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14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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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조선 중기의 문신.
2. 생애[편집]
1496년(연산군 2년) 음력 4월 19일에 태어났다. 아버지는 연산현감을 지냈던 이보간이다.
1525년(중종 20년)에 사마시에 합격하고 3년 뒤에 문과에 급제하면서 관직 생활을 시작했다. 승문원 권지와 예문관 검열 등을 거쳐 병조와 예조의 좌랑을 지냈고, 명나라에 서장관으로서 다녀오기도 했다. 이후에도 사헌부 지평, 호조 정랑, 홍문관 교리 직을 맡았으며 홍주목사 및 담양군수를 역임하는 등 지방관으로서 선정을 베풀기도 했다. 그 뒤 직제학, 동부승지, 우부승지, 대사간, 부제학을 지냈으며, 대사헌과 이조, 호조, 공조의 판서를 거쳐 우의정과 좌의정 직까지 오르는 등 주요 고위직을 역임했다.
이명은 우리가 생각하는 바른 선비의 전형이었던 듯 하다. 즉, 공사 구분이 철저하고 의로운 일이면 반드시 행해야 하는 성격이었던 것 같다. 명종 시기 문정왕후의 동생 윤원형이 득세하던 시절에 그 일파였던 이기가 마음대로 권력을 휘두르며 죄없는 선비들을 괴롭히자 이를 비판하며 그를 배척했고, 이조참판 직을 역임하던 1553년(명종 8년)에는 을사사화 때 억울하게 죽은 사람들을 복권시키라고 명종에게 아뢰기도 했다. 이게 얼마나 대단한 것이냐하면, 저 시기는 을사사화를 일으킨 주범인 문정왕후와 윤원형이 시퍼렇게 살아서 권력의 정점에 있던 때였다(!). 정말 말 그대로 목숨걸고 간언한 것. 또한 1565년(명종 20년) 가을에는 청백리로 선정받았다. 청백리는 청렴하고 강직한 신하에게 국가에서 내려주는 호칭인데, 조선왕조 500년 역사 상 청백리 호칭을 받은 사람은 불과 217명 뿐이었다. 즉, 굉장히 받기 힘든 영예인 것. 국가에서 공식적으로 인정할 정도로 이명의 성품이 깨끗하면서도 소신 있었다는 뜻이다.
명종이 붕어하고 선조가 왕이 되자 70대 초반의 노인이었던 이명은 사직을 청했고, 1572년(선조 5년) 음력 8월 6일에 세상을 떠났다. 향년 77세.[4]
3. 묘역[편집]
묘는 서울특별시 노원구 월계동에 있다. 묘역 일대는 1983년 11월 11일에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41호로 지정받았다. 묘의 석물로는 문관석과 망주석이 각각 2기 있고, 석등과 묘갈이 각각 1기 씩 있다.
묘의 동남쪽에 그의 일생을 기록한 신도비가 있다. 비는 이명 사후 2년 뒤인 1574년(선조 7년)에 세운 것으로, 김귀영이 비에 새길 글을 짓고, 신충겸이 글씨를 썼다. 네모난 받침돌 위에 비를 세운 형태로, 윗 부분을 둥글게 만들었다. 받침돌 측면에는 조각이 새겨져있다.
신도비를 보호하기 위해 비각을 만들었다. 지붕은 맞배지붕으로, 측면에 나무로 만든 풍판을 두었다. 처마는 홑처마, 공포는 이익공이며 공포 사이마다 화반을 두었다. 단청은 모루단청으로 칠했다.
정면 1칸, 측면 1칸으로, 벽과 창이 없이 사방이 뚫려있다. 단 사방에 홍살을 설치했는데 홍살의 높이는 매우 낮다. 정면에 있는 홍살 가운데에는 아주 작은 문이 달려 있다. 이 문을 통해 비각으로 들어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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