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위스/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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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고대
2. 중세 전기
3. 서약 동맹의 성립
4. 주변 국가의 간섭
5. 종교 개혁과 독립
6. 프랑스 혁명과 분열
8. 현대
9. 둘러보기


1. 고대[편집]


고대 내륙 켈트족 중 알프스 산악부족이었던 헬베티족이 국가의 기원이며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첫 갈리아 원정 당시 게르만족에게 밀려 이주하다 카이사르에게 공격받고 다시 돌아갔다. 이후 서방 속주의 원활한 지배를 위해 알프스의 치안과 교통을 확보하고 싶어하던 로마 제국의 관료체계에 정식으로 편입되며 점점 로마인들에게 동화되었고 이 가운데 보급된 민중 라틴어가 현대 스위스의 공용어 중 하나인 로망슈어의 조상이 되었다.

2. 중세 전기[편집]


국경방어선이 붕괴된 서로마제국 말기에 들어서 결국 게르만의 한 일파인 알레만니족에게 정복되었다. 알레만니족의 언어는 오늘날 스위스 독일어의 조상이 되었다. 그러나 알레만니 족은 얼마 되지 않아 프랑크 왕국에 복속되었다. 또한 프랑크 왕국이 분열되는 과정에서 고지 부르군디아 왕국과 고지 부르군디아와 저지 부르군디아가 합쳐진 아를 왕국의 지배를 거쳐 신성 로마 제국 지배하에 들어갔다.

3. 서약 동맹의 성립[편집]


파일:스위스 국기(1470).svg.png
1470년대부터 사용한 스위스 국기.

하에서 비교적 자유를 누렸으나 합스부르크 가문이 점차 세력을 넓히면서 억압적인 통치를 시작하자 기나긴 투쟁을 벌였다. 이 무렵 이 최초로 실체를 갖추게 된다. 1315년 모르가르텐 전투의 승리로 합스부르크 가문으로부터 사실상 독립을 쟁취한다. 1316년 독일왕이었던 루트비히 4세(아직 황제로 즉위하기 이전이었다)는 스위스의 독립을 인정하는 조치를 취하기도 했는데 그는 합스부르크 가문의 라이벌이었던 비텔스바흐 가문 출신이었고, 이를 통해 합스부르크를 견제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4. 주변 국가의 간섭[편집]


스위스는 연합의 영토를 계속 확대시켜 1513년에는 인구가 700,000명으로 늘어났다. 스위스 주정청들은 1515년 이탈리아를 공격했다가 마리냐노 전투에서 프랑스프랑수아 1세에게 참패하고, 이후 발루아 왕가에만 군사를 보내겠다는 서약을 하여 사실상 예속된다. 그러나 프랑스가 카를 5세신성 로마 제국과 적대 관계가 되면서 스위스 본토마저 유린당했다. 스위스 용병들은 신성 로마 제국과 싸운 파비아 전투 등에서 잇따라 패배했다.


5. 종교 개혁과 독립[편집]


이후 종교 개혁으로 인해 결국 영토가 나누어져 카펠 전쟁을 치르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초반에 울리히 츠빙글리가 개신교군을 이끌고 기세를 올렸으나, 결국 페르디난트 1세카를 5세가 지원에 나선 가톨릭군의 역습에 패배를 당하고 전사했다. 제네바장 칼뱅이 나타나기도 했으며 종교 개혁 당시 개신교가 크게 전파되어 칸톤끼리 싸우고 멀쩡했던 칸톤이 분리되는 일까지 있었는데 30년 전쟁에서 정식으로 독립을 인정받았다.


6. 프랑스 혁명과 분열[편집]


파일:헬베티아 공화국 국기(프랑스어).svg.png
헬베티아 공화국의 국기.

프랑스 혁명 중 프랑스 혁명군에게 점령당하면서 칸톤들을 지휘할 중앙 정부인 헬베티아 공화국(1798~1803)이 만들어졌다. 그러나 헬베티아 공화국의 급진적인 대개혁 때문에 알로이스 폰 레딩(1765~1818)이 난을 일으켰으나, 프랑스 정규군에게 진압되었다. 이후 1803년 나폴레옹 을 만들면서 불화가 끝났다. 나폴레옹 전쟁 이후에는 빈 회의에서 독립과 영세 중립국의 지위를 인정받았다. 스위스가 이렇게 협정을 통해 영토를 거의 확정지었던 1815년에는 인구가 많이 증가해서 1,800,000명으로 증가해 있었다. 그러나 스위스로부터 사실상 분리 독립하려는 존더분트가 가톨릭 주들을 중심으로 조직되면서 연방과 갈등이 일어났고, 1847년 존더분트 전쟁에서 연방군이 승리하면서 1848년 스위스 연방 헌법이 만들어진다.


7. 제2차 세계 대전[편집]


제2차 세계 대전이 일어났을 때는 한 방면을 막으면 어떻게든 국가를 방위할 수 있었던 이전과는 달리, 나치의 세력이 독일은 물론 프랑스, 오스트리아를 모두 점령했고, 남쪽의 이탈리아 역시 나치에 동조하는 추축국이었다. 온 유럽 대륙이 모두 나치의 지배 아래 들어갔는데, 스위스는 그 한 가운데서 유일하게 나치의 지배가 미치지 않는 영토가 되었다. 하지만 국민의 지지를 받는 앙리 기장은 무장 중립 노선을 유지했다. 독일은 '타넨바움 계획'(Unternehmen Tannenbaum) 등 스위스 점령 계획을 종종 수립했지만 기존의 전략을 깰 만한 전술을 완성할 수 없었고, 스위스는 지형이 험하고 요새화가 어느정도 이루어져 있었기에 어느 정도의 피해가 있을 것으로 예상되었다. 후술할 스위스를 외화 결제 창구로 이용해야 하는 것과 더불어 당면한 소련 등의 적을 상대하기도 바빠 독일은 스위스 침공은 득보다 실이 클 것으로 판단하였고, 스위스는 끝까지 침공받지 않고 무사했다.

그러나 스위스 은행나치 독일에게 협조적이었기에 침공을 당하지 않았다는 어두운 면도 있었고 이는 나중에야 뒤늦게 폭로되었다. 나치는 외화 부족에 시달렸고 외국으로부터 자원을 수입해야 할 때 외화를 결제해야 했는데 중립국인 스위스 은행을 통해서 많은 거래를 하였다. 그때나 지금이나 스위스 은행의 자금력과 영향력은 매우 컸으며 스위스 은행은 나치에 외화를 환전해주거나 외국과의 거래 대금 지급을 스위스 은행을 통해서 하게 해주는 등의 협조에 응해주었고 외화가 부족했던 나치 독일이 스위스 침공을 득보다 실이 크다고 판단하는데 큰 영향을 주었다.


8. 현대[편집]


스위스는 그동안 빠르고 안정적인 인구 성장을 통해 계속 인구가 늘어났고 나중에는 조금 느려지기는 했지만 변함없이 증가해서 전쟁이 끝나고 나서인 1951년에는 인구가 4,700,000명이 되었다. 이후에도 스위스는 중립국으로서 유럽 연합에도 가입하지 않고 있고 국제연합에는 국민 투표를 거쳐 2002년 190번째 국가로 가입했다.


9. 둘러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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