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SP미디어/RBW 인수 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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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룹 ]
데뷔 / 계약일
아티스트
팬클럽
1992.02.21
ZAM
-
1993
코코
-
1994.01.01


1996
마운틴

1996.02
IDOL

1997.04.15
젝스키스
옐로우키스
1998.05.12
핑클
핑키
1999.08.07
클릭비
NIZI
2003.09.08
투샤이

2004.01.20
샤인

2005.06.08
SS501
트리플 S
2007.03.29
카라
카밀리아
2008.04.24
에이스타일

2009.11.14
레인보우
레인너스
2012.04.07
퓨리티

2012.06.02
A-JAX
A-LIGHT
2015.08.24
APRIL
파인에플
2017.07.19
KARD
HIDDEN KARD
2021.03.17
미래소년
NOW
2023.10.18
YOUNG POSSE

굿펠라스엔터테인먼트 인수
2022.12.12
가비엔제이

2022.12.12
베이비블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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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이호연 사장 재직 시절
2.1. 소속 연예인 관리
2.1.1. 방목형(?) 관리
2.1.2. 뽑은 즉시 데뷔
2.1.3. 젝스키스와의 관계
2.1.4. 젝스키스 팬덤과의 관계
2.1.4.1. 최악으로 치달은 관계
2.1.4.2. 재결합 후 DSP의 언플에 대해서
2.1.4.3. DSP 루머 문서 다중 계정 적발 사건
2.1.4.4. 멤버 영입과 강성훈 역할에 대한 거짓말
2.1.4.5. 이후 팬덤의 태세전환
2.1.5. 기타 소속 가수들과의 관계
2.2. 계약관련
2.2.1. 계약서 관련 젝스키스 팬덤의 비난
2.2.1.1. 반박
2.2.2. 강다니엘 계약 분쟁 관련 루머 유포
2.2.2.1. 반박
2.3. 노래 스타일
2.4. 안목과 캐스팅
2.5. DSP가 한국에서 최초로 시도한 사항들
2.6. 기획력
2.6.1. 해외 진출 실적
2.7. 취약한 언론플레이 능력
3. 이호연 사장이 물러난 이후


1. 개요[편집]


DSP미디어, 그들이 남긴 의미있는 족적

DSP미디어의 RBW 인수 이전 특징을 정리한 문서.


2. 이호연 사장 재직 시절[편집]


RBW 인수 이전 시기도 2010년 이호연 사장의 뇌출혈을 기점으로 크게 나뉜다. 2000년도 대학원 논문[1]을 보면 DSP에 대해 "대표자가 전 가수들을 총괄 기획하고 제작이나 각종 결정권에 큰 영향력을 행사" "모든 체계가 중앙집중적으로 편중되어 있어 전형적인 개인형 매니지먼트 구조"라고 분석하고 있다. 그가 뇌출혈로 쓰러진 후 DSP가 쇠퇴하자 이 점이 더욱 부각됐고, 이호연의 경영능력을 높이 평가하는 기사들도 나왔다.[2][3]


2.1. 소속 연예인 관리[편집]


전술한 바와 같이, 이 회사는 2010년 이호연 대표가 뇌출혈로 쓰러지기 전과 후가 많이 대비된다. 2010년 이전에는 과도한 스케줄이 문제될지 언정, 소속 아이돌이 뜨질 못해 팬들이 안타까워하는 일은 거의 없었다. 몰아붙여서 스타로 확실히 만들어 줬고, 곡을 받아오는 능력이나 방송에 꽂아넣는 능력도 좋았다. 전술했다시피 젝스키스의 경우 데뷔하자 마자 무려 11개의 프로그램에 고정으로 출연했다.[4] 지상파 3사가 전부이던 시절임을 감안하면 엄청난 푸쉬 능력이다. 반면 2010년 이후의 DSP는 소속 아이돌을 제대로 케어하지 못하고 있다. 곡빨이나 프로그램 섭외력도 약하다는 평이 많아졌다.[5]

이런 상황에서 대중들에게 안타까움을 받은 그룹이 레인보우였다.[6] 이는 2009년 말에 데뷔했더니 바로 2010년 3월 사장이 쓰러지면서 회사가 쇠퇴해 갔기 때문일 것이다. 이호연 사장 시절 멤버를 하나하나 잘 뽑아놓고 데뷔는 시켜 놓으며 많은 기대로 dsp의 불꽃이 될 뻔 했으나 이후 회사 상황 자체가 바뀌어 버려서 서포트가 부족했다는 평이 많다.


2.1.1. 방목형(?) 관리[편집]


팬들 사이에서는 소속 가수 관리를 안 하기로 유명하다. 마치 평화로운 염소들이 초원을 뛰놀게 하는 마냥 거의 내버려두다시피 하는 방목형 관리를 보여줘 원성이 높다. 이로 인해 붙은 별명이 목장이다. 그런데 목장 경영이 무조건 안 좋은 건 아니다. 나름대로의 장점은 있다. 소속 가수들을 전혀 관리하지 않아 진정 실력있고 능력있는 아이들만 살아남을 수 있는 환경이 구성되어 있다.[7][8]

DSP 소속 걸그룹은 독보적인 기행으로도 유명했다. 대표적인 경우가 지금까지도 영상, 방송캡쳐 및 활동 시절 일화가 짤방으로 전해지는 핑클, 카라, 레인보우. 또한 소속가수의 병역이행 면에서도 희귀한 사례를 남겼는데, 오종혁의 경우 무려 해병대사령관에게 전역연기 신청을 냈다.

또한 DSP의 전통이라면 소속 연예인이 항상 본명으로 데뷔했다.


2.1.2. 뽑은 즉시 데뷔[편집]


DSP미디어는 일명 뽑즉데로 유명하다. 즉, 인재를 발굴했으면 적응기간이 없거나 짧게 두고 바로 무대에 올려버린다. 일례로 핑클의 경우만 하더라도 옥주현은 아무것도 안한 연습생을 데려다가 장기간 키워서 데뷔시킨 게 아니라 성악가 훈련으로 아주 다지고 다져진 기본기를 갖춘 연습생을 데려다가 바로 핑클의 멤버로 넣었고 이효리 역시 처음부터 댄서로서 완성된 자질을 바로 넣은 것이다. 이를 인정하는 옥주현의 발언도 있다. 노래 안 되고 춤도 안 되는데 '연습생 시절'이란 것도 없이 그 상태로 데뷔를 시켰다고 하였다.


2.1.3. 젝스키스와의 관계[편집]


젝스키스 해체 이후 멤버들이 직접 이호연 사장에 대해 언급한 바를 보면 다음과 같다.

은지원, 장수원, 김재덕은 2013년 DSP 페스티벌에 참석해서 공연을 펼쳤다. 은지원은 "사장님 이야기를 안 할 수 없다. 사장님은 늘 우리가 무대를 하면 뒷편에 서서 함께 해주셨다. 오늘은 몸이 좋지 않으셔서 참석 못하셨다"라며 "사장님 덕에 우리가 아직도 이렇게 무대에 설 수 있는 것 같다"며 고마움을 전하며 "의리"를 외쳤다. 이어 김재덕 역시 "이호연 사장님의 빠른 쾌유 바란다"고 덧붙였다.##

김재덕은 OBS와의 인터뷰에서는 "젝스키스가 있기까지 DSP라는 기획사가 있었고, 또 사장님에게 고마움을 많이 느끼고 있기 때문에 출연 결정을 하게 됐다"고 말했다.영상 22초부터

강성훈은 2015년 1월 30일 러빙핸즈에서 "팬들은 (이호연 사장님을) 안 좋아하지만 DSP 사장님이 젝스키스를 위해서 많은 일은 하신 건 맞아.. 마지막에 안 좋게 끝나서 그렇지."라고 말했다.

이재진의 경우 싫어하는 것으로 보인다. 과거 싸이월드 시절 호연이라는 이름을 가진 팬이 글을 남기자, 답글로 "호연이라.."라며 불편한 기색을 드러냈다.[9]

기타 김현중의 2013년 아시아 경제 인터뷰#에서 "은지원 형도 이효리 누나도 다 지금은 이적을 했지만 전 회사를 그리워해요. 사실 회사를 옮기고 나서 이전 회사를 그리워하는 경우는 많지 않잖아요. 하지만 모두가 그리워하는 걸 보면 사장님은 참 좋고 대단한 분이셨던 것 같아요. 역시 정이라는 것은 위대하다는 걸 느끼죠."라고 말한 바 있다.

2016년 라디오 스타에 출연해서 해체이유에 대해 말했는데, 이호연 사장과의 관계가 아니라 가깝게 지내던 매니저(김기영으로 추측됨)와의 사이가 나쁜 것이 원인이었다고 밝힌바 있다.


2.1.4. 젝스키스 팬덤과의 관계[편집]



2.1.4.1. 최악으로 치달은 관계[편집]

젝스키스 팬과의 이호연의 관계를 보면, 젝스키스 활동 당시 오빠들을 무리한 스케줄로 혹사시켜서 번 돈을 젝스키스에게 제대로 안 주고 핑클에게 쏟는다며 이호연 사장을 엄청 욕했고, 핑클에 대한 안티 활동도 심했다.#[10] 이후 젝스키스가 해체하면서 그 관계는 최악으로 치닫는다. 훗날 멤버들 말에 따르면 강제해체는 아니고 해체 의향이 있는 멤버들이 다수였다. 다만 해체에 소속사 책임을 부정할 수는 없다. 아무튼 당시 팬들은 해체 전날 멤버들이 전화로 일방적으로 해체를 통보 받고 강제 해체 됐다고 굳게 믿었다. (심지어 오늘날도 그렇게 믿고 있는 팬들이 있다.) 핑클 멤버들의 성격이 억셌기에 다행이지 소심했으면 핑클은 진작에 공중분해 되었을 것이다.

그렇게 믿은 결과의 상징적인 예시가 조영구의 차를 박살낸 사건이다. 젝스키스가 해체한 날 팬들이 몰려가 조영구 차를 이호연 차로 생각하고 반파될 정도로 완전 부셔버렸다. 차종이 그랜저 XG로, 산 지 보름도 안 된 것이었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차 안에 있던 조영구씨의 옷가지나 소지품 등도 도난당했다. 기사, 기사

이로 인해 현장에서 몇 명의 고교생 팬들이 경찰에 잡혀서 파출소로 연행되었을 때 조영구가 차마 학생들을 처벌해달라고 할 수가 없어서 그냥 차비까지 줘가면서 집으로 보냈다고 훗날 토크쇼에서 밝혔고[11], 이후 팬클럽에서 공식적으로 조영구에게 사과를 하고 조영구도 용서를 하면서 상황은 일단락됐다. 팬들이 십시일반으로 보상금을 모금하기도 했으나 모금한 인원이 20여명이었고, 어린 중고등학생들이 모은 돈인지라 액수가 적어서 조영구 측에서 거절했고[12], 보상은 젝스키스 소속사 이호연 사장에게 받았다고 한다. 당시 수리비 견적이 1100만원이 나왔고, 1100만원 전액 이호연 사장이 보상했다고 밝혔다.기사.

오늘날 기준으로 보면 고급 차종이 반파됐는데 겨우 1100만원 보상하냐고 볼 수도 있는데, 당시 그랜져 XG의 신차가격이 2000만원 할 때다.기사 저 정도 수리비면 아예 다 갈아엎어 수리한 정도다. 그리고 저 정도 수리비면 새차 사다가 일주일 타고 중고차 시장에 매물로 내놓은 가격이기도 하다.

이외 당시 "미친 개호연 새끼 뒈지는 날 우리젝팬들 얼굴에 비로소 웃음꽃이 핀다."는 문구로 회사 사장 이름을 대놓고 욕하며 활보하고 다녔다.사진 그나마 이런 문구는 애교로 보일 정도인 다음과 같은 문구들이 있었다. "D.S.P 두고 보자 / 개좇십창 창녀 썅클 / 썅클은 창녀래요 / 뻑큐 씹탱 개호연 / 이호연 죽여라 / 창녀 핑클 / 이호연 너 나랑같이 죽자 / 이호연 너의 정력에 무릎을 꿇는다 / 이호연 제삿상에 옥돼지 머리 놔주마. / - 호연씨 사랑해요. 당신의 효리가 - / 이호연 너의 그녀들을 찾으려면 창녀촌으로 오너라 / 나는 개호연이다 나는 미친놈이다 나는 오늘 뒈졌다 속보 6월18일 2시 이호연 젝스키스 팬에게 맞아 사망."# 당시에는 각주와 같은 경악할 수준의 루머를 퍼뜨리는 경우도 많았다.[13]

그리고 2000년 6월 8일 시사프로 피자의 아침 방송을 보면 당시 사무실 경호회사 직원이 다음과 같이 인터뷰 하고 있다.

"(5월) 18일.. 농성을 부리고 여기에다 계란 세례나 밀가루, 식초 이런 것들을... 난동을 부려가지고..."

이 정도면 오늘날 기준이라면 폭처법까지 적용이 가능해서[14] 징역을 정말 제대로 살게 된다. 아마 교도소 안에서 FIFA 월드컵 2번~3번을 보고 출소하게 될 것이다.

젝스키스 재결합 당시 팬들 활동이 활발해지면서 이호연에게 쌍욕하는 글도 다시 많아졌었다. 6년째 식물인간처럼 누워있는 노인네가 갑자기 젝스키스 팬들에게 각종 쌍욕과 패드립을 엄청 먹었다. 젝스키스 데뷔때는 태어나지도 않거나 애기였던 신규 입덕 팬들도 올드팬들 말에 따라서 욕하며 움직였다. 그러나 과장과 허위 정보를 가지고 욕하는 부분이 많아 문제다. 자세한 내용은 젝스키스/DSP 관련 루머 문서 참조. 오늘날 악플에 대한 고소와 처벌 사례를 비추어 봤을 때, 올라온 글들을 보면 빼박캔트 처벌 당할 수준이다.


2.1.4.2. 재결합 후 DSP의 언플에 대해서[편집]

2016년 젝스키스의 재결합 후 YG엔터테인먼트와의 계약 소문이 돌자, 이호연 전 사장이 거동불가능한채 누워있는데 인사는 하러 왔어야 하지 않냐며 YG에 앞서 DSP에 연락했어야 한다는 언플 기사가 나왔다. 이에 대해 젝스키스 팬들이 몰려와서 해당기사 댓글은 악플 일색이다해당기사. 6년째 거동불가능하고 말을 못하는 상태로 누워있는 이호연이 기사를 냈을리는 없는데, 병상에 누워있다 뜬금없이 욕을 엄청 먹게 되었다.

위 언플은 이호연 사장의 공로를 부각시키는 효과보다는, 대량의 악플과 허위 루머 유포 같은 부작용이 더 컸다. 최다추천 댓글 내용들을 보면 허위루머의 총집합 편일 정도이다. 강제로 해체당했다, DSP 측이 젝스키스 상표권 신청했다가 거절당했다, 젝스키스로 소속사가 300억이나 벌었다, 밤무대 돌렸다, 술자리 불러냈다, 3000만원 행사 뛰고 80만원 받았다는 등의 내용인데, 젝스키스/DSP 관련 루머 문서에서 보듯이 이는 사실로 보기 어렵다. 그러나 팬들에 의해 최다추천에 박아놨으니, 이 기사를 계기로 일반인들이 그런 루머를 믿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렇지만 해당 언플 기사를 낸 DSP 또한 비판을 피할 수는 없다. 젝스키스 시절 회사와 트러블이 심했다는 것은 사실이고, 젝스키스 팬덤이 이호연 사장에 대해 악플로 도배할 것은 불 보듯 뻔한 상황이었다. 특히 요즘 대중들은 저런 식의 기사를 "앞에 인사 얘기는 그냥 쓴 것이고 결국 DSP랑 계약하자고 언플한거네"라고 받아들인다. 실제로도 그런 목적이 있었다면 어리석은 판단이다. 왜냐하면 DSP에 대한 일반인들 시선조차, 이호연 사장이 쓰러진 이후 회사가 쇠퇴하여 젝스키스를 감당할 능력이 안된다고 봤기 때문이다. 젝스키스 멤버들 생각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결국 아무 성과 없이 욕만 먹은 언플이다. 이호연 사장이 물러난 이후 각종 오판들로 쇠퇴한 경력을 봤을 때, 그런 오판들의 연장선 상에 있다고 보인다.

물론 이호연 사장이 젝스키스를 만들고 키웠으니, 6년째 식물인간처럼 누워있는 사장한테 병문안 좀 오라고 말할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이야기는 개인적으로 하면 될 일이지, 저런 식으로 언플할 사안은 아니었다. 게다가 말도 못하고 거동불가능한 상태인 이호연이 기사에서 나오는 의견을 개진했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 아예 저런 기사가 나왔다는 사실조차 모를 가능성이 높다. 기사 대부분이 기자의 상상이거나 DSP 측의 의견일 것이다.

이 언플에 대해 젝스키스 팬들은 이호연 병문안이란 말을 꺼낸 것이 있을 수 없다는 식의 반응으로 도배했다. 그러나 젝스키스 팬덤이 이호연과 최악의 관계지, 위 목차에 서술되어 있듯이 젝스키스 멤버들이 이호연과 그런 최악의 사이는 아니다.

이외 팬들은 이호연과 소속사는 젝스키스에게 제대로 해준 것이 없고, 젝스키스 멤버 본인들 매력과 능력으로 뜬 것인데 뭔 염치없는 소리를 하냐는 주장을 했다. 하지만 전혀 말이 안되는 억지다. 소속사가 키우는 것이 아이돌이다. SM과 비교해서 부족한 면이 없다고는 할 수 없지만, 분명 DSP와 이호연 능력으로 성공한 것이 사실이다. 멤버 뽑는 것, 유명 작곡가한테 좋은 노래 받아오는 것, 공개방송에 출연시키는 것 등 모두 소속사의 몫이다. 오히려 DSP가 아니었으면 당시 SM의 독주에 누가 제동을 걸었을지 의문이다.

우선 그 정도 수준되는 멤버들이 한 팀에 모인건 DSP와 이호연 역할이 컸다. 2016년 라디오스타 방송을 계기로 팬들은 강성훈이 젝스키스 멤버를 구성한 것이지 이호연은 젝스키스를 만든 것에 1도 한 것이 없다는 주장을 했는데, 사실관계를 살펴보면 전혀 아니다. 일단 은지원, 강성훈 2명은 이호연이 하와이에 가서 직접 데리고 왔다. 이호연 사장이 하와이의 클럽 사장과 친분이 있어 둘을 발견할 수 있었다. (SBS 땡큐 130329일자 방송 참조)

장수원은 기존 인터뷰에서 밝혀진 바에 따르면, 사장도 강성훈과 마찬가지로 솔직한 모습을 마음에 들어해서 뽑고 싶어 했다. 김재덕과 이재진은 이호연이 인맥이 있던 이주노 소속사에 찾아가 직접 데려온 인물이다. 이호연이 이주노와 형 동생 하는 사이로 가까웠기에 가능한 일이었다.[15] 김재덕의 경우 장수원 폭로에 따르면 사실 강성훈이 뽑기 싫어했다. 즉, 강성훈이 젝스키스를 만들었다는 것은 사실과 전혀 다르다.

그리고 비싸고 좋은 작곡가를 많이 섭외해서 겨우 3년 활동인데도 명곡들이 많다. 해체 후 16년이나 지나서 단독 콘서트를 열었지만 오늘날 들어도 좋은 노래가 많아 세트리스트를 충분히 채웠다.[16] 이에 대해 팬들은 작곡가가 곡을 만든거지, 소속사랑 사장이 한게 뭐냐고 욕하는데, 당연히 말이 안되는 소리다. 기획사가 아이돌에게 해줄 수 있는 최고의 서포트가 좋은 작곡가로부터 대박날 수 있는 곡을 받아오는 일이다. 이 능력 여부에 따라 아이돌의 성공이 결정난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다. 2016년 기사만 봐도, 젝스키스를 스타덤에 올려놓은 곡 폼생폼사는 이호연 인맥으로 신인 작곡가를 발굴해 대박을 터뜨린 사례이다#. 이호연이 쓰러진 이후의 DSP가 레인보우에게 블랙스완같은 희대의 망곡을 주면서 못 띄우는 것만 봐도, 소속사 사장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 수 있다.

이외 이호연 까는 용도로 '젝스키스라는 이름 조차 MBC PD 은경표가 지어줬는데 이호연은 한게 뭐냐'는 말이 많은데, 그 MBC 은경표 PD가 이호연 인맥이다. 하와이에서 강성훈과 은지원을 스카웃 했을 때, 이호연이 하와이에 간 이유가 은경표 PD랑 놀러간 것이었다. 사장이랑 친분이 두터우니 고민을 거듭해서 젝스키스라는 퀄리티 좋은 이름을 지어준 것이지, 그렇지 않으면 이름을 지어줄 리도 없었다.

애시당초 데뷔하자마자 H.O.T.의 라이벌 포지션으로 언론의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주요 방송에 출연한 것은, DSP가 아니면 거의 불가능했다. (당시의 DSP 위상은 지금과 전혀 다르다) 데뷔하자마자 무려 11개의 프로그램에 고정으로 출연하는 푸쉬를 받았다. 당시 지상파 3사가 전부고 케이블 방송이 거의 없었던 시절 임을 감안하면 엄청난 푸쉬 능력이다. 경희대 논문[17]을 보면 그 이유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같은 매니지먼트사에 소속된 가수들의 활동은 각각 독립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출연 프로그램이나 음반활동이 서로 맞물려 있음을 알 수 있다. <DSP> 소속의 젝스키스가 1998년 7월, 3집 앨범을 낼 때 핑클이 데뷔했고, 1999년 8월에 젝스키스 4집 앨범 발매와 맞추어 클릭B가 데뷔했다. 그리고 젝스키스의 경우도 데뷔 앨범은 1997년 5월 14일에 발매되었지만 첫 방송 출연은 그보다 한 달 전인 1997년 4월 15일에 있었고 1집 발매 직후부터는 11개의 프로그램에 고정으로 출연하게 되었다. 이처럼 젝스키스가 데뷔 전후부터 왕성한 활동을 하게 된 데에는 당시 이 매니지먼트사에 MBC 라디오와 KBS 라디오의 간판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두 탤런트가 있었기 때문이다. "박소현, 이본, 오현경은 연기와 MC 등에서 다양하게 활동하고 있기 때문에 이들이 출연하는 프로에 소속 가수들을 홍보하기가 훨씬 용이하다. 물론 실력도 없는 가수를 안면이 있다는 이유로 출연시키면 말도 안되겠지만, 어느 정도 기본을 갖추었다 싶을 때 다양한 홍보채널을 이용하고, 그랬을 때 이왕이면 같은 소속사 연예인이 진행하거나 출연하는 프로에 함께 출연할 수 있도록 배려하는 것은 방송가의 일종의 관행이기 때문이다."(DSP 사장) 이처럼 이미 다른 스타를 통해 방송가와 인맥을 쌓아 놓은 기존 매니지먼트사들은 그 회사의 신인을 홍보할 때 기존의 스타를 이용하게 된다. 이러한 홍보방식은 방송사와 매니지먼트사 양측 서로의 필요에 의해 이루어진다고 볼 수 있다. 방송사에서는 스타를 섭외해야 할 필요가 있고 매니지먼트사에서는 신인을 홍보해야 할 필요가 있으므로 이 두 가지가 맞물려 '끼워팔기'라는 기존 스타를 활용한 홍보방식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위 논문에 나온 다른 내용을 보면, "젝스키스가 음반을 내기도 전인 1997년 3월부터 각 통신망에 멤버들의 사진과 새로 나올 음반에 대한 정보들이 제공됐다. 그로 인해 젝스키스는 매체에 출연하기도 전부터 10대들에게 알려지게 되었고 데뷔 무대 때부터 팬들이 따라다니기 시작했다."고 쓰고 있다. 당시로서는 최초이자 혁명적인 방법이었다.

데뷔 이후에도 최고로 인기있던 프로그램들에 젝스키스가 무수히 많이 출연했는데, 소속사의 파워가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또한 스케줄을 매우 빡세게 돌려 원망을 들었지만, 그렇게 쉴 새 없이 앨범을 내며 몰아부쳐 H.O.T.를 따라잡았기에 불가피한 측면이 있었다. 2011년 KBS 해피투게더에 출연했을 때 이에 대한 증언이 나왔다. 영상의 6분 20초부터 나온다.

여기서 은지원이 밝힌 바에 따르면, "여러 사람들이 H.O.T.와 라이벌이라고는 하지만, 데뷔초에는 인기 격차가 너무 커서 따라잡기가 너무 벅찼다. 콘서트를 하면 계란 후라이였다."고 한다.[18] 하지만 H.O.T.는 활동 후 휴식기가 길었던 반면, 젝스키스는 쉬지 않고 1년에 2~3장 씩 앨범을 내며 활동해서 팬을 늘려가, 따라잡을 수 있었다고 밝혔다.[19]

근본적으로 DSP 자체가 거의 이호연 사장의 카리스마, 인맥, 그리고 감으로 유지되던 회사였다. 당시에는 이호연 대표가 건재할 때고, 그 덕분에 젝스키스 역시 성공하는데 큰 힘을 받았다. 그가 뇌출혈로 쓰러진 후 DSP가 쇠퇴하자 이 점이 더욱 부각됐고, 이호연의 경영능력을 높이 평가하는 기사들도 나왔다.[20] 이런 의미에서 도의적으로 뇌출혈로 6년째 누워있는 사장한테 인사 좀 하러 오라는 말을 할 수는 있을 것이다.

재결합시 DSP와 계약하지 않은 이유에 대해, 젝스키스 멤버들은 2016년 12월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밝혔다. 참고로 이호연은 명목상 대표로 되어 있을 뿐, 2010년 뇌출혈 이후 현재까지도 병상에 누워있어 사실상 없다시피 하다. 거동이 불가능하며 감정 표현 정도가 가능한 상태라고 알려져 있다.

“DSP미디어는 우리가 활동할 당시와 전혀 다른 회사였다.”

그룹 젝스키스가 재결합 활동을 데뷔 당시 소속사인 DSP미디어와 협의하지 않은 이유를 이 같이 밝혔다. 젝스키스는 1일 서울 마포구 YG엔터테인먼트 사옥에서 가진 인터뷰에서 “재결합을 하며 DSP미디어를 생각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면서도 “(과거) 대표님은 편찮으시고 매니저는 단 한명도 누군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전혀 다른 회사였다”고 말했다. 은지원과 제이워크로 활동했던 장수원, 김재덕은 과거 DSP미디어 가수들이 모두 출연한 패밀리 콘서트에도 출연한 적이 있다. 당시에도 과거 함께 일했던 매니저는 없었다고 했다.

http://entertain.naver.com/read?oid=018&aid=0003690448

과거 소속사였던 DSP미디어와의 연결점

“DSP는 우리가 알던 과거 소속사가 아니었어요. 이호연 대표님 말고는 우리가 아는 스태프는 아예 없죠. 다른 회사가 돼 있는 곳이라 교감할 수 없었어요.”(장수원 강성훈 은지원)

http://allets.com/bbs/board.php?bo_table=allets&wr_id=656&sca=STAR

과거 소속사 DSP미디어가 아닌 YG와 손을 잡게 된 이유도 솔직하게 전했다. 은지원은 "예전에 DSP 패밀리 콘서트에 갔는데 저희가 활동할 때 있던 분들이 단 한분도 없었다. 이호연 사장님 외에 다른 회사가 되어있어서 당황스러웠다"고 말했다.

http://entertain.naver.com/read?oid=111&aid=0000473169


이 말은 적당히 둘러댄 말이 아니라 사실이라고 판단된다. 왜냐하면 2011년 카라 전속계약해지 통보 사건에서, 카라 측의 주장과 같은 내용이기 때문이다. 젝스키스도 저런 말을 할 정도면 당시 카라 측의 주장도 맞았었다고 생각된다.

현재 카라 측은 dsp의 매니지먼트 미숙에 대해 강한 불만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특히, 이들이 문제로 삼는 것은 카라 매니지먼트를 총괄하는 dsp 이호연 사장의 부인이다.

작년, 이호연 사장이 뇌출혈로 쓰러진 이후 사장 부인이 경영권을 쥐게 된 가운데, 그녀는 연예 소속사 관리 경험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소속사 경영을 시작, 그로 인해 많은 중역 간부들이 회사를 떠났다고 한다. 이들 중역 간부 또는 베테랑 직원들은 핑클, ss501 등의 매니지먼트 경험을 가지고 있는 매니지먼트 전문가들이었다.

또한 사장 부인은 카라의 매니지먼트를 함에 있어서도, 세세한 것까지 일일이 지지해 카라 멤버들과 갈등이 생기기 시작했다는 것이 카라측의 주장이다.

요컨대, 이호연 사장이 자리를 비우고나서 dsp의 매니지먼트가 매우 부적절하고 미숙했고, 이것이 이번 계약 해지 소동의 본질이라는 것이다. 변호사측은 “능력 있는 전문적인 소속사를 찾고 있다”고 언급했다.

http://jpnews.kr/8368



2.1.4.3. DSP 루머 문서 다중 계정 적발 사건[편집]

2016년 젝스키스가 재결합 한 이후 젝스키스 팬덤은 과거 젝스키스가 당했던 일이라며 각종 커뮤니티에 많은 글들을 올렸고, 이호연 사장에 대한 수많은 욕설과 모욕 글을 게시했다. 그러나 당했다고 하는 내용 중 대부분이 과장되거나 허위사실이어서 문제다. 이에 대한 자세한 내용이 젝스키스/DSP 관련 루머 문서에 서술되어 있다.

해당 문서는 2016년 말 젝스키스 팬덤으로 추정되는 외부세력에 의해 수차례 문서훼손을 당하였다. 결국 편집제한이 오랫동안 걸려졌었다. 이후 토론으로 넘어와서도 문서를 지우려는 불법적인 행동이 이어졌고, 결국 토론의 대다수 계정이 다중계정으로 발각되어 영구차단 당하는 사태로 까지 번졌다.# 동일인물이 다른 사람인 척 하며 글을 수백개 올려 문서를 지우려 했다. 그러다 아이디를 헷갈려 글을 쓰는 바람에 들통이 났고,# 관리자의 조사 결과 다중이 짓이 매우 광범위하게 벌어졌음이 드러났다. 토론에서 다른 사람인 척 하며 여론을 조작하는 행위는 중대한 규정 위반으로 영구차단 대상이다.


2.1.4.4. 멤버 영입과 강성훈 역할에 대한 거짓말[편집]

앞에서 간략히 언급했는데, 젝스키스 팬덤의 태세 전환이 독보적으로 보이는 사안이라 자세히 서술한다.

2016년 라디오스타에 출연한 강성훈은 다음과 같은 내용의 발언을 했다.

당시 은지원과 강성훈의 듀엣에서 6인조 아이돌그룹으로 노선이 변경되었는데, 강성훈은 반발하여 자신은 그만 두겠다고 말했다. 이에 사장이 "네가 OK한 사람으로 뽑겠다"며 설득했다고 한다. 그래서 강성훈이 오디션장에서 이호연 사장 옆에 앉아 이야기하며 멤버들을 뽑았다. 장수원은 오디션 장에서 할 줄 아는게 없다고 말하는 순수함이 마음에 들어, 강성훈이 사장한테 귓속말로 "쟤 픽스 하시죠"라고 말했다고 한다. 김재덕은 워낙 춤을 잘 추니 사장이 처음부터 OK 했다. 근데 장수원 폭로에 따르면 강성훈은 김재덕 얼굴을 보고 뽑기 싫어했다고 한다. 이에 강성훈이 해명하길, 얼굴이 아니라 사투리가 너무 쎄서 오해했다고 밝혔다. 이재진의 경우, 강성훈 생각에 김재덕이 각기춤을 잘 추는 반면 이재진은 웨이브를 잘 춰서 조화가 맞아 보였다고 한다. 고지용은 강성훈과 초등학교때 부터 친구인데, 고지용이 강성훈에게 가수를 하고 싶다고 부탁하자 강성훈의 추천으로 젝스키스에 합류하게 됐다.


이호연 사장을 싫어하는 젝스키스 팬덤은 이 방송을 계기로 "젝스키스를 만든 것은 강성훈이지 이호연은 한 것이 없다"는 식의 글을 많이 퍼뜨렸다. 그러나 강성훈 발언 자체부터 다른 멤버들 발언과 어긋나는 부분이 많을 뿐더러, 사실관계를 따지면 젝스키스를 만드는데 제일 큰 공헌을 한 것은 이호연 사장이다.

우선 이재진의 영입은 기존 인터뷰에서 밝혀졌던 바에 따르면, 은지원과 김재덕이 사장과 매니저를 설득한 덕분이다. 원래는 이호연이 6명 멤버 중 이재진은 뽑기 싫어했다. 화면으로 보니 코가 커서 안 되겠다 했다고 한다. 이에 대해 99년도 출연한 서세원쇼나(영상 14분부터), 컴백 자서전의 김재덕 부분에 은지원과 김재덕이 회사를 설득했다는 이야기가 나온다.[21]

고지용의 경우 기존에 자서전 등을 통해 알려진 바에 따르면, 이호연이 처음 얼굴 보자마자 바로 OK해서 멤버로 영입하는데 문제가 없었다고 한다. 그리고 '고지용이 강성훈한테 가수를 먼저 하고 싶다고 말했다'라는 부분도 고지용 본인의 말과 다르다. 고지용은 자서전에서나 인터뷰에서나 늘상 원래는 "가수를 할 생각이 없었다."고 언급해왔고 방송에서도 사업가가 꿈이었다고 얘기했다. 또한 가수를 하게 된 계기를 물었을 때에도 '성훈이의 추천으로' 라고 대답했었다.

장수원의 경우 이호연 사장이나 다른 멤버의 발언에 따르면 다음과 같이 뽑혔다. 2차 오디션장에서 이호연 사장이 '잘 하는 게 뭐냐'고 장수원에게 물었는데, 장수원은 '아무것도 없는데요'라고 답했다고 한다. 그랬더니 사장이 솔직해서 좋다며 그대로 합격시켰다.

영입 과정 전반에 대해서 살펴보면, 이호연 인맥의 공이 제일 컸음을 알 수 있다. 일단 은지원, 강성훈 2명은 이호연이 친분이 있던 하와이 클럽 사장으로 부터 소개 받아 직접 데리고 왔다.(출처: SBS 땡큐 130329일자 방송) 그리고 나머지 3명도 강성훈이 아니었으면 젝스키스 멤버로 뽑히지 않았을거라고 볼 수 없다. 장수원은 전술한 바와 같이 사장이 솔직한 모습을 마음에 들어해서 뽑고 싶어 했다. 김재덕과 이재진은 이주노 소속사의 연습생이었는데, 이호연이 찾아가 직접 데려왔다. 이호연과 이주노가 형 동생 하는 사이일 정도로 친밀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책 '스타를 만드는 사람들'에 관련 이야기가 나온다. 고지용의 경우 강성훈을 계기로 소개받았으니 강성훈 공이 크다고 할 수 있다.

과거 컴백 자서전의 강성훈 부분에 적힌 관련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원문: 그러나 뜻밖의 상황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당시 서울에서는 한창 5명에서 6명 정도의 댄스그룹이 인기를 끌고 있었다. 나는 멤버의 수가 6명이 될 것이라는 사실에 실망했다. "사장님, 동물원 원숭이도 아니고 멤버가 그렇게 많은 그룹에서는 노래부르기 싫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어디서 그런 배짱이 튀어나왔는지 겁도 없이 사장님께 털어놓았다. 그리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가수의 꿈을 접고 다시 공부에 매달렸다. 사장님은 나를 설득하시는 한편, 어머니를 만나 내 마음을 돌려달라고 부탁하셨다. 나는 공부에 전념하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한번 품은 가수의 꿈이 쉽사리 지워지지 않는 것 또한 사실이었다. 이때 나의 마음을 돌려주신 분은 어머니셨다. "성훈아, 비록 어리지만 사장님과 이미 한 약속은 지켜야 되지 않겠니? 그리고 쉽게 네 꿈을 접을 수 있겠는지 마지막으로 다시 한번 생각해보렴" 어머니의 말씀이 옳았다. "어머니, 한번 해볼게요. 그 대신, 열심히 할 게요." 그리고 내 마음이 완전히 바뀐 것은 지금의 멤버들을 하나 둘 만나면서부터였다. 착하고 세련된 느낌의 수원이, 워낙 춤을 잘 추는 재덕이 형과 재진이 형을 보니 더욱 믿음이 갔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내가 소개한 지용이. 지용이는 전교 10등 안에 들 정도로 모범생이었지만, 어릴 때부터 나와 붙어다니던 춤꾼 중에 춤꾼이었다. 이렇게 여섯 명이 모이자, 나는 세상에 부러울 것이 없었고 잘해낼 자신감이 생겼다.


즉, 강성훈이 젝스키스의 결성에 영향을 준 것은 맞지만 라디오스타에서의 발언은 과장됐다. 젝스키스 팬들이 퍼뜨리던 "젝스키스는 강성훈이 만든 그룹이고 이호연은 한 것 없다"는 말은 더더욱 거짓이다. 애초에 강성훈이 원하는대로 였다면 젝스키스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강성훈이 싫어하던 김재덕이 초반부터 잘만 멤버로 가입된 것을 보면, 이호연 사장의 발언(네가 OK한 사람으로 뽑겠다)이 진심이었는지도 의문이다. 나 안하겠다는 16살 짜리 연습생을 달래느라 한 발언일 가능성이 크다. 사실 대형기획사가 사운을 걸고 런칭하는 아이돌을 16살 짜리 연습생이 전적으로 맡았다는 것 자체가 말이 안된다.[22]


2.1.4.5. 이후 팬덤의 태세전환[편집]

2018년 9월 강성훈의 팬클럽 문제, 대만 공연 문제 등 여러 구설수가 터지고 나서는, 위 발언이 거짓이었다는 글이 젝스키스 팬덤으로부터 나오고 있는 실정이다. 2016년도에 강성훈이 젝스키스 만들었다며 글 퍼뜨리던 것을 생각하면 180도 태도가 변했다.

위 내용이 젝스키스 문서에 작성된 후, ‘예능에서 재밌으라고 약간의 MSG를 첨가해서 한 발언일 뿐 심각하게 받아들일 필요가 없다’며 위 내용이 대거 삭제됐다. 물론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예능 발언을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러나 젝스키스 팬덤은 2016년경 젝스키스/DSP 관련 루머 문서에서 보듯이 이호연 사장에 대한 온갖 욕설과 허위루머를 유포했다. 그 과정에서 위 라디오스타 발언은 좋은 소재거리였다. 이호연은 한 것이 없고 젝스키스는 강성훈의 작품이라는 내용을 퍼뜨렸으며, 심지어 해외 케이팝 팬들한테도 그렇게 유포했다.[23] 이에 2018년 9월 강성훈의 불미스러운 사건이 터진 후에, 젝스키스는 강성훈이 만든 그룹이라는 옹호 글이 올라오기까지 했다.파일:bkshfalse.png

영문 위키피디아도 같은 취지의 내용으로 수정해놨었다.## 이렇게 잘못된 사실이 퍼뜨려진 상태라면, 그에 대한 반박 내용이 작성되어야 함은 당연하다. 당시 올라온 글의 예시는 각주 참조 바람. 글에서 보듯이 ‘개호연 욕하면서 안목 하나 땜에 깨림직했는데 ㅈㄴ 상쾌하다’ ‘저 새낀 결국 ㅂㅅ’ '역시 개호연 취향이 그리 고급질리없엇네' 등 모욕 글도 다수 올라왔다. 이래놓고 2018년 9월 강성훈 사건이 터진 후에는 팬덤이 나서서 본 문제에 대해 강성훈을 비난하니, 태도가 180도 바뀐 것이다.[24]


2.1.5. 기타 소속 가수들과의 관계[편집]


젝스키스 팬덤의 경우 전술한 바와 같이 최악의 관계였던 것과 달리, SS501 초창기 시절에는 훈훈한 일화들이 보인다. 어떤 일본 꼬마가 표를 잃어버려서 콘서트 못들어가고 있으니까, 왜 그러고 있냐며 사장이 대기실로 데리고 갔다고 한다. 그 꼬마랑 SS501이랑 밥도 같이 먹었다고.. 팬클럽 창단식 때는 팬들 700명이 밤새느라 밖에서 벌벌 떨고있으니까, 이호연 사장이 양해를 구해서 안에 리허설 보게 도와주기도 했다고 한다.# SS501 공방 뛰러온 팬들한테 슬쩍 다가가서 "지금 하는거 재밌니?" 라든지 "현중이 왜 좋아해?" "쟤네 인기 어느 정도냐"라는 등 어슬렁 거리며 말을 건냈다고 한다. 심지어 멜론콘서트 때는 초록색 옷 입고 팬들이랑 같이 풍선 흔들고 있었다고.. 뇌졸중으로 쓰러지기 직전인 2009년 일본 개그맨 게키단 히토리와의 일화영상에서, 게키단 히토리의 아내가 이호연을 사람 좋아보이고 친절한 분이었다고 회상하는 것을 보면 늙어서는 사람 자체가 온화해졌다고 생각된다. SS501 중후반기에는 무리한 일본 진출, 제대로 활동을 안시켜준 점 등으로 욕을 먹기도 했다. 다만 이때는 회사 자체가 백억대 부채로 휘청이던 때이긴 하다. SS501 막바지 상황은 젝스키스 해체 때와 같은 불미스러운 일은 없었다. 애초에 이호연 사장이 뇌출혈로 사경을 헤메던 상태로 회사 자체가 어수선해서, 멤버들의 계약을 연장할만한 여건이 안됐다.

SS501김현중의 경우 무릎팍도사에 출연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활동 당시 소속사 사장님을 아버지라 부르며 매우 가깝게 지냈다고 한다. DSP를 떠나기 전에 이호연 사장과 술자리를 가졌는데, 도저히 말이 안 떨어져 몇잔이고 술을 계속 마셨다고 한다. 그러다 이호연 사장이 '너 어떡할거냐? 있을거야? 말거야? 나갈려면 빨리 나가야지 서로 힘들게'라고 말했고, 김현중은 '사장님 곁이 아닌 다른 곳에서 일해보겠습니다'라고 했다”고 그때를 회상했다. 그러자 이호연은 힘든 거 있으면 말하라고, 회사 못 구해도 도와주겠다고 했다고 한다.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이호연은 뇌출혈로 쓰러졌는데, 김현중은 지금도 병문안을 종종 가고 있으며 솔로로 1위를 하면 꼭 사장님께 수상소감을 전하고 싶다고 말했다. 실제로 이후 솔로로 1위를 했을 때 그렇게 했다. 2013년 아시아 경제 인터뷰#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저를 데뷔시켜주신 DSP 이호연 사장님을 요즘에도 가끔 찾아 뵙곤 해요. 건강이 조금 안 좋으셨는데 요새는 많이 괜찮아지셨어요. 은지원 형도 이효리 누나도 다 지금은 이적을 했지만 전 회사를 그리워해요. 사실 회사를 옮기고 나서 이전 회사를 그리워하는 경우는 많지 않잖아요. 하지만 모두가 그리워하는 걸 보면 사장님은 참 좋고 대단한 분이셨던 것 같아요. 역시 정이라는 것은 위대하다는 걸 느끼죠."
다른 멤버 김형준은 2016년 Double S 301로 컴백하면서, 지금도 DSP 최미경 사모님과 연락하며 지내고 있고 키워주신 이호연 사장님께 감사하다는 인사를 전했다. 김형준이 14살 때 이호연 사장이 직접 캐스팅해 데려왔었다. 김규종은 활동당시 공홈편지에서 평소 이호연이 '우리 오공돌이들~ 일로와봐~'라고 말한다고 밝히기도 했다.

핑클과는 소속사 나갈 때도 DSP에서 알아봐줄 정도로 잘 지냈다. 이호연이 뇌출혈로 쓰러지고 병실에 누워있을 때, 핑클 4명이 모두 찾아와서 이호연 사장이 좋아하던 노래 "루비"를 불러주며 눈물 지었다고 한다.# 활동 당시에는 핑클의 기행 항목에서 보듯이 화려한 일화들 때문에, 이호연은 핑클을 망나니시스터즈라고 불렀다고 전해진다. 2013년 5월 29일 라디오스타에 이효리가 출연해서 말하길, 사장님과 매우 친분이 두터워서 회사가 어려워 월급이 밀리면 다음에 상황 좋아지면 달라고 쿨하게 넘어갔다고 한다. 2017년 7월 5일 라디오스타에서 "이호연 대표도 이효리한테는 두손 두발 다 들었다"는 소문에 대해 물어봤는데, 이효리는 아니라면서 자기는 진짜 착했다고 답했다. 성유리는 무릎팍도사에서 데뷔때 신인으로서는 받기 어려운 좋은 대우를 받았다고 말하기도 했고, 회사에서 나갈때도 매우 원만히 나가며 감사인사를 전했다.# 옥주현은 2015년 핑클회동 당시 페이스북에 다음과 같은 글을 올리며 당시의 소속사 직원과 사장님에게 고마움을 전하기도 했다.[25] 또한 이호연 사망 후 장문의 글을 통해 이호연 사장과의 인연에 고마움을 표시하기도 했다. 내용 자체가 재밌고 잘 읽히게 써서 화제가 되었다.(전문)

카라의 경우도 이호연 쓰러지기 전까지는 사이가 좋았던 것으로 보인다.

DSP의 상황이 어려워져 카라가 해체위기일 때 소속사 사장은 카라를 끝까지 지켰다. DSP가 상장사 시절 제작했던 드라마 연개소문이 크게 실패하면서 자본잠식을 당한다. 당시 지분은 자동차 부품회사에서 대부분 가지고 있었다. 곧바로 소집된 주주총회에서, 적자폭이 커진 부분을 가지치기 하고 회사를 살리라는 압박이 들어온다. 이 가지치기 대상이 바로 드라마, 예능부분 사업을 접고 걸그룹 카라를 해체시키는 것이었다. 3회에 걸친 회의 끝에 이호연 사장이 내린 결론은 지원 안받고 '지분 다 내놓고 합병 파기 자본잠식으로 상장폐지. 그래서 SS501 & 카라 데리고 나옴'이었다. 이후 카라가 일본에서 초대박을 쳤던 것을 생각하면 신의 한수였다. 정작 자신은 카라의 일본 진출 후 얼마되지 않아 뇌출혈로 쓰러져 그 모습을 보지 못했다.

카라가 처음으로 지상파 가요프로에서 1위를 한 날, 이호연 사장이 멤버 전원에게 청담동 명품샵에서 명품백을 하나씩 사줬다고 한다. 그러나 이호연 사장이 뇌출혈로 쓰러지면서 2011년 카라 전속계약해지 통보 사건이 발생하고 만다. 카라 측은 신뢰관계가 있던 이호연 대표가 투병을 시작한 시점부터 소속사와 신뢰가 깨졌다고 밝혔다. 구하라의 경우, 병상에서 누워있는 아버지 같은 이호연 대표를 떠날 수 없어 소속사에 잔류하기로 마음을 굳힌 것 같다는 기사가 나오기도 했다. 실제로 이호연이 구하라를 특히 아꼈다는 이야기가 돌긴 했다. 2010년 6월 5일 김정은의 초콜릿 방송에 이효리가 출연해 다음의 에피소드를 말했다. 한번은 이효리가 구하라를 불러내서 같이 술을 마셨는데, 구하라가 다음날 스케줄 중 구토를 했다.[26] 그러자 이호연이 이효리한테 전화를 걸어 ‘너 그 버릇 아직도 못 고쳤냐’며 혼냈다고 한다.


2.2. 계약관련[편집]



2.2.1. 계약서 관련 젝스키스 팬덤의 비난[편집]


옛날 젝스키스, 핑클까지는 계약서 없이 활동했다고 한다. 클릭비부터 계약서가 생겼다.

20세기 미소년 시즌3에 해당하는 은희상담소에서 젝스키스의 소속사(DSP)후배인 레인보우 멤버들이 나왔을 때, 계약서 없이 활동했다는 사실이 직접적으로 언급됐다. 레인보우 멤버들이 계약서가 없었다고 들었다며 진짜냐고 먼저 물어봤다. 이호연 사장은 연습생들에게, 젝스키스는 계약서 없이도 몇년을 무난하게 일한 의리파 애들이었다고 말했다고 한다. 계약서가 없었던 것에 대한 이호연 사장의 입장은 다음과 같다. "계약보다 신뢰를 더 중요시하는 거죠. 신뢰가 무너지면 계약도 소용없지 않습니까. 끼와 감각을 갖고, 인간적이고 자유로운 정신으로 유대를 가질려고 해요. 그런 유대관계 속에서 창작활동을 해야 결과물도 좋아진다고 봅니다.”#

젝스키스 팬들은 계약서가 없었던 사실 자체로 DSP에 대해 매우 많은 비난 글을 올렸었다. 실제로 젝스키스가 정산과 관련해 해체 무렵 회사와 갈등을 겪은 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이재진의 경우 과거 싸이월드 시절 호연이란 이름의 팬이 글을 남기자 불편한 기색을 내비쳤던 것을 보면 감정이 안 좋게 끝난 것으로 보인다. 의리를 표방하며 계약서를 안 썼지만 오히려 그 점 때문에 인간적 신뢰관계 쉽게 깨질 수 있는 문제다. 그리고 착취의 의도가 아예 없었다고 단정하지는 못할 것이다.


2.2.1.1. 반박[편집]

그러나 어떤 대우를 받았느냐, 상호 신뢰가 형성됐느냐에 초점이 맞춰져야지 계약서가 없었다는 사실만으로 나쁜 놈 취급을 하는 것은 잘못됐다. 당시 DSP가 이상한 것이 아니라 연예계에서 계약서 없이 활동하는 일이 특이한 경우가 아니었다. SM 이수만이 당시 H.O.T.와 세밀한 계약서를 작성한 것과 같은 경우는 적었다.(다만 돈을 적게 주는 불공정한 면이 있어 문제가 되었다.) 심지어 최근까지도 계약서가 없는 사례는 자주 보인다. 아바엔터테인먼트의 민효린, 채정안, 한지민, 채시라 등이 계약서 없이 활동했으며#, 문근영은 나무엑터스와 10년 가까이 계약서 없이 활동했고#, 송지효도 씨제스엔터테인먼트와 계약서 없이 활동했으며#, 이효리도 B2M엔터테인먼트와 계약서를 작성하지 않고 그냥 의리로 남아있기도 했다.# 다 신뢰를 바탕으로 계약서 없이 활동한다는 입장이다. 그리고 법적으로 봐도 서면계약서를 의무화 할 수 있는 조항은 없다. 하도급 계약이라면 서면으로 계약을 안 한 것에 대해서 문제를 삼을 수 있지만 이 부분은 하도급 계약이 아니다.# 특히 연예인은 개인사업자일뿐 근로기준법의 적용을 받는 근로자가 아니다.# 이렇게 계약서 없이 활동하는 경우가 지금도 발견되는 것은 연예인에게도 유리한 측면이 있기 때문이다. 계약서의 내용에 구속되어 제약을 받는 것은 회사 뿐만 아니라 연예인도 해당된다.

그리고 이호연 사장이 인터뷰한 내용대로 인간적 관계가 성공적으로 유지된 사례도 있다. 핑클이 그 예시이다. 성유리가 무릎팍도사에서 밝히길 데뷔때 신인으로서는 받기 어려운 좋은 대우를 받았다고 한다. 이효리는 2013년 라디오스타에 출연해서 말하길, DSP 시절 사장님과 매우 친분이 두터워서 회사가 어려워 월급이 밀리면 다음에 상황 좋아지면 달라고 쿨하게 넘어갔다고 한다. 핑클은 이후 타 소속사로 이적할 때도 DSP에서 알아봐주는 등 원만하게 끝을 맺었다. 그리고 은지원, 이효리, 김현중이 이적 후에도 전 회사가 그립다는 말을 했다는 것을 보면 인간적인 관계가 어느정도 쌓인 점은 맞다고 보인다기사. 이효리는 이적 후의 소속사인 B2M엔터테인먼트(사장이 DSP 출신인 길종화)에서도 계약이 오래전에 만료되었는데 계약서를 작성하지 않고 그냥 의리로 남아있기도 했다기사.

이호연이 정말 악마 같았으면 노예계약서를 작성했을 것이다. 당시 젝스키스에게 해준 대우보다 더 나쁜 조건으로도 얼마든지 계약서를 작성할 수 있던 시기였고, 이를 통해 5년이고 10년이고 소속사에 묶어놓을 수도 있었다. 젝스키스 팬들이 근거로 드는 2001년 7월 시사매거진 2580 보도내용을 보면, 노예 수준의 계약서로 당시 가장 잘 나가던 아이돌 그룹 가수들의 음반 인세가 100원도 채 되지 않았고(SM이 100원으로 H.O.T. 멤버당 20원이었다고 함), 계약금도 없이 10년 가까이를 소속사에 묶어버리기도 했다. 만약 젝스키스가 저런 대우를 받았다면, 당시 정산이 제대로 안되었던 것은 물론 계약서에 발목이 붙잡혀 오늘날 YG와 계약하는 것도 사실상 어려웠다.

실제로 당시 계약서를 쓰지 않은 덕분에, 젝스키스는 2016년 재결합시 YG엔터테인먼트와 자유롭게 계약서를 작성했다. 상표권 또한 YG 측에서 정식으로 등록해 젝스키스의 상표권을 가지고 있다.2000년 6월 16일자 피자의 아침 방송에서 이상호 기자가 계약서를 작성하지 않은 이유에 대해 추궁하자, DSP 측은 멤버들이 계약에 묶이지 않도록 배려한 것일 뿐이라고 밝혔다. 결국 이 말대로 2016년 젝스키스가 재결합할 때는 아무 제약 없이 YG랑 계약했다. 이는 SM을 나온 신화가 상표권을 찾기 위해 험난한 여정을 거친 점과 비교된다.

그리고 소속사에서 나가고 싶어도 계약서에 발목이 붙잡혀 나갈 수 없는 아이돌의 사례는, B.A.P 동방신기 등 지금까지 무수히 많았다. 반면 젝스키스는 본인들이 해체를 결정하고 데뷔 3년만에 소속사를 나가겠다고 하자[27], DSP에서 놔줬다. 계약서를 안 썼으니 붙잡을 수 있는 방법도 없다. 이후 솔로활동도 전 소속사의 별다른 방해 없이 이루어졌다. 팬들은 회사에서 방송활동을 방해해서 성적이 안 좋은거라 주장하는데 전혀 근거없는 루머다.(젝스키스/DSP 관련 루머 문서 참조.) 당장 음방이나 예능에도 잘만 출연했었다. 반면 H.O.T.에서 나간 3인의 경우, 당시 SM의 방해와 관련해 여러 기사들이 나며 사회적 파란을 일으킨 바 있다. 한편 장수원, 김재덕이 해체 이후 결성한 제이워크를 보면, Suddenly라는 곡으로 흥했지만 당시 계약한 소속사에서 제대로 활동을 안시켜주고 계약도 안 풀어줬다. 그래서 20대의 많은 시간을 아무것도 못하고 흘려보냈다.

한편 그동안 젝스키스 팬덤은 DSP미디어가 젝스키스 해체하고 나서 찌질하게 상표권 등록을 수차례 시도했다가 실패했다고 퍼뜨렸는데, 이는 거짓말이다. DSP에서 젝스키스 상표권 등록을 신청한 사실 자체가 없다. 어느 이상한 기업체에서 신청했다 거절당한 내역만 있다. 여기서 젝스키스를 검색하면 알 수 있다.

이런 식의 루머 유포가 많았는데 정산금액과 관련해서도 그동안 젝스키스 팬들이 퍼뜨린 내용에는 과장과 허위가 심하다. 대우에 관해서 불만을 가진 멤버들이 있었다는 점은 맞지만, 오늘날 밝혀진 바를 보면 당시 업계에서 젝스키스가 노예취급을 받은 것이라고 볼 근거가 없다. 자세한 내용은 젝스키스/정산 문제 문서를 참조 바람. 이외 젝스키스의 선배 그룹인 ZAM은 당시 돈을 다발로 받고 다녔다고 한다. 당시 같은 소속사인 박소현이 증언한 부분이다.영상

클릭비 이후로는 계약서를 작성하고 있다. 현재 모습을 보면 정산과 관련해 안 좋은 소리는 없다. 제대로 정산이 되고 있다고 하며 수익분배 비율도 타소속사와 비교해봤을 때 나쁘지 않다. 카라 전속계약해지 통보가 터진 이후 회사 자체가 크게 바뀌었다. 이호연 시절처럼 가수들이 히트치지는 못하지만, 이런 면에 있어서는 과거와 달리 계약서에 따라 정확히 지급된다고 보인다. 심지어 2015년 그렇게 뜨지 못한 에이프릴도 데뷔하고 반년쯤 지나고 정산을 받았다고... 또한 비상장기업임에도 불구하고 감사보고서가 DART에 올라온다.


2.2.2. 강다니엘 계약 분쟁 관련 루머 유포[편집]


2019년 강다니엘이 소속사와 계약 분쟁이 발생했는데, 강다니엘 소속사 사장이 DSP 출신이라며 온갖 루머를 유포하는 글이 다수 올라왔다. 이런 식의 내용####인데 네이트 판의 최다 추천 항목에 까지 오르게 만들었다.# 요악하자면 강다니엘 팬덤 측이 강다니엘을 옹호하는 글을 올리면서, DSP가 과거 이런이런 짓을 했고 그것이 강다니엘한테 반복된다는 식의 논리를 펴고 있다.[28]


2.2.2.1. 반박[편집]

그러나 사실관계를 보면 거짓말 투성이다.

일단 젝스키스의 정산 금액과 해체에 대한 것부터 거짓말이다. 이는 젝스키스 팬덤이 허위루머를 퍼뜨리던 내용인데, 자세한 사실관계는 젝스키스/DSP 관련 루머 문서를 참조 바란다.

그리고 강다니엘 분쟁에서 문제된 '제3자 권리 양도'가 DSP의 수법이라고 써놨는데, 그런 사실관계 자체가 없다. DSP가 제3자 권리 양도를 해서 문제됐다거나 한 사례는 존재하지 않는다.

근본적으로 강다니엘 사장이라는 길종화는 핑클과 카라를 맡은 인물이어서, 젝스키스와는 관련이 거의 없는 인물이다. 그리고 2009년 9월에 DSP를 퇴사해서 카라의 분쟁사건과도 관련이 없다. 재직 시절 자기가 맡은 가수가 회사와의 심각한 트러블이 생긴 적도 없다. 오히려 사이가 좋았다는 정보가 발견된다. 2012년 본인 결혼식 때 옥주현이효리가 축가와 사회를 맡을 정도였다.# 이효리는 길종화가 나와서 차린 B2M엔터테인먼트로 이적했는데, 당시 계약서를 쓰지 않고 계약금을 받지도 않았다. 그리고 계약이 오래전에 끝났는데도 계속 의리로 남아있기도 했다.기사 성유리는 2015년 인터뷰에서 "종화 오빠 생각이 많이 난다"며, "S.E.S. 친구들을 보면 요정같고 귀여운 장난을 치곤 하던데, 우리는 네 명이서 힘을 모아 매니저 오빠를 괴롭혔다. 그래서 오빠들이 저희 때문에 힘들어 했다"고 털어놨다.#

물론 과거의 가수와 사이가 좋았다고 해서 현재도 문제 없을거라는 보장은 없다. 그러나 허위루머를 퍼뜨리면서 가수 측을 옹호하는 행동은 분명 잘못됐고, 당사자가 고소를 할 경우 법에 의해 처벌될 수 있는 일이다. 현재의 일은 현재대로 해결할 문제다.

그 외에 TS엔터테인먼트가 소속 가수와 여러 트러블이 생긴 점을 들어. DSP에서 보고 배운 것이라는 말을 퍼뜨린다. CEO인 김태송이 과거 DSP의 직원이었기는 하다. 소방차와 ZAM의 매니저를 했었다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소방차와 ZAM은 80~90년대초 활동하던 그룹이다. TS엔터테인먼트 설립시기인 2008년과는 무려 15~20년의 간격이 있다. DSP의 잘못으로 몰아가는 것 자체부터 이상하지만, 설령 둘을 엮는다고 해도 시간적 간격이 너무 벌어져 있다. 이런 식이면 엔터 업계 전체를 다 엮을 수도 있는 수준이다. 더군다나 김태송은 이제 고인이 되었고 TS엔터테인먼트 자체도 위태로운 상황이어서 어떠한 반박도 하기 힘든 처지라 이런 소문은 눈덩이처럼 불어날 가능성이 높다.


2.3. 노래 스타일[편집]


노래 선정이 꽤나 좋은데 외부 작곡가 위주로 돌아가는 회사임에도 곡 퀄리티가 대체적으로 안정적이고 좋은 편이었다. 특히 대중성을 잘 공략하였다. 노래가 좋지 않았으면 다트식 운영이 절대 성공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단점으로는 시대적인 트렌드를 따라가려만 한다는 점[29]과 간혹 타이틀곡 선정이 엉망이라 수록곡은 다 좋은데 타이틀곡이 별로인 경우가 발생한다는 점. 그 대표적인 사례가 서브타이틀곡이 카라의 대표곡이 된 <미스터>다.

SM이나 YG, JYP 미스틱, 젤리피쉬, 플레디스 등의 소속사와는 다르게 전속 작곡가나 편곡가가 존재하지 않는 편이다. 이는 대성기획 시절때도 그랬는데 팬들은 제발 전속 작곡가좀 데려와 달라고 하곤 그랬다. Rock U 이후 Sweetune이 전속 작곡가마냥 카라에게 곡을 자주 줬으나 Day&Night부터는 이 관계도 끝. 다만 DSP와의 관계가 끊어졌을 뿐이지 카라 전 멤버들에게는 곡을 계속해서 제공하거나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는 중이다.

2016년 젝스키스가 재결합하면서 DSP의 곡 받아오는 능력이 다시 재조명받기도 하였다.[30] 당시의 뮤비 퀄리티는 처참했지만, 대신 비싼 작곡가는 많이 섭외해서 겨우 3년 활동인데도 명곡들이 즐비하다. 해체 후 16년이나 지나서 단독 콘서트를 열었지만 오늘날 들어도 좋은 노래가 많아 세트리스트를 충분히 채웠다. 다만 이는 이호연 대표 있을 때의 상황이라는 측면도 있다. 2016년 기사만 봐도, 젝스키스를 스타덤에 올려놓은 곡 폼생폼사는 이호연 인맥으로 작곡가를 섭외해왔다.# 이호연이 쓰러진 이후에는 레인보우의 블랙스완같이 역대급 망곡을 주는 경우도 있어 비판을 받기도 한다.


2.4. 안목과 캐스팅[편집]


연습생이 매우 많은 편은 아니라 데뷔 시에는 다른 소속사의 연습생을 데려와서 데뷔시키기도 하는데[31], 어디선가 불쑥 데려오는 것도 데려오는 것이지만 데려오는 멤버들과 기존 멤버들의 조화도 매우 좋은 편이라 DSP 아이돌들은 비주얼만큼은 큰 악평을 들은 적이 없다. 여기다가 이호연 특유의 높은 안목까지 포함하면, 그 위력은 무시무시했었다. 비쥬얼 만큼은 최강이라는 평을 들었다. 이호연, DSP를 제일 싫어하는 팬들도 인정할 정도다. 대표적으로 젝스키스의 멤버들, 오종혁, 유호석, 김형준, 김현중, 구하라.

언론이나 방송에서 밝혀진 캐스팅 일화들을 보면 다음과 같다.

이효리의 캐스팅 비화를 보면, 이호연이 핑클 멤버 구성에 한참 신경을 쓰고 있을때, 강남역에서 아르바이트를 마치고 집으로 향하던 이효리가 눈에 들어왔다고 한다. 곧바로 달려가 버스를 타던 이효리를 설득해 사무실로 데려왔다. 하지만 당시 이효리는 다른 매니지먼트업체와 계약을 맺고 있었는데, 말도 안되는 계약조건이어서 즉시 소속 매니지먼트사에 항의해 이효리를 데려왔다고 밝혔다.# 이효리가 힐링캠프[32]에 출연해서 밝힌 일화에 따르면, 대뜸 '나 이호연이요'라고 전화가 와서 사장을 만났다고 한다. 만나서는 노래나 춤 하나도 안 시켜보고 얼굴만 보고 바로 뽑았었다고 밝혔다.[33] 참고로 이날 방송에서는 DSP 측에서 한혜진 미모 포텐을 알아보고 핑클에 들어오지 않겠냐는 제의를 했던 것이 밝혀졌다. 그러나 한혜진 본인이 거절했다고 한다.

옥주현힐링캠프에 출연했을 때 데뷔 일화를 밝혔는데#, 이호연이 스카우트로 풀어놓은 기자가 옥주현이 노래하는 모습을 보고 이호연한테 데려갔다고 한다. 이호연은 옥주현을 처음 보자마자 왜 이렇게 뚱뚱하냐며 돌직구를 던졌는데, 옥주현은 나는 성악 하는 사람이니까 상관없다고 맏받아쳤다. 그러자 이호연은 너 아이돌 시켜준다는데 뭐가 싫냐며, 여자는 살빼고 쌍커풀 하면 확 바뀐다고 설득했다고 한다. 그런데 데뷔 날짜가 다가오는데도 수술을 안 시켜주다가 뒤늦게 시켜줘서, 데뷔하고 쌍커풀 부운 채로 활동했다고...[34][35]

이호연이 쓰러지기 전 마지막으로 기획에 참여한 레인보우의 경우[36], 멤버 지숙2014년 2월 세바퀴에서 레인보우 멤버로 뽑힌 비화를 이야기했다. 당시 회사에 오디션을 보러 갔는데 아무도 없길래 소파에 앉아 있었다고 한다. 그때 중후한 남성이 들어오더니 ‘너 뭐냐. 잠깐 들어와봐’라고 해서 들어갔다고 한다. 이어 그 남성이 ‘애들아 나와봐’라고 하자 6명의 멤버들이 나왔고, 그 사이에 서보라고 했다고 한다. 그러더니 ‘너 다음 주부터 나와’라고 해서, 오디션을 보지도 않은 채 합격했던 일화를 밝혔다. 그 남성이 이호연 사장이다. 소파에 앉아있는 모습을 보고 마음에 들었다고 한다. 레인보우에 대한 세간 평가가 '멤버 개개인은 너무 좋은데[37] 왜 더 못 뜨는지 이해가 안 간다'며, 반응들을 보면 확실히 멤버는 잘 뽑아서 데뷔시켰다고 보인다.

다른 DSP 가수들의 경우에도 이런 식의 일화들이 많다. 젝스키스고지용도 공항에서 나오는 모습을 보고 이호연이 그냥 바로 캐스팅 했다는 소문이 있고, 김재덕도 본인이 밝히길 사장이 그냥 처음 봤는데 아무것도 안 시켜보고 바로 캐스팅 했다고 한다.[38] 장수원은 오디션장에서 사장의 '잘 하는 게 뭐냐'는 질문을 받고 '아무것도 없는데요'라고 답했더니, 사장이 솔직해서 좋다며 그대로 합격시켰다. 클릭비오종혁은 2006년 라디오에서 밝히길, 오디션 보러 DSP 사무실에 갔을 때 어느 경비원같은 후줄근한 옷 입은 아저씨가 다가와서 '오디션 보러왔냐'고 묻길래 진짜 버릇없이 굴었다고 한다. 근데 그게 알고보니 이호연이었다. 이외 카라강지영도 뽑아서 15일 연습시키고 데뷔시켰다.[39] 전술했듯이 이효리도 춤 노래 아무것도 안 시켜보고 그냥 얼굴 보고 뽑았다.

SS501의 경우, 김형준이호연이 직접 줍줍했고, 박정민은 김기영 실장의 모교 생활기록부를 뒤져 발굴했다. 김현중은 박정민 지인에게 추천받아 줍줍했고, 허영생은 원래 SM 계열사인 BM에서 연습생 생활을 하다[40] 나온 상태였는데, 마침 김형준의 지인이자 캐스팅디렉터인 허영생의 지인에게 추천받아 오디션을 보고 영입되었고, 김규종만이 유일하게 5차 공개 오디션을 통해 영입되었다. 김형준과 박정민은 학교 동창이며, 김현중은 박정민 지인의 지인이고, 허영생은 김형준 지인의 지인이다.

이렇게 설렁설렁 뽑거나 연습생 기간이 짧았던 멤버들이 이후 크게 활약한 것을 보면 감은 좋았던 것으로 보이며, 에이프릴도 레이첼이 오디션 합격 후 2개월 연습하고 데뷔하게 된다.

기타 90년대 초중반 이본, 오현경, 이승연, 이아현, 박소현[41] 등을 발굴한 사람도 이호연이다.(출처: #, #, #, #, #, 아궁이 160715일자 방송편 등)

박소현의 말에 따르면 1997년 당시 젝스키스 데뷔 전부터 이호연 사장님이 젝스키스 이야기를 많이 했는데, 장수원의 경우 친구 따라 오디션을 왔고 별 의지가 없었다고 한다. 근데 사장님이 무조건 잘된다고 하길래 저 친구의 어떤 모습을 보고 캐스팅 했을까 의아했었다고 밝혔다. 근데 정말 오랜 시간 지나도록 롱런하는거 보니, "사장님이 괜히 사장님이 아니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고 발언했다. 박소현 본인도 연예계 생활에 별로 의지가 없었는데, 사장님이 "너 5년 정도 일 해서 시집갈 밑천 벌어 결혼하면 되지 않겠냐."고 설득해서 일하게 됐다고 한다.영상 이후 박소현이 오랫동안 연예계에서 활약한 것을 생각하면 안목이 있었다.

이런 식의 일화가 한명 더 있는데, 바로 이혜영이 주인공이다. 2018년 3월 18일 JTBC 슈가맨2 방송에 출연한 이혜영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1990년대 당시 이혜영은 자신이 연예인과 맞지 않는다는 생각에 이쪽 일을 그만두려 했다고 한다. 그런데 얼마전 작고하신 이호연 사장님이 자기한테 전화를 해서, ZAM의 윤현숙과 듀오를 해보자고 하여 일을 하게 됐다고 밝혔다. 이 듀오가 코코인데 당시 '요즘 우리는' 등으로 꽤 인기를 모았다. 이후 이혜영이 패션, 드라마, 예능 등에서 활약했던 것을 보면 안목이 있었다. 2010년 들어서는 연예계 활동이 뜸해졌지만, 전 남편인 이상민이 예능에 활발히 나와 계속 언급되고 있다.

한편 젝스키스의 경우 2016년 라디오스타에서 강성훈이 밝힌 바에 의하면, 멤버 캐스팅에 강성훈이 직접적인 관여를 했다고 한다. 당시 듀엣에서 급작스럽게 6인조로 바뀌자 강성훈이 탈퇴하려 했고, 이에 이호연이 나머지 4명은 너가 OK 하는 사람들로 뽑겠다고 설득했다고 한다. 그래서 오디션장에서 강성훈이 이호연 옆에 앉아 같이 결정했다고 한다. 방송된 내용은 각주와 같다.[42] 한마디로 정리하면, 김재덕은 강성훈이 뽑기 싫어했고, 이재진은 이호연이 싫어했으나 강성훈은 마음에 들어 했는데, 김재덕과 은지원이 회사를 설득해 뽑힐 수 있었다. 고지용, 장수원은 사장이랑 강성훈 둘다 마음에 들어했다고 보인다. 한편 당시 상황에 대해 컴백 자서전에 나와있는 내용은 각주와 같다.[원문]

이호연을 싫어하는 젝스키스 팬들은 이 방송을 계기로 "젝스키스를 만든 것은 강성훈이지, 이호연은 한 것이 없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막상 내막을 살펴보면 이호연의 공이 제일 크다. 일단 은지원, 강성훈 2명은 이호연이 친분이 있던 하와이 클럽 사장에게 소개 받아 직접 데리고 왔다.[43] 이외 4명이 문제인데 고지용 영입은 전적으로 강성훈의 친구였던 사실 덕분이지만, 나머지 3명은 강성훈 아니었으면 젝스키스 멤버로 뽑히지 않았을거라고 볼 수 없다. 장수원은 기존 인터뷰에서 밝혀진 바에 따르면 사장도 강성훈과 마찬가지로 솔직한 모습을 마음에 들어해서 뽑고 싶어 했다. 김재덕과 이재진은 이호연이 인맥이 있던 이주노 소속사에 찾아가 직접 데려온 인물이다. 이주노와 친형제처럼 지내는 사이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44] 김재덕의 경우 이날 방송의 장수원 폭로에 따르면, 강성훈이 사실 뽑기 싫어했다. 이재진의 경우 이호연이 코가 크다며 뽑기 싫어했는데, 기존 방송에서 밝혀진 바에 따르면 은지원과 김재덕이 이호연을 설득해 뽑힐 수 있었다.영상 14분부터


2.5. DSP가 한국에서 최초로 시도한 사항들[편집]


DSP가 한국에서 최초로 시도한 것들이 꽤 많다. 우선 일본 아이돌 형태를 먼저 도입해 소방차ZAM을 히트시켰다. 소방차는 국내 최초의 아이돌이라 불리고, ZAM은 국내 최초 혼성그룹이다.

이후 95년 당시 14∼15세의 재미교포 중학생으로 구성된 듀오 IDOL을 배출하며 가수의 평균연령을 대폭 낮췄다. 최초로 10대인 멤버에 해외파로 이루어진 아이돌로서, 이후 유행한 ‘교포가 낀 미소년 댄스팀’의 첫 모델이었다.#

젝스키스의 블랙키스와 화이트키스는 아이돌 유닛의 시초다. 핑클은 4인 4색으로 아예 그룹내 색깔별로 맡은 타이틀이 있었고, 클릭비는 최초의 밴드형 아이돌이자 최초의 멤버 수가 많은(7인 이상) 아이돌이었다.

핑클은 여자 아이돌 그룹 사상 처음으로 첫 콘서트를 라이브 음반으로 제작하였다.
특히 핑클은 2000년대 넘어서는 멀티형 연예인을 바라는 시대적 트렌드에 따라 `따로 또 같이`라는 전략을 구사하며 핑클 멤버 4명의 개인 활동을 시작했다. 당시에는 개별 활동에 대한 주위의 반발이 컸지만 특유의 뚝심으로 밀어붙여 방송계에 만능 엔터테이너가 성공하는 새로운 주류를 만들어냈다.#

2000년에 나온 경희대 대학원 논문을 보면 다음과 같은 말이 나온다.[45] 오늘날 인터넷을 통한 사전 홍보나 브이앱을 활용한 소통이 매우 활발한데, 당시 최초로 시도된 것이다.

경향신문에서 조사한 “국민가수”에 뽑힌 <DSP>의 젝스키스는, 음반을 내기도 전인 1997년 3월부터 각 통신망에 멤버들의 사진과 새로 나올 음반에 대한 정보들이 제공됐다. 그로 인해 젝스키스는 매체에 출연하기도 전부터 10대들에게 알려지게 되었고 데뷔 무대 때부터 팬들이 따라다니기 시작했다. 핑클의 경우도 데뷔 전에 이미 네티즌을 대상으로 그룹이름인 '핑클'을 정해 놓고 그룹의 이미지를 정한 다음 그에 맞는 멤버를 충원했다.

(중략)

기존의 가수들이 팬들과의 모임을 팬클럽 공식행사를 통해서만 이루어진 데 비해 <DSP> 소속가수인 클릭B와 핑클은 화상채팅을 통해 팬들과의 만남을 가지기도 한다. 관전보드 시스템이라는 새로운 방식으로 개설된 4개의 방에서 각각 10명의 네티즌들이 대화에 참여할 수 있고 각 방마다 500명의 네티즌들이 관람하는 일종의 화상채팅쇼를 통해 가수를 알리는 방식이다.


SS501은 리얼리티쇼에서 데뷔하여 스타덤에 오른 최초의 사례였다. 그리고 SS501의 암욜맨은 아이돌 유닛 최초로 1위를 달성한 곡이다.

배윤정의 야마앤핫칙스는 2000년대 후반~2010년대 크게 성공한 아이돌 안무 제작팀인데, 이 팀을 발견해 최초로 일을 의뢰한 곳이 DSP다. 카라의 데뷔 곡 브레이크 잇의 안무였는데, 그 결과가 좋지는 않았다. 하지만 선하의 '샨티샨티' 안무를 한번 더 의뢰했고 여기서 반응이 왔다. 그래서 다시 카라의 안무 제작을 맡겼는데, 이게 그 유명한 Pretty Girl이다. 이 춤이 대박 나면서 성공 궤도에 올랐고, 이후 DSP 뿐만 아니라 수많은 아이돌의 히트 안무를 만들어냈다.

―그래서 안무 제작을 시작했나.▷전=댄서 일로는 돈이 안되니까 안무 의뢰가 들어오면 적극적으로 했다. 처음에 카라의 '브레이크 잇'이 들어왔다. 처음 해보는 거였다. 의욕만 앞섰다. 멋있으면서 귀엽게 모든 안무를 다 넣고 싶었다. 욕심이 많다 보니 말도 안되는 안무가 나왔다. 역시 잘 안됐다.

―반전 계기는 무엇이었나.▷배=선하의 '샨티샨티' 안무 제작이었다. 연습생 중에 머리카락을 자주 꼬는 애가 있었다. '머리 좀 그만 만져!' 하고 야단치다가 머리 꼬는 안무를 생각해냈다. 노래가 엄청 히트한 건 아니지만 춤이 인기를 끌었다. 그게 업계에서 반응이 좋으면서 DSP엔터에서 카라 안무를 다시 제안했다. 카라의 '프리티걸'이었다. TV에서 김국진 씨가 일어서서 두 팔을 위로 올리고 흔들면서 "예~" 하는 장면을 봤다. 귀엽다 싶어서 그걸 넣었는데 터졌다. 그때 생각했다. 안무는 힘을 빼야 하는구나. 그때 자신감이 붙었다.#


이제 일반화가 된 역조공은 카라가 처음으로 했다.[46][47] 또한 한국 걸그룹의 도쿄 돔 단독공연 및 홍백가합전 출연[48]은 카라가 최초이다.[49]


2.6. 기획력[편집]


DSP는 과거 2000년대 중반까지 전성기를 구가했는데 이는 기획력이 좋아서가 아니라, 멤버 뽑기와 이호연 사장의 감과 인맥이 좋았기 때문이었다. 1세대 아이돌 시장에는 아직 지금처럼 체계화된 시스템이 정립되지 않았다. 얼굴 잘 생기고 끼있는 애들을 뽑아서 괜찮은 노래 붙여주면 그럭저럭 장사가 되는 시스템이었다. 게다가 젝스키스는 처음부터 댄서 출신 두 명(이재진, 김재덕)을 멤버로 넣은 덕에 안무 구성 및 트레이닝은 소속사에서 안 해줘도 가수 당사자들이 알아서 해결할 수 있었다.[50]

또한 이호연 사장의 인맥과 감, 불도저식 추진력으로 회사의 단점들이 커버가 됐다. 이호연 사장은 연예계에 있어 강력한 영향력을 가진 인물이었고, 인재를 알아보는 감이나 일을 밀고 나가는 추진력도 좋았다. 다트 던져 회사일을 결정하냐며 다트사마라는 비아냥도 있었지만, 30여년간 수많은 스타들을 배출했던 것을 생각하면 분명 실력 있는 인물이었다. 그가 뇌출혈로 쓰러진 후 DSP가 어려움을 겪자 이 점이 더욱 부각됐고, 이호연의 경영능력을 높이 평가하는 기사들도 나왔다.[51][52] 말하자면 DSP 미디어가 다트 기획력으로 기획사를 꾸려나갔는데 이호연 본인의 신기하고 놀라운 수준의 정확도로 던지는 다트와, 그가 쓰러진 뒤 아무렇게나 던지는 다트는 질적수준이 넘사벽이라서 이호연이 직접 던지는 다트로는 핑클로 대박쳤지만 그가 없이 아무렇게나 막 던지는 다트로는 레인보우로 쪽박을 차고 만 것이다.[53]

그러나 그 이후 아이돌 산업이 체계화되고 이호연 사장마저 뇌출혈로 쓰러지면서, 결국 DSP는 경쟁력을 잃고 말았다. 한때 경쟁사였던 SM이 보아를 필두로 전문적인 트레이닝/연습생 시스템과 체계화된 마케팅 전략을 수립해나가는 동안, DSP는 그만큼 발전하지 못했다. 그래도 2000년대 중후반까지는 그럭저럭 성공했지만, YG엔터테인먼트JYP가 본격적으로 대두되고 이호연이 쓰러지면서 도태되는 운명을 맞게 되었다.

90년대 중후반부터 2000년대 초반즈음에 막 신생 기획사로서 등장했던 연예 기획사들은 회사 전속으로 활동하는 프로듀서를 육성하거나 유명 프로듀서를 전속으로 영입하는 것은 기본이고, 각종 트레이닝 시스템과 회사 전용 연습실등을 구축하는 것은 물론, 정기적인 오디션 시스템을 통해 연습생 육성 시스템을 만드는데 주력했는데 DSP는 이런 부분에 대한 투자가 미흡했었다. SM엔터테인먼트를 제외하고 90년대 중반 이후 등장했던 신생 기획사들중, 현재 대형 기획사로 성장한 곳이 JYPYG엔터테인먼트이고, 이 회사들은 꾸준히 투자를 거듭한 끝에 현재 아이돌 혹은 가수를 육성하기 위한 여러 부대시설을 갖춘 사옥과 독자적인 육성 시스템을 구축한 것만 봐도 답은 나올 것이다. DSP는 2006년 SBS드라마 연개소문에 투자했다 큰 실패를 맛본 후 상장폐지가 되는 아픔을 겪긴 했지만, 그 전까지만 해도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아이돌 기획사중 하나였고, 회사 규모도 절대 작지 않았다. 팬들에겐 스죄라 불리며 욕을 얻어먹는 스타제국도 2000년대 중반 꽤 묵직한 존재감을 알렸던 시절 쥬얼리의 성공 이후로 규모는 조금 작지만 녹음 스튜디오와 연습실, 헬스장, 식당등이 있는 준수한 규모의 사옥을 건설하고,[54] 이후 보컬이나 댄스 트레이너들을 영입하면서 정기적인 오디션을 개최하는등 미래를 위한 투자를 힘써왔다.

그래도 DSP도 2000년대 중후반기에는 8~90명 규모의 여러 국적의 연습생에, 연습실 트레이너 등을 갖춰놓으며 시스템을 구축하기는 했다. 김재경 등 당시 나이대에서 에이스라 불리던 연습생도 상당수 있었다. 하지만 그냥 놔둬도 알아서 돌아갈만한 건실한 시스템을 갖추지는 못했고, 그 결과 회사를 진두지휘하던 인물이 쓰러지자 회사도 급격히 기울었다. 이건희가 쓰러져도 여전히 잘 나가고 있는 삼성같은 대기업과, 회사의 존망을 대표의 비전, 리더십, 인맥 등에 크게 의존하는 소~중견 연예기획사의 차이를 보여주었다.

2000년대 중반까지는 도시전설급 일화들이 많다. 무릎팍도사 성유리편과 김현중편을 보면 대강 알 수 있다. SS501은 트레이닝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멤버들이 직접 사비를 들여 보컬 연습을 받을 정도였고, 연습실도 회사가 운영하는 곳이 없어서 이곳 저곳 전전하며 연습하곤 했다. 아침에 일어나면 운동장 20바퀴를 돈 다음, 5~6명을 한 방에 두고 보컬 연습을 하라고 했다 한다. 서로 시끄러우니 양동이를 뒤집어 쓰고 연습했다고 한다... 핑클의 경우 옥주현이 나머지 멤버들을 가르쳤고, 연습생 시절 노래 연습을 위한 피아노가 없어서 모 라디오 노래 대회에서 우승하여 받은 상품인 전자 피아노로 연습했다고 한다. 애시당초 이진과 성유리는 노래 부르던 학생도 아니었는데, DSP는 무작정 데려와서 트레이닝 한번 제대로 해주지 않고 걸그룹으로 데뷔시켰다. 근데 결과물이 대박이었다는 것이 함정 카라는 탄탄한 가창력을 갖춘 메인보컬 한 명이 있었으나, 그 멤버가 개인사정으로 탈퇴한 이후에는 해체위기까지 거론될 정도로 오랜 공백기가 있었고,[55] 새로 들어온 멤버들의 실력이 이를 뒤받쳐주질 못해서 여러 쓴소리를 들었어야 했다.

사실 1세대 아이돌 시장에서 젝스키스핑클 등을 필두로 2대 아이돌 기획사로 이름을 날리던 시절에도 SM엔터테인먼트의 아이돌을 벤치마킹하여 헤어스타일이나 컨셉면에서 비슷한 느낌으로 데뷔시킨 경향이 컸다.[56] SM의 아이돌에 인원 한명 더붙여서 데뷔시킨것도 그러한 이유였고. 그리고 2000년대 중반 SS501을 필두로 다시 2세대 아이돌 그룹을 선보일때는 1세대 아이돌 시절의 그룹 형태를 거의 그대로 옮겨 왔고, 멤버들의 매력이 발산되며 존재감이 컸을 뿐, 기획력 자체에서 특징적인 모습을 보여주지는 못했다.

그렇다고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이, 이런 따라하는 전략만으로 성공할 수는 없다는 점이다. 가요계가 그렇게 호락호락한 곳은 아니다. 젝스키스, 핑클, SS501, 카라 모두 자신들만의 강점과 특색을 분명 살려냈고, 곡빨 안무빨도 SM에 버금가는 혹은 뛰어넘는 수준으로 붙여줬기에 성공한 것이다. 당시 99년 11월 3일자 한겨레 기사를 봐도 SM 따라했지만 실패한 가수는 무수히 많았고, 그 중 DSP는 기획력 측면에서 성공했다는 평을 받았다.[57]

이호연이 대표로 있었을 때는 이호연의 신기와 같은 다트 실력으로 대박을 터뜨려준 면이 컸다. 예를 들어 이호연이 드라마에 눈을 돌렸을 때는 성적이 별로다가, 이호연이 다시 돌아와 손을 본 U R ManPretty Girl은 대박을 쳤다. 이호연 보고 다트사마라고 놀리기도 하는데, 다트도 한 번이 아니라 여러 번 맞추면 실력으로 봐야 할 것이다.# 하지만 이호연이 쓰러진 지금은 그런 것도 아니다. 현재는 25년 전통의 과거 2대 기획사라는 명성에 걸맞지 않는 기획력을 보여주는 경우가 많다. 실질적인 기획력만 보면 오히려 2000년대 중반 이후 등장한 중형 기획사들보다 딸리며, 동네 구멍가게 수준이라는 의견도 있었다. 이는 2014년 카라 멤버들의 계약이 종료되고 멤버 두 명이 나간 후에 억지로라도 멤버를 영입하고[58] 푸쉬를 과도하게 준 점에서 알 수 있는데, 팬덤은 물론 멤버들마저도 무시하다시피 한 처사에 결국 팬들, 기존 멤버, 새 멤버 모두 그리 좋지 못한 결과를 얻게 되었다.

결론적으로는, 언제 어디를 가든 리더나 에이스가 중간에 낙마하는 경우는 다반사다. 여기서 회사의 비전을 완전히 잃게 될지 아니면 회사의 비전 및 기반을 유지하게 될지는 리더나 에이스 밑에 있는 부하 및 직원, 전체적으로 보면 리더나 에이스 없이도 회사에 대한 비전과 플랜 B 및 향후 대책을 얼마나 체계적으로 만드느냐에 따라 회사의 운명이 결정된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DSP는 이호연 사장이 건제하던 시절 이호연 사장을 대신할 만한 인재나 향후 위기 상황 및 이호연 사장의 부재시 향후 대책이나 플랜 B를 만드는데 소홀했고, 결국 이호연 사장이 뇌졸중으로 쓰러진 후 맥없이 몰락했다. DSP가 이호연이 뇌출혈로 쓰러진 후 맥없이 몰락한 이유도 바로 한창 잘 나가던 시절에 리더의 부재를 대체할 만한 기획력 및 플랜을 전혀 수립해 놓지 않았기 때문이다.


2.6.1. 해외 진출 실적[편집]


해외 진출의 성과에 대해서 체계적인 기획이나 준비로 이뤄낸 것이 아니라고 비판하는 의견이 있다. 1세대 아이돌 시절에는 젝스키스핑클이 대만등에서 어느정도 성과를 거두기도 했지만, 이 당시에도 해외 진출을 미리 준비한 것은 아니었고, 한류붐 + 다른 아이돌 그룹의 성공이 맞물려 현지에서 수요층이 늘어나면서 기회를 얻은 측면이 컸다. 반면 SM엔터테인먼트는 외형적으로 보면 비슷한 해외진출 행보를 보이는 듯 했으나, S.E.S.를 앞세워 일본 시장에서 밑바닥부터 개척을 시작했으며, 이 때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하자 이를 반면교사 삼아서 다시 일본 시장에서 성공하기 위해 준비시켰던 것이 보아였다. SM엔터테인먼트보아의 일본 데뷔를 준비시킬때 S.E.S.의 경험을 토대로 "일본 시장에서 자리잡기까지 걸리는 시간"을 나름대로 계산하고 이를 역산하여 보아의 일본 진출 시기를 조율했다는 사실은 이미 유명한 일화며, 이후 보아의 성공과 이를 통한 경험을 앞세워 다시 밀어 붙인게 동방신기의 일본 진출이었다. 반면 DSP는 SS501때도 한류 붐에 편승해 급하게 일본 시장을 두드린 느낌이 컸으며, 당연히 장기적인 안목으로 보면 이는 좋은 선택이 아니었다. 심지어 그런 급한 기획이 맞물리면서 한국 시장과 일본 시장 어느곳에서도 큰 성과를 내지 못하는 시기가 생기기도 했다.

그래도 분명 카라는 일본 시장에서 큰 성공을 거두었다. 이에 대해 개그맨 게키단 히토리의 홍보효과 + 때마침 맞물린 '미스터'의 인기로부터 얻어걸렸다는 의견이 있는데, 그 2개에 DSP의 역할이 크니 잘못된 발언이다.

첫번째로 미스터의 경우 작곡가 Sweetune과 안무가 배윤정을 붙여준 게[59] 소속사의 역할이었으니, 소속사가 한 일이 없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일본에서 인기를 얻은 요인은 국내에서 형성된 이미지와, 국내에서 활동하던 곡(미스터, 점핑 등)과 안무(엉덩이 춤)였다. 즉 국내에서 히트를 시켜놨으니 일본에서 통한 것이다. 이호연이 드라마에 눈을 돌렸다가, 다시 돌아와서 손을 본 Pretty Girl이 히트를 치며 카라가 스타덤에 올랐다. 애시당초 구하라, 강지영 등 멤버 구성에 있어 이호연 입김이 컸다. 카라한테 처음 반응이 오자 일본에서 러브콜이 들어왔지만, 국내기반을 더 닦아야 한다고 판단해 거절했다. 당시 회사가 백억대 부채로 휘청이던 상태여서 한푼이 급했겠지만 잘 선택한 판단이다. 훗날 이호연이 물러난 이후의 DSP가 레인보우A-JAX를 국내 기반도 안 닦였는데 무리하게 진출시켰다가, 양국에서 이도저도 아니게 된 것과 비교되는 결정이다. 2009년 카라의 국내 기반이 제대로 닦이자 일본에서 스스로 알아서 반응이 일어나며 더 좋은 조건으로 진출하게 된다. 게키단 히토리, 야구치 마리 등 톱연예인들이 자처해서 언급해줄 정도였다. 특히 2009년 국내활동을 하며 일본에서 히트를 친 결정적 요인인 명곡 "미스터"가 탄생했다. 그게 안무가랑 작곡가가 만든 거지 이호연이 만든 거냐고 반문할지 모르겠는데, 그 작곡가랑 안무가를 인맥과 감으로 섭외하는 게 소속사 사장 역할이다. 대표이사 바뀐 이후의 DSP가 자사 가수들, 특히 레인보우에게 줬던 곡과 안무 퀄리티역대급이었던 것이 블랙스완[60]를 생각하면 답이 나올 것이다. 카라 때의 DSP는 백억대 부채로 앞을 못 내다보는 상황이었고, 레인보우 때의 DSP는 카라가 벌어다 준 현금으로 풍족한 상태였던 것을 생각하면, 소속사 사장 역할이 엄청나게 큰 것을 알 수 있다. 다만 미스터를 타이틀곡으로 안 밀고 Wanna를 타이틀곡으로 민 것은 미스였다.

두번째로 게키단 히토리의 경우 일본 방송에서 카라를 홍보할 때 감동받은 일이라며 자주 말하는 일화가, 카라가 일본 진출하기 훨씬 전에 사적으로 DSP 사무실에 직접 찾아가서 멤버 전원의 친필 싸인 포스터를 받아왔다는 이야기다.[61]영상 사무실 문 앞에 어떤 경비원 같은 사람이 있었는데, 자기가 카라의 팬이라고 말하니 사무실로 친절하게 안내해서 멤버 전원의 친필 싸인이 있는 포스터를 줬다고 한다. 사람 좋아보이는 친절한 분이었다고 회상했다. 그런데 2010년 2월 도쿄 赤坂BLITZ에서 열린 카라의 라이브에 간 날 그 경비원 아저씨가 있길래 아는척 했더니, DSP 사장이었다고 한다. 즉 그 사람이 이호연이었던 것이다ㄷㄷㄷ 뇌출혈로 쓰러지기 얼마 전의 이야기다. 카라가 일본에 전혀 진출하지 않았던 시절이고 게다가 게키단 히토리가 누군지 알 리도 없으니[62], 보통 사람 같으면 그냥 적당히 응대하고 말았을 것이다. 하지만 사장이 직접 친절히 대접했고 그 결과 상상 이상의 홍보효과를 냈다. 참고로 이때 카라인도쿄 방송을 보면 이호연 사장이 일본까지 같이가서 챙기고 있다. 그런데 안색이 그냥 보기에도 안 좋아, 이미 뇌출혈의 징조가 있었다. 윤흥관 이사(카라가 아빠라고 부르던 분)는 카라의 일본 첫 쇼케이스때 뒤에서 울다가 이호연사장님에게 들켜서 몇달간 놀림 당했다고, 라디오에 나와서 말한바 있다.[63]

또한 카라는 생뚱맞게 일본 진출에 성공한 것이 아니라, 이미 DSP에 어느 정도 기반이 갖추어져 있었기에 성공한 것이다. 2006년에 이호연과 친분이 있던 高和彦씨를 대표로 선임해 DSP 일본법인을 설립했고, SS501을 일본에 진출시켰다. 이때의 高和彦씨의 인맥과 노하우가 카라의 일본진출에 큰 도움을 주었다.# 그리고 카라의 경우는 일본음악저작권협회에서 중핵을 맡고 있는 프로덕션 오기에서 일본 쪽 매니지먼트를 지원했으며 이 덕분에 많은 방송 프로그램에 나갈 수 있었다.

아무튼 분명 카라의 대 성공은 DSP의 해외 진출의 전환점이었고, 이를 통해 해외 진출 성공의 경험을 축적시키나 했다. 하지만 레인보우A-JAX를 한국 시장에서 입지를 다지기도 전에 급하게 일본 시장에 내보냈다가, 한국에서도 일본에서도 확실하게 자리를 잡지 못하게 만들어 버렸다. 레인보우와 같은 경우 카라가 일본에서 대 성공을 거둔 시기와 맞물려 일본 진출을 하였기 때문에 기대를 모으기도 했으나, 맥락없는 카라 동생 그룹이라는 타이틀만 밀어붙이다가 일본의 카라 팬들에게까지 쓴소리를 들어야 했다. 국내에서 카라에게 처음 반응이 오기 시작하자 일본 진출 제의가 들어왔을때, 당시 DSP는 카라의 국내 기반을 더 닦아야 한다고 판단해 진출을 미루고 2010년 5월에 대형기획사와 더 좋은 조건으로 진출했던 것과 비교하면 아쉬운 결정이다.

한편 카라 자체에 대해서 보면, 초반에는 아예 제2의 핑클이라는 컨셉하에 메인 보컬 + 그외멤버라는, 사실상 핑클의 후속 그룹과 같은 느낌의 멤버 조합으로 데뷔하면서 역시 신선한 기획력을 찾아보기는 힘들었었다. 데뷔초의 힙합 컨셉마져도 대중들에겐 아무런 반응을 얻지못했다. 이에 이후 카라가 성공한 것은 전담 작곡진이었던 Sweetune의 능력과 멤버 본인들의 매력으로 이룬 것이라고 평가절하하는 의견이 있다. 하지만 전술한 바와 같이 엠넷 오디션을 통해 능력 있는 멤버들(구하라, 강지영)을 추가로 뽑아오고, 그런 대박 작곡가와 안무가를 붙여주는 게 소속사의 능력이자 역할이다. 소속사 대표가 바뀐 후 레인보우에게 붙여진 곡과 안무의 퀄리티를 생각하면 답이 나온다. 게다가 카라 때는 방송제작 사업 실패로 인해 상장폐지 크리까지 몰려 소속사가 백억대 빚에 허덕이던 때고, 레인보우 때는 카라가 벌어다 준 돈으로 소속사가 풍족한 상태였다. 이 점을 보면 아이돌의 성공에 소속사의 능력과 결정력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 수 있다.

2017년부터는 KARD가 전혀 생각지 못한 방법으로 해외진출을 이뤄냈는데, 이미 기존 해외 K-POP 팬들에게 좋은 반응을 이끌어내며 오히려 기존 일본 시장에서 벗어나 북미, 남미까지 포함한 해외 투어를 먼저 시작했다. 아이튠즈 월드 차트 25위 까지 오르며 국내보다 해외에서 더 반응을 얻고 있어 이 기세를 유지하면 최초의 해외지향형 아이돌이 될지도. 실제로도 유럽, 남미권에서의 반응이 좋은 편이다. KARD의 경우에는 의도적으로 스페인어를 연상시키는 가사를 넣거나[64], 남미 취향의 안무를 넣는 등 해외 공략을 차근차근 준비한 케이스이다.

컴백도 DSP 아이돌 치고는 비교적 빠른 주기로 컴백이 이뤄지고 있는데, 멤버인 BM이 앨범에 참여하기 시작하면서, 본격적으로 전곡 작사작곡을 담당하고 있기 때문에 얼마든지 곡을 뽑아낼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해외투어 반응이 좋아 컴백과 동시에 해외투어를 여는 등 1년에 한번꼴로 해외투어가 열릴정도로 반응이 좋다. 주기적인 해외투어 덕분에 해외팬덤도 꽉 잡고 있다. 명실상부 DSP의 돈줄로 우뚝 솟아올랐다.


2.7. 취약한 언론플레이 능력[편집]


언론플레이가 생명인 연예 기획사이면서도 언론플레이 능력이 형편없다. 아니, 형편없는 수준이 아니라 언론플레이 자체를 거의 하지 않아서 소속 그룹 팬들에게 '제발 언플 좀 해라' 같은 말을 적지 않게 듣는다. 그래도 컴백 기사 정도는 약간 날리기는 하고, 레인보우가 데뷔할 적에 엄청난 양의 보도자료를 투하하여 언플을 쏟아냈다. 하지만 "SS501, 카라는 제대로 신경도 안 써주더니 얘네들은 왜 이렇게 밀어주냐" 며 반감만 만든 데다, 레인보우의 첫 활동은 젝스키스 핑클 더블에스 카라가 번 돈을 까먹으면서[65] 이렇다 할 성과를 거두지 못한 채 종료되었다. 그나마 이것도 다른 대형 기획사 신인들과 비교하면 새발의 피 수준. DSP 소속 기존 연예인들에 비해 엄청났다는 것일 뿐이다. 이것도 꾸준히 지속되지 못하고 반짝 언플에 그치고 말았으며 정작 언플해야 할 타이밍에 언플을 해주지 않는 건 선배 그룹들과 마찬가지. 오죽했으면 내가 네트워크와 더불어 언플을 전혀 안 하는 기획사 중 하나로 꼽힐까. 그리고 2014년 허영지 데뷔 시 이를 답습해 엄청난 언플을 쏟아내고 신규 서바이벌까지 런칭했으나[66] 결과는 신규 팬 확보 실패 및 팬덤 이탈로 이어졌다.[67]

김현중이 전두환 팔순잔치에 참석했다는 기사가 떴을 당시에 DSP는 "결코 그런 일은 없다" 며 강하게 반발하다가, 이런 기사가 뜰 정도로 오히려 역효과만 불러들였다. 다만 실제로 전두환과 이호연 사장 생일이 1월 18일로 같긴 하다. 이것을 가지고 이호연 정치성향이 극우라고 보기는 힘들다. 노무현 대통령 사망 당시 이호연은 SS501을 조문하게 하고, 공항에서 출국할 때 멤버 전원 검은 양복을 입게 했다. 정치성향이 어떻다 보다, 그냥 별 생각없이 자기가 하고 싶은대로 행동했다고 보인다. 한편 전두환 생일 참석 건을 가지고, 이호연이 김현중의 몸값을 떨어뜨려 DSP에서 못 나가게 하려는 수작 아니냐는 음모론도 있었다. 하지만 전술한 바와 같이 김현중이 무릎팍도사에서 직접 밝힌 바를 보면, 이호연은 김현중을 쿨하게 보내주면서 힘든 것 있으면 얘기하라며 도와주겠다고 말했다. 그리고 얼마 후 뇌출혈로 쓰러졌다. 이 점을 봤을 때 음모론은 설득력이 떨어진다. 당시 김현중 인기를 봤을 때 겨우 그 정도 사건 가지고 소속사를 못 찾을 수준이 아니기도 했다.

언플로 메이저 걸그룹을 만들었던 광수 사장과는 대조적이다. 카라의 성장과 함께 자본의 여유가 생기면서 허위기사[68]에 대한 대응도 빨라지고 있지만 갈 길이 멀다.

그런데 이 형편없는 언론플레이 능력이, 소 뒷걸음질 치다 쥐잡는 것 마냥 아주 가끔 도움이 되기도 한다. 소속 연예인들이 사고를 쳐서 사회적 이슈로 떠오르면 다른 연예 기획사에선 자기 변명, 물타기, 감성팔이 등의 언플로 여론을 무마시키려다 역효과로 일이 더 커지고 연예인과 기획사의 이미지가 더욱 악화되는 경우가 자주 있다. 그런데 DSP에선 이럴 능력이 없어서 기획사&소속 연예인들이 사실을 그대로 인정하며 사과하게 되고, 이게 오히려 대중들에게는 진실성이 있는 것처럼 보여서 생각보다 빨리 사건이 무마되는 경우가 가끔 있다. 대표적인 사례로 카라 멤버들이 탄 차량이 장애인 주차공간에 무단 주차를 해서 논란이 되었을 때, DSP 측에선 곧바로 이를 인정하고 재발 방지를 위해 노력하겠다고 밝혀서 논란이 가라앉은 적이 있다.


3. 이호연 사장이 물러난 이후[편집]


에이프릴 데뷔 이후로 매니저, 코디[69], 스타일리스트, 회사 직원 등의 일처리에 관해 악평이 여기저기서 나오고 있다. 한마디로 팬들 의견을 귓등으로 듣는 걸 넘어 아예 듣지 않는다. 특히 매니저들이 V LIVE에 너무 자주 나온다는 문제가 있는데, 에이프릴의 경우 주목받아야 할 가수 대신에 매니저가 브이앱에 너무 많이 나오고 멤버들에게 무례한 언행을 일삼으며 팬들의 불만이 상당한 편이다.[70] 2018년 들어 멤버에게 막말을 하는 등 이 문제가 심각해져서 항의를 받고 탁구 브이앱이 삭제되기도 했다.[71][72] 또한 주간 아이돌, 아이돌룸과 같은 아이돌 예능 출연이 없는 것에도 팬들이 분노하고 있다.

여담으로 이호연의 와병 전보다 이호연의 와병 후의 소속 걸그룹의 평균신장이 아주 많이 내려갔다. 핑클(168cm)은 베이비복스와 더불어 당대 최장신 걸그룹이었던 것에 비해[73] 카라(163cm), 레인보우(164cm), 퓨리티(161cm), 에이프릴(164cm)[74] 등의 평균신장이 낮아졌다. 단순히 흥망성쇠가 문제가 아니라 이호연이 쓰러진 후 회사의 취향도 많이 바뀌었음을 알 수 있다.

피드백이 되었는지 the Ruby 활동에서는 보컬멤버들의 분량을 감안하더라도 그간 파트를 못 받던 멤버들의 파트가 대폭 늘어나는 등 전보단 나아진 편이다.

2016년 KARD가 데뷔하면서 본명 전통은 깨지고 마는데, [75] 남자 멤버 두 명이 각각 자신의 별명과 영어 이름을 변형한 것을 예명으로 사용한다. 또한 에이프릴도 레이첼은 이름(나연)이 같은 연예인이 많아 영어 이름을 예명으로 사용하게 되었다.

2010년대 이후 멤버 구성 현황을 보면 다음과 같다. 윤채경프로듀스 101에서 간발의 차이로 아이오아이로 데뷔를 하지 못해서 I.B.I가 되었고 그 나름대로 인기를 끌자 DSP미디어 측은 그런 윤채경을 바로 APRIL에 합류시켰고 역시 레이첼도 발레리나 이력만 보고 바로 APRIL에 합류시켰다. 확실한 건 이렇게 인적자원을 구성한 APRIL은 데뷔한 지 5년이 지난 2020년 중순까지도 음악 방송 1위가 없다는 점이다. APRIL에 비해 굉장히 낮은 평가를 받았던 CLCAPRIL에게는 한참 후배인 EVERGLOW도 음방 1위를 이룩했지만 APRILCLC보다 좋은 출발점에다가 EVERGLOW보다 몇 년 일찍 데뷔하고도 불구하고 1위가 없다.

중요한 것은 이호연 사장이 직접 뽑즉데한 이효리는 40살을 넘긴 나이인 아직도 절정의 인기를 구가하고 있는 반면 이호연 사장이 병원에 실려간 이후 데뷔한 에이프릴은 이효리에 비하면 인기 차이가 너무 심할 정도로, 이효리보다 네임드에서 밀리는 아이돌이다. 심지어 이 문제로 인해 에이프릴 데뷔 2개월 전 센터가 바뀌면서 멤버 간 집단괴롭힘 논란이 터지게 되었다.

이호연이 쓰러지고 회사는 이호연과 따로 운영되지만, 그 안목과 줍줍 전통은 죽지 않았다는 평이다. A-JAX는 회사의 기획력이 개판이라 그렇지 비주얼만큼은 DSP답게 좋다는 평이 많았으며 에이프릴의 데뷔 때도 다른 소속사의 연습생을 데려오면서 이 전통은 깨지지 않았다는 것을 다시 한 번 인증하기도 했다. 실제로도 윤채경의 경우 비록 I.O.I에 최종 선발은 되진 못했지만 프로듀스 101에서 제대로 포텐이 터졌고 그걸 기반으로 해서 I.B.I에 따로 선발이 되었을 정도였다. 참고로 현재는 DSP의 신인개발팀이 인재 영입을 맡고 있다.

한편 DSP가 소원을 놓친 점을 두고 안목이 별로라고 보는 이들도 있다. 그러나 이호연이 쓰러진 이후 일어난 일임은 둘째로 치더라도, 소원 나이대의 걸그룹 런칭 자체가 없었으니 소속사를 탓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회사 자체가 휘청여서 아예 걸그룹을 제때 런칭하지 못했다.

하지만 오디션 서바이벌에서 첫 데뷔조 입성 참가자가 이미 에이프릴로 데뷔했던 이현주였고, 연습생 신분은 손동표가 처음일 정도라 연습생 신분 참가자들의 처참한 성적을 본다면 그 캐스팅을 잘 한다는 장점마저도 의문이 되고 있으며, 인재 육성 체계 및 팬덤 확보에서 보완이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플레디스판타지오처럼 캐스팅만 잘 하는 회사라는 악명에서 벗어나려면 신인개발팀에서도 전국에서 인재를 찾아 오디션을 개최하는 등의 지속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그러나 에이프릴부터는 캐스팅된 멤버가 없고 전원 오디션을 통해 들어왔다.[76]

2014년 들어 다양한 작곡가들에게 곡을 받는 시대로 흘러가게 돼서 그런지 더이상 팬들은 작곡가를 데려와 달라는 소리를 하지 않는다.

언플에 대해선 비판이 더욱 늘어나게 되었다. 대표적으로 연습생 안소진의 자살 사건 당시, DSP는 재빠르게 베이비카라의 공식 팬카페를 비공개로 전환하고 네이버 프로필을 수 시간만에 바꾸었으며 자사 입장을 홍보하는 기사를 쏟아내었다. 참고로 당시 레인보우가 블랙스완으로 컴백하고 활동을 마칠 때까지도 네이버 프로필 사진을 신곡의상으로 바꿔주지 않았다. 그런데 미니4집은 발표하자마자 프로필 사진 바꿔줬다. 급하긴 급한건가 카라 멤버 3인의 계약 만료 당시에도 3명은 계약이 종료되고 각자 길을 찾아갔지만 DSP가 카라를 보내주는 듯한 뉘앙스의 언플 기사를 쏟아내기도. 임직원들에게 불리할 때만 언플 능력이 풀가동되는 신기한 회사. 심지어 레인보우는 재계약에 실패하자 계약이 조금 남아있음에도 불구하고 먼저 해체 기사를 내는 짓거릴 저질렀다.[77] 과거 SS501이나 카라도 이 짓은 안 했다.

이후 APRIL 원년 멤버들의 이현주 집단괴롭힘 논란이 발생하며 이 문제는 심하게 터져나왔고, 이미 여론이 완전히 등을 돌린 상황에서 에이프릴을 옹호하려고 이현주를 폄훼하는 입장문과 보도자료를 계속 내면서 아예 회사 신뢰도가 바닥으로 떨어졌고, 설상가상으로 이현주를 고소하겠다는 선언을 하면서 회생 불가능한 상태가 되었다. 그리고 관련 고소 건은 2021년 6월 혐의없음으로 종결되었다.[78]

에이프릴의 경우, '사월이' 라는 마스코트를 만들어서 그룹 홍보에 적극적으로 참여시키는가 하면[79], 아이돌 리얼리티 프로그램을 UHD로 찍는 등의 시도를 하고 있다. KARD는 총 3단계에 걸친 데뷔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으며 히든 멤버, 히든 버전 뮤비 등의 다양한 마케팅을 진행했으며 히든 멤버 컨셉은 폐기되었다.[80]

2015년 무렵 이후 임직원들이 거의 물갈이되었는데, 그 이후 기획력과 콘텐츠의 질이 많이 나아졌다는 평을 듣는다. KARD의 경우 3연속 싱글로 화제성을 높이고, 음악과 퍼포먼스 면에서 남미 시장을 적극적으로 공략하는 수법을 통해 해외를 중심으로 팬들을 확보하며 좋은 반응을 얻는 등 기획력 측면에서 꽤 훌륭한 모습을 보여 주었다.

하지만 이호연의 사망 뒤 기획사가 돈이 없는 건지 정규 앨범 발매에 인색해졌다. DSP 소속 아티스트의 정규 앨범은 카라 4집 Full Bloom가 마지막이며 이 앨범은 무려 2013년에 나온 앨범이다. 과거 레인보우는 정규 앨범이 1개 있다지만 파트 1, 2로 나눠냈으므로 사실상 미니 앨범이며 소속된 아이돌인 KARD나 ARPIL 모두 정규 앨범이 1개도 없이 싱글과 미니 앨범만 발매했다.
[1] 가수 매니지먼트에 관한 사례연구, 김정은, 경희대 언론정보대학원, 2000[2] 원문: 업계 관계자들은 “DSP가 지금의 위치에 오르게 된 데는 DSP의 설립자인 이호연 대표의 역할이 결정적이었다”고 입을 모은다. 이 대표가 DSP 설립 초부터 줄곧 기업의 경영·기획 등을 비롯해 가수의 앨범 제작까지 손수 돌보며 기업의 성장을 도모했기 때문이다. 성균관대학교 체육학과를 졸업한 이 대표는 1981년 한밭기획, 1989년 대성기획 등을 거쳐 1991년 DSP를 설립했다. 실력 있는 제작자로 유명세를 탄 후 데뷔시키는 가수마다 정상에 올려 ‘스타제조기’라는 수식어를 얻기도 했다. 큰 부침 없이 기업의 덩치를 키워내 경영 능력 또한 높이 평가받았다. 빅스타 산실 남편 쓰러진 후 ‘아내의 경영은’[3] 원문: 대성기획의 수장은 1980년대 소방차를 대스타로 만들었으며, 1990년대 잼 젝스키스 핑클, 2000년대 SS501 등 수많은 스타 아이돌 그룹을 탄생시킨 이호연 대표였다. 물론 이호연 대표는 DSP의 사장도 맡았다. 추진력과 스태프 관리에 있어 가요계 최고 수준이었던 이호연 대표가 일선에서 활발히 활동하던 시절, 대성기획 및 DSP는 이수만 사장의 SM엔터테인먼트와 함께 사실상 국내 양대 가요 기획사로 군림했다. 카라, 시급해결과제 '멤버추가건' 아닌 '韓활동 확정+多'[4] 출처: 가수 매니지먼트에 관한 사례연구, 김정은, 경희대 언론정보대학원, 2000[5] 에이프릴의 경우 주간 아이돌, 아이돌룸에 나가지 못해 팬들의 원성이 크다.[6] 정작 카라 팬들 사이에서는 일본에서의 끼워팔기 때문에 반응이 좋지 않았다. 일본 활동 당시 남녀노소 불문하고 골고루 팬층이 분포되어 있었던 카라와는 달리 레인보우는 국내에서 남성 팬 비중이 조금 더 높게 형성되어 있어서 활동 당시 팬층도 겹치지 않았던 편. 남녀노소 상관없는 K-POP 걸그룹의 고른 인기 및 현지화 전략은 이후 TWICE가 2016년부터 일본에 진출하면서 이어받게 된다.[7] 이 경향이 극에 달한 곳이 쟈니스 사무소이다. 연습생에 해당하는 주니어들을 많이 뽑아 놓고 데뷔는 사장 마음대로 시키며 트레이닝도 속성으로 시키는 회사. 결국 타키자와 히데아키가 차기 헤드로 취임하면서 정식 양성소 설립이 결정되었다.[8] 대신 DSP는 케이팝 팬들 사이에서 에이프릴 이후로 보컬 및 댄스 파트분배가 능력주의로 칼같다는 평가를 받는다. 보컬 능력을 고려하면서도 프리데뷔 과정에서도 팬들의 반응을 고려해 최대한 공평하게 분배하려 하는 타 기획사와는 대조적.[9] 젝스키스 결성 당시 6명 중 유일하게 이호연이 탐탁치 않아했던 멤버가 이재진이다. '화면으로 보니 코가 커서 안 되겠다'고 퇴짜를 놓았지만, 나중에 은지원, 김재덕이 회사를 설득하여 멤버로 데려왔다고 한다.영상 14분부터 이때부터 악연이 시작됐는지도 모르겠다.[10] 성유리는 무릎팍도사에서 밝히길, 활동 당시 자기가 화장실 안에 들어가자 안티팬들이 입에 담지도 못할 더러운 쌍욕을 했다고 한다. 성유리는 그 시절 이후로 트라우마가 생겨서 교복입은 여학생들만 봐도 식은땀이 흐른다고 한다.[11] 정식으로 보험처리를 하려면 일단 학생들을 처벌해야 했는데 차마 그럴 수가 없었다고 한다.[12] 조영구 본인이 놀러와 방송에 출연했을 당시 20명 밖에 모금을 안했다고 직접 말했다.#[13] 오늘날 보면 손발 오그라드는 수준의 주작 글을 올리며 핑클클릭비를 천하의 나쁜놈으로 몰아갔다.## 본 내용이 작성된 이후 일부 팬사이트가 글을 막아놨는데, 이전에 캡쳐한 화면은 다음과 같다.# 이외 이효리가 이호연 애를 낙태해서 핑클한테 대상줬다는 등 오늘날 같으면 바로 고소 먹을 수준의 루머 글을 올렸다.# # # # # # # [14] 폭처법 적용 기준은 의외로 방대하다. 폭행은 물론이고 얼굴에 침을 뱉는 행위, 계란, 밀가루, 식초 등을 투척하는 행위도 적용이 된다.[15] 책 '스타를 만드는 사람들 참조[16] 수록곡 중에서도 명곡들이 많다. 뫼비우스의 띠 같이 '이게 젝스키스 노래였어?'라고 하는 곡들도 상당수 있다.[17] 김정은, 가수 매니지먼트에 관한 사례연구, 경희대학교 언론정보대학원[18] 계란 후라이는 하얀색 H.O.T 팬들 사이에 둘러싸인 노란색 젝스키스 팬을 비유한 것이다.[19] 아무튼 팬들 입장에선 음악방송이며 각종 예능에서 거의 1년 내내 젝스키스를 볼 수 있던 시절이었다. 이때에 익숙한 일부 올드팬들은 재결합 후 젝스키스의 신곡 활동이 2~3주란 소리를 듣고 적응 못하고 있다.[20] 원문: 업계 관계자들은 “DSP가 지금의 위치에 오르게 된 데는 DSP의 설립자인 이호연 대표의 역할이 결정적이었다”고 입을 모은다. 이 대표가 DSP 설립 초부터 줄곧 기업의 경영·기획 등을 비롯해 가수의 앨범 제작까지 손수 돌보며 기업의 성장을 도모했기 때문이다. 성균관대학교 체육학과를 졸업한 이 대표는 1981년 한밭기획, 1989년 대성기획 등을 거쳐 1991년 DSP를 설립했다. 실력 있는 제작자로 유명세를 탄 후 데뷔시키는 가수마다 정상에 올려 ‘스타제조기’라는 수식어를 얻기도 했다. 큰 부침 없이 기업의 덩치를 키워내 경영 능력 또한 높이 평가받았다.# // 원문: 대성기획의 수장은 80년대 소방차를 대스타로 만들었으며, 90년대 잼 젝스키스 핑클, 2000년대 SS501 등 수많은 스타 아이돌 그룹을 탄생시킨 이호연 대표였다. 물론 이호연 대표는 DSP의 사장도 맡았다. 추진력과 스태프 관리에 있어 가요계 최고 수준이었던 이호연 대표가 일선에서 활발히 활동하던 시절, 대성기획 및 DSP는 이수만 사장의 SM엔터테인먼트와 함께 사실상 국내 양대 가요 기획사로 군림했다.#[21] 컴백 자서전의 김재덕 부분 원문 : "재덕이는 내일부터 연습하자!" 아쉽게도 나만 뽑히게 되었다. 주노형 사무실에서 약 3일을 머는 동안 DSP 이호연 사장님이 우리들의 춤을 보시더니 당시 구상중이던 젝스키스의 멤버로 나를 점찍게 된 것이다. 난 한번도 그런 상황을 예측하지 못했기 때문에 당황했다. 퀵실버 멤버들 중 누구는 뽑히고 누구는 떨어지고, 정말 전혀 상상하지 못한 일이 벌어졌다. 꽤 고민이 되었다. 원하던 가수가 된다고는 하지만 다른 친구들은 그냥 부산으로 돌려 보내야 한다니... 일단 팀에 합류했다. 주위에서는 "네가 잘 되어야지 친구들도 도와줄수 있다"란 말씀을 해 주었다. 그리고 우린 전에 이런 얘기를 한 적이 있었다. 누가 되더라도 웃음으로 보내주자라고. 다행히 재진이가 함께 남았다. 재진이는 주노형 사무실에 있으면서 백댄서로 활동하게 된 것이다. 그러던 중 젝스키스 멤버로 사람이 부족했다. 연습하던 한 친구가 떨어져나갔기 때문이다. 다른 능력보다 춤추는 능력이 있으면 좋은 자리였다. 난 기회는 이때다 싶어 매니저인 기영이형에게 부탁해서 재진이를 다시 한번 봐달라고 졸랐다. "춤도 잘 추지만 생각이 깊은 아이예요." 함께 있던 지원이형도 지원 사격을 해주었다. 그 동안 주노형 사무실에서 봤던 이미지가 꽤 좋았던 것이다. 처음에는 별반응을 보이지 않았던 기영이형도 마음을 돌렸다. 그리곤 사장님께 허락을 받아 재진이를 젝스키스의 5번째 멤버로 받아들이게 되었다.[22] 당시의 DSP(대성기획)는 SM과 함께 2대 기획사였다.[23] 예를 들어 이런 식 파일:ckshfalse.jpg[24] http://gall.dcinside.com/board/view/?id=6kies&no=149604&exception_mode=recommend&page=1200 http://gall.dcinside.com/board/view/?id=6kies&no=332195 https://m.blog.naver.com/my_mister_/220724827354 https://entertain.naver.com/read?oid=382&aid=0000477466 http://gall.dcinside.com/board/view/?id=6kies&no=149534&exception_mode=recommend&page=1200 https://theqoo.net/sechskies/266272420 https://theqoo.net/ktalk/574257919 https://theqoo.net/sechskies/266283108 http://gall.dcinside.com/board/view/?id=6kies&no=385819 http://gall.dcinside.com/board/view/?id=6kies&no=405008 http://gall.dcinside.com/board/view/?id=6kies&no=409834 http://gall.dcinside.com/board/view/?id=6kies&no=648656 https://theqoo.net/ktalk/457708137 http://gall.dcinside.com/board/view/?id=6kies&no=163415&exception_mode=recommend&page=1170 http://gall.dcinside.com/board/view/?id=6kies&no=926097 https://www.instiz.net/pt?no=3943138&page=1 https://theqoo.net/sechskies/496491603 https://theqoo.net/sechskies/266310757 https://onehallyu.com/topic/461510-instiz-eun-ji-won-kang-sung-hoon-hawaii-couple/ [25] 오랜만에 옛날 이야기 보따릴 펼쳤더니 재미난 일들이 많긴 하다. 넷은 여러모로 세고 특이했다. 이상하리만큼 운이 좋았다, 우린. 가수가 되고 싶단 큰 꿈도 없이 캐스팅된 아이들. 노래 안 되고 춤도 안 되는데 '연습생 시절'이란 것도 없이 그 상태로 데뷔를 시킨다고… 망할 거라고 확신하며 아무 기대도 겁도 없이 세상에 나왔다. 예상대로 데뷔곡 '블루레인'은 큰 집중을 받지 못했지만 좌절하지도 않았다. 당연하다고 생각했기에. 우리 사장님은 갑자기 말도 안 되는 곡으로 방향을 바꿔 빛의 속도로 일을 진행했다. 뮤직비디오를 찍던 날의 기억이 생생하다. 이런 옷을 입고, 이런 유치한 가사를 립싱크하라니. 이걸로 앞으로 방송도 해야 하냐고. -이것봐 나를 한번 쳐다봐. 나 지금 예쁘다고 말해봐-콜미 콜미 콜콜 기 붜 코올 -난 니거야- 우린 모두 하기 싫은 티를 뚝뚝 묻혀가며 했다. 그 이후 고공행진. 노래 춤 실력을 키워야 하는데 예능의 절대 강자로 시청률을 제압하던 핑클은 잠자는 시간, 가요 프로그램 출연하는 시간을 제외하곤 예능촬영에 몰두. 노래 연습은 안녕... 춤은 모두가 따라 출 수 있는 걸로. 오늘 밥 먹으면서 저 위의 내용으로 웃음꽃이 활짝 폈다. 신기하지 않냐며, 잠깐 꿈을 꾸고 깨어난 것 같다며. 갖춰진 것도 없이 운이 억수로 좋았던 건 말이 안 되는걸 되게끔 옆에서 애써준 사람들의 공이 크다고. FBI에서 훈련 받는 것보다 우리 넷을 케어하는 게 몇 배는 더 고통스러웠을 매니저 오빠들. 불도저 이호연 사장님. 오늘 귀 좀 간지러우시겠다. 핑클을 에워싼 숲이 되어준 그대들에게 고맙고 보고 싶고 미안하고 넷이서 이야기 나누며 많이 그리워했어요. 오겡키데스카.[26] 구하라는 생전에 술을 잘 못 마셨다.[27] 젝스키스 팬들은 강제해체 당했다는 루머를 수없이 퍼뜨렸으나, 멤버 본인들이 수차례 강제 해체가 아니라고 인터뷰한 바 있다. 자세한 내용은 젝스키스/해체 문서 참조[28] 기타 이런 식의 글들이 올라왔다.## [29] 우스갯소리로 SM에 1명씩 더하여 데뷔시키는 전략이 DSP의 전략이 아니냐는 소리가 돌기도 했다.[30] 반면 YG는 지나친 EDM뽕으로 곡을 다 죽여 놨다는 평가를 듣는다.[31] 대표적인 경우가 구하라, 이나은. 이 둘은 각각 SM(+JYP 공채 1기 합격), JYP 공채 11기 3위 출신이다. 그리고 구하라아이린보다 6년 일찍 데뷔한다[32] 120416일자 방송[33] 이효리의 2집 앨범 땡스투에 "8년동안 든든하게 지켜주시는 우리 사장님 '나 이호연이야!' 그 말 오래오래 듣고 싶어요. 건강하세요.."라고 적혀있는 것을 보면, '나 이호연이야'가 평소에 자주하는 말버릇이었다고 보인다.[34] 기타 정선희가 여걸파이브에서 밝히기를, 사장이 당시 "물건이 들어왔는데 좀 커"라고 했다고 한다.[35] 알다시피 옥주현김현정과 동급으로 키가 엄청나게 크다. 걸그룹으로서는 거의 탑클래스 수준으로 키가 큰 173cm인데, 그런 큰 키에 살집까지 붙으니 말 그대로 거대하게 보이는 것이다. 1세 위의 김범수가 위압감을 느낄 정도라고.[36] 데뷔하고 거의 곧바로 이호연 사장이 쓰러졌다. 데뷔는 시켜놨는데 케어는 전혀 못해준 셈이다.[37] 김재경은 연습생 당시에도 에이스라고 소문이 자자했다. 고우리, 오승아는 지상파 드라마에 활발히 출연 중인데, 비쥬얼이 원래 배우인 것 같다는 평이다. 조현영도 남초 사이트에서 매우 흥했었다.[38] 그래서 김재덕 본인은 자기가 얼굴이 잘 생겨 뽑힌 줄 알았다고 한다. 본래는 춤으로 캐스팅되었다고 생각했다고. 그리고 20년 뒤 닮은꼴 후배도 비슷한 캐스팅 루트를 거쳐 데뷔하게 된다.[39] 이 때문에 활동 초기 실력 면에서 박한 평가를 받았으나 이후 끊임없는 춤, 노래 연습 및 어학습득력을 통해 발전했다. 2014년부터 일본의 스위트 파워로 이적하면서 솔로가수 활동과 배우 활동도 잘 하고 있는 중. 그리고 뮤지컬 및 1인 음악극도 맡아서 자기 몫을 충실히 소화할 수 있는 가수, 배우로 성장했다.[40] SM과 정식 계약 전에 소속되는 회사. 그리고 그 기획사는 KARD 멤버 이름이 된다.[41] 첫 매니저가 DSP의 길종화 이사였다.# 2016년 젝스키스가 재결합하며 강성훈이 박소현의 러브게임에 출연했는데, 연습생 시절 강성훈과 은지원이 원래 듀엣으로 데뷔하려던 것도 다 알고 있었다.[42] 장수원은 오디션 장에서 할 줄 아는게 없다고 말하는 순수함이 마음에 들어, 강성훈이 사장한테 귓속말로 "쟤 픽스 하시죠"라고 말했다고 한다. // 김재덕은 워낙 춤을 잘 추니 사장이 처음부터 OK 했다. 근데 장수원 폭로에 따르면 강성훈은 김재덕 얼굴을 보고 뽑기 싫어했다고 한다. 이에 강성훈이 해명하길, 얼굴이 아니라 사투리가 너무 쎄서 오해했다고 밝혔다. // 이재진은 강성훈 덕에 뽑힌 측면이 크다고 보인다. 강성훈 생각에 김재덕이 각기춤을 잘 추는 반면 이재진은 웨이브를 잘 춰서 조화가 맞아 보였다고 한다. 추가로 영입한 4명의 멤버 중 이호연이 반대한 멤버는 이재진이다. 99년 서세원쇼에서 밝힌 바에 따르면(해당영상 14분부터), 이호연은 이재진을 보고 '화면으로 보니 코가 커서 안 되겠다'고 퇴짜를 놓았지만 나중에 은지원과 김재덕이 회사를 설득하여 멤버로 데려왔다고 한다. 이호연 사장에 대해 공개적으로 싫어하는 티를 낸 유일한 멤버가 이재진인 것을 보면, 이때부터 악연이 시작됐는지도 모르겠다. // 고지용은 강성훈과 초등학교때 부터 친구인데, 강성훈의 추천으로 젝스키스에 합류하게 됐다. 익히 알려진 바와 같이, 이호연이 처음 얼굴 보자마자 바로 OK 해서 멤버로 영입하는데 문제가 없었다. 다만 이날 강성훈의 고지용에 대한 발언은 부정확한 면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고지용이 강성훈한테 가수를 먼저 하고 싶다고 말했다'라는 것은 상당부분 전 과정이 생략되어 있다. 편집상의 문제라고 보인다. 고지용은 자서전에서나 인터뷰에서나 늘상 원래는 가수를 할 생각이 없었다고 언급해왔고 방송에서도 사업가가 꿈이었다고 얘기했다. 또한 가수를 하게 된 계기를 물었을 때에도 '성훈이의 추천으로' 라고 대답했었다. 즉, 강성훈의 말에서 '고지용이 가수를 하고 싶어했다' 라는 것은 먼저 가수를 하고 싶다고 자기 의견을 낸 것이라고 보기보다는 강성훈의 제안을 거절하고 난 뒤 설득 끝에 승낙한 것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보는 게 맞다.[원문] 그러나 뜻밖의 상황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당시 서울에서는 한창 5명에서 6명 정도의 댄스그룹이 인기를 끌고 있었다. 나는 멤버의 수가 6 명이 될 것이라는 사실에 실망했다. "사장님, 동물원 원숭이도 아니고 멤버가 그렇게 많은 그룹에서는 노래부르기 싫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어디서 그런 배짱이 튀어나왔는지 겁도 없이 사장님께 털어놓았다. 그리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가수의 꿈을 접고 다시 공부에 매달렸다. 사장님은 나를 설득하시는 한편, 어머니를 만나 내 마음을 돌려달라고 부탁하셨다. 나는 공부에 전념하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한번 품은 가수의 꿈이 쉽사리 지워지지 않는 것 또한 사실이었다. 이때 나의 마음을 돌려주신 분은 어머니셨다. "성훈아, 비록 어리지만 사장님과 이미 한 약속은 지켜야 되지 않겠니? 그리고 쉽게 네 꿈을 접을 수 있겠는지 마지막으로 다시 한번 생각해보렴" 어머니의 말씀이 옳았다. "어머니, 한번 해볼게요. 그 대신, 열심히 할 게요." 그리고 내 마음이 완전히 바뀐 것은 지금의 멤버들을 하나 둘 만나면서부터였다. 착하고 세련된 느낌의 수원이, 워낙 춤을 잘 추는 재덕이형과 재진이형을 보니 더욱 믿음이 갔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내가 소개한 지용이. 지용이는 전교 10등 안에 들 정도로 모범생이었지만, 어릴때부터 나와 붙어다니던 춤꾼 중에 춤꾼이었다. 이렇게 여섯 명이 모이자, 나는 세상에 부러울 것이 없었고 잘해낼 자신감이 생겼다.[43] SBS 땡큐 130329일자 방송[44] 책 '스타를 만드는 사람들' 이호연 부분 참조[45] 가수 매니지먼트에 관한 사례연구, 김정은, 경희대 언론정보대학원, 2000[46] 2012년 MBC 가요대제전에서도 판도라의 사전녹화를 진행하면서 핫팩과 파리바게뜨 샌드위치를 나눠 주기도 했다.[47] 지금은 역조공으로도 유명해진 아육대도 2013년 설날에 5인 체제로 참가한 바 있다.[48] 홍백가합전의 출연은 소녀시대와 동시에 최초. 그리고 중소돌의 도쿄돔 입성은 5년 후인 2018년 방탄소년단이 LOVE YOURSELF 월드투어로 다시 이루게 되며, 중소돌의 도쿄돔 입성은 현재까지도 카라와 방탄소년단이 유이하다.[49] 그리고 한국 걸그룹의 도쿄돔을 포함한 돔투어는 TWICE가 처음으로 이루게 되었다. 교세라 돔 오사카 최초는 BLACKPINK.[50] 에이프릴도 '봄의 나라 이야기', '손을 잡아줘' 활동으로 볼 때 안무실수가 별로 없는 편이다.[51] 업계 관계자들은 “DSP가 지금의 위치에 오르게 된 데는 DSP의 설립자인 이호연 대표의 역할이 결정적이었다”고 입을 모은다. 이 대표가 DSP 설립 초부터 줄곧 기업의 경영·기획 등을 비롯해 가수의 앨범 제작까지 손수 돌보며 기업의 성장을 도모했기 때문이다. 성균관대학교 체육학과를 졸업한 이 대표는 1981년 한밭기획, 1989년 대성기획 등을 거쳐 1991년 DSP를 설립했다. 실력 있는 제작자로 유명세를 탄 후 데뷔시키는 가수마다 정상에 올려 ‘스타제조기’라는 수식어를 얻기도 했다. 큰 부침 없이 기업의 덩치를 키워내 경영 능력 또한 높이 평가받았다.# // 대성기획의 수장은 80년대 소방차를 대스타로 만들었으며, 90년대 잼 젝스키스 핑클, 2000년대 SS501 등 수많은 스타 아이돌 그룹을 탄생시킨 이호연 대표였다. 물론 이호연 대표는 DSP의 사장도 맡았다. 추진력과 스태프 관리에 있어 가요계 최고 수준이었던 이호연 대표가 일선에서 활발히 활동하던 시절, 대성기획 및 DSP는 이수만 사장의 SM엔터테인먼트와 함께 사실상 국내 양대 가요 기획사로 군림했다.# [52] 2015년 핑클 멤버들의 회동 후 옥주현은 페이스북에 다음과 같은 글을 올린 바 있다. 핑클의 성공에 이호연의 감과 추진력이 상당부분 작용했음을 알 수 있다. // 오랜만에 옛날 이야기 보따릴 펼쳤더니 재미난 일들이 많긴 하다. 넷은 여러모로 세고 특이했다. 이상하리만큼 운이 좋았다, 우린. 가수가 되고 싶단 큰 꿈도 없이 캐스팅된 아이들. 노래 안 되고 춤도 안 되는데 '연습생 시절'이란 것도 없이 그 상태로 데뷔를 시킨다고… 망할 거라고 확신하며 아무 기대도 겁도 없이 세상에 나왔다. 예상대로 데뷔곡 '블루레인'은 큰 집중을 받지 못했지만 좌절하지도 않았다. 당연하다고 생각했기에. 우리 사장님은 갑자기 말도 안 되는 곡으로 방향을 바꿔 빛의 속도로 일을 진행했다. 뮤직비디오를 찍던 날의 기억이 생생하다. 이런 옷을 입고, 이런 유치한 가사를 립싱크하라니. 이걸로 앞으로 방송도 해야 하냐고. -이것봐 나를 한번 쳐다봐. 나 지금 예쁘다고 말해봐-콜미 콜미 콜콜 기 붜 코올 -난 니거야- 우린 모두 하기 싫은 티를 뚝뚝 묻혀가며 했다. 그런데 이게 그렇게 터질 줄이야 그 이후 고공행진. 노래 춤 실력을 키워야 하는데 예능의 절대 강자로 시청률을 제압하던 핑클은 잠자는 시간, 가요 프로그램 출연하는 시간을 제외하곤 예능촬영에 몰두. 노래 연습은 안녕... 춤은 모두가 따라 출 수 있는 걸로. 오늘 밥 먹으면서 저 위의 내용으로 웃음꽃이 활짝 폈다. 신기하지 않냐며, 잠깐 꿈을 꾸고 깨어난 것 같다며. 갖춰진 것도 없이 운이 억수로 좋았던 건 말이 안 되는걸 되게끔 옆에서 애써준 사람들의 공이 크다고…FBI에서 훈련 받는 것보다 우리 넷을 케어하는 게 몇 배는 더 고통스러웠을 매니저 오빠들. 불도저 이호연 사장님. 오늘 귀 좀 간지러우시겠다. 핑클을 에워싼 숲이 되어준 그대들에게 고맙고 보고 싶고 미안하고 넷이서 이야기 나누며 많이 그리워했어요. 오겡키데스카.[53] 정작 그 못떴다던 레인보우 역시 다트가 맞아떨어져간 멤버이 존재하는걸 보면 그 레인보우를 결성한 이호연의 안목을 다시 알수 있게 해주는 대목이다.[54] 사실 스타제국의 사옥 규모는 대형기획사에 비해 작은 거지, 어지간한 소규모 연예기획사들과는 당연히 비교가 안될정도로 좋은 시설을 가지고 있다. 프로듀스 101만 보더라도 스타제국의 회사 규모나 사옥의 수준은 상위권이었다.[55] 애초에 카라도 핑클과 같은 구조로 만든 것이어서 딱히 체계적인 멤버 구성은 아니었다. 무었보다 카라를 기획했던 길종화부터가 핑클의 매니저 출신이라서.[56] 그나마 클릭비가 밴드 아이돌이라는 신선한 컨셉이었지만, 멤버수나 코디는 신화를 벤치마킹한 게 강했다.[57]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99110300289117001&editNo=6&printCount=1&publishDate=1999-11-03&officeId=00028&pageNo=17&printNo=3649&publishType=00010 [58] 2014년 허영지 영입과 그에 대한 논란, 2015년 설리f(x) 활동 태업 논란과 탈퇴 이후로 걸그룹 멤버의 탈퇴 후 새 멤버 영입이 줄어들었고 탈퇴한 멤버의 파트는 남아 있는 멤버들에게 재분배하는 편이다.[59] 스윗튠은 이후 인피니트도 최정상급 아이돌로 키워냈고 현재 러블리즈의 프로듀서를 윤상 프로듀싱팀인 1Piece와 함께 맡고 있으며, 배윤정은 이후 야마핫칙스 댄스팀을 이끌고 최정상급 안무가로 자리잡으며 EXID위아래, 원밀리언의 안무가 메이제이 리와 함께 프로듀스 101의 안무 디렉팅을 맡기도 했다. 그야말로 2010년대 케이팝씬을 이끄는 황금손을 미리 붙여준 셈.[60] 이 이후 나온 Whoo 뮤직비디오도 노래는 괜찮았으나 소속사 예산 문제로 영상이 디지페디가 포기한 퀄리티가 나왔다. 그리고 라붐이 블랙스완으로 활동할 뻔했다고.[61] 풋스마 20110308일자, 메렝게의 기분 20110204일자, How to モンキーベイビー!2009년 11월 방송 등[62] 자신이 일본의 개그맨이라고 말은 했다지만, 카라가 일본에 전혀 진출하지 않은 상태고 한국에 유명한 일본 연예인도 아니니 이상하게 생각하는게 보통일 것이다.[63] 윤흥관 이사는 카라의 첫 도쿄돔 콘서트 전날 다음과 같은 트윗을 올리기도 했다. "이제 내일이다. 나가 이곳에서 공연을... 믿기지 않는다. 그리고 기쁘다. 눈물 날 정도로 ㅠㅠ 사장님께서 이걸 보셨음 많이 좋아하셨을텐데........"[64] 2018년 슈퍼주니어의 Lo Ciento 무대에도 특별 피쳐링 형태로 참가했다.[65] 그리고 에이프릴도 이 테크를 그대로 타면서 푸쉬를 먹튀하고 집단괴롭힘 사건까지 터지게 되면서 카라 팬들의 지지를 죄다 까먹었으며, 팬들은 Red Velvet, TWICE 등으로 흩어졌다.[66] 그 서바이벌 플랫폼은 훗날 세븐틴과 ASTRO가 데뷔프로젝트로 잘 써먹었다.[67] 실제로 이 때 분열되어 나간 허영지 지지 팬사이트 중 카라와(2017년 폐쇄)는 오픈 당시 멤버에 대한 성희롱성 표현 및 기존 멤버들에 대한 배척으로 팬덤에서 문제가 된 적이 있다. 그리고 5인 지지 게시판인 카라게시판이 2018년까지도 카라 팬포럼으로 이어져 오는 중.[68] 특히 국내뿐만 아니라 일본의 사이조, 주간실화, 리얼라이브 등 가십매체에 대한 대응 또한 형편없으며, 2011년 이들 가십매체에서 나온 기사는 후에 전부 구라로 밝혀졌다.[69] 특히 MAYDAY 활동 때는 총천연색 옷을 입혀서 어줍잖게 레트로 컨셉 따라한다고 불만이 폭발했으며, the Ruby에서는 코디가 이효리의 코디를 맡았던 정보윤 스타일리스트로 교체되었는데 위키미키, 프로미스나인의 코디와 같아서 이 그룹 팬들에게도 피드백이 들어오고 있다. 이효리 U Go Girl에 쓰였던 의상재활용 문제가 지속적으로 제기되는 중이긴 한데 이 이외에 의상에 대한 불만은 없는 편.[70] 또한 팬매니저 및 인력의 무성의하고 자의적인 일처리도 도마에 오르는 편이라 팬포럼에선 스태프가 도를 넘어 나대는 회사라는 악평이 있고, DC 등 인터넷사이트에서 에이프릴, 카드 멤버들에 대한 악플 및 악성루머 유포에 손 놓고 있는 모습을 보이다가 2018년 12월에서야 고소공지를 올려 이걸 이제서야 하냐고 팬들에게 욕을 얻어먹고 있다.[71] 이 이후 웹 자체 예능 온에어프릴, 브이앱에서 매니저의 비중이 줄어들었다. 그러나 2019년 다시 매니저가 영상에 나와서 부정적인 의견이 늘어나는 중.[72] DSP는 2018년 현재 주력 포트폴리오가 보이그룹이 주역인 타 기획사와는 다르게 걸그룹, 혼성그룹이다.[73] 실제로 DSP미디어를 거쳐간 여자 아이돌 멤버 중 김현정에 비빌 정도의 체격을 가진 사람은 옥주현소원, 단 둘 뿐이다.[74] 이진솔 혼자 168.5cm라서 그렇지 이진솔 하나만 제외해도 평균 신장이 1cm 이상 내려간다.[75] 김태형은 방탄소년단 와 본명이 같아서 예명을 쓰고 있다.[76] 다만 이진솔의 경우 다니던 실용음악학원에서 비공개 오디션으로 입사했는데, 심사위원이 DSP에 소속된 작곡가 지인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6개월만에 데뷔했는데, 본인이 V LIVE에서 오디션보다는 캐스팅에 더 가깝다고 밝히기도 했다.[77] 이 짓은 요미우리 자이언츠가 과거 모리 마사아키에게 했던 짓과 대단히 흡사하다.[78] 그러나 이현주의 이후 행보에 많은 문제가 드러나면서 이현주에 대한 옹호 분위기는 감소 중이다.[79] 이후 우주소녀에서도 '우쭈' 라는 캐릭터 계정을 따로 만들어 운영 중이다. 그러나 사월이가 2017년 이후로 무대에 오르는 일은 더 이상 없는데 2018년 12월 성덕라이브 녹화에서 깜짝 등장하기도 했다.[80] 대신에 2018년 HOT와 젝스키스의 콜라보 무대 이후로 오랜만에 SM-DSP 간 콜라보가 펼쳐졌는데, 전소민, 전지우가 슈퍼주니어의 Lo Siento 피쳐링 활동을 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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