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간(당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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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생애
2.1. 돌궐 토벌
2.2. 고구려 진무
3. 대중매체


1. 개요[편집]


高侃
생몰연대 미상.
당나라의 무장으로, 돌궐고구려, 신라 전선에서 활약했다. 발해[1] 고씨 출신.

2. 생애[편집]



2.1. 돌궐 토벌[편집]


생년 미상으로, 정관 21년(647년) 11월 돌궐의 아사나곡발이 아들을 당에 보내어 방물을 바쳤고, 그 자신도 당나라에 대해 충성을 다하겠다고 하였다. 당태종은 그 소식을 듣고 기뻐하며 운휘장군 안조차, 장한화를 보내 마중 나갔지만 곡발은 입조할 뜻이 없었다. 사명을 다하기 위해 우둔위랑(右屯衛郞) 장한화와 카를룩 부족을 획책해 장안으로 향하려 했으나 곡발에게 발각되어 일행이 모두 살해당했다.

태종은 소식을 듣고 격노하여 북방의 돌궐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기 위해 군사를 보내 곡발을 정벌하기로 결심하였다. 정관 23년(649년) 정월 태종은 당시 우효위낭장 고간을 당군의 총관으로 임명해 회흘과 복골 부족을 거느리고 곡발을 토벌하라는 명을 내렸다. 고간이 대군을 거느리고 입성한 후, 가라록니숙궐사리발(歌邏祿泥孰闕俟利發)과 발새복처목곤막하돌사근(拔塞匐處木昆莫賀咄俟斤)이 당에 투항한다.

영휘 원년(650년) 6월 아식산(阿息山)에 군사를 거느리고 추격했다. 곡발은 각 부(部)를 불러들여 완강히 저항하려 했으나 소부(所部)가 모두 출전하지 않자 수백 기를 이끌고 달아났다. 고간이 이끄는 군대는 승승장구해 금산[2]에서 곡발을 생포했다. 9월 7일, 고간은 곡발을 압송하여 태묘에서 포로를 바쳤다. 이후 북정안무사로 부임했다.


2.2. 고구려 진무[편집]


건봉 원년(666년), 연개소문이 죽고, 장남 연남생이 뒤를 이었으나 동생 연남건, 연남산과 불화하자, 연남건이 막리지를 자칭하여 연남생을 몰아내고, 연남생은 아들 연헌성을 당나라에 보내 원조를 청했다. 6월 7일 당 고종은 우효위대장군 글필하력을 요동도안무대사로 임명하고 연남생을 구원했다. 이때 영주도독이었던 고간은 좌금오위장군(左金吾衛將軍) 방동선과 함께 행군총관을 맡아 고구려 토벌에 나섰다.

건봉 3년(668년) 2월 이세적설인귀 등을 이끌고 부여성을 공격하자 주변 30개 성이 모두 항복하고 고간과 방동선이 신성[3]을 진수하였다. 그러나 연남건이 군사를 보내 고간을 습격하고 방동선이 고구려군에게 대패하나 설인귀의 도움으로 겨우 살아난다.

총장 원년(668년) 9월 12일 고구려 멸망 이후 옛 고구려 영토에 안동도호부를 설치하고 그 땅을 통할하였다. 고간은 전후 안동도호부에 유임되었다. 그 해 공로로 좌감문위대장군에 올랐다.


2.3. 나당전쟁[편집]


함형 원년(670년) 4월 토번이 군사를 일으켜 당으로부터 서역을 빼앗는 등 서북 국경을 위협하자 당 고종은 설인귀를 토번 전선에 투입한다.[4] 검모잠이 이 틈을 타 군사를 일으켜 고장의 외손자 안승을 왕으로 옹립했다. 고종은 고간을 동주도행군 대총관으로 임명하고 토벌에 나섰다. 당의 대군이 쳐들어온 가운데 안승은 검모잠을 죽이고 신라로 귀순했다.[5] 고간과 사평태상백 양방은 안동도호부의 치소를 평양에서 요성주로 옮겼다.

함형 2년(671년) 7월 초하루, 군사를 이끌고 안시성을 함락했다. 함형 3년(672년) 8월에는 군사를 이끌고 평양으로 가 고구려 부흥군이 차지한 한시성과 마읍성을 공략했다. 12월에는 백빙산에서 고구려 부흥군과 이를 증원한 신라군을 격파해 2천명을 포로로 잡고 3천을 참수했다. 이 과정에서 한때 당군 수천 명이 죽어 석문(石門)까지 후퇴했으나 대아찬 효천(曉川), 사찬 의문(義文)·산세(山世), 아찬 능신(能申)·두선(豆善), 일길찬 안나함(安那含)·양신(良臣) 등을 죽이고 승리하였다. 이후 고간은 농우도지절대총관을 거쳐 평원군개국공(平原郡開國公)에 봉해졌다. 고간이 죽은 후 좌무위대장군(左武衛大將軍)으로 추증되고, 시호를 '위(威)'라 하였으며, 건릉(乾陵)에 부장되었다.


3. 대중매체[편집]


화랑전사 마루에서는 메인 악역으로 나오며 준정의 상관으로 나온다. 배우 이정용이 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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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한국사의 발해 왕조가 아니라 보하이 해 바다를 말한다.[2] 지금의 알타이 산맥 부근[3] 사부구가 신성 성주를 결박하고 항복하여 신성이 함락되었다.[4] 설인귀는 대비천에서 가르친링에게 대패하고, 포로로 잡혀 훈계를 받은 뒤 당으로 돌아와 삭탈관직당한다.[5] 의견 대립으로 인해 안승이 검모잠을 죽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