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영근(1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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崔泳謹
1922년 4월 24일 ~ 2004년 8월 13일 (향년 82세)

1. 개요
2. 생애
3. 선거 이력
4. 관련 문서


1. 개요[편집]


대한민국의 전 관료, 기업인, 정치인이다. 본관은 경주(慶州)[1], 호는 우송(友松)이다. 종교불교다.


2. 생애[편집]


1922년 4월 24일 경상남도 울산군 두동면(現 울산광역시 울주군 두동면) 삼정리 하삼정마을에서 천석꾼이던 아버지 최현범(崔鉉範)과 어머니 '다개댁(茶開宅)' 권씨 사이에서 차남으로 태어났다. 같은 울산군 출생의 이후락과는 어릴 적부터 친한 사이였다. 두동공립보통학교(現 두동초등학교, 23회)를 졸업하고 상경하여 보성전문학교에 입학하였다.

보성전문학교 재학 시절 학도병으로 일본 제국 육군에 강제 징집되기도 했으나, 만주로 향하던 열차가 밀양군 삼랑진면(現 밀양시 삼랑진읍)을 지날 무렵 일본군 헌병의 감시가 소홀한 틈을 타 탈출하였고, 집으로 돌아와서는 마을 뒷산에서 1년 여 간 은거하였다.#

8.15 광복서울대학교 법과대학 전문부를 졸업하고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본과에 입학했으나 4학년 때 중퇴했다.

1952년 지방선거에서 무소속으로 초대 경상남도의회 의원 선거에 출마해 당선되면서 정계에 입문했다. 이후 민주당에 입당해 신파 계열에 가담했고, 김대중과는 사석에서 말을 놓는 사이로 친해졌다. 1958년 제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당 후보로 경상남도 울산군 갑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자유당 안덕기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1960년 제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같은 선거구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그리고 이듬해인 1961년 보건사회부(현 보건복지부) 정무차관을 지냈다.

1963년 제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경상남도 울산시-울산군 선거구에서 민주당 후보로 당선되었다. 그러나 1967년 제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신민당 후보로 출마하였다가 민주공화당 설두하 후보에게 밀려 낙선하였다. 이후 정계를 잠시 떠나 제일생명보험 사장, 한국기원 이사장, 한국권투위원회 위원장 등을 역임하였다.

1980년 서울의 봄 때는 친구였던 무소속 이후락 의원으로부터 "1973년 박정희가 김대중을 죽이라고 지시했으나 자신은 곤혹스러워 계속 미뤘었고 김종필과도 이야기가 다 되었다며 박정희가 재촉하자 실행했다"라는 김대중 납치 사건 관련 전말을 들었다.

1980년대 중반에는 민주헌정연구회라는 단체를 만들어 김대중을 외곽에서 지원하였다. 1987년 김대중이 평화민주당을 창당하자 입당하였다. 이듬해인 1988년 제1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평화민주당 전국구 국회의원으로 당선되었고, 평화민주당 부총재를 역임했다.

이후 정계를 은퇴하였고 경기도 성남시에서 여생을 보내다가 2004년 8월 13일 서울특별시 종로구 연건동 서울대학교병원에서 숙환으로 별세하였다.#


3. 선거 이력[편집]


연도
선거종류
선거구
소속정당
득표수(득표율)
당선여부
비고
1952
1952년 지방선거
경상남도의회 의원

[[무소속|
무소속
]]

-
당선
초선
1958
제4대 국회의원 선거
경남 23[2]


14,736 (40.05%)
낙선 (2위)

1960
제5대 국회의원 선거
26,220 (71.56%)
당선 (1위)
초선
1963
제6대 국회의원 선거
경남 12[3]

파일:민주당(1963년) 흰색 로고타입.svg

31,101 (45.17%)
재선
1967
제7대 국회의원 선거
경남 12[4]

[[신민당(1967년)|
파일:신민당 벽보글씨.svg
]]

39,934 (45.85%)
낙선 (2위)

1988
제13대 국회의원 선거
전국구

[[평화민주당|
파일:평화민주당 글자.svg
]]

3,783,279 (19.3%)
당선 (13번)
3선


4. 관련 문서[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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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정랑공파.#[2] 울산군 갑[3] 울산시, 울산군[4] 울산시, 울주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