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릴 모스칼렌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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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소련의 장군.
2. 생애[편집]
농민 가정에서 태어나 시골 4년제 초등학교를 졸업했다. 1917년부터 1919년까지 그는 아르툐몹스크의 농업 학교에서 공부했는데, 러시아 내전 발발로 학업을 포기했다.
2.1. 러시아 내전[편집]
마을 대부분이 안톤 데니킨 장군의 자원군에 의해 점령되자 한동안 숨어 지냈다. 1920년 8월 적군이 마을을 탈환함과 동시에 모스칼렌코도 적군 제1기병군에 합류했다.
2.2. 전후[편집]
루간스크 포병학교, 제2하리코프 포병학교에서 학업을 재개했다. 1921년 5월 하리코프 적군 포병학과로 이적한 뒤 레닌그라드의 고급 장교 교육을 수료했다. 1922년부터 1932년까지 제6기병사단과 제1기병군에서 복무했으며 기병포병사단의 소대장을 역임했다. 1932년부터 극동군 특수기병사단장을 역임했다. 1936년부터 키예프 군관구의 제45기계화군단에서 복무했다.
2.3. 제2차 세계 대전[편집]
모스칼렌코는 정말 유능하다. 자신의 시간과 건강보다 승리를 우선시하기 때문이다. 수비보다 공격에만 강한 게 흠이지만.
제1우크라이나전선군 사령관 이반 코네프
2.3.1. 겨울전쟁[편집]
제51소총수사단 포병부대 사령관, 제35소총병군단과 제2기계화군단의 포병대 사령관을 역임하며 적기훈장을 수여받았다.
2.3.2. 바르바로사 작전[편집]
1941년 6월부터 1942년 3월까지 제1대전차여단, 제15소총수군단, 제6군, 그리고 제6기병군단을 지휘했다. 이 기간 동안 남부집단군은 300대 이상의 독일 국방군 전차를 파괴했다. 그는 1941년 7월 23일 레닌훈장을 수여받았다. 1942년 3월부터 7월까지 제38군 사령관을 역임했다.
2.3.3. 스탈린그라드 전투[편집]
제1전차군을 지휘하다 1942년 8월부터 1942년 10월까지 제1근위군 사령관으로 임명됐다. 모스칼렌코의 부대는 12일동안 프리드리히 파울루스의 전차부대 진격을 저지했다. 1942년 10월부터 1943년 10월까지 제40독립군 사령관을 역임했다.
2.3.4. 쿠르스크 전투[편집]
제3차 하리코프 전투, 드네프르 전투에 투입됐다. 드네프르 강 서쪽 교두보를 확보한 뒤 소비에트 연방 영웅 칭호를 수여받았다. 이후 제38군 사령관을 역임했다.
2.4. 말년[편집]
1948년 8월부터 모스크바 군관구 방공군 사령관을 역임했다. 1953년 6월 26일, 니키타 흐루쇼프는 게오르기 주코프, 모스칼렌코에게 협력을 요청한 뒤 라브렌티 베리야를 체포했다.[4] 결과적으로 1955년 3월 11일, 다른 5명의 대장들과 함께 원수로 진급하게 됐다. 이후 1960년까지 모스크바 군관구에서 복무하다 전략 로켓군 총사령관으로 임명됐다. 모스칼렌코는 흐루쇼프의 최측근에서 신임을 샀기 때문에 보다 빨리 진급할 수 있었다. 물론 긍정적인 평가만 있었던 건 아니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큰 사건은 없었지만, 주코프 다음으로 특별한 이유 없이 명예퇴역을 간접적으로 강요당한 뒤 국방부 감찰관으로 임명됐다. 당시 모스크바에 있던 프랑스 언론인 미셸 타투(Michel Tatu)는 쿠바 미사일 위기 당시 실책으로 추측했다. 1978년 두 번째 소비에트연방영웅 훈장을 수여받은 뒤, 1985년 6월 17일 모스크바에서 사망했다.모스칼렌코는 최고인 동시에 최악의 인물이다. 조국 수호에 적극적으로 헌신할 수 있다는 걸 알기에 그를 스탈린에게 좋은 인물이라고 말했지만, 어쩔 땐 폭력적이고 무례하고, 정신적으로 이상한 자라는 걸 느꼈다. 전투 지휘엔 소질이 있었지만 그는 부하 장교들을 심적으로 괴롭히는 자로 악명이 높다. 모스칼렌코가 가장 많이 하는 말은 "인민의 적이나 마찬가지군. 네놈은 군사재판에 불려나가 총살돼야 마땅해!"였다.
니키타 흐루쇼프의 회고록
3. 진급 이력[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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