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로스의 데메트리오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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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디아이 - 라베타이 왕국 5대 군주
Δημήτριος | 데메트리오스
제호
한국어
데메트리오스
그리스어
Δημήτριος
라틴어
Demetrius
존호

생몰 년도
미상 ~ 기원전 214년
재위 기간
기원전 222년 ~ 기원전 219년

1. 개요
2. 행적



1. 개요[편집]


아르디아이 - 라베타이 왕국 5대 군주.

2. 행적[편집]


그의 출신에 대해 그리스인이라는 설, 일리리아인이라는 설, 그리스와 일리리아 혼혈이라는 설이 제기되고 있지만, 기록이 부족해서 어느 쪽이 사실인지 분명하지 않다. 그는 당시 그리스의 식민지였던 파로스 섬에서 태어났거나 그곳으로 이주해 성장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일찍이 아르디아이 왕국의 2대 군주 아그론으로부터 파로스 총독으로 선임되었다. 기원전 229년 일리리아 해군이 코르기라 섬을 정복한 뒤 자국으로 귀환할 때, 그는 코르리가에 주둔한 일리리아 수비대의 지휘를 맡았다.

코르기라 섬은 히드룬툼 해협(오늘날 오트란토 해협)을 통해 이탈리아 반도와 발칸 반도를 연결하는 항로와 아드리아 해 연안, 이오니아 해 연안을 연결하는 상업 항로를 통제했기 때문에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했다. 그는 이 섬의 지휘관으로서 주변 유지들과 교류하면서 자체적으로 통치했다. 그러던 중 로마 공화국이 지속적인 해적 행위를 일삼는 아르디아이 왕국을 응징하기 위해 원정군을 코르기라 섬으로 파견했을 때, 그는 여성 섭정 테우타를 저버리고 로마군에 저항 없이 섬을 넘겨줬다. 그 대가로, 일리리아인에 대한 작전이 성공적으로 마무리 될 때 일리리아 해안에 대한 지배권을 약속받았다.

그렇게 섬을 로마군에게 넘겨준 뒤, 그는 로마군을 따라 아폴로니아로 진군했다. 아폴로니아 역시 별다른 저항 없이 항복했고, 다른 지역도 로마군에 곧 공략되었다. 결국 더 이상의 저항은 무의미하다고 판단한 테우타는 기원전 227년 로마에 막대한 공물을 바치고 해적 행위를 중단하며 해안 지대를 로마에 넘기는 평화 협약을 맺었다. 그 후 그는 코르기라와 아폴로니아를 제외한 일리리아 해안지대 전역의 지배자가 되었다. 테우타는 패전의 책임을 지고 퇴위했다. 일부 학자들은 그가 기원전 228년에서 226년 사이에 아르디아이의 내륙 영토까지 장악했을 것으로 추정한다. 그가 지배한 영역은 스코드라와 리소스 사이의 일대였을 것으로 보인다. 기원전 222년경, 그는 아그론 왕의 전처이자 피네스의 어머니 트리테우타와 결혼하고 피네스를 밀어내고 아르디아이 왕국의 왕이 되었다. 다만 테우타를 따르던 일리리아 지휘관 스케르딜라이다스와 권력 일부를 공유해야 했다.

그는 처음에는 로마나 다른 그리스 국가들을 자극하지 않으려 노력했다. 그러다가 로마가 기원전 225년 켈트족의 침공에 맞서 싸우느라 일리리아 지역에 대한 관심이 거의 없다는 걸 눈치챘고, 이를 틈타 세력 확장을 꾀했다. 그는 아폴로니아 동쪽에 있던 것으로 추정되는 아틴타니아와 더 남동쪽에 있던 다사레티스를 노렸다. 아틴타니 족에게 로마와 거리를 두고 자신에게 귀순할 것을 권유했으며, 일리리아-마케도니아 국경지대의 전력적 요충지인 다사레티스도 점차 그의 지배하에 들어갔다. 아피아노스에 따르면, 그는 이스트리아 원주민들과 협력하여 아드리아 해 연안에서 해적 행위를 일삼았다고 한다. 이는 갈리아 키살피나에서 켈트족과 교전하고 있던 로마군에 보급하기 위해 북쪽으로 항해하는 로마의 곡물선들을 노린 것으로 추정된다.

기원전 225~223년 중에, 마케도니아의 섭정 통치자 안티고노스 3세와 동맹을 맺었다. 이는 다사레티스 지배에 대해 마케도니아의 간섭을 배제하고 그리스로 진출하기 위해 맺었던 것으로 보인다. 기원전 223년, 그가 이끄는 1,600명의 일리리아 병사들을 이끌고 펠로폰네소스에서 스파르타 왕 클레오메네스 3세를 상대로 전쟁을 벌이고 있는 안티고노스 3세와 합류했다. 1년 후, 그의 군대는 라코니아에서 벌어진 셀라시아 전투에서 마케도니아군이 스파르타 왕을 물리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마케도니아는 이 승리로 스파르타를 공략했고, 그는 다사레티스와 일리리아 남부, 파에오니아 근처의 여려 영역을 장악했다.

기원전 221년, 로마 공화국은 데메트리오스의 지원을 받아 로마의 곡물선들을 습격하는 이스트리아인들을 격파했다. 한편, 안티고노스 3세는 스케르딜라이다스가 이끄는 일리라이인들과 싸워서 승리했지만 갑작스럽게 사망했다. 이 일은 마케도니아 왕국과의 관계를 놓고 그와 스케르딜라이다스 사이에 분열이 일어났다는 것을 암시한다. 그는 안티고노스 3세의 뒤를 이어 마케도니아 왕이 된 필리포스 5세와 우호 관계를 맺으려 노력했다. 기원전 220년 초, 그와 스케르딜라이다스가 이끄는 90척의 일리리아 함대는 리소스 남쪽으로 항해했다. 그들은 펠로폰네소스 반도 남서쪽 마을인 필로스에 상륙하여 포위 공격했지만 공략에 실패했다. 이후 그들은 둘로 나뉘었다. 스케르딜라이다스는 북쪽으로 돌아갔고, 그는 50척의 남은 배와 함께 펠로폰네소스 주변을 계속 항해하여 키클라데스에 도착한 뒤 여러 곳을 습격했다. 이후 키클라데스 산맥을 가로질러 여러 곳을 약탈한 뒤 사로니코스 만의 첸크레아로 이동했다. 이때 아카이아 동맹 사령관 타우리온이 그에게 접근했다. 폴리비오스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타우리온은 그에게 아카이아인들을 도와달라고 간청하며, 아이톨리아인들이 지협을 건널 때 그들을 덮쳐달라고 청했다. 당시 데메트리오스는 여러 섬을 공략하여 많은 수익을 거뒀지만, 로도스인들이 그를 공격하기 위해 출격한 것에 위협을 느끼고 있었다. 이런 때에 배를 운반하는 비용을 충당해주겠다는 타우리온의 제안에 기꺼이 귀를 기울였다. 그러나 아이톨리아인들이 이틀 먼저 지협을 통과해버려서 뜻을 이루지 못했고, 그 대신 아이톨리아 해안의 일부 지역을 습격한 뒤 코린트로 귀환했다.


데메트리오스가 이끄는 일리리아 함대는 팰레폰네소스 반도를 다시 돌아갈 필요 없이 지협을 통과해 디올코스를 거쳐 이오니아 해역으로 이동했다. 그럼으로서 지중해에서 가장 강력한 해군이라는 평판을 얻던 로도스 함대를 회피할 수 있었다. 그렇게 본국으로 귀환한 뒤, 그는 육군은 이끌고 아티타니아를 거쳐 다사레티스로 이동한 후, 로마의 보호를 받고 있떤 일리리아 부족인 파르티니와 아폴로니아를 공격했다. 원로원은 그의 이같은 행위에 분개하여 당장 로마로 출두하라고 요구했다. 데메트리오스가 거절하자, 원로원은 219년 일리리아인들과 전쟁을 또다시 벌이기로 했다. 그해 집정관인 루키우스 아이밀리우스 파울루스마르쿠스 리비우스 살리나토르가 로마군을 이끌고 일리리아로 진격했다.

그는 로마의 예상되는 침공에 맞서 남쪽의 요충지인 디말레와 북쪽의 요충지인 파로스에 상당한 수비대를 배치했다. 또한 자신의 정책에 반대하는 자들을 축출하고 추종자들에게 정부를 맡겼으며, 정예병 6천 명을 친히 이끌고 파로스에 주둔했다. 그러나 로마군의 전투력은 그의 예상을 뛰어넘었다. 일리리아에 도착한 로마군은 디말레를 집중 공격해 일주일만에 함락시켰고, 지역 부족 지도자들은 로마인들에게 인질을 바치며 귀순했다. 그 후 로마군은 그가 주둔한 파로스 섬으로 항해했다. 파로스 섬 역시 공략당했고, 그는 급히 탈출하여 마케도니아 왕국의 필리포스 5세에게 망명했다. 그 후 로마군은 파로스의 도시 전체를 파괴하고 일리리아 해안의 나머지 영역을 공략했으며, 주요 부족 및 도시와 적절한 협약을 맺었다.

기원전 217년, 로마군은 대표단을 마케도니아로 보내 그를 자신들에게 넘기라고 요구했다. 필리포스 5세는 이를 거부하고, 데메트리오스를 자신의 고문으로 삼았다. 그는 로마군에 대한 정보를 필리포스 5세에게 기꺼이 제공했다. 기원전 217년 6월, 필리포스 5세와 그가 아르고스에서 열린 네메아 축제에 참석했을 때, 트라시메누스 호수의 전투에서 로마군이 한니발 바르카의 카르타고군에게 완패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데메트리오스는 필리포스 5세에게 서둘러 아이톨리아인들과 화해하고 모든 군대를 일리리아로 진격하라고 조언했다.

"그리스는 이미 당신에게 전적으로 복종했고 앞으로도 그럴 것입니다. 아카이아인들은 당신에게 애정을 보내고 있고, 아이톨리아인들은 전쟁의 재난을 목도하고 공포에 사로잡혔으니까요. 왕께서 이탈리아로 건너가는 것은 대제국을 건설하는 첫번째 단계입니다. 지금 로마인들이 패전을 겪었으니 속히 행동해야 합니다."


필리포스 5세는 그의 조언을 따르기로 마음먹고, 기원전 216년 일리리아 해안 지대를 공략하려 했다. 또한 기원전 215년 카르타고와 동맹을 맺었는데, 동맹 협약에는 "로마의 지배에 있는 모든 일리리아인들을 파로스의 데메트리오스에게 돌려보낸다"라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그러나 로마의 적절한 반격으로 인해 계획은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 기원전 215년, 마케도니아군이 메세네 지도자들을 학살한 사건이 벌어졌다. 학살 다음날 현장에 도착하여 성채를 점령하기를 원했던 필리포스 5세는 고문들에게 성채 공략을 그만둘 지 아니면 성채를 공략할지를 물었다. 그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조언했다.

"왕께서 마음에 꺼림칙한 게 있다면 가능한 한 빨리 그만두십시오. 그러나 용감하고 현명한 왕으로서, 성채를 가지십시오. 만약 왕께서 지금 그것을 그만둔다면, 왕께서는 다시는 좋은 기회를 얻지 못할 것입니다. 두 개의 뿔을 잡고 있다면 혼자서 소를 통제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필리포스 5세는 시키온의 아라토스의 "이 이상 잔혹하게 군다면 마케도니아에 대한 적대감이 심해질 테니 이쯤에서 그만두고 떠나야 한다"라는 조언을 받아들이고 마케도니아로 돌아갔다. 기원전 214년, 메세네가 재차 반기를 들었다. 이에 필리포스 5세는 성채를 진작에 공략하지 않았던 걸 후회하고 그에게 메세네를 공략하게 했다. 그는 즉시 출전했지만, 메세네 공방전 도중 전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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