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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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상세
3. 같이 보기



1. 개요[편집]


結集

기원전 544년에 석가모니 부처가 입멸한 뒤 그 제자들이 모여서 그의 가르침과 계율을 함께 외워서 기억하는 형식으로 정리하였는데, 이것을 ‘결집’이라고 한다.[1]


2. 상세[편집]


산스크리트어 ‘상기티(Samgiti)’를 번역한 말이며, 한역으로는 ‘합송’, ‘합주’, ‘집회’라고도 한다. 어원상으로는 제자들이 한데 모여서 각자 기억하고 있는 가르침을 일제히 입을 모아 읊어냄으로써 전혀 이의가 없다는 것을 표시하여 ‘불설’이라는 것을 확정하였던 데서 비롯된다. 이러한 뜻에서 ‘성전의 결집’을 의미하는 동시에 ‘경전의 편찬을 위한 집회’가 곧 결집을 뜻하기도 한다.

이러한 결집을 통해 편찬된 경전은 큰 바구니에 담아서 보관하던 관습에 따라 세 종류의 바구니(삼장, 트리-피타카)라 부른다. 즉 경장, 율장, 논장을 합해서 삼장이라 하는데, 이러한 형식으로 불교 경전이 완성되기까지는 기나긴 세월이 걸렸다.

석가모니 생전에 승단은 급속히 팽창해 갔지만 일원적 조직 체계를 갖추고 있다기 보다는 오히려 규모가 서로 다른 여러 세력으로 구성되어 있는 편이었다. 이들은 같은 믿음을 추구한다는 공통분모는 지니고 있었지만, 각 지역 문화의 개별적 영향 때문에 공통된 계획이나 공식적인 강령 같은 것은 갖고 있지 않았다. 더구나 석가모니 부처 자신이 "내 입멸 뒤에 교단의 지도자는 없을 것"이라고 천명했기에, 세존이 사망하자 각 세력은 더욱 중심을 잃고 뿔뿔이 흩어지는 것 같았는데, 세존의 말씀을 한데 모아 놓은 것이 없다는 사실이 이러한 현상을 한층 가속화했다. 게다가 어느 한 제자가 붓다의 모든 말씀을 듣고 기억하고 있을 것 같지도 않았다. 그래서 두 가지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 첫째. 세존의 교설을 한데 집결해야 하고,
  • 둘째, 승단 내부의 분열[2]과 논쟁을 끝내기 위해

승단의 계율을 집대성, 확정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즉 붓다의 가르침이 세월의 흐름에 따라 차츰 소멸되어 간다든지 잘못 전해진다든지, 혹은 해석상의 이론이 제기되는 경우가 발생하게 되는 등의 일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서 제자들이 한데 모여서 각기 기억하고 있던 교법을 함께 ‘합창’하여 서로. 확인을 거친 뒤 석가모니 부처의 가르침을 정리하는 모임, 즉 ‘결집’을 단행한 것이다.[3]

석가모니 부처는 생전에 모든 가르침을 구술로만 전달했기에 사후 그의 가르침도 그로부터 직접 설법을 들었던 제자들에 의해서 구두로 전해졌고, 대부분의 경전들이 당시 10대 제자의 한 명으로 '다문제일'이라 불릴 만큼 석가모니 부처의 가르침을 가장 많이 기억하고 있었던 아난이 “나는 이렇게 들었다(여시아문).”라는 서두로 자신이 기억하고 있던 석가모니 부처의 가르침을 암송하면, 다른 제자들이 이를 모아 정리하였는데, 이 과정에서 한 명이라도 "스승께서는 그렇게 말씀하지 않으셨다"고 하면 채택하지 않았다고 한다.

불경은 그리스도교성경이나 이슬람코란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그 양이 방대한 것으로도 유명하며, 기본적인 경전은 서력 250년경까지 그 대부분이 완성되었다. 이러한 '결집'을 통해서 석가모니 부처가 없는 채로 구심점을 잃어가던 불교 교단은 석가모니 부처가 남겼던 유훈[4] 같이 오로지 ‘진리’에만 의지하는 상가로 거듭나게 되었다.[5]

부처의 입멸 직후 치러진 제1차 결집을 포함해 총 6번의 결집이 있었다. 1~4차 결집은 기원전 인도에서, 5~6차 결집은 부처의 반열반 2400주년, 2500주년에 맞추어 미얀마에서 열렸다.


3. 같이 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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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곽철환, ‘초기불교와 그 자료’ 7쪽[2] 사실 이런 현상은 석가모니 생존시에도 이미 기미를 보였다. 데바닷타 항목 참조[3] 김미숙 <인도불교사-붓다에서 암베드카르까지> 40~41쪽[4] ‘스스로를 진리의 등불, 바다 위의 섬에 의지하고 그 등불에 의지해, 그 섬에 의지해 살아가라’던 열반경 말씀[5] 김미숙 <인도불교사-붓다에서 암베드카르까지> 39~41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