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공군 1차 공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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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6.25 전쟁에서 중공군과 유엔군, 국군이 최초로 조우한 사건이다.
2. 상세[편집]
6.25 전쟁에서 북한군은 남침하여 대한민국을 낙동강 일대까지 몰아붙였으나, UN군의 원군과 인천 상륙작전으로 전선이 크게 밀리기 시작한다. 이후 북한군은 청천강과 압록강 일대까지 밀리게 된다. 이 상황에서 김일성은 중국에 도움을 요청하고, 이렇게 중공군이 6.25 전쟁에 참전, 남하하게 된다.
압록강까지 밀고 올라간 유엔군과 국군은 늦어도 11월23일 추수감사절 전까지 전쟁을 끝낸다는 목표를 세웠고, 이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쉬지않고 북진하였다.
하지만 중공군은 한참 전에 압록강을 건너 북한 적유령 산맥에 숨어있었다.
유엔군과 국군이 서부전선 청천강을 도하하고, 동부전선 함흥, 흥남을 점령 후 장진호와 청진 방향으로 총공세를 펼치는 그 때 10월 25일 중국인민지원군 제13군은 기습 공격을 감행해 적유령 산맥 남단에 5개 군을 전개, 1개 군을 장진호 북쪽에 전개하여 동부에서는 유엔군과 국군의 전진을 저지하였고, 서부에서는 운산-희천 방향으로 공격을 강행해 유엔군 및 국군을 청천강 이남으로 격퇴시킨다.
그리고 홀연히 자취를 감춘다.[1]
매우 의심스러운 상황이었으나 크리스마스 전에 전쟁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간다는 맥아더의 신념 하에 유엔군은 계속 북진한다.
중공군의 공세는 총 7개가 있으며
2차 공세가 청천강 전투와 장진호 전투로 이어진다.
3차 공세로 인해 유엔군은 1.4후퇴를 하였다.
4차 공세가 횡성 전투와 지평리 전투로 이어진다.
중공군 춘계 공세라고도 불리는 5차 공세는 임진강 전투(설마리 전투, 파평산 전투)로 이어진다.
6차 공세는 5차 공세 실패로 주도권을 잃은 마오쩌둥이 여전히 재공세를 명령한 것으로 현리 전투와 용문산 전투로 이어진다.
7차 공세는 6차 공세로부터 무려 2년 후에 개시되었으며, 금성 전투로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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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중공군은 유엔군을 돌파할 수 있었으나 보급문제로 11월 5일 철수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