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왕/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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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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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즉위 이전
3. 귀족 숙청
4. 개혁 정책
4.1. 국학 설치
4.2. 정치제도, 지방 행정과 군제 정비
4.3. 관료전의 지급과 녹읍 폐지
4.4. 달구벌(대구) 천도 시도
4.5. 대당 관계
4.6. 일본과의 관계
4.7. 기타 행적
5. 최후


1. 개요[편집]


신라 신문왕의 생애를 다루는 문서.


2. 즉위 이전[편집]


태어난 시기는 명확하지 않으나 681년에 승하한 문무왕이 56세였고, 신문왕은 문무왕의 장남이라는 점과 장남 효소왕이 6살에 왕이 된 것을 감안하면 즉위 시점에 대략 20대 혹은 30대 중반으로 추정한다면 640년대 중반인 선덕여왕 치세(632년~647년) 혹은 650년대인 진덕여왕 치세(647년~654년) 혹은 할아버지 태종 무열왕 치세(654년~661년)쯤에 출생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 보면 백제 멸망 때는 유년기에서 10대 초반 혹은 10대 중반이었고 고구려 멸망~나당전쟁 때는 10~20대쯤 되었을 것이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문무왕의 장남이었다. 필사본 《화랑세기》에는 소명태자라는 장자가 있었지만 일찍 세상을 떠나 차남인 신문왕이 태자가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내물왕 때부터 계산하면 내물왕의 10대손이다. 참고로 신문왕 즉위 후 100년 후에나 즉위하는 제37대 선덕왕도 내물왕의 10대손이라고 한다. 이는 선덕왕의 족보가 부정확하다는 근거가 될 수도 있고, 가족별로 대손 차가 크다는 이야기가 되겠다. 참고로 선덕왕이 부계로는 신문왕과 같은 항렬이지만 모계로는 신문왕의 증손자인 혜공왕과 사촌이 된다(...). 실제 나이는 혜공왕의 아버지 경덕왕과 비슷하지만 말이다.

그런데 아버지 문무왕이 태자 시절에 전쟁터에 자주 나섰던 것과 달리 신문왕은 665년 8월 태자에 책봉된 것 외에는 즉위 전까지 활약상이 없다. 기록이 부실해서 행적이 안 남아있는 것일 수도 있고, 정치가 아닌 전쟁에는 그다지 소질이 없었거나 아버지 문무왕이 굳이 전쟁터에 보내지 않았을 수도 있다.

신문왕은 형제가 많았던 문무왕과는 달리 형제에 대한 기록이 없다. 당나라에 사신을 보낼 때만 신문왕의 형제인 것처럼 보이는 사람이 나오는데 이는 정황상 왕족이라는 구색을 맞추려고 그런 것 같고, 실제 문무왕의 자식은 신문왕밖에 없었을 가능성이 있다. 그렇게 치면 왕의 유일한 자식이자 차기 왕위 계승권자를 위험한 전쟁터에 내보내지 않는게 당연하다.

신문왕은 교서에서 자신을 '조그만 몸 혹은 왜소하다 혹은 보잘것없다'(眇躬)라고 말한 적이 있으므로 비유적 의미가 아니라면 정말 체격이 작고 전장에 어울리지 않는 인물이었을 수도 있다. #1 #2 #3

즉위 이전, 청년기에 상당히 시끄러운 시대를 살았음에도 불구하고, 신문왕의 이름으로 기록된 사건은 거의 없다. 그는 전쟁 공신이자 귀족인 김흠돌의 딸을 태자비로 맞아들였다.


3. 귀족 숙청[편집]


이미 문무왕 시절부터 왕권 강화를 위한 정치 개혁이 꾸준히 시행되고 있었고, 절대왕권과 6두품을 중용하는 이런 정책은 상당수 진골 귀족의 반발을 불러일으켰을 것이다. 난세를 끝낸 영웅이던 문무왕 치세에는 그저 불만만 가지고 김흠돌이란 구심점으로 뭉치는 데 그치고 있었다.

아울러 기록을 종합해 볼 때 이미 문무왕-신문왕 교체기의 허점을 노려 반란을 일으키려고 준비하고 있었을 가능성도 있다. 그래서 젊은 신문왕이 즉위하면서 이들을 정리하는 것이 첫 번째 과제가 되었다.

아버지 문무왕의 관 앞에서 유조에 따라 681년 7월 7일에 곧바로 즉위한 지 불과 1개월 뒤인 681년 8월, 신문왕은 삼국통일전쟁 때 김유신 지휘하에서 종군해 많은 군공을 세우며 군부의 실력자가 된 김군관상대등에서 해임한 뒤 병부령으로 강등시켰고, 대신 각간 진복을 상대등에 임명했다.

진복도 삼국통일전쟁에서 활약한 장군이었다. 그리고 진복이 665년 중시에 취임한 직후 신문왕이 태자로 책봉받았는데, 경덕왕대 기록을 참고할 때 태자 책봉이 중시의 주요 업적임을 알 수 있으므로 진복은 신문왕의 뜻을 따르는 신문왕의 사람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김군관은 백제와 고구려 공격은 물론 나당전쟁 때도 종군한 백전의 노장이었는데 그를 이렇게 강등시킨 것은 삼국통일전쟁을 통해 비대해진 무관 진골 세력을 견제하기 위한 조치라는 해석이 유력하다.

그리고 며칠이 지나지 않은 681년 8월 8일, 장인 김흠돌의 모반 사건이 일어났다. 김흠돌 역시 김군관처럼 삼국통일전쟁에 상당한 전공을 세웠으며 자신의 을 당시 태자였던 신문왕에게 시집을 보낼 정도로 막강한 위세를 자랑했으나 신문왕은 즉위하자마자 막강한 권력을 지녔던 장인 김흠돌을 견제하여 전제 왕권을 확립하고자 했다.

김군관 강등으로 김흠돌 세력이 도모하던 역모가 사실상 세상에 드러나자 흠돌은 준비기간을 1주일도 갖지 못하고 서둘러 반란을 일으키려 했으나 신문왕은 이미 예상했던지 준비한 진압군으로 이내 반군을 제압했다. 이에 일부는 대궐 뜰에서 항복하고 일부는 산골짜기로 도망가 숨었다.

아직 상복도 벗지 않은 시점에 일어난 반란에 신문왕은 분노해 반란세력을 철저히 추적했는데, 산으로 도망간 잔당은 3~4일에 걸쳐 샅샅이 추적해 모두 주살했다. 이 사건으로 파진찬 김흥원, 대아찬 진공을 비롯한 상당수 귀족들을 숙청했다. 잔당 소탕을 완료한 후 8월 16일에는 교서를 내렸다.

16일에 교서를 내렸다.

“공이 있는 자에게 상을 주는 것은 옛 성인의 좋은 규범이고, 죄가 있는 자에게 벌을 주는 것은 선왕의 훌륭한 법이다. 과인이 왜소한 몸[1]

과 볼품없는 덕으로 숭고한 기틀을 받아 지키느라 먹을 것도 잊고 아침 일찍 일어나 밤늦게 잠들며 여러 중신들과 함께 나라를 편안케 하려 하였다. 그런데 어찌 상복도 벗지 않은 때에 경성에서 난이 일어나리라 생각했겠는가? 적괴의 우두머리 김흠돌, 김흥원, 진공 등은 벼슬이 자신의 재주로 오른 것이 아니고, 관직은 실로 성은(聖恩)으로 오른 것인데도, 처음부터 끝까지 삼가 부귀를 보전하지 못하였도다. 마침내 불인(不仁)·불의(不義)로 복과 위세를 마음대로 부려 관료들을 깔보고 위아래를 속였다. 날마다 만족하지 못하는 탐심을 왕성히 하고 포학한 마음을 제멋대로 하여 흉악하고 나쁜 이들을 불러들이고 왕실의 근시들과 결탁하여 화가 안팎에 통하게 되었다. 똑같은 악인들이 서로 도와서 날짜를 정하여 세상을 어지럽히는 반역을 행하고자 하였다. 과인이 위로 하늘과 땅의 보살핌에 힘입고 아래로 종묘(宗廟)의 영험을 받아서인지 김흠돌 등의 악이 쌓이고 죄가 가득 차자 그들이 도모하던 역모가 세상에 드러났다. 이는 바로 사람과 신이 함께 버리고, 하늘과 땅이 용납하지 않음을 증명하는 것이다. 의리를 범하고 풍속을 해침에 이보다 심한 것이 없다. 그러므로 병사들을 추가로 모아 은혜를 잊고 의리를 저버린 나쁜 무리들을 없애고자 하였다. [그들 무리 가운데] 일부는 산골짜기로 도망가 숨고, 일부는 대궐 뜰에서 항복하였다. 그러나 가지나 잎사귀 같은 잔당들을 샅샅이 찾아 모두 죽여 삼사일 안에 죄수 우두머리들이 탕진되었다. 일이 부득이 했으나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으니 근심스럽고 부끄러운 마음을 어찌 한시라도 잊으리오. 이제 요망한 무리들이 숙청되어 먼 곳이나 가까운 곳이나 근심이 없게 되었으니 소집한 병사와 말들을 빨리 돌려보내도록 하라. 사방에 공포하여 [나의] 이러한 뜻을 알게 하라.”


당연히 원래 왕비였던 김흠돌의 딸도 아버지의 모반죄에 함께 엮어 폐출시키고 일길찬 김흠운의 딸 신목왕후를 새 왕비로 맞이했는데 신문왕의 후계자효소왕성덕왕은 모두 그녀의 소생이다. 김흠운은 태종 무열왕의 사위였고, 이미 27년 전인 655년 백제와의 전쟁에서 퇴각하지 않고 맞서다 전사했던 인물로, 그가 세상에 두고 간 딸의 나이는 이 시점엔 적어도 28세였다. 10대에 하는 결혼도 흔하던 전근대 기준으로는 굉장히 늦은 결혼이었다.

신목왕후를 왕비로 맞이하는 과정에서 김개원, 김삼광, 김문영이 중요한 역할을 했는데 김개원은 태종 무열왕의 아들이자 숙부였고, 김삼광은 김유신의 아들, 김문영은 황산벌 전투의 선봉장이었던 김유신의 심복 출신이었다. 김흠운은 무열왕계 혈통에 향가 <양산가>(陽山歌)의 주인공으로 칭송받던 전쟁 영웅이었다. 납비의 절차에 참가한 이들이 하나같이 왕권과 밀착된 인물이었던만큼 새 왕비를 맞이하는 절차 자체가 전제 왕권을 강화하려는 의도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여기서 묘한 것은 위서로 판단되는 《화랑세기》에서 김흠돌이 김유신의 조카이자 김유신의 딸 김진광의 남편으로 나온다.

김흠돌의 모반에 대해서도 여러 이설이 엇갈리고 있다. 김군관과 김흠돌이 긴밀한 관계에 있었는데 김군관이 강등되자 김흠돌이 위기 의식을 느꼈으며 딸이 신문왕의 비였지만 소생이 없었던 것도 그의 위기 의식을 부채질했다는 견해도 있다.

하지만 반대로 김흠돌은 어차피 왕의 장인이었던 만큼 굳이 모반을 꾀할 정도로 무리수를 둘 이유는 없었으며 오히려 이 사건은 신문왕이나 그 수하가 조작한 친위 쿠데타였다고 보는 견해도 존재한다. 일반적으로는 신문왕의 왕권 강화책에 대한 반발로 김흠돌이 모반을 꾀했다는 해석이 통설이다.

며칠 뒤 김흠돌의 난을 완전히 진압한 신문왕은 앞서 병부령으로 강등했던 김군관 역시 처형시켜 버렸다. 죄목은 김흠돌의 모반을 알면서도 이를 고하지 않았다는 것. 다만 반역에 연루되었음에도 김군관의 혈족을 멸족시키지는 않았고 김군관의 아들 1명만 자결시키는 정도로 끝냈다. 즉위하자마자 일어난 이 정치판의 유혈사태에 대해서는 많은 이야기가 있지만 이런 숙청극을 통해 신문왕은 즉위하자마자 무소불위의 강력한 왕권을 세우는데 성공한다.

이후 신문왕은 반포한 교서에서 역적 무리의 높은 벼슬이 자신의 능력으로 올라간 것이 아니라 은전(恩典)(능력과 무관한 신분 서열을 통한 것)임을 강조했는데 추진한 여러 정책과도 일맥상통하듯 귀족 신분보다는 능력을 더 우선시하겠다는 인사의 방향을 천명한 것이다.

신문왕은 681년 10월에 왕을 경호하는 부서인 시위부의 장 위에 6인의 장군직을 더 설치했는데 이 조치만 봐도 왕권을 강화하려는 신문왕의 의도가 드러난다. 지금까지가 부왕 문무왕이 사망한 즉위 원년 가을 한철에 다 있었던 일이다.

문무왕이 설치를 허락했던 신라 내 고구려 유민 자치 국가 보덕국도 신문왕의 숙청 리스트에 포함되었다. 보덕왕 안승은 앞서 김흠돌의 난이 일어나자마자 소형(小兄) 수덕개(首德皆)를 사신으로 보내 신문왕에게 역적 토벌을 축하했는데, 신라의 수도였던 경상북도 경주시와 보덕국이 있던 전라북도 익산시의 물리적 거리나, 전화도 없던 당시 정보전달 속도를 감안하면 반란 발발 5일만에 경주에 축하 사절이 도착했다는 건 보덕국 측도 굉장히 이 상황을 예의주시하며 빠르게 지지 선언을 한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신문왕을 거스를 뜻이 없음을 표명한 보덕국도 불과 3년 뒤 684년 해체되고 신라의 직접 통치로 전환되었다. 기록상으로는 보덕국에서 반란이 일어나 토벌하면서 없앤 거기는 하지만 신문왕은 이미 서라벌 귀족들도 신속하고 잔혹하게 숙청한 사람이라, 보덕국 역시 언젠가 제거해야 할 구시대의 잔재로 생각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다만 신문왕이 모든 정치세력을 찍어누르는 권위 일변도로 나간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백제 출신 승려인 경흥을 국로(國老)로 삼아 경주로 불러들여 불교계의 큰어른으로 중용했으며, 옛 백제와 보덕국의 땅이던 금마저왕궁리 유적미륵사를 현대에 발굴조사한 결과 신라시대에도 백제의 국가사찰이었던 초대형 절들이 유지되었던 것으로 드러나 신문왕이 백제 유민에 대한 포용 정책을 펼쳤음을 찾아볼 수 있다. 옛 삼국 유민을 각각 3개 부대씩 설정한 9서당이 완성된 것도 신문왕 시기였으며 이들은 신문왕의 세력기반이 되었다.


4. 개혁 정책[편집]



4.1. 국학 설치[편집]


이러한 숙청을 바탕으로 전제 왕권 확립을 위해 여러 가지 조치를 단행하였다. 우선 682년 국학을 확립해서 국학의 경(卿) 1인을 설치했다. 본래 국학은 진덕여왕 치세인 651년에 설치되었지만 이때는 아직 국학이 좀 미비된 상태였고, 신문왕이 경을 설치하면서 국학의 위상을 높이려고 했다고 볼 수 있다.


4.2. 정치제도, 지방 행정과 군제 정비[편집]


부왕 문무왕이 율령격식에 불편이 있으면 개혁하라는 유언을 남겼듯이 실제로 신문왕은 정치제도를 크게 보완했다. 686년 예작부를 설치해 중앙 14처 주요 관부가 완성되었다.

신라 내부의 자치정권이었던 보덕국은 강한 왕권을 중심으로 전국을 직접 통치하고자 하던 신문왕에게는 걸림돌이자 옛 삼국시대의 잔재였다. 신문왕은 즉위 초부터 보덕국의 기능을 약화시키기 시작했다.

683년에는 보덕국안승을 소판(蘇判)으로 삼았다. 소판은 신라 17관등 가운데 제3등급이었던 잡찬의 다른 이름이다. 참고로 신라의 관직 체계상 진골만 오를 수 있는 관등이므로 외지인인 고구려 왕가 출신 안승을 진골 골품으로 대우해 주었음을 알 수 있다. 신라에서 토착 신라 왕가 이외에 외부 출신 세력을 진골급으로 대우한 것이 기록으로 남은 것은 금관국 가야계 신김씨, 고구려계 안승, 발해 왕가 대씨 셋 뿐이다.

신문왕은 또한 안승에게 김씨 성을 하사했으며 금마저 대신 서라벌에서 살도록 했다. 그리고 고구려인으로 구성된 황금서당(黃衿誓幢)과 말갈인으로 구성된 흑금서당(黑衿誓幢)을 설치했다. 이로써 통일 신라의 '9서당(誓幢)' 중 6서당이 존재하게 되었다.

그러나 684년에는 보덕국에 사는 고구려 유민들의 대대적 저항이 일어났는데, 원인은 안승의 조카인 대문이 금마저(金馬猪, 현재의 익산)에서 거병하려다가 실패해서 목숨을 잃은 것이다. 대문이 왜 그랬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지도자인 안승을 금마저의 보덕국과 분리하는 일련의 조치에 불만을 가진 것으로 추정된다.

아무튼 대문은 고구려 유민들이 왕으로 추대한 안승의 조카이므로, 고구려 왕족 후손으로 인정받는 인물이었을 것이다. 그런 대문의 사망에 격분한 보덕국인들이 관리들을 죽이고 거병하는 사태가 벌어진 것이다. 신문왕은 이를 진압하기 위해 토벌군을 보냈고 토벌군도 많은 피해를 감수하면서 이 반란을 진압했다. 이 때 바로 1년 전 만들어진 고구려인으로 구성된 부대인 황금서당도 파견되었는데 아이러니한 건 보덕국인들도 고구려계고, 황금서당도 고구려계라, 동족상잔이 일어난 것이다.

사실 역사 속에는 비슷한 사례가 많았는데 임진왜란 때도 조선에 투항한 항왜들은 조선인보다 더욱 적극적으로 일본군과 맞싸워 김충선처럼 큰 공을 세우기도 했고, 이후 항왜들이 다수 참가한 반란 이괄의 난을 같은 항왜인 김충선이 토벌하는 항왜간의 동족상잔이 일어나기도 했다.

태평양 전쟁미국에 살던 일본계 미국인들이 오히려 일본군과 더 용맹하게 싸웠던 것처럼 황금서당 소속 고구려인들은 의심받기 쉬운 출신을 극복하고 충성을 증명하기 위해서라도 동포들과 처절하게 싸워야 했을 것이다.

보덕국의 반란 진압 과정에사 황금서당의 지휘관 중 하나인 김영윤이 전사한다. 이 김영윤은 김반굴의 아들이자 김유신의 동생 김흠순의 손자다. 신문왕은 진압 후 보덕국 유민들을 남쪽의 주나 군현으로 옮겼고, 금마저는 이때 이르러 금마군으로 신라의 행정단위에 편입되었다.

685년에 사지(舍知)를 설치하여 영(令)·경(卿)·대사(大舍)·사지(舍知)·사(史)의 5단계 관직제도가 완성되었으며, 이해에 지방 제도인 9주 5소경제를 확립했다. 신라의 9주는 일선주, 삽량주, 한산주, 수악주, 하슬라주, 소부리주, 완산주, 청주, 발라주를 가리키는데, 685년에 설치된 것은 완산주로 신문왕 대에 9주 체제가 완성된 것이다. 그리고 5소경은 이전에 북원경, 금관경, 중원경이 이미 설치되어 있었으며 이 해에 설치된 것은 서원경과 남원경으로 이렇게 신라의 지방 통치 체제가 완성되었다.

686년에는 예작부(궁궐, 관청 보수 담당 부서)의 장관직을 개편했고, 이해에도 여러 지방 행정 체제를 개편했다. 오늘날의 충청도 지역에 새로운 현을 설치하거나 군과 현을 승격하거나 단위를 내리는 작업을 했으며, 이 해에 보덕국 유민들로 이루어진 적금서당과 벽금서당을 만들어 8서당을 완비했다.

690년에는 남해안 도서 지역에 군을 설치하고, 개지극당(皆知戟幢)과 삼변수당(三邊守幢)이라는 새로운 부대를 창설했다. 개지극당은 '극병'을 중심으로 한 부대이고, 삼변수당은 한산주(지금의 경기)나 하슬라주(지금의 강릉시, 강원도 일대) 등의 북방을 지키는 부대였다.


4.3. 관료전의 지급과 녹읍 폐지[편집]


687년에는 종묘의 시초격인 5묘제를 설치하여 태종 무열왕계의 전제 왕권을 확립시켰다. 5묘에는 태조대왕(성한왕, 누구인지 밝혀지지 않았음[2]) - 진지대왕(진지왕) - 문흥대왕(김용춘) - 태종대왕(태종 무열왕) - 문무대왕(문무왕)을 모셨다.

또한 이 해에 문무 관료들에게 일정량의 토지를 차등있게 하사했다. 이른바 '관료전'(官僚田)을 분급한 것인데 이것은 실제 정무를 수행하는 관리들에게 일정한 보수를 지급한 조치라는 데 의의가 있다. 즉 골품보다는 후천적인 '직분'을 중시하여 진골 귀족의 기득권을 약화시키려는 의도가 있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조치로는 아직 미흡했다.

결국 689년에 폭탄 조치를 취하는데 바로 녹읍(祿邑)을 폐지한 것이다. 본래 신라에서 진골 귀족들은 녹읍을 지급받았고, 6두품과 그 이하들은 '축년사조'라고 해서 일종의 월급처럼 한 해 혹은 한 달을 기준으로 국가에서 일정량의 곡물이나 토지를 제공받았었다.

그런데 신문왕은 이 해에 녹읍을 폐지하고, 진골이든 6두품 이하든, 막론하고 전부 축년사조로 돌려 버렸다.(神文王九年 春正月 下敎 罷內外官祿邑 逐年賜租有差 以爲恒式 )

이 기록대로 녹읍을 폐지하고, 매해 직위에 따라서 조세를 주었다는 것은 조선시대 관수관급제와 비슷한 것으로 보인다. 조선의 관수관급제는 관료들에게 지급한 기존의 수조권 토지에서 관료가 직접 받는 것을 막고, 관청에서 수급받아 관료에게 지급하는 것으로, 중앙과 지방행정체제가 고도로 정비된 15~16세기에 시행될 수 있었던 것인데, 행정제도가 약간의 붕괴가 시작면서 바로 사라진다.

그런데 약 700~800년 이전에 이러한 고도의 제도가 시행되었는지 많은 의문이 있다. 2년전인 687년에 지급한 관료전과 연계되어서 생각해 보면 기존의 녹읍으로 지급한 토지를 관료전으로 바꾸고, 이를 각 지방의 관청에서 조세로 받으면, 수급량에 따라서 중앙관청에서 수도에 거주하는 관리에게 지급한 것으로 보인다.

녹읍이 진골 귀족의 세력 기반이 되었던 것을 생각하면 신문왕의 조치는 진골들의 경제 기반에 타격을 입혀 진골도 6두품과 같은 행정 관료층으로 편입시키고, 왕권을 강화하려는 의도였다고 볼 수 있다. 이후 70년 뒤 경덕왕이 녹읍을 부활시킬 때까지 진골들은 6두품 이하들처럼 축년사조를 받아가며 생활해 간다.


4.4. 달구벌(대구) 천도 시도[편집]


녹읍을 폐지한 그 해, 신문왕은 장산성(경산)에 행차해 거동했고 도읍을 달구벌(지금의 대구)로 옮기려 했으나 신하들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는 못했다.

《삼국사기》 <악지>를 보면 이 해 신문왕이 신촌(新村)에 거동해 잔치를 열고 악인들에게 신라 음악을 연주했다는 기록이 존재하는데, 이 '신촌'이라는 곳이 어디인지 알 수 없지만 이후에 이루어진 연구에 의해 이곳은 대구 천도 시도와 관련된 지명이라는 의견이 제기되었다.

이 신촌이 《삼국사기》 <지리지>를 참조해 충청남도 보령시 주포면이라고 보아, 삼국통일 직후의 지방 안정이 목적이라고 보는 설도 있다. 그런데 <본기>에서는 689년에 신문왕이 장산성(경산시)에 행차했다는 기록만 있을 뿐 서해안에 있는 보령까지 갔다왔다는 기록이 없어서 이름만 같은 다른 신촌일 가능성도 있다.

신문왕이 경주를 떠나 대구 천도를 시도했던 이유는 불분명하나, 이 역시 신문왕의 왕권 강화 시도로 보는 의견이 우세하다. 본래 신라의 수도 경주는 진골 귀족의 세력이 막대했던만큼 이곳을 벗어나 천도하여 새 수도로 가면 대부분의 귀족들은 연고지를 떠나 권력이 약화되고 강력한 왕권 아래의 새로운 정치적 중심지를 만들려고 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왜 대구인가?'에 대한 이유는 통일 수도로서 경주의 입지 자체가 너무 구석에 위치한 상황에서 전통적인 신라 영역, 즉 진한, 변한 권역[3]양주를 벗어나지 않는 한도 내에서 국가 중심부에 가까운 지역이 대구이기 때문에 경주의 지역적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이곳으로 천도를 계획했다는 의견이 많다.

경주 분지보다 대구 분지가 넓으므로 도시 개발이나 식량 생산에서도 좀 더 유리하다. 고구려 장수왕 역시 비슷한 이유로 국내성에서 평양성으로 천도한 바 있다.

지정학적으로 살펴보면 교통 역시 동해 바다와 육로로만 이어지는 경주보다는 낙동강금호강의 수운을 이용해 물자를 수송할 수 있는 대구가 편리하다. 철도가 등장하기 전까지 전 근대 시대는 육로보다 수운이 대량 수송에 훨씬 효율적이고 속도도 빨랐으며, 그 중에서도 경주의 바닷길과 대구의 강길을 비교하면 《조선왕조실록》에서도 여러 번 제기됐던 문제지만 아무리 연안 항해를 한다고 해도 풍랑이 이는 바닷길보다는 언제나 잔잔한 강길이 항해하기가 훨씬 쉽고 안전했다.

신라시대에도 고려나 조선시대처럼 강물길을 통해 수도로 물자를 수송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충주상주시는 신라 때도 매우 중요한 도시로 취급되었는데, 《삼국사기진흥왕 18년, 19년(557년 ~ 558년) 지금의 광역시 비슷한 지역 중심 도시격인 소경을 설치하고, 서라벌의 귀족과 부유한 백성을 이주시켜 신도시를 만들었다. 이게 고구려에게서 이 땅을 551년에 빼앗은 지 겨우 6년밖에 안 된 시점이었다. 충주 지역이 무엇 때문에 요충지인지 생각해본다면, 신라 때도 한강 - 낙동강 수운을 활발히 이용했을 거라고 추정할 수 있다.

후대의 방식을 참고한다면, 조선 시대에는 경상도에서 거둬들인 세곡(稅穀)을 한양으로 운반할 때 낙동강 수로를 통해 상주로 옮기고 거기서 육로로 문경새재를 넘어 충주의 가흥창으로 옮기고, 거기서 다시 배편으로 남한강을 따라 한양으로 운송했다. 낙동강과 남한강의 상류가 가깝기 때문에 이게 가능했는데, 만약 수도 위치가 대구라면 역순으로 적용하면 신라의 수도가 중부 지방 한강변에 있는 것과 비슷하게 교통이 편리한 효과를 얻을 수 있었을 것이다.


4.5. 대당 관계[편집]


당나라와는 아버지 문무왕 대에 있었던 나당전쟁 이후 오랫동안 형식적인 조공조차 보내지 않으면서 교류가 없는 사실상 단교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당나라에 사신 보낸 횟수를 세어보면 무열왕 때 6회, 문무왕 때 14회, 신문왕 때 1회, 효소왕 때 1회다. 나당전쟁의 후유증으로 거의 교류가 끊긴 상태였다.

단교 상태가 지속되던 중 686년 신문왕은 당나라에 처음으로 사신을 파견해 유교 경전인 《예기》와 문장을 요청하면서 당과의 관계 회복을 시도했다. 이에 당시 당나라의 실권자였던 측천무후가 여러 유교적 예법과 모범으로 삼을 만한 유교 경전 글을 정리해 50권의 책으로 만들어 신라에 보내주었다. 이는 나당전쟁 이후 신라와 당의 실질적인 첫 교섭인데 《예기》 전체를 그대로 보내주지 않고 일부만 발췌해서 보내 준 것은 아직 나당 관계가 미묘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692년 봄, 당나라에서 무열왕의 묘호인 태종에 대해 시비를 걸고 묘호(廟號)를 쓰지 말라고 압력을 넣었다. 하지만 신문왕은 답사를 보내 정중하게 이를 거절했다. 답사의 요지는 무열왕 역시 덕이 있고 어진 신하 김유신을 얻어 삼한일통의 대업을 이루었으니 태종이라는 묘호를 받을 자격이 충분하다는 것. 이는 시사하는 바가 큰데 묘호는 원래 폐하 같은 용어처럼 천자국 전용이었기 때문이다.

고려조선도 모든 왕에 태조, 문종, 고종 등등 묘호를 올렸지만 일단은 전부 중국 몰래 올린 것이다. 그런데 신라는 태종 묘호를 취소할 생각이 없다고 대놓고 당나라에 통지해 관철시켰으니, 신라 역시 당군을 나당전쟁으로 싸워서 격퇴한 후 자신감이 붙어 당에 대해서 당당한 외교적 자세를 유지했고 자국의 정통성을 지키려 했다고 볼 수 있다.

한편 이 당시에는 묘호를 피휘하는 것을 신라측에서 거부했지만 당나라와 거의 단교 상태에 가깝던 관계가 회복된 성덕왕때에는 성덕왕의 이름 '융기'가 당 현종 이융기와 같아서 이름을 바꿔달라는 요구를 국교 회복을 위해 들어주게 된다.

이후 신라와 당의 관계 개선은 점진적으로 이루어져 효소왕조공이 재개되고, 성덕왕 때에 가서 완전한 국교 회복이 이루어졌다.


4.6. 일본과의 관계[편집]


당나라와 서먹서먹했던 반면 후방의 일본과는 그 어느 때보다도 사신을 많이 주고받았으며 이는 《삼국사기》와 《일본서기》에서 모두 확인할 수 있다. 신라는 열심히 싸웠던 당나라와 아직 사이가 좋지 못한 만큼 후방에 있는 일본의 도움이나, 적어도 방해는 되지 않도록 일본과의 사이를 개선해놓을 필요가 있었으며, 일본 역시 원래 친밀했던 백제가 패망한 지 오래인 이상 신라와 계속 적대할 수만은 없었다.

당시 일본은 아직 견당사를 본격적으로 파견하기 이전이기 때문에, 불교 등 선진문물을 전파 받으려 했고 신라는 지식인 승려들을 일본에 보내주기도 했다. 《일본서기》에 의하면 689년(신문왕 9년) 4월에

“신라가 김도나 등을 보내어 영진인왕(瀛眞人王)의 죽음을 조문하고, 아울러 학문승(學問僧) 명총(明聰)과 관지(觀知) 등을 보내어 별도로 금동아미타상·금동관세음보살상·대세지보살상 각 1구와 채백금릉(綵帛錦綾)을 바쳤다.”

고 한다.


4.7. 기타 행적[편집]


문무왕 시기부터 공사 중이던 감은사를 완성했다. 원래 감은사는 부처의 힘을 빌려 언젠가 혹시 바다를 통해 쳐들어올지 모를 왜를 진압한다는 의미로 동해바다 어귀에 짓고 있었다. 그러다 문무왕의 유조에 따라 나라를 지키는 동해 바다의 용으로 윤회한다는 의미로 대왕암에 장례를 치르고, 절에 동해 바다와 통하는 수로를 만들어 용이 드나드는 상징적 구조를 만들고 절 이름도 부왕의 은혜에 감사한다는 의미로 감은사로 지었다. 한편 대왕암이 잘 내려다보이는 해변 절벽 위에 이견대를 지었고, 이 장소와 관련된 만파식적 설화가 전해져 내려온다.


5. 최후[편집]


692년 7월 2일에 붕어했다. 《삼국사기》에는 그냥 692년 7월에 승하했다고 기록되어 있지만, 신문왕 사후 그의 추도를 위해 건립된 황복사 3층 석탑의 '황복사금동사리함기'에 신문왕이 7월 2일에 붕어했다고 적혀 있다.# 아버지 문무왕과 아들 효소왕의 나이로 유추해 보면 장수하지 못한 듯하며, 짧게는 30대 후반에서 많아봐야 50대 초반의 꽤 젊은 보령에 붕어(崩御)한 것으로 추측된다.#

신문왕이 붕어했을 때 원자 이홍(효소왕)의 나이는 아직 6세, 둘째 융기(성덕왕)는 이제 막 태어난 아기였다. 비록 젊은 왕비 신목왕후가 살아 있긴 했지만 어린 후계자를 남긴 채 붕어했으니 근심과 걱정 속에서 최후를 맞이했을 듯하다.

파일:신문왕릉.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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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왕릉은 경주시 배반동에 있는데, 경주시울산광역시를 잇는 7번 국도 바로 옆에 있고 신문왕릉 정류장에 서는 경주시 시내버스도 대단히 많아서 접근성이 매우 좋은 편이다. 이전 시대의 신라왕릉보다 좀 더 장식물이 늘어나고 섬세해진 것이 보인다. 다만 2017년 발굴 조사 결과 효성왕의 가묘가 아닌가 하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1] 보잘것없다 혹은 조그만 몸으로 나오기도 한다.[2] 대체로 김씨의 시조인 김알지나 김세한으로 추측된다.[3] 여기에 추가적으로 신라 투항 후 왕족인 진골로 대접받고 문무왕의 모친이자 신문왕의 조모인 문명왕후부터 모계 혈통으로 실제 신라 왕실에 혈통으로도 합쳐진 옛 금관가야 지역도 이 양주에 포함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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