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즈텍 제국/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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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기원
2. 테노치티틀란 왕국
3. 제국으로의 부상
3.2. 잠깐의 쇠퇴기
3.3. 재부활과 정복활동
4.1. 고압적인 황제
4.2. 텍스코코 왕위계승전쟁
4.3. 우에소칭고 정벌
5.1. 유카탄 탐험
5.3. 2명의 통역가를 얻다
5.5. 틀락스칼텍과의 동맹
5.6. 촐룰라 대학살
5.9. 코르테스의 수난
5.10. 틀락스칼라로 후퇴하다
6. 스페인 정복 이후






1. 기원[편집]



파일:Gemelli_Careri_Aztec_Map.jpg

아즈틀란에서 이주하는 아즈텍인들
옛날 옛적, 멕시코 북부의 한 산에 일곱 개의 동굴[1]이 있었는데 이 곳에 일곱 개의 부족이 살았다. 그 일곱 부족은 각각 쏘치밀카, 틀라후이카, 아콜화, 틀락스칼테카, 테파네카, 찰카, 그리고 멕시카 부족이었다. 이 일곱 부족들은 부족만 달랐지 대부분 비슷한 언어를 사용했기에 이들을 모두 묶어서 '치치멕'이라고 불렀다. 일곱 부족들은 세력이 커지자 하나씩 치코모즈톡을 떠나 '아즈틀란'이라는 장소 근처에 정착했다.

아즈틀란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확실한 기록이 없다. 아즈틀란이 천국이나 다름없었다는 설도 있고 '아즈테카 치코모즈토카'라는 폭군이 통치했다는 말도 있다. 어쨌든 확실한 건 치치멕족이 신성한 계시를 받고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정복 전쟁을 펼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개중 7번째 부족이자 마지막 부족이었던 멕시카 부족은 어느 날 번개로 나무가 산산조각나는 것을 목격했다. 멕시카 부족은 이를 나머지 부족들로부터 떠나 자신들만의 운명을 개척해야한다는 의미로 받아들였다. 그리하여 멕시카 부족은 더더욱 멀리 떨어져나와 남쪽으로 방랑했다. 때로는 사냥도 하고, 정착도 했지만 어디에 오래 머물지는 않았다.

멕시카인들은 끊임없이 남하하며 1250년 경 멕시코 중부 지방까지 다다랐다. 하지만 이미 근처에 쓸만한 알짜배기 땅들은 죄다 톨텍 문명이 선점한 상태였고, 막 도착한 이방인에 불과했던 메시카인들은 어쩔 수 없이 톨텍 군주들의 용병 노릇을 하며 살 수 밖에 없었다. 멕시카인 용병들은 스스로 톨텍 국가였던 '콜후아칸' 왕국 아래로 들어가 복속됐다. 멕시카인들은 콜후아칸 아래에서 용병 노릇을 하며 '차풀테펙'이라는 척박한 땅 한켠에 세들어 살았다.

멕시카 용병들이 전쟁에서 혁혁한 전과를 세우자 콜후아칸 왕은 멕시카인들에게 자기 딸들 중 하나를 시집보냈다. 설화에 따르면 멕시카인들이 이 공주의 가죽을 벗겨 신께 제물로 바쳤다. 제 딸이 산제물로 바쳐졌으니 격노한 콜후아칸 왕은 바로 군대를 보내 멕시카인들을 쓸어버리려 들었다.[2] 기겁한 멕시카인들은 콜후아칸 왕의 분노를 피해 텍스코코 호수 한복판의 섬으로 도망쳤다. 멕시카 부족은 이 곳에서 호수에서 거대한 독수리가 선인장 위에 앉아 뱀을 물고 있는 모습을 목격했다. 그들은 이 것이 바로 신이 내린 징조라고 여겨 내친김에 바로 정착했다. 이 곳이 바로 멕시카인[3] 곧 아즈텍인들의 수도, 테노치티틀란의 창립 설화다.


2. 테노치티틀란 왕국[편집]


테노치티틀란의 공식 창건 연도는 1325년이지만 테노치티틀란이 대제국으로 발전하기까지는 한참 시간이 걸렸다. 아직 아즈텍인들은 왕도 없는 상태라서 콜후아칸 왕에게 사절을 보내 한 번만 공주를 더 보내달라고 청원했고, 이 공주와 아즈텍 지도자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 '아카마피치틀리'를 테노치티틀란의 첫 번째 왕으로 삼았다.

아카마피치틀리가 즉위한 이후, 테노치티틀란은 얼마 가지 않아 인근의 강대국 '아스카포찰코'에 복속당했다. 테노치티틀란은 보름바다 아스카포찰코에 공물을 바쳐야했고 아스카포찰코는 아즈텍인들을 위험하다고 생각해서 적대했다. 하지만 테노치티틀란은 아스카포찰코에 핍박받는 와중에도 끊임없이 세력을 확장해나갔다. 호수 내부 섬 주변에 흙과 바위를 쏟아부으며 섬을 확장해나갔고, 호수 곳곳을 개간, 간척하며 농경지를 늘렸다.[4] 1382년에는 스스로를 '틀라토아니'로 선포하며 우이칠로포치틀리에게 바치는 성대한 대관식을 치르기도 했다.

아카마피츠틀리가 죽자 그 아들 우이칠리우이틀이 왕위에 올랐다. 우이칠리우이틀은 주군국 아스카포찰코의 국왕 '테조조목'의 딸과 결혼해 정치적 입지를 다졌고 아스카포찰코에 바치는 공물량을 크게 줄였다. 직물 산업을 크게 장려해 더이상 거친 모직옷을 입는 대신에 부드러운 면직물로 만든 옷을 입고 심지어 외국에 수출하기도 하는 등 여러모로 내실 다지기에 주력한 군주였다.

아카마피츠틀리가 죽자 치말포포카가 20세의 어린 나이에 왕위를 물려받았다. 치말포포카는 둑길을 파고 인근 도시국가 '텍스코코'의 망명 왕자 네사우알코요틀을 받아들여 갈등을 중재하는 등 테노치티틀란의 발전을 이끌었다. 언뜻 평화로워보이던 정세는 아스카포찰코의 전성기를 이끌던 국왕 테조조목이 서거하면서 반전된다. 테조조목이 죽자 그의 아들 타야친이 왕위를 계승했는데, 타야친의 이복형 마쉬틀라가 타야친을 쫒아내고 왕위를 찬탈한 것이다. 타야친은 테노치티틀란으로 도망쳐 마쉬틀라에게 함께 맞섰는데, 이에 위협을 느낀 마쉬틀라가 군대를 이끌고 쳐들어와 치말포포카 왕을 죽여버린 것이다.

치말포포카 왕이 살해당하자 아즈텍인들은 바로 치말포포카의 삼촌 이츠코아틀을 새 왕으로 추대했다. 이츠코아틀은 당시 아스카포찰코의 위협 때문에 망명해있던 텍스코코의 왕자 '네사우알코요틀'과 손을 잡고 대대적인 전쟁을 벌였다. 아스카포찰코 공성전은 무려 100여 일동안 계속되었고, 결국 마쉬틀라가 왕위를 포기하고 도망치면서 아즈텍의 승리로 막을 내린다. 전쟁이 끝난 직후 이츠코아틀은 아스카포찰코 공성전에 큰 도움을 줬던 도시국가 '틀라코판'과도 동맹을 맺었다. 이리하여 테노치티틀란, 텍스코코, 틀라코판 이 3개의 도시국가가 삼각동맹이라는 새로운 군사동맹체제를 결성했다. 이렇게 아즈텍 제국이 세워진 것이다.


3. 제국으로의 부상[편집]


아즈텍 제국의 초대 황제로 떠오른 이츠코아틀은 쏘치밀코 호수와 찰코 호수 기슭의 치남파스 지방으로 눈길을 돌렸다. 호수 해안을 따라 늘어선 담수 샘 덕분에 이 곳을 간척해 거대한 규모의 농지를 개간, 식량 공급을 안정화시킬 수 있었다. 이츠코아틀은 1430년에는 쏘치밀코, 1432년에는 믹스퀵, 1433년에는 쿠이틀라후악과 테좀파 등 주변의 도시국가들을 죄다 정벌하며 제국의 판도를 급격하게 늘려나갔고, 이로써 테노치티틀란의 농업 자원을 확보할 수 있었다. 이후에는 옛 상국이던 콜후아칸, 코요아칸 등을 정복해 멕시코 계곡 남부에 대한 영향력을 더욱 강화했다.

이츠코아틀이 이렇게 막대한 승리를 거둔 덕에 타이틀에 '쿨후아의 군주', '테파넥의 군주' 따위를 추가하고 스스로 격을 황제로 높였고 나중에는 멕시코 계곡 바깥으로까지 진출했다. 내적으로도 관심을 많이 기울였는데 모든 사람들이 문자를 아는 것은 현명치 못하다라며 아즈텍 입맛에 맞지않는 역사책들을 죄다 불태웠다. 오직 아즈텍 관리들의 심의를 통과한 역사서, 기록들만이 살아남았다고. 또한 제국의 수도 테노치티틀란 정비에도 앞장서서 거대한 신전, 도로, 정부건물 등을 축조했다.


3.1. 몬테수마 1세[편집]


제국의 기반을 놓은 이츠코아틀은 1440년에 사망했다. 이츠코아틀이 죽자 몬테수마 1세가 42세의 나이로 새로운 황제로 즉위했다. 몬테수마 1세는 15세기 중후반 내내 이어질 아즈텍 제국의 팽창정책을 치밀하게 계획하고 실행에 옮겼다. 그는 아즈텍의 틀라토아니로서 삼국동맹의 나머지 2개 도시들을 관할할 책임이 있었다. 삼국동맹 내부에서 테노치티틀란이 가장 목소리가 크긴 햇지만, 당시 텍스코코는 7개의 도시들을, 틀라코판은 9개의 도시들을 관할하는 상당한 세력을 구축하고 있는 국가들이었기에 무시할만한 체급의 국가가 아니었다.

몬테수마 1세는 삼각동맹이 전쟁으로 얻은 전리품의 5분의 2는 테노치티틀란에게, 5분의 2는 텍스코코에게, 나머지 5분의 1은 틀라코판에게 나누어주기로 합의시켰다. 내부를 안정시킨 몬테수마 1세는 테노치티틀란까지 이르는 거대한 수로를 완공시켜 도시에 바로 신선한 담수를 공급했으며, 1445년 우악사카 지방을 정복하는 등 멕시코 계곡 외부로 뻗어나가 대서양에 이르기까지 했다. 몬테수마 1세의 정복전쟁 덕분에 카카오, 고무, 면화, 과일, 깃털, 조개 같은 새로운 상품들이 테노치티틀란 시장으로 유입되었고, 아즈텍 제국은 멕시코 고원에서부터 멕시코 만에 이르기까지 광대한 영토를 장악했다.

그러나 몬테수마 1세의 재위기가 평화로운 것만은 절대로 아니었다. 1446년에 거대한 메뚜기 떼가 농작물을 집어삼켜 거대한 기근을 불러왔고, 1449년에는 텍스코코 호수가 범람해 테노치티틀란이 물에 잠겨버렸으며 1450년부터 4년에 걸쳐 서리와 가뭄이 내려 대흉작이 들었다. 4년 동안이나 지속된 가뭄 때문에 테노치티틀란의 경제는 거의 무너지다시피 해버렸고, 테노치티틀란 인구의 대부분이 그대로 증발했다. 사람들은 제 자녀를 시장에 팔아 생계를 유지하는 등 비참한 상황으로 굴러떨어졌다.

몬테수마 1세는 4년의 기근이 신들의 분노 때문이라고 여겼다. 그는 기근을 종식시키기 위해선 신에게 바치는 인간 제물을 늘려 신들을 기쁘게 해줘야한다는 방책을 내놓았다. 이때부터 발생한 것이 바로 그 유명한 꽃 전쟁이다.

아무리 아즈텍 제국이라지만 명분도 없이 바로 전쟁을 걸 수는 없었으니 테노치티틀란의 대신전을 건립하는 데에 필요한 자원과 노예를 바치라고 협박했다. 도시국가 '찰코'는 인근 국가들과 연합해 저항했으나 1453년에 정복당하고 말았다. 몬테수마 1세는 적국에 3번 선전포고를 했고, 상대국이 3번의 선전포고에도 불구하고 항복하지 않으면 그대로 20일 이내에 전쟁을 걸었다. 아즈텍 제국은 강대국 틀락스칼라와의 대결을 피하기 위해 대서양 인근의 우악스텍과 토토낙을 먼저 공격했다. 아즈텍 제국이 북부 베라크루즈의 대부분을 장악하자 경각심을 느낀 틀락스칼라, 우에소칭고, 촐룰라 등의 인근 도시국가들은 방비를 강화했다.

몬테수마 1세는 틀락스칼라, 우에소칭고, 촐룰라 등 중부 멕시코 도시국가들을 정벌해 그 제물을 잡아오려 시도했다. 꽃 전쟁을 통해서 전쟁의 유용성을 깨달은 아즈텍 제국은 이후 기근의 영향에서 벗어난 이후에도 끊임없이 꽃 전쟁을 벌이며 인근 도시국가들로부터 제물을 뜯어왔고, 이건 스페인 콩키스타도르들이 들어올 때까지 쭉 계속됐다.

몬테수마 1세는 1458년 직접 30만 대군을 이끌어 정복 전쟁에 나서기도 했다. 아즈텍 상인 160명을 죽였다는 구실로 믹스텍 영토로 원정을 떠난 것이다. 아즈텍의 전통적인 라이벌 틀락스칼라가 믹스텍을 지원했지만 압도적인 물량의 아즈텍 군대를 막아낼 수는 없었다. 믹스텍의 왕 '아토날'은 포로로 잡혀 목이 졸려죽었고 그의 가족들은 노예로 전락했다. 이후 믹스텍은 거의 기둥뿌리를 뽑아서 아즈텍에 조공을 바쳐야했는데, 무려 이불 2,000여 장, 머리 장식과 방패가 포함된 최고급 갑옷 2벌, 녹색 보석 구슬, 녹색 깃털 800다발, 코치닐 염료 40자루, 금가루 20자루 등 알뜰하게 털어갔다. 사람도 많이 끌고왔는데 소녀처녀들은 쓸어오다시피했고 왕의 하렘도 통째로 데려왔다고.

푸에블라와 오아하카, 멕시코 중부 일대의 수많은 도시국가들은 아즈텍 제국의 활발한 정복 활동에 큰 충격을 받았다. 메소아메리카에서 여러 도시국가들이 옹기종기 번영하던 시대가 끝나가던 것이다.

몬테수마 1세는 사회적으로 개혁을 통해 아즈텍 사회의 기본 틀을 정립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은 계급에 따른 주거 형태 제한이었다. 예를 들어 귀족이나 위대한 전사들만이 2층 집을 가질 수 있었다. 탑은 아예 지을 수 없었다. 탑은 하늘에 있는 신들에게 가까워지는 신성한 건물이라 여겼기 때문. 그래서 탑은 오직 왕궁이나 신전에만 허락되는 건물이었다.

계층에 따라 철저하게 구분되는 교육을 확립하여 궁전의 각 방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도록 하는 한편, 공교육을 크게 확대했다. 또한 모든 형벌들 가운데 사형은 오직 황제만이 선고할 수 있게 만들었고, 다른 판사가 사형을 선고할 때는 집행 전 미리 반드시 황제에게 허락을 구하도록 했다. 이렇게 몬테수마 1세가 꽃 전쟁, 교육, 사회제도, 법체계 등 다양한 분야에서 기본 틀을 만들어놓고 갔기에 일부 학자들은 몬테수마 1세가 진정한 아즈텍의 개국군주라고 칭하기도 한다.


3.2. 잠깐의 쇠퇴기[편집]


1468년 몬테수마 1세의 아들 악사야카틀에게 왕위가 넘어갔다. 이미 왕세자 시절부터 사포텍 도시국가인 테우안테펙을 성공적으로 포위 점령하는 등 군사령관으로서의 재능을 보여줬기에 사람들이 악사야카틀에게 거는 기대는 상당했다. 그는 틀락스칼라를 완벽히 포위하고, 우악스텍과 믹스텍 방면으로 영향력을 넓혀 아버지의 정복 사업을 이어받으려는 야심을 드러냈다. 하지만 아즈텍 제국이 단독으로 틀락스칼라를 정복하기에는 힘이 부족했기에 이를 도와줄 동맹 세력이 절실했다.

당시 악사야카틀은 테노치티틀란 중앙 사원구역에 새로운 기념물을 건설하기로 기획했다. 거대한 둥근 돌에 태양과 달력을 새겨 제국의 전쟁과 정복 사업에 바치도록 한 것이다. 전통에 따라 텍스코코나 틀라코판 등 여러 동맹국들에게 물자 및 노동력의 형태로 원조를 받았다.

태양 석비가 완공되자 참석한 모든 사람들은 준공식을 어떻게 개최할지, 행사에서 희생제물로 바칠 포로들은 어디서 구해야할지 논의하기 시작했다. 악사야카틀은 참석한 손님과 각국 사신들에게 테노치티틀란에 하루 더 머물도록 요청했다. 인근 최고의 강대국이자 적수 타라스칸을 공격해 포로들을 뜯어낼 구상을 해놨는데, 국력이 강한 타라스칸을 치길 위해선 동맹국 사신들에게 도움을 받는 것이 필수적이기 때문이었다. 타라스칸은 아즈텍과 마찬가지로 15세기 들어 급격히 패권국으로 올라온 인근의 강대국으로 함부로 할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악사야카틀은 1476년 타라스칸을 치기 위해 2만 명이 넘는 대군을 조직했지만, 타라스칸은 그 2배 가까운 수의 대군을 동원해 아즈텍 제국과 맞섰다.악사야카틀은 단념하지 않고 전투를 시작했다. 전투는 하루종일 맹렬하게 전개되었다. 그러나, 다음날 아침 해가 떠오르자 악사야카틀의 정예 친위병은 거의 증발하는 수준으로 궤멸당했다.[5] 아즈텍 제국 군대는 테노치티틀란으로 후퇴했고 5분의 1만이 겨우 살아남았다. 패배의 충격은 엄청났다. 아즈텍 제국의 위신이 크게 실추당했고, 수많은 도시국가들이 아즈텍의 통치에 반발하며 반란을 일으켰다. 실의에 빠진 악사야카틀은 1481년 그대로 사망했다. 정황상 무능에 치를 떨던 신하들이 악사야카틀을 암살한 것으로 추정된다.

악사야카틀이 허무하게 죽어버리자 동생 티소크가 새로운 왕으로 즉위했다. 그는 전란으로 황폐해진 테노치티틀란의 대피라미드 재건을 지시했고 휘하 부족들의 반란을 진압했다. 삼국동맹 내에서 흔들리던 테노치티틀란의 지위를 공고히하고 3국 가운데 테노치티틀란의 우위를 재확인하기도 했다. 티소크는 나름 악사야카틀이 남긴 거대한 똥을 치우려 노력은 했지만... 즉위한지 5년도 안되어 불명의 이유로 사망했다. 티소크가 죽자 그의 동생 아위소틀이 왕위를 물려받았고, 이후 아즈텍 제국은 다시 부활에 성공한다.


3.3. 재부활과 정복활동[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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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즈텍 제국의 시대별 팽창 권역
티소크의 동생 아위소틀은 흔들리는 제국을 다잡는데에 모든 여력을 퍼부었다. 즉위하자마자 우아스텍인들의 반란을 진압하며 유능한 군사 지도자로서의 면모를 보여줬고, 군대를 재편성하고 잃어버린 영토의 대부분을 되찾았다. 제국의 영토를 회복했음에도 불구하고 이에 멈추지 않고 정복활동을 계속해 아즈텍의 영토를 2배 이상 늘렸다.

아위소틀은 전례없는 수준의 장거리 정복을 계획했다. 타라스칸을 우회해 남부 게레로의 해안 지방을 정복한 것이다. 이로써 아즈텍 제국은 아카풀코를 정복해 태평양 연안의 전략적 무역로를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게 되었다.

1497년에는 오아하카의 대부분을 정벌하고 테우안테펙을 거쳐 현재의 과테말라 - 멕시코 국경까지 이르렀다. 보급선이 지나치게 길어지자 돌아가려 했으나, 지원을 담당하던 사포텍이 배신을 때려버렸다. 결국 아위소틀은 사포텍 군주 '코시호에사'에게 반강제로 자신의 딸을 시집보내는 등 전례없는 굴욕적인 수준의 결혼동맹을 체결해야만 했다. 새로 정복한 소코누스코 지방에서도 반란을 막기위해 자치권을 허락하는 등 널널히 풀어줘야만 했고, 그때문에 생각만큼 막대한 전리품을 챙기지도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위소틀의 치세에 아즈텍 제국은 500만 명의 인구를 다스리는 대제국이라는 전성기를 맞았다.


4. 몬테수마 2세[편집]



4.1. 고압적인 황제[편집]


아위소틀이 사망하자 몬테수마 2세가 왕위에 올랐다. 몬테수마 2세는 몬테수마 1세의 증손자로, 5세부터 제왕교육을 받아왔고 왕위에 오르기 전부터 유명한 전사이자 우이칠로포치틀리의 대제사장이었다. 그는 15세기 후반 아위소틀 재위기 동안에도 이미 정복 활동에서 이름을 날렸는데, 4년 동안 지속된 아요틀란 정복전에서 몬테수마 2세가 직접 야전사령관으로 활약하며 다녔던 것. 1490년 즈음 이미 몬테수마 2세는 4명의 적 사령관을 사로잡았고 아즈텍 제국 내에서도 상당한 위치에 있는 군사령관이었다.

몬테수마 2세는 1502년, 혹은 1503년 즈음에 아즈텍 제국의 황제로 즉위했다. 그는 대관식 직후 제국의 중앙집권화를 꾀했는데, 38개의 지방행정구역을 더 설치하는 한편 지방 각지에 총독들을 파견하고 판사를 보내는 등 황제의 권력 증대에 집중했다.

하지만 몬테수마 2세 역시 즉위 직후부터 어려운 나날을 보내야했다. 1505년 심각한 가뭄이 들어 광범위한 흉작이 일었고 멕시코 인구 상당수가 굶어죽었다. 몬테수마 2세는 가뭄의 영향을 받지않은 몇안되는 지역인 토나카판에서 옥수수를 실어 테노치티틀란을 포함한 제국 각지로 뿌렸다. 하지만 기근이 무려 3년 동안이나 지속되자 이렇게 구호해주는 것도 한계에 부닥쳤고, 심지어 일부 귀족들마저 살기위해 제 자녀들을 노예로 팔아치울 정도로 상황이 나빠졌다. 귀족들이 자녀를 노예로 팔 정도였으니 일반 평민들은 지옥도에 가까운 상황이었다는 것. 몬테수마 2세는 이 소식을 듣고 팔려나간 자녀들을 다시 가족에게 돌려보내고 해당 귀족들에게 음식을 제공했다.

몬테수마 2세는 철저한 엘리트주의자였다. 궁정의 상당부분을 자신 직속의 신하들로 교체했고, 평민들과 귀족들 사이의 분열을 고의적으로 부추겼다. 그는 평민들이 정치인이나 고위 요직에 앉는 것을 금지했고, 심지어 귀족과 평민들 사이에서 태어난 사생아가 궁정에 진출하는 것 역시 금지했다. 전임 황제들은 그래도 평민들이 고위직으로 진출하는 것을 원천적으로 차단하지는 않았던 걸 생각하면 아즈텍 제국 내에서도 매우 차별적인 정책이었다.

몬테수마 2세 시대 아즈텍 제국은 이전보다 더욱 폭압적이고 군국주의적인 제국으로 발전했다. 일단 재위 초반부에 불어닥친 기근가뭄을 해결하기 위해 지방 속국들로부터 많은 구호물자들을 뜯어낼 수 밖에 없었는데, 기근이 해결되고 난 이후에도 이같은 고율의 세금을 그대로 유지했던 것이다. 게다가 아즈텍 제국 외교 정책의 초점이 영토 확장에서 제국 안정화로 바뀐 탓도 컸다. 영토를 확장하지 않으니 들어오는 전리품의 양이 줄어들었고, 이에 어쩔 수 없이 이미 복속된 속국들로부터 더 공물을 뜯어내는 수밖에 없었다. 참다못한 속국들이 반란을 일으키면 아예 군사를 몰고 쳐들어가 싸그리 털어왔다.

몬테수마 2세는 수도 테노치티틀란을 완전히 새롭게 단장했다. 길이 200m, 너비 200m에 달하는 거대한 궁전을 건설했고, 이 왕궁 내부에는 수 백여명의 신하들이 동시에 잔치를 벌일 수 있는 거대한 안뜰과 수많은 방들이 있었다. 스페인 제국에게 완벽히 파괴당해 알려진 것은 잘 없지만 복층이었다. 맨 위층에 있는 알현실 양 옆으로 텍스코코와 틀라코판, 이 양대 동맹국 왕들의 대기실이 있었다. 명상실도 있었는데 창문도 빛도 들지 않았으며 모든 벽이 검은색으로 칠해져 황제가 명상용으로 사용했다. 맨 아래층에는 정부 관료들이 사용하는 방 2개가 있었다. 하나는 평민들을 통솔하는 관리와 판사들의 회의실이었고, 나머지 하나는 전쟁을 기획하는 고위 군사령관들의 회의실이었다.

빵과 서커스라는 통치방식을 이용하기도 했다. 제국 전역에서 사치품과 식량을 뜯어와 시민들에게 먹을거리를 공급했다면, 이제는 서커스를 제공할 차례였다. 그래서 몬테수마 2세는 '토토칼리'라는 이름의 동물원을 지었다. 주로 조류를 중심으로 하는 동물원이었는데 케찰, 독수리, 참앵무새 등 색색의 새들을 보유하고 있었다. 장밋빛 저어새도 길렀고 새들을 위해 인공 연못을 파기도 했다. 새만 키우는 건 아니라서 재규어, 늑대, 같은 동물들도 길렀다. 심지어 에르난 코르테스도 즐겼다고 말했을 정도. 하지만 코르테스가 아즈텍인들의 사기를 낮추기 위해 일부러 도시를 불태울 때 함께 불탔고 현재는 유구조차 찾아보기 어렵다. 그 외에 1506년에는 수로를 만들어 테노치티틀란의 항구와 신전까지 직통으로 담수를 공급하기도 했다. 물론 스페인 침공 당시 테노치티틀란의 식수 공급을 차단하기 위해 파괴되어 현재는 찾아볼 수 없다.

몬테수마 2세가 스페인에 얻어맞은 비운의 군주라고 알려져 있지만 사실 이 사람도 만만치 않게 무력을 선호하는 군주였다. 6만 대군을 이끌고 노팔라, 익파테펙 지방에서 일어난 반란을 무력으로 진압했고 5,100여 명의 포로를 잡아왔다. 여자와 어린아이들은 노예로 시민들에게 뿌려졌고 나머지 인원들은 황제의 즉위를 기념하기 위해 제물로 바쳐졌다. 이후 틀락스시아코 지방이 반란을 일으키자 역시 쳐들어가 모든 걸 불태우고 50세 이상의 남자들을 모두 죽여버렸으며, 통치자는 비참하게 제물로 바쳐졌다. 이처럼 몬테수마 2세의 군사활동의 가장 큰 특징은 새로운 영토를 정복한다기보다는 기존의 영토에서 일어난 반란을 진압하는 데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는 것이었다.

몬테수마 2세의 통치 기간 내내 곳곳에서 반란이 끊임없이 터져나왔다. 아즈텍의 공물 요구가 날이 갈수록 심해지고 꽃 전쟁이 시도때도 없이 일어나자 피정복민들이 살기 위해 반란을 일으켰다. 1510년 아위소틀 황제가 정복했던 오아하카 지방에서 대대적인 반란이 일어났고, 영토를 늘리지는 못할망정 전임 황제가 정복했던 영토가 떨어져나간다는 것은 몬테수마 2세의 권위에 치명타였기에 어쩔 수 없이 진압에 나설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아즈텍 제국 전역에서는 쉬지않고 반란이 일어났고, 아즈텍 제국 역시 효과적으로 모든 반란을 처리하기에는 힘들었다.

어디까지나 이전 황제들에 비해서 반란 처리에 중점이 맞춰져 있다는 것이지 영토 확장을 아예 안한 것은 절대 아니었다. 오히려 몬테수마 2세 시대의 아즈텍 제국은 여전히 활발한 정복량을 자랑했다. 1504년 다른 도시의 영주가 아름다운 나무가 있다는 소문을 듣고 그걸 빼앗기 위해 전쟁을 일으키기도 했고, 현재 멕시코 게레로주 지방과 오악사카 지방을 중심으로 정복전을 이어갔다. 특히 1507년 40만 대군을 이끌고 나름 끗발있는 대도시던 '토토테펙'을 함락했다. 토토테펙이 상당한 국력을 가진 나라였기에 공성전 도중 아즈텍의 틀라토아니 2명이 사망했다. 그리고 그 대가는 참혹했다. 어린이를 제외한 토토테펙인들이 아예 학살당했고 1,350명이 포로로 잡혔다.


4.2. 텍스코코 왕위계승전쟁[편집]


몬테수마 2세 재위기의 수많은 사건들 가운데 가장 논란이 많은 일들 중 하나로, 삼국동맹의 한 축을 이루는 '텍스코코'의 왕위계승분쟁에 관한 사건이다.

당시 텍스코코의 국왕 '네사우알필리'는 오랫동안 텍스코코를 다스려온 군주였다. 그러나 나이가 들수록 호전성이 떨어지며 평화적인 성향으로 변했는데, 몬테수마 2세는 이에 대해 불만을 품기 시작했다. 텍스코코가 아즈텍 제국의 침략전쟁을 제대로 지원해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텍스코코가 아즈텍의 최대 숙적인 틀락스칼텍을 무려 4년 동안이나 단 한번도 공격하지 않자 울화통이 터진 몬테수마 2세는 네사우알필리 왕을 협박하다시피 왜 틀락스칼텍을 침략하지 않냐고 따졌다. 몬테수마 2세의 등쌀을 못이긴 네사우알필리는 어쩔 수 없이 제 아들 2명을 사령관 삼아 대군을 출병시켜 틀락스칼텍을 쳤다.

하지만 이미 몬테수마 2세는 텍스코코가 못마땅해진 상태였다. 그는 틀락스칼텍에 몰래 정보를 흘려 텍스코코를 배신했다. 텍스코코 대군은 틀락스칼텍 군대에 야습당해 전멸당했다. 이 소식을 들은 네사우알필리는 몬테수마 2세의 배신을 직감, 그의 폭정 앞에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을 자탄하며 그의 궁전에서 자살했다. 이것이 네사우알필리의 죽음에 얽힌 이야기지만, 현대 학자들은 딱히 신빙성이 없다고 평가한다. 어쨌든 네사우알필리가 죽자 무려 80일 동안 아즈텍 전역에서 장례식이 치러졌다.[6]

문제는 네사우알필리가 1516년 죽고 난 이후에 터졌다. 그는 급사했기에 후계자를 제대로 지정하지 못하고 죽었는데, 그와중에 무려 6명이나 왕위계승후보가 존재했던 것. 하지만 저마다 결점이 하나씩은 있어서 한 명은 부유했으나 무능력했고 나머지는 너무 어리거나 공적이 없었다. 이때 중재자로 나선 게 몬테수마 2세였다. 몬테수마 2세는 자신의 조카인 '카카마친'을 텍스코코의 새 왕으로 추천했다. 텍스코코 의회는 그대로 받아들였고 카카마친은 자연스레 새 틀라토아니로 즉위했다. 허나 이같은 결정에 당연히 다른 왕자들은 반발했다. 특히 '익스틀리소치틀' 왕자는 이 결정에 불만을 품고 반란을 계획했다.

의회가 카카마친을 새 왕으로 선포한 직후, 익스틀리소치틀은 도시를 빠져나가 군대를 소집했다. 익스틀리소치틀의 역모를 눈치챈 카카마친은 즉시 몬테수마 2세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몬테수마 2세는 군대 모집과 동시에 네사우알필리의 보물들을 미리 테노치티틀란으로 옮겨갔다. 익스틀리소치틀은 10만 명에 달하는 대군을 이끌고 텍스코코 휘하 도시들을 순방했다. 툴란친고, 테페아풀코 등의 도시들에선 환영받았지만 오툼바 사람들은 그를 환영하지 않았고, 이에 격분한 익스틀리소치틀은 오툼바를 불태워버리고 통치자를 죽여버렸다. 이 소식이 텍스코코에 전해지자 몬테수마 2세는 즉시 대군을 파견하고 모든 도시를 요새화했다.

쾌속진군한 익스틀리소치틀은 빠르게 텍스코코를 포위했다. 텍스코코 인근의 도시들 대다수를 장악하며 몬테수마 2세의 원군 투입을 경계하며 카카마친의 활로를 끊어버리려 시도하기도 했다. 대군을 운용할 길이 막힌 몬테수마 2세는 텍스코코 내부의 영향력을 이용해 '쏘치틀'이라는 이름의 장군을 따로 파견했으나 쏘치틀은 얼마 못가 사로잡혀 화형당해 사망했다. 패배의 소식이 들려오자 몬테수마 2세는 군사적 해결을 포기했다. 그는 평화적 해결법을 제안했고, 익스틀리소치틀도 몬테수마 2세와 대결하기에는 부담이 컸기에 받아들였다. 익스틀리소치틀은 몬테수마가 개입하지 않는 조건으로 형제들끼리만 따로 만나 텍스코코의 영토들을 분할하기로 합의했다. 텍스코코 도시 자체는 여전히 카카마친의 소유였으나, 텍스코코가 거느리던 수많은 도시들은 카카마친, 익스틀리소치틀을 포함한 3명의 형제들이 나누어가졌다. 그러나 끊임없이 카카마친으로부터 견제를 받던 익스틀리소치틀은 결국 텍스코코 외부로 피난을 떠났다.

계승전쟁은 나름 이렇게 결말이 나나 싶었지만.... 훗날 콩키스타도르들이 쳐들어오면서 다시 점화된다. 카카마친은 1519년 스페인인들이 처음 텍스코코에 입성했을 때 그들을 환영했지만, 훗날 이들이 몬테수마 2세를 가둬버리자 스페인에 적대적으로 변했다. 카카마친은 군대를 동원해 몬테수마 2세를 풀어주고 스페인 병사들을 죽여버리려 들었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에르난 코르테스는 꼭두각시인 몬테수마 2세를 이용해 카카마친을 쫒아내려 들었는데, 이때 몬테수마 2세는 이전에 쫒겨났던 익스틀리소치틀을 카카마친 대신 텍스코코의 왕위에 앉히는 방법을 제안했다. 결국 몬테수마 2세의 명분과 스페인의 화력을 등에 업은 익스틀리소치틀은 카카마친을 쫒아내고 텍스코코의 틀라토아니로 즉위했다. 자신의 야망을 위해 제 민족을 배신한 셈.[7]


4.3. 우에소칭고 정벌[편집]



파일:aztecs-at-war.png

꽃 전쟁을 벌이는 아즈텍 군대
1503년 경 토토테펙을 정복한 몬테수마 2세는 멕시코 계곡에서 가장 강력한 도시국가들 중 하나였던 우에소칭고로 눈길을 돌렸다. 마지막 전쟁이 치러진 지 몇 달이 지나자 테노치티틀란에 새로운 노예와 제물, 부의 유입이 줄어들었고 이에 우에소칭고 공격으로 활로를 찾으려 한 것이다. 몬테수마 2세는 꽃 전쟁을 계획했고, 미리 우에소칭고와 그 인근 틀락스칼라, 촐룰라 등에 전령을 보내 꽃 전쟁을 열기로 합의했다. 즉 서로간에 합의된 전쟁이었지 아예 기습적인 침공은 아니었다는 것. 아틀릭스코 평원에서 전투를 치르기로 합의됐고 몬테수마 2세는 네다섯명의 형제들과 함께 전장으로 나갔다.

그는 제 형제였던 틀라카우에판을 군사령관으로 임명하고 10만에 달하는 군대를 맡겼다. 틀라카우에판은 군대를 텍스코코, 틀라코판, 테노치티틀란에서 온 병사들 이렇게 3개의 그룹으로 나누어 서로 순서대로 우에소칭고 군대와 격돌하도록 지시했다.

아틀릭스코 평원에서 전투가 시작되자, 틀라카우에판은 가볍게 200명의 보병을 보내 적군의 전열을 건드려보았으나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가장 먼저 우에소칭고 군대와 격돌한 텍스코코 군대는 엄청난 사상자를 입고 후퇴했다. 다음으로 틀라코판에서 온 군대가 우에소칭고 군대와 부딪혔는데, 이들 역시 우에소칭고를 격파하는데 실패하고 물러났다. 틀라카우에판은 지원군을 전장에 쏟아붓고 심지어 본인이 직접 전장에서 싸웠지만 그 스스로마저도 전사했다.[8] 총사령관 틀라카우에판이 사망하자 아즈텍 군대는 일시적으로 물러났다.

사령관 틀라카우에판마저도 죽은 아즈텍 제국은 기록적인 패배를 당했다. 양측 진영에서 각각 4만 명에 달하는 상상을 초월하는 인명피해를 냈다. 비로 우에소칭고의 피로스의 승리이긴 했지만 어쨌든 아즈텍 제국은 우에소칭고에게 패배당했다. 대부분의 전투에서 승리하던 아즈텍 제국 측으로서는 당혹스러운 결과였다. 아즈텍 귀족들 상당수도 죽임당했다.

아즈텍 제국도 큰 손해를 입었지만 그보다 더 심각한 건 우에소칭고 쪽이었다. 애초에 체급이 상당했던 아즈텍과는 달리, 국력이 상대적으로 작았던 우에소칭고에게 몇 만에 달하는 인명피해는 궤멸적인 피해였다. 우에소칭고는 이 피해로부터 결코 회복하지 못했고 후술하다시피 이는 우에소칭고가 훗날 틀락스칼라에게 정복당하는 단초가 된다.

패배와 막대한 인명피해의 소식을 전해들은 몬테수마 2세는 크게 충격을 받았다. 그는 틀라카우에판을 영웅으로 신격화했고 그를 기리기 위한 수많은 시들을 짓도록 했다. 우에소칭고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한 몬테수마 2세는 이 이후로도 끊임없이 우에소칭고를 찝적댔는데, 아틀릭스코 전투만큼은 아니어도 상당한 규모의 전투들을 여러 차례 치렀다. 1506년에도 또 한번 우에소칭고와 꽃 전쟁을 벌였고 이번에는 양측이 서로 1만에 가까운 전사자를 내는 등 비등비등한 전과를 냈다. 하지만 아즈텍은 우에소칭고를 멸망시키는 데에는 실패했고, 우에소칭고는 훗날 아즈텍이 아닌 틀락스칼라에게 멸망당한다.


4.4. 틀락스칼라 침공[편집]


아즈텍 제국의 최대 라이벌로 꼽히는 틀락스칼텍은 의외로 아즈텍과 대립한 역사가 짧다. 아즈텍과 틀락스칼텍 사이에서 최초의 대규모 군사분쟁이 일어난 것은 몬테수마 2세가 즉위한 이후인 1504년 즈음의 일이다. 당시 틀락스칼텍은 나라 전체가 아즈텍 제국에 둘러싸인 형태였기에 끊임없이 괴롭히는게 가능했다. 몬테수마 2세는 다양한 방법으로 틀락스칼텍을 공격했다. 당시 틀락스칼텍은 홀로 아즈텍에 맞서기엔 국력이 약해 인근 우에소칭고 등 여러 국가들과 동맹을 맺고 싸우고 있었다. 허나 몬테수마 2세는 이들 사이를 교묘하게 이간질했고, 우에소칭고가 틀락스칼텍을 공격하도록 유도했다.

혈맹이나 다름없던 우에소칭고가 틀락스칼텍에 미묘하게 적대적으로 돌아서자 틀락스칼텍은 모든 동맹국들을 의심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몬테수마 2세도 크게 유리하진 않았다. 아무리 우에소칭고가 틀락스칼텍을 공격한다고 해도, 틀락스칼텍이 무너지면 다음은 자신들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고 이전 동맹으로서의 역사가 있었기에 대대적인 공격은 삼갔던 것이다.

우에소칭고와 틀락스칼텍과의 첫 싸움은 칠로치틀란 지역에서 일어났다. 우에소칭고 공격군이 패퇴해 물러나며 틀락스칼텍의 승리로 끝났다. 이후 우에소칭고와 틀락스칼텍 사이의 국경지대에서 수많은 소규모 군사충돌이 일어났으나 그어떤것도 성과를 거두지 못했고 서로 지지부진한 소모전만을 계속했다.

우에소칭고의 배신에 격분한 틀락스칼텍은 즉시 반격을 개시했다. 우에소칭고 역시 이미 아즈텍 제국에 착실하게 얻어맞으며 국력이 약화된 상태라 틀락스칼텍의 공격에 취약했다. 우에소칭고 전체가 틀락스칼텍 군대에 포위당했고 수많은 마을들이 약탈당했다. 나라가 망하기 직전까지 몰리자 우에소칭고는 1512년 아즈텍 제국에 구원을 요청했다. 우에소칭고는 몬테수마 2세에게 제발 틀락스칼텍 군대를 자신들의 국경 바깥으로 쫒아내달라고 애걸복걸했다. 몬테수마 2세는 우에소칭고에 아즈텍의 영향력을 강화할 기회라고 보고 대군을 파견했으며, 우에소칭고 난민들을 대량 테노치티틀란으로 받아들였다.

이로써 상황은 틀락스칼텍 VS 우에소칭고 - 아즈텍 제국 연합군으로 들어섰다. 하지만 틀락스칼텍 군대가 아즈텍 원병이 오기 전에 미리 인구가 적은 험준지대들을 미리 선점했고, 요새화시켜 공성전에 들어서면서 백중세가 되어버렸다. 소모전이 이어졌고 무려 20일 동안이나 전투가 이어졌다. 양측 모두 어마어마한 피해를 입었는데 틀락스칼텍은 유명한 장군이 사로잡혀 죽었고 아즈텍은 피해규모가 워낙 커서 본국에 지원병을 요청해 '가능한 모든 인원을 최대한 빠른 시일 내에 보낼 것'이라며 닦달할 정도였다.

자국 영토에서 전쟁이 지속되면서 우에소칭고는 갈수록 망해갔다. 아즈텍 원군은 생각보다 쓸모있지 못했고 틀락스칼텍 군대는 끊임없이 영토 내부로 밀고들어왔다. 얼마가지 않아 틀락스칼텍 군대가 우에소칭고 왕궁마저 점령했고, 왕궁에 쌓여있던 식량을 싸그리 털어갔다. 기근이 몰아닥치며 우에소칭고 인구 상당수가 굶어죽었다. 1516년에 우에소칭고는 아즈텍 제국과의 동맹을 파기했다. 16세기 초 우에소칭고는 푸에블라 계곡 전체에서 가장 강력한 국가였으나 결국 틀락스칼텍에 정복당해 나라가 망해버린 것이다. 반대로 틀락스칼텍은 아즈텍의 최대 경쟁자로 급부상했다.


5. 콩키스타도르의 도래[편집]



5.1. 유카탄 탐험[편집]


스페인인들은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1493년 두 번째 항해에 나섰을 때 이미 히스파니올라 섬에 첫 스페인 정착지를 차렸다. 이후 신대륙의 막대한 경제적 가치를 깨달은 스페인 사람들은 을 찾아나서기 위해 눈에 불을 켜고 다녔다. 특히 원주민들의 노동력, 그리고 금을 찾아나서기 위한 유럽인들의 열망은 상상을 초월했다. 신대륙에 스페인 사람들이 정착한 지 무려 25년만에 탐사 원정대가 멕시코 해안으로 파견됐다.

1517년 쿠바 총독 디에고 벨라스케스 데 쿠엘라르프란시스코 에르난데스 데 코르도바에게 3척의 함대를 맡기고 서쪽으로 항해해 유카탄 반도를 탐험하도록 명령했다. 유카탄 해안 카토체 곶에 도착한 코르도바는 마야인들과 조우했다. 코르도바는 스페인 국왕에게 충성을 맹세할 것과 그 대가로 스페인의 보호를 약속한다는 내용의 서약을 체결하도록 했다.[9] 코르도바는 2명의 마야인을 포로로 잡고 '멜초르'와 '율리안'이라는 세례명을 주었다. 이 포로들은 스페인어를 제대로 배우지 못했기에, 스페인 정복자들에게 유카탄 반도에 금이 넘쳐난다는 허위 정보를 제공했다.

코르도바는 유카탄 탐험을 계속하던 도중, 밤에 마야 추장 '모크쿠오'의 공격을 받아 스페인 탐험대 50명이 사망했다. 코르도바는 살아남았지만 치명상을 입고 결국 숨졌다. 결국 남은 선원만이 간신히 쿠바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당시 유카탄 반도는 오히려 중부 멕시코보다도 일찍 유럽인들에게 알려졌지만, 스페인의 정복 자체는 한참 후에야 이루어졌다. 가장 큰 이유는 당시 유카탄 반도에 있던 마야 문명이 거의 붕괴한거나 다름없는 상태였기 때문. 당대 마야 문명은 후고전기 말기 단계였는데, 이미 큰 대도시들은 죄다 무너지고 조그마한 부락들만이 남아 연명하고 있었다. 아즈텍 제국이나 잉카 제국과는 달리 중앙집권적인 정부가 없었고 머리만 날리면 그대로 정복됐던 타 아메리카 문명권들과는 달리 하나하나 직접 찾아가서 정복해야했다. 스페인의 마야 문명 정복은 1697년 최후의 마야 도시 '노흐페텐'이 함락되기까지 무려 170여년이나 걸렸다.


5.2. 에르난 코르테스의 원정대[편집]



파일:Hernán_Cortés_anónimo.jpg


파일:Cortés_Ruta_Cuba-Tenochtitlan.png

에르난 코르테스
코르테스의 원정 경로
쿠바 총독 벨라스케스는 끊임없이 멕시코, 중남미 지방으로 탐험대를 파견했다. 벨라스케스는 3번째이자 이전과는 궤를 달리하는 거대한 규모의 원정대를 꾸리기로 결심했는데, 이 원정대의 사령관으로 임명된 사람이 바로 그 유명한 에르난 코르테스다.

코르테스는 안달루시아에서 태어나 벨라스케스 총독이 쿠바를 정복할 때 함께 쿠바로 건너왔으며 행정직을 맡았다. 이미 경제적, 사회적으로 크게 성공하여 금광 경영과 목장을 통해서 부를 축적했고 벨라스케스 총독의 처남이 되기까지 했다. 코르테스는 벨라스케스 총독의 총애에 힘입어 사령관직을 얻어냈다. 코르테스는 이미 3척의 나비오 선박과 상당량의 현금을 보유하고 있는 자본가였기에 원정 자금의 3분의 2 정도를 사비로 지불했다. 벨라스케스 총독이 지불한 건 원정 비용의 절반도 되지 못했다. 코르테스는 심지어 빚을 져가면서까지 원정대의 규모를 늘렸다. 그야말로 원정에 제 인생을 걸었던 것이다.

그러나 원정을 떠나기 직전, 벨라스케스와 코르테스 사이의 갈등이 터진다. 벨라스케스는 코르테스에게 새로 발견한 원주민들과 물건을 거래할 권한만을 주고 싶어했다. 원정에서 얻어낼 막대한 부와 재화는 자기 이름으로 가져가고 싶어했던 것이다. 당연히 빚까지 져가며 원정에 사활을 건 코르테스가 찬성할 리 없었다. 코르테스는 벨라스케스를 독단적이고 식민지에서 자기 맘대로 하는 폭군으로 묘사하며 벨라스케스의 권위를 실추시켜버렸다.

코르테스의 행보가 갈수록 의심스러워지자 벨라스케스는 코르테스를 대놓고 적대시하기 시작했다. 멕시코 본토를 정복하는 사람은 고작 쿠바라는 섬 하나를 정복한 자신보다 훨씬 큰 영예를 누릴 것이 확실했는데, 아무리 봐도 코르테스가 본인이 직접 그 영예를 차지하고 싶어하는 것 같았기 때문. 결국 벨라스케스는 코르테스를 원정대 사령관에서 쫒아내기로 결심한다. 그는 루이 데 메디나를 새로운 원정대 사령관으로 임명했지만, 코르테스의 이복형제가 중간에 그를 납치해 죽여버리고 메디나가 가지고 있던 벨라스케스의 임명장을 코르테스에게 전달했다. 벨라스케스가 자신을 쫒아낼 것이라는 걸 알아챈 코르테스는 벨라스케스가 더 훼방놓기 전에 원정대가 출발할 수 있도록 박차를 가했다.

벨라스케스는 직접 코르테스를 만나 겉으로는 온갖 칭찬과 미사여구를 늘어놓았다. 물론 속으로는 서로 죽이고 싶어했지만. 하지만 코르테스가 만남 직후 벨라스케스의 출항 금지 명령을 씹고 1519년 2월 10일, 630명의 스페인인, 300명의 안티야스 원주민, 12필의 말, 10문의 대포, 의사, 목수 등을 실은 10척의 배와 함께 유카탄 탐험에 나섰다. 벨라스케스는 당장 원정대 회항과 코르테스의 즉각 투옥을 명령했지만 이미 항구에서 떠나간 배가 그의 명령을 들을 리 없었다. 그래서 사실 에르난 코르테스의 원정은 처음부터 명백한 항명으로 시작됐다고 할 수 있다.


5.3. 2명의 통역가를 얻다[편집]


코르테스는 아메리카 본토에 상륙한 뒤, 유카탄 반도 동해안의 코수멜 섬에서 현지인들을 기독교로 개종시키려 시도했지만 결과는 딱히 좋지 못했다. 그 곳에 머무는 동안 유카탄에 있는 또다른 백인 남성에 대한 소문을 듣고 유카탄 해안 마을가를 뒤지다가 프란치스코회 수도승이던 게로니모 데 아귈라르를 구조했다. 아귈라르는 1511년 스페인 난파선에서 떠내려와 살던 몸으로, 8년 동안 마야인들 사이에서 살다가 마을 족장에게 옛 동포들과 합류할 수 있도록 허가를 받고 석방되어 마을을 빠져나왔다.

아귈라르는 스페인어마야어를 둘다 능숙하게 구사하는 능력자였다.[10] 코르테스는 아귈라르라는 귀중한 통역가를 얻고 코수멜 섬을 떠나 유카탄 반도를 돌아서 포토찬 섬에 상륙했다. 포토찬에 상륙한 코르테스는 2번의 경기를 거치며 '말린체'라는 이름의 마야인 여성을 영입했다. 말린체는 마야어와 나우아틀어를 알았기에 이후 코르테스 원정대는 "코르테스 ↔ 아귈라르 ↔ 말린체 등 마야인 ↔ 멕시코 원주민"의 의사소통 체계를 갖추게 되었다. 아즈텍 제국의 언어인 나우아틀어를 통역해줄 사람을 구하며 아즈텍인들과도 의사소통이 가능해진 것이다.

코르테스는 금에 대한 강렬한 욕망을 좆아 미친듯이 금을 찾아다녔다. 협상이 가능한 부족들에게는 총칼로 위협해 금을 뜯어냈고, 적대적으로 나오는 부족들은 강제로 제압한 뒤 금을 뜯어냈다. 하지만 걸신들린 것마냥 금을 쫒던 추잡한 모습에도 불구하고 의외로 코르테스를 나름 호의적으로 맞아들이는 원주민들도 꽤 많았다. 특히 아즈텍 제국에게 인신공양당할 가축 농장 취급을 받던 인근 약소 부족들은 코르테스나 아즈텍이나 별다를 바가 없었고, 압도적인 무력을 가진 콩키스타도르들에게 경외감을 느끼며 이런저런 정보를 제공했다. 코르테스는 이 동맹 부족들을 통해 여러 정보들을 획득했는데, 개중 코르테스의 귀를 솔깃하게 만든 정보가 바로 '황금의 제국', 아즈텍 제국에 관한 이야기였다.

그리고 고작 수백 명을 이끄는 안달루시아 촌뜨기는 인구 수백만 명에 수만 명의 군대를 가진 대제국을 털어서 황금을 잔뜩 뜯어낸다는 미친 발상을 하고 말았다.


5.4. 베라크루스 건설[편집]



파일:HernanCortes.jpg


파일:veracruz-mexico-beaches.jpg

베라크루스에 상륙하는 코르테스
현재 베라크루스의 모습
코르테스는 1519년 4월 현대의 베라크루스 해안가에 상륙했다. 도착 직후 아즈텍 제국의 사절단이 그들을 맞았고, 선물을 서로 교환했다. 코르테스는 자신들의 우월한 화력을 과시하며 아즈텍인들에게 깊은 인상(사실상 협박)을 남겨주려 시도했다.

이때 코르테스는 이미 돌아간다는 선택지가 없었다. 벨라스케스 총독을 엿먹이고 사실상 항명하며 뛰쳐나온 것이나 마찬가지였기에 쿠바로 돌아가면 구금되거나 죽는 결론 밖에 없었다. 그래서 코르테스는 별 소득없이 스페인으로 돌아갔을 때의 안전장치를 마련해두기 위해 베라크루스를 세웠다. 훗날 벨라스케스가 자신을 추궁하면 '왕에게 바칠 영토를 개척하러 갔습니다'라고 둘러대기 위한 목적이었다. 물론 훗날 코르테스가 베라크루스 따위와는 비교가 안될 정도로 광활한 영토를 세우면서 굳이 변명할 일은 없어지지만. 어쨌든 코르테스는 베라크루스의 시의회를 구성하고 자신을 스스로 부장판사이자 시장직에 추대했다.[11]

코르테스는 인근 '쳄포알라'라는 이름의 마을로 진군했다. 쳄포알라 사람들은 코르테스 일당을 환영했다. 그러나 이미 아즈텍 제국을 정복할 생각에 빠져있던 코르테스는, 쳄포알라 족장 '치코메코아틀'을 부추겨 아즈텍 세관원들을 죽이고 아즈텍에 반란을 일으키도록 부추겼다. 이미 치코메코아틀이 오래 전부터 아즈텍 제국의 과도한 공물 요구에 환멸내고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치코메코아틀은 스페인 사람들이 베라크루스를 건설하는 것 역시 도와주며 큰 도움을 제공했다.

반란의 소식은 테노치티틀란까지 빠르게 전해졌다. 콩키스타도르의 우월한 무장을 전해들은 몬테수마 2세황금과 직물 등 선물을 사신들에게 들려보냈다. 사신들은 코르테스가 포로로 잡은 아즈텍 세관원들을 풀어준 것에 감사를 표하며 황제께서 코르테스를 환영한다고, '옛 문헌에 예언된대로 도착했다'고 확신하고 있다고 전했다. 사신들은 선물공세를 펼치며 코르테스가 테노치티틀란을 방문하지 못하게 만류하도록 시도했지만, 오히려 사신들이 주는 금은보석에 눈이 돌아간 코르테스 입장에서는 테노치티틀란을 반드시 가야겠다는 열망을 불태우는 일일 뿐이었다.

참고로 이때 쿠바의 벨라스케스 총독에게 여전히 충성하는 충성파들이 반란을 일으켰다. 안그래도 항명에 불만을 품고 있던 상당수 스페인 병사들이 멕시코의 혹독한 기후에 진저리를 치고 있던 것. 그러나 코르테스는 반란을 진압하고 2명의 반란 지도자를 교수형에 처해버렸다. 이걸로 부족하다고 생각한 코르테스는 아예 자신들이 타고온 함선을 자침시켜버렸다. 코르테스는 쳄포알라 추장 '치코메코아틀'을 포함해 대포 등 보급품 운반 임무를 맡은 200여 명의 원주민들을 함께 동행시켰다.[12]


5.5. 틀락스칼텍과의 동맹[편집]


고작 몇 백여명에 불과한 코르테스의 군대가 수십만 대군을 동원가능한 아즈텍 제국을 정면으로 꺾는다는 건 아예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래서 코르테스가 생각해낸 방법은 바로 아즈텍 제국의 최대 경쟁국, 틀락스칼텍을 이용하는 것이었다. 틀락스칼텍은 몬테수마 2세 이래 아즈텍과 미친듯이 치고받고 싸우면서 서로 죽이지 못해 으르렁거리는 사이였다. 이 관계를 간파한 코르테스가 의도적으로 틀락스칼텍에 접근한 것이다.

코르테스는 틀락스칼텍으로 향했다. 그러나 틀락스칼텍은 200여 개의 도시와 마을들로 구성된 일종의 동맹집단이었고, 아즈텍 제국처럼 하나의 단일된 중앙정부가 존재하지 않았다. 처음에는 틀락스칼텍인들 역시 스페인 병사들을 경계하며 공격해댔다. 1519년 9월 2일부터 5일까지 무려 3일간 극렬한 전투가 일어났다. 하지만 코르테스가 지속적으로 포로들을 석방하고 평화의 메시지를 들려보냈고, 틀락스칼텍 역시 코르테스의 주 목표가 자신들이 아닌 아즈텍 제국이라는 사실을 깨닫자 공격을 중지했다.

틀락스칼텍의 가장 주요 도시는 '틀락스칼라'였다. 이미 100년 동안 아즈텍 제국과 꽃 전쟁을 벌여온 탓에 틀락스칼라의 아즈텍에 대한 증오심은 그야말로 하늘을 찌르는 수준이었다. 심지어 틀락스칼라가 아즈텍에게 일방적으로 얻어맞는 구조라, 도시 인근이 죄다 아즈텍 제국에 포위당한 상태였으며 아즈텍이 심심하면 군대를 보내 틀락스칼라로부터 신에게 바칠 인간 제물을 뜯어오는 현실이었다. 그야말로 산제물을 사육하는 인간 농장. 그딴 대우를 받고 있었으니 아즈텍을 무찌르겠다고 찾아온 코르테스가 그들의 눈에는 하늘에서 내려온 동앗줄이나 다름없었다.

코르테스는 1519년 9월 23일 틀락스칼라인들의 극렬한 환영을 받으며 틀락스칼라로 입성했다. 다만 틀락스칼라가 100년간 경제적으로 봉쇄당한 탓에 도시가 하도 가난해 소금과 천이 없어 음식만 겨우 제공할 수준이었다고. 코르테스는 20일간 틀락스칼라에 머무르며 전열을 다듬었다. 의외로 코르테스는 틀락스칼라에서 고압적으로 나서지 않았다. 오직 주어진 것만 받도록 부하들을 규율했으며, 약탈은 절대 금했다. 그래도 포교를 포기하지는 않아서 지도층들이 세례를 받도록 설득했고, 실제로 몇몇 왕족들에게 세례를 해주기도 했다.[13]


5.6. 촐룰라 대학살[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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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cholula.jpg

촐룰라 대학살
촐룰라 대피라미드의 복원도
한편 아즈텍 제국 측에서는 코르테스가 적국인 틀락스칼라에 머물렀다는 사실에 경악했다. 코르테스 진영에 머물던 아즈텍 사절단은 '어떻게 이런 가난하고 못배운 사람들 사이에서 20일 동안이나 머물 수 있나'라고 불만을 터뜨리며 빨리 틀락스칼라에서 벗어날 것을 촉구했다. 아즈텍 사절들은 코르테스가 이왕 테노치티틀란으로 올 것이라면, 틀락스칼라의 속국인 우에소칭고를 거치는 대신에 아즈텍의 영향 아래 있는 촐룰라를 거쳐서 테노치티틀란으로 올 것을 요구했다.

당시 촐룰라는 메소아메리카에서 테노치티틀란에 이어 2번째로 거대한 도시였으며 가장 신성한 종교적 성소들 중 하나였다. 심지어 이집트 기자의 대피라미드보다도 더 거대한 피라미드를 세우고 숭배했을 정도.[14] 그러나 아즈텍을 정복대상으로만 보던 코르테스에게 촐룰라는 종교적 중심지가 아니라 아즈텍 대군이 주둔하고 있는 요새도시였을 뿐이었다. 그는 테노치티틀란에 입성하기 전에 촐룰라를 쳐서 미리 후방의 적군을 없애겠다는 계획을 짜냈다.

아직 아즈텍 제국과 군사충돌을 할 생각은 없었던 코르테스는 유보책을 택한다. 일단 아즈텍의 선물과 제안을 받아들여 촐룰라를 거쳐서 테노치티틀란으로 향하겠다고 답신하는 대신, 틀락스칼라인들로부터 1,000명의 전사를 제공받아 군사를 보충했다. 그리고 2명의 정찰병들을 미리 보내 테노치티틀란으로 향하는 가장 빠른 경로와 주변 지리를 탐색하도록 시켰다.

촐룰라에서 정확히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서로의 기록이 모순된다. 코르테스와 그 부하들은 별 저항없이 촐룰라에 입성하긴 했지만 촐룰라의 지도자들은 그를 환영하러 나오지도 않았다. 셋째 날에는 심지어 음식과 물조차 제공하지 않았다. 도시 주변에는 요새가 건설되고 있었고 스페인 병사들과 함께 온 틀락스칼라 병사들은 아즈텍이 습격을 준비하고 있다고 경고했다. 말린체가 한 귀족의 아내와 대화한 후 촐룰라인들이 스페인 대학살을 준비하고 있다고 보고한 소식이 쐐기를 박았다. 그 정보가 사실인지 아닌지는 모르지만, 코르테스는 선제공격을 명령했다.[15]

스페인 병사들은 촐룰라 지도자 틀라퀴악과 틀라치악을 붙잡은 다음 도시에 불을 질러버렸다. 코르테스의 기록에 따르면 3시간 만에 3천 명을 죽이고 왕궁과 신전 등 도시 전체를 불태웠다고 전했고 또다른 콩키스타도르 기록에는 사망자가 총 3만 명에 달했다고 적었다. 물론 여자와 아이들은 이미 스페인 병사들이 도착했을 때 위화감을 느끼고 자리를 피했기에 그정도로 많이 죽었을 가능성은 없지만, 종교적 성지인 촐룰라가 코르테스에게 무력하게 함락당했다는 것 자체가 아즈텍에게는 엄청난 충격이었다. 촐룰라가 불타는 꼴을 보고 기겁한 아즈텍 제국의 동맹 도시들은 미리 코르테스에게 항복하는 것을 진지하게 고려하기 시작했다.

몬테수마 2세 역시 촐룰라가 몇 백명의 정복자들에 의해 무력하게 무너지는 광경에 할말을 잃었다. 한참 수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거대한 도시를 함락하는 모습에 막연한 무력감을 느꼈던 것이다. 몬테수마 2세의 입장에서는 아즈텍의 거대한 대군을 동원해 이들을 막아낼 수도 있었지만 그 피해가 어느 정도가 될지 감을 잡을 수 없었다. 신중한 성격이었던 몬테수마 2세는 결국 이들을 테노치티틀란에 초대한 뒤에 직접 나와 이들을 환영하기로 결심한다.


5.7. 테노치티틀란 입성[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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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테노치티틀란의 모습

1519년 11월 9일, 코르테스와 부하들은 마침내 테노치티틀란에 입성했다. 당시 테노치티틀란은 25만 명이 거주하는 세계에서 가장 거대한 도시들 중 하나였으며 당시 남북아메리카 대륙을 통틀어 가장 거대한 대도시였다. 현대 학계의 추정에 따르면 당시 테노치티틀란은 나폴리이스탄불을 제외하면 유럽의 모든 도시들보다도 규모가 컸으며 스페인 세비야의 4배 크기에 달했다. 그야말로 아즈텍 제국의 모든 게 집약되어있는 제국의 중심 그 자체였던 것이다.

코르테스는 스스로를 후아나 1세 여왕, 카를로스 1세,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5세 등등 스페인 왕실의 대리인이라고 소개했다. 몬테수마 2세 역시 이들을 맞기 위해 테노치티틀란의 대로 한가운데로 나왔다. 아즈텍 황제 양 옆에는 텍스코코 왕 카카마친, 틀라코판 왕 테틀레판케찰틴 등 다양한 군주들이 도열했다. 모두 화려한 깃털 장식과 금제 장신구로 호화찬란하게 차려입은 상태였다. 테노치티틀란의 수십만 시민들이 모두 양 진영의 지도자들이 대로 한복판에서 만나는 걸 지켜보았다.

몬테수마 2세는 그의 형제 쿠이틀라후악, 조카 카카마친과 함께 앞으로 걸어나왔다. 코르테스는 앞으로 나온 황제를 포옹하려 시도했지만, 황제를 함부로 껴안는 건 상상도 할 수 없는 짓이었기에 곧바로 양 옆의 쿠이틀라후악과 카카마친에게 제지당했다. 코르테스는 황제에게 함부로 말을 걸수도, 신체적으로 접촉할 수도 없었다.

양측이 인사를 마치자 황제는 코르테스에게 직접 깃털로 세공한 꽃, 보석이 박힌 금목걸이, 꽃 화환을 씌워주었다. 그런 다음 몬테수마 2세가 직접 코르테스를 여신의 성지로 데려가 좀 더 사적인 인사를 한 다음, 코르테스에게 '내 모든 것은 당신 것이오'라고 말하며 아즈텍 제국의 모든 것을 넘겨준다고 말했다는데 이건 확실하지 않다. 애초에 이 말이 코르테스의 기록에 남아있는 것이기 때문에...

몬테수마 2세는 코르테스 일행에게 아버지 악사야카틀의 궁전을 내어주었다. 코르테스의 스페인 병사들 모두와 일행들 역시 모두 코르테스를 따라 들어와 이 곳에 행장을 풀었다. 잠시 후 몬테수마 2세가 이들을 다시 찾아왔는데, 이 두 번째 만남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이견이 있다. 콩키스타도르의 기록에 따르면 번째 환영인사에서 했던 의례적인 말들을 반복한 다음 스페인 국왕에게 충성을 맹세한 뒤 코르테스를 그의 대리인으로 인정, 자신이 가진 모든 것들을 그에게 넘겨주겠다고 다시 확언했다지만 역시 스페인 측에서 쓰여진 편파적인 기록이라 신뢰성은 딱히 없다.

코르테스는 테노치티틀란의 중앙 피라미드에 있는 우이칠로포치틀리의 우상을 내다버리고 그 자리에 성모 마리아십자가를 세울 것을 요구했다. 당연히 몬테수마 2세가 그 요구를 받아들일 리가 만무했고, 황제는 격노해 다시는 그런 말을 하지말라고 꾸짖었다.


5.8. 붙잡힌 몬테수마 2세[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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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노치티틀란에서 황제와 조우하는 코르테스
한편 저멀리 베라크루스에서는 또 하나의 돌풍이 몰아치고 있었다. 당시 베라크루스 일대는 '쿠알포포카'라는 이름의 아즈텍 지방관들이 지배하고 있었다. 하지만 코르테스가 갑작스럽게 들이쳐 베라크루스 식민도시를 세우고 인근 마을들을 아즈텍이 아닌 스페인에게 귀속시키면서 갈등이 발생했다. 마을 원주민들이 충성대상을 아즈텍에서 스페인으로 바꾸자 쿠알포포카가 이를 못마땅하게 여기고 다시 재정복하려 시도했던 것이다.

쿠알포포카는 아즈텍을 배신하고 스페인에 붙은 마을들을 공격해 불태웠다. 마을들이 스페인에 도움을 청하자 스페인 병사와 아즈텍 군대 사이에서 충돌이 일어났는데, 스페인 병사들이 수적 열세를 이기지 못하고 패배했다. 5명의 병사들이 죽었고 1명은 포로로 사로잡혀 산제물로 바쳐졌다. 쿠알포포카는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한 스페인 병사의 목을 잘라 테노치티틀란으로 보냈다. 병사의 목이 테노치티틀란에 도착하자 도시는 그야말로 뒤집어졌다. 안그래도 촐룰라의 멸망 때문에 민심이 흉흉한데, 자칫하면 테노치티틀란마저도 촐룰라와 같은 꼴이 날 수 있다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소식을 전해들은 코르테스는 몬테수마 2세에게 평화적으로 해결하자는 뜻을 타전했다. 그는 황제에게 자신들의 병영에서 보자고 연락했고, 황제는 1519년 11월 14일 코르테스가 머무는 궁전으로 향했다. 그리고 그 궁전에서 몬테수마 2세는 그대로 사로잡혔다. 코르테스는 이때부터 황제를 사로잡아 완전한 꼭두각시로 부려먹으며 슬슬 아즈텍 제국의 파멸에 시동을 걸기 시작한다.

코르테스는 몬테수마 2세를 협박해 스페인 병사들을 죽인 쿠알포포카를 즉시 죽여버릴 것을 명령했다. 쿠알포포카는 즉시 압송당해 화형으로 비참하게 죽었지만, 코르테스는 이미 사로잡은 황제를 절대 놓아줄 생각이 없었다. 몬테수마 2세는 스페인 병사들에게 사로잡힌 상태에서 도시 사람들이 반란을 일으킬까 두려워했고, 황족들이 자신을 버리고 새로운 황제를 추대할까 두려워했다.

몬테수마 2세는 11월 14일에 사로잡힌 이래로 다음해 5월 말까지 스페인의 포로로 잡혀살았다. 코르테스는 몬테수마 2세가 외견상으로는 여전히 아즈텍의 황제노릇을 하도록 놔두었다. 궁전 바깥을 나갈 수는 없었으나 내부에서는 나름 자유롭게 내버려두었는데, 심지어 코르테스와 게임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굴욕적인 것은 여전했으니 몬테수마 2세는 스페인 국왕에게 제대로 된 '충성맹세'를 해야했으며 제 아버지의 보물을 포함해 테노치티틀란의 금붙이들을 죄다 녹여 코르테스에게 갖다바쳐야했다. 황제를 협박한 코르테스는 테노치티틀란 중앙 신전 꼭대기에 하느님을 위해 바치는 제단을 쌓았다.

스페인 콩키스타도르들이 미친 듯이 금과 보석들을 쓸어가자 아즈텍인들 사이에서는 불만이 치솟았다. 마침내 신관들이 '신들께서 저 침략자놈들을 당장 쫒아내지 않는다면 우리를 떠나갈 것이라고 말하셨다!'라는 예언을 내리며 시민들을 결집시키기 시작했다. 수많은 귀족들이 수도로 집결해 악랄한 약탈자들을 쳐죽일 준비를 하기 시작했지만, 아직 황제가 적들의 손에 잡혀있다는 사실 단 하나때문에 공격을 차일피일 미루고만 있었다.


5.9. 코르테스의 수난[편집]


황제를 손아귀에 넣고 승승장구하는 것 같던 코르테스였지만 계속 좋은 일만 있지는 않았다. 가장 큰 문제는 역시나 벨라스케스 총독에 대한 항명 문제였다. 제 뒤통수를 치고 제멋대로 원정을 떠난 코르테스에게 감정이 좋을 리가 없었고, 벨라스케스는 무려 19척의 함대와 1,400여 명의 대규모 병사들을 보내 코르테스를 사로잡도록 했다. 판필로 데 나르바에스가 함대를 이끌었고 벨라스케스는 코르테스를 죽이든 살리든 상관하지 않았다.

몬테수마 2세는 코르테스에게 19척에 달하는 대함대가 해안에 출몰했음을 알려주었다. 기겁한 코르테스는 가장 행적이 의심스러운 병사들만을 따로 가려뽑아 테노치티틀란에 남겨두고 몬테수마 2세를 감시하도록 했다. 그리고 가장 총애하고 신뢰하는 부하들은 직접 이끌고 나르바에스를 상대하러 갔다. 코르테스는 야간 기습으로 나르바에스를 공격했고, 나르바에스를 애꾸눈으로 만들고 포로로 잡는 대승을 거두었다. 코르테스는 패배한 병사들에게 자비를 베풀었고 병사들은 상당수가 기꺼이 코르테스의 편으로 넘어왔다.

코르테스는 승리 직후 테노치티틀란에서 아즈텍인들의 반란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는다. 톡스카틀 축제 도중 틀락스칼텍 병사들의 이간질로 스페인 병사들이 아즈텍 귀족들을 600명 넘게 죽여버렸고, 이 여파로 대대적인 반란이 일어났다는 것. 자세한 것은 슬픔의 밤 문서 참조. 어쨌든 코르테스는 테노치티틀란에 고립되어있는 스페인 병사들과 하루빨리 합류하기 위해 테노치티틀란으로 쾌속진군했다. 귀환할 때는 코르테스의 병력은 더욱 불어난 상태라 무려 1,300여 명의 병사, 96마리의 말, 2,000명의 틀락스칼라 전사들이 합쳐진 상당한 대군세였다.


5.9.1. 슬픔의 밤[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슬픔의 밤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5.10. 틀락스칼라로 후퇴하다[편집]


슬픔의 밤에서 최악의 피해를 입은 코르테스는 눈물을 머금고 테노치티틀란에서 도망쳐나왔다. 그 많은 인원들이 죄다 흩어졌고 400여 명이 큰 부상을 입었으며 100마리에 육박하던 군마들은 고작 20마리 밖에 남지 않았다. 스페인 병사들은 사기가 크게 수직낙하했다. 아즈텍 제국을 정복하는 게 불가능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병사들이 넘쳐났고 코르테스에게 되돌아갈 것을 요구했지만 코르테스는 쿠바로 돌아가면 항명죄로 죽는 수 밖에 없었기에 단호하게 씹어버렸다.

코르테스 휘하의 틀락스칼라 부하들은 그를 위로했다. '그 강력한 도시를 목숨걸고 탈출한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낙담하지 말라. 이전에도 우리는 그대를 강력한 전사로 생각했으나, 지금은 더욱 강력한 전사로 생각한다'라고 말했다. 코르테스는 틀락스칼텍 부하들의 조언을 받아들여 틀락스칼라로 후퇴했다.

코르테스는 파누코 강의 주둔지로부터 병사들을 끌어와 병력을 보충했다. 또한 쿠바와 스페인 본국으로부터 군사를 보충받으며 전열을 다시 가다듬었다. 본국으로부터의 지원에 의존한 것만도 아니라서 브리건틴 13척을 자력으로 건조했고 대포를 달아 그럴듯한 함대를 구성, 텍스코코 호수를 통해 테노치티틀란을 함락할 계획을 세웠다. 다른 멕시코 부족들과 연합할 의사도 내비쳤지만 이미 슬픔의 밤에서 입은 막대한 피해가 멕시코 전역으로 퍼져나간 상태라 이전만큼 큰 효과는 거두지 못했다. 항명 문제도 빠른 시일 내에 해결하기 위해 부관 '디에고 오르다즈'를 나르바에스의 패잔병들과 함께 쿠바로 되돌려보냈고 또다른 부관 프란시스코 몬테호를 스페인 본국에서 자기를 변호시키기 위해 산토 도밍고로 향하는 배에 실어보내기도 했다.

어느 정도 마음의 평화를 되찾은 코르테스는 겨우 틀락스칼텍 일대를 평정할 수 있었다. 아즈텍 제국이 자행하던 가혹한 인신공양과 밥먹듯이 저지르던 살인강간을 하지 않겠다는 확언을 심어주었던 덕이 컸다. 마침내 대부분의 틀락스칼텍인들이 코르테스를 따라 다시 테노치티틀란을 향해 진군하겠다는 데에 뜻을 모았고, 1520년 크리스마스 경 대략 1만에 달하는 틀락스칼텍 대군이 테노치티틀란 함락이라는 목적 하나로 똘똘 뭉쳐 코르테스의 지휘 아래 모였다.


5.11. 테노치티틀란 함락[편집]



파일:Conquista-de-México-por-Cortés-Tenochtitlan-Painting.png

코르테스에게 함락되는 테노치티틀란
한편 코르테스 일당을 크게 물리친 아즈텍 제국 역시 상황은 매우 좋지 않았다. 가장 큰 원인은 바로 천연두. 콩키스타도르들이 같이 가지고 온 천연두 바이러스에 아무 면역이 없던 아즈텍인들이 속수무책으로 천연두에 죽어나갔던 것이다. 1520년 9월부터 시작된 테노치티틀란의 천연두 유행은 무려 70여일 동안 지속되었다. 슬픔의 밤 도중 죽어버린 몬테수마 2세를 이어 새로운 황제로 즉위한 쿠이틀라우아크마저도 천연두로 사망했을 정도였다.

아즈텍 제국이 천연두에 빠져 정신을 못차리는 사이, 코르테스와 틀락스칼텍 군대는 그 공백을 노려 아즈텍 제국의 도시들을 하나하나 정복해나갔다. 항복하는 도시들은 그대로 받아들였지만 저항하는 도시들은 죄다 불태우고 황금과 부를 노략질했다. 천연두로 취약해진 아즈텍인들은 스페인의 우월한 화력과 틀락스칼텍의 머릿수 앞에 무력했다. 얼마 가지 않아 아즈텍 제국에 남은 유일한 도시는 수도 테노치티틀란과 또다른 도시 '틀랄텔롤코' 뿐이었다.

테노치티틀란을 제외한 대부분의 도시들이 함락되자 코르테스는 본격적인 테노치티틀란 공성전에 들어갔다. 먼저 호수 위에 떠있는 테노치티틀란과 육지를 잇는 둑을 끊어버렸고, 미리 건조한 함선들을 텍스코코 호수에 띄워 테노치티틀란을 해상봉쇄했다. 봉쇄전은 무려 8개월 동안이나 지속됐다. 스페인 병사들은 테노치티틀란의 식량, 식수 공급을 끊어버렸고[16] 테노치티틀란은 기아와 굶주림에 시달리며 콩키스타도르들과 싸워야만 했다.

새로운 황제 콰우테목은 정말 완강하게 싸웠다. 하지만 완강한 저항에도 불구하고 8개월 동안 고립된 상태로 싸우다보니 한계가 찾아왔다. 1521년 8월 13일 결국 테노치티틀란과 틀랄텔롤코는 함락당했다. 콰우테목은 몰래 도시를 빠져나가려다가 사로잡혔다.

함락당한 테노치티틀란은 잔혹하게 능욕당하고 약탈당했다. 가장 큰 이유는 8개월 동안 테노치티틀란이 지나치게 완강하게 저항했던 탓이었다. 코르테스는 공성전 도중 여러 차례 외교적인 방법을 동원했지만 테노치티틀란은 번번이 거부했다. 게다가 불리한 상황에서도 그 인신공양 풍습만큼은 죽어도 버리지 못했던지 사로잡은 스페인 병사 70명의 심장을 산 채로 도려내어 대놓고 코르테스 측을 도발했다. 이 행동은 콩키스타도르들을 극도로 격분시켰고, 결국 이 행동의 대가는 테노치티틀란의 함락 이후 참혹한 약탈로 되돌아오고야 만다.

코르테스는 도시에 입성하자마자 주신전의 아즈텍 우상들을 당장에 끌어내리고 십자가성모 마리아 상을 세웠으며, 다시는 인신공양과 식인이 이 곳에서 벌어지지 않을 것을 선포했다.[17] 테노치티틀란이라면 치를 떨던 틀락스칼텍 병사들과 기존 피정복민들은 테노치티틀란을 거의 완벽히 파괴했다. 궁전, 신전은 물론 심지어 일반인들의 거주구역까지 죄다 무너져내렸다. 어느 정도 원주민들이 분을 풀자 이제는 스페인인들이 나서서 스페인 식민지풍의 도시, 즉 미래의 멕시코 시티의 기반을 닦았다. 살아남은 아즈텍인들은 테노치티틀란에 사는 것이 금지되었으며 틀랄텔롤코로 강제추방당했다. 이로써 아즈텍 제국은 177년 만에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6. 스페인 정복 이후[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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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례받는 원주민들
당시 포토시 은광의 모습
아즈텍 제국을 정복한 스페인 제국은 아즈텍인들을 스페인 행정체계 내에 착착 편입시켰다. 1524년 '인도 왕립 최고 위원회'[18]가 구성되었고 1527년에 첫 '오디엔시아', 즉 항고법원이 만들어졌다. 1535년 카를 5세는 스페인 귀족 카를로스 멘도사를 초대 총독으로 임명했다. 새롭게 정복된 영토는 코르테스가 제안한 '뉴 스페인'이라는 명칭을 그대로 사용했다. 총독 벨라스케스의 명령을 때려쳤던 코르테스와는 달리 멘도사는 스페인 본국에 대단히 충성적이었다. 애초에 카를 5세가 그를 초대 총독 자리에 임명한 이유가 그거였기도 하고.

아즈텍 제국 자체는 1521년 8월 테노치티틀란의 함락과 동시에 붕괴했지만 그 사회구조와 조직, 사람들은 멀쩡히 남아서 존재하고 있었다. 처음부터 멕시코 원주민들의 모든 것을 갈아엎을 역량은 없었기에 스페인 식민정부는 일단 어느 정도 수준의 자치는 허용했다. 아즈텍 시대의 공물제도, 세수, 사회구조, 귀족 작위, 지배 엘리트 등은 그대로 유지되었으며 다만 공납 대상만이 아즈텍 정부에서 스페인 정부로 바뀌었을 뿐이었다.

스페인은 토착 귀족들을 그대로 인정해주며 지역 안정을 꾀했다. 모든 귀족들에게는 스페인식으로 '돈', 여귀족은 '도나'라는 칭호를 하사받았다. 원주민 귀족들은 스페인어를 배우기 시작했고 스페인 수사들은 사람들에게 스페인 알파벳을 쓰는 방법을 가르쳤다. 이는 곧 원주민 사회 내부에서 자생적인 전통이 되었고 원주민들은 빠르게 스페인 식민사회의 일원으로 편입됐다.

원주민들의 융화에 가장 큰 역할을 한 건 뭐니뭐니해도 프란치스코회도미니코회의 수사들이었다. 그들은 원주민들에게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 직접 나우아틀어를 배웠다. 수사들은 1571년 나우아틀어 - 스페인어 사전을 만들 정도로 포교에 열심이었고 성경 전체를 번역하지는 못했으나 일부 짤막한 기도문이나 단락 같은 것들은 나우아틀어로 번역해서 원주민들에게 배포하기까지 했다. 다만 16세기 후반에 식민정부와 프란치스코회 중앙수도원 차원에서 나우아틀어로 성경을 번역하는 건 이단에 가깝고 원주민들에게 하느님의 뜻을 왜곡해서 전할 우려가 있다고 비판하면서 거의 사라진다.

아즈텍이라는 거대한 제국을 정복했으니 스페인 사람들에게 막대한 보상을 내릴 차례였다. 스페인 왕실은 스페인인들이 현지의 막대한 원주민 노동력을 마음대로 쓰도록 허가했다. 명목상으로는 노동력을 구매하고 임금을 지불하는 형식이었지만 사실상 현지인들을 강제노동으로 착취하는 방식이었다. 즉, 현지인들 입장에서는 아즈텍이라는 기존 권력층이 사라지자 스페인이라는 더욱 가혹하고 교묘하게 착취하는, 지배층만 교체된 것에 불과했다. 스페인 사람들이 어찌나 원주민들을 쥐어짰는지 곳곳에 죽어자빠지는 원주민들이 넘쳐났고, 원주민들의 수가 수요를 감당못할 수준으로 감소하자 심지어 흑인 노예들을 해외에서 수입하기까지 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아즈텍의 압제로부터 다른 부족들을 구해준 에르난 코르테스 역시 아즈텍이나 아즈텍에 가담한 고위 관리들, 기독교로 개종하지 않고 고유의 신을 믿고 예식을 거행한 사제들을 우상숭배의 죄목을 물어 잔인하게 죽이기도 했다. 아즈텍 귀족들을 개에게 물어뜯게 하여 잔인하게 죽이는 코르테스

스페인 최대의 젖줄은 바로 포토시 은광이었다. 현재의 볼리비아에서 발견된 세계 최대 규모의 은광이었는데, 스페인으로 유입된 부의 대부분이 바로 여기서 나왔고 한때 전세계 은 생산량의 90%를 생산하는 미친 채굴성을 보여줬다. 다만 이후 스페인이 개신교 개혁운동에서 가톨릭의 편을 들며 대대적인 전쟁을 벌이고, 오스만 제국의 유럽 침공을 막기위해 용병을 고용하며 막대한 비용을 허공에 날리면서 이 태산같이 쌓아놨던 부는 허망하게 사라졌다. 게다가 스페인은 그 많은 은을 상당수 중국으로부터 사치품을 사오는 데 썼는데, 이때문에 포토시 은광에서 캐낸 은 상당수는 중국으로 블랙홀처럼 빨려들어갔다.

아즈텍의 교육 시스템은 제한적이고 폐쇄적인 교회 교육으로 축소됐다. 아마란스와 같이 기존 메소아메리카에서 종교적으로 중요하게 여겨졌던 음식은 아예 금지당했다. 가톨릭 선교사들은 스페인 전역에서 아즈텍 문화 철폐 운동을 벌였고 메소아메리카 전통 문화는 빠른 속도로 사라졌다. 16세기에 무려 24만 명에 달하는 스페인 사람들이 멕시코로 이민을 왔고 17세기에는 그 2배 가까운 45만 명이 왔다. 북미의 영어권 개척자들이 자기들끼리만 결혼을 하며 어느 정도 백인 피를 유지한 것과는 달리, 멕시코로 이민온 멕시코 이민자들은 태반이 독신의 젊은 남성이었고 이들은 대부분 원주민 여성들과 결혼했다.[19] 이러한 결과로 멕시코 지방에서는 메스티소라고 알려진 백인과 원주민 혼혈들이 인구의 대다수를 차지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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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치코모즈톡이라고 불렀다.[2] 이 설화가 유명하긴 하지만 이 내용은 디에고 두란을 제외하면 대부분의 사료, 특히 원주민들의 사료에서는 나오지 않고, 메시카인들이 콜후아칸의 공격을 받았다고 설명한다. 또한 아즈텍의 제1대 틀라토아니인 '아카마피치틀리'의 부모 중 모친은 콜후아족 공주 출신이었으니, 메시카인들이 콜후아족 공주를 인신공양했다는 것은 어디까지나 상징적인 표현이거나, 후술될 치말쇼치틀과 우이칠리우이틀의 인신공양이 와전된 것에 불과할 가능성이 높다.[3] '아즈텍'이라는 이름은 후세 역사가들이 붙인 이름으로 본인들은 스스로를 아즈텍인이라고 부르지 않았다.[4] 이때 활용한 게 바로 '치남파스 농법'이다. 얕은 습지에 배수로를 건설해 물을 뺀 다음, 말뚝을 박아 사각형의 구획을 만들어 덩굴로 단단하게 묶어 고정시켰다. 그 안에 호수 바닥에서 퍼낸 비옥한 진흙과 수풀을 층층이 쌓았다. 어느 정도 형태가 만들어지면 그 위에 버드나무를 심는다. 이렇게 하면 나무 뿌리가 호수 바닥까지 파고들어가 침식을 막을 수 있었다. 비료로는 거주민들이 생활하면서 나오는 음식물 쓰레기나 분변을 재활용했다.[5] 다만 타라스칸 역시 상황이 썩 좋지는 않았다. 아즈텍 제국의 북서쪽 확장은 막아냈으나 타라스칸도 큰 피해를 입었다. 이후 타라스칸은 확장보다는 국경 요새화와 아즈텍 제국에 대한 경계 위주 정책으로 전환하며 수세로 들어갔다. 이후 타라스칸은 1522년 콩키스타도르에게 평화적으로 항복하며 살아남는 듯 하였지만, 결국 왕은 반역죄가 씌워져 처형당하고 스페인에게 병합당했다. 그래도 평화적으로 합병된 덕에 아예 인구가 쓸려나간 다른 도시들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원주민 문화가 짙게 남아있을 수 있었다.[6] 이 장례식은 스페인이 당도하기 전 메소아메리카에서 가장 거대한 규모의 장례식이었다.[7] 익스틀리소치틀은 훗날 코르테스의 친구가 되었고, 기독교로 개종한다음 온두라스 정복을 돕는 등 누구보다 스페인을 위해 싸웠다. 그러나 아즈텍의 압제에 시달리던 피정복민들은 되려 익스틀리소치틀을 자신들을 구원해준 위대한 영웅으로 여겼다.[8] 사실 우에소칭고는 그를 사로잡고 싶어했지만, 틀라카우에판이 잡히는 것보다 차라리 전장에서 희생하는 걸 더 명예롭게 여기며 죽여달라고 부탁하자 어쩔 수 없이 죽였다고 한다.[9] 사실상 마야인들 앞에서 읊은 것에 가깝다. 마야인들은 그걸 이해하지도 못했고 스페인의 보호를 받는다는 것, 근대적인 조약의 의미가 정확하게 어떤 의미인지 몰랐다.[10] 그는 마을을 빠져나오기 직전, 자신과 함께 살던 또다른 스페인인 게레로에게도 같이 갈 것을 제안했다. 그러나 게레로는 이미 현지인 마을에서 결혼해 3명의 아이가 있었고, 마을 내에서 고위직을 차지하고 있어서 거절했다. 게레로의 운명은 불확실하지만 아마 스페인 군대와 맞서 싸우다가 전사한 것으로 추정된다.[11] 굳이 코르테스가 이런 귀찮은 작위를 맡은 이유는 벨라스케스의 권위에서 벗어나기 위해서였다. 베라크루스의 개척자가 되면 쿠바의 개척자 벨라스케스와 권한이 어느 정도 비슷해지기 때문에 벨라스케스와 명목상으로는 동급자가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부 콩키스타도르들은 이 성과를 보고하기 위해 스페인 본국으로 돌아가기도 했다.[12] 이 원주민들은 멕시코 해안지대의 덥고 습한 기후에 익숙해져 있어서, 춥고 우박이 내리는 테노치티틀란 일대의 기후에 얼어죽을 뻔했다고 한다.[13] 물론 당시 틀락스칼라인들이 가톨릭의 교리와 개종의 뜻을 진짜 알고 하지는 않았다. 그냥 틀락스칼라의 토착 만신전야훼라는 새로운 신을 하나 더 추가했을 뿐이다.[14] 이 피라미드는 아직도 남아있다. 세계에서 가장 거대한 피라미드이기도 하다. 다만 생각하는 것과는 달리 위로 높이가 높은 건 아니고, 기단이 압도적으로 넓어서 얕고 넓은 형태의 피라미드다.[15] 사실 이건 논란의 여지가 많다. 스페인과 틀락스칼라 측은 촐룰라가 실제로 스페인 병사들을 죽이려 시도했다고 기록했으나, 촐룰라 측의 기록에는 몬테수마 2세로부터 그런 명령을 들은 건 사실이지만 실행할 생각은 없었다고 써있다. 아즈텍을 극렬히 증오하던 틀락스칼라인들이 일부러 촐룰라인들의 말을 왜곡해서 코르테스에게 전달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16] 호수 한복판이라 왜 식수가 부족한지 의아할 수도 있겠지만, 텍스코코 호수는 석회질이 매우 강해 식수로 마시면 탈이 난다. 그래서 아즈텍의 역대 황제들이 가장 신경썼던 것들 중 하나가 테노치티틀란에 신선한 식수를 공급하는 것이었다.[17] 스페인 병사들은 아즈텍에게 산 채로 사로잡히면 정말 상상도 못하는 개죽음을 당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절대 항복하지 않고 말그대로 죽을 각오를 다해서 싸웠다.[18] 당시만해도 스페인 사람들은 아메리카가 인도인 줄 착각하고 있었다.[19] 초기에는 이사벨 1세 여왕이 스페인 남자와 원주민 여성들의 통혼을 장려하기도 했을 정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