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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호 (r20200302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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年號/元号
1. 개요
다른 말로는 원호(元號/元号)ㆍ 다년호(大年號)[2] 라고도 한다. 연호를 선포하는 행위를 '건원(建元)'이라고 한다. 독자적으로 연호를 제정하고 사용함은 문화권 전체의 맹주(황제나 제국 등)를 자처하는 행위였기 때문에, 황제를 자칭하는 '칭제(稱帝)'와 더불어 칭제건원 또는 건원칭제라 묶어서 불렀다. 또한 화이론을 따르는 유학자들은 중국 이외의 나라가 칭제건원하는 행위를 불경하게 여겼다.
현대에는 서양에서 들어온 서력기원을 도입하면서 한국, 중국, 베트남에서는 완전 폐지, 북한과 대만, 태국[3] 에서는 자체 기년법을 사용하고 있다. 지금도 옛 방식으로 연호를 사용하는 나라는 일본뿐이다.
연호는 황제의 권위가 물리적 공간과 백성들을 넘어 시간에까지 미침을 상징하는 것으로, 본래는 황제가 느끼기에 국정을 쇄신할 필요가 있을 때나, 심하면 기분 전환 삼아 바꾸었다. 따라서 황제가 변덕스러운 성향이거나 나라가 어지러울수록 자주 바뀌었으며, 대부분 두 요인이 일치하는 경우가 보통이었다. 혼란기에는 한 해도 사용하지 못하고 휙휙 바뀌거나, 심지어는 몇 시간 만에(...) 갈아치워버린 경우도 존재한다. 이외에도 나라에 재해나 이변이 발생했을 때, 또는 오행에 따른 60간지의 순환에 따라 연호를 바꿀 수 있었다. 대표적으로 메이지 유신 이전 일본에서는 갑자년(甲子年)과 신유년(辛酉年)에 개원하는 관례가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하면 당장 문서에 연월일을 기록할 때 심히 곤란하기 때문에 명나라 시대에 한 황제는 한 연호만 쓰는 일세일원제가 확립되었다. 그리고 곧 주변국도 이러한 관습을 따랐다. 일단 이 방식이 정착하자 시호나 묘호와는 달리 당대의 살아있는 황제 본인에게도 사용할 수 있고 독창적이라서 구분하기 쉽다는 장점이 있었으므로, 이후로 이전에 쓰이던 시호나 묘호 대신 (연호명)+제(帝)라는 식으로 황제를 칭하는 용법이 널리 퍼졌고, 청나라도 이를 그대로 따랐다.
연호로 과거의 시간을 표기하고자 한다면, 어떤 일이 어느 왕이 다스리던 몇 년째 해에 일어났는지 알면 연도를 쉽게 표기할 수 있다. 반대로 몇 년 뒤의 가까운 미래는 그렇다 치더라도 수십, 수백 년 후 먼 미래의 시간을 쓰고자 한다면 불편이 많다. 그 때까지 왕이 살아있을 리가 없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이렇게 연호를 쓰는 나라들도
제사 때 읽는 축문에서는 원래 연호로 연도를 적었다. 하지만 명나라가 멸망하고 소중화 사상이 대두되며 조선에서 청나라의 연호를 인정하지 않는 풍조가 정착하자 축문에서 아예 연호를 생략하기가 굳어버렸다. 일제강점기는 말할 것도 없고. 한문으로 쓰인 축문에서 '유세차'가 이것의 흔적으로, 원래는 '유 (연호 x년) 세차 ㅇㅇ' 라고 했다. 이 때문에 현대에는 고유의 연호인 단군기원이나 현재 대한민국의 공식 연호인 서력기원을 써야 바람직하다는 주장이 있다.
2. 방식
2.1. 일세일원제
이 문제는 14세기 들어 명나라 때 일세일원제(一世一元制), 즉 한 황제당 한 연호 제도를 정함으로써 겨우 해소되었고[4] 청나라도 이를 받아들였다.[5]
일세일원제가 확립된 뒤로는 군주를 해당 군주가 반포한 연호를 사용해서 부르기가 정착되었다.[6] 그래서 명대 이후부터는 묘호나 시호보다 '연호+황제'나 '연호+제(帝)'라고 하기가 일반화되었다. 예를 들어 주원장이 홍무(洪武) 연호를 사용했으므로 '홍무제(洪武帝)'라고 부르는 식이다.
한편 일본의 덴노들은 메이지 유신 이후에 일세일원제를 채택했지만, 연호를 사후에 그대로 중국의 시법과 무관하게[8] 시호로 올리기 때문에, 살아 있을 때는 연호+덴노 식으로 부르지 않고, 사후에 연호+덴노 식으로 부른다. 예를 들어 현재의 덴노인 나루히토의 연호는 레이와이고, 사후에 레이와 덴노라고 불릴 '예정'이지만 살아 있는 지금은 레이와 덴노라고 부르지 않는다. 그냥 덴노라고 하든지 긴조 덴노(今上天皇, 금상천황)이라고 부른다.
한편 연호를 써서 군주를 지칭하는 것을 영어로 번역 때는 '연호+칭호' 순으로 적음이 일반적이다. 예를 들면 홍무제는 Hongwu Emperor[9] 로 적는 식이다. 군주의 휘를 그대로 쓰거나, 묘호ㆍ시호 또는 존호(尊號)를 쓸 경우 '칭호+이름/묘호/시호/존호' 순으로 써서 칭호가 앞에 오지만(예를 들면 Emperor Gojong 식으로) 연호를 쓸 때는 칭호 앞에 쓴다는 것. 아마 '연호+칭호'의 경우 '그 연호가 사용되던 시기의 군주'라는 의미라서인 듯하다. 그리고 연호로 군주를 지칭할 경우, 문장에서 해당 군주의 칭호를 쓸 때 the도 앞에 붙여서 the Hongwu Emperor 식으로 써야 한다.[10] 그러나 연호를 그대로 시호로 올리는 관습이 있는 일본의 덴노들은 Emperor Shōwa 식으로 칭호를 앞세운다. 시호라는 의미가 더 강해서인 듯하다.
2.2. 즉위년칭원법과 유년칭원법
전통적인 유교예법에서는 유년칭원법이 정통인 바, 중국과 한국, 월남에서는 기본적으로 유년칭원법을 따랐다. 즉, 새 군주가 즉위하면 바로 개원을 하는 것이 아니라 다음 해 1월 1일을 기하여 예고한 연호로 개원한다. 이는 선대 군주의 통치 시대를 존중한다는 효 사상의 반영이기도 하고, 한 해에 연호가 둘 이상이 공존하면 생길 혼란을 피하는 효과도 있다. 이듬해에 바꿀 연호를 미리 공지할 수 있으므로 개원에 따른 충격도 적어 실용적이다. 반면, 정변이나 반정 등 정상적이지 않은 방법으로 군주가 폐위되었다면, 선대 임금의 통치를 부정해야 하므로 예외적으로 즉위년칭원법을 택하기도 한다.
중국은 춘추에서 처음으로 유년칭원법을 사용한 이래 계속 유년칭원법을 사용하여, 명대에 일세일원제(=한 황제 한 연호)를 채택한 이후부터는 새 황제가 즉위한 다음해 1월 1일에 연호가 바뀌었다. 하지만 한 해에 세 황제가 재위한 경우[11] 라든가, 직전 황제의 정통성을 부인할 경우에는 예외적으로 즉위년칭원법을 썼다.
한국에서는 고대에는 대체로 즉위년칭원법을 사용했지만, 일부 금석문을 보면 유년칭원법도 부분적으로 사용한 듯하다. 원 간섭기 이후부터 중국의 영향을 받아 유년칭원법이 원칙으로 바뀌었다. 그러나 유년칭원법을 사용할 때에도 선대 군주의 정통성을 부인할 필요가 있거나 비정상적 방법으로 군주가 바뀌었다면 중국에서처럼 즉위년칭원법을 사용했다. 다만 한국은 독자 연호를 쓰지 못한 기간이 길기 때문에 연호 대신 '세종 ○년' 하는 식으로 국왕이 즉위한 후 햇수를 세는 방식으로 연도를 적는 경우가 많은데, 이때도 같은 원칙을 적용하여 국왕이 즉위한 다음해를 원년(1년)으로 본다.[12] 다만, 순종이 즉위하면서 기존 연호인 광무를 융희로 개원할 때에는 즉위년칭원법을 써서 순종 즉위년(1907)을 융희 원년으로 삼았는데, 이는 고종이 비정상적으로 강제 퇴위를 당했기도 하고, 이미 대한제국이 일본의 반식민지로 전락한 상태였으므로 즉위년칭원법을 사용하는 일본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월남도 막 왕조 이후부터는 유년칭원법을 사용해 왔지만, 응우옌 왕조가 프랑스 식민지로 떨어지고 나서는 프랑스에 의해 황제가 여러 번 폐립되다보니 황제가 갈아치워진 날 바로 연호도 바뀐 경우가 많았다.
현재까지 군주 즉위에 따라 연호를 사용하는 전세계에서 유일한 국가인 일본은 특이하게도 연호를 처음 사용한 7세기부터 현재까지 즉위년칭원법을 계속 유지한다. 그 바람에 연호가 바뀌면 달력 제작업체가 난감해한다. 2019년에도 나루히토 황태자가 새 천황으로 등극하는 5월 1일에 맞추어 헤이세이(平成)라는 연호를 레이와(令和)로 개원하였다.
3. 국가별 연호
3.1. 한국
3.1.1. 고구려
광개토대왕릉비에 따르면 고구려 광개토대왕이 391년 즉위하면서 영락(永樂)'이라는 연호를 사용했는데, 이것이 신뢰할 수 있는 기록으로 남은 한반도의 최초의 연호이다. 이후 고고학적 연구로 고구려가 연가(延嘉)나 건흥(建興) 등 자체적인 연호를 사용했음이 밝혀졌다. 하지만 이외에는 신빙성 있는 기록이 남지 않아, 신라를 제외한 고구려나 백제에서 연호를 어떻게, 얼마나 사용했는지 전모를 밝히기는 무리이다.[13] 그런 탓에 역사 기록에서 연호 대신 군주가 즉위한 지 햇수로 몇 년째인지 따져서 연도를 표기하는 경우가 아직도 많다.[14]
3.1.2. 신라
3.1.3. 발해
3.1.4. 후삼국시대
3.1.5. 고려
3.1.6. 조선
3.1.7. 구한말
3.1.8. 일제강점기
3.1.9. 대한민국
이후 1961년(단기 4294년) 박정희가 5.16 군사정변을 일으킨 후 연호에 관한 법률을 개정, 1962년(단기 4295년)부터 단기를 폐지하고 서력기원으로 전환하여 여전히 일상적으로 사용한다.
서력기원이나 불멸기원 등에서 영향을 받아 우리나라의 소규모 종교단체에서도 내부적으로는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기도 한다. 교조나 창교주의 일생에서 중요한 시점을 원년으로 잡는다. 가령 천도교는 최제우가 종교적 체험을 하고 동학을 시작한 1860년을 원년으로 하는 포덕(布德) 연호를 사용하고, 증산도는 증산 강일순이 태어난 1871년을 원년으로 하는 도기(道紀) 연호를, 신천지는 창교주 이만희에게 재림 예수의 영이 내렸다는 1984년을 원년으로 하여 신천기(新天紀) 연호를 사용한다. 그래서 외부인들에게는 이런 종교들의 내부 문서에 쓰인 연도가 헷갈리기 십상이다.
환빠들은 위서 환단고기의 기록에 따라 환국기원(桓國紀元, 약칭 환기·桓紀)[21] , 신시개천(神市開天)[22] 같은
그 외에도 '민중진군(民衆進軍)'이라는 연호가 있는데 주로 노동계나 운동권 등에서 일부 사용된다.[23] 이 연호는 5.18 민주화운동이 일어난 1980년을 원년으로 삼는다.
민중진군이 노동운동계 등에서 쓰이는 표현이라면 '통일염원'이라는 연호도 있다. 풀 버전으로 쓸 때는 분단조국/통일염원 OO년으로 쓴다. 한반도가 해방을 맞은 1945년을 원년으로 삼는다. 문익환 목사가 방북 당시에 쓰기도 했고 학생운동 진영에서 쓰기도 했다. 기사 참조
3.1.10. 북한
북한에서는 1997년부터 김일성이 태어난 1912년을 원년으로 삼아 주체연호를 제정, 서기와 병용한다.[24] 위의 중화민국과 원년이 같으므로 햇수도 같다. 다만 여기는 서기 병기를 하지 않는 중화민국(대만)의 민국 연호와 달리 서기를 병기한다. 북한의 4차 핵실험 발표문에서처럼 주체 105(2016)로 병기한다. 주체연호 창시자는 최덕신이고 김정일이 본격적으로 시행했다.
3.2. 중국
3.2.1. 전근대
3.2.2. 중화민국(대만)
3.3. 일본
3.3.1. 개괄
일본은 바다 건너 먼 곳에 있어 중국의 영향이 크게 미치지 않아 연호를 꾸준히 써도 중국이 굳이 딴죽을 걸지는 않았다. 까탈스럽기로 유명한 수양제가 일본의 사신이 보낸 국서에서 천황을 해가 뜨는 나라의 임금이라고 명기하고 수양제를 해가 지는 나라의 임금이라고 표현한 것을 듣고도 그냥 넘어간 것이 이를 잘 보여준다.[25]
현대 일본의 덴노 연호 단축표기법으로 해당 연호의 로마자 첫머리를 이니셜로 한 알파벳과 연도 숫자만 쓰는 식이 있다. 보통 쇼와 이후의 연호에만 해당된다. 예를 들어 쇼와 39년(1964)을 S39, 헤이세이 10년(1998)을 H10이라고 쓰는 식.
현재는 공식적으로 사용되지 않지만 진무 덴노 즉위기원(황기)도 있다. 서기 + 660. 일본 제국 시대에는 군부를 중심으로 널리 사용되었고, 대부분의 무기 명칭이 제식 채용 연도를 황기로 환산한 연도로 붙였다.[26]
일본의 공문서에서는 연도 표기에 연호를 쓰는 경우가 많지만 민간에서는 서기 연도도 자주 쓰인다. 하지만 공공기관에서 서류를 작성하거나 서류를 발급받을 때는 대체로 서기가 아니라 연호에 따라 기재하도록 하거나, 또는 연호에 따른 연도만 표기하므로 실생활에서 연호에 따른 연도를 모르면 좀 난감할 수 있다.
1945년 패전 이후로 황실전범을 뜯어고치면서 연호 사용에 관한 법 조항이 사라졌지만 관용적으로 계속 쇼와(昭和) 연호를 사용하였다. 1950년 한국전쟁 개전 직전에 참의원에 연호를 아예 폐지하자는 안건이 올라왔었으나 한국전쟁의 여파로 흐지부지되었고 관습적으로 그냥 사용하는 상황이 지속되었다. 그러다 1960년대 후반부터 민간에서 연호를 법제화하자는 운동이 시작되었다. 1975년 히로히토 재위 50주년을 즈음해 차기 천황의 등장에 대비해 연호의 공백상태가 나와서는 안 된다는 운동이 활발해져 여러 지자체 의회에서 연호법제화 추진을 속속 결의하였다. 결국 1979년 일본 정부는 국회에 연호(원호元号)법안을 제출하고 중의원, 참의원을 통과하자, 같은 해 6월 11일 공포해 시행에 들어갔다. 이 법은 '쇼와'를 연호로 하고 일원일세를 규정했는데, 패전 전과 달리 연호의 제정자를 천황에서 내각으로 바꾸었다. 헤이세이 연호가 처음으로 이 법령에 의거하여 제정되었다. 1989년 1월 7일 히로히토가 사망하고 아키히토가 즉위하면서 내각이 헤이세이(平成)를 채택한 것. 헤이세이 연호를 공표한 사람이 나중에 수상이 된 오부치 게이조(당시 내각관방장관)이다. 1989년에 나온 일본 엔 동전은 쇼와 64년이라 찍힌 것과 헤이세이 원년이라 찍힌 것이 공존하는데, 전자가 수집가들 사이에서 액면보다 비싸게 거래된다.
그러나 이러한 연호는 천황의 재위기간으로 시간을 계산하는 방식이므로 국민 주권의 원칙에 위배되고, 일본 내에서만 통용되므로 일본인의 역사 인식과 국제감각을 약화시키며[27] , 연호 사용을 법률로 강제하는 것은 표현과 종교의 자유에 어긋난다는 등의 비판의 목소리도 있다. 이런 비판은 일본 공산당 등 좌파에서 주로 볼 수 있다. 아울러 군주가 죽으면 그 해가 지나기 전에 연호가 바뀌기 때문에 연도 표기를 갈아치워야 하는 불편함도 있다.[28]
2019년 4월 1일에 결정, 발표된 새 연호는 레이와(令和)이다. 출전은 일본 고전가요집 만요슈. 헤이세이 연호 결정 당시의 관례에 따라 스가 요시히데 내각관방장관이 발표하고 아베 신조 총리가 기자회견을 열어 연호의 취지를 설명했다. 레이와 연호는 동년 5월 1일에 황태자였던 나루히토가 천황으로 즉위하면서 적용되었다.
일본에서도 소규모 종교단체가 자체적인 연호를 사용하기도 한다. 천리교에서는 교조 나카야마 미키가 처음 신내림을 받았다는 1838년을 천리교가 시작한 해로 보고 입교(立敎 릿쿄)라는 연호를 사용한다.
3.3.2. 현대 일본의 연호 교체
연호법 제정으로 연호 제정의 권한이 내각으로 넘어갔지만 원칙적으로 연호는 덴노가 결정하는 것이므로 덴노가 죽기 전까지는 '공식적으론' 새 연호를 논의하지 않는다. 그러나 죽은 다음에 새 연호를 결정하겠다고 하면 혼란이 막심하므로 실제로는 비공식적으로 새 연호를 준비한다. 예를 들어 헤이세이 연호는 히로히토(쇼와 덴노)가 1989년 1월 7일 죽자 임시 각의를 열어 20분 만에 결정한 것이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명목상'일 뿐 실제로는 1988년 9월부터 새 연호를 정하고자 비공식적으로 준비작업에 들어갔다. 히로히토가 죽었을 즈음에는 이미 최종후보 3개 안만 남았다고 한다.
2019년에 아키히토 덴노가 퇴위하므로 연호가 바뀌는데, 2019년부터 행정 시스템상에서 연호제를 폐지하기로 결정했다.링크 그러나 여전히 종이 문서에는 서기와 일본 연호를 병용하기로 하였다. 한편 새 연호 발표가 늦어지자 연호 사용을 포기하고 서기를 사용하는 지자체나 기업도 늘어났다고 한다. 새 연호를 미리 발표해야 행정 시스템이나 서류 등을 미리 바꿔둘 수 있는데, 발표가 늦어지니까 차라리 서기로 바꾼다는 것이다. 한편 일부 보수적인 국회의원들은 연호를 새 덴노 즉위 당일에 공표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유인즉 헤이세이 시절에 미리 새 연호를 공표하면 두 덴노의 권위가 서로 충돌한다는 것이다. 일본인들 사이에서도 연호는 일본의 전통이니까 지키자는 파, 연호를 폐지하지는 않되 공문서 등에는 서기를 쓰자는 파, 연호제를 폐지하고 서기로 통일하자는 파로 서로 의견이 엇갈린다.
일단은 2019년 4월에 신 연호를 발표하여 신 덴노가 즉위하여 신 연호가 적용되는 5월 1일까지 연도 수정 작업을 최대한 서두르게 하되 연도 수정이 안 되면 수정이 끝날 때까지 헤이세이 31년(=2019년)으로 표기해도 무방하다는 원칙을 정하고 정부 차원에서 지자체 등을 대상으로 이러한 작업을 차질 없이 진행하기 위하여 간담회 등을 열고 있어서 공기관이나 지자체는 사실상 연호 유지로 하는 듯 보인다. 하지만 기업들 중에서는 연호/서기를 같이 표기하거나 아예 서기로만 표기하는 곳도 제법 나오고 있으나 아직까지는 기존처럼 연호를 사용하는 기업이 더 많을 것으로 보인다. 일본 내에 서력이나 연호를 자동 변경해주는 프로그램이 있는 이유가 기업인들 사이에서 해외 교역 등을 위해서는 서기는 써야 하지만 그렇다고 연호를 포기하기는 힘든 기업들이 많아서 나온 것이니...
2019년 3월 14일 서력을 연호로 바꾸는 등의 프로그램에 대한 갱신 작업 유무에 대해서 절반 가까이 기업들은 아직까지 계획이 없다는 조사결과가 나왔다. 이는 아직까지 신 연호가 발표되지도 않았는 데 굳이 새 연호를 대비한 프로그램 정비를 할 경우 오류 발생을 우려해서 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고 한다.
2019년 3월 기준으로 5월달에 신 덴노가 될 나루히토 황태자에게 대략적으로 추려진 신 연호 후보군들에 대해서 아베 총리가 통보하는 것을 검토하기로 했다. 일본 우익 세력들은 '연호 결정은 황실에 맡겨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현행 일본 법은 황실이 정치에 참여하지 못하도록 금지하므로, '연호 결정을 황실에 맡기자.'는 의견을 어느 정도 따르면서도 법 위반이 되지 않게 하려는 의도인 듯하다.
2019년 3월 14일 일본 정부측은 4월 발표 전에 신 연호를 결정할 조직 편성 및 그동안 연호 결정자 미공표 및 회의록 등이 없다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법제화를 서두를 예정[30] 이라고 한다.
3.4. 베트남
베트남의 경우 대외적으로는 중국에 사대하면서도 내부적으로는 황제국을 표방하였으므로 10세기에 연호를 도입한 후 1945년까지(프랑스 식민지가 된 뒤에도 권력만 잃고 황제 지위는 계속되었으므로 연호제는 유지) 연호를 사용하였다. 한마디로 외왕내제로 몰래 사용한 경우다.
1945년 베트남 민주 공화국에서는 당연히 서기를 채택하였지만, 민간에서는 얼마간 비공식적으로 '월남민주공화(Việt Nam Dân chủ Cộng hòa)' 연호가 사용되기도 했다.
3.5. 태국
태국에서는 부처님의 연호인 불멸기원을 사용하는데 불멸 연도를 기원전 543년으로 보아 이를 원년으로 한다.
3.6. 몽골
20세기초 몽골에서는 칭기즈 칸이 건국한 해인 1206년을 원년으로 하는 칭기즈 칸 기원이 비공식적으로 사용되기도 했으나, 이후 상황이 상황인지라 더 이상 사용되지 않았다.
4. 전근대 동아시아의 호칭 개념 목록
4.1. 개념
4.2. 호칭 종류
5. 같이보기
[1] 명대 이후에는 특별한 이유가 없는 한 임금이 즉위한 다음 해로 고착되었다. 유교적 예법에 따라 즉위한 해에는 선황의 연호를 바꾸지 않기 때문이다.유교적 예법에서는 새 군주가 즉위했다고 선군의 정책을 바로 바꾸는 것을 불효라고 보았다. 바로 바꾸는 경우가 있다면, 반정 등으로 즉위하여 선군의 정통성을 인정하지 않을 때 정도.[2] 원래 大의 음은 '대'지만 여기서는 '다'로 읽는다.[3] 태국은 불멸기원(불기)를 사용하는데 세계 불기와는 다른 독자적인 불기이다.[4] 명나라에서도 정통제가 토목의 변을 겪은 뒤 복위하면서 천순으로 연호를 변경한 예외가 있기는 했다. 정통 연호를 그대로 쓴다면 오히려 더 혼란스러웠을 것이다.[5] 예외적으로 사실상 재건국을 했다면 황제 생전에 연호를 바꾸기도 했다. 청태종이 후금 시절 쓰던 천총(天總) 연호를 청나라를 개국하면서 1636년 4월 11일부로 숭덕(崇德)으로 바꾸었고, 조선에서도 고종황제가 건양 연호를 대한제국 선포를 두 달 앞두고 1897년 8월 16일부로 광무로 바꾸었다.[6] 명나라 이전에도 사례가 있긴 하다. 경시제가 그 예이다. 다만 경시제의 경우 정통 황제로 인정 받지 못해 황제로서의 묘호, 시호, 능호를 받지 못한 탓에 후대에 뒤늦게 황제로 취급해 줘서 편법 비슷하게 연호+제(帝)라고 부르는 것이다. 마침 그의 치세가 워낙 짧아서 연호가 '경시(更始)' 하나밖에 없었기 때문에 자연스레 연호를 이용해 그를 지칭하게 되었다. 아니면 그냥 성명 '유현'을 그대로 쓰거나.[7] 정식 시호는 너무 길어서 제사 등 특별한 상황에서나 쓸 뿐이고, 약칭 시호는 너무 비슷해서 얼른 구분되지 않는다.[8] 일본 역대 덴노들의 시호는 중국의 시법에 맞는 경우도, 안 맞는 경우도 있었다. 이는 한국의 삼국(하대 신라는 제외)과도 비슷한 현상이다.[9] Hongmu가 맞지 않냐고 생각할 수 있는데, Hongwu는 중국어 발음대로 적은 것이다. 오자 아니니 수정하지 말 것.[10] 단순히 목록형으로 군주들을 나열할 때는 the를 생략하는 경우가 일반적이지만 "The Hongwu Emperor was the founder of the Ming dynasty."처럼 문장 안에서 사용할 때는 the가 붙어야 한다는 뜻. 반면 칭호를 앞세우는 이름/묘호/시호/존호 등은 the를 절대로 앞에 쓰지 않는다.[11] 가령 명나라는 1620년 만력제의 뒤를 이어 태창제가 즉위했으나 1개월 만에 붕어했는데, 원칙대로 하자면 태창 연호가 붕 떠버리기 때문에 그해 7월까지는 만력, 8월부터 12월까지는 태창 연호를 사용하는 것으로 타협했다.[12] 현대의 학자들은 즉위년 칭원법의 기록 때문에 원년(1년)과 즉위한 해가 혼동되지 않도록, 즉위한 바로 그 해는 '즉위년'이라고 칭한다. 예를 들어 조선 정조의 즉위년은 1776년이지만, 정조실록의 즉위 기사에는 '영종(영조)대왕 52년에 즉위하셨다.'고 기록했다. [13] 백제는 발견된 금석문들이 죄다 연도를 갑자로만 표기했기 때문에, 백제가 국내에서 연호를 사용 안 했다고 추측하는 이들도 있다.[14] 물론 요즘 나오는 역사책에서는 서기를 함께 병기한다.[15] 조선의 모든 선비들이 언제나 숭정 연호를 사용한 것은 아니다. 조선 후기의 문서나 금석문을 보면, 반청사상으로 숭정 연호를 쓴 것도 있지만 청나라 연호를 쓴 것도 많다.[16] 정확히는 청일전쟁으로 조선에 대한 중국의 영향력이 없어지면서.[17] 글자 그대로 양력을 세웠다는 의미.[18] 이봉창 의사와 윤봉길 의사가 결의문과 수류탄을 들고 찍은 사진들에서, 결의문의 내용을 자세히 보면 결의 날짜에 대한민국 연호를 사용했음을 알 수 있고, 임시정부 관련 문서나 기록은 전부 대한민국 연호를 사용하여 작성되었다.[19] 그래서 노인들조차도 (단기는 당연히 알아도) 대한민국 연호는 모르는 경우가 많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로 찾아가서 독립운동을 한 소수의 투사들 외에는, 일제 치하에서 일본의 연호를 쓰다가 광복 후 미군정 하에서 잠시 서기를 쓰고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단기를 사용하였기 때문. 따라서 민중 대부분은 대한민국 연호를 접할 기회가 거의 없었다. 그리고 젊은 세대는 한때 단기만 사용했다는 사실조차 모른다.[20] 구 연호에관한법률(법률 제4호. 1961. 12. 2. 법률 제775호로 폐지) : "대한민국의 공용연호는 단군기원으로 한다."[21] 환단고기에 기록된 환국(桓國)의 건국 시점을 기준으로 한다. 그런데 환국이 건국된 연도에 대해서 서기전 7197년에서 서기전 67,078년#까지 여러 가지 가설이 있다 보니 이론(?)상 환기가 여럿 있을 수 있다. 보통은 온건(?)하게 서기전 7197년을 원년으로 하는 경우가 많지만 일부 강경파(?)들은 서기전 67,078년을 원년으로 하는 크고 아름다운 환기를 쓰기도 한다. 하지만 이런 연호들을 사용하면 연도의 단위수가 너무 커지기 때문에 시간의 흐름이 제대로 느껴지지 않아 매우 불편하다. 환단고기가 아니라 한단고기가 맞다고 주장하는 이들은 이단의 이단 당연하게도 환국기원(환기)도 한국기원(한기)으로 부른다.[22] 환단고기에 기록된 신시 배달국(神市倍達國)의 건국년(서기전 3898년)을 원년으로 한다.[23] 풀 버전으로 쓸 때는 “'주에서 해방으로, 민중진군 ○○년'이라고 한다.[24] 북한 정부 공식 발표에서도 주체연호만 쓰는 일은 거의 없고 대부분 서기가 따라나오지만 일상적으론 주체력만 통용된다.[25] 일본에서도 아시카가 요시미츠 대의 무로마치 막부처럼 중국의 번속국임을 스스로 드러낸 경우가 좀 있었다.[26] 대표적인 예시가 0식 함상전투기. 황기 2600년(1940)에 채용되어 이와 같은 이름이 붙었다. 참고로 황기 2600년에 채용된 무기를 두고 육군은 100식 기관단총과 같이 '100식'이라, 해군은 상술한 0식 함상전투기와 같이 '0식'이라 명명했다. 이런 것까지 쓸데없이 대립했다[27] 현지 티켓, 마트 영수증 등에는 대부분 독자 연호만 쓰이고 서기는 병기된 경우가 드물다. 그 탓에 외국인들은 몇 년 지나면 연호만 보고 언제였는지 알기가 힘들다.[28] 사람이 죽고 사는 것은 예측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천황이 급작스럽게 사망하여 연호를 바꾼다면 일을 굉장히 서둘러서 진행해야 한다. 헤이세이 시대에서 레이와 시대로 넘어온 2019년은 천황이 죽어서가 아니라 생전에 양위하여 바뀌었기 때문에, 일치감치 언제 연호를 바꿀지 미리 공표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호가 바뀐 이후 한동안 시스템 상에서는 '레이와 원년(令和元年)'이 아니라 '헤이세이 31년(平成31年)'으로 표기되는 경우가 종종 일어났다.[29] 2019년 일본 언론 보도에 따르면 의사록은 별도로 존재하지 않는다. 의사록 등이 있으면 신연호 발표 전에 관저상주 언론인 등을 통해서 외부로 유출될 가능성이 있어서라고... 그 때문에 신연호 발표 이후 해당 연호가 어떻게 해서 나왔는지에 대해서 참여자들에게 물어봐야 한다.[30] 헤이세이로 결정될 때 회의록은 당시 공문서 관리법 등 관련 법률이 없어서 이를 작성하지 않은 탓에 당시 쇼와의 후계 신 연호를 헤이세이로 결정하던 당시 회의 참여자들을 하나하나 방문해서 인터뷰를 해야 알 수 있었다. 일본의 공문서 관리법 등은 2000년대에 들어와서 만들어졌다.[31] 조선이었다면 쓸어버릴 수 있겠지만 북경이 수도인 명-청 입장에서 남쪽 멀리 있는 베트남은 쓸어버리자면 비용이 너무 많이 들었다.[32] 동아시아의 호칭을 붙이는 유교적 예법이다.[33] 휘를 직접적으로 부르지 않는 관습[34] 황제의 호칭이다.[35] 왕의 호칭이다.[36] 죽은 후에 올리는 호칭으로 군주와 신하에게 올린다.[37] 제사시에 쓰는 호칭으로 황제에게만 붙인다.[38] 군주와 그 일가를 높혀 부르는 말이다. 시호로 굳어지기도 한다.[39] 군주의 왕릉에 붙이는 호칭이나 군주 그 자체를 뜻할때도 쓰인다.[40] 황실의 방계인 궁가를 부르는 호칭[41] 제후가 가신에게 내리는 칭호[42] 생전에 쓰는 이름[43] 피휘를 위해 성인에게 붙이는 호칭[44] 휘의 피휘를 위해 별명처럼 편하게 부를 수 있도록 지은 이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