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의 봄(영화)/탐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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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상세
2.1. 군사 관련
2.2. 실제와 허구


1. 개요[편집]


영화 〈서울의 봄〉의 탐구적 내용을 서술한 문서.


2. 상세[편집]


드라마 제5공화국 이후 18년 만이자 영화로는 최초로 12.12 군사반란이 극화 되는 것으로, 당시의 현실을 얼마나 구현했는지, 또한 역사적 사실을 어떻게 담아낼지가 주 관심사다. 제5공화국 방영 이후 12.12 쿠데타의 두 주역인 전두환노태우는 이미 세상을 떴지만[1], 여전히 장세동이나 허화평, 정호용, 박희도신군부 시절의 인사들 일부가 아직 살아 있기도 하고, 더불어서 이들을 지지하는 세력도 아직도 남아 있어 역사적, 정치적 이슈와 맞물리지 않을 수 없는 상황.[2] 전두환을 미화하든 비판적으로 그리든 어느 진영에서고 비난은 날아올 수밖에 없는 형국이다. 게다가 제5공화국처럼 제작진이 비판하는 입장에서 제작해도 주연 배우의 연기만으로 이를 미화하는 것으로 비춰질 수 있다는 잠재 요소도 있다.[3] 때문에 커뮤니티 사이트에선 농반진반으로 황정민 팬들은 자기 배우가 연기를 잘 해도 멋있다고 칭찬할 수 없는 영화란 말도 나온다. 특히 상황 종료 후 혼자 화장실에서 미친듯이 웃는 장면은 소름끼칠 정도.

아무래도 대한민국 현대사에 있어 가장 민감한 소재 중 하나고 또 이미 대법원에서 명백한 군사 반란으로 유죄 판결로 결론이 난 사건이니만큼 제작진은 전두광을 중심으로 하여 스토리를 진행하면서도 보안사령관 전두광을 명확한 악으로, 그와 대립하는 이태신 수경사령관을 선으로 표현하기 위해 연출적인 면에서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예를 들어 마지막 장면에서 보안사에 연행된 이태신이 벽을 보며 좌절하는 장면과 마찬가지로 화장실에서 벽을 보며 박장대소하는 전두광을 교차하며 보여주고, 보안사에서 고문받으며 조사를 받는 이태신과 하나회 축하연에서 경박하게 춤추고 노래하는 하나회 인사들을 명확히 교차시켜 이 사건의 성공이 결코 긍정적으로 평가될 수 없음을 나타내려 하였다. 또한 하술하겠지만, 의도적으로 두 캐릭터의 선악을 명확히 드러내기 위해 반란군측과 진압군측 인사들의 언행 등에 각색이 가해졌다.

비슷한 시기의 역사를 다룬 남산의 부장들이나 헌트와 마찬가지로 실존인물의 이름을 그대로 쓰지 않고 비슷한 가명을 쓰는 쪽을 택했다.[4] 아무래도 똑같이 독재정권 시기를 다뤘다가 개봉 이후에 명예훼손 등의 시비로 상영금지 가처분 신청 등 여러모로 시달린 그때 그 사람들의 전례가 있다 보니 본작을 포함해 2020년대 기준 많은 현대사 관련 작품들은 고의적으로 약간의 각색을 통해 실제 역사와 다소 떨어뜨려놓는 식으로 논란을 피하는 편이다. 예외가 있다면 실화 드라마를 표방했던 제5공화국이 있는데, 이 쪽은 아예 5공 측 인사인 장세동허화평에게 감수를 받았다. 물론 각색이 있었던들 '전두광'[5]누군지는 어차피 안 봐도 비디오니, 인물의 생전 외모 특징인 대머리를 살리기 위하여 배역을 맡은 황정민도 대머리 특수분장을 하고 등장했다.[6][7] 덕분에 실존인물이 좀 더 얼굴에 살이 붙어 있는 것 빼고는 싱크로율이 엄청나다는 평을 받는다. 이에 따라 황정민의 출연작들 중에서 흔치 않은 대머리 상태의 모습을 볼 수 있는 작품이 됐다. 그와 대립하는 이태신의 모델인 장태완 사령관 또한 생전에는 머리가 상당히 벗겨져 있었는데, 전두광과는 달리 이마를 벗기지 않고 담당 배우인 정우성의 머리에 흰머리를 조금 추가하는 정도로 각색했다.[8] 사실 장태완 소장은 12.12 반란 당시엔 정수리 뒤쪽으로는 머리가 꽤 남아 있는 편이었다. 1931년생으로 40대 후반이었기 때문.

  • 실제 역사와 각색을 적절히 조합해 탄생시킨 개성있는 주역 캐릭터들에 대해 호평이 많다. 물론 영화 자체가 실화를 기반으로 하긴 했어도 기본적으로 픽션을 추구하는 영화이기에 실존 인물과 크게 거리가 있는 인물도 있어 불호를 표하는 관객들도 있긴 하다. 다만 동시기를 다룬 제5공화국이나 남산의 부장들에서도 재현율이 저조하다는 비판을 하는 이들에게 배우들의 훌륭한 연기력과 독창성으로 만회했던 바가 있었고, 본작 또한 실제 인물들과 차이가 있는 캐릭터들도 작품성을 통해 관객들을 납득시켰다. 주요 인물인 정상호노태건은 싱크로율이 상당한 편. 염동헌이 연기한 유학성은 아예 빼다 박은 수준이다.[9] 반면 황정민이 분한 '전두광'은 기존 미디어와 역사에서 알려진 무겁고 중후한 모습보다는 야망에 가득찬 활화산 같은 모습을 중점으로 야비한 기질과 인간적인 면모를 한데 섞어 고유의 입체적인 캐릭터로 재탄생시켰다. 정우성이 맡은 이태신 또한 실존 인물의 거침 없고 정열적인 모습이 아니라 고독하고 홀로 역경과 맞서 싸우는 초인으로서의 모습이 부각되어 재현율을 중요시 여기는 관객에겐 지적을 받았고, 이러한 성향의 관객들은 풍채가 좋은 최규하에 비해 정동환은 마른 체형이라 배역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지적했다.[10]

  • 직접 커튼을 친다거나 전등을 끄는 액션들을 통해 작중 인물이 능동적으로 조명을 조절하여 제작자의 의도를 드러내는 연출을 적극 활용하였다.

  • 한미연합사로 도망쳤던 오국상 국방장관이 B-2벙커로 올 때 미군이 동승한 포드 승용차를 타고 오는데 실제로 미군측에서 상황이 어떻게 될지 모르니 미군쪽 인원이 탄 차량을 탈 것을 권유해 실제로 노재현이 이를 타고 이동했다. 이 포드는 이후 오 장관이 육본 지휘부가 B-2를 떠나려 할 때 '타고 온 포드 어딨냐'고 다시 잠시 언급된다.

  • 이태신이 출동 직전 아내와 통화하는데, 아내는 현재 서울 상황을 전혀 모르고 남편이 오늘은 집에 오는지 묻는다. 실제로 12.12 당시 대부분 서울시민들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도 몰랐고, 아침이 되어서야 상황을 파악할 수 있었다. 지금과 달리 정보통신수단이 발달하지 못했던 시대라 그 난리가 일어났음에도 상황 파악이 쉽사리 되지 않았던 것.[11]

  • 영화에 등장하는 차량 번호판들 중 0419가 있으며, 전두환이 탑승한 것으로 보이는 차량의 번호판은 1123이다.[12] #

  • 이태신이 행주대교 앞에서 2공수를 회군시키는 장면은 천안문 6.4 항쟁 당시 탱크맨과 비슷한 구도를 띄고 있다.

  • 12.12를 다룬 드라마 제4공화국제5공화국과 마찬가지로 배역들의 사투리 사용은 실제 인물과는 살짝 차이가 있다. 정우성은 이전에 장태완 수경사령관을 연기했던 배우들과 달리 표준어를 사용한다. 정병주 특전사령관, 김오랑 소령 역시 동남 방언을 사용해야 맞지만[13] 앞선 드라마들과 마찬가지로 표준어를 사용한다. 반란군 중에서는 영주 출신 황영시를 연기한 안내상[14]이 표준어를 썼고[15], 반면 평택시 출신 차규헌을 연기한 전진기가 도리어 경상도 사투리를 사용했다.[16]

  • 마지막에 등장하는 반란군 주역들의 기념사진은 실제 사진과 같은 장소에서 같은 구도로 촬영했다. 이는 2008년 보안사령부의 후신인 기무사령부가 서울 소격동에서 과천시로 이전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앞서 12.12를 다룬 드라마 제5공화국이 방영됐던 2005년에는 기무사가 소격동 청사를 사용하고 있어 다른 곳을 배경으로 찍어야 했다. 현재 구 기무사령부 건물은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으로 사용하고 있어 누구나 방문할 수 있다.


2.1. 군사 관련[편집]


개봉 전, 막대한 제작비와 수많은 배우들이 동원되는 초대형 프로젝트임이 알려지며 아시아 영화를 사랑하는 세계 각지의 시네필들과 밀리터리 매니아들로부터 소품이나 당시 장비, 배경 구현 등에 있어서 어느 정도의 완성도를 달성할지 그 귀추가 주목되었다. 같은 사건을 다룬 <제5공화국>의 경우 아무래도 40부작이 넘는 드라마고 소품에 신경을 많이 쓰지 않던 2000년대였던 반면, <서울의 봄>은 140분 남짓한 영화 한 편인데다가 2020년대 시점엔 CGI 기술도 고도화됐고 자문을 위한 전문가, 소품, 무대 디자인 등에 있어 진일보할 것으로 기대된 것이다.[17] 결과물은 몇몇 물리적인 제약이 있던 부분을 제외하면 역대 현대사 군사 영화 중에선 최고 수준으로 나와 팬들의 기대를 충족시키는 데에 성공했다.[18]

사전 제작부터 전문 감수 팀(에코나이너, 대표 태상호 기자)이 합류하면서 군사 묘사 부분에 상당한 발전이 있었다고 한다. 에코나이너는 당시 주요 군시설 구조와 무기, 피복 및 개인장구에서 전술 행동까지 감수했다고 밝히며 영화 속 반영 부분을 찾는 재미를 느껴봐달라고 SNS 계정을 통해 관객들에게 당부하였다.

한편 진압군 측 이귀오 장군 역을 맡은 이귀우(육사 41기)가 제7포병여단의 여단장을 역임하고 준장으로 전역한 진짜 장군 출신이라 그의 도움도 컸다고 한다. 특히 영화 초반부 및 후반부 155㎜ 견인곡사포 사격 씬에서 현장 배우 가운데 포를 제대로 다룰 수 있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는데[19], 그가 현장에서 직접 배우들을 훈련시키고 일부 배우들에게는 적절히 실제 국군 야전곡사포대 편제상에 있는 '포반장' 등의 역할을 분담해주며 연기와 제작 양쪽에서 도왔다고 한다. 맡은 배역이 소장이었던지라 영화 출연 후 지인들로부터 언제 소장으로 진급했냐며 농담 섞인 연락도 왔다고 한다.리버스 성덕 영화 ‘서울의 봄’ 출연·자문… 준장 출신 60세 늦깎이 배우

사건의 중심이었던 육군본부 B-2 벙커와 수방사 벙커를 재현하기 위해 제작진들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고 한다. 그 시절의 지휘통제실을 엿볼 수 있는데 현대의 지휘벙커는 각종 전자장비와 CCTV, 실시간 전장상황도와 전자지도로 가득하지만 지금과 달리 그런 게 없던 1970년대인지라 사방에 실물 지도가 걸려있고 컴퓨터 대신 지도와 전화기만 가득하다. 이 벙커들은 제작사인 플러스엠이 유튜브에서 공개한 영상에서 등장한다. #

작중 등장하는 군부대들도 각색을 거친 것을 제외하면 매우 훌륭히 재현됐다. 공수여단들은 전부 짝수번호가 붙은 가상의 부대로 변경되었고,[20] 수도경비사령부는 부대마크에 검은색 역삼각형이 더해지고 원래있던 검은 삼각형은 검은 테두리가 있는 노란색 삼각형으로 바뀌었다. 9사단은 부대마크가 12.12 당시 사용중이던 일명 '누운 백마'가 아닌 1951년에서 1953년 사이에 사용하던 숫자 '9' 부대마크로 변경하였다.

한편 영화 초반, 필동 수도경비사령부 본청 중앙현관 현판에는 '행동으로 충성하자' 라는 문구와 함께 현재 실제로 사용 중인 부대마크가 그대로 들어가 있다. 그리고 역시 영화 초반 이태신 육군본부 교육참모부 차장이 정상호 육군참모총장의 연락을 받고 한남동 공관을 방문했을 때, 그가 입은 군복의 패치에서의 육군본부 마크 역시 실제 마크와 달리 별이 여러 개 달려있다.[21] 반면 제3야전군사령부제71보병사단, 제26보병사단처럼 현재 해체된 부대는 실제 부대마크를 그대로 사용했다. 단, 제30보병사단은 해체되었지만 제30기갑여단이 부대마크를 그대로 사용중이기에 가상의 부대마크를 사용했다.

피복 재현은 완벽하다. 1979년 당시 육군 근무복과 민무늬 전투복을 구분해 세팅했으며 무궁화 받침이 없던 대령 이하 장교 계급장도 제대로 재현했다. 육군 특전사전차 승무원들의 충정복도 올바르다. 특히, 피복에 있어 야전부대를 지휘하는 장성 지휘관과 국방부에서 근무하는 非 지휘관 장성의 차이를 분명히 드러냈는데, 배송학 군수차관보는 녹색 견장 없이 국방색 견장에 계급장을 차고 있는 반면 지휘관들은 녹색 견장에 계급장을 부착하고 있다. 군복에 붙이는 병과 휘장의 경우 지금과는 다르게 시계 반대방향으로 90도 뒤집어 부착했는데, 1979년 당시 부착 지침에 맞춰 제대로 맞춘 것이다. 이러한 피복류의 전반적인 요소들은 등장인물 하위 문서에 있는 각 부대에 소속된 인물 사진에서 다시 볼 수 있다.

또한 군복을 통해 전두광과 이태신의 성향을 대비시키는 효과를 주었다. 군 외부로의 야욕을 펼치는 전두광은 시종일관 색이 진하고 쨍한 새것같은 근무복 차림으로 등장하며, 참군인 그 자체인 이태신은 색이 바래 은은한 국방색인 전투복 차림을 고수한다. 다만 전두광은 출연하는 내내 근무복 앞가리개를 하지 않는데, 군인의 본분을 저버린 인간이라는 것을 복장을 통해서도 암시하려고 한 것으로 보인다.

옥의 티라면 작중 육군 특전사의 베레모 모표가 1979년 당시의 것이 아니라 현용인 점 정도인데, 자문을 맡은 태상호 기자가 직접 "당시 모표 실물은 구하기 매우 어렵고 소품 신규 제작도 비용이 너무 많이 들어, 현용을 부착하는 것으로 타협했다"고 밝혔다.

다음은 영화에서 등장한 군용 병기들이다. 시대가 시대인만큼 오늘날에는 패튼 빼고대부분 예비군 치장물자로 지정되어있거나 완전히 퇴역한 병기들인 것이 특징.



2.2. 실제와 허구[편집]


  • [각색] 수도경비사령관 이/취임식에서 위대한 전진, 신아리랑 등이 연주된다.
  • [실제] 1979년 당시에는 아직 발표되지 않은 곡들이다.

  • [허구] 영화에서는 이태신 장군이 갑종장교 출신으로만 묘사된다.
  • [실제] 장태완 장군은 육군종합학교 출신이다. 다만 실제 장태완의 임관 분류는 갑종장교이다.

  • [각색] 이태신 수경사령관, 공수혁 특전사령관, 김준엽 헌병감이 연희동 요정에 모이는 장면에서 이들을 맞이하는 사람이 원경 수경사 헌병단장 혼자이다.
  • [실제] 조홍 헌병단장이 장태완 수경사령관, 정병주 특전사령관, 김진기 헌병감과 함께 있지만 전두환을 대신해 우국일 보안사 참모장이 이들을 맞이한다. 다만 우국일 준장은 반란군 소속이 아니었기에[22] 사건 이후 전두환과 뜻이 맞지 않았는지 일주일만에 결별하고 1995년 12.12 재판에서 증인으로 출석하기도 했다.

  • [각색] 육참총장 경호원 권형진 준위가 부상을 입고 피를 흘리면서도 그 몸으로 가까스로 도착해서 정 총장의 납치 사실을 전한다.
  • [실제] 두 명의 실존 인물을 합친 전개이다. 반일부 준위는 총격을 받았지만 다치지 않고 간신히 도망쳐서 해병대 내무반에 도착해 사실을 알렸다. 부상 당한 당사자 김인선 대위는 총탄 4발을 몸에 맞은 후 의식을 거의 잃었다가 잠시뒤 장태완이 걸어온 전화를 가까스로 받고 앰뷸런스를 보내달라고 외치는데 그 순간 합수부 요원들이 또 총격을 가해 팔에 관통상을 입고 기절했다. 얼마 후 다시 깨어나서 사력을 다해 공관 밖의 연못으로 기어갔고, 12월의 얼음장 같은 물 속에 몸을 숨긴 채 1시간 반 동안이나 버티다가 결국 공관 초병에 의해 발견됐고 순천향병원으로 후송되어서 목숨을 건졌다.

  • [각색] 삼청동 국무총리 공관의 헌병특별경호대 병력을 제압하는 부대가 수경사 경비단으로 나온다.
  • [실제] 하나회 소속인 청와대 경호실의 병력이 출동하여 무장해제 시켰다. 또한 영화에서 묘사된 바와 달리 청와대 경호실 병력과 경호실장 대리 정동호 준장은 공관 안에 상주하고 있지 않았다. (당시 총리공관 경호 업무는 헌병특별경호대가 전담했다.)

  • [허구] 전두광이 국무총리 공관으로 정 총장 체포 재가를 받으러 갔다가 실패하고 돌아가려는데, 육본 측의 연락을 받은 경비병력에 의해 체포될 뻔하다가 간발의 차이로 문을 들이받고 탈출하는 장면이 나온다.
  • [실제] 김진기 헌병감이 국무총리 공관으로 전화를 걸어서 전두환의 소재를 파악했으나 영화처럼 즉각 체포명령은 내리지 않았고 대기 명령만 내렸다. 정승화 총장을 연행한 주체가 확실하지 않았던 상황이라서 즉각 체포 명령을 내리지 않았던 것이다. 그 틈에 전두환은 총리공관을 빠져나갔고, 헌병특별경호대는 하나회의 병력에 의하여 무장해제된다. 전화가 걸려올 당시 하나회 일원인 경호실 작전담당관 고명승 대령이 이미 헌병대 무장해제를 위한 병력을 이끌고 온 상태였다.

  • [각색] 이태신이 수경사 30경비단에 전화를 걸어 반란군 지휘부와 통화하는 장면[23]에서 한영구 1군단장과 배송학 국방부 군수차관보 순으로 전화를 받는다.
  • [실제] 장태완은 유학성 군수차관보와 먼저 통화한 뒤 황영시 1군단장과 이야기를 나눴다. 이후 차규헌도 바꿔주려 했지만 장태완이 먼저 전화를 끊었다. 유학성과 황영시와는 다르게 차규헌은 작속 상관으로 모셨었기 때문에 예를 갖추려 전화를 끊었다고 한다. 이 장면으로 유명해진 제5공화국은 물론, 전작인 제4공화국에서도 순서가 바뀌어서 나왔다. 단 코리아 게이트에서는 정상적으로 나온다.

  • [허구] 이태신이 행주대교를 홀로 막아 서울로 진격하던 2공수여단 병력을 돌려보내는 장면이 나온다.
  • [실제] 1공수여단이 특전사령부와 육군본부의 지시를 무시하지 않고 중도에 회군한 뒤, 박희도 여단장이 오면서 재출동한다. 다만 혈혈단신으로 병력을 막아서는 모습이 아주 픽션은 아니고, 김진영 수경사 33경비단장[24]의 이야기를 각색한 것으로 보인다. 당시 김진영은 장태완의 명령으로 진압을 위해 수경사로 집결하는 33경비단 전차중대를 설득해 원대복귀하게 했다.

  • [허구] 김준엽 헌병감이 육본 벙커에서 체포된다.
  • [실제] 김진기 헌병감은 수경사에서 장태완과 함께 신윤희 중령에 의해 무장해제 당하고 체포되었다. 이 과정에서 육군본부 작전참모부장 하소곤 소장이 저항하다 총탄에 맞은 부분은 생략되었다.

  • [허구] 총격전이 여러 번 등장하고, 총에 맞고 쓰러지는 병사도 여럿 연출되고 수류탄도 터지는 등의 액션 장면이 많이 있다.
  • [실제] 무력충돌보다는 전화를 통한 명령, 견제와 협박 및 회유 등이 주를 이뤘으며 직접적인 충돌을 최대한 피하려 했기에 실제 인명피해는 사망자 3명(33헌병대 박윤관 상병, 국방부 헌병중대 정선엽 병장, 특전사령관 비서실장 김오랑 소령)에, 부상자가 다수(40여 명으로 추정, 정확한 부상자수는 파악되지 못했다) 나오는 정도에 그쳤다. 그 때문인지 작중에서 총격전으로 쓰러진 인원이 꽤 나오지만 실제 사망한 김오랑 소령과 정선엽 병장을 모티브로 한 등장인물들에게만 자막을 붙이며 전사했다고 알린다.[25]

  • [실제] 일부 관객들이 "너무 신파적이며 작위적인 연출이다."라고 비판한 육사 25기 오진호(김오랑) 소령이 홀로 남아서 특전사령관 공수혁(정병주) 소장을 지키다가 반란군과 교전 끝에 전사하는 장면은 실화다. 특히 작중 반란군들의 대화에서 밝혀지는 것처럼 김오랑은 특전사령관을 체포하려던 15대대장 박종규 중령과는 관사 위아래 집에 살며 호형호제하던 절친 사이였으며, 사건 직전인 불과 며칠 전 부부 동반으로 저녁식사를 할 정도로 가족끼리도 친한 사이였다.#[26]

  • [각색] 이태신이 아내와 통화하며 "오늘도 못 들어갈 거 같으니 미안하다."라고 말하며 애처가임을 드러냄과 동시에 암울한 결말을 향한 서사가 강조된다. 사실 이 일화의 주인공은 장태완 장군이 아니라 김오랑 소령이다. 주인공 이태신에게 관객들이 더 집중할 수 있도록 여러 사건들을 몰아주고, 조연에 해당되는 오진호는 이미 '친한 동료이자 형님에게 살해당하는 최후'라는 비극이 예정되어 있었기에 극의 서사에서 오진호에게 감정이 과도하게 집중되는 일을 막기 위해 각색이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 [허구] 이태신은 종반부 장면에서 휘하 부대와 함께 광화문까지 전차를 몰고 행진하여 전두광을 위시한 반란군들과 직접 대치하는 장면은 실제와 다르다. 이태신이 수경사 야포단에 내린 포격 명령, 국방부 장관의 직위해제 발언, 바리케이드를 넘어간 뒤 발언하는 것도 모두 허구이다. 이는 전두광, 더 나아가 전두환에게 하고 싶었던 마지막 대사를 위한 감독의 연출로 풀이된다. 사실 아무리 정밀타격을 한다고 해도 155mm 야포를 서울 시내에 사격한다면 작중 전두광의 언급처럼 수많은 인명피해가 불가피했을 것이다.
  • [실제] 실제론 야포단을 수경사령부로 집결시키려 했으나 30사단 관할이던 행주대교가 1공수에게 점령당해서 야포단장에게 그 위치에서 30경비단을 향해 포 조준 명령을 내렸다.[27] 사령부에 주둔하던 전차 4대와 TOW미사일 중대, 그리고 수경사령부 내의 가용 가능한 모든 병력(비전투병까지 다 긁어모아 총 104명)을 소집하여 아스토리아 호텔을 공격개시선으로 설정하고 출동하려고 했지만 전차에서 전차부대 본부에서 내려오는 장태완 사살 무전[28]이 들리자 유사시 전차 전력의 배신이 우려된다는 부관들의 만류로 공격을 포기했다. 결국 그렇게 전두환 체포를 포기하고 사령관실에서 대기하고 있다가 반란군들에게 체포되었다.

  • [실제] 쿠데타가 끝나고 전두광이 파티를 열면서 '방랑시인 김삿갓' 노래를 부르는 것은 약간의 각색이 들어가긴 했으나 실화이다. 작중에서는 쿠데타 성공 직후 열린 파티에서 부른 것으로 묘사했지만, 실제로는 조금 시일이 지난 뒤에 열린 위로연에서 부른 것.# 노래가 끝나고 손드는 장면도 재현했다.[29]

  • [허구] 전두광과 이태신에게 서사를 집중시키려고 한 나머지 반란군 측이나 진압군 측이 바보나 겁쟁이처럼 그려진 면이 상당히 많다. 노태우만 하더라도 전두환이 위험에 처했다는 판단이 서자마자 9사단 출동을 단독 결정하여 2인자 자리를 굳혔는데, 영화에서의 노태건은 초반에 너무 수동적인 데다가 겁 많은 사람으로 그려졌다.[30] 쿠데타 성공의 또다른 1등 공신 박희도 또한 1공수를 움직이라는 명령에 망설임 없이 출동시켰던 반면에, 작중의 도희철은 전두광에게 등 떠밀려서 자신의 부대를 움직였고, 자신이 출동 명령을 내릴 때도 어쩌지 못해 노태건이 핀잔을 준 후에야 제대로 지시를 내렸다. 또한 한영구 1군단장 및 배송학 군수차관보 등 전두환보다 선배인 장성들도 상황이 불리하게 돌아가자 겁을 먹고 내뺄 궁리부터 하는 소시민으로만 그려진다.
  • [실제] 실제로는 반란군 측도 나름대로 스스로 판단과 결단을 내려서 사태를 유리하게 뒤집기 위한 시도들을 했다. 일례로 장태완 장군이 30경비단으로 전화를 걸었을 때 유학성황영시가 직접 받아 대응하기도 하고, 노태우박희도가 9사단과 1공수여단을 단독출동시키기도 했으며 신사협정 전략도 입안하는 등 나름대로 반란에 있어 역할들을 맡았다.

  • [허구] 진압군 측에서 이태신을 강조하기 위해 육본 및 각 전방부대 및 재경부대 지휘관들이 어리석거나, 겁쟁이거나 고지식하고 순진하게 그려진 측면이 있다. 또한 사건 발생 초기엔 한남동 공관에서 총격전이 있었을 뿐, 누가 정 총장을 납치했는지, 그리고 보안사가 어떤 계략을 꾸미는지를 파악하지 못한 채 우왕좌왕 한 반면, 영화에서는 초기부터 보안사가 정 총장을 납치했다는 사실을 모두가 훤하게 내다보고 하나회가 벌인 짓이란 걸 대놓고 이야기하는데, 그럼에도 명백한 군사반란 상황 속에서 육본 지휘관들이 어영부영하거나 순진하게 하나회 측을 믿는 모습이 다소 과장되어 그려졌다. 또한 김준엽 헌병감 외에 다른 육본 지휘관들을 무능하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캐릭터로 묘사한 영화와 달리, 실제로는 김진기 헌병감 뿐만 아니라 안종훈 육본 군수참모부장[31], 하소곤 육본 작전참모부장[32] 등 다수의 장군이 강경 진압을 주장하였다.
  • [실제] 서울에서 총격전이나 화력을 동원한 전투가 벌어지면 수많은 인명피해가 날 수 있고, 무엇보다 이 위기를 틈타 북한이 남침을 감행할까봐 진압군 측이 섣불리 진압을 시도하지 못 하였다. 또 현재에는 이 사건이 군내 비밀 사조직이었던 하나회의 짓이었다는 것이 널리 알려져 있지만, 당시는 커녕 9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하나회가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지, 나아가 하나회라는 조직이 존재하는지조차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상황이었다. 심지어 대선배이자 창설멤버인 11기를 비롯한 초기가입자들(대략 50년대 군번) 정도만 제외하면 하나회 내부에서도 서로 누가 하나회인지 조차 모르는 정도였다.[33] 말 그대로 전두환이 패거리를 만들어서 친한 사람들과 몰려다니고 권력 욕을 드러낸다는 정도 수준으로만 알려져 있었고, 정상이라면 보안사령부가 이런 상황을 감찰, 파악, 수사를 해야 했는데 문제는 그 보안사가 전두환 본인의 손아귀에 있었다. 정확히 하나회의 정체가 드러나는 것은 6월 항쟁3당 합당 등 수많은 정치적 격변을 겪은 뒤 김영삼이 대통령에 취임한 직후 단행된 하나회 숙청을 위한 대규모 군 인사와, 그 과정 속에서의 투서 사건 등을 통해서였다.[34]

  • [각색] 장태완의 이름을 앞뒤 글자까지 바꾼 건 한민족의 영웅 충무공 이순신과 합친 거라는 얘기도 있다. 실제로 작중 전두광을 잡으러 출동하는 이태신이 광화문 앞 이순신 장군 동상 아래를 지나며 주시하는 장면도 나온다. 반면 정상호 참모총장을 연행하려는 보안사 요원들은 이순신 장군 동상의 뒷모습만을 보고 지나갔는데, 이는 이들이 군인정신에 맞지 않는 반란을 자행한다는 점을 암시하는 장치로 해석할 수 있다.

  • [실제] 쿠데타가 성공으로 끝난 뒤, 전두광과 쿠데타 세력들은 국방장관으로부터 정 총장 체포 관련 동의를 얻고서 대통령 재가를 받기 위해 국무총리 공관으로 다시 찾아갔고, 최한규 대통령이 어쩔 수 없이 재가하는 장면이 나온다. 이 과정에서 서명하고서 재가 날짜와 시각을 밑에 적어놓는 장면을 통해 사후 재가라는 것을 명시해 놨는데 이 역시 사실이다. 실제 노재현 국방장관이 동의한 뒤 최규하 대통령의 재가가 이루어졌고, 당시 자리에 있었던 신현확 총리는 최규하 대통령이 재가 시간인 12. 13. 05:10 AM이라고 적은 사실을 12.12 관련 공판 및 수사에서 몇 차례에 걸쳐서 언급하였다.[35] 그러나 신군부 입장에서는 대통령이 재가 시간을 05:10AM으로 적어놓았다는 것이 기록으로 남으면 명백한 불법 행위임을 드러내는 것과 다를 바 없었기에 이후 신군부가 펴낸 <제5공화국 전사> 부록 1편 390페이지에 실린, 이른바 '수사착수건의' 문서엔 이 재가 시간이 삭제되었다.# 명확히 드러나진 않았으나 신군부가 고의로 삭제했음이 강하게 추측된다.

  • [허구] 이태신은 수경사 내 파견된 보안사 소속 보안부대의 존재에 신경 쓰지 않는 모습을 보이고 상황이 끝날 때까지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으면서 보안사 도청에 계속 무기력하게 당하는 모습을 보였다.
  • [실제] 장태완 역시 사태 초반에 이러한 부분에 대해 신경 쓰지 않다가 중반부에 참모 중에 한 사람이 몰래 자신에게 다가와서 보안부대 요원들이 사령부 작전 상황 등을 실시간으로 보안사령부에 보고하는 것 같다며 알려주었고 그러자 자신이 실수했다면서 자책했다고 한다. 그러고 나서 곧바로 보안부대 요원들을 전부 다 영창에 입창시켰고 동시에 보안부대로 통하는 모든 통신선을 절단하도록 지시했다.#[36] 작중에서도 일부 언급되지만, 보안사는 그 특성상 모든 군부대를 감찰하고 감시하는 임무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모든 각급 부대에는 이를 담당하는 보안부대를 파견해둔다. 국방부부터 각 야전군, 군단과 사단급 부대 등엔 모두 이에 해당하는 보안부대가 있는데 반란 당시 이 보안부대들은 각급 야전 부대장을 감시, 미행하고, 나아가 부대장 및 지휘부에 대한 회유 및 협박 공작을 진행하면서 쿠데타 성공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보안부대 특성상 각급부대에 분산배치되어 있지만, 그 지휘권은 파입부대가 손댈 수 없고 보안사가 중앙집권적으로 통제하는데 이 점이 보안사 입장에선 최고의 장점으로 발휘된 것이다. 그렇기에 보안사령관이 군부정권 내내 최고의 요직이 된 것이며, 그 이후에도 중시된 것이다.

  • [실제] 극중 합동참모의장은 등장하지 않았고, 대사로도 언급되지 않을 정도로 사실상 없는 사람 취급을 받았는데, 이 역시 당시 군부 지휘계통을 정확히 묘사한 것이다. 1979년 당시 합동참모의장은 군령권이 없고 국방장관을 보좌하는 현역 최고 대장이라는 상징성만 있었다.[37]. 군령권과 군정권 모두 다 각군 참모총장이 가지고 있었는데, 그렇다 보니 반란군에게 있어서 합동참모의장은 안중에도 없었고 육군참모총장을 납치한것이다.

  • [각색] 마지막 장면에 나오는 반란군 주역들의 기념사진은 실제 사진과 같은 장소에서 촬영했지만, 사진 속 등장인물은 차이가 있다. 실제 사진에 나오지 않는 이학봉이 포함돼있고, 개인 사정으로 당시엔 빠져있다가 합성을 통해 사진에 들어간 박준병백운택이 처음부터 함께 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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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두 사람 모두 개봉 2년 전 한 달 간격으로 숨졌으며, 특히 이 영화의 개봉일은 전두환의 2주기 하루 전날이다.[2] 이름을 본디 이름이 아닌 전두, 노태 식으로 조금씩 바꾼 것도 이를 의식해서인 듯 하다.[3] 다만 우렁찬 장군 스타일에 가까웠던 이덕화의 전두환과는 달리 황정민의 전두광은 늠름한 장군보다는 배우 본인이 과거 연기한 아수라(영화)박성배, 수리남전요환와 비슷하게 권력을 탐하는 광인에 가까운 스타일이라 이런 논란은 없을 듯 하다.[4] 다만 작중 직접 등장하지 않는 박정희와, 사람의 이름이 아니라 조직명인 하나회는 실명 그대로 나온다.[5] 제작진들이 등장인물 이름을 써두고 투표했을 때 전두광이 항상 1등이었다. 이름의 광이 대머리를 떠오르게 하는 빛 광()이 아니냐는 말이 나왔는데 작중 잠깐 스쳐지나가는 명패를 보면 진짜 빛 광 자를 썼다. 영화가 공개되기 전에는 미칠 광(狂)으로도 해석한 것도 있다.[6] 국제시장에서도 볼드캡 위에 가발을 쓴 채로 노인 연기를 한 적이 있다.[7] 가발은 총 다섯 개 버전이 있었다. #[8] 이는 전두광과 외관적으로 대비를 두기 위한 의도일 수도 있다. 선과 악으로 대비되는 두 인물이니만큼 확연히 차이를 두어야 하기 때문.[9] 염동헌은 드라마 빛과 그림자에선 전두환을 모티브로 한 정장군 역을 연기한 바 있다. 대머리라는 공통점이 있어 역시 싱크로율이 나쁘지 않았다.[10] 정동환은 최규하 전 대통령보다는 장면 전 총리와 싱크로율이 높은 배우로 유명하다.[11] 실제로 제5공화국에서 장태완 장군을 연기했던 김기현 성우가 역사저널 그날에 출연해서 당시 상황을 회고하기도 했는데, 저 당시는 중앙정보부와 문교부 등에서 대놓고 언론을 통제하던 시절인데다 언론보도 자체도 체계적이지가 못해서 당시에는 한강다리가 통제됐다, 퇴근시간에 시민들 발이 묶였다 정도로만 짤막하게 보도가 나갔었고, 일반 시민들이 12.12 군사반란이라는 걸 인지하게 된 건 민주화 이후의 일이였다고.[12] 1988년 11월 23일에 전두환이 대국민 사과문을 발표하고 백담사로 유배를 갔다. 그리고 정확히 33년 후에 사망했다.[13] 정병주 장군은 영주시, 김오랑 소령은 김해시 출신이다.[14] 배우 본인이 대구광역시 출신에 옛날에도 사투리 연기를 꽤 했음에도 굳이 표준어를 쓴 게 의아한 부분이다.[15] 제5공화국에서도 배우 문회원이 표준어로 연기했다.[16] 경상도 사투리는 남도 방언 중 고치기 가장 어려운 만큼 그 출신이 아니라면 자연스럽게 따라하기조차 어렵다. 최근에는 경상도 출신 배우가 서울말을 배워 연기하는 경우는 꽤 있지만, 반대로 타지 출신 배우가 경상도 사투리 연기를 하는 경우는 잘 없는 추세. 앞서 언급한 전진기의 경우에는 서남 방언을 쓰는 전라북도 완주군 출신임에도 경상도 사투리로 연기했다.[17] 다만 제5공화국은 당시는 물론이고 지금 기준으로 봐도 한정된 환경속에서 군사 재현에 꽤나 신경을 많이 쓴 작품이긴 하다.[18] M48A3K와 KM900의 경우 군의 지원을 받지 못하였기 때문에 치장 물자가 아닌 소품팀이 제작한 레플리카를 이용하였다. 드라마 D.P. 시리즈처럼 아무래도 육군 입장에선 흑역사를 들추는 작품이라.....[19] 155mm견인곡사포는 사격에서 40kg이 넘는 포탄을 들어야 하고 방열과정에서도 무게가 상당한 가신과 발톱을 들고 고정시켜야 하며 포 받침을 고정시켜는 자키를 돌려야 하는 등 포반 인원들이 숙련되지 않으면 고되고 시간이 많이 걸린다. 촬영과정에서도 방열은 생략하더라도 사격 절차가 숙달되지 않으면 실사격처럼 보여주기가 매우 어렵다. [20] 실제 공수여단은 모두 홀수인데 행주대교를 건넌 제1공수특전여단은 2공수로, 진압하려 출동했다가 신사협정으로 회군한 제9공수특전여단이 8공수로 나오며, 제3공수특전여단은 4공수로, 제5공수특전여단은 6공수라는 이름으로 나온다.[21] 실제 육본 마크는 가운데 큰 별을 중심으로 삼각형 모양으로 작은 별 세 개가 달려 있지만, 영화에서는 가운데 큰 별을 중심으로 주위에 여덟 개의 작은 별이 달려 있는 모양이다. 이는 아래 있는 제작사의 유튜브 영상에서 등장하는, 육군본부 B-2 벙커 세트장 입구에서도 확인해볼 수 있다.[22] 쿠데타 성공 이후 주역들의 기념 사진에 얼굴이 나오지만 보안사 참모장 자격으로 찍은 것이고 실제로 전두환 측에서 우국일 장군에게는 쿠데타 계획을 전혀 알려주지 않아서 총격전 이후 장태완, 정병주, 김진기 세 장군들과 함께 원대복귀했다고 한다.[23] 일명 장포스로 알려진 그 장면[24] 물론 이쪽은 정부측이 아닌 반군측이다.[25] 참고로 정선엽 병장도 육군본부를 방어하는 것으로 나오지만 실제로는 국방부 청사에 배속되어 있었고 국방부에서 전사한 것으로 기록이 남아있다.[26] 한편 박종규가 이끌고 온 반란군들에게 6발의 총탄을 맞고 사망한 김오랑 소령의 시신은 특전사령부 뒷산에 암매장됐다가 이후 특전사 동료 장교들의 항의로 사건 3개월이 지난 1980년 2월 28일 국립서울현충원 제29묘역-2923호에 이장되었다. 그의 죽음 이후에 대한 이야기는 김오랑박종규 인물문서 참조.[27] 다만 경복궁 인근엔 다수의 민가가 밀집해있고, 장태완 장군도 이것을 모르지 않았기에 실사격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작중에서는 조명탄까지는 쏜 것으로 묘사되지만 실제로는 조명탄 추진체가 화재를 일으킬 우려에 그마저도 쏘지 못했으며, 장태완 장군 역시 회고록에서 조명탄일지라도 발사했다면 막대한 민간피해가 발생했을 것이라고 회고했다.[28] 전차 무전은 엔진 소음 때문에 소리가 굉장히 크게 설정되는 관계로 연병장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들을 수 있었다.[29] 링크의 영상은 1980년 1월 23일에 소격동 국군보안사령부 식당에서 촬영된 '위로파티'이다. 당시 전두환의 옆에서 맞장구를 쳐주는 사람은 당대 최고 코미디언이었던 서영춘.[30] 다만 9공수가 출발했을 때 자살 생각을 했다는 본인의 회고록을 보면 겁이 많은 모습도 현실 반영일 수 있다. 영화에서도 후반부에 들어서면서 9사단을 출동시키고 전두광 부재시에 작전 지시를 내리는 등 하나회 2인자의 면모를 유감없이 드러낸다.[31] 이후 군수기지사령관으로 전보된다. 신군부5.17 내란 때도 5월 17일 오전 11시 국방부 제 1회의실에서 열린, 신군부 세력의 비상계엄 전국 확대를 관철하기 위해 열린 전군 지휘관 회의에서도 "비상계엄 전국 확대는 시기상조다. 국민의 합의와 총화에 따라야 한다."라고 끝까지 반대 의견을 내지만 묵살당했다.[32] 이후 수경사에서 진압회의 중 하나회 소속 수경사 헌병단 부단장 신윤희 중령이 이끌고 온 병력의 총격에 폐를 다쳐 중상을 입은 후 3개월의 치료 끝에 겨우 살아남고 하나회에 의하여 80년 2월 강제 예편조치된다. 영화에선 이 부분이 등장하지 않는다.[33] 이 부분의 경우 영화 내에서도 강동찬 대령이 이태신 소장에게 수방사 휘하 지휘관들의 신상을 보고하는 과정에서 "누가 하나회인지 멤버들도 잘 모른다"라는 말로 등장한 바 있다.[34] 반란 당시 녹취된 이건영 3군사령관을 필두로 한 장군들의 통화 내용을 들어보면 # 하나회라는 단어는 일절 나오지 않고(영상의 29:58에 쓰인 하나회 말이지요는 (진도개) 하나 (추임새) 말이지요의 오기이다.) 또 초반에는 이들이 반란의 주모자라는 걸 몰라서 우왕좌왕하는 걸 알 수 있다. 다만 아무리 비밀이었다고는 해도 전두환노태우를 필두로 일부 장교들이 자주 모여서 움직인다는 이야기는 공공연하게 떠돌고 있었고 육군본부 측에도 장세동, 김진영 등이 전두환과 한패라는 것은 어느 정도 알려져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상상 이상으로 깊숙하게 뿌리내리고 있다는 게 백일 하에 드러난 것은 군부정권이 완전히 퇴장하고 난 뒤 문민정부 출범 이후에서야 이루어진다.[35] 1995년 12월 16일 서울중앙지검에서 있었던 검찰 수사에서 신현확 당시 총리는 검사의 질의에 "위와 같이 노재현 국방부 장관이 이미 결재를 하여 가져온 재가서류의 내용을 대략 검토하신 후 일자와 시간을 기입하고 사인을 하는 방법으로 재가하였습니다."라고 얘기했다. 출처는 전남대 5.18 연구소가 공개하고 있는 조사 당시의 조서.#[36] 제5공화국에서 이 장면이 묘사되는데 장태완 사령관이 선제적으로 사령부 내 보안부대를 진압할 것을 김기택 참모장에게 지시한다. 또 육군본부 지휘부가 수경사로 이동하면서 함께 넘어 온 육군본부 보안부대장 변규수 준장도 체포해 감금했다.[37] 합참의장이 군령권을 보유한 실권직이 된건 1991년 노태우 정부 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