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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레사 크리스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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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브라질 제국 페드루 2세의 황후. 브라질 제국의 마지막 황후다.
2. 작위[편집]
- 양시칠리아 왕국의 테레사 크리스티나 공주 전하 Her Royal Highness Princess Teresa Cristina of the Two Sicilies (1822년 3월 14일 ~ 1843년 5월 30일)
- 브라질 제국의 황후 폐하 Her Imperial Majesty The Empress of Brazil (1843년 5월 30일 ~ 1889년 11월 15일)
3. 생애[편집]
3.1. 어린 시절[편집]
1822년 3월 14일 칼라브리아 공작 프란체스코와 스페인의 마리아 이사벨의 6남 6녀 중 6녀로 태어났다. 아버지 프란체스코는 양시칠리아 왕국 국왕 페르디난도 1세의 장남으로 왕세자였고, 어머니 마리아 이사벨은 스페인 왕국 카를로스 4세의 4녀다.
1825년 아버지가 프란체스코 1세로 즉위하였으나 5년 뒤인 1830년에 병으로 사망하였다. 당시 테레사 크리스티나는 7살이었다. 어머니 마리아 이사벨은 남자들과 만나길 좋아했고, 재혼한 후에는 아예 딸에게 신경쓰지 않았다. 이로 인해 테레사 크리스티나는 외롭고 고립된 환경에서 자랐다.
3.2. 황후[편집]
1841년 초, 브라질 제국의 황제 페드루 2세는 황후가 될 신붓감을 찾고 있었다. 양시칠리아 왕국은 테레사 크리스티나를 추천하였고, 테레사 크리스티나의 초상화를 본 페드루 2세는 결혼을 승낙하였다. 두 사람은 페르디난도 1세와 카를로스 4세를 기준으로 5촌이기도 했다.[1] 1843년 5월 30일 대리인을 통한 결혼식을 올린 뒤, 테레사 크리스티나는 배를 타고 브라질로 향했다. 브라질에 도착한 후 남편을 처음으로 보게 된 테레사 크리스티나는 페드루 2세에게 첫눈에 반했다.
하지만 페드루 2세는 초상화와 매우 다른 아내의 실물을 보고 크게 실망했다(...). 테레사 크리스티나는 키가 작고 과체중이었으며 못생기진 않았지만 예쁜 편도 아니었다. 남편의 냉담한 반응을 본 테레사 크리스티나는 눈물을 흘렸다. 두 사람은 9월 4일 리우데자네이루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그리고 1844년에는 페드루 2세의 누나 자누아리아와 테레사 크리스티나의 남동생 루이지가 결혼하여 겹사돈을 맺었다.
결혼 초부터 부부 사이가 좋지 않았지만, 테레사 크리스티나는 좋은 아내이자 황후가 되고자 노력했다. 두 사람 사이에서 아폰수, 이자베우, 레오포우지나, 페드루 아폰수가 태어나면서 부부 관계도 점차 좋아졌다. 다만 페드루 2세는 테레사 크리스티나를 사랑하는 아내라기보다는, 친한 친구이자 동료로서 대했다고 한다. 1847년 장남 아폰수가, 1850년에 차남 페드루 아폰수가 요절하여 장녀 이자베우가 황태녀가 되었으며, 이후 페드루 2세가 여러 정부를 두면서[2] 더이상 아이를 낳지 못했다.
테레사 크리스티나는 정치에는 관심이 없었으며 편지를 쓰고 독서를 하며 시간을 보냈다. 또 노래를 잘 불렀으며 오페라와 무도회를 즐겼다. 특히 고고학에 관심이 많아 오빠인 페르디난도 2세와 여러 유물들을 교환했고 고고학 연구를 후원했다. 브라질로 시집오면서 가져온 유물들은 2018년 9월 2일 브라질 국립박물관 화재 사고로 소실됐다.
3.3. 브라질 제국의 멸망[편집]
1871년 2월 7일 차녀 레오포우지나 공주가 장티푸스로 사망하여 브라질 황실은 큰 슬픔에 빠졌다. 페드루 2세는 아내를 위해 유럽 여행을 결정하였고, 두 사람은 1876년과 1887년에 해외 여행을 떠났다. 테레사 크리스티나는 친정 이탈리아에도 찾아갔지만, 이미 양시칠리아 왕국이 멸망하고 이탈리아 왕국에 병합된 후였다. 그녀는 자신의 고향이 변해버린 것에 슬퍼했다.
1889년 노예지 폐지에 불만을 품은 데오도루 다 폰세카 장군이 쿠데타를 일으켜 페드루 2세를 폐위시켰다. 테레사 크리스티나는 브라질을 떠나야 한다는 생각에 매우 슬퍼했다고 한다. 브라질 황족들은 모두 브라질을 떠나 포르투갈 왕국 리스본에 도착했다.
3.4. 사망[편집]
천식과 관절염을 앓는 상태로 오랜 시간 해외여행을 한 데다, 브라질에서 추방당한 테레사 크리스티나의 건강은 급속도로 악화되었다. 브라질 황족들이 영원히 브라질에서 추방당했다는 소식을 들은 후 그녀는 더이상 삶을 이어갈 의지를 잃었으며, 결국 1889년 12월 28일 67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브라질 국민들은 테레사 크리스티나가 사망했다는 소식에 진심으로 애도했고, 그녀를 "브라질인의 어머니(Mãe dos Brasileiros)"라고 칭했다.
유해는 포르투갈 왕족들이 묻혀있는 상 비센트 드 포라 성당에 안장되었다가, 1939년 브라질 페트로폴리스 성당으로 이장됐다.
4. 가족관계[편집]
4.1. 조상[편집]
4.2. 자녀[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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