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튜드베이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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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미국의 사라진 자동차 제조사로 미국 인디애나 주 사우스 벤드에서 창립된 회사이다.
2. 역사[편집]
독일계 미국인 이민자였던 스튜드베이커 형제가[1] 마차 제조업 등을 하다가 남북전쟁 당시 북군에 납품한 마차가 호평을 받았고, 이후 서부행 마차행렬의 절반 이상을 차지할 정도로 큰 성공을 거두었다.
1897년에 최초의 가솔린 프로토타입 차량을 개발했으나, 의외로 전기차 부문에도 많은 투자를 한 기업이었다. 제작이 쉬운 전기자동차를 우선 개발하려 했고, 1902년, 토머스 에디슨이 설계한 3단변속기에 최고시속 21km/h를 낼 수 있는 승용차 및 전기 트럭을 만들어 첫해에 20대를 판매하기도 했다. 하지만, 당시 비싼 배터리 가격으로 인해 한계를 느끼면서 철수하게 되었다. 1912년까지 약 1,814대를 팔았다고. 이외에도 외주생산, 판매대행 등을 하면서 성장하였다.
1911년에 자동차 부문이 설립되었다. E-M-F 자동차의 공장과 기술자를 인수한데 이어 웨인, 노슨, 폰티악의 공장을 합병하면서 몸집을 불렸다. 저가 및 실용적인 라인업을 생산하던 회사였으며 제1차 세계대전 당시에 군용 물자들을 공급했는데 내구성에서 상당한 호평을 받기도 했다. 이후 계속 성장하면서 1928년에 피어스 애로우를 인수하기도 했는데 대공황이 터지면서 1933년 회장의 자살 및 법정관리에 들어가게 되었다. 그럼에도 차량 라인업들을 통해 2년만에 간신히 회생하게 되었다.
창립 2년 만에 노조에 의한 강경한 6일간의 파업이 이루어지기도 했다.
유명 디자이너들인 버질 엑스너와 레이먼드 로위가 해당 기업에서 스타일링을 담당하기도 했으며, 유선형 디자인의 제품을 다수 제작한 바 있다.
1950년대 들면서 미국 빅 3과의 출혈경쟁 심화, 한국전쟁으로 인한 자원부족, 신규 8기통 엔진의 결함, 1953년식 신차 라인업의 실적부진[2] 을 비롯한 경영 위기 및 적자를 겪으면서 팩커드와 합병이 이루어졌으나 경영난을 타계하지 못했고, 프리미엄 브랜드였던 팩커드를 1953년식 스튜드베이커 차종에 기반한 배지 엔지니어링 모델로 1~2년 연명시키다가 1958년식을 끝으로 브랜드를 폐지해야 했을 정도였다. 그러다가 커티스-라이트와의 계약과 염가 라인업 스코츠맨(Scotsman)의 상업적인 실적을 계기로 기존 스튜드베이커 차종을 소형화한 라크(Lark)를 개발, 미국 불황기의 컴팩트카 시장에 안착하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1960년대에 컴팩트카 시장에서도 AMC와 미국 빅 3과의 출혈경쟁이 커지자 라크의 실적도 떨어졌고, 스튜드베이커에서는 자동차 애프터마켓 파츠와 항공사같은 외부 사업으로 포커스를 돌리기 시작했다. 스튜드베이커의 회장도 공구 및 자동차 슈퍼차저 사업을 하던 맥클러치(McCulloch Motors Corporation) 출신의 셔우드 에그버트(Sherwood Egbert)로 교체했을 정도로 외부사업에 집중하려고 했으나, 자동차 업계 경력이 없음에도 셔우드 에그버트가 신규 헤일로카 아반티의 개발, 라크의 페이스리프트 및 라인업 확장 등으로 자동차사업에 투자를 강화하는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신규 라크 시리즈의 실적부진과 아반티의 상업적 실패, 셔우드 에그버트의 암 투병으로 인해 1963년에 경영진 교체 후 1달만에 사우스 벤드 공장을 철수했고, 캐나다로 이적해 1965년 11월까지 라크 시리즈의 업데이트를 이어가며 버티다가 결국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되었다.
자세한 역사는 해당 페이지를 참고할 것 #
3. 생산차량[편집]
4. 여담[편집]
- 사우스 벤드 지역에 해당 브랜드의 박물관이 아직도 남아있다고 한다.
-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의 첫 차가 1951년식 스튜드베이커 커맨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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