바르딜리스 1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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엥켈레아이 - 타울란티 왕국 5대 군주
Βάρδυλις | 바르딜리스 1세

파일:바르딜리스 1세.jpg[1]

제호
한국어
바르딜리스 1세
그리스어
Βάρδυλις
라틴어
Bardylis I
존호

생몰 년도
기원전 448년경 ~ 기원전 358년
재위 기간
기원전 4세기 초 ~ 기원전 358년

1. 개요
2. 생애



1. 개요[편집]


엥켈레아이 - 타울란티 왕국 5대 군주. 남부 일리리아 부족들을 포섭하고 에페이로스 왕국마케도니아 왕국에 막대한 피해를 야기하는 등 강대한 위세를 떨쳤으나 마케도니아 왕국의 필리포스 2세에게 패망했다.

2. 생애[편집]


리흐니도스 호수(오흐리드) 인근에 거주하는 일리리아인들 사이에서 출생했다. '바르딜리스(Bardylis)'라는 이름은 알바니아어 형용사 bardhë(흰색)과 관련있는 것으로 추정되며, 인도유럽어 조사 *bʰór(h₁)ǵos < *bʰreh₁ǵ-(반짝이다, 빛나다)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인다. 고대 기록에 따르면, 그가 기원전 358년 에비론 계곡 전투에서 전사했을 때 90세였다고 한다. 이에 따른다면, 그는 기원전 448년경에 출생했을 것이다.

원래 직업은 광부였지만, 일이 잘 풀리지 않아 가난에 찌들자 광업을 그만두고 산적 무리에 들어갔다. 그는 곧 두목이 되었고, 부하들에게 전리품을 아낌없이 나누어줘서 신망을 얻었다. 그의 명성이 점차 커지자 지지자들이 각지에서 몰려들기 시작했고, 나중에는 강대한 세력을 구축하여 기존의 통치자들을 밀어내고 왕으로 군림하기에 이르렀다. 그가 언제 통치자가 되었는지는 기록이 미비해 알 수 없으나, 기원전 4세기 초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는 다르다니아 족의 주요 도시인 다메스티온과 은광을 장악하고 그곳에서 나오는 수익을 토대로 강대한 군사력을 육성했으며, 은화를 독자적으로 주조했다. 기원전 365년경에는 현재 코소보에 있는 광산 도시인 다파리아에서 디마스티온에서 발행한 주화와 동일한 표준과 유형인 동전을 주조했다. 일부 역사학자들은 그가 다메스티온을 통제한 것을 근거로 그를 다르다니아의 왕으로 간주했다. 하지만 그는 다르다니아 뿐만 아니라 타울란티, 엥켈레아이, 다사레테 등 다른 일리리아 부족들도 거느렸기 때문에 적절한 표현이 아니다. 일각에서는 그가 세운 왕국을 "바르딜리스 왕국"이라고 별도로 칭하기도 한다.

역사가 파쟈코우크시는 그의 왕국이 북서쪽의 리존스 만(코토르)에서 남쪽의 빌리오네스까지 뻗었으며, 동쪽에서는 리크라도스 호수를 따라 프레스파 호수에 이르는 일대를 장악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최근에 리존(몬테네그로의 리산)에 2개의 일리리아 왕궁이 발견되면서, 그의 왕국과는 별개의 또다른 국가가 존재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현재 학계는 파쟈코우크시의 주장은 사실과 거리가 멀다고 간주한다. 다만 그의 국가가 남부 일리리아에서 가장 강대했던 것만은 분명하다. 서쪽의 그리스 식민도시 디라키움과 아폴로니아가 바르딜리스의 직접적인 지배에 놓였는지는 분명하지 않으나, 적어도 특별한 마찰이 벌어지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의 통치 기간 동안 일리리아인들이 두 도시를 공격했다는 기록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 리크니도스 호수의 동쪽에 자리잡은 린케스티다 왕국을 얻기를 희망했다. 이 지역은 오래 전부터 일리리아와 마케도니아인간의 분쟁 지역이었다. 당시 마케도니아는 기원전 399년 아르켈라오스 1세가 암살된 이래 정국 혼란에 휩싸여 있었다. 그는 이 기회에 마케도니아를 완전히 제압하기로 하고, 기원전 393년 대군을 동원하여 마케도니아로 쳐들어갔다. 디오도로스 시켈로스에 따르면, 그가 이끄는 일리리아군은 마케도니아를 점령하고 아민타스 3세를 축출한 뒤 꼭두각시로 삼고자 아르가이오스 2세를 왕위에 앉혔다고 한다. 아민타스 3세는 올린토스로 피신한 뒤 그들에게 마케도니아 동부의 영토인 미그도니아 또는 안트만트를 50년간 양도하고 중요한 무역 특권을 줄 테니 자신을 도와달라고 청해 동의를 얻어냈다.

기원전 392년, 아민타스 3세는 테살리아와 스파르타의 도움으로 마케도니아를 탈환하고 아르가이오스 2세를 축출했다. 그러나 강대한 일리리아에 대적할 여력이 없었던 아민타스 3세는 일리리아인들에게 매년 조공을 바치기로 하고, 막내 아들 필리포스를 인질로 넘겨줬다. 필리포스 왕자는 나중에 테베로 보내져서 수년 간 그곳에서 체류해야 했다. 기원전 370년, 바르딜리스는 마케도니아를 또다시 침공했다. 일리리아군은 상부 마케도니아를 장악했고, 마케도니아 왕 알렉산드로스 2세는 왕위를 지키기 위해 일리리아인들에게 막대한 공물을 바쳐야 했다.

기원전 367년, 마케도니아 왕 알렉산드로스 2세가 어머니 에우리디케와 간통하고 있었던 프톨레마이오스의 선동으로 축제 도중 암살당하고 동생 페르디카스 3세가 프톨레마이오스를 처단한 뒤 왕위에 올랐다. 페르디카스 2세는 일리리아에게 빼앗긴 상부 마케도니아를 탈환하려 했다. 그러나 기원전 360년, 원정을 떠난 페르디카스 3세는 일리리아군의 매복 공격을 받고 전사했다.

이렇듯 마케도니아를 상대로 승승장구하는 동안, 그는 에페이로스 왕국에도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기원전 385년, 그는 시라쿠사참주 대 디오니시오스와 동맹을 맺고 알케타스 1세를 왕위에 복위시키기 위해 몰로시아로 쳐들어갔다. 몰로시아 전체가 약탈당했고, 15,000명이 목숨을 잃었다. 이에 스파르타아게실라오스 2세가 개입하여 테살리아, 마케도니아, 몰로시아와 연합해 일리리아군을 격파했다. 다만 알케타스 1세는 복위할 수 있었다.

기원전 360년, 그는 에페이로스 왕국을 재차 침공했다. 당시 에페이로스의 군주 아리바스는 정면 대결로는 도저히 승산이 없다고 판단하고, 왕국을 아이톨리아 동맹에 양도할 거라는 소문을 퍼뜨린 뒤 매복했다. 일리리아인들은 아이톨리아 동맹의 개입을 두려워해 약탈물을 챙기고 돌아가다가 매복한 적에게 급습되어 막심한 피해를 입고 패주했다. 다만 에페이로스 북부 일대에 대한 영향력은 여전히 행사할 수 있었다.

이렇듯 바르딜리스가 위세를 떨치고 있던 기원전 359년, 지난날 일리리아에 인질로 갔고 뒤이어 테베에 인질로 보내졌던 필리포스 왕자가 필리포스 2세로서 마케도니아 왕위에 올랐다. 그는 일리리아인들이 왕국에 더 이상 깊숙이 쳐들어오는 걸 막기 위해 매년 막대한 공물을 바치고 린케스티다 왕국에 대한 일리리아인들의 영향력을 인정했다. 바르딜리스는 흔쾌히 받아들였지만, 필리포스가 이렇게 시간을 번 뒤 내정 및 군사 개혁을 대대적으로 단행하여 힘을 비축한 뒤 마케도니아 왕위를 주장하는 아르가오스를 물리치고 파에오니아인들을 섬멸하는 등 나라를 훌륭하게 이끌자, 자신이 큰 실수를 저질렀다는 걸 깨달았다. 그는 필리포스 2세가 더 크기 전에 짓밟아버리기로 마음먹고, 군대를 끌어모아서 마케도니아 침공을 준비했다.

필리포스 2세는 바르딜리스의 행보를 첩보를 통해 알아채자 선제 공격하기로 했다. 기원전 358년, 필리포스 2세는 수도 펠라에서 출격하여 할리아몬(크르나) 강 기슭의 엘리미오티스로 진군했다. 필리포스 2세는 이곳에서 현지 기병대를 추가로 징집한 뒤, 키릴리 디르벤 고개를 지나 그의 영역으로 진격했다. 그는 이에 맞서 출진했고, 양군은 일리아 남동부 비톨라 인근의 에리곤 계곡에서 마주쳤다. 당대 기록에 따르면, 필리포스 2세는 1만 보병과 600명의 기병을 갖췄으며 바르딜리스는 1만 보병과 500 기병을 구성했다고 한다.

필리포스 2세는 마케도니아 팔랑크스 부대를 좌익과 중앙에 배치하고 우익에는 히파스피스타이(Hypaspistai: 방패를 든 자)를 배치했으며, 기병대를 양 측면에 배치했다. 바르딜리스는 이에 대응해 가장 뛰어난 일리리아 전사들을 중앙에 배치하고, 상대적으로 전투력이 떨어지는 척후병들을 측면에 배치했으며, 기병대로 측면을 보호했다. 이윽고 전투가 개시되자, 마케도니아 기병대가 상대 기병대를 향해 맹렬히 돌격하여 일찌감치 격파했다. 이에 바르딜리스는 직사각형 형태의 방진을 결성하여 적 기병대의 돌격을 사방에서 막아내게 했고, 600명밖에 안 됐던 마케도니아 기병대는 적의 방진을 뚫지 못했다.

그 후 양군 보병대가 정면 대결을 벌였으나 한동안 교착 상태에 빠졌다. 그러던 중 히파스피스타이 부대가 일리리아군 오른쪽 측면을 돌파하는 데 성공하면서, 일리리아군의 전열이 흐트러졌다. 이에 팔랑크스 부대가 사리사를 앞세워 밀어붙였고, 결국 일리리아군은 패주했다. 마케도니아 기병대는 패주하는 적을 맹렬히 추격해 막대한 타격을 입혔다. 디오도로스 시켈로스에 따르면, 이 전투에서 7천 명 이상의 일리리아인들이 전사했다고 한다. 유스티누스에 따르면, 마케도니아군의 사상자는 수천 명에 달했다고 한다.

바르딜리스는 에비론 계곡 전투에서 전사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 후 일리리아인들은 상부 마케도니아 일대를 마케도니아 왕국에 반환하고 오흐리드 호수로 국경을 옮겼다. 또한 바르딜리스의 딸 또는 손녀 아우다타가 이 시기에 필리포스 2세와 결혼했다. 그에게는 클레이토스라는 아들이 있었는데, 훗날 알렉산드로스 3세와 맞붙었다가 참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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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990년 알바니아에서 발행된 우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