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빈 심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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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의안대군의 세자빈
현빈 심씨 | 賢嬪 沈氏


현빈심씨묘 전경
출생
1380년대 초중반
사망
1448년(향년 60대)
능묘
현빈심씨묘(賢嬪沈氏墓)[1]
재위기간
조선 왕세자빈
1397년 10월 26일 ~ 1398년 10월 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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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
부유 심씨
부모
부친 부성군 심효생
(富城君 沈孝生, 1349 ~ 1398)
모친 정경옹주 류씨
(貞慶翁主 全主 柳氏)
배우자
의안대군
자녀
슬하 1남
아들 - 원손(元孫, 1398 ~ 조졸)
봉작
현빈(賢嬪)
삼한국대부인(三韓國大夫人)

1. 개요
2. 생애
3. 가계도



1. 개요[편집]


태조 이성계의 8남 의안대군 이방석의 2번째 부인. 아버지는 부성군으로 봉해진 심효생이며 어머니는 정경옹주로 봉해진[2] 유습의 딸인 유씨이다. 본관은 부유 심씨이다.

2. 생애[편집]


의안대군의 1번째 부인이었던 현빈 유씨가 폐출된지 1년 3개월만인 1394년 10월 왕세자인 의안대군과 혼인하여 현빈에 봉해졌다. 그러나 1398년 1차 왕자의 난 이후 왕세자 의안대군이 폐해지자 그녀는 폐세자빈이 되었는데 그녀의 아버지 심효생은 숙청되었으며 남편 의안대군은 살해되었다. 의안대군과의 소생으로는 1398년에 낳은 아들이 있었지만 남편이 사망한 이후, 기록이 전혀 남지않아 생사여부를 알 수 없어 아무래도 역시 당시 숙청의 칼날을 피하지 못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 그녀는 먼저 출가한 시누이 경순공주를 따라 정업원에 출가하였으며 정업원에 여승으로 머물던 공민왕혜비 이씨가 사망하자 정업원 주지로 임명되었다.[3] 이에 앞서 태종 재위 초기에는 동서인 무안대군의 처 왕씨와 함께 외방으로 내쳤다는 기록이 있으나[4] 이후 도성으로 돌아와 정업원에 살며 주지가 된 것으로 보인다.

후일 삼한국대부인에 봉해진다. 후사가 없어 의안대군에게 세종의 6남 금성대군 이유가 봉사손으로 입적되었다가 금성대군 사사 이후에는 세종의 서5남 밀성군의 아들 춘성군이 봉사손으로 입적되었다. 심씨는 왕자의 난이 발발한지 50년만인 세종 30년(1448년)에 사망했다.[5][6]

3. 가계도[편집]


  • 조부 : 심인립(沈仁立) - 금주 지사(錦州 知事)
  • 조모 : 황공로(黃公老)의 딸
    • 부 : 조선의 개국공신 예문관대제학 부성군(富城君) 심효생(沈孝生, 1349년 ~ 1398년)
    • 모 : 정경옹주 전주 유씨(貞慶翁主 全州柳氏) - 유습(柳濕)의 딸
      • 오빠 : 세종 때의 호조판서, 형조판서 심도원 (沈道源, 1375년 ~ 1439년)

  • 남편 : 폐세자 이방석(廢世子 李芳碩, 1382년 ~ 1398년)
    • 장남: 원손, 이름미상(元孫, 1398년 5월 29일/6월 14일 - 1398년 8월 26일/10월 6일) - 출생 기록만 남겨져 있다.조졸한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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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남편의 무덤 바로 아래에 위치해있다.[2] 태조실록 7권, 태조 4년 2월 13일 정축 5번째기사 "심효생의 부인 유씨(柳氏)를 정경 옹주(貞慶翁主)라 하였다."[3] 태종실록 15권, 태종 8년 2월 3일 임오 1번째기사 "혜화 궁주(惠和宮主) 이씨(李氏)의 상(喪)에 부의(賻儀)를 내려 주었다. 궁주(宮主)는 고려(高麗) 시중(侍中) 이제현(李齊賢)의 딸인데, 공민왕(恭愍王)이 아들이 없어 후궁(後宮)에 뽑아들여 혜비(惠妃)로 봉(封)하였고, 뒤에 여승(女僧)이 되어, 정업원(淨業院)에 머물러 있었다. 쌀·콩 30석과 종이 1백 권을 부의(賻儀)로 주고, 소도군(昭悼君)의 처(妻) 심씨(沈氏)로 대신 정업원의 주지(住持)를 삼았다."[4] 태종실록 5권, 태종 3년 1월 4일 임오 2번째기사 "고(故) 세자(世子)의 빈(嬪) 심씨(沈氏)와 무안군(撫安君)의 처 왕씨(王氏)를 외방으로 내쳤다. 헌사(憲司)에서 심씨·왕씨가 원망하는 말이 있다고 상언(上言)한 때문이었다."[5] 세종실록 122권, 세종 30년 11월 23일 을사 1번째기사 ""이제 소도공 부인(昭悼公夫人) 심씨(沈氏)가 죽었으니 예장(禮葬)으로 할 것인가. 만약 예장으로 하면 어떤 예(例)를 쓸 것인가. 또 금성 대군(錦城大君)이 소도공의 뒤가 되었으니, 마땅히 중복(重服)을 입어야 할 것이나, 기질(氣質)이 여의고 약하여, 삼년상을 입으면 참지 못하는 바가 있을 것이다. 무릇 남의 뒤로 들어간 자는 본종(本宗)을 위해서는 강복(降服)하는 것이나, 대군(大君)과 같은 이는 이 예(例)가 아니니, 내게는 마땅히 삼년상을 입어야 할 것인데, 또 심씨를 위하여 삼년상을 입는 것은 또한 어렵지 아니한가. 어떻게 처리해야 할까.""[6] 여담으로 그녀는 조카 며느리격인 소헌왕후보다 무려 2년이나 더 살다가 갔는데, 세종 역시 2년 터울로 숙모인 심씨가 사망하고 2년만인 1450년에 승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