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노 노리요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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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前 한신 타이거스 소속 프로 야구선수로, 프로 데뷔 이래 한신 타이거스에서만 재적한 원클럽맨이자 1985년 일본시리즈 우승을 이끈 주축 멤버이기도 했다.
2. 프로 입단 전[편집]
마에바시 공고 2학년 시절이던 1968년 일본 고교야구 전국대회에 진출하여 코시엔을 밟았지만 첫 경기에서 나라현 대표인 치벤가쿠엔 고교에게 영봉패를 당하며 한 경기만에 짐을 쌌고 2학년 여름 외엔 번번히 예선에서 탈락하며 고등학교 시절을 코시엔 1회 진출로 끝마쳤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주오대학으로 진학하여 토토 대학야구 리그에서 1학년부터 1번 타자를 치는 등 압도적인 존재감으로 전 경기 출전을 완수, 리그 통산 99경기 출전, 350타수 99안타, 타율 .283 7홈런 39타점 및 베스트나인 2회 수상의 출중한 성적을 남기고 1973년 드래프트 1위로 한신 타이거스에 입단했다.
3. 한신 시절[편집]
그런데 하필 같은 해 드래프트 6위로 입단했던 카케후 마사유키가 그대로 3루수로 정착하면서 사노는 좌익수로 옮기게 되었고, 이후 기록상으론 카케후가 사노를 압도하게 되었으나 그의 프로 생활 전반에 걸쳐 라이벌 관계가 되었다. 1977년에는 후술할 외야 펜스 충돌 사고를 겪기도 했으나 부상을 털어내고 복귀한 뒤로는 준수한 타격을 보여주며 규정타석에 미달했지만 타율 .305란 준수한 성적을 기록했다.
1979년엔 후지타 타이라의 부상 이탈로 1루수를 보기도 했으며, 이 해 커리어 최초로 규정타석에 도달하여 타율도 정확히 3할을 찍었다. 다만 이 시즌엔 히로시마 도요 카프의 센트럴리그 우승을 결정짓는 마지막 타자가 되는 불운도 겪었다.[2] 1981년엔 당해 제정된 최다승리타점 타이틀의 첫 수상자가 되었으며,[3] 1984년엔 커리어 2번째로 3할 타율을 달성했다.
1985년에는 주로 6번-좌익수로 출장하며 타율 .288/OPS .775 13홈런 60타점을 기록, 당시 슬러거들이 즐비하던 한신의 일명 뉴 다이너마이트 타선[4] 에서 유격수 히라타 카츠오, 포수 키도 카츠히코와 같이 하위타선에서 무시 못할 공격력을 뽐내며 상대 투수들에게 큰 부담을 안겨줬으며, 21년 만의 센트럴리그 우승이 결정되었던 10월 15일 야쿠르트 스왈로즈와의 메이지진구 야구장 원정 경기에선 우승을 결정짓는 동점 희생플라이[5] 를 쏘아올렸다. 다만 그 해 일본시리즈에서는 3차전까지 선발 좌익수로 출전했으나 11타수 무안타에 그치며 아무런 활약도 보여주지 못했고, 결국 4차전 이후론 나가사키 케이지, 요시타케 하루키에게 좌익수 자리를 내준 채 남은 시리즈 경기엔 출장하지 못했지만 그래도 한신이 우승하면서 구단 사상 첫 일본시리즈 우승 멤버라는 영예를 얻게 되었다.
이후 1987년까지 10+홈런을 치며 꾸준히 주전으로 뛰었으나 1988년부터 신인들의 대두로 출장기회가 급감했고, 결국 1989년을 끝으로 1549시합 출장, 타율 .273/OPS .726, 1316안타 144홈런 564타점의 기록을 남긴 채 현역에서 은퇴했다. 은퇴 후엔 코치 및 스카우터로 전직하여 활동을 이어가다 2020년을 끝으로 한신에서 퇴단했고, 이후엔 스카이 A 등에서 야구 해설가를 역임하기도 했다. 2023년 한신의 우승 후 나온 기사에서는 모교 마에바시 공고에서 코치로 재직 중이라고 한다.
3.1. 카와사키 구장 울타리 충돌 사고[편집]
1977년 4월 29일, 타이요 훼일즈와의 카와사키 구장 원정경기에서 선수 생활은 물론 본인의 생명까지 위험했던 아찔한 사고를 겪은 바 있다.
9회 말 타이요의 공격 때 1사 1루에서 타자 시미즈 토오루가 친 타구를 사노가 잡았으나, 이 과정에서 당시 콘크리트가 그대로 노출되어 있던 카와사키 구장 외야의 좌측 펜스에 세게 부딪히면서 두개골이 골절되는 심각한 부상을 입고 말았다. 사노는 충돌의 여파로 정신을 잃은 와중에도 공을 끝까지 잡고 있었으나, 끝내 일어나지 못한 채 구급차로 병원에 실려갔다. 그런데 사노의 상태를 살피려고 심판원, 선수단이 모여든 상황에서 타이요 측의 1루 주자 노구치 요시오[6] 가 혼자 1루에서 홈까지 달려서 7-7 동점을 만들었고, 이 사건은 현재까지 희생 플라이로 1루 주자가 득점을 기록한 유일한 사례로 기록되어 있다.
당연히 요시다 요시오 감독은 볼데드 상황이라며 득점 인정이 안 되는 게 아니냐고 항의했으나, 심판진은 규정상 수비측 선수의 부상으로 타임을 선언하는 건 불가능하다며 이 항의를 받아들이지 않았고, 결국 제소시합[7] 으로 한다는 조건 하에 경기가 재개되었으나 시간 제한[8] 때문에 무승부가 된 채 그대로 9회에 경기가 끝나며 한신은 이길 수 있었던 경기를 무승부로 날리고 말았다. 이후 한신의 제소로 5월 12일에 해당 시합에 대한 참고위원회가 열렸으나, 상술한 대로 규정에 어긋나지 않는다는 이유로 이 제소는 각하되었다.
한편 이 사고를 계기로 센트럴, 퍼시픽 양 리그는 전 구단에 외야 펜스에 고무를 두를 것을 지시했고, 이를 통해 일본 내 각 야구장들의 외야 펜스가 고무를 두른 펜스로 바뀌는 등 선수들의 편의와 안전을 고려한 시설 개선이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또한 같은 해 8월 1일에 프로, 아마추어를 총괄하는 일본야구 규칙위원회가 개최되어 사노의 사례처럼 선수의 생명에 영향을 줄 수 있는 부상이 발생했을 경우, 심판원이 타임을 선언할 수 있도록 하는 조항이 추가되었다.
여담으로 KBO 리그에서도 강동우가 비슷한 사고를 데뷔 1년차부터 겪었다.
4. 기타[편집]
카케후 마사유키와는 프로 생활 내내 라이벌이었다. 그래도 둘 다 3루와 좌익에서 공생하면서 나름 족적을 남겼다.
1985년 5월 20일 코라쿠엔 구장에서의 전통의 일전에선 7회 대타로 나와서 마키하라 히로미 상대로 만루홈런을 친 적이 있었다. 이 만루포를 계기로 0-5로 지던 시합을 한신이 열심히 따라가 7-5로 역전승을 했다.
현역 시절엔 등번호 9를 달았으며, 맷 머튼을 거쳐 현재 해당 번호는 타카야마 슌이 달았다. 그러나 타카야마는 2016년 1년 신인왕 획득으로 반짝했을 뿐, 그 뒤로 주전에서 밀리더니 결국 2023년을 끝으로 타카야마는 전력외 통고와 함께 한신을 떠나게 되어 이 번호는 빈 번호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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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981~1988년까지 양대리그에서 승리타점(결승 타점)이 가장 많은 선수에게 주던 타이틀로, 1989년부터 양대리그 모두 타이틀을 폐지, 센트럴리그에서만 특별상 형식으로 시상하다가 2000년을 끝으로 완전히 폐지되었다. 사노 본인이 초대 수상자였으며 이후 하라 다쓰노리, 랜디 바스 등이 이 타이틀을 정식으로 수상한 적이 있었다. 2000년 완전히 폐지 때 최후의 수상자는 에토 아키라였다.[2] 에나츠 유타카를 상대로 2루 직선타를 쳤으나 2루 주자가 귀루하지 못하면서 병살타가 되었고, 그대로 히로시마의 승리로 경기가 종료되면서 히로시마의 리그 우승이 결정되었다.[3] 15승리타점으로 초대 수상자가 되었다. 타이틀 자체는 1988년까지 양대리그에서, 이후로는 센트럴 리그만 특별상 형식으로 2000년까지 수상자를 선정했다.[4] 당시 한신 라인업은 1번에 34홈런 타자 마유미 아키노부가 들어왔고, 백스크린 3연발로 유명했던 클린업 트리오는 랜디 바스 - 카케후 마사유키 - 오카다 아키노부로 구성되었다.[5] 이날 경기 전까지 한신은 매직넘버를 불과 1만 남겨놓은 상황이었는데, 이 경기를 무승부로 마치며 매직넘버를 완전히 소진시키는 데 성공했다.[6] 은퇴 후 타이요의 후신인 요코하마 베이스타즈 구단 이사를 역임하며 프런트로써 90년대 후반 팀의 최전성기 구축에 큰 공헌을 했다.[7] 심판의 판정이 규정에 위반될 수 있는 경우 소속 리그에 해당 판정에 대한 심의를 요청하는 시합. 2021년을 끝으로 폐지되었다.[8] 당시 규정상 일본프로야구는 양대리그를 통틀어 경기 시간이 3시간을 넘겼을 경우, 3시간을 넘긴 시점에서의 이닝까지 진행하도록 되어 있었다. 다만 9회가 되기 이전 3시간을 넘겼을 경우엔 그대로 9회까지 진행하도록 규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