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스탄티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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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가톨릭의 제88대 교황. 재위 708년 3월 25일 ~ 715년 4월 8일. 재임기간 약 7년 1개월.
전임 교황 시신니오와 형제로 추정된다.
2. 생애[편집]
5번째 시리아 출신 교황으로, 현재 레바논 영토인 티레에서 태어났다. 재위 중 동로마 제국 황제들과 인연이 많았다. 복위한 황제 유스티니아노스 2세(2차 재위 705~711)가 교황을 콘스탄티노플로 소환하여 그 인연이 시작되었는데, 역대 교황들이 로마 주교의 수위권을 강조했던 것 때문에 갈등이 일어났다. 유스티니아노스 2세는 칙령을 내려 교황은 단지 '서방 총대주교'일 뿐, 전체 교회의 영도자는 아니라고 지적했는데, 콘스탄티노 교황은 이런 칙령에 반항하지 않고 이를 인정하려 했다. 또 황제의 명령에 순응한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710년 10월 콘스탄티노플로 직접 가서 황제를 만났으며, 내용이 알려지지 않은 밀담을 나누었다. 이를 통해 교황이 황제에게 순종한다는 사실을 확인한 황제는 이듬해 교황에게 로마로 돌아가도 좋다고 허락했다.
711년 12월 유스티니아노스 2세가 피살되고 필리피코스가 동로마 제국 황제가 되었다. 필리피코스는 공의회에 의해 이단으로 단죄된 단성론의 신봉자였기 때문에 681년의 콘스탄티노플 공의회를 교황이 거부하라고 강요하였는데 교황은 이를 거부하고 따르지 않았다. 파울루스 디아코누스(부제: Paul the Deacon)에 따르면 필리피코스의 서신을 교황은 이단으로 여기면서, '로마 시민은 이단 황제의 이름(연호), 주화에 찍힌 황제의 초상, 황제의 법령(chapters)[1] 를 받지 않겠다고 천명했다'고 하면서 로마 시민(Populus Romanus)의 지지를 자신의 행동에 대한 정당화의 기제로서 언급했다. 여기서 눈여겨볼 점은 분쟁의 상대 또한 (동)로마 황제임에도 불구하고 자기 뒤에는 로마 시민들의 지지가 있다고 했다는 점이다. (국가로서의) 로마로부터 (도시 및 교회조직으로서의) 로마가 분리해 나가려는 독자정체성을 주장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2] 여하튼 그 결과 교황은 황제가 보낸 군대에 의해 체포되어 구금되는 신세가 되었는데, 로마 시민들이 이에 저항하여 교황을 구출하고, 무력 충돌 끝에 황제군을 로마에서 몰아냈다. 어떻게 보면 (동)로마군이 로마 시민들에 의해 로마 시에서 쫓겨난 꼴이다.(...) 여하튼 이 대립은 713년 6월 필리피코스 황제가 퇴위당하고 새 황제 아나스타시오스 2세가 즉위하여 다시 정통신앙으로 복귀함에 따라 대립은 종식되었다. 그리하여 교황은 남은 임기는 비교적 평온하게 보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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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네이버 사전의 옥스퍼드 사전에 따르면 '(나쁜 짓을) 비호하는 듯한 법(정책)'이라는 뜻이 있다.[2] Transformations of Romanness 11p, 원문: 'Paul the Deacon allows for the agency of the populus Romanus in one instance, when the Emperor Philippicus sent a letter to Rome regarded as heretical by the pope: then 'the Roman people confirmed that they would not receive the name, the charters or the image on the coins of the heretical emperor.' This was the populus of the city of Rome. It is remarkable that the pope relied on legitimation by the people of Rome to back his stance against what he regarded as a heretical measure by the empero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