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치슨 라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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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애치슨 라인.jpg
애치슨 라인의 대략적인 모습[1]
1. 개요
2. 애치슨의 연설 내용
3. 애치슨 선언의 배경
4. 전개
5. 영향
5.1. 일각의 남침유도설 주장
5.2. 트루먼 독트린과의 관계
6. 대중매체



1. 개요[편집]


애치슨 라인(Acheson line)은 1950년 1월 12일에 미국국무장관이던 딘 애치슨(1893~1971)이 선언한 미국의 극동 방위선이다. 애치슨은 워싱턴 내셔널 프레스 클럽에서 열린 전 미국 신문기자 협회에 참석하여 <아시아의 위기>라는 제목으로 연설하면서, 소련중국의 영토적 야욕을 저지하기 위한 미국의 극동 방위선을 재확인하는 발언을 했다. 여기서 그는 태평양에서 미국의 극동 방위선을 알류샨 열도 - 일본 - 오키나와 - 필리핀을 연결하는 이른바 '애치슨 라인'을 발표한다.


2. 애치슨의 연설 내용[편집]


애치슨의 <아시아의 위기> 연설중에서, 애치슨 라인을 선포하는 부분이다.

What is the situation in regard to the military security of the Pacific area, and what is our policy in regard to it?

In the first place, the defeat and the disarmament of Japan has placed upon the United States the necessity of assuming the military defence of Japan so long as that is required, both in the interest of our security and in the interests of the security of the entire Pacific area and, in all honour, in the interest of Japanese security. We have American and there are Australian troops in Japan. I am not in a position to speak for the Australians, but I can assure you that there is not intention of any sort of abandoning or weakening the defences of Japan and that whatever arrangements are to be made either through permanent settlement or otherwise, that defence must and shall be maintained.

The defensive perimeter runs along the Aleutians to Japan and then goes to the Ryukyus. We hold important defence positions in the Ryukyu Islands, and those we will continue to hold. In the interest of the population of the Ryukyu Islands, we will at an appropriate time offer to hold these islands under trusteeship of the United Nations. But they are essential parts of the defensive perimeter of the Pacific, and they must and will be held.

The defensive perimeter runs from the Ryukyus to the Philippine Islands. Our relations, our defensive relations with the Philippines are contained in agreements between us. Those agreements are being loyally carried out and will be loyally carried out. Both peoples have learned by bitter experience the vital connections between our mutual defence requirements. We are in no doubt about that, and it is hardly necessary for me to say an attack on the Philippines could not and would not be tolerated by the United States. But I hasten to add that no one perceives the imminence of any such attack.

So far as the military security of other areas in the Pacific is concerned, it must be clear that no person can guarantee these areas against military attack. But it must also be clear that such a guarantee is hardly sensible or necessary within the realm of practical relationship.

Should such an attack occur… the initial reliance must be on the people attacked to resist it, and then upon the commitments of the entire civilised world under the Charter of the United Nations which so far has not proved a weak reed to lean on by any people who are determined to protect their independence against outside aggression. But it is a mistake, I think, in considering Pacific and Far Eastern problems to become obsessed with military considerations. Important as they are, there are other problems that press, and these other problems are not capable of solution through military means. These other problems arise out of the susceptibility of many areas, and many countries in the Pacific area, to subversion and penetration. That cannot be stopped by military means…

딘 애치슨, National Press Club, 1950. 1. 12


Speech on the Far East - CIA CIA 정보공개법 전자자료실, 연설 전문은 PDF 3페이지 분량이다

DEAN ACHESON’S ‘PERIMETER SPEECH’ ON ASIA (1950) 조금 요약한 버전

ACHESON'S SPEECH TO THE NATIONAL PRESS CLUB 많이 축약한 버전

해리 트루먼 도서관, Remarks by Dean Acheson Before the National Press Club

애치슨 라인 밖의 지역이 침략당했을 때에는 안보를 보장해주지 않는 것을 명백히 하며, 그러한 안보 보장은 합리적이지도 필요하지도 않다고 말했다. 만약 침공이 발생하면 그들이 스스로 저항해야 하고, 유엔 아래 문명세계 차원에서 지원해야 하며, 태평양과 극동지역에서의 문제에 군사적 해결책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말했다.

이로 인하여, 애치슨 라인 밖의 지역은 침공당해도 미군이 개입하지 않으며, 국제연맹 마냥 경제제재나 부과하고 비난 성명이나 내겠다는 의미로 해석될 여지를 남겼다.


3. 애치슨 선언의 배경[편집]


1949년 8월, 미국중국학자 오웬 래티모어(Owen Lattimore) 교수는 미 국무성의 위촉을 받고 제출한 남한 정책의 보고서에서 이렇게 기술하였다.[a]

남한은 미국의 이익과 정책에 있어 자산이 아니라 부채이다. 오늘날 남한의 대한민국 정부가 어느정도 지속될 것인가는 의문시되며, 따라서 미국은 너무 깊게 들어가지 않는 것이 좋다.


이 의견서는 1950년 4월 미국 국무부에 의해 공포되었으며, 래티모어는 수일 후 상원에 출석하여 한국에 대한 원조 중지를 주장하였다. 비슷한 시기 미국의 국가안전보장회의는 1949년 12월 결의에서 "만약에 공산군이 남한에 대하여 무력 침입을 행하더라도 미국은 남한에 지상군을 파견하지 않을 것이다."라 의견을 밝혔다.[a] 이처럼 당대 미국 정부는 여전히 한반도에서 얻을 지정학적 이익이 거의 없다고 판단하였으며[2], 오히려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난 직후 도래한 냉전의 긴장 속에서 소련이 태평양 방면으로 눈을 돌리는 것을 염려하여 대한민국에 충분한 무기도 제공하기를 꺼렸다. 미국의 국무장관 딘 애치슨의 선언은 이러한 미국 조야와 국무부의 분위기 속에서 발표되었다.

흔히 이 선언을 통해 한반도, 타이완 섬, 인도차이나 반도가 애치슨 라인에서 제외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하지만 보다 정확히는, '포기한다' 라기보다는, 미국에 반드시 방어할 의무가 없다는 것이었다. 이는 연설문 원본에서도 알 수 있는데, 당시 애치슨이 소위 '애치슨 라인'을 가리키며 쓴 단어는 '방어선'이 아니라 '방어적 주위(defensive perimeter)'이다. 당시 애치슨 선언에 당황한 이승만은 장면 주미대사에게 조속히 애치슨과 접촉하도록 했으나, 애치슨이 의회 출석으로 부재중이라서, 윌리엄 버터워스(William Butterworth) 국무부 북동아시아 담당 차관보를 대신 만났다. 이승만은 한국을 애치슨 라인에 포함시켜달라고 요구하는 편지를 보냈으며, 한국 외무 장관이 주미 대사에게 해명을 요구했다. 미국은, 한국이 반드시 지켜야 할 가치가 없어서 애치슨 라인에서 제외된 것이, 한국의 방위를 포기하는게 아니라면서 원조를 약속했다. 이후 1950년 1월 26일 ‘대한민국정부와 북미합중국정부간의 상호방위원조 협정’이 체결되었으며, 1950년 2월 10일, 미국 의회는 한국 원조 법안을 통과되면서, 한국도 안심하게 된다.##

또한 애치슨 라인 안에 들어간 지역을 보면 모두 미군이 직접적으로 관할할 수 있는 지역이다. 알류샨 열도는 미국령이었고, 필리핀은 당시 미국으로부터 막 독립한 신생국이었다.[3][4] 일본은 국권회복 이전으로 연합군 점령하에 있었다. 반대로 한국의 경우 독립국인데다 자국의 군대도 있었기 때문에 애치슨 라인 안에 포함되었다면 오히려 국제적으로 큰 문제가 생겼을 것이다. 같은 이유로 섬임에도 불구하고 독립국이었던 타이완 역시 애치슨 라인에서 빠졌다.

본래 애치슨 라인의 진정한 목적은 국제분쟁 발생 시 미국 육군이 즉시 지원할 수 있는 범위를 한정한 것이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후 미국 정부는 세계 대전을 2번이나 연속으로 치뤘으므로 당분간 큰 전쟁이 일어날 가능성은 낮다고 여겼고, 현실적으로도 이를 부담스럽게 생각했다. 그로 인해 전후 급속히 군비를 축소하였고, 그로 인해 한국전쟁 발발 직전에 이르러서는 미군군기나 장비 상태가 엉망이 되었다.[5][6][7]

이러한 상황에서 미국의 절대적인 방위선으로 책정한 것이 애치슨 라인이었고, 애치슨 라인 밖의 지역은 안 지켜도 되는 지역이 아니라 직접적인 병력 주둔이 없어도 방어가 가능한 지역으로 간주한 것이다. 당시 제독의 반란 사건 등에서 볼 수 있듯이 당대에는 항공모함도 필요없다고 간주하고 핵무기전략 폭격만으로도 충분히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다는 인식이 지배적이었다. 그래서 군부 역시도 비슷한 안건을 주장한 바 있지만 애치슨 라인 때문에 묻히고 말았다.[8]

당시 미국의 유럽 외 지역에 대한 무지도 고려해야 한다.[9] 1950년 1월 당시 구미 서방의 관점에서 제대로 근대화되었다고 할만한 군대는 동아시아 지역에선 사실상 전무했다. 그나마 근대화에 근접했던 일본군은 미군에게 처절하게 털린 끝에 아예 해체되었고, 미국이 지원해준 중국 국부군은 부정부패 끝에 고작 치하 따위가 중장비의 전부인 알보병 중공군에게 대륙을 포기하고 대만으로 도주하는 실정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미국이 딴에는 미국식 훈련 프로그램과 미국제 장비로 무장을 시켜주고 미군 고문이 직접 자문을 해주는 한국군 정도면 서방의 입장에서는 동아시아 신생국 치고 그럭저럭 괜찮은 군대로 평가할 수 있었다.[10] 이에 대하여 반론하자면, 이미 미국은 웨드마이어 보고서를 통해서, 북한군의 전력이 한국군을 압도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애치슨 라인 선언의 진정한 의미는 라인 밖의 비(非)공산국가가 공산군의 침공을 받았을 경우, 해당 국가가 적국의 공격을 막아내며 버티는 동안 미국은 유엔을 통해 해당 국가에 도움을 준다는 것이다. 애치슨을 변호하는 입장에서는 이것이 결코 공산군의 침공에 저항하는 라인 밖의 비공산국가를 가만히 내버려두겠다는 의미가 아니었다고 본다. 그러나 비판적으로 보자면, 애치슨 라인 안쪽 지역들에 대한 안보 보장과는 어조가 완전히 다르며, 애치슨 연설에서 군사적 해결책은 부적절하다고 말하면서, 미군이 참전해서 개입하지 않는다는 취지로 말했다.

애치슨이 연설한 시점에서 미국 국무부가 가진 한국 관련 현안은 미국 의회에서 계류 중인 한국 원조법안을 통과시키는 것이었다. 그런 이유로 애치슨 선언 이후 북한에서 나온 발표의 내용은 "조선반도식민지화하려는 미제국주의자를 비난한다'였다. 즉 원조법안이 중요했다는 것. 그런데 당시 미국 의회는 극도로 예산 감축에 혈안이 되어 있었기 때문에 듣도 보도 못한 신생국을 위한 직접적인 군대 파견과 같이 대규모 자금이 투입되는 정책 실시를 기피하고 있었다. 다만, 원조물자들이 한국에 도착하는 시기들이 좀 미묘하다.

이러한 상황에서 발표된 애치슨 선언이 내포하는 의미란, 신생 대한민국은 미국이 약간의 원조금만 주면 자기 스스로 국가를 방어할 수 있다는 메세지를 미국 의회에 보내는 것이었으며, 결국 한국 원조법안은 의회에서 통과되었고 애치슨은 이걸 자랑스러워했다. 하지만 한 달 뒤에 한반도에서는... 한국 정부 역시 이승만 대통령이 감사전문을 보내고 외무장관이 환영을 표하는 담화를 발표했는데, 이것은 국방비를 포함한 정부 예산 일체를 아직 미국 원조에 의존하고 있던 2년차 정부가 의례적으로 한 말이지 한국이 군사적으로 자립하겠다는 뜻은 당연히 아니었다.

여하튼 애치슨 라인은 실질적 의미는 적지만 그 당시 북한에게 사기 진작이 되는 명분을 주었고, "미국이 한반도를 비롯한 아시아 지역에 대해 자세한 파악을 하지 못했다!"라는 인상을 주어 한국 침공에 자신감을 가지게 하였으므로 까여도 어쩔 수 없다. 애치슨 선언의 의미를 군사적 관점에서 보자면 결국 미국은 한반도 유사시 이에 대응할 유의미한 전력을 갖춘 지상군을 신속 투입할 생각도 계획도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게 중요한 게, 수천 수만의 인원이 장비를 다 갖추고 이동하는 것은 흔히 양판소에서 지도자의 말 한마디에 군대가 바로 움직인다는 설정과 달리 현실에서는 불가능하다. 어떤 부대부터, 어떻게 이동시키고, 이에 대한 보급은 어떻게 하고 등 사전에 치밀하게 계획을 세워야 실제로 움직이는 게 가능하다. 그래도 실행과정에서 혼란이 발생하고 일정이 지연되는 등의 문제가 발생하는 게 다반사다.[11] 실제로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제대로 준비하지 못한 채 급하게 투입된 스미스 대대 및 이들의 상위부대인 미 24사단이 대평리-공주 전투에서 전력을 손실한 채 치른 대전 전투에서 참패한 것도 급하게 투입되느라 전력을 다 갖추지 못한 것이 한 이유다. 평시에 작계를 만들고, 심지어 비밀로 꽁꽁 감춰두는 게 괜히 그런 게 아니다.

간단하게 설명하면, 2차대전 이후 일본은 사실상 미국 군정의 식민지였으므로 미군 입장에서 애치슨 라인의 의미는 대만과 한국은 중국의 영향력 아래 있는 전쟁터로 판단, 군시설을 집중시키지 않고 전쟁터의 배후지로는 과거 식민지였던 필리핀(대만의 배후지)과 현재 식민지인 일본(한국의 배후지)을 활용한다는 전략을 선언한 것이다. 또한 애치슨 라인에 일본, 필리핀은 지리적 위치상 태평양과 바로 직결되었고 아무리 군축 바람이 불어도 그것은 곧 하와이와 미국 본토로 직결되는 문제인데다 일본은 본토를 지킬 육군도 없었으니 미 육군이 직접 투입해서 공산권의 태평양 진출을 저지할 필요가 있어서 포함시킨거고 대한민국, 대만, 남베트남은 태평양하고 직결되지도 않았고 일본과 필리핀이 배후에 있으니 미국은 해공군만 지원하고 육군은 현지에서 잘 훈련시키면 된다는 판단으로 제외시킨 것이다. 여기서 미국 정부와 미국 군부의 입장이 달라지는데 정부는 정상화 정책으로 2차대전 이전으로 군대 규모를 감축하기 위해 완전 철수를 원했고 군부는 즉각 반격 규모의 병력 유지를 주장했다.[12]


4. 전개[편집]


애치슨은 오늘날까지도 한국인들에게 '한국의 포기를 주장했다'는 부정적인 이미지를 얻고 있는 것은 물론, 자국인 미국 내 보수 진영에서도 6.25 전쟁과 공산 진영 확대의 주범이라는 욕을 바가지로 먹고 있다. 46년에만 해도 한반도에는 미 육군이 주둔하고 있었고 M7 프리스트M18 헬캣 같이 T-34에 유효타를 줄 수 있는 장비까지 있었지만, 모두 다 빼버리는 바람에 한국은 부산 앞까지 밀려버리고, 나중에 투입된 미군의 피해 또한 커졌다. 실제로도 1950년 말에는 의회결의 형식으로 국무장관직에서 쫓겨날지도 모를 위기를 겪었고, 죽을 때까지 보수파들에게 자신의 연설을 변호해야만 했다. 한국에서의 악명이야 둘째치고 미국에서도, 6.25 전쟁 동안 미국은 엄청난 군비를 썼고 만단위 사상자가 났으며, 외교전략을 고쳐 일본과 독일을 완전히 청소하지 못한 채 재무장시켜야 했고[13], 이 전쟁과 전후처리 동안 소련과 중국을 대등하게 인정할 수밖에 없게 되었으니, 어쩌면 그 선 하나 때문에 그 전쟁이 일어났을 지 모른다는 가능성만으로도 애치슨이 좋은 소리를 들을 수 없다.

덤으로 애치슨은 제2차 세계 대전의 영향으로 파괴된 일본의 회생을 앞당긴 구원투수로 지목받았다.[14] 그가 야기한 전쟁을 지원하기 위해 일본에 군수품 생산을 하청해 벌어들인 달러가 일본의 전후복구에 큰 밑거름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일본과 더불어 독일의 재군비도 이 전쟁이 빌미가 되었는데 유럽 주둔 미군까지 한반도로 차출돼 전력공백을 채워야 했기 때문에 추축국이었던 독일은 1955년, 정식으로 군대를 보유하게 되었으며 일본에도 상당한 수준의 재무장을 허용해주어야만 했다.

게다가 애치슨은 미국 국내만 아는 정치가가 아니라 유럽 방면에 대해서도 넓은 지식과 훌륭한 인식을 가진 정치가라 더욱 비극적이다. 한마디로 말해서 국제정치 전반에 무감각한 사람은 아니라는 것. 당장 마셜 플랜이나 서유럽의 재건, 소련 블록의 확대 방지나 북대서양 조약 기구의 창설 등 트루먼 행정부의 외교정책의 주요 업적은 사실 애치슨의 머리에서 나왔던 것이다. 오히려 서유럽에서 그는 서유럽의 구원자라는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상대적으로 (일본을 제외한) 아시아에 대해서는 무지하고 무관심했던 것이 큰 화근이 되었고,[15] 이렇게 유럽에 상대적으로 더 관심이 있고 아시아에는 한국, 일본 및 남베트남을 제외하면 그다지 관심이 없는 미국의 외교정책은 이후 냉전/탈냉전 시기 내내 지속되어 왔다. 그나마 한국에 제대로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 것도 6.25 전쟁 이후였다.

아이러니하게도 현 미국의 패권정책을 기반을 다져놓은 게 이 사람이고, 오히려 한국 덕분에 미국이 구해졌다고 발언했다고 한다. 당시 국무부가 NSC-68을 제안했으나, 트루먼과 국민들이 받아들이지 않았다가, 6.25로 인해서 공산권의 침략전쟁이 확인되면서 전폭적인 지지를 받아 통과됐기 때문이다.[16]

2006년 동북아시아 평화포럼 참석차 방한한 리처드 아미티지 전 전 미국 국무부 부장관은 김대중 전 대통령과 만나 "애치슨 라인은 미국과 소련이 38선을 그어 분단이 되고 전쟁이 일어났으며 당시 미국은 한국을 미국 방위선인 애치슨 라인 밖이라고 해서 북한의 오판을 가져왔다"고 밝혔고 이에 아미티지 장관은 "은혜를 모른다는 것은 잘못됐다며 당시 미군 철수가 조기에 이루어졌고 애치슨 라인도 실수였다"고 전해졌다.기사

최근에는 중국이 부상하고 대한민국과 대만이 미국의 동북아시아의 중요 동맹국이 되자 미국정계는 하마터면 애치슨 때문에 중요 동맹국이 날아갈 뻔 했다고 보기도 한다.[17]

정리하자면, 6.25 전쟁의 근본적 및 직접적 요인은 북한의 남침 및 적화통일 야욕이었으나, 그 요인의 기저요인 중 하나는 미국의 애치슨 라인 선언으로 인한 북한의 오판 촉발인 만큼 미국도 책임에서 완전히 자유롭진 못하다.[18]

5. 영향[편집]


애치슨 선언 이전까지 김일성의 전쟁요구는 스탈린에게 계속 거절당했었고, 애치슨 선언 이후에 김일성이 다시 스탈린을 찾아가서 전쟁을 승인받았다. 김일성은 1949년 3월에 처음으로 한국전쟁을 제안했으나 스탈린은 이를 거절했었다. 스탈린은 애치슨 선언 이후인, 1950년 1월 30일 처음으로 김일성의 계획에 동의를 표했고, 1950년 3월과 4월에 있었던 김일성과의 회담에서 미국의 참전 여부와 마오쩌둥의 참전 여부 등을 검토한 후에 최종적으로 전쟁을 승인했다.

1월 30일 스탈린은 드디어 김일성에게 “나는 김일성을 도울 준비가 되어 있다.” 그러나 “남한과 관련해 김일성이 도모하고자 하는 일은 매우 심각한 문제이므로 철저한 준비가 돼 있어야 한다.”라고 알려왔다. 스탈린은 여전히 남한문제와 관련한 미국의 개입 가능성이 소련을 위험하게 할 수 있다고 우려하고 있었기에 “심각한 위기가 발생하지 않도록 이 문제는 잘 계획돼야 한다.”고 덧붙였다.

김일성과 북한 외무장관 박헌영은 3월 하순 소련 군사고문들과 공격 계획을 논의하기 위해 모스크바를 방문했다. 스탈린은 미국이 아시아 본토에서 군사개입을 배제한다는 새로운 극동정책을 채택했다는 정보국의 보고를 주된 근거로 승인을 해주었다. 이런 정확한 정보에 근거해서 소련의 지도자는, 북한이 남한을 공격한다 해도 미국이 남한을 위하여 전쟁에 개입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결론지었다. 스탈린은 “국제정세의 변화”가 이제는 무력에 의한 한반도의 통일을 가능하게 한다고 생각했다. 첫 번째의 변화는 1949년 10월 중국공산당의 승리로 중국 군대가 필요한 경우 한반도에 참전할 수 있다는 것이다. 게다가 중국에서 공산당의 승리를 막지 못한 미국이 훨씬 득이 적은 한국을 위해 싸우지 않을 것이라는 판단이었다. 또 다른 “국제정세의 변화”는 전 달에 체결된 모스크바와 베이징의 방위동맹으로 인해 미국이 “아시아의 공산주의자들에 대한 도전에 좀 더 소극적이게” 만들었다고 스탈린은 생각했다.

자신의 논지를 강화하기 위해 스탈린은 “미국에서 수집한 정보에 의하면 그것은 사실이며 현재 전반적인 분위기는 미국이 개입하지 않으려는 것이다.”라고 덧붙였다. 스탈린의 발언은 1949년 12월 말경 채택한 NSC 48이라 불리는 미국의 새로운 동아시아 전략정책에 대해 언급한 것으로 보인다. 그는 소련이 워싱턴에 심어놓은 고위급 영국인 스파이 도널드 매클린(Donald McLean)을 통해 그 정책을 숙지하고 있었다. 어쨌든 1월 12일 국무부장관 딘 애치슨(Dean Acheson)은 내셔널 프레스 클럽(National Press Club)에서의 연설을 통해 새로운 정책을 발표했다. 이 발언은 NSC 48의 내용을 공식화한 것이었다. 중화인민공화국의 설립과 제2차 세계대전 종식 후의 군대해산으로 인해 가동할 수 있는 군대동원 능력이 제한되었기 때문에 아시아에서의 미국의 방위선을 일본과 아시아 본토, 그리고 필리핀과 아시아 본토 사이의 동쪽으로 한정하기로 결정함으로써 새로운 “방위선(defensive perimeter)”에서 한반도를 제외시켜버렸다.

스탈린은 워싱턴의 새로운 동아시아 전략정책이 그 지역에 힘의 공백을 만들었다고 보았고, 그 공백을 매우기 위해 재빠르게 움직였다. 1950년 1월 첫 주에 스탈린은 동아시아에 대한 자신의 정책을 전부 바꿨다. 1월 6일 스탈린은 마오쩌둥에게 연락해 동맹을 맺자고 제의했다. 마오쩌둥이 지난 12월에 모스크바를 방문했을 때 스탈린은 이 동맹에 대해 주저했었다. 이러한 메시지는 1월 12일 국무부장관 딘 애치슨이 내셔널 프레스 클럽에서 연설하기 이전에 마오쩌둥에게 전달됐다. 그래서 시기적으로 봤을 때 스탈린이 1월 6일 이전에 매클린으로부터 NSC 48의 실체에 관해 들었을 것으로 추론할 수 있다.

...

김일성은 1949년 3월에 처음으로 남한에 대한 침공을 제안했으나 스탈린은 이를 거절했다. 스탈린은 전쟁을 단기간에 끝낼 수 있고 미국이 개입 안 한다는 보장이 있어야만 남침이 허용될 것이라는 점을 분명히 했다. 돌이켜보면 이러한 스탈린의 염려는 결과적으로 옳았다.

그러나 1949년 10월 중국공산당의 승리로 미국의 의지가 약화됐고, 중국이 필요시에 한반도에 개입할 수 있게 됐다. 또한, 미국에 심어놓은 스파이를 통해 미국의 대 아시아정책의 소극적 태도 전환을 간파했고, 이러한 확신은 애치슨 라인의 천명으로 더 강해졌다. 그래서 한반도에서의 군사도발이 신속하게 진행되고, 미국이 즉각적으로 개입하지 않을 것이란 확신하에 스탈린은 전쟁을 승인했다.

북‐중‐소 삼각관계가 6ㆍ25전쟁 과정과 전후 북한외교 행태에 미친 영향 :기밀해제문서를 중심으로,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 2010, vol.33, no.3, 통권 120호 pp. 117-142 (26 pages) #


박명림의 저서 <한국 전쟁의 발발과 기원>을 근거로 당시에 발행된 《로동신문》 1월 15일자에서 북한은 애치슨 라인에 한국과 대만, 일본, 필리핀이 모두 포함된다고 보고 있었다는 주장이 있다. 그러나 북한 노동신문이 미국의 아시아 방위선에 한국이 포함된다고 인식한 것은 오보로 인한 착각이었다. 이후 로동신문 2월 10일자에서는 애치슨 라인에서 한국이 제외되어 있다고 제대로 보도한다. 또한 김일성이 애치슨 선언을 미국이 한국을 포기한다고 이해하고 흥분했다는 증언이 있다.

3) 남과 북의 반응

1950년 1월 6일자 대한민국 국무회의의 내용을 통해서 드러난 바와 같이 미국은 개입하지 않을 가능성이 많다는 것이 당시 대한민국의 우려 섞인 주도적인 관측이었다. 그런데 북한은 1950년 1월 25일자 로동신문 에서 애치슨라인에 남한이 포함된다고 적고 있다.이것은 뉴욕타임즈 의 오보 때문이었다. 애치슨은 1월 12일 내셔널프레스클럽에서 연설하면서 연설문 사본을 배포하지 않았으며 기자들은 자신들의 메모에 의존해 기사를 작성했기 때문에 정확히 쓸 수 없었다. 뉴욕타임즈 1월 13일자에는 한국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대신 1월 15일자에는 점령하의 일본, 한국, 오키나와, 필리핀이 방위선에 포함된다고 명시했으며 자국민들의 직접적 책임 하에 있는 지역은 동남아시아라고 적었다. 이는 명백히 오보였다. 이에 장면 대사는 애치슨에서의 연설에 대한 이승만의 감사를 전했다. 그런데 북한은 로동신문 2월 10일자를 통해 “미국은 일본, 필리핀, 그리고 琉球열도를 통제할 것이라”고 언급하면서도 남한이 방위선 바깥에 위치하고 있음에 관해서는 아무런 언급을 하고 있지 않으므로 애치슨방위선에 대한 정확한 인식에 도달해 있음을 보여 주고 있다. 그런데 로동신문 1950년 3월 3일자와 10일자에는 “애치슨 연설은 거짓말과 선동으로 가득 차 있어 아시아의 민족해방투쟁에 대한 전쟁을 준비한 의도를 숨기는 시끄러운 합창”이라고 비난해 일견 미국의 개입을 예견하는 듯한 뉘앙스를 풍기고 있으나 이는 북한 특유의 반미적 태도를 보여준 것에 불과하다고 평가할 수 있다. 한때 김일성의 ‘직속기자’ 였던 한재덕에 의하면 북한의 중앙통신사가 미국 뉴스통신사의 전문들을 정기적으로 녹음했는데 애치슨연설도 유선통신문으로 채록되어 자신이 직접 김일성에게 전달했다는 것이다. 이에 김일성을 비롯한 북한의 지도자들이 크게 흥분했다는 증언인데 아마 한국이 미국의 방위선에서 제외된다는 것에 고무되었다는 맥락으로 추측된다.

한국전쟁 발발 직전의 상황: 내전설과 남침유도설에 대한 비판적 조망, 이완범, 한국역사연구회, 역사와 현실, 2006, vol., no.62, pp. 377-397 (21 pages) #

다만, 사실 스탈린은 미국이 개입하리라는 것을 간파하고 있었으면서도 전쟁을 승인했고, 오히려 미국이 한반도에 개입하길 희망했다는 분석도 있다. 이름하여 소련의 미국개입유도설이다. 조지워싱턴 대학 교수인 리처드 쏜턴에 의하면, 미국은 NSC-68을 위해서, 애치슨 라인으로 김일성의 오판을 촉발해서 남침을 유도했고, 스탈린은 이런 미국의 남침 유도를 간파하고 오히려 역이용하기로 했다. 미군을 동아시아 한반도 지역의 장기 소모전에 묶어놓고, 소련은 유럽의 공산주의 확산에 집중한다는 것이다. 스탈린은 전쟁 승인의 조건으로 김일성에게 마오쩌둥의 참전 약속을 받을 것을 요구했는데, 이는 잠재적 경쟁자인 중국을 미국과 이이제이 시키기 위한 계략이었다는 것이다.


5.1. 일각의 남침유도설 주장[편집]


한국전쟁이 터지자마자 미군이 곧바로 파병되었다는 점에서 애치슨 라인 선언이 공산권을 전쟁에 끌어들이기 위한 떡밥이었다고 주장하는 일부 유사역사학자들이 있다. 그러나 전쟁이 발발하기 1년 전쯤 쓰여졌다가 몇년 전 공개된 미국 기밀문서에 따르면, 미국 정부는 하루빨리 주한미군을 철수시키기로 이미 합의해놓은 상황이었고, 실제로도 1949년 6월 26일 철수했다. 미국 군부는 한반도의 가치를 낮게 평가하고 빨리 철수하고 싶어했는데, 미국 국무부는 한반도에서의 조기 철수에 반대했다. 미국 국무부와, 군부의 맥아더 파벌이 한반도의 수호를 주장했다.

참고로 남침유도설을 주장을 하는 사학자들이 모두 종북주의자들이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은데, 보수 인사들이 이런 주장을 하는 경우도 의외로 많았다. 대개는 원망과 한탄조 내지는 미군도 못 믿는다 정도의 뉘앙스지만. 1990년대 초중반까지 남침유도설 주장이 재야와 대학가에 퍼졌는데, 이건 강대국들의 외교 문서가 공개되지 않던 냉전기의 연구를 바탕으로 한 수정주의 역사학자들의 주장을 받아들인 것이다.

미국은 정작 이승만 대통령이 대한민국 국군을 무장시킬 무기를 지원해 달라고 졸라댔을 때도 전차같은 무기를 주면 한국이 그 무기 가지고 북한 침공할까봐 두려워 방어적인 용도로 사용할 무기만 지원하였다. 당시 이승만은 매번 북진통일을 외쳐 댔는데, 아시아보다는 유럽에 더 신경을 쓰고 싶었던 미국 정부는 혹시나 일어날 말썽을 사전에 차단하려 했다. 덤으로 당시 한국은 빨치산 토벌과 38선상에서의 국지전에서 북한을 상대로 그럭저럭 불리하지 않은 전투를 하고 있었다. 문제는 북한군이 전차를 가졌으니 전차를 보급해달라는 등, 당시 중국과 소련을 통해 물자와 병력 보충을 받던 북한 사정을 근거로 한 이승만의 국군 전력 강화 요구 자체는 올바른 것이었지만, 이이 대한 제대로 된 근거를 제시하지 못했고 이전에도 잦은 과장을 일삼았기 때문에 미국은 그것을 억지 또는 착오로 여겼다는 것이다.[19] 그런데 이승만은 계속 북진통일을 강력하게 주장했다. 애치슨은 1954년의 한 세미나에서 "만약 대한민국이 확고한 보장을 받았더라면 더 도발적이고 호전적으로 변했을 것"이라고도 말했다.

1949년 6월 미군 철수가 흔히 ‘미국의 한국포기’처럼 비춰지고 있지만 이는 너무 피상적인 해석이다. 군부의 철군주장은 무조건적인 즉각적 철수였지만, 국무부와의 타협을 거치면서 실행된 철군은 여러 보완조치가 선행된 조치였다. 군부는 1945년 9월 진주시부터 가용병력의 부족과 한반도에 대한 전략적 가치의 저평가(低評價), 전쟁이 이미 끝났음을 들어 진주자체에 반대하였으며 이후로도 계속 철군을 주장했다. 하지(John R. Hodge)사령관의 경우 초기에는 계속 철군을 주장하였지만, 북으로부터의 위협을 현장에서 감지하고 나서는 철군이 막상 구체화되었을 시점부터 국무부의 입장에 동조했다. 즉 철수일정을 연기시키고 한국에서 내부적인 안정을 기하려는 계획을 지지하면서, 외부침략에 대처하기 위해 남한의 국방력에 보다 적극적인 군사원조가 제공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특히 1949년 중국이 넘어간 이후 미 국무부는 한반도에 대한 전략적 가치 인식을 보다 적극적으로 고려하게 되었다.

2) 애치슨이 선을 그은 의도

그런데 1950년 1월 애치슨라인 설정에 의한 한반도의 제외 결정이 ‘미국의 불개입’ 함정을 파놓았다는 가설에 설득력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후일 애치슨은 한국에 대해서 아무런 언급이 없었을 뿐 한국을 포기한다는 공약을 한 적은 없었다고 주장했다. 애치슨의 연설을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미국의 극동 방위선은 알류산 열도, 일본 본토를 거쳐 류큐(오키나와 섬)로 이어진다. …… 방위선은 류큐(오키나와 섬)에서 필리핀으로 연결된다. …… 이 방위선 밖에 위치한 나라의 안보에 대해서는 군사적 공격에 대하여 아무도 보장할 수 없다. 만약 공격이 있을 때에는 …… 제1차 조치는 공격을 받은 국민이 이에 저항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연설은 바로 뒤에 만약 방위선 바깥의 지역에 대한 공격이 이루어진다면 “우선은 공격받은 국민들이 그에 저항해야 하지만, 그 다음에는 유엔헌장 아래에서 전체 문명세계가 개입”할 것이라는 내용이 이어진다. 애치슨이 한국의 포기하지 않았다는 사후 설명은 실제로는 남침을 유도했으면서도 ‘발뺌’하기 위해 거짓을 얘기했거나, 아니면 남침을 야기시킨 결과에 대해서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는 ‘변명’일 수 있다.

애치슨의 의도는 미국이 대륙에서의 군사충돌을 회피하고 중국 내전에 개입하지 않으며 남한과 국민당이 유엔의 지원으로 자체 안보를 해결해야 한다는 것이었지만 표현은 부주의했다. 스탈린과 모택동은 우회화법을 읽지 못했던 것이다.

그런데 실제로 5월 초 상원 외교위원장 톰 코널리(Tom Connally)는 유에스 뉴스 앤드 월드리포트 지와의 회견에서 “한국의 위치는 중요하지 않고” 애치슨라인 이외의 한반도에 관련된 라인은 필요하지 않다고 명백히 말했다. 즉 오키나와·필리핀을 연결하는 미국의 방위선에 한국은 제외되며 한국을 포기하는 것이 검토되고 있는 것으로 관측된다고 말했다. 또한 소련이 언제나 마음만 먹으면 대만을 점거할 수 있듯이 쉽게 한국을 정복할 수 있다고 부기했다. 코널리는 워싱턴의 정책결정자들이 이러 저러한 일이 일어나면서 우리를 전쟁에 나가게 만들 사건이 교묘히 만들어질 것이라고 믿고 있다(They believe that events will transpire which will maneuver around and present an incident which will make us fight)는 유도설을 연상시키는 언어도 구사했다. 이에 대해 애치슨은 5월 3일 기자회견을 통해 코널리의 견해를 정정할 것을 공개적으로 거절했으므로 애치슨의 후일 주장은 발뺌일 가능성이 있다. 코널리의 회견이 전해지자 한국 언론들은 민감하게 반응했다. 5월 9일 이승만은 코널리의 회견이 “공산주의자들에게 남한으로 쳐들어와서 점령해 버리라고 노골적으로 청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an open invitation to the Communists to come down and take over South Korea)고 비난했다.

따라서 애치슨라인이 북의 오판을 어느 정도 야기시켰을 가능성은 있다. 리차드 닉슨은 1980년에 발간된 책에서 “북한이 애치슨의 의도된 왜곡 발언에 오판했다”고 평가했다. 또한 애치슨은 1951년 맥아더 청문회에서 버드(Byrd) 상원의원이 “미훈련이며 장비도 형편없는 군대를 그곳에 남겨 둔 것은 한마디로 공격에의 초대(an invitation for an attack)가 아니었는가”라고 질문했을 때, “그 점은 당신의 말이 맞는 것 같다”(You may be right about that)고 대답했다. 물론 애치슨라인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은 아니었고 철군이후의 상황에 대한 언급이었지만 이 발언이 남침야기에 대한 애치슨의 ‘최대한 인정’이었다. 애치슨은 1970년에 발간한 회고록에서 “이것이 내가 1950년 1월에 던진 경고였고 침략자가 소홀히 한 경고였다” 고 말해 자신은 침략을 하지 말라고 경고했을 뿐 침략을 유도한 것은 아니라고 회고했다. 그런데 위의 증언을 심층적으로 볼 때 애치슨라인은 커밍스의 주장처럼 대만 제외에 의한 대중(對中) 화해 제스처와 중·소 이간 의도에서 발표된 것이 아니라 분명 ‘북한에 대해 어떤 메시지를 주기 위해서’ 발표된 측면이 있었다. 그 메시지가 침략 말라는 경고이건 아니면 침략 유도이건 간에 말이다. 그런데 침략을 말라는 경고를 하면서 알류샨 열도, 일본, 오키나와, 필리핀 등의 명시적 방위선에서는 빼고 태평양의 다른 지역(물론 한국을 이 지역으로 분류한다는 명시적인 구절은 없다)으로 분류한 것은 심상치 않은 것이었다. 이 지역의 군사적 공격에 대한 저항은 일차로 공격받는 주민들에 의존해야 하며 그런 연후에 상황이 재평가되어 유엔에 의존할 수 있을 것이라고 소극적으로 언급되었다. 이것은 롤백 보다는 봉쇄를 선호한 애치슨이 봉쇄의 원칙을 언술한 것이었다고 해석할 수는 있다. 그런데 경고라고 하면 “한국을 방위할테니 침략하지 말라”는 명시적인 구절이 포함된 상태에서 하는 것이 상식적이지 않을까? 그러나 애치슨은 경고의 특성에서 보여지는 ‘과장되고 높은 톤’의 목소리로 얘기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남한은 유엔이 방위할 수 있다’는 소극적인 언사를 구사했다. 이는 남한의 도발을 막기 위한 소극성의 발로라는 해석도 있을 수 있지만 여기에 ‘침략을 초대하려는’ 숨은 의도가 있지 않을까 하는 의심을 품게 한다. 후일 애치슨의 공화당 정적 들 특히 맥카시(Joseph McCarthy)는 공산주의자들에게 공격하라는 ‘파란 불’(a green light for aggression)을 보냈다고 비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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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매트레이는 북한이 미국의 불개입을 예상했기보다는 오히려 개입의 정도가 깊어질 것을 우려하여 더 깊어지기 전에 남침을 도발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미국의 군사원조가 성공하여 남한이 확고하게 안정될 것(미의 개입 전술 성공)을 두려워하여 이것이 달성되기 전에 전쟁을 개시한 것이라는 추론이다. 즉 철군으로 조성된 힘의 공백이 장래의 더 큰 개입을 막기 위한 호기를 제공했다는 것이다. 북한은 미국의 직접적 무력개입은 예상하지 못했지만 군사비 지원 등의 간접개입은 예상했다고 매트레이는 해석했다. 한편 1950년 5월 중순 덜레스의 남한 국회에서의 연설과 이승만과의 회담, 38도선 시찰 등 일련의 행위에 대해 북한 지도부는 미국의 대한정책이 새롭게 개입의 방향으로 기울어지고 있다고 평가해 이를 막기 위해 선제공격을 했다는 주장도 있다.

5) 전쟁 직전 미국의 한국 방위 확인

그런데 미국 국무부는 모든 위험상태를 계산에 놓고 정책을 시행하였으며 당시 북한으로부터의 위험을 의식하여 남한을 안정시키려는 목표아래 무력을 사용하지 않는 간접개입을 확대해 나아갔다. 트루먼은 1949년 6월 19일 의회가 대한원조를 승인해 준다면 미국은 아시아 전역에 평화와 민주주의를 실천할 주요 조치들을 취할 수 있을 것이라고 자신 있게 주장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한반도는 공화국(한국)이 실천에 옮기고 있는 민주주의의 이념과 원칙들이 북한 주민들에게 부과되고 있는 공산주의 통치와 서로 맞붙어 경쟁을 벌이고 있는 하나의 시험장이다. 공화국의 생존과 자립적이며 안정된 경제로의 발전은 전체 아시아인들에게 지대한 그리고 지속적인 영향을 미칠 것이다. 미천한 공화국의 이러한 발전은 남아시아와 동남아시아 그리고 태평양 도서민들을 고무시켜 자신들을 에워싸고 있는 공산주의 선전에 대항하여 이를 물리칠 수 있게 할 것이다. 나아가 대한민국은 민주주의의 성공과 또한 공산주의에 대항하는 민주주의의 저력도 아울러 보여줌으로써 자신들을 유린한 공산세력의 손아귀로부터 벗어나려는 동아시아인들의 등대가 될 것이다.

즉 한반도는 무력에 의존하지 않고 봉쇄를 실행하는 봉쇄정책(containment policy)의 시험 케이스(test case)였다. 실제로 1950년 선거가 민주적으로 치러져 정치적 안정이 달성될 수 있었고 재정위기도 호전되고 있었다. 또한 1950년 6월 1일 트루먼은 미 의회가 예정된 군사원조를 승인하기만 하면 “이승만 정부가 북에서 감히 침략할 엄두조차 못 낼만큼 강해줄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나아가 6월 17일 38선을 시찰한 애치슨 국무장관의 개인 특사 덜레스(John Foster Dulles)는 6월 19일 한국 국회에서 “만일 공격을 받는다면 미국은 한국을 방위할 것”이라고 다소 도전적인 어투로 공언했다. 이것이 오히려 ‘이승만과의 북침공모’나 즉각적 개입을 위한 시나리오, 북침 혹은 남침유도음모를 은폐하기 위한 위장예측, 공격할 자의 덮어씌우기 예언 등으로 해석되지만 증거가 부족한 실정이다. 따라서 방위공약은 단순한 허풍이거나 ‘예상하지 못한 적중’이 되어 버린 것이다.

만약 김일성이 덜레스의 발언을 주목했다면 남침시 적극적 개입이 있으리라는 것을 예상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에 주목했다는 증거는 없다. NSC 8(철군주장; 1948년 4월 2일)이 초래했던 공백이 NSC 68(방위비증가와 주변지역에서의 Rollback; 1950년 4월 14일)의 등장으로 메워지려 했을 때 전쟁이 일어났다.

덜레스공약과 NSC 68에 의거, 미국은 예견된 즉각 개입의 시나리오를 진행시켰다. 애치슨라인에 입각해 본다면 6월 19일의 덜레스공약과 즉각 개입이 정책의 역전현상을 보여주는 것이었다고 해석할 수 있다. 롤백을 주장하는 강경론자 덜레스와 봉쇄-국제주의를 교묘하게 혼합하면서 공화당의 차이나로비에 맞섰던 애치슨은 물론 대비되는 면도 있다. 그러나 미국은 철수와 무력개입이라는 양극단적인 정책대안을 모두 고려하면서 어느 중간지점에서 정책을 수행하였으며 한번도 ‘포기’한 적은 없었다. 방위선에서는 제외되었지만 유엔에 의해 설립된 대한민국에 대한 ‘유엔의 보호’는 어느 정도 암시적으로 보장되어 있었던 것이다. 특히 중국공산화 이후 무력개입 쪽으로 접근되어 가고 있었으며, 6·19(덜레스공약)와 6·25에 의하여 무력개입전략으로 집약되었다.

한국전쟁 발발 직전의 상황: 내전설과 남침유도설에 대한 비판적 조망, 이완범, 한국역사연구회, 역사와 현실, 2006, vol., no.62, pp. 377-397 (21 pages) #


즉 엄밀히 말해서 애치슨 선언에서는 한국을 '포기' 하지는 않았으나, 그렇다고 한국의 안보를 보장하지도 않았고 유엔에서 처리하도록 하였다. 게다가 상원 외교위원장 톰 코널리는 진짜로 '포기한다' 라고 말했었고, 한국이 애치슨 라인에서 제외됨으로 인하여, 전쟁 발발시 유엔에서 비난성명이나 하면서, 미군의 개입은 없고, 군수물자나 간접지원할 것 같은 가능성을 내비추었고, 이는 김일성이 미군 개입 이전에 속전속결로 적화통일을 하면 된다는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5.2. 트루먼 독트린과의 관계[편집]


나는 자유민들이 그들 자신의 방식으로 그들 자신의 운명을 결정하고 개척하도록 우리가 도와야만 한다고 믿습니다(I believe that we must assist free peoples to work out their own destinies in their own way). 47년 3월 미 의회, 트루먼 출처##

트루먼 독트린한반도의 운명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게 되는데 해리 S. 트루먼은 공산주의를 막기 위해 그리스와 터키에 대한 경제원조 개시를 역설했다. 당시 국무장관은 조지 C. 마셜이었는데,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소련과의 동맹을 위해 노력했던 마셜은 이제 소련과의 정면대결이 불가피하다고 보았다. 트루먼 독트린에 대한 미 상원의원 청문회에서 국무차관은 딘 애치슨이었다. 그는 트루먼 독트린을 한국에도 적용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한국을 방어해야 할 또 하나의 나라라고 언급하였다. 그러나 이에 대해 많은 상원의원들은 경악했다. 왜냐하면 미국이 영원히 끝나지 않을 극동(Far East)전쟁에 개입하게 될지 모른다는 우려 때문이었다.

흥미로운 점은 딘 애치슨은 통념과 달리 한반도에 대해 무지하지도 무관심하지도 않았다. 마셜과 애치슨은 의회에 그리스와 터키의 경제원조 금액은 각 4억 달러를 요청했지만 한국에 대한 경제원조 금액은 6억 달러를 요청했다. 미국의 입장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한국을 포기해서는 안 된다는 점이었다. 당시 한반도는 미국과 소련이 직접 대치하는 곳이었으며, 두 체제(regime)가 실험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3년 뒤 애치슨은 기존 트루먼 독트린에 비해 한 걸음 뒤로 물러난 문제의 애치슨 선언을 발표한다.


6. 대중매체[편집]


대체역사소설스탈린의 편지에서는 애치슨 라인을 그은 것까지는 똑같지만 스탈린이 트루먼에게 비밀 회담을 제의하면서 맥아더의 해임이 취소되고, 그날 밤 애치슨은 분노에 찬 채로 폭음을 하고 바로 다음 날 과로로 인해 심장마비로 사망한다. 그리고 존 포스터 덜레스[20]가 새로운 국무장관이 되고 맥아더가 6.25 전쟁의 작전권을 계속 가지게 되면서 미국은 아시아 중심의 외교/국방정책 노선으로 전환한다. 덕분에 애치슨은 사후에도 비난받는다.

드라마 야인시대 80회에서 잠깐 언급된다. 유진산과 전진한, 김두한의 대화에서 미국이 발표한 태평양안전보장선에서 대한민국을 제외하고 일본, 필리핀 일대를 설정했다고 말했다. 즉, 김일성이나 소련군, 중공군이 쳐들어와도 미국은 관심이 없다는 뜻으로 말한다[21]. 그리고 그 다음회인 81회에서 6.25 전쟁이 발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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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쿠릴 열도에 대해서는 애매하다. 샌프란시스코 조약에 따라 소련이 점유하기는 했으나, 이후 미국은 1953년경 소련에 대해 '샌프란시스코 조약을 곡해하여 수용하지 말라' 면서 그 예시로 일본의 북방 영토를 들기도 했다.[a] A B 許政, 《雩南 李承晩》, 太極出版社, 1970, p. 309-310[2] 만약 소련이나 미국이나 한반도가 그렇게 중요했다면 애초에 분단이 될리도 없었을 것이다. 소련에게 한반도가 중요했으면 미국의 저항에도 기어코 제주도까지 밀고 내려왔을 것이며, 미국 또한 오키나와하지가 아닌 북지의 웨드마이어 장군을 곧장 한반도로 투입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즉, 두 강대국 모두 소련은 만주, 미국은 일본을 중요하게 여겼지 한반도는 전혀 그렇지 못했기에 결국 반으로 쪼개진 것이다.[3] 이 때문에 미군 사령관인 맥아더가 일본이 필리핀을 점령하기 전까진 미군 소속 필리핀군 고문직이었다.[4] 또한 독립 직후부터 맺은 몇차례의 조약을 통해 상당수의 미군이 주둔하고 있었으며 확고한 친미국가였다. 태평양에서 미국이 가장 먼저 맺은 상호방위조약이 미비상호방위조약인 것은 이유가 있다.[5] 이는 데이비드 핼버스탬의 논픽션 <콜디스트 윈터(The Coldest Winter)>에 자세히 나와 있다.[6] 심지어 6.25 전쟁이 터지자 미국은 기지에 "기념물"로 둔 M26 퍼싱 전차까지 가져왔다고 한다. 당시 군축 탓에 보급이 시원찮아서 극동군에서 오키나와 등에 유기물자를 회수하여 부품으로 이용할 정도로 열악했던 것. 그 얼마 안 되던 퍼싱조차 일본 내 공장에서 급조하여 만든 저질 부속품 때문에 한국에 상륙한 뒤 얼마 안 가서 퍼져나가 전차병들이 환장했다고...[7] 미국은 아니지만 6.25 전쟁에 참전한 캐나다의 경우에도 유엔 결의에 따라 파병하게 되었을 때 파병할 상비전력이 본토에 없어 새로이 지원자들을 모집해 부대를 편성, 훈련시켜서 한국으로 보냈을 정도였다. 당시 캐나다 참전용사 중 한분의 이야기를 다룬 국내 다큐에서 나온 내용이었다. 허쉬 가(家)의 둘째가 먼저 파병되었는데 얼마후 큰형도 자원입대해서 한국에 왔고 같은 중대에 속했지만 형제들은 이를 몰랐다고 한다. 그러다가 중공군과의 격전에서 간신히 적을 막고 전사자들을 옮기는데 동생이 형의 시신을 발견했고 이게 트라우마가 되어 평생을 괴로워하던 동생은 나중에 별세하면서 부산의 UN군 묘지에 안장된 형과 함께 묻어 달라고 유언했고 결국 대한민국 국가보훈처까지 이 사례가 전해져 동생의 유골이 형과 함께 안장되게 되었다. 본래는 배우자만이 허용되는데 동생도 6.25 전쟁 참전용사였기 때문에 가능했던 걸로 보인다.[8] 미 공군은 핵무기와 폭격기만 있으면 만사가 해결되므로 해군이 퍼먹는 예산이나 좀 줄이고 자기들 잘 봐달라는 식으로 홍보하고 있었으나 해군은 이에 반발하여 제독들의 반란이 발생하는 등 미군 내에서도 우여곡절이 많았다.[9] 뉴욕이나 워싱턴 D.C.같은 미국의 심장부가 동부에 위치해 있고 유럽은 미국의 동부지역에서 대서양만 건너면 도착하는, 태평양 너머의 아시아보다 지리적으로 소련의 위협에 가끼이 노출된 상태다. 더구나 미국의 다수이자 주류를 이루는 미국 백인들은 유럽에서 아메리카로 건너온 유럽계 사람들이다. 때문에 미국은 아시아보다 유럽에 대한 위협을 보다 심각히 여기는 것이다.[10] 6.25 전쟁 초기에 백선엽, 김종오 등 좋은 성과를 거둔 명장들의 성공 비결 중 하나도 미군 고문과의 원활한 소통이었다.[11] 출동을 목적으로 설치된 119나 파출소/지구대조차 장비 갖추고 지원 요청하고 하는 데 시간이 걸린다. 하물며 병사 개인이 40kg을 짊어지고 가야하는(이건 창칼 쓰던 시대도 마찬가지) 군대가 출동하는 것은 말할 나위가 없다. 긴급한 연락이 왔을 때 직장이든 집에서든 1분 안에 준비해서 현장에 갈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12] 결과적으로 군부의 입장이 맞았던 것으로 판단되면서 군부의 영향력이 커지고 케네디 때는 "미국에는 화이트 하우스와 펜타곤이라는 2개의 정부가 있는 것 같다"고 불평을 터뜨릴 정도까지 갈등이 심화됐다.[13] 다만, 세간의 인식과 달리 실제론 재무장 및 전범 청산 등은 이미 2차 국공내전 무렵부터 진행되었다.[14] 사실 국공내전에서 국민당이 수세에 몰리면서부터 일본의 재무장재벌 부활이 이미 계획중이었다.[15] 사실 애치슨 입장에서는 억울한 것이, 당시 미국 정부나 미국 의회, 미국 정보부에서도 아시아, 특히 한반도에 대한 정보가 빈약했다. 지금이야 들 때문에 백악관 내에서도 아시아 전문 자문관들이 배치되어있지만 당시는 현재 21세기같은 동아시아 정세가 형성되기 한참 전이었기 때문.[16] 2차 대전 종전 후로는 미국은 군축을 지속했으나 이 때 기점으로 군비 확장에 들어갔다.[17] 물론 이는 결과론이긴 하다만 만일 대한민국과 대만이 공산화되었다면 미국은 그야말로 일본과 필리핀 둘로 미국의 최후 방어선을 삼아야 하는 악몽과 같은 시츄에이션에 처해졌을 것이다. 설상가상으로 몇년 후엔 이 사건마저 터지고 말았으니 필리핀도 위태로왔기는 마찬가지였을지도 알 수 없다. 동남아까지 공산화할 위급한 상황에 대한민국이 이미 공산화된 이후였으면 결국 남은 건 일본 뿐이었을 텐데 그에 대한 막대한 비용을 치뤄야 했을 것을 생각한다면 이만큼 미국에게 악몽이 될 일은 없다.[18] 고위급 인사가 공식적인 자리가 아닌 사적인 자리에서 생각없이 던지는 말도 논란이 우후죽순으로 생겨나는 판국인데 애치슨 라인은 공식적으로 선언까지 해버렸으니 비판이 안나올래야 안 나올 수가 없다.[19] 가령 이승만은 미국에게 북한이 해주에서 서울까지 포격이 가능한 대포 4문을 보유하고 있다고 주장했는데 그 거리는 70km가 넘는다. 미국 또한 이 사실을 지적하면서 말이 안되는 소리라고 반응했다.[20] 대일강화조약을 주도한 외교통으로 아시아 우선 전략을 주장했고 강경한 반공주의자였다. 실제로는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정부에서 국무장관이 된다.[21] 물론 앞서 서술했듯이 이는 실제 역사와는 다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