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천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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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영천읍성 전투
3. 한국전쟁 영천·신녕 전투


1. 개요[편집]


본 문서는 영천에서 일어난 전투를 다룬다.


2. 영천읍성 전투[편집]


임진왜란정유재란 전투 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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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음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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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朝]: 조선군의 승리 / [日]: 일본군의 승리 / [明]: 명나라군의 승리



영천복성 전투
시기
1592년 7월 26일~28일 (음력)
장소



조선 경상도 영천군 읍성
(현 경상북도 영천시 성내동)
원인
일본군의 전라도 진공
교전국
조선 파일:조선 어기.svg
일본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1920px-Goshichi_no_kiri_inverted.svg.png
지휘관
권응수
권응평
이은수
권사악
최진립
불명
병력
3500명~4000명 추정
약 1000명
피해
전사자 80명, 부상자 230명
900명 이상 사상, 수십명 도주[1]
결과
조선군의 승리
영향
일본군 보급로 교란 및 차단, 경상좌도 및 동해안 영향력 회복과 안전 확보


임진왜란 당시 벌어진 영천성 탈환전. 조선관군-의병 연합군이 공성작전을 성공시켜 일본군을 격파하며 성을 탈환했다. 이는 임진왜란 최초의 공성전 승리라고 한다.

당시 영천성은 원래 관아와 객사, 군기창 같은 것들은 있었어도 읍성은 없었던 곳이나, 일본군이 쳐들어올 조짐이 감지되었던 것인지 1591년에 축성되었다고 하며, 결국 개전 이틀만에 경주와 영천에 일제히 쇄도해 들어온 대규모 일본군 주력부대에게 순식간에 무혈점령 당하고 만 상태였다.

이를 함락 약 석달만에 격파하고 탈환한 것이다. 이때 먼저 영천성 공성전을 위해 포항, 경주, 의성, 청송 방면에서 영천으로 연결되는 모든 일본군의 보급로를 싹 차단한 뒤, 7월 23일 최초 당도하여 정찰을 벌인 후, 7월 24일엔 주력부대가 접근해 와서 영천성 기준 강 바로 건너편, 영천 남측 완산뜰에 부분 임시목책 형태로 진을 치고 공성준비를 하며 권응평[2]이 약 500명 규모의 기병대를 끌고 성을 한바퀴 빙 돌며 강행정찰한 후, 25일 자정을 넘기자 마자 탐색전을 벌여 성밖으로 튀어나온 일본군들을 상대하던 권응수가 왜장 한명을 사살해 냈고, 25일 아침엔 영천성과 같은 높이가 되도록 목책에 토벽을 추가하여 보강, 이후 나뭇가지와 쇳조각을 폭약과 함께 집어넣은 일종의 세열 수류탄인 질려통을 제작하였으며, 26일에 본 공세에 돌입, 남쪽의 주력부대가 동서남 방향을 포위공격하며, 형 권응수가 말을 타고 성 위의 일본군들을 계속 사살해 대자, 일본군이 이를 역습하려 병력을 내보냈으나 이걸 동생 권응평과 이은수가 나서 쓸어버렸고, 이후 북쪽 마현산 자락의 의병대가 방화를 통한 화공과 연막차장을 동시에 실시하여 일본군을 눈도 못뜨게 만들고, 남문이 포격을 얻어맞고 파괴되어 길이 열리자, 도끼를 들고 닥돌까는 권응수를 따라 관군-의병 연합군이 성 안에 쇄도하였고, 백성 1090명 가량을 구출하고 잔적소탕을 하던 과정에서 연합군이 던진 질려통에 일본군 탄약고가 유폭해버렸다. 이후 최후의 왜군 장수를 처단함으로서 전투는 조선의 승리로 끝났다.[3]

참고로 이 전투에서 조선군은 1583년 개발된, 개발된지 9년밖엔 안된, 당대 조선군 최신 개인화기인 수평쌍대식 화승산탄총, 쌍자총통을 사용하였다고 한다. 총열 하나에 3발짜리 산탄이 들어갔다고 하며, 총 6발이 일제히 날아갔다고 한다. 임진왜란 과정에서 더 성능이 좋은 조총이 도입되자 도태되었다.


3. 한국전쟁 영천·신녕 전투[편집]


항목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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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수급이 500과 정도 되었다고 한다.[2] 권응수의 동생으로, 형제 둘 다 영천성 전투에 참전했다.[3] 이 왜군 장수의 이름은 법화라고 전해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