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산: 용의 출현/역사 재현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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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위 문서: 한산: 용의 출현
1. 개요[편집]
본 문서에서는 2022년 개봉된 영화 한산: 용의 출현의 재현성에 관하여 다룬다. 영화 개봉 전 정보가 일부 포함되어 있음에 유의할 것.
2. 배경 및 소품[편집]
지적할 만한 부분이 없는 것은 아니나 명량에서 지적되었던 소품들은 대다수 고증에 맞게 새로 교체되었다.
기존 '명량' 때 소품을 그대로 다시 쓸 것이라는 예상을 완전히 뒤엎은 건데, 전작이 고증 부분에서 워낙 비판을 많이 받아 그대로 쓰기에는 무리가 있었고 명량이 1761만이라는 전무후무한 흥행을 기록하면서 제작에 많은 배려를 받아 그런 선택을 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2.1. 복식[편집]
주요 인물들이 두정갑을 입고 있는데 갑옷의 재현 부분에서 실제 유물 및 기록과 모습이 동떨어진 것 같다는 비판이 많은 편이다. 사족이나 다름없는 용문양 견철[1] 은 주인공으로서의 개성이라고 하더라도, 한국 사극의 고질적인 아무런 유물 근거 없는 챔피언 벨트마냥 생긴 허리띠와 장식수준을 넘은 필요 이상의 두정은 지나치다. 명량 때 보이던 정체를 알 수 없던 찰갑[2] 과 비교해서 그나마 두정갑으로 발전한 것은 괄목할만하나, 디테일은 유물을 전혀 참고하지 않은 창작갑옷이 분명하다.
또한 칼의 패용 방식도 말이 많은데, 칼을 손에 들지 않고 띠돈을 사용하는 것은 옳게 된 반영이나 검의 방향이 잘못되었다는 지적이다. 영화에서는 일본 타치 식으로 손잡이가 앞으로 가도록 허리에 수평으로 칼을 차고 있는데, 조선 환도는 손잡이가 뒤로 가고 칼집이 다리 쪽으로 비스듬히 기울어진 모습으로 차야 한다는 것이다.[3] 다만 조선의 예법이나 규정에서 명문으로 정해지지 않았기에 손잡이가 앞으로 가도록 검을 휴대하는 것도 반영 오류라고 볼 수 없다. 환도의 띠돈은 고리가 360도 회전 가능하므로 칼을 어느 방향으로든 자유자재로 돌릴 수 있고, 그래서 손잡이가 뒤쪽으로 가는 방식이 더 많았을 뿐이지 앞쪽으로 가는 방식이 없던 것은 아니다.[4] . 비슷한 사례로 망건이 있는데, 망건 또한 상투가 떨어지지 않게 이마 위쪽으로 맸지만 실제 역사에선 현대의 한국 사극처럼 이마에 머리띠마냥 매는 선비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변요한이 연기하는 와키자카 야스하루의 갑옷도 바뀌었다. 아무래도 조진웅과 변요한의 신장이 차이나다 보니 어차피 바뀌었어야 했다.[5] 자주색 계열에다 뒤에는 황금장식이 있는 형태다. 또 특이한 점은 가토 요시아키의 오징어 투구(...)가 그대로 영화상에 나왔다. 그렇지만 와키자카의 부하들의 투구는 색깔만 다를 뿐, 뿔은 전부 동그라미 형태의 뿔이다.(영화를 참고하자).
또한 왜군의 복식도 바뀌었는데 전에 전체적으로 빨간색 위주였던 전작의 갑옷에서 영화 대립군에 나온 왜군의 갑옷으로 바뀌었다. 전작 명량에서 '왜군들이 해적이든, 정규군이든 할 거 없이 전부 다 획일화된 갑옷을 입고 나온다'는 지적을 받고 각 영주들이 거느리는 군사들마다 세부적으로는 갑옷에 차이를 두었다. 예를 들어 와키자카가 이끄는 군사들은 투구의 목가리개가 흰색이지만 웅치에서 고바야카와 다카카게가 이끄는 군사들은 목가리개가 빨간색이다.
전작에서 사용했던 왜군 갑옷은 노를 젓는 노꾼들의 갑옷으로 전락하여 잘 드러나지 않으며 왜군 하급 부관들의 갑옷과 투구는 거의 절대 다수가 영화 '대립군'의 갑옷을 사용한다. 특히 명량에선 대부분의 부관들이 초승달 모양 장식이 붙은 스지가부토를 착용하고 있는데 반해 본작에서는 전령들의 투구로만 쓰임이 한정되었으며 대부분의 부관들은 원 모양의 장식이 붙은 즈나리가부토를 착용한다.[6]
아무래도 영화 '대립군'에서 조선군 측 복장을 '명량'의 복장을 사용해서 이번에 '한산'을 찍을 때도 '대립군'의 왜군 복장을 사용한 것 같다.
다만 한국 사극의 고질적인 문제인 여성들의 짧은 저고리는 잘못된 것. 단국대학교 석주선박물관에서 16세기 회화를 바탕으로 재현한 당시 기생들의 복식을 보면 저고리의 길이가 매우 길고,소매의 폭이 매우 넉넉하다. 이것이 조선 전기의 저고리 특징이다.
김향기씨가 입고 나온 기생의 복식은 소매가 좁고, 매우 짧고 타이트한 18세기 이후의 양식이다. 김향기씨 외 다른 기생들이 입고 나온 저고리는 16세기의 것에 비해선 짧지만 그래도 긴 편이며, 소매가 넉넉한 것으로 보아 의도적으로 이렇게 입혔는지는 의상감독의 재량이 아니었을까라는 생각이 든다.
2.2. 함선[편집]
2.2.1. 조선 전선[편집]
2.2.1.1. 판옥선[편집]
파일:한산판옥선.jpg
판옥선의 묘사가 다소 바뀌었다. 전작 명량에서는 배 옆면의 용 그림이 그렇게 뚜렷하게 드러나지 않았지만 이번 작에서는 도색하여 뚜렷하게 나오며, 지휘소 지붕도 누각이 없었지만 한산에서는 설치되어 있고, 명량의 판옥선과 달리 지휘소의 계단이 옆쪽에도 추가되어 두 개이다. 그리고 지휘관의 직함을 적은 현판이 누각에 설치되어있다.
명량 뿐만 아니라 이전에 임진왜란을 다룬 모든 작품들과 가장 큰 차이점은 진법에 많은 분량을 할애한 것이다. 기존 작품들은 어느 해전을 다루든 주로 화포전에 주로 집중했다. 그에 반해 한산은 포로로 잡힌 왜군들을 이용해 기동 및 진법 훈련하는 장면, 조선 수군의 기본 이동 진법인 첨(尖)자진 활용, 모든 전선들이 학익진을 갖출 때까지 공격을 기다리는 등 진법의 중요성을 강조했다.[7]
다만 아쉬운 점은 그간 임진왜란을 다룬 작품들과 마찬가지로 판옥선의 한쪽 면에서만 함포 발사를 묘사한 부분이다. 실제로 판옥선은 당시 세계 최초로 노를 이용해 그 자리에서 배를 돌리며 전후좌우 모두 사격이 가능한 시스템이었다. 이런 사격 시스템이 있었기에 영화와 달리 실제 한산도 대첩에서는 단 한 척의 왜선도 가까이 접근하지 못했으며, 명량해전에서는 숫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승리할 수 있었다. 이런 식으로 제자리 회전을 통한 사격은 불멸의 이순신에서나 몇 번 등장했을 정도로[8] 묘사된 적이 거의 없다.
명량에 이어서 이번 영화에서도 왜군들이 조선 해군에게 가까이 접근하는 장면들이 많다. 적을 유인해내는건 비슷하지만 실제론 유인해내서 포 사정거리까지 접근라면 포격적으로 격침 시켰다. 이순신 장군은 월선해서 백병전이 벌어질 경우 이길 수 없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이건 아무래도 해상 학익진의 개념이 '바다 위의 성'으로 정리되는 봉쇄망을 만들어 왜선의 돌파를 막는 개념으로 설정되었기 때문에 그런 것으로 보인다.
2.2.1.2. 거북선[편집]
거북선은 2층 구조 1척과 3층 구조 2척이 확인되었다.[9] 실제 거북선이 2층일지 3층일지는 학계에서도 여러 주장과 의견도 많이 갈리고 있는데 그냥 2가지를 다 보여주었다. 이게 가능한 이유는 거북선이 독자적인 함선이 아니라 특수목적을 위한 개조함선이라는 가설이 있기 때문. 주로 튼튼한 판옥선을 베이스로 개조했다는 가설이며 과거 실제 거북선을 그린 기록들마다 눈에 띄는 차이가 있는 것도 이런 이유 때문 아니냐는 가설이다. 그게 아니더라도 판옥선도 오래 사용해오며 개량되며 설계가 바뀌었는데 임진왜란 180년 전, 태종 시절 때도 있었던 거북선도 개량해오며 시대마다 모습이 바뀌었을 가능성이 충분히 있다. 또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고증 오류로 판명난 해군사관학교에 있는 목이 있는 거북선은 등장하지 않는다.
작중에서 나온 2층 거북선은 나대용이 3층 거북선의 약점을 보완하기 위해 개조를 한 것으로 나오는데, 2층 구조는 3층 구조의 느린 속도와 충파시 용머리가 적선에 끼는 [10] 단점을 보완하여 배 아래에 도깨비머리가 튀어나온 형태와 용머리를 넣었다 뺐다 할수 있게 개조되었다.[11] 이 부분도 순수 창작은 아니고 KBS 역사스페셜에도 방송된 적 있는 주장을 바탕으로 만든 것이다. KBS 역사스페셜 – 거북선 머리는 들락거렸다 / KBS 1999.2.13 방송분 유튜브 영상[12]
배가 3층 구조일 시 배의 복원력에 문제가 생겨 측면 포를 쏘면 뒤집힐 수 있다는 설을 인식해서 그런지 3층선은 측면포를 판옥선처럼 연속적으로 쏘지는 않는다. 또 그간 거북선이 무적인 것처럼 과장되었던 것에 반해 적선에 박혀 못움직이는 용머리, 느린 속도, 취약한 측면 등 단점들을 그대로 표현하는 동시에 돌격선이라는 한정된 역할만을 부여했다.
임진왜란 당시 거북선에 분명히 등판 가운데에 쇠송곳이 꽂히지 않고 맨 갑판으로 된 승조원 이동통로가 있었다고 기록에 남아있었다. 그 후 거북선에서는 방어상의 약점이라고 판단되어 없어졌었는데 이를 재현한 점도 새로운 점이다.
2층선은 층이 낮아져서 3층선과 달리 속도가 빨라졌다. 그리고 노를 젓는 공간과 포를 쏘는 공간이 겹치면 측면포를 움직이면서 포를 쏠 수 없다는 설에 맞게 돌격하면서 앞쪽 포만 쏘다가 충파 후 정지된 채로 적선이 가까이 몰려오면 측면포[13] 를 이용하여 전탄사격을 한다. 또한 2층선은 나머지 두척과 달리 등판이 검은빛을 띄고 판옥선의 포탄을 일부 튕겨낸 것으로 보아 등판이 철갑일 것이다. 게다가 스치기만 해도 왜군 세키부네가 나뭇조각이 터지듯이 박살이 나는 모습을 보였다.[14]
극중에서는 3척이 등장하지만 실제로는 2척만 투입되었다.
2.2.2. 일본 전선[편집]
일본의 군선은 '명량' 때보다는 모두 조금 작게 나왔다. 이는 기록에 따른 것으로 명량해전 때 일본 군선이 그간의 전투 경험을 살려 개전 초보다 더 크게 만들어진 것은 사실이다. 선조실록에서는 칠천량의 패전을 보고받은 선조가 "대체로 적의 배가 전보다 대단히 크다고 하는데 사실인가?"라고 물으니 김응남이 그렇다고 대답하는 모습이 나온다. 전쟁 초기에는 일본군의 배와 조선군의 배가 서로 크기 차이가 너무 나서 일본군이 등선육박을 할 때 공성전을 하듯이 사다리를 타고 조선군 함선으로 올라왔어야 했다고 하니 이 부분을 부각시킨 것으로 보인다. 다만 초반 준사 일행이 훈련에 동원한 노획 세키부네는 정말 사다리를 거의 수직으로 올려야 판옥선 갑판에 닿을 수준인데 반해 실제 전투에 투입된 세키부네들은 완만한 경사로 광양전선에 오를 수 있을 정도였다.
작중 일본군은 세키부네의 빠른 속력을 활용해 유인전에 나선 광양과 옥포의 전선들을 따라잡아 등선전을 시도하는데, 실제 한산 해전에 대한 조일 양측 기록 모두 이러한 양상은 확인되지 않는다. 다만 칠천량 해전 등을 보면 세키부네들이 조선 전선을 따라잡아 등선에 성공한 사례가 충분히 있기 때문에 이를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와키자카의 군대가 사용하는 철갑을 두른 배와 화포가 달려있는 배(텟코센), 충각이 달려있는 배 모두 가토에게서 삥뜯은 물건들로 등장하는데, 이들은 영화상의 창작이다.
일본군이 한산도 대첩에서 안택선(텟코센)에 불랑기포를 매달아 사용하고 있다는 것은 잘못된 묘사라는 지적도 있다. 그러나 왜 수군의 대포 사용 자체가 고증에 크게 벗어난다고 볼 수는 없다. 당시 일본군도 서양에서 수입한 소형 불랑기포를 사용했다는 기록이 있기 때문이며 왜구와 동업했던 중국 해적 왕직을 통해 일본 해적들은 명나라식 대포를 이미 입수한 상태였고, 그래서 일본 수군은 사실상 대포를 운용했다고 봐야 한다. 한산 해전 이후에 벌어진 안골포 해전에서도 참전했던 구키 요시타카의 기함 니혼마루(日本丸)[15] 에도 함포가 3문이 설치되어 있었다.
당대 조선쪽 기록에도 비슷한 내용을 확인할수가 있는데, 선조와 류성룡의 칠천량 해전 직후 대화에서도 왜군이 대포를 달아 접근하기 힘들었다는 내용이 나온다.
다만 영화에서 묘사된 것처럼 한산도 대첩에서 대포를 사용했다는 기록은 나오지 않는데[17] , 사실 이런 묘사는 이번 영화만의 문제는 아니다. 한산도 대첩을 다룬 다른 영상 매체에서도 볼 수 있는데 대표적으로 20여년전의 불멸의 이순신에서도 와키자카군은 안택선에서 대포 2문을 대들보에 매달아 사용하고 있다.(선조가)
"척후병도 설치하지 않았단 말인가? 왜 후퇴하여 한산(閑山)이라도 지키지 못했는가?"
하니, 성룡이 아뢰기를,
"한산에 거의 이르러서 칠천도(七川島)에 도달했을 때가 밤 2경이었는데 왜적은 어둠을 이용하여 잠입하였다가 불의에 방포(放砲)하여[16]
우리 전선 4척을 불태우니 너무도 창졸간이라 추격하여 포획하지도 못하였고, 다음날 날이 밝았을 때에는 이미 적선이 사면으로 포위하여 아군은 부득이 고성으로 향하였습니다. 육지에 내려보니 왜적이 먼저 하륙하여 이미 진을 치고 있었으므로 우리 군사는 미처 손쓸 사이도 없이 모두 죽음을 당하였다고 합니다."
선조실록 90권, 선조 30년 7월 22일 신해 3번째기사 ##
대포를 대들보에 걸었다는 것은 조선전역해전도 때문에 생긴 오해로 실제론 조선처럼 갑판에 거치했다. 사실 조선전역해전도는 임진왜란때 그려진게 아니라 20세기 작품으로 한일 양쪽 모두 반영에 참고할 물건이 전혀 아니다.[18]
3. 줄거리 전개 관련[편집]
긴장감을 위해 꽤 많은 각색이 이루어졌다. 이건 김한민 감독뿐 아니라 역사를 소재로 하는 영화는 100% 사실과 고증에 입각해서만 만들기는 어렵다. 애초에 다큐멘터리가 아닌 영화인 이상 고증 그대로 사실 그대로만 쓰려면 재미가 반감될 수밖에 없는 것.
그럼에도 전작 명량에 이어 과도한 각색과 왜곡에 대한 비판은 불가피하다. 이순신 장군 관련 기록이 부족하면 어쩔 수 없이 재해석이 필요할 수도 있지만 난중일기, 장군이 쓴 장계, 조정에서 조사한 보고서, 와키자카를 비롯한 일본 쪽 기록리 워낙 자세하게 남아있기 때문이다. 일부 각색이면 모를까 감독은 왜곡에 가깝게 비틀어서 지속적으로 비판를 받고 있다.
3.1. 사천 해전[편집]
사천 해전과 그로부터 이틀 뒤에 벌어진 당포 해전을 합쳤다.
거북선으로 대장선을 들이받은 상황은 그로부터 이틀 뒤에 벌어진 당포 해전에서 벌어진 일이다. 그리고 거북선의 공격을 받은 미치유키의 안택선이 반쯤 부서진 채로 표류하던 것을 끌고 왔다고 와타나베 시치에몬이 언급한다. 그런데 사천 해전, 당포 해전 당시에는 참전한 모든 왜군 함선이 격침되었기 때문에 실제로라면 와키자카가 거북선의 공격에 부서진 안택선을 보는 상황이 나올 수가 없다.
이순신이 왼쪽 어깨에 총을 맞았다는 상황은 사실에 맞게 재현되었다. 단, 영화에서는 총을 쏜 사람이 준사라는 인물로 설정되었는데, 준사는 한산도 대첩보다도 더 뒤인 안골포 해전 이후에 항왜가 되었다. 또한 나대용이 사천 해전에서 총을 맞은 것은 사실이며,[19] 이순신과 마찬가지로 영화에서는 준사가 쏘았다는 설정이 들어갔다. 하지만 나대용은 당시에 거북선이 아니라 대장선에 승선하고 있었다.
3.2. '복카이센' 대사[편집]
참고로 예고편에서 와타나베가 부서진 도쿠이 미치유키[20] 의 군선들을 보면서
이라고 말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실제 임진왜란 당시 일본에서 거북선을 부른 명칭은 '맹선(盲船)'[21] 이란 뜻의 메쿠라부네였다. 배가 사방이 전부 막혀있어서 어디로 밖을 내다보는지 알 수 없어 장님 배라고 불렀다고[22] .해저 괴물.....복카이센!
복카이센(沐海潛)은 임진왜란 종전 이후, 일본에서 제작된 군담들 중 인형극 <남신궁황후>(男神宮皇后)에 등장하는 인물로 고려국 요동대왕(조선왕)이 조공을 게을리 해 일본이 병선 수만척을 보내자 요동대왕이 물질에 능하고, 힘센 복카이센에게 독물고기로 변해 일본 대장이 탄 배를 전복시키라는 지시를 내린다. 복카이센은 호랑이 머리에 등에는 가시가 돋았고, 꼬리를 위로 곤두세운 '샤치호코'(위 티저 영상에서 해저 괴물로 번역되었다.)라는 물고기로 변해 일본배에 달려들고, 이를 고니시 유키나가를 모티브로 한 고니시 야슈우로(小西彌十郞)가 퇴치한다. 등에 가시가 돋은 괴이한 물고기 샤치호코와 그 샤치호코로 변신한 물질에 능한 장수 복카이센은 진주목사 김시민을 모티브로 만든 '목소관(木曾官)처럼 이순신과 거북선을 모델로 창작해낸 인물이다.[23] 즉, 복카이센은 임진왜란 종전 이후 일본 인형극에 등장하는 인물이지, 임진왜란 중인 1592년 일본군 사이에서 언급될 이름은 아니다.
영화 내에선 패잔병들이 거북선을 '복카이센'으로 부르는 것을 듣고 와키자카가
라며 익히 알고 있다는 듯 반응을 보이며 '복카이센'은 일본군이 품은 두려움의 표시로, '메쿠라부네'는 멸칭으로 쓴다. 영화를 보면 알겠지만 영화 내 사용 빈도는 메쿠라부네가 더 많으며 초반을 제외하면 대부분 메쿠라부네라고 언급한다."이야기 속의 괴물 말인가"
'복카이센'이란 명칭이 기존에 다른 사극을 통해 알려지지 않았던 만큼 제작진이 사전에 해당 논문을 읽고 자료조사를 했음은 분명하다. 영화에서 사용한 것은 거북선에 대한 일본군의 두려움을 강조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각색한 것이다.[24] 그리고 "복카이센"은 "거북선"을 마치 일본 한자음으로 읽은 것처럼 들려서
3.3. 웅치 전투[편집]
웅치 전투는 웅치 전투와 후속전 안덕원 전투가 결합되었으며, 목적부터 양 군의 규모까지 많은 각색이 이뤄졌다. 웅치 전투의 최고 지휘관은 김제 군수 정담이었지만 이 영화에선 후군장이었던 황박이 최고 지휘관처럼 묘사된다. 황박은 웅치 전투에 참전해 살아남고, 다음날 벌어진 이치 전투에 참전했다가 전사했으나 영화에서는 웅치 전투에서 전사한 것으로 나온다. 실제 역사에서는 최고 지휘관 김제 군수 정담이 웅치 전투에서 전사했다. 함께 등장한 황진은 장수 방면을 지키던 조방장 이유의가 달아나자 전라 감사 이광의 지시로 남원 방어를 위해 내려갔다가 7월 5일경 다시 웅치로 귀환하라는 지시를 받는다. 웅치에서 무너진 조선군이 나주 판관 이복남의 지휘하에 안덕원(오늘날의 전주시 산정동과 금상동 일대)에서 재정비할 때 지원군으로 합류해 일본군의 전주성 진격을 좌절시켰다. 그러나 이건 오리지널판에 한정된 얘기이며, 정담 배역도 캐스팅 목록에 있고, 리덕스판에서는 정담이 등장한다.
리덕스판에서 이치 전투와 웅치 전투가 동시에 발생하고 있다는 내용이 안코쿠지 에케이를 통해 언급되는데, 흔히 이치, 웅치 전투가 같은 날 발생했다고 알려져 있으나 이는 《선조수정실록》의 서술 방식을 감안하지 않아 생긴 오류다. 그리고 영화에서의 권율의 직책이 전라도 순찰사인데, 실제 이치 전투 당시 권율의 직책은 광주 목사였으며, 웅치 전선에는 안코쿠지만 참전하고 고바야카와는 이치 전투를 치르러 갔다.
웅치 전투는 일본군측 제6군의 고바야카와 다카카게의 예하 병력이 전주로 향하기 위해 남하하다가 조선군과 마주친 것이었으나, 영화상에서는 전주성으로 향하던 왜군 병력이 와키자카 야스하루의 제안을 받아들여 방향을 돌려 전라좌수영을 육로로 공격하려 한 것으로 각색되었다.[26] 이와 같은 이유로 허를 찔린 조선군은 항왜인 준사가 제공한 정보 덕분에 막판에 급하게 최소한의 방어진을 세우고, 후군장이었던 황박이 지휘를 하게 된 상황인 것으로 보인다.
이 고바야카와 다카카게의 전라좌수영 공격을 위한 웅치 돌파 추측이 극중에서는 와키자카의 견내량 내 본진돌격의 계기로 작용하는데[27] 둘 사이에 무슨 관련이 있는지 역사적 배경을 알고 있는 관객으로서는 도저히 이해하기 어렵다. 웅치와 여수 사이의 거리가 자그마치 150km이다.....[28] 이는 실제론 전주성 방어전에 가까웠던 웅치 전투가 전라좌수영 방어전으로 각색되었기 때문이다. 웅치 전투가 일어난 곳은 전주의 지척에 있다. 영화에선 준사가 전주성과 전라좌수영으로 향하는 갈림길에서 전주성으로 가는 길목이 텅 비었다는 것을 확인하고, 몇 시간 뒤에 (전라좌수영 근처에서) 전투가 일어나므로 마치 전주성(전라북도 북단)과 전라좌수영(여수, 전라남도 남단)이 가까이 있는 듯 보이지만, 실제론 상당히 멀리 있다. 기왕 각색을 할 것이면 차라리 웅치 전투란 설정 자체를 빼고, 가상의 전투로 연출하는 게 개연성 면에선 더 나았을 것이다.[29] 거기다 웅치 전투는 한산도 대첩 전날에 벌어졌기 때문에 출격 전날에 양동작전을 논의해놓고 "지금쯤이면 웅치를 돌파했을 것"이라는 추측도 당연히 틀린 말이 된다.
그리고 작중에서는 조선 의병들이 화포 사격으로 왜군을 저지하는 묘사가 나오나, 도로 사정이 나빠 중장비를 빠르게 운송하는 데 제한이 따르고, 기병 중심으로 여진족과 왜구에 맞서는 식으로 교리가 짜여 있었던 임진왜란 이전 조선 육군은 수성전이 아닌 야전에서 승자총통과 완구 이상의 화기를 운용하는 데 관심이 없어, 그런 훈련 자체가 되어있지 않았다. 조선군이 야전에서 포병 운용에 본격적으로 관심을 갖고 연구하기 시작하는 건 인구증가와 지속적인 개간으로 교통이 불편한 험지가 줄어든 조선 후기부터로 주로 수레에 조선에서 애용한 소형 불랑기, 총통, 신기전, 조총 등을 올려서 운용하는 쪽으로 발전한다.[30]
그리고 오류를 하나 꼽자면 와키자카 야스하루가 고바야카와 다카카게에게 쓰는 서신중에 그대(そなた)라는 표현을 쓰는데 이것이 실제로 와키자카 야스하루가 보낸 편지를 그대로 사용한 것이라면 모르겠으나 작중 대본이라면 이는 명백한 오류이다. 이 표현은 최소한 서로 동등한 입장일때 주로 쓰는 호칭인데 둘의 나이 차이는 21세로 고바야카와 타카카게가 한참 연상이고 무엇보다 고바야카와 타카카게는 전국 시대 대영주 가문인 모리 가문의 삼남으로 와키자카 야스하루가 감히 그대라고 부를만한 나이도 신분도 아니다. 백번 양보해서 당시 임진왜란 일본군 전체로 놓고봐도 9군 사령관중 최고 연장자이며 영주로서의 명성은 시마즈 요시히로와 동급임과 동시에 도요토미 히데요시 다음에 해당하는 "오대로"에 들 정도의 대영주인 고바야카와 다카카게인데 영지나 나이나 명성이나 모든게 한참 뒤떨어지는 와키자카 야스하루 정도라면 그에게 도노(殿)라고 높혀 불러야 맞을 것이다.(현대로 치자면 일개 소령 중령정도가 옆군단 군단장에게 맞먹는 호칭을 쓴것). 현대 일본에서도 둘의 인지도 차이는 꽤 큰 편으로 고바야카와 다카카게는 전국시대를 주름잡았던 다이묘였기에 각종 게임에 등장하며 능력치도 우수한 편이나 와키자카 야스하루는 모르는 사람이 더 많다.
3.4. 한산도 대첩[편집]
실제 역사를 그대로 반영할 시 너무나 일방적이고, 압도적인 승리라 극적 재미를 위해 상당한 각색이 가해졌다. 실제 역사상의 해전 양상을 영화에서 그대로 보여주면 영화적으로 극적인 긴장감을 주기 어렵기 때문에 어느 정도 치열한 양상을 보이도록 각색하는 것이 불가피했다. 그래서 한산도 대첩 이후에 일어난 안골포 해전의 전개를 차용하여 영화 내에서는 안골포 해전 수준의 접전과 피해가 있었던 것으로 묘사된다.
아무리 각색이 필요했다고는 하나 전작 명량에 이어 한산에서 까지 근접전으로 승리했다는 식의 묘사는 오류가 아니라 잘못된 것이다. 이순신 장군은 노량해전을 제외하면 단 한 번도 근접전을 명령한 적이 없다.[31] 승리한 모든 해전에서는 적을 함포 사정거리까지 유인해 선두부터 포격해 나가는 작전을 구사했다. 이는 조선 수군이 백병전에 강한 왜군과 직접 싸워서는 승산이 없다는 걸 잘 알았기 때문이다. 근접전을 펼친 것 처럼 묘사할 경우 조선 수군의 여러 뛰어난 전략과 작전은 무시된다.
또 거북선을 마치 가장 중요한 전력함으로 묘사하는데 이것도 잘못된 것이다. 이순신 장군은 거북선을 전선을 흐트리는 용도로 쓸 뿐이며, 판옥선이 모든 해전의 진정한 승패를 갈랐다.[32] 판옥선은 각종 포와 신기전을 제자리에 서서 360도를 돌며 발포하는 당시 전세계에서도 찾기 힘든 전선이었으며, 주요 임진왜란 해전의 승리를 결정지었다.
거기에다 이순신 장군의 치밀한 첩보 수집을 통한 사전 작전 수립도 큰 부분을 차지한다. 이 부분은 전작 명량에서 초반에 잘 묘사했다.
우선 가토 요시아키와 와키자카 야스하루가 견원지간이란 설정을 넣어 와키자카가 흉계를 통해 가토의 부하들을 거의 몰살시키고, 그의 배 40척을 빼앗고 쫓아버리는 전개를 추가한다. 개연성을 위해 일본 내 장수간 갈등을 빚는 장면을 넣어 일본군의 졸전에 대한 이유를 설명해주는 장치로서 썼다고 볼 수 있다.[33] 예고편이 나올 당시만 해도 긴장을 조성하려고 '부하들의 항명' 같은 같은 내부 갈등을 억지로 만들어 채우려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컸던 걸 생각하면, 다시보니 선녀같은 각색이다. 실제 역사상에선 와키자카와 가토 사이에 마찰은 없었으며, 오히려 와키자카가 대패하자 가토 요시아키와 구키 요시타카가 구하기 위해 전장에 나섰고, 그때 이순신에게 같이 박살나고 패주했다.[34]
또 와키자카를 실제보다 신중하게 표현했다. 당시 와키자카는 용인전투에서 조선군을 궤멸했다는 자심감에 힘 입어 유수한 해적 집안 출신[35] 이라는 자부심에 이순신 장군 공격을 자처했다. 본격적인 전투가 시작된 것도 와키자카가 섣불리 나섰기 때문이다.
전투 초반 어영담이 유인전을 시도해도 일본군이 따라오지 않자 위험을 무릅쓰고 더 가까이 다가가는 것으로 나온다. 실제는 조선 수군의 유인선들은 서있기만 했고, 일본군이 먼저 조총을 쏘며 쫓아온다. 참고로 유인 작전에 참가한 장수로 어영담 외에 이운룡이 있었으나 실제로는 김완이 갔다.[36] 학익진 진형에서 김완이 좌익 끝단으로 포지션이 잡혀서 제외한 것으로 보인다.
조선 수군이 유인에 성공하고 한번에 제압하기 위해 일본군이 아주 가까이 올 때까지 기다렸다가 조란탄을 섞어 포격하는 걸로 묘사된다. 실제 조선군은 일본군이 함포 사정거리 안으로 들어오기만 기다렸다가 들어서자마자 선두의 왜선들에 교차사격과 불화살 공격을 퍼부었다. 이에 일본군은 제대로 된 공격은 커녕 피해가 커지자 도망치려 했고, 조선 수군이 쫓아가서 공격했다. 실제로 조선군의 사망자 수는 고작 3명으로 이 정도면 눈먼 조총탄에 당했다고 봐야지 치열한 근접전을 치렀다고는 볼 수 없다. 다만 원중거의 《화국지》에 백병전을 묘사하는 문구가 있는 것으로 보아 유인전을 펼쳤던 함선에 대한 왜군의 근접전 시도 정도는 있었던 것으로 정리할 수 있다.
이때 거북선 3척이 투입되는데 실제로는 2척이었다. 왜군들이 포를 이용해 거북선들을 공격하거나 거북선이 포위 되기를 기다렸다가 사방으로 포를 발사하는 것도 허구다. 실제로 거북선은 돌격선으로 계속 직진하면서 포를 쏘는 동시에 왜선 노를 부러뜨리고 전선을 흐트리는 역할을 했다. 때문에 영화처럼 적재적소에 나타날 수 없었다.
와키자카의 조카 마나베가 판옥선의 포격으로 전사한 것으로 묘사되었으나, 마나베는 전투 이후 살아남아 한산도에 몸을 숨겼고, 그곳에서 할복자살했다.
또 한 가지 고증상 아쉬운 점은 학익진을 표현한 부분이다. 한산에서도 다른 작품들과 같이 일자진에서 좀 더 구부린, 접시 모양 형태로 구현했을 뿐만 아니라, 학익진을 공해상에서 만들었다. 실제로 조선 수군은 이순신 장군이 올린 장계와 와키자카 야스하루가 남긴 전투 기록에 따르면 기장(箕張), 즉 곡식의 불순물을 고르는 키(簸)의 모양의 진법을 구사했으며, 섬이 많은 곳은 진로가 철저히 제한될 수밖에 없기 때문에 항상 육지를 끼고 진형을 만들었다. 키는 U자 형태라서[37] 처음부터 정직하게 U자를 만들고 그 안에 적을 넣으려 하면 진형이 완성되기도 전에 양 끝단부터 각개격파당하지만,[38] 한산도 대첩에서 보였던 학익진은 U자의 개운데만 먼저 만들어놓고 매복해있던 이억기함대가 좌측에서, 원균 함대가 우측에서 나와 마저 완성시키는, 망치와 모루에 더 가까운 변형판으로 만들었기 때문에 일본군을 완전히 가둬서 궤멸시킬 수 있었다.[39] 때문에 원균이 혼자 먼저 포탄을 다 소진하고 무력하게 있었다는건 허구다.
학익진을 완성하고 이순신 장군이 왜선들을 가까이 올 때 까지 기다리는데 이건 오류가 정도가 아니라 잘못된 부분이다. 이순신 장군은 노량해전을 제외하고는 단 한번도 근접전을 치룬적이 없으며 항상 왜선들을 함포 사정거리까지 유인해내서 가장 선두를 포격하는 전술을 운용했다. 한산대첩 당시 왜선은 판옥선에 단 한번도 가까이 가보지 못하고 궤멸당했다.
따라서 나대용이 지휘한 거북선이 와키자카의 배를 들이밭은 후 다른 판옥선들이 포격하는 것도 허구다.
전투 막바지에 이순신 장군이 활로 도망가는 와키자카의 등을 맞추는 것도 허구다. 상술했듯이 왜선들은 애초에 가까이 접근조차 하지 못하고 궤멸 당했다.
3.5. 안골포 해전[편집]
안골포 해전은 그냥 함대로 안골포 일대의 왜군 기지를 일방적으로 포격하고, 구키 요시타카와 가토 요시아키가 그걸 그냥 구경하는 걸로 묘사했지만, 실제로는 한산도 대첩 때와 비슷하게 유인전을 통해 왜군 함대를 끌어내고 섬멸한 전투였다.[40]
사실 이렇게 된 이유는 와키자카와 구키-요시아키 간의 갈등관계를 만든답시고 둘의 배를 모조리 빼앗는 걸로 전개시키다보니 정작 안골포에서는 역사와 달리 둘 다 손놓고 구경할 수밖에 없는 결과가 만들어진 것이다.
3.6. 부산포 해전[편집]
영화에서는 부산포 해전이 3차 출정 시기인 1592년 음력 7월 11일에 발발했다고 언급하지만, 실제 부산포 해전은 1592년 음력 9월 1일에 벌어졌으며, 4차 출정 때의 일이었다. 3차 출정은 안골포를 포격하는 것으로 마무리지었다.[41]
부산포 해전에서 녹도 만호 정운이 전사했지만 이 내용은 다뤄지지 않았고, 일방적인 포격으로 승리한 걸로 처리되었다.
실제 부산포 해전에 정박해있던 왜선은 400척 정도의 대함대였는데, 정작 부산포의 왜선은 출정 나온 판옥선보다도 한참 적은 숫자만이 정박되어있다.
4. 기타[편집]
- 영화 등장인물들 중에 원균이 나와 있어 개봉 전에 원균을 명장 또는 맹장으로 만들려는 게 아니냐 하는 우려가 나온 바 있다. 그러나 이런 우려와 반대로 영화 내에선 '시방 우리는 공세가 아니라 수세야!'라는 대사로 사태 파악을 못하는 모습을 보여주거나 이운룡 등 부하들이 이순신을 돕고자 하자 '너희들도 이순신 똘마니가 되었느냐'고 이순신 앞에서 막말을 하고, 전투가 벌어진 후에는 학익진에 제대로 합류하지 못하고 뒤쳐지거나 겁에 질려 마구잡이로 포탄을 쏘아 낭비하고, 적들이 매복하고 있었던 곳에 무작정 쳐들어가자고 주장하는 무능함과 비겁함 등이 묘사되는 등 명확히 졸장으로 그려졌다.[42] 사실 한산해전을 다루면 원균은 나올 수밖에 없는데, 원균이 등장인물에 있다는 이유만으로 원균명장론/맹장론을 우려하는 것은 지나친 기우라고밖에 볼 수가 없다.[43]
- 영화 내에 '영감'이라는 표현이 등장한다. 작품의 배경인 한산도 대첩 때 이순신은 삼도수군통제사가 아닌 전라 좌도 수군절도사였는데[44] 수군절도사의 경우 정3품 당상 서반 외관직이지만 이미 이순신은 정2품 자헌대부였기에 대감이라는 표현이 맞는 표현이다.[45] 다만 위에 나온 내용은 예고편에서 잠깐 나온 대사에 관한 내용일 뿐 본편에서는 여전히 장군이라는 표현이 쓰인다. 전라우수사 이억기가 이순신을 부를 때 "영감"이라 부르고, 경상우수사 원균은 이순신을 "이수사"라고 부르는데 그 외 부장들은 모두 장군이라 부르는 희한한 모습으로 각색되어 있다. 원균은 이순신과 같은 수군절도사고 이순신이 품계가 더 높기는 했으나 원균이 경력이나 나이가 많아 이수사라고 불러도 딱히 이상하지는 않지만 나머지 부장들은 장군이 아닌 대감으로 불러야한다.[46] 사실 전작에서도 고위직인 배설은 통제공이란 올바른 호칭을 쓰고 다른 장수들은 장군이라고 부르는 잘못된 호칭을 섞어 썼다. 호칭이 잘못되었다는건 인지하고 있지만 전작은 장군이라고 하고 지금은 영감이라고 하자니 이상해서 호칭 통일 차원에서 그냥 둔 듯하다. 이 기조를 이어간다면 이순신은 3부인 노량에서도 장군 소리를 들을 것으로 보인다.[47]
- 많은 사극들에서 보이듯 등장인물들이 지나치게 현대적인 말투를 쓰기도 하는데, 원균이 "똘마니들"이란 표현을 쓰는 장면이 나온다. 원균의 무례함과 똘끼를 보여주는 장치로 이해하면 될 듯. 또한 원균이 이순신의 작전을 두고 "자살 행위" 같은 너무나 현대스러운 단어를 구사하기도 했다. 물론 사극 제작자들에겐 어쩔 수 없는 것이 철저한 고증으로 중국어와 한국어의 온갖 사투리가 짬뽕된 듯한 16세기 중세 한국어를 구현하려 들면 배우들은 배우대로 고생하고 관객들은 알아듣지도 못해 외국 영화처럼 처음부터 끝까지 자막을 깔아야 할 것이다. 현대의 말투가 나타나기 시작한 것은 길어봐야 200년 전부터의 일이다. 상황이 이러니 밑도 끝도 없이 시대상을 재현하려 들 바에야 별 고민 없이 제작진이나 관객이나 서로 편한 현대식 말투를 쓰는 것.
물론 사극을 보면서 중세 한국어를 쓸거라고 기대하는 관객은 없을 것이나, 높은 평가를 받는 사극처럼 '현대식 언어이지만 고풍적인 말투(사실 근대 한국어 시기의 말투가 대부분)'를 쓰는게 아니라, 속어를 썼다는 점에서 몰입을 깨는 요소라 받아들일 수 있다. 예를 들어 용의 눈물의 등장인물들은 전부 현대 한국어로 대화하지만, '똘마니'같은 속어를 쓰는 건 경우가 다르다.
- 한산도 해전 당일, 조선 수군이 기동하는 진은 첨자진이다. 조선 수군의 훈련 모습을 담은 조선 수군 조련도에도 가장 자주 등장하는 진으로 조선 수군의 가장 기본적인 진법이라 추측되고 있다. 참고로 이 첨자진은 이순신이 고안했다는 주장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