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조의 하북 평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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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배경
2.1. 원소의 사망과 계승 갈등
2.1.1. 기록
3. 전개
3.1. 북벌의 시작
3.1.1. 여양 전투
3.1.1.1. 기록
3.1.2. 평양 전투
3.1.2.1. 기록
3.2. 원담과 원상의 내전
3.2.1. 기록
3.3. 업 전투
3.3.1. 기록
3.4. 남피 전투
3.4.1. 기록
3.5. 유주 평정
3.5.1. 기록
3.6. 호관 전투
3.6.1. 기록
3.7. 해안 평정
3.7.1. 기록
3.8. 오환 정벌
3.8.1. 기록
4. 창작물에서


1. 개요[편집]


삼국지의 한 국면.

당시 하북 최대의 군웅이었던 원소가 사망하면서, 조조원담, 원희, 원상, 고간을 토벌하여 하북(기주, 병주, 유주)과 청주를 평정하는 경과를 다룬다.

이 일이 있었던 시기는 당시의 연호로는 건안 7 ~ 12년 사이이며, 서기로는 202 ~ 207년이다.


2. 배경[편집]



2.1. 원소의 사망과 계승 갈등[편집]


관도대전에서 패배한 원소는 관도대전 패전 2년 후인 202년 5월, 병사한다. 비록 원담을 형의 아들로 입적시키면서 폐출시켰지만 원소군 내부에는 원담을 지지하는 세력 또한 많았다. 원담은 심배, 봉기와 사이가 좋지 않았고 곽도, 신평은 원담을 지지하여 심배 등과 사이가 좋지 않았다.

원소가 죽고 많은 사람들이 나이가 많은 원담을 후계로 세우고자 했다. 하지만 심배는 원담이 뒤를 이으면 신평 등에게 해를 입을까 두려워 원소의 유명을 칭탁하여 원소의 삼남인 원상을 후계자로 세운다. 원담은 이에 반발하여 스스로 거기장군이라 칭하고 여양에 주둔한다.

거기장군은 원소가 처음 발해군에서 거병할 때 칭한 직위인데, 원담은 이를 통해 본인이 원소의 후계자라는 것을 암묵적으로 드러낸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남쪽의 조조가 움직이기 시작한다.


2.1.1. 기록[편집]


원소는 군이 격파된 이후로 병을 얻어 피를 토하다 여름 5월에 죽었다. 작은 아들 원상(袁尙)이 이를 대신했고, 원담(袁譚)은 거기장군을 자칭하며 여양(黎陽)에 주둔했다.

『삼국지』 「무제기」


심배(審配)와 봉기(逢紀)가 신평(辛評), 곽도(郭圖)와 권력을 다투었는데, 심배와 봉기는 원상을 좇았고 신평과 곽도는 원담을 따랐다. 많은 사람들이 원담이 장자라 하여, 그를 세우고자 하였다. 심배 등은 원담이 후사를 이으면 신평 등이 자기를 해할꺼라 여겨 원소의 본래 뜻을 따른다 하여, 이에 원상을 받들어 원소를 대신해 세웠다. 원담이 도착했으나, 위에 서지 못하자 스스로 거기장군(車騎將軍)이라 칭했다. 이 때문에 원담과 원상 사이에 틈이 벌어지게 되었다.

「원소전」


원소가 죽을 때 후계를 정함에 미치지 못하였는데, 심배와 봉기는 평소 교만, 사치하여 원담은 이를 병폐로 여겼고, 신평과 곽도는 모두 원담과 가까웠으므로 심배와 불화했다. 많은 무리들이 원담이 나이가 많았으므로(長), 그를 세우고자 하였다. 심배 등은 원담이 옹립되면 능히 신평 등에게 해를 입을 것을 두려워하였으므로, 원소의 유명을 칭탁하여 원상을 받들고 후계자로 세웠다.

원담은 스스로 거기장군이라 칭하고 나와서 여양에 주둔하였다.

『후한서』 「원소열전」



3. 전개[편집]



3.1. 북벌의 시작[편집]



3.1.1. 여양 전투[편집]


조조가 황하를 건너려 하자 원상은 봉기에게 적은 군사를 주고 원담을 따르게 한다. 원담은 원상한테 군사를 더 보내달라고 부탁하지만 심배 등의 반대로 원상은 군사를 더 보내지 않는다. 원담은 분노하여 봉기를 죽인다.

202년 9월, 조조가 황하를 건넌 후 원담을 공격한다. 원담이 원상한테 이 사실을 알리자 원상은 심배한테 업성을 지키게 한 후 원담과 함께 조조를 상대로 대치하며 치열한 접전을 펼친다.

비록 조조가 관도에서 대승을 거뒀으나, 황하를 건너 공격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관도 때와 마찬가지로 보급이 문제였다. 조조는 이전정욱한테 군량미 수송 업무를 맡기는데 원상은 위군태수(魏郡太守) 고번(高番)에게 명하여 황하 주변에 주둔하게 하고 물길을 끊게 한다.

그러자 조조가 이전과 정욱한테 명한다.

만일 배가 건널 수 없으면, 내려와 육로로 운송하도록 하시오.

조조의 명을 들은 이전은 장수들과 상의하며 말한다.

고번의 군대는 무장한 자가 적고 물에만 의지하고 있으며 게으른 마음이 있어, 그들을 공격하면 반드시 승리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들의 군대는 내부에서 통솔하지 못합니다. 만일 국가를 이롭게 한다면 독자적으로 결단하는 것도 가능한 것이니, 응당 빨리 적을 공격해야만 됩니다.

정욱 역시 그의 의견에 동의하였고 마침내 황하를 건너 고번을 격파한다. 이후 정욱은 정예병 수천을 모아 조조와 합류한다.

한편 조조는 원씨 형제를 밀어붙이고 203년 2월~3월 무렵, 두 형제는 여양성 안으로 퇴각한다. 조조가 성을 포위하자 원담 등이 상대하지만 대파당하고 원담과 원상은 밤 중에 업으로 도주한다.

4월, 조조는 업으로 진군하지만 원상이 역격하여 조조를 한 차례 격파한다.

5월, 조조는 허도로 돌아오며 장군 가신(賈信)을 남겨 여양에 주둔시키고 장료악진을 보내 음안(陰安)을 함락하고 백성을 황하 남쪽으로 이주시킨다.

시점은 불분명하지만 곽가는 이렇게 조언한다.

원소는 이 두 아들을 모두 사랑하여 적자(適子)를 세우지 않았습니다. 곽도(郭圖)와 봉기(逢紀)가 그들을 위하여 모신(謀臣) 노릇을 하여 그들 사이에서 필시 서로 번갈아 다툴 것이니 다시 서로 사이가 멀어질 것입니다. 우리가 급히 공격하면 원담과 원상은 서로 도울 것이고, 느슨하게 하면 뒷날의 다툼이 반드시 생겨날 것입니다. 남쪽으로 형주(荊州)를 향하여 마치 유표(劉表)를 칠 것처럼 하면서 그 변화를 기다리느니만 못합니다. 변화가 생긴 뒤에 그들을 공격한다면 일거에 평정할 수 있습니다.

이 조언이 원상에게 격파되기 이전이라면 승세를 타서 원상을 공격하지만 역격당한 뒤 곽가의 조언을 따른 것이 되고, 원상에게 격파된 이후라면 한번 패배했음에도 장수들이 승세를 타서 공격하자고 하나 곽가의 조언을 따라 물러난 것이 된다.


3.1.1.1. 기록[편집]

가을 9월, 공이 이를 정벌해 연달아 싸웠다. 원담, 원상이 여러 번 패하자 물러나 굳게 지켰다.

8년(203년) 봄 3월, 그 외성(郭)을 공격하자 (원담 등이) 출전했으나 이를 대파하니 원담, 원상은 밤중에 달아났다.

여름 4월, 업으로 진군했다.

5월, 허도로 돌아오며 가신(賈信)을 남겨 여양에 주둔하게 했다.

『삼국지』 「무제기」


태조가 북으로 원담과 원상을 정벌하였다. 원담은 여양(黎陽)에 진을 쳤는데, 원상은 원담에게 병력을 조금 보내고서는 이에 봉기를 시켜 원담을 따르게 하였다. 원담이 병력을 더 보태줄 것을 요구했지만, 심배 등이 의논하여 주지 않았다. 원담이 노하여 봉기를 죽였다.

태조가 하수(河水)를 건너 원담을 공격하니, 원담이 원삼에게 위급함을 알렸다. 원상은 병사를 나눠 원담에게 더해주고 싶었지만 원담이 그 병사를 끝내 빼앗아 버릴까 두려워 해, 이에 심배를 시켜 업(鄴)성을 지키게 하고, 원상 자신이 병사를 거느리고 원담을 도왔는데 태조와 여양에서 서로 대치하였다.

9월부터 2월까지 성 아래서 크게 싸웠는데 원담과 원상은 패배하여 퇴각해 성으로 들어가 수비했다. 태조가 그들을 포위하자, 이에 밤에 달아났다. (태조가) 추격해 업성에 이르러, 그 지역의 보리를 거둬들이고, 음안(陰安)을 함락시킨 후, 군대를 이끌고 허도로 돌아왔다.

「원소전」


원상은 봉기에게 적은 군사를 주며 원담을 따르게 하였다.

원담은 군사를 늘리는 것을 요구했지만 심배등이 거듭 논하여 원담에게 군사를 보내주지 못하게 했다, 이에 원담이 노해 봉기를 죽였다.

조조가 황하를 건너 원담을 공격하자, 원담은 이를 급히 원상에게 알렸다.

원상은 일단 머물면서 면밀히 정황을 조사하고는 심배에게 업을 지키게 하고 직접 출진해 원담을 도왔다.

그리하여 원담과 원상이 더불어 조조와 싸우게 되었다.

여양성 근교에서 조조와 원담,원상은 9월부터 그 다음해 2월에 이르기까지 치열하게 싸웠는데, 마침내 원담과 원상이 (여양성으로) 패퇴하였다. 조조는 여양성을 포위하려고 하자, 원담, 원상은 밤중에 도망쳐 업으로 귀환했다.

조조가 계속 공격해 오자 원상이 역격하여 조조를 격파했다. 이에 조조가 허도로 귀환했다.

『후한서』 「원소열전」


원소가 패한 후, 이전은 비장군으로 임명되어 안민현(安民縣)에 주둔했다. 조조가 여양에서 원담과 원상을 공격할 때, 이전과 정욱(程昱) 등을 보내 군량미를 수송하도록 했다. 마침 원상은 위군태수(魏郡太守) 고번(高番)에게 병사를 이끌고 황하 근처에 주둔하도록 명령하고, 물길을 끊도록 했다. 조조가 이전과 정욱에게 명했다.

"만일 배가 건널 수 없으면, 내려와 육로로 운송하도록 하시오."

이전은 장수들과 상의하여 말했다.

"고번의 군대는 무장한 자가 적고 물에만 의지하고 있으며 게으른 마음이 있어, 그들을 공격하면 반드시 승리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들의 군대는 내부에서 통솔하지 못합니다. 만일 국가를 이롭게 한다면 독자적으로 결단하는 것도 가능한 것이니, 응당 빨리 적을 공격해야만 됩니다."

정욱 역시 그의 의견에 동의했다. 그래서 북쪽으로 황하를 건너 고번을 공격하여 그를 무찔러 물길이 통하게 되었다.

「이전전」


정욱이 산택(山澤)에 망명해 있던 자들을 거둬들여 정병(精兵) 수천 명을 얻어, 이에 군사를 이끌고 태조와 여양에서 만나 원담(袁譚)과 원상(袁尙)을 토벌하자, 원상과 원담은 격파되어 패주하였다.

「정욱전」


태조를 수행해 여양(黎陽)에서 원담, 원상을 토벌했고 공을 세워 행(行) 중견장군(中堅將軍)에 임명되었다.

태조를 수행해 업(鄴)의 원상을 공격했는데 원상이 굳게 지키자 함락시킬 수 없었다. 태조는 허도로 돌아갔는데, 장료를 보내 악진과 함께 음안(陰安-기주 위군 음안현)을 함락케 하고 그 백성들을 하남(河南-황하 이남)으로 이주시켰다.

「장료전」


태조를 수행해 원담, 원상을 여양(黎陽-기주 위군 여양현)에서 공격해 그 대장인 엄경(嚴敬)을 참斬하고 행(行) 유격장군(遊擊將軍)에 임명되었다. 별도로 황건적을 쳐서 깨뜨리고 낙안군(樂安郡-청주 낙안군)을 평정했다.

「악진전」


태조를 뒤따라 원소(袁紹)를 격파하고, 원소가 죽자 또한 (태조를) 뒤따르며 여양(黎陽)(→기주 위군魏郡 여양현)에서 원담(袁譚), 원상(袁尙)을 쳤는데 연달아 싸워 여러 차례 이겼다. 제장(諸將)들이 승세를 타서 나아가 공격하자고 하니 곽가가 말했다,

“원소는 이 두 아들(→원담과 원상)을 모두 사랑하여 적자(適子)를 세우지 않았습니다. 곽도(郭圖)와 봉기(逢紀)가 그들을 위하여 모신(謀臣) 노릇을 하여 그들 사이에서 필시 서로 번갈아 다툴 것이니 다시 서로 사이가 멀어질 것입니다. 우리가 급히 공격하면 원담과 원상은 서로 도울 것이고, 느슨하게 하면 뒷날의 다툼이 반드시 생겨날 것입니다. 남쪽으로 형주(荊州)를 향하여 마치 유표(劉表)를 칠 것처럼 하면서 그 변화를 기다리느니만 못합니다. 변화가 생긴 뒤에 그들을 공격한다면 일거에 평정할 수 있습니다.”

태조가 말했다,

“좋소.”

그리고는 남정(南征)하여 군(軍)이 서평(西平)(→예주 여남군 서평현)에 당도했을 때 과연 내분이 일어나 원담과 원상이 기주(冀州)를 다투었다.

「곽가전」



3.1.2. 평양 전투[편집]


원상은 여양에서 조조와 대치하는 와중에 원소가 시도하지 않았던 전략을 사용하는데 바로 하동을 공략하는 것이었다. 원상은 그가 임명한 하동태수 곽원(郭援), 원소의 조카인 병주자사 고간, 그리고 흉노 선우를 파견하여 평양(平陽)을 점령하게 하면서 또 사자를 보내 마등 같은 관중의 군벌들과 손을 잡으려 한다.

흉노의 선우가 먼저 평양에 도착하여 소란을 일으키자 사례교위인 종요가 이를 포위한다. 하지만 격파하기 전에 곽원의 군대가 도착하고 만다.

여러 장수들이 하동에서 물러나야 한다고 주장하자 종요는 이렇게 말한다.

지금 원씨의 세력이 강하기 때문에 곽원이 오자 관중에서 몰래 그들과 내통을 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모든 사람들이 모반을 일으키지 않은 것은 우리의 위명을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이다. 만약 포기하고 물러나 약한 모습을 보이게 되면, 이곳의 백성들은 누구를 막론하고 적이 되지 않겠는가? 만약 우리가 다시 돌아온다면 그것을 얻을 수가 있겠는가? 이는 싸우기도 전에 미리 패전을 한 것이나 다름이 없다. 또 곽원은 성질이 급하고 괴팍하며 무조건 이기면 된다고 생각을 할 것이니, 반드시 우리를 쉽게 볼 것이다. 만약 우리가 물러나 분수(汾水)를 건너 진영을 구축하면 따라서 강을 건너려고 할 것이다. 그들이 미처 강을 건너기 전에 공격하며 크게 깨뜨릴 수가 있다.

그리고는 장기(張旣)를 마등에게 사신으로 보내 설득하게 한다.

한편 곽원이 하동에 도착하자 그가 지나간 성들은 모두 함락되었지만 오직 강읍(絳邑)만이 저항했다. 이에 곽원은 흉노의 선우까지 불러 성을 공격한다.

당시 강읍의 장을 대행하고 있던 사람은 가규였는데 곽원이 성을 포위하여 긴급해지자 가규는 자기가 이 어려움을 벗어나기는 어렵다는 것을 알고, 사람을 은밀히 성 밖으로 보내 인수를 하동으로 돌려보내며 말한다.

빨리 피씨현(皮氏縣)을 점령하십시오.

곽원의 공격에 성은 위태로웠고 결국 점령되지만 강읍의 부로(父老)와 곽원이 약속하여 가규를 살해하지 않았다.

곽원이 강읍을 점령하고 진군하려 하자 가규는 곽원이 먼저 피씨현을 점령할까 두려워 곽원의 모사 축오(祝奧)를 설득한다. 이 때문에 곽원은 7일 정도를 강읍에 머물러 있었다.

그 사이 장기가 관중의 군벌들에게 도착하여 그들을 설득하고 마등 등은 장기의 의견을 따른다. 마등은 아들 마초에게 1만여 명의 병사를 인솔하여 종요와 함께 고간과 곽원을 격파하도록 한다.

곽원은 적을 가볍게 여겨 여러 사람들이 말렸음에도 불구하고 분수(汾水)를 건너려 한다. 곽원의 군사들이 강으로 들어오자 종요, 마초 등이 이를 공격한다. 이 전투에서 마초는 화살에 맞자 자루로 다리를 감싸고 싸우는 분투를 선보였으며 방덕은 선봉에 서서 직접 곽원을 참수한다.

위략에 의하면 방덕은 곽원의 목을 베었지만 그가 곽원인 줄은 몰랐다고 한다. 전투가 끝난 후 사람들이 곽원이 죽었으나 목이 없다고 말하자, 방덕은 활통에서 머리 하나를 꺼낸다. 곽원의 머리였고 이를 본 종요는 큰 소리로 울고 만다. 곽원은 종요의 조카였던 것이다. 방덕이 사죄하자 종요는 이렇게 말한다.

곽원은 내 조카이기는 하나 국가의 적이다. 어찌 경이 사과할 필요가 있겠는가.

전투는 곽원군의 대패였다. 곽원은 전사했으며 흉노의 선우는 항복했다. 이로써 하동으로 우회하려는 원상의 시도는 실패하고 만다.


3.1.2.1. 기록[편집]

태조가 하수를 건너 원소의 아들 원담(袁譚)•원상(袁尙)을 공격하였으나, 고간(高幹)과 곽원(郭援)이 하동(河東)지역을 침략하자, 관우(關右=관서지역)가 진동했는데 종요(鐘繇)가 마등 등을 거느리고 이를 격파했다. 이 말이 『종요전』에 있다.

「순욱전」


그 후에 흉노의 선우가 평양(平陽)에서 소란을 일으키자 종요는 군대를 이끌고 가서 포위를 했지만 격파하지 못했다. 원상(袁尙)이 임명한 하동태수 곽원(郭援)이 많은 군사들을 이끌고 하동에 도착했다. 여러 장수들이 하동에서 물러나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종요는 이렇게 말했다.

“지금 원씨의 세력이 강하기 때문에 곽원이 오자 관중에서 몰래 그들과 내통을 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모든 사람들이 모반을 일으키지 않은 것은 우리의 위명을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이다. 만약 포기하고 물러나 약한 모습을 보이게 되면, 이곳의 백성들은 누구를 막론하고 적이 되지 않겠는가? 만약 우리가 다시 돌아온다면 그것을 얻을 수가 있겠는가? 이는 싸우기도 전에 미리 패전을 한 것이나 다름이 없다. 또 곽원은 성질이 급하고 괴팍하며 무조건 이기면 된다고 생각을 할 것이니, 반드시 우리를 쉽게 볼 것이다. 만약 우리가 물러나 분수(汾水)를 건너 진영을 구축하면 따라서 강을 건너려고 할 것이다. 그들이 미처 강을 건너기 전에 공격하며 크게 깨뜨릴 수가 있다.”

장기(張旣)가 마등에게 곽원을 치자고 하자, 마등은 아들 마초(馬超)에게 정병을 주어 맞아 싸우게 했다.

곽원이 적을 가볍게 여겨 분수를 건너려고 하자, 여러 사람들이 말렸지만 듣지 않았다. 곽원의 군사들이 강으로 들어왔을 때 그들을 공격하여 크게 깨뜨리고 곽원의 목을 베는 한 편 선우로부터 항복을 받았다. 이에 관한 일이 〈장기전(張旣傳)〉에 있다.

「종요전」


원상은 여양에서 조조에게 저항하며, 그가 임명한 하동태수 곽원(郭援)과 병주자사 고간 및 흉노 선우를 파견하여 평양(平陽)을 탈취하도록 하였으며, 또 사자를 서방으로 파견하여 관중의 장군들과 손을 잡았다.

사예교위 종요는 장기를 파견하여 장군 마등 등을 설득하도록 하였다. 장기는 그들에게 싸우는 것과 항복하는 것의 이해관계를 말하였으며, 마등 등은 그의 의견에 따랐다. 마등은 아들 마초에게 1만여 명의 병사를 인솔하여 종요와 함께 고간ㆍ곽원을 격파하도록 보냈는데, 그들을 크게 격파하고 곽원의 머리를 베었다. 고간과 선우는 모두 항복했다.

「장기전」


처음으로 군의 관리가 되어 강읍(絳邑)의 장(長)을 대행했다. 곽원이 하동을 공격할 때, 그가 지나친 성과 읍은 모두 함락되었지만, 가규가 성을 굳게 지켰으므로 곽원이 그를 공격하였지만 함락시키지는 못했다. 곧 선우를 불러 양군이 합쳐서 빠르게 공격하였으므로 성은 금방이라도 함락될 것 같았는데, 강읍의 부로(父老)는 곽원과 약속하여 가규를 살해하지 않았다. 강읍의 백성들이 붕괴된 이후에, 곽원은 가규의 이름을 듣고 그를 장군으로 삼으려고 무기로 협박하였지만 가규는 움직이지 않았다. 곽원은 부하들에게 가규를 납치하여 머리를 조아리도록 했는데, 가규가 질책하며 말했다.

“어떻게 국가의 현관이 적을 위해 머리를 조아리겠느냐!”

곽원은 화가 나서 그를 죽이려고 했다. 강읍의 관리와 백성들은 가규를 죽이려고 한다는 것을 듣고 모두 성벽에 올라가 외쳤다.

“약속을 어기고 우리의 현명한 군주를 죽인다면 차라리 함께 죽겠소!”

곽원의 부하들은 가규가 절개가 있다고 생각하였고, 많은 사람들이 그를 위해 사면을 요청하여, 마침내 가규는 죽음을 면하게 됐다.

(중략)

당초, 가규는 피씨현(皮氏縣)을 지나면서 말했다.

“영지를 다툴 경우 먼저 이곳을 점거하는 자가 승리할 것이다.”

곽원이 성을 포위하여 긴급해졌을 때, 가규는 자기가 이 어려움을 벗어나기는 어렵다는 것을 알고, 사람을 은밀히 성 밖으로 보내 인수(印綬)를 하동으로 돌려보냈다. 그리고 말했다.

“빨리 피씨현을 점령하십시오.”

곽원은 강읍의 백성들을 병합하고 병사를 앞으로 나아가게 하려고 했다. 가규는 그가 먼저 피씨현을 점령하게 되는 것이 두려웠으므로, 곧 다른 계책을 이용하여 곽원의 모사 축오(祝奧)를 미혹하게 하였다. 곽원은 이 때문에 이레 동안 머물러 있었다. 군 안에 있는 사람들은 가규의 말을 들었기 때문에 실패하지 않았다.

「가규전」


건안 연간, 태조가 여양에서 원담, 원상을 토벌하자, 원담은 곽원, 고간 등을 보내어 하동군을 공략케 하였다. 태조는 종요로 하여금 관중의 여러 장수들을 이끌고 이를 토벌케 하였다. 방덕은 마등의 아들 마초를 좇아 평양에서 곽원, 고간과 대치하였는데, 방덕은 군의 선봉이 되어, 나아가 이들을 크게 격파하고, 직접 곽원의 목을 베었다.

방덕은 스스로 수급 하나를 베었으나, 그것이 곽원인줄은 알지 못했다. 싸움이 끝난 후, 사람들이 곽원이 죽었으나, 그 목이 없다고 하였다. 곽원은 종요의 조카였다. 방덕이 뒤늦게 와서는 활통에서 수급 하나를 꺼내자, 이를 본 종요가 큰 소리로 울었다. 방덕이 종요에게 사죄하자, 종요가 말했다.

"곽원은 내 조카이기는 하나 국가의 적이다. 어찌 경이 사과할 필요가 있겠는가." – 「위략」

「방덕전」


사례교위(司隷校尉) 종요(鍾繇)가 관중(關中)을 진수하게 되자 한수, 마등에게 서신을 보내 화(禍)와 복(福)에 관해 진술했다. 마등이 마초를 보내 종요를 뒤따르게 하니 평양(平陽-하동군 평양현)에서 곽원(郭援), 고간(高幹)을 토벌하고 마초의 장수 방덕(龐德)이 직접 곽원을 참수했다.

마초는 그 뒤 사례교위(종요)의 독군종사(督軍從事)가 되어 곽원(郭援)을 토벌했는데 날아온 화살에 맞자 낭(囊-자루, 주머니)으로 자신의 다리를 감싼 채 싸워 곽원을 격파하고 참수했다. – 「전략(典略)」

「마초전」



3.2. 원담과 원상의 내전[편집]


조조가 허도로 돌아가자 원담은 원상에게 말했다.

사실 내가 조조한테 진 것은 내 군대의 갑옷이 낡아서 정교하지 않기 때문이었다.지금 조조는 패주하고 있고, 조조의 무리들은 고향에 가고 싶다는 마음에 전의를 상실했으니까, 그들이 도하하려고 할때 습격하면 궤멸시킬 수 있다. 이 기회를 놓치면 안된다.

하지만 원상은 들어주지 않았다. 군사를 보충해주지도, 갑옷을 바꿔주지도 않자 원담은 분노했다.

이때 곽도와 신평이 원담에게 말했다.

선공(원소)께서 장군으로 하여금 형의 후사를 잇게 한 것은 심배가 제안한 것입니다.

원담이 이를 그럴듯하다고 생각하고 마침내 군사를 끌어모아 원상을 공격하지만 패했다. 이후 원담은 군세를 수습해 남피로 도망갔다.

별가 왕수가 청주의 관원들을 인솔하여 원담을 구원하자 원담은 이렇게 말했다.

우리 군대를 보존할 사람은 왕별가(王別駕)뿐이구나.

한편 원담이 패한 후, 유순(劉詢)이 탑음(漯陰)에서 병사를 일으키자 여러 성이 모두 호응했다.

원담은 탄식하며 말했다.

지금 청주 전체가 모두 배반을 하는 것이 어찌 내가 덕망이 없는 것인가!

이에 왕수가 말했다.

동래태수(東萊太守) 관통(管統)은 비록 해안가 멀리 있지만, 이 사람은 배반하지 않고 반드시 올 것입니다.

10여 일 후, 관통은 처자식을 버리고 원담에게 투항한다. 그의 처자식은 적에게 살해되었고, 원담은 관통을 낙안태수(樂安太守)로 임명한다.

원담이 원상을 다시 공격하려고 하자 왕수가 그에게 말한다.

형제간에 서로 공격하는 것은 패방의 길입니다.

하지만 원담은 듣지 않았다.
원담은 나중에 또 왕수에게 물었다.

당신에게는 어떤 계책이 있소?

왕수가 대답했다.

형제란 좌우의 손과 같은 것으로, 비유해 말하자면 어떤 사람이 싸우려 하고 있는데 싸우기 전에 오른손을 자르고, "나는 반드시 이길 것이다" 라고 말하는 자가 있다면 그가 과연 성공하겠습니까? 형제조차 버리고 친하게 지내지 않는데 세상의 누구와 친하게 지낼 수 있겠습니까.

참언하는 소인배들은 단지 중간에서 일신의 사욕을 누리기 원하는 자들입니다. 그들의 말에 귀를 닫고, 그 간신들을 베어 버린다면 형제는 다시 친목할 것이고, 그렇게 사방을 방어한다면 결국 천하를 호령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원담은 이를 따르지 않았다.

이후 원상이 직접 군사를 거느리고 원담을 공격하여 대승을 거뒀다.

원담은 성을 점거하고 굳게 지켰으나 원상이 이를 포위하고 공격하자 다시 평원으로 도망갔다. 이후 원상은 관도(館陶)로 진군하지만 원담에게 패하여 물러나 요해지를 지켰다. 원담이 이를 추격하나 원상의 복병에 걸려 대패했다.

이때 곽도(郭圖)가 원담에게 말한다.

장군의 국토는 작고 병사들은 얼마 없습니다. 군량미도 부족하고 세력도 약합니다. 현보(顯甫)[1]

가 공격해 온다면 오래 버티지 못할 것입니다. 어리석은 생각인지는 모르지만 조공을 불러서 현보를 공격하게 하는 것은 어떻습니까? 조공이 온다면 필시 업(鄴)성을 공격할 텐데, 그렇다면 현보는 업성으로 되돌아갈 것입니다. 이때 장군이 서쪽으로 진격하여 업성으로부터 북쪽까지 모조리 차지할 수 있습니다. 만약에 현보군이 패해서 흩어진다면 이들을 불러 모아 조공에게 대항하면 됩니다. 조공은 먼 거리를 달려와서 양식도 부족할 테니 필시 스스로 물러날 것입니다. 만약 이렇게 된다면 조국(趙國) 이북은 모두 우리 땅이 됩니다. 이후에 조조와 맞서면 됩니다. 그리하지 않으면 이룰수 없습니다.

원담은 처음에는 반대했지만 결국 곽도의 말을 따랐다.

원담이 곽도에게 누구를 보낼지 묻자 곽도는 신비를 추천하고 이에 신비가 조조에게 사자로 가게 되었다.

유표가 원담과 원상에게 편지를 써서 둘의 싸움을 말렸으나 원담과 원상은 듣지 않았다.

203년 8월, 조조는 유표(劉表)를 정벌하려 서평(西平)에 주둔 중이었다. 원담이 신비를 보내 항복을 빌며 구원을 청하자 조조는 아랫사람들에게 물었다. 많은 사람들이 유표가 강하다고 생각해 먼저 그를 평정하는게 옳고 원담과 원상은 걱정거리가 못된다고 말했다.

이때 순유가 말했다.

천하에 막 일이 터지고 있는데 유표는 장강과 한수(漢水) 사이를 앉아서 보전하고 있으니, 사방을 경략할 뜻이 없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원씨는 4주의 땅에 웅거하며 갑주를 두른 병사가 10만이며, 원소가 관후(寬厚)함으로 병사를 얻어 그의 두 아들이 화목하면 이뤄놓은 대업을 지킬 수 있게 하였으니, 천하의 대란이 끝나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형제들이 나쁜 상태를 만났으니, 이런 형세라면 둘다 보전하지 못합니다. 만약 한쪽으로 병합되면 힘으로 전일(專一)하게 되고, 힘을 전일하게 되면 저들을 도모하기 어렵습니다. 저들의 혼란한 틈을 타 취하면, 천하가 평정될 것이니, 이때를 놓쳐서는 안됩니다.

그러자 조조는

내가 여포를 공격할 때 유표는 침범하지 않았고 관도전투 때에도 원소를 돕지 않았으니 유표는 스스로를 지키는 적에 불과하므로 의당 뒷날 도모해야한다. 원담, 원상은 교활하니 마땅히 그들이 어지러워진 것을 틈타야 한다. 설령 원담이 간사한 마음을 품고 있어 끝내 항복하지 않더라도 내가 원상을 격파하고 그 땅을 거두어들인다면 이로움이 절로 많을 것이다.

라 말하고는 원담의 화친 요청을 수락했다. 그리고는 군대를 이끌고 원상을 공격했다.

10월, 조조는 여양(黎陽)에 도착한다. 원상은 조조가 황하를 건넜다는 소식을 듣고 평원의 포위를 풀고 업으로 돌아간다. 또한 원상에 반기를 들고 양평(陽平)에 주둔 중이던 여광(呂曠), 여상(呂翔)[2]이 조조한테 투항한다.

원담은 포위가 풀리자 몰래 장군의 인수(印綬)를 여광, 고상에게 주지만 이들은 받은 인수를 조조에게 보냈다.

이를 보고 조조가 말한다.

나는 원담에게 작은 계책이 있을 줄 알았다. 나로 하여금 원상을 공격하게 하고는 그 틈에 백성들을 노략해 무리들을 모으고 원상이 격파되면 가히 스스로 강성해져 내가 피폐해진 것을 틈타려는 것이다. 그러나 원상이 격파되었는데도 나는 여전히 강성하니 무엇을 틈탈 수 있겠는가?

조조는 원담이 진심으로 항복한 것이 아님을 알았지만 아들 조정을 원담의 딸에게 장가보내 원담을 안심시킨다.


3.2.1. 기록[편집]


8월, 공이 유표(劉表)를 정벌하여 서평(西平-예주 여남군 서평현)에 주둔했다. 공이 업을 떠나 남쪽으로 가자 원담과 원상이 서로 기주(冀州)를 다투었는데, 원담은 원상에게 패해 달아나 평원(平原)을 보전했다. 원상의 공격이 급해지자 원담은 신비(辛毗)를 보내 항복하고 구원을 청했다. 제장들이 모두 이를 의심했으나 순유(荀攸)가 권하니 공이 이를 허락했다. 이에 공이 군을 이끌고 돌아왔다.

공이 말했다,

“내가 여포를 공격할 때 유표는 침범하지 않았고 관도전투 때에도 원소를 돕지 않았으니 유표는 스스로를 지키는 적(自守之賊)에 불과하므로 의당 뒷날 도모해야한다. 원담, 원상은 교활하니 마땅히 그들이 어지러워진 것을 틈타야 한다. 설령 원담이 간사한 마음을 품고 있어 끝내 항복하지 않더라도 내가 원상을 격파하고 그 땅을 거두어들인다면 이로움이 절로 많을 것이다.”

이에 (원담의 구원요청을) 허락했다. – 「위서(魏書)」

겨울 10월, 여양(黎陽)에 이르러 아들 조정(曹整)과 원담의 딸을 결혼시켰다.

원상은 공이 북쪽으로 왔다는 말을 듣고 평원의 포위를 풀고 업으로 돌아갔다. 동평(東平)의 여광(呂曠), 여상(呂翔)이 원상에 반기를 들어 양평(陽平-연주 동군 양평현)에 주둔했는데, 그 무리들을 이끌고 투항해오자 열후로 봉했다.

원담은 포위가 풀리자 은밀히 장군의 인수(印綬)를 여광에게 주었다. 여광이 받은 인수를 보내자 공이 말했다,

“나는 원담에게 작은 계책이 있을 줄 알았다. 나로 하여금 원상을 공격하게 하고는 그 틈에 백성들을 노략해 무리들을 모으고 원상이 격파되면 가히 스스로 강성해져 내가 피폐해진 것을 틈타려는 것이다. (그러나) 원상이 격파되었는데도 나는 여전히 강성하니 무엇을 틈탈 수 있겠는가?” – 「위서(魏書)」

「무제기」


태조가 남으로 형주(荊州)를 정벌하여 군대가 서평(西平)에 이르렀다. 원담과 원상이 군대를 일으켜 서로를 공격하였는데, 원담이 패배하여 평원(平原)으로 달아났다. 원상이 급하게 공격하자, 원담은 신비(辛毗)를 태조에게 보내 구원을 요청하였다. 태조가 이에 돌아와 원담을 구원하고, 10월에는 여양에 이르렀다.

원상은 태조가 북으로 향한다는 소식을 듣고, (원담이 있는) 평원의 포위를 풀고 업성으로 돌아갔다. 원상의 장수 여광(呂曠)과 여상(呂翔)이 원상을 배반하고 태조에게 귀부하였는데, 원담은 다시 몰래 장군의 인수를 새겨 여광과 여상에게 주었다. 태조는 원담이 속인 것을 알고, 그와 혼인관계을 맺어 그를 안심시키고 이내 군대를 이끌고 돌아갔다.

「원소전」


이에 조조가 허도로 귀환했는데, 이때 원담이 원상에게 말하길,

"사실 내가 조조한테 진 것은 내 군대의 갑옷이 낡아서 정교하지 않기 때문이었다.지금 조조는 패주하고 있고, 조조의 무리들은 고향에 가고 싶다는 마음에 전의를 상실했으니까, 그들이 도하하려고 할때 습격하면 궤멸시킬 수 있다. 이 기회를 놓치면 안된다." 라고 했다.

원상은 원담을 믿을 수 없었으므로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미(원담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아) 원담에게 군사를 더해 주지 않았지만, 또한 원담군의 갑주도 교체해 주지 않았다.

원담은 대노하였다. 곽도와 신평이 원담에게 말하길,

"선공(원소)께서 장군으로 하여금 형의(원소가 원상을 후계자로 삼기 위해 원담을 폐출시켜서 원담은 호적상으론 원소의 아들이 아님.) 후사를 잇게 한 것은 심배가 제안한 것입니다."

라고 하자 원담이 이를 그럴듯하다고 생각했다.

마침내 원담이 군사를 끌어모아 원상을 공격해 외문에서 싸웠는데, 원담이 패했다. 원담은 군세를 수습해 남피로 도망갔다.

별가 왕수는 청주의 관원들을 인솔하여 원담을 구원했다.

원담은 돌아가 다시 원상을 공격하고자 했으므로, 이에 대해 왕수에게 자문하길, "어떤 계책이 있는가."라고 했는데 이에 대해 왕수는

"형제란 좌우의 손과 같은 것으로, 비유해 말하자면 어떤 사람이 싸우려 하고 있는데 싸우기 전에 오른손을 자르고, "나는 반드시 이길 것이다" 라고 말하는 자가 있다면 그가 과연 성공하겠습니까? 형제조차 버리고 친하게 지내지 않는데 세상의 누구와 친하게 지낼 수 있겠습니까.

참언하는 소인배들은 단지 중간에서 일신의 사욕을 누리기 원하는 자들입니다. 그들의 말에 귀를 닫고, 그 간신들을 베어 버린다면 형제는 다시 친목할 것이고, 그렇게 사방을 방어한다면 결국 천하를 호령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라고 간언했으나 원담이 이를 따르지 않았다.

이에 원상이 직접 군사를 거느리고 원담을 공격하자 원담이 대패했다.

원담은 성을 점거하고 굳게 지켰으나 원상이 이를 포위하고 매우 급하게 공격하자 다시 평원으로 패주했다.

원담은 영천의 신평을 조조에게 보내 구원을 요청하였다.

(중략)

마침내 조조가 돌아와 원담을 구원했다. 10월에 여양에 이르렀는데 조조가 황하를 건넜다는 소식을 들은 원상은 이에 평원의 포위를 풀고 업으로 귀환했다.

원상의 장수 여광, 고상이 반기를 들어 조조에게 갔다. 원담이 거듭 장군인을 새겨 이를 여광,고상에게 주었다. 조조는 원담의 속임수를 알았으나 아들 조정을 원담의 딸에게 장가보내 원담을 안심시켰다.

『후한서』 「원소열전」


원담과 원상은 마침내 무기를 찾아 서로를 꾸짖으며 싸우는 지경에 이르렀다.싸움은 원담군이 불리했고, 원담은 패주해 평원을 보전했다. 이에 원상은 군을 관도(館陶)로 진군시켰다. 원담이 이를 공격해 격파했다. 원상은 물러나 요해지를 지켰고, 원담이 이를 추격했다. 원상은 여기에 복병을 숨겨두고 있었고 원담을 대파했다. 이때 원담군의 강시유혈[3]

을 헤아리기가 불가능할 정도로 많았다.

『후한서』 「원소열전」 주석에 인용된 「헌제춘추」


원소가 죽자, 원담과 원상은 사이가 벌어졌다. 원상이 원담을 공격하여 원담의 군대가 패했다. 왕수는 관리와 백성들을 인솔하여 원담을 구원하러 가니, 원담이 기뻐하며 말했다.

“우리 군대를 보존할 사람은 왕별가(王別駕)뿐이구나.”

원담이 패하자, 유순(劉詢)이 탑음(漯陰)에서 병사를 일으켰으며, 여러 성이 모두 호응하자, 원담은 탄식하며 말했다.

“지금 청주 전체가 모두 배반을 하는 것이 어찌 내가 덕망이 없는 것인가!”

왕수가 말했다.

“동래태수(東萊太守) 관통(管統)은 비록 해안가 멀리 있지만, 이 사람은 배반하지 않고 반드시 올 것입니다.”

10여 일 후, 관통은 과연 그의 처자식을 버리고 원담에게 투항하였다. 이 결과 그의 처자식은 적에게 살해되었고, 원담은 또다시 관통을 낙안태수(樂安太守)로 임명했다. 원담이 원상을 다시 공격하려고 하자, 왕수가 그에게 권고했다.

“형제간에 서로 공격하는 것은 패방의 길입니다.”

원담은 불쾌했지만, 이로써 왕수의 고상한 뜻과 절개를 알았다. 나중에 또 왕수에게 물었다.

“당신에게는 어떤 계책이 있소?”

왕수가 대답했다.

“이른바 형제란 왼팔, 오른팔과 같습니다. 비유를 들어 말하면,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과 결투를 하려고 하면서 자기 오른팔을 자르고, ‘나는 반드시 승리할 것이다’라고 말한다면, 이렇게 하는 자가 이길 수 있겠습니까? 형제를 버리고 가까이하지 않으면, 천하에서 누가 그와 친할 수 있겠습니까? 당신의 부하들 중에서 참언하는 소인이 있다면 진실로 중간에서 싸움을 하도록 하여 일시적으로 자신들의 사욕을 구하는 것입니다. 원컨대, 현명한 당신은 귀를 닫아 버리고 그들의 말을 듣지 마십시오. 만일 당신이 간사하고 아첨을 떠는 신하 몇 명을 죽일 수 있다면, 형제는 다시 친해져 화목해질 것이고, 그로써 사방을 방어한다면 천하를 마음대로 호령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원담은 왕수의 충고를 듣지 않았다. 그래서 원상과 서로 공격하고, 태조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왕수전」


다음해(203년), 태조가 막 유표를 정벌하려 하는데, 원담과 원소가 기주(冀州)를 두고 다투었다. 원담이 신비(辛毗)를 보내 항복을 빌며 구원을 청하니, 태조가 장차 이를 허락하려 하며, 여러 아랫사람들에게 물었다. 많은 여러 아랫사람들은 유표가 강하다고 생각해 먼저 그를 평정하는게 옳고 원담과 원상은 걱정거리가 못된다고 하였다.

순유가 말하길

"천하에 막 일이 터지고 있는데 유표는 장강과 한수(漢水) 사이를 앉아서 보전하고 있으니, 사방을 경략할 뜻이 없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원씨는 4주의 땅에 웅거하며 갑주를 두른 병사가 10만이며, 원소가 관후(寬厚)함으로 병사를 얻어 그의 두 아들이 화목하면 이뤄놓은 대업을 지킬 수 있게 하였으니, 천하의 대란이 끝나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형제들이 나쁜 상태를 만났으니, 이런 형세라면 둘다 보전하지 못합니다. 만약 (한쪽으로) 병합되면 힘으로 전일(專一)하게 되고, 힘을 전일하게 되면 저들을 도모하기 어렵습니다. 저들의 혼란한 틈을 타 취하면, 천하가 평정될 것이니, 이때를 놓쳐서는 안됩니다."

라 했다. 태조가 옳다라고 했다. 이에 원담과 화친을 허락하고, 마침내 돌아가 원상을 격파했다.

「순유전」


원상(袁尙)이 평원(平原)에서 그의 형 원담(袁譚)을 공격할 때, 원담은 신비를 사자로 삼아 조조에게 파견하여 화의를 구하였다.

영웅기(英雄記): 원담과 원상이 서로 성 밖에서 싸웠는데, 원담 군사들이 패해 북쪽으로 달아났다. 곽도(郭圖)가 원담에게 말했다.

"장군의 국토는 작고 병사들은 얼마 없습니다. 군량미도 부족하고 세력도 약합니다. 현보(顯甫 원상)가 공격해 온다면 오래 버티지 못할 것입니다. 어리석은 생각인지는 모르지만 조공을 불러서 현보를 공격하게 하는 것은 어떻습니까? 조공이 온다면 필시 업(鄴)성을 공격할 텐데, 그렇다면 현보는 업성으로 되돌아갈 것입니다. 이때 장군이 서쪽으로 진격하여 업성으로부터 북쪽까지 모조리 차지할 수 있습니다. 만약에 현보군이 패해서 흩어진다면 이들을 불러 모아 조공에게 대항하면 됩니다. 조공은 먼 거리를 달려와서 양식도 부족할 테니 필시 스스로 물러날 것입니다. 만약 이렇게 된다면 조나라(趙國) 이북은 모두 우리 땅이 됩니다. 이후에 조조와 맞서면 됩니다. 그리하지 않으면 이룰수 없습니다."

원담은 처음에는 반대했지만, 나중에 그 의견에 따랐다. 곽도에게 물었다.

"누굴 보내면 좋겠습니까?"

곽도가 대답했다.

"신좌치입니다".

원담은 신비를 조조에게 보냈다.

조조가 장차 형주(荊州)를 정벌하기 위해, 서평(西平)에 주둔하고 있었다. 신비가 조조를 만나 원담을 뜻을 전하자 조조는 매우 기뻐했다. 며칠이 지난 후, 조조는 또 먼저 형주를 평정하고 원담과 원상으로 하여금 스스로 서로를 피폐시키도록 하려고 했다. 어느 날, 연회석에서 신비는 조조의 안색을 살피고 변화가 있음을 알았으며, 이 일을 곽가에게 말했다. 곽가가 신비의 말을 조조에게 전하자, 조조는 신비에게 질문을 했다.

"원담을 신임할 수 있소? 원상이 반드시 승리할 수 있소, 없소?"

신비가 대답하여 말했다.

"명공께서는 그들의 신의와 위선에 대해서는 묻지 마시고 단지 그들이 처한 형세만을 논하셔야 합니다. 원씨는 본래 형제 지간 이면서 서로 정벌하는 것인데, 다른 사람이 그 틈을 탈 수 있다 고는 할 수 없지만, 천하는 자신에게서 평정 될 수 있다 고는 할 수 있습니다. 지금 명공께 급히 구원을 요청했으므로 이 일은 알 수 있습니다.

현보(원상)가 현사(顯思 원담)의 곤란한 상황을 보고도 취할 수 없는 것은 여기에서 힘이 다한 것입니다. 원씨의 군대는 나라 밖에서 패하고, 지혜로운 신하는 조정안에서 주살 당하며, 형제가 서로 헐뜯고, 나라는 분열되어 둘이 되었습니다. 해를 이어 전쟁과 정벌을 하고, 감옥 안에서는 이가 자랍니다. 게다가 가뭄과 병충의 피해가 더하고, 기근이 이어졌습니다. 나라에서는 비축한 식량이 없어, 행군하는 병사들도 식량을 지니지 못합니다. 위로는 천재가 내리고, 아래는 인간 세상의 어려움이 있습니다. 백성들은 어리석은 자와 현명한 자를 구분하지 않고, 모두 원씨의 세력이 붕괴되고 와해될 것임을 알고 있습니다.

이것은 하늘이 원상을 멸망시키려고 하는 때인 것입니다. 병법에서 말하길, `견고한 성과 끓는 연못이 있고, 병사 백만을 끼고 있을지라도 식량이 없다면 지킬 수 없다` 고 했습니다. 지금 명공이 업성을 공격하려고 하는데, 원상이 돌아와서 구하지 않는다면, 자신을 지킬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돌아와서 구원한다면, 원담이 뒤를 추격할 것입니다. 명공의 위엄으로써 곤궁한 적에 대응하고, 피폐한 적을 공격하는 것은 가을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과 다를 바 없습니다. 하늘이 원상을 명공께 주셨는데, 명공께서는 취하지 않고 형주를 정벌하려고 하십니다. 형주는 안락한 곳이 많고, 나라에는 동란이 없습니다. 중회(仲虺 은나라 탕왕의 신하)에게 `혼란스런 나라를 취하고, 망한 나라를 업신여기려 한다` 고 한 말이 있습니다.

현재 원담과 원상 두 사람은 장래 계획에 힘쓰지 않고, 내부에서 서로 공격하고 있으니, 혼란스럽다고 할 수 있습니다. 집에 있는 사람들은 먹을 것이 없고, 행군하는 병사들을 식량이 없으니, 망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새벽에 저녁 일을 꾀하지 못한다면, 백성들의 목숨은 유지해 나가기 어려운데, 이때 그들을 안정시키지 않는다면 다른 해를 기다려야만 할 것입니다. 다른 해에 혹시 풍년을 거두면, 또 원씨 형제는 스스로 망할 것을 알고 그들의 덕정을 새롭게 실행할 것이고, 당신은 병사를 사용할 중요한 시기를 잃게 될 것입니다. 지금 그들이 구원을 요청한 틈을 타서 그들을 진무시킨다면, 이익은 막대한 것입니다. 그리고 사방으로부터의 침략은 하북(河北)이 가장 큽니다. 하북이 평정되면, 육군(六軍 천자의 군대)은 강대해져 천하를 진동시킬 수 있습니다."

조조가 말했다.

"좋소."

그래서 원담을 도와 원상을 토벌하기로 응답하고는 군대를 여양(黎陽)에 주둔시켰다.

「신비전」



3.3. 업 전투[편집]


204년 1월, 조조는 황하를 건너고, 기수(淇水)를 막아 백구(白溝)로 들어가게 해 군량 수송로를 확보한다.

2월, 원상은 소유(蘇由)와 심배를 남겨 업(鄴)을 지키게 하고 다시 한번 원담을 공격한다. 조조는 이 틈을 타서 업을 공격한다. 조조군이 업과 거리가 50리 정도 되는 원수(洹水)에 도착하자 소유는 조조군에 호응하려 한다. 하지만 모의가 누설되어 심배와 성 안에서 싸우다가 패배하고 소유는 탈출해서 조조한테 항복한다.

업에 도착한 뒤 조조는 토성과 땅굴을 만들어 성을 공략한다. 이에 심배는 성 안에 참호를 파서 대항한다. 심배의 장수인 풍례가 조조군과 내응하여 성문을 열자 조조군 300명 정도가 성 안에 들어가는 데 성공한다. 심배가 이를 눈치채고 큰 돌을 떨어뜨려 책문(柵門)에 맞추니 책문이 닫혔고, 안에 들어간 병사들은 모두 사망한다.

한편 무안장(武安長)[4] 윤해(尹楷)는 모성(毛城)에 주둔하며 상당(上黨)[5]으로 군량 수송로를 통하게 했다.

4월, 조조는 조홍을 남겨 업을 포위하게 하고 직접 윤해를 공격하여 격파한다. 원상의 장수 저곡(沮鵠)[6]이 한단(邯鄲)[7]을 수비하니 한단 또한 공격해서 무너뜨린다.

조조가 한단을 격파하자 역양령(易陽令)[8] 한범(韓範)이 거짓으로 항복했다가 다시 배반한다. 조조는 서황을 보내서 역양을 공격하게 한다. 서황이 도착하여 화살을 성 안으로 날려 성패(成敗)에 관해 진술하자 한범은 후회하며 서황에게 곧바로 항복한다.

그 뒤 서황은 조조한테 말한다.

원씨 두 명이 아직 깨뜨려지지 않았고 아직 떨어뜨리지 못한 여러 성들은 귀를 기울이며 살피고 있습니다. 오늘 역양(易陽)을 멸한다면 내일이면 다른 성들은 모두 죽음을 각오하고 지킬 것이니 하북(河北)을 적시에 평정하지 못할까 두렵습니다. 원컨대 공께서 역양을 멸하지 않고 항복시켜 다른 여러 성들에 보이신다면 모두 공을 우러러 볼 것입니다.

조조는 서황의 의견을 받아들인다.

이 무렵 섭(涉)현의 현장인 양기(梁岐) 또한 조조한테 항복한다.

5월, 토산과 땅굴을 허물고 성을 둘러싸는 참호를 판다. 참호의 둘레가 40리에 이르렀는데, 처음에 보기엔 쉽게 넘어다닐 수 있을 정도로 얕았다.

심배는 이를 보고서 웃을 뿐 굳이 다투려 하지 않는다. 그런데 조조는 하룻밤만에 물길이 통할 정도로 참호를 깊게 파서 장수(漳水)의 물을 끌어들여 수공을 편친다.

7월, 원상은 업의 소식을 듣고 군사 1만여 명을 이끌고 돌아와 업을 구원하려 한다. 이에 장수들이 조조한테 말한다.

이들은 귀사(歸師-퇴각하는 군사)라서 군사들이 모두 스스로 싸우고자 하니 피하는 것이 낫습니다.

그러자 조조가 말한다.

원상이 큰 길을 따라 온다면 응당 피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만약 서쪽 산을 따라 온다면 사로잡을 수 있다.

원상은 과연 서쪽 산을 따라 와서 부수(滏水)에 임해 둔영을 세우고 심배가 이에 호응한다. 밤중에 심배가 성의 북쪽을 통해 나와 원상과 협공하지만 조조가 이를 역으로 깨트리자 원상은 달아나 곡장(曲漳)에 의지하여 영채를 세운다.

조조가 이를 추격하여 포위하는데 포위망이 완성되기 전에 원상은 음기(陰夔)와 진림(陳琳)을 보내 항복을 청한다. 하지만 조조는 이를 허락하지 않고 오히려 더 단단히 포위한다. 원상은 결국 밤중에 남구(濫口)로 달아나고 조조가 이를 추격하여 포위한다. 그러자 원상의 장수인 마연(馬延), 장의(張顗) 등이 조조한테 항복한다. 결국 원상군은 무너지고 원상은 중산[9]으로 도망간다.

당시 견초는 군량을 수송하기 위해 상당에 가 있었는데 원상의 패전 소식을 듣고 고간한테 말한다.

병주의 동쪽에는 항산(恆山), 서쪽에는 하수(河水,황하)의 험고함이 있으며 갑옷을 입은 장졸 5만에 북쪽으로는 강성한 호(胡)에 기대고 있으니 원상을 맞이해 서로 힘을 합쳐 변화를 살펴보시오.

하지만 고간은 이를 따르지 않고 오히려 견초를 죽이려 한다. 견초는 결국 샛길을 통해 달아나지만 원상에게 향하는 길은 이미 끊겼고 어쩔 수 없이 조조한테 항복한다.

원상이 달아나자 조조는 원상의 운송수레에서 인수와 절월을 얻어 성 안 사람들한테 보여준다. 이를 본 성 안 사람들의 사기는 바닥을 쳤다. 그러자 심배는 병사들을 격려하며 말한다.

우리가 지금까지 죽기를 각오하고 싸워왔으므로 조조도 지쳐 있다. 뿐만 아니라 곧 유주[10]

도 구원하러 올 것이다. 어찌하여 너희들은 주인이 없다고 두려워하느냐!

이후 조조가 포위망을 시찰하러 나오자 심배는 숨겨놓았던 쇠뇌를 꺼내 쏘았는데 몇 개는 거의 명중할 뻔 한다.

8월에도 여전히 포위는 계속되었고 5월에 성이 물에 잠긴 이후로 성 안에서 굶어 죽은 자가 반이 넘었다. 심배의 형의 아들인 심영(審榮)이 동문을 지키고 있었는데 밤중에 성문을 열어 조조군을 받아들이자 성은 함락되고 심배는 생포된다.

조조가 심배한테 물었다.

내가 포위망 가까이를 시찰할때 어찌 그리도 쇠뇌가 많았소?

그러자 심배가 대답한다.

오히려 너무 적었던 것이 원망스러울 뿐이오.

그러자 조조는

경은 원씨에 충성을 다했는데, 나한테도 그렇게 할 수는 없겠소?

라 물으며 심배를 등용하고자 한다.

하지만 심배는 끝까지 굽히지 않았고 이를 지켜보는 사람들은 모두 탄식을 금하지 못한다. 심배가 끝까지 항복하지 않자 조조는 심배의 목을 베게 한다.

조조는 업을 점령하고 원소의 묘에 제사를 지내는 한편 원소 가족들의 안전을 확보하고 재보와 함께 돌려 보낸다. 그리고 마침내 병주의 고간이 항복하자 조조는 고간을 그대로 병주자사로 임명한다.

이후 조조는 장료를 보내 조국(趙國)과 상산(常山)을 공략하게 하니 여러 산적들과 흑산적 손경(孫輕)이 투항한다.


3.3.1. 기록[편집]


9년(204년) 봄 정월, 황하를 건너고, 기수(淇水)를 막아 백구(白溝)로 들어가게 해 양도(糧道-군량수송로)를 통하게 했다.

2월, 원상이 다시 원담을 공격하며 소유(蘇由), 심배(審配)를 남겨 업(鄴)을 지키게 했다. 공이 진군해 원수(洹水-강이름)에 당도하자 소유는 항복했다. 도착한 후 업을 공격했는데 토산과 땅굴을 만들었다. 무안장(武安長-위군 무안현의 현장) 윤해(尹楷)가 모성(毛城)에 주둔하며 상당(上黨-병주 상당군)으로 양도(糧道)가 통하게 했다.

4월, 조홍(曹洪)을 남겨 업을 공격하게 하고, 공은 친히 군을 이끌고 윤해를 공격해 깨뜨린 후 돌아왔다. 원상의 장수 저곡(沮鵠)이 한단(邯鄲-기주 조국趙國 한단현)을 수비하니 또한 이를 공격해 무너뜨렸다.

역양령(易陽令-조국 역양현의 현령) 한범(韓範)과 섭장(涉長) 양기(梁岐)가 현을 들어 항복하니 이들에게 관내후의 작위를 내렸다.

5월, 토산과 땅굴을 허물어버리고, 성을 둘러싸는 참호를 파고 장수(漳水)를 터뜨려 성 내로 끌어들이니, 성 중에 굶은 죽는 자가 절반을 넘었다.

가을 7월, 원상이 돌아와 업을 구원하자 제장들이 모두 이르길,

“이들은 귀사(歸師-퇴각하는 군사)라서 군사들이 모두 스스로 싸우고자 하니 피하는 것이 낫습니다.”

고 했다. 공이 말했다,

“원상이 큰 길을 따라 온다면 응당 피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만약 서쪽 산을 따라 온다면 사로잡을 수 있다”

원상이 과연 서쪽 산을 따라 와서 부수(滏水) 에 임해 둔영을 세웠다.

밤중에 군사를 보내 포위망을 침범하자 공이 역격(逆擊)하여 패주시키고 마침내 그 둔영을 포위했다. 어울려 싸우기 전에 원상이 두려워하여 전 예주자사 음기(陰夔)와 진림(陳琳)을 보내 항복을 청했다. 공이 이를 허락치 않고 포위를 더욱 급하게 했다. 원상은 밤중에 달아나 기산(祁山)을 보전했고 공이 이를 추격했다. 원상의 장수 마연(馬延), 장의(張顗) 등이 (공의) 진(陳)으로 와서 항복하자 원상군이 크게 허물어졌고 원상은 중산(中山-기주 중산국)으로 달아났다. 원상의 치중을 모두 노획하고 원상의 인수(印綬), 절월(節鉞)을 얻어 원상으로부터 항복한 자들을 시켜 그의 집안사람들에게 보여주자 성안의 사람들이 무너지고 기가 꺾이었다.

8월, 심배의 형 심영(審榮)이 자신이 수비하던 성의 동문(東門)을 열어 군사들을 안으로 들였다. 심배가 맞서 싸웠으나 패했다. 심배를 사로잡아 참수하고 업을 평정했다. 공이 원소의 묘에 임해 제사를 지내고 곡을 하고 눈물을 흘렸다. 원소의 처를 위로하고 그 가인(家人)들과 보물을 되돌려 보내고, 잡다한 비단과 솜을 내리고 관에서 양식을 공급하도록 했다.

「무제기」


원상은 심배와 소유(蘇由)에게 업성을 지키게 하고, 다시 평원에서 원담을 공격했다.

태조가 진군하여 장차 업성을 공격하려 원수(洹水)에 도착하였는데, 업성과 거리가 50리였다. 소유가 (태조에게) 내부에서 호응하려고 했지만 모의가 누설되어, 심배와 성중에서 싸우다가 패배하고 탈출해 태조에게 달아났다. 태조가 마침내 진군해 공격하며 땅굴을 파자, 심배 또한 안에서 참호를 파서 대응하였다.

심배의 장수 풍례(馮禮)가 군문을 열고 돌격하니, 그 안쪽의 태조의 병력은 3백명이었는데, 심배가 이를 알아채고 성 위에서 큰 돌을 떨어뜨려 책문(柵門)을 명중하니, 책문은 닫히고, 들어갔던 자들은 모두 죽었다.

태조가 마침내 포위하여 참호를 파는데 둘레가 40리였고, 처음에는 얕게 파게 하여 넘을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심배가 이를 보고 웃으면서 싸우러 나가지 않고도 이로움을 챙기겠다고 생각하였다. 태조가 하룻밤에 이를 파게 하여 너비와 깊이가 2장이나 되게 하고 장수(漳水)의 물길을 터트려 물을 대니, 5월부터 8월까지 성중에 굶어 죽은 자가 반을 넘었다.

원상이 업성의 급보를 듣고, 병사 1만 여명을 거느리고 구원하러 돌아왔는데, 서산에 의지하여 오면서 동으로 앙평정(陽平亭)에 이르렀을 때 업성과 거리가 70리가 되자 부수(滏水)가 임하여서 횃불을 들어 성중에 보여주니, 성중에서도 횃불을 들어 서로 호응하였다. 심배가 성의 북쪽으로 출병시켜 원상과 함께 포위망에 대결하고자 하였다. 태조가 이를 도리어 공격하니, 패배하여 돌아왔고, 원상 또한 격파되어 패주하여 곡장(曲漳)에 의지하여 진영으로 삼으니, 태조가 마침내 이를 포위하였다.

합전(合戰)하기 전에 원상이 두려워서, 음기(陰夔)와 진림(陳琳)을 보내 항복을 빌었지만, 들어주지 않았다. 원상이 돌아와 남구(濫口)로 달아났지만, (태조가) 진격하여 다시 급히 포위하자, 그의 장수 마연(馬延) 등은 진영에 임하여 항복하니 군사가 크게 궤멸되고 원상은 중산(中山)으로 달아났다.

(태조군이) (원상의) 운송수레를 다 거두어 들이다가, 원상의 인수(印綬)와 절월(節鉞) 및 의물들을 얻게 되어 이를 그의 일가에게 보여주니, (업)성 중은 무너지고 말았다.

심배의 형의 아들인 심영(審榮)은 동쪽 문을 지키고 있었는데, 밤에 성문을 열어 내부에서 태조의 군대에 호응하였고, 성중에서 심배와 싸워서 심배를 사로 잡았다. 심배의 기세가 장렬(壯烈)하여 끝내 굽힌다는 말이 없으니, 보는 사람마다 탄식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마침내 그를 참수했다.

고간이 병주를 들어 항복하니, 다시 고간을 병주자사로 삼았다.

「원소전」


9년(204년) 3월. 원상은 심배를 남겨 업을 지키게 하고 다시 원담을 공격했다.

(중략)

조조는 (원상이 원담과 싸우러 출정하자) 이 틈을 타 업을 공격했다.

심배의 장수 풍례는 조조와 내응하여 돌문을 열고 조조의 병사 삼백여명을 출입시켰다. 심배는 이를 알아채고 여기에 커다란 바위를 떨어뜨렸다. 문이 닫혀있었으므로 (들어간 사람들은) 모두 죽었다. 조조는 이에 성을 에워싸는 구덩이를 팠다. 이 둘레가 사십리에 이르렀는데, 처음에 보기엔 쉽게 넘어다닐 수 있을 정도로 얕았다.

심배는 이를 바라보곤 웃을 뿐이었고 굳이 다투려 하지 않았다.

그런데 조조는 하룻밤만에 물길이 통할 정도로 참호를 깊게 팠고 이 넓이와 깊이가 2장에 이르렀다.장수(강이름)의 물을 끌어들이니 5월부터 8월에 이르기까지 성안의 아사자가 절반이 넘었다.

원상은 업의 위급함을 듣고 1만의 군을 이끌고 귀환하여 업을 구원하려 했지만 조조는 이를 격파했다.

원상은 달아나 곡장에 의지하여 영채를 세웠지만, 조조는 원상을 포위했다.

포위가 완성되기 전, 원상은 이를 두려워하여 음기,진림을 보내 항복을 청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결국 원상은 포위를 뚫고 다시 남구로 달아났는데, 조조는 또 다시 나아가 급히 원상을 포위했다.

원상의 부장 마연 등은 원상과 조조가 싸우기에 앞서 투항했고, 이로 인해 원상의 군대는 완전히 무너졌다.

원상은 다시 중산으로 달아났으며, 조조는 그의 치중을 모두 거두어들이고 원상의 인수, 절월 및 의복 등을 얻었다.

이를 업성에 보이자, 업성이 무너져 내렸다. 심배가 병사들에게 말하길,

"(우리가) 지금까지 죽기를 각오하고 싸워왔으므로 조조도 지쳐 있다. 뿐만 아니라 곧 유주(원희)도 구원하러 올 것이다. 어찌하여 너희들은 주인이 없다고 두려워하느냐!?"

라고 (병사들을 격려)했다.

조조가 나와서 포위망을 시찰했는데, 심배가 이를 보고 숨겨놓았던 쇠뇌를 쏘게 하였고 이 중 몇 개는 거의 명중할 뻔했다.

심배의 형의 아들인 심영은 동문교위였는데 밤중에 성문을 열어 조조군을 맞아들였고, 심배는 이를 맞아 싸웠지만 생포되었다.

조조는 심배를 위하여 말하길, "내가 포위망 가까이를 시찰할때 어찌 그리도 쇠뇌가 많았소?"라고 묻자 심배가 말하길," 오히려 너무 적었던 것이 원망스러울 뿐이오." 라고 말했다.

다시 조조가 말하길, "경은 원씨에 충성을 다했는데, 나한테도 그렇게 할 수는 없겠소?" 라고 말하며 심배를 살려주고 싶어했다.

하지만 심배의 의기는 장렬하고 끝까지 굽히는 말이 없었으니 이를 지켜보는 사람들은 모두 탄식을 금할 수 없었다.

결국 심배를 베었다.

원상의 어머니, 처자의 안전을 확인하고 재보와 함께 되돌려 보냈다.

고간은 병주를 들어 항복하였고 다시 병주자사가 되었다.

『후한서』 「원소열전」




태조가 업(鄴)을 포위한 뒤 한단(邯鄲-기주 조국趙國 한단현)을 격파하자 역양령(易陽令-기주 조국 역양현의 현령) 한범(韓範)이 거짓으로 성을 들어 항복했다가 다시 맞서서 지켰다. 태조가 서황을 보내 이를 공격케 했다. 서황이 도착하자 화살을 성 안으로 날려 성패(成敗-성공과 실패)에 관해 진술했다. 한범이 후회하며 서황에게 곧바로 항복했다.

그 뒤 태조에게 말했다,

“원씨 두 명(원담과 원상)이 아직 깨뜨려지지 않았고 아직 떨어뜨리지 못한 여러 성들은 귀를 기울이며 살피고 있습니다. 오늘 역양(易陽)을 멸한다면 내일이면 (다른 성들은) 모두 죽음을 각오하고 지킬 것이니 하북(河北)을 적시에 평정하지 못할까 두렵습니다. 원컨대 공께서 역양을 (멸하지 않고) 항복시켜 다른 여러 성들에 보이신다면 모두 공을 우러러 볼 것입니다.”

태조가 이를 옳다고 여겼다.

별도로 모성(毛城)을 쳤는데, 복병을 두고 엄격(掩擊-기습. 엄습)하여 3둔(屯)을 격파했다.

「서황전」


다시 업(鄴) 을 공격할 때 태조를 수행해 업을 깨뜨렸다. 장료는 별도로 조국(趙國-기주 조국), 상산(常山-기주 상산군)을 공략하고 여러 산적들과 흑산적 손경(孫輕)을 불러 투항케 했다.

「장료전」


건안 9년(204년), 태조(太祖)(조조)가 업(鄴)을 포위했을 때 원상은 견초를 상당(上黨,병주 상당군)으로 보내 군량을 감독하여 가져오게 했다. 견초가 미처 돌아오기 전에 원상은 격파되어 중산(中山)으로 달아났다. 당시 원상의 이종사촌형 고간이 병주자사였는데, 견초는

‘병주의 동쪽에는 항산(恆山), 서쪽에는 하수(河水,황하)의 험고함이 있으며 갑옷을 입은 장졸 5만에 북쪽으로는 강성한 호(胡)에 기대고 있으니 원상을 맞이해 서로 힘을 합쳐 변화를 살펴보라.’

고 고간에게 권했다. 고간이 이를 따르지 않은데다 또한 은밀히 견초를 해치려고 했다. 견초가 이를 듣고 샛길로 몰래 떠났으나 길이 막혀 원상을 따라잡지 못하니 마침내 동쪽으로 태조에게로 나아갔다. 태조가 기주(冀州)를 다스리게 되자 그를 벽소해 종사(從事)로 삼았다.

「견초전」



3.4. 남피 전투[편집]


9월, 천자가 조조에게 기주목을 겸하게 하자 조조는 연주목 자리를 반납한다.

조조가 업을 포위하고 있을 때, 원담은 감릉(甘陵)[11], 안평(安平)[12], 발해(勃海)[13], 하간(河間)[14]을 공략하여 차지했다. 이후 원상이 패하여 중산으로 도망가자 원상을 공격하여 그 무리를 거둬들인다. 원상은 패한 후 고안(故安)[15]으로 달아나 원희한테 간다.

조조는 원담에게 서신을 보내 약속을 어긴 것을 꾸짖고 혼인 관계를 끊는다. 이후 조조가 원담을 공격하니 원담은 평원을 점령하고 직접 용주(龍湊)에 주둔한다. 한편 요서의 오환이 원담을 도우려 하자 조조는 견초를 보내 설득하고 결국 오환은 원담을 돕지 않는다.

12월, 조조가 평원에 도착하여 진을 치자 원담은 남피로 도망가 달아났다가 청하에 주둔한다. 조조는 평원에 입성하고 주변 현들을 평정한다.

205년 1월, 조조는 원담을 급습한다. 아직 군대가 모이지 않았던 원담은 대패한다. 이후 조조는 남피를 포위한다.

조조가 포위를 느슨하게 하려 하자 조순이 말했다.

지금 천리 길을 도적(蹈敵)[16]

하여 와서 전진하여 이기지 못하고 퇴각한다면 필시 위엄을 잃을 것입니다. 게다가 외떨어진 군사로 깊이 들어와 있으니 오래 지탱하기 힘듭니다. 저들은 이겨서 교만해지고 우리는 패해서 두려워하니 두려움으로 교만함을 대적하면(以懼敵驕) 반드시 이길 수 있습니다.

조조는 그 의견을 옳다고 생각하여 급하게 공격하니 원담은 대패한다. 이때 악진이 선두에 서서 동문을 돌파했다. 원담은 말을 타고 달아났지만 조순 휘하의 기병한테 참수당한다. 조조는 남피를 점령하고 곽도를 죽인다.

왕수는 당시 낙안에서 식량을 운반하고 있었는데, 원담의 위급함을 듣고 자신이 데리고 다니던 병사 및 여러 종사 등 수십 명을 인솔하여 원담에게 달려갔지만 도착하기 전에 원담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는다.

왕수는 말에서 내려 곡을 하며 말했다.

군주가 없으니 어디로 돌아가야 하는가?

이후 조조를 만나 원담의 시신을 거두어 안장할 수 있게 해줄 것을 부탁한다. 조조가 대답하지 않자 왕수가 다시 말했다.

저는 원씨의 두터운 은혜를 입었는데, 만일 원담의 시신을 거두어서 염한 연후에 찢겨 죽는다 해도 원한이 없을 것입니다.

이 말을 들은 조조는 왕수의 충의를 아름답게 여겨 그의 요구를 들어준다.

그 뒤 조조는 왕수를 독군량관(督軍粮官)으로 임명하고 낙안(樂安)으로 돌아가게 한다. 원담이 격파되자 여러 성이 모두 항복했는데, 오직 관통만이 낙안을 지키면서 명령에 따르지 않았다. 조조는 왕수에게 명령하여 관통의 머리를 베게 한다. 왕수는 관통이 망국의 충신이었으므로, 그의 결박을 풀게 하고 그로 하여금 조조를 만나도록 한다. 조조는 기뻐하며 관통을 사면한다.

남피를 점령한 후 조조는 서황을 보내 평원을 평정하게 하고 장료를 보내 해안을 평정하게 하고 악진과 장합을 보내 옹노[17]를 공격하여 대파한다.


3.4.1. 기록[편집]


9월, 영을 내렸다,

“하북은 원씨의 난으로 어려움을 겪었으니 올해 조부(租賦)를 내지 말도록 하라.”

호강(豪强-권세가)들이 겸병(兼幷)하는 것에 관한 법을 엄중히 하자 백성들이 기뻐했다.

천자가 공을 영(領-겸직의 의미) 기주목(冀州牧)으로 임명하자 공이 연주목은 반납했다.

공이 업을 포위했을 때 원담이 감릉(甘陵), 안평(安平), 발해(勃海), 하간(河間)을 공략하여 차지했다. 원상이 패하여 중산(中山)으로 물러나자 원담이 이를 공격했고, 원상이 고안(故安-유주 탁군 고안현)으로 달아나자 (원담이) 그 무리를 아울렀다. 공이 원담에게 서신을 보내, 약속을 어긴 것을 꾸짖으며 혼인관계를 끊었고, 딸을 (원담에게로) 돌려보낸 뒤 진군했다. 원담이 이를 두려워하여 평원을 함락했다가 물러나 남피(南皮)를 지켰다.

12월, 공이 평원으로 입성하고 여러 현들을 공략해 평정했다.

10년(205년) 봄 정월, 원담을 공격해 격파하고 원담을 참수하고 그 처자를 죽이니 기주가 평정되었다.

공이 원담을 공격할 때 아침부터 시작해 한낮에 이르기까지 판가름 나지 않았다. 이에 공이 친히 북채와 북을 잡자 사졸들이 모두 분발했고 이때에 응하여 적을 격파했다. – 「위서(魏書)」

「무제기」


태조가 업성을 포위하자, 원담은 감릉(甘陵), 안평(安平), 발해(渤海), 하간(河間)을 공략해 취하고, 중산(中山)에서 원상을 공격하였다. 원상은 고안(故安)으로 달아나 원희(袁熙)를 따라가고, 원담은 원상의 무리들을 다 거두어 들였다. 태조가 장차 그를 토벌하려 하자, 원담은 이에 평원(平原)을 함락하고 남피(南皮)을 병합하여, 직접 용주(龍湊)에 주둔하였다.

12월, 태조가 그 군문에 진을 치자, 원담은 나오지 않고 밤에 남피로 도망가 달아났다가, 청하(淸河)에 임하여 주둔하였다.

10년(205년) 정월, 이를 공격해 함락시키고, 원담 및 곽도 등을 참수했다.

「원소전」


조조가 업을 포위한 사이 원담은 거듭 배반하여 감릉, 안평, 발해, 하간군을 점령,약탈하고 원상이 있는 중산까지 공격했다.

패배한 원상은 고안으로 달아나 원희에게 의탁했다.

원담은 원상의 남은 무리를 남김없이 거두어들였으며 돌아와 용주에 주둔했다.

12월. 조조가 원담을 공격하자 원담은 야음을 틈타 남피로 달아나 청하에 주둔했다.

다음해 정월,(조조가) 원담을 급습했다. 원담은 출진하여 조조를 막고자 했지만, 군대가 모두 집결하기 전에 조조에게 격파당했다.

원담은 휘날리듯이 재빠르게 말을 몰며 달아났으나, 추격하는 자의 의지는 인간의 수준을 뛰어넘는 것이었다. 그가 말을 재촉하며 끈질기게 원담을 추격하는 도중 마침내 원담이 낙마하고 말았다.

원담이 뒤돌아보며 그에게 말하길, "어이! 애송아 나를 그냥 지나쳐준다면 내가 능히 너를 부귀하게 만들어주마." 하지만 원담의 말이 입에서 모두 떨어지기도 전에 이미 그의 머리는 베어져 땅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또한 이때 곽도등의 무리를 베고 그들의 처자를 주륙했다.

『후한서』 「원소열전」


태조를 수행해 원담을 공파했다. 별도로 해안지대를 공략하고 요동적(遼東賊) 유의(柳毅) 등을 격파했다. 업으로 돌아올 때 태조가 친히 나가 장료를 맞이하며 함께 수레를 탔다. 장료를 탕구장군(盪寇將軍)으로 임명했다.

「장료전」


태조를 수행해 남피(南皮-기주 발해군 남피현)의 원담을 쳤는데, 선두에 서서 원담의 동문(東門)에 진입했다. 원담이 패한 후 별도로 옹노(雍奴-유주 어양군 옹노현)를 공파(攻破)했다.

「악진전」


또한 태조를 수행해 발해(渤海-기주 발해군)에서 원담을 공격하고, 별도로 군을 이끌고 옹노(雍奴-유주 어양군 옹노현)를 포위해 대파했다.

「장합전」


태조를 수행해 남피(南皮)의 원담을 격파하고 평원(平原)의 반적(叛賊)들을 쳐서 무찔렀다.

「서황전」


조인의 동생 조순(曹純)은 처음 의랑, 참사공군사(參司空軍事)로 임명되었고 호표기(虎豹騎)를 지휘해 남피(南皮) 포위에 종군했다. 원담(袁譚)이 나와 싸워 사졸들이 많이 죽었다.

태조가 (포위를) 느슨하게 하려 하자 조순이 말했다, “지금 천리 길을 도적(蹈敵-전장으로 와서 적과 싸움)하여 와서 전진하여 이기지 못하고 퇴각한다면 필시 위엄을 잃을 것입니다. 게다가 외떨어진 군사로 깊이 들어와 있으니 오래 지탱하기 힘듭니다. 저들은 이겨서 교만해지고 우리는 패해서 두려워하니 두려움으로 교만함을 대적하면(以懼敵驕) 반드시 이길 수 있습니다.”

태조가 그 말을 옳게 여겨 급히 공격하고 원담이 패했다. 조순 휘하 기병이 원담을 참수했다.

「조인전」


태조가 장차 원담을 치려할 때 유성(柳城)의 오환(烏丸)이 기병을 내어 원담을 도우려 했다. 태조는 견초가 일찍이 오환을 다스린 적이 있으므로 그를 유성으로 보냈다.

견초가 도착하니 초왕(峭王)이 군장을 엄비해 5천 기(騎)를 원담에게 보내려 하고 있었다.

또한 요동태수 공손강이 평주목(平州牧)을 자칭하며 사자 한충(韓忠)을 보내 선우(單于)의 인수(印綬)를 지니고 와서 초왕에게 주었다. 초왕이 뭇 장(長)들을 대거 모았고 한충 또한 그곳에 좌정하였다. 초왕이 견초에게 물었다,

“예전에 원공(袁公)(→원소)이 천자의 명을 받았다고 말하며 나를 선우로 임명했소. 그런데 이제 조공(曹公)(→조조)이 다시 천자에게 아뢰어 나를 진짜 선우로 삼는다고 말하고 요동에서 또한 선우의 인수(印綬)를 가지고 왔소. 사정이 이와 같으니 셋 중에서 어떤 것이 진짜요?”

견초가 대답했다,

“예전에는 원공이 승제(承制, 황제의 명령인 제制를 받들어 행한다는 뜻으로 황제의 권한인 관작봉배 따위를 임의로 행사함을 가리킴)하여 임명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원공이 중간에 잘못을 범하여 천자께서 조공에 명해 이를 대신하게 하였고, 조공이 말하길 응당 천자에게 아뢰어 다시 진짜 선우로 삼아야 된다 하셨으니 이것이 옳습니다. 요동은 황제에게 속한 아래의 군(郡)이니 어찌 함부로 참칭하며 배가(拜假)할 수 있겠습니까?”

한충이 말했다,

“우리 요동은 창해(滄海)의 동쪽에 있으며 백만 군사를 끼고 또한 부여(扶餘), 예맥(濊貊)을 부리고 있소. 당금의 형세는 강한 자가 우선이니 어찌 조조만 유독 옳단 말이오?”

견초가 한충을 꾸짖으며 말했다,

“조공은 진실 되고 공손하고 명철하고 천자를 보좌하고 떠받들어 모심으로서 반란자를 치고 복종하는 자는 어루만져 사해를 편안하고 고요케 했다. 너희 군신이 어리석고 간사하여 지금 지세가 험하고 멀다는 것을 믿고 왕명(王命)을 위배해 함부로 배가(拜假)하려 하여 황제의 존엄을 업신여기고 희롱하니 바야흐로 도륙(屠戮)되어야 마땅한데 어찌 감히 대인(大人)(→조조)을 업신여기고 헐뜯는가?”

그리고는 곧바로 한충의 머리를 붙잡아 땅에 박고는 칼을 뽑아 목 베려 했다. 초왕이 깜짝 놀라 맨발로 뛰쳐나가 견초를 끌어안고서 한충을 용서해주도록 청했고 좌우(左右)가 실색하였다. 그러자 견초가 자리로 되돌아와 초왕 등을 위해 성패의 효과와 화복이 귀결될 바를 설명하니 그들 모두가 좌석 아래로 내려와 무릎 꿇고 공경히 칙교(敕敎)를 받들었고, 곧바로 요동의 사자(→한충 일행)와 작별하고 원담을 구원하기 위해 엄비했던 기병을 파했다.

태조가 남피에서 원담을 멸하고 견초를 군모연(軍謀掾)으로 임시로 임명하고 오환을 치는데 종군하게 했다.

「견초전」


태조가 원상이 있는 기주를 격파시키자, 원담은 또 태조를 배반했다. 태조는 군대를 이끌고 남피(南皮)로 가서 원담을 공격했다. 왕수는 당시 낙안에서 식량을 운반하고 있었는데, 원담의 위급함을 듣고 자신이 데리고 다니던 병사 및 여러 종사 등 수십 명을 인솔하여 원담에게로 갔다. 고밀현에 이르러, 원담이 죽었다는 사실을 듣고 말에서 내려 곡을 하며 말했다.

“군주가 없으니 어디로 돌아가야 하는가?”

곧 태조를 만나 원담의 시신을 거두어 안장할 수 있게 해줄 것을 부탁했다. 태조는 왕수의 마음을 살펴보려고 일부러 대답하지 않았다. 왕수가 또 말했다.

“저는 원씨의 두터운 은혜를 입었는데, 만일 원담의 시신을 거두어서 염한 연후에 찢겨 죽는다 해도 원한이 없을 것입니다.”

태조는 왕수의 충의를 아름답게 여기고 그의 요구를 들어주었다.

후에 태조는 왕수를 독군량관(督軍粮官)으로 임명하고 낙안(樂安)으로 돌아가도록 했다. 원담이 격파되자 여러 성이 모두 항복했는데, 오직 관통만이 낙안을 지키면서 명령에 따르지 않았다. 태조는 왕수에게 명령하여 관통의 머리를 베도록 하였다. 왕수는 관통이 망국의 충신이었으므로, 그의 결박을 풀게 하고 그로 하여금 태조를 만나도록 했다. 태조는 기뻐하며 그를 사면시켰다.

「왕수전」



3.5. 유주 평정[편집]


조조가 원담을 공격하고 있던 205년 1월, 유주에서는 원희의 부하인 초촉장남이 배반하여 원희와 원상을 공격하자 원희와 원상은 삼군의 오환한테 달아난다. 이후 초촉 등은 조조한테 항복한다.

4월, 흑산적의 수장인 장연이 무리 10만 명을 이끌고 투항한다. 한편 조독곽노 등이 유주자사와 탁군태수를 죽이고 삼군의 오환이 광평에서 선우보를 공격한다.

8월, 조조가 조독 등을 공격하여 정벌하고 노하(潞河)를 건너 광평을 구원하자 오환은 새(塞) 밖으로 달아난다. 이로서 장성 이남의 유주 또한 평정되었다.


3.5.1. 기록[편집]


그달(205년 정월)에 원희(袁熙)의 대장 초촉(焦觸), 장남(張南) 등이 모반하여 원희, 원상을 공격하자, 원희, 원상은 삼군(三郡)의 오환(烏丸)에게로 달아났다. 초촉 등이 그 현을 들어 항복하자 열후에 봉했다.

당초, 원담을 토벌할 때 얼음 깨는 일을 하지 않고 달아난 백성들이 있었는데 투항 해와도 받아들이지 말도록 영을 내렸다.

여름 4월, 흑산적 장연(張燕)이 그 무리 10여 만을 이끌고 투항하니 열후에 봉했다. 고안(故安)의 조독(趙犢), 곽노(霍奴) 등이 유주자사, 탁군태수를 죽였다. 삼군의 오환이 광평(獷平)에서 선우보(鮮于輔)를 공격했다.

가을 8월, 공이 이를 정벌해 조독 등을 참수하고, 노하(潞河)를 건너 광평을 구원하자 오환이 새(塞) 밖으로 달아났다.

「무제기」


원희,원상은 그들의 장수인 초촉,장남에게 공격당하여 요서의 오환에게로 달아났다.

초촉은 스스로 유주자사라고 칭하고, 군현의 태수와 현령,현장들로 하여금 원상을 등지고 조씨(=조조) 에게 투항하도록 몰아붙였다.

초촉은 수만의 병사를 사열시키고, 백마를 죽여 그 피로서 맹세한 뒤 말했다.

"명령을 어기는 놈은 참수한다!!"

유주의 관료들은 감히 그를 쳐다보지도 못했고, 머뭇거리며 각자 피를 마셨다. 별가인 대군 사람 한형의 차례에 이르자 그가 말하기를,

"나는 원공 부자의 두터운 은혜를 입었소. 이제 그분들이 패망하기에 이르렀는데, 나의 지혜가 모자라 이를 구하지도 못하고, 용기가 부족해 (원상을) 위해 능히 죽지도 못했으니, 나의 의에는 결함이 있는 것이오.

(이토록 부끄럽기가 짝이 없는데,) 이제 조씨를 북면하여 섬기기까지 하는 것은 나로서는 도저히 견딜 수 없소."

자리에 앉아있던 모든 사람들은 한형의 말에 낮빛을 잃었다.

초촉이 말하기를,

"사나이가 대사를 이루려면 마땅히 대의가 분명해야 하며, 일의 성사는 한 사람만으로는 이루어 질 수 없소. 한형의 뜻은 이루어졌으니 (우리는) 가서 군주를 섬기도록 합시다."

이를 전해들은 조조는 한형의 절개에 대단히 감탄하고 그를 높이 평가해 거듭 초빙했으나,한형이 언제나 이를 피했으므로 이르지 못했다. 끝내 한형은 집에서 죽었다.

『후한서』 「원소열전」



3.6. 호관 전투[편집]


한편 병주의 고간은 조조가 오환을 토벌하는 사이 반란을 일으킨다. 고간은 업성을 습격하려 했지만 당시 업성을 지키고 있던 순욱의 형 순연한테 발각당해 내통하는 자들을 전부 주살한다.

그러자 고간은 상당태수를 붙잡고 호관구를 지킨다. 또한 위고, 장염 등이 고간에 호응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이에 조조는 악진과 이전을 보내 고간을 공격하게 한다. 악진은 상당 쪽으로 우회하여 배후에서 고간군을 공격하여 승리를 거두지만 호관구를 점령하는 것은 실패한다.

206년 1월, 결국 조조가 직접 고간을 정벌한다. 고간은 이 소식을 듣고 하소등승을 남겨 성을 지키게 한 후 본인은 흉노의 선우한테 가서 구원을 청하나 선우는 거절한다. 결국 고간은 극소수만을 데리고 형주로 도망가려 하나 상락도위 왕염에게 붙잡혀 참수당한다.

조조는 호관을 포위하고 이렇게 영을 내린다.

“성이 함락되면 모두 파묻어 죽여라.”

여러 달이 지나도록 함락하지 못하자 조인이 조조한테 말한다.

성을 포위할 때는 필히 활문(活門)을 보여주어 이로써 그들이 살아날 길을 열어주어야 합니다. 지금 공(公)께서 반드시 죽일 것이라 말씀하시니 그들로 하여금 스스로 굳게 지키게 하였습니다. 게다가 성이 단단하고 양곡이 많아 이를 공격하자니 사졸들이 상하고 수비하자니 시간이 오래 걸립니다. 지금 (적의) 견고한 성 아래에 머물면서(頓兵堅城) 공격해 포로들을 반드시 죽이겠다는 것은 좋은 계책이 아닙니다.

조조가 조인의 말을 따르자 호관을 지키던 자들이 항복하니 성을 포위한지 세 달만이었다.

고간에 호응하여 반란을 일으킨 위고, 장염 등도 종요, 장기, 가규, 두기의 활약으로 진압되면서 고간의 반란은 실패로 끝난다.


3.6.1. 기록[편집]


겨울 10월, 공이 업으로 돌아왔다.

당초 원소는 생질인 고간(高幹)을 병주목(幷州牧)으로 삼았었는데, 공이 업을 함락하자 고간이 투항했고 이에 고간을 (병주)자사(刺史)로 삼았다. 고간은 공이 오환을 토벌한다는 말을 듣고는, 주(州)를 들어 모반하여 상당태수를 붙잡고, 군사를 일으켜 호관구(壺關口)를 지켰다.

11년(206년) 봄 정월, 공이 고간을 정벌했다. 고간이 이를 듣고 그 별장(別將)을 남겨 성을 지키게 하고, 자신은 흉노로 들어가 선우에게 구원을 청했으나 선우는 거절했다. 공이 호관을 석 달 동안 포위해 함락했다. 이에 고간은 형주로 달아났으나 상락도위(上洛都尉) 왕염(王琰)이 그를 붙잡아 참수했다.

「무제기」


고간이 반란을 일으켜 상당(上黨)태수를 붙잡고 병사를 일으켜 호구관(壺口關)을 지켰다. 악진(樂進)과 이전(李典)을 보내 격퇴케 하였으나, 함락시키지 못했다.

11년(206년), 태조가 고간을 정벌하였다. 고간이 그의 장수 하소(夏昭)와 등승(鄧升)을 남겨 성을 지키도록 하고, 자신은 흉노의 선우(單于)에게로 가서 구원을 요청했으나 얻지 못하여, 혼자 여러 기(騎)와 더불어 도망갔는데, 남으로 형주로 달아나고자 하였으나, 상락(上洛) 도위(都尉)에게 붙잡혀 참수되었다.

「원소전」


고간이 거듭 배반하여 상당태수를 붙잡고 군사를 일으켜 호구관을 지켰다.

11년(206년), 조조가 직접 군사를 이끌고 고간을 정벌했다. 고간은 이에 그의 장수로 하여금 성을 지키게 하고, 스스로 흉노에게 가서 구원을 요청했으나 원군을 얻지 못했다.

고간은 패망하여 홀몸에 단지 몇 기만을 거느리고 도망쳤다. 남쪽으로 도망가 형주에 의탁하려고 하였으나, 상락도위에게 붙잡혀 참수당했다.

『후한서』 「원소열전」


악진은 별도로 고간(高幹)을 정벌했는데, 북쪽 길을 통해 상당(上黨-병주 상당군)으로 들어가 우회해서 배후를 쳤다. 고간 등이 되돌아가 호관(壺關)을 지키자 (악진은) 연달아 싸워 적의 머리를 베었다. 고간이 견수(堅守-굳게 지킴)해 공략하지 못했는데 태조가 친히 정벌하여 호관을 함락했다.

「악진전」


하북(河北)이 평정된 후 호관(壺關)을 포위하는데 종군했다. 태조가 영을 내렸다,

“성이 함락되면 모두 파묻어 죽여라.”

여러 달이 지나도록 함락하지 못했다.

조인이 태조에게 말했다,

“성을 포위할 때는 필히 활문(活門)을 보여주어 이로써 그들이 살아날 길을 열어주어야 합니다. 지금 공(公)께서 반드시 죽일 것이라 말씀하시니 그들로 하여금 스스로 굳게 지키게 하였습니다. 게다가 성이 단단하고 양곡이 많아 이를 공격하자니 사졸들이 상하고 수비하자니 시간이 오래 걸립니다. 지금 (적의) 견고한 성 아래에 머물면서(頓兵堅城) 공격해 포로들을 반드시 죽이겠다는 것은 좋은 계책이 아닙니다.”

태조가 이를 따르니 성이 항복했다. 이에 조인의 앞뒤 공을 기록해 도정후(都亭侯)에 봉했다.

「조인전」


순욱의 형인 순연(荀衍)은 감군교위(監軍校尉)로서 업성을 지키며, 하북의 일을 모두 감독하였다. 태조가 원상을 정벌할 때, 고간(高幹)이 은밀히 병사를 보내 업성을 습격할 것을 모의했는데, 순연이 반역을 알아차리고 모두 다 주살하니, 그 공으로 열후에 봉해졌다.

「순욱전」


그 후에 하동 출신 위고(衛固)가 반란을 일으키자, 장성(張晟), 장염(張琰), 고간 등이 힘을 합쳐 침입했다. 종요는 또 다시 장병들을 이끌고 그들을 격파했다.

「종요전」


고간이 모반했을 때, 장염(張琰)은 병사를 일으켜 이에 호응하려고 했다. 가규는 장염의 음모를 모르고 앞으로 가서 장염을 만났다. 가규는 병사들이 변하여 일어나려고 한다는 것을 듣고 돌아가려고 했지만, 붙잡힐 것이 두려워 장염을 위해 계책을 짜내어 마치 그와 같이 모의하는 사람인 것처럼 하였는데, 장염은 그를 믿었다. 당지 민지현의 관청은 여성(蠡城)에 있었는데, 성벽과 연못이 견고하지 못했다. 가규는 장염에게 병사를 구하여 성을 수리했다. 반란을 일으키려고 하는 사람들은 모두 그들의 음모를 숨기지 않았기 때문에 가규는 그들을 전부 죽일 수 있었다. 그리고 가규는 성벽을 수리하고 장염에게 저항했다. 장염이 패망한 이후, 가규는 조부를 잃은 것을 이유로 관직에서 떠났다.

「가규전」


그 후 고간은 또 병주를 들어 모반하였다. 하내 사람 장성(張晟)의 무리 1만여 명은 귀의할 곳이 없어서 효민(崤澠) 일대에서 소란을 피웠는데, 하동의 위고(衛固)와 홍농(弘農)의 장염(張琰)이 각기 병사를 일으켜 그들에게 호응했다.

조조는 장기를 의랑으로 임명하여 종요의 군대 일에 참여하도록 하고, 서쪽으로 가서 마등 등의 장수들을 불러오도록 하였다. 그들은 모두 병사를 인솔하여 함께 장성 등을 공격하여 격파시켰으며, 장염과 위고의 머리를 베었고, 고간은 형주로 달아났다. 조조는 장기를 무시정후(武始亭侯)로 봉하였다.

「장기전」



3.7. 해안 평정[편집]


206년 8월, 조조는 직접 순우(淳于)[18]에 도착한다. 악진과 이전을 보내 관승을 격파하자 관승은 섬으로 달아난다.

또한 기주가 평정된 이후 창희가 다시 모반하자 우금을 보내 정벌하게 했는데 이기지 못하자 추가로 하후연을 보내 우금과 힘을 합치게 했다. 창희를 공격하여 10여 둔영을 격파하자 창희는 친분이 있던 우금한테 항복한다.

여러 장수들은 모두 창희가 이미 항복했으므로 조조한테 호송해야 한다고 말하자 우금이 말한다.

제군은 공의 상령(常令)을 모른단 말이오! 포위당한 후에 항복한 자는 사면하지 않는다 했소. 무릇 법을 받들고 영을 행하는 데(奉法行令) 으뜸되는 것이 절(節-절도, 절조)이오. 비록 창희가 옛 벗이긴 하나 나 우금은 절(節)을 잃을 순 없소!

그리고 눈물을 흘리며 직접 창희를 참수한다.

조조는 이 소식을 듣고 탄식하며 말한다

창희가 내게로 와 항복하지 않고 우금에게 항복했으니, 어찌 그의 운명이 아니겠는가!

창희와 결탁한 무리들도 여건한테 진압된다. 관승과 창희까지 토벌당하자 장성 이남은 모두 평정되었다. 하지만 조조는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3.7.1. 기록[편집]


(206년)가을 8월, 공이 동쪽으로 해적(海賊) 관승(管承)을 정벌해 순우(淳于-북해국 순우현)에 도착했다. 악진, 이전을 보내 이를 격파하자 관승은 바다의 섬으로 달아났다.

「무제기」


태조는 관승(管承)을 정벌하기 위해 순우(淳于-청주 북해국 순우현)에 주둔하고, 악진을 이전과 함께 보내 공격하게 했다. 관승이 패주해 바다의 섬으로 달아났고 해안지대가 평정되었다.

「악진전」


장광(長廣)에 이르러 관승(管承)을 공격하여 모두 승리했다.

「이전전」


창희昌狶가 모반하자 우금于禁을 보내 공격하게 했는데 이기지 못하자 다시 하후연을 보내 우금과 힘을 합치게 했다. 마침내 창희를 공격하여 10여 둔영을 항복시켰고 창희는 우금에게 나아가 투항했다. 하후연이 돌아오자 전군교위典軍校尉에 임명했다.

「하후연전」


기주(冀州)가 평정되고 창희(昌豨)가 다시 모반하자 우금을 보내 이를 정벌케 했다. 우금이 급히 진격해 창희를 들이쳤다. 창희는 우금과 교분이 있었으므로 우금에게로 나아가 항복했다. 제장들은 모두 창희가 이미 항복했으므로 응당 태조에게로 호송해야 한다고 했다.

우금이 말했다,

“제군은 공의 상령(常令)을 모른단 말이오! 포위당한 후에 항복한 자는 사면하지 않는다 했소. 무릇 법을 받들고 영을 행하는 데(奉法行令) 으뜸되는 것이 절(節-절도, 절조)이오. 비록 창희가 옛 벗이긴 하나 나 우금은 절(節)을 잃을 순 없소!” 직접 창희의 형을 집행했는데 눈물을 흘리며 참수했다.

이때 태조는 순우(淳于-청주 북해국 순우현)에 주둔하고 있었는데 이 소식을 듣고 탄식하며 말했다,

“창희가 내게로 와 항복하지 않고 우금에게 항복했으니, 어찌 그의 운명이 아니겠는가!”

그리고 우금을 더욱 중하게 여겼다.

동해(東海-서주 동해군)가 평정되자 우금을 호위장군(虎威將軍)에 임명했다.

「우금전」


양릉교위(襄陵校尉) 두송(杜松)의 부하 경모(部民炅母) 등이 반란을 일으켜 창희(昌豨)와 결탁했다. 조조는 여건으로 하여금 두송의 직무를 대신하도록 했다. 여건이 임지에 도착한 후, 경모 등 두목과 함께 반란을 일으킨 수십 명을 초대하여 술과 음식을 나누어 주었다.

한편으로는 용감한 사병들을 선발하여 옆에 매복켰고, 여건은 경모 등이 모든 취한 것을 살피고 나서 복병들로 하여금 그들을 전부 죽이도록 했다.

그 나머지 무리들은 진무하였으므로, 많은 적들은 곧 평정됐다.

「여건전」



3.8. 오환 정벌[편집]


요서 선우 답돈은 원소한테 후하게 대접받았는데 이 때문에 원상 형제는 그에게 귀의했다. 조조는 이를 정벌하고자 했는데 군량 운송이 어려운 것이 문제였다. 이에 조조는 동소의 계책을 이용하여 평로거(平虜渠)와 천주거(泉州渠) 두 수로를 판다.

207년 정월, 조조는 업으로 돌아와 삼군의 오환을 정벌하려 한다. 그러자 여러 장수들이 말했다.

원상은 도망간 적에 불과하고 이적(夷狄)들은 탐욕스러울 뿐 친애함이 없으니 어찌 원상이 이들을 능히 부릴 수 있겠습니까? 지금 깊이 들어가 정벌하면 유비가 필시 유표를 설득해 허도를 기습할 것입니다. 만에 하나 변고가 생기면 후회해도 소용없을 것입니다.

그러자 곽가가 말했다.

공이 비록 위엄으로 천하를 진동시키고 있으나 호(胡)는 그들이 멀리 떨어져있는 것을 믿고 있으니 필시 방비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들에게 방비가 없음을 틈타 갑작스럽게 공격한다면 격파하여 멸할 수 있습니다.

게다가 원소(袁紹)가 민이(民夷,중국의 일반백성과 오랑캐)에게 은혜를 베푼데다가 원상 형제가 생존해 있습니다. 4주(四州)의 백성들은 단지 위엄으로써 강제로 우리에게 귀부한 것이며 은덕과 시혜가 아직 더해지지 못했는데 이를 내버려두고 유표를 치며 남정(南征)한다면, 원상은 오환(烏丸)이라는 자산을 기반으로 그의 사주지신(死主之臣,주인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충성스런 신하)들을 불러 모을 것이고 이와 더불어 호인(胡人)이 한꺼번에 움직인다면 민이(民夷)가 함께 호응할 것이니, 이는 답돈(蹋頓)에게 다른 마음이 생기게 하고 분수에 넘치는 욕심의 계책을 이루게 하는 것이라 청주, 기주가 우리의 소유가 되지 못할까 두렵습니다.

유표는 좌담객(坐談客,앉아서 담소하기나 좋아하는 인물)일 뿐이라 자신의 재능이 유비를 부리기에는 충분치 않다는 것을 잘 알고 있어 유비에게 중임을 맡기면 그를 제어할 수 없을까 두려워하고 가벼운 임무를 주면 유비가 별 쓸모가 없을 것이니 우리가 비록 나라를 비워두고 원정(遠征)하더라도 공이 염려하실 게 없습니다.

조조가 북쪽으로 올라가 역(易)에 도착하자 곽가는 이렇게 조언한다.

병(兵)에서는 신속(神速)을 귀하게 여깁니다. 이제 천리 길을 가며 적을 습격하려는데 치중(輜重)이 많으면 이득을 취하기 어렵습니다. 게다가 치중으로 인해 진군이 늦어져 저들이 우리가 온다는 것을 듣게 되면 필시 방비를 할 것입니다. 치중은 남겨두고 경병(輕兵)으로 겸도(兼道)[19]

하여 출군함으로써 엄기불의(掩其不意)[20]하느니만 못합니다.

조조는 곽가의 조언을 따른다. 과연 유비가 유표를 설득해 허도를 습격하고자 했으나 유표가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5월, 조조는 무종(無終)[21]에 도착했다.

7월, 비가 많이 내려 홍수가 나 해안의 도로가 막혀 통하지 않았다. 또 적군이 샛길을 차단하여 지키고 있었기 때문에 조조군은 나아갈 수 없었다. 조조가 이것을 걱정하다가 전주에게 물으니, 전주가 말했다.

이 길은 매년 가을과 여름에는 항상 물이 가득합니다. 얕다고 해도 수레와 말이 통과하지 못하고, 깊다고 해도 배가 운행할 수 없으니, 오랜 시간 어려움을 겪게 됩니다. 옛날 북평군(北平郡)의 군치(郡治)는 평강(平綱)에 있었고, 길은 노룡(盧龍)에서 나와 유성(柳城)에 이르렀습니다. 광무제(光武帝) 건무(建武) 연간 이래로 이 길이 무너져 내려 끊어진 지 2백 년이 되었는데, 좁고 작은 지름길이 있어 통행할 수 있었습니다. 지금 적은 승상의 대군이 무종에서 나와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면, 물러날 것으로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느슨하게 아무런 준비도 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가 만일 군대를 조용히 철수시키고 노룡의 입구로부터 백단(白檀)의 험난함을 뛰어넘고 텅빈 곳을 나온다면, 길은 가깝고 편리할 것이고, 그들이 아무런 준비를 하고 있지 않을 때에 갑자기 덮치면, 답돈(蹋頓)의 우두머리를 싸우지 않고도 잡을 수 있습니다.

조조는 전주의 의견을 받아들이는 한편 군사를 인솔하여 돌아가며 물 옆 길가에 세워져 있는 큰 나무에 이렇게 기록한다.

지금은 여름이라 길이 통하지 않으니, 가을을 기다렸다가 다시 진군 하리라.

적군의 척후기병(斥候騎兵)은 이를 보고 정말로 조조의 군대가 물러났다고 생각했다.

조조가 군을 이끌고 서무산(徐無山)으로 올라가 노룡(盧龍)의 새(塞)를 나오니 새 밖의 길이 끊어져 통하지 않았다. 산을 파고 계곡을 메우며 500여 리를 가서 백단(白檀)을 거치고 평강(平岡)을 지나 선비정(鮮卑庭)을 건너고 동쪽으로 유성(柳城)으로 향했다.

유성에 도착하기 2백리 전에 적들이 이를 알아챘다. 원상, 원희는 답돈(蹋頓), 요서 선우 누반(樓班), 우북평 선우 능신저지(能臣抵之) 등과 함께 수만 기를 이끌고 맞섰다.

8월, 백랑산(白狼山)에 올랐다가 졸지에 적과 조우했는데 그 무리들이 매우 많았다. 조조군의 치중은 후방에 있고 갑옷을 입은 자는 적어 모두 두려워했다. 조조가 높은 곳에 올라 적의 진지가 정돈되지 못한 것을 보고는 이에 군사를 풀어 공격하며 장료와 장합을 선봉으로 세웠다.

적군이 크게 붕괴되니 답돈과 명왕(名王) 이하를 참수하고, 투항한 호인(胡人), 한인(漢人)이 20여 만 명에 이르렀다. 요동 선우 속복환(速僕丸)과 요서, 우북평의 여러 호족들은 그 종족들을 버리고 원상, 원희와 함께 요동으로 달아났다.

오환을 격파한 후 어떤 이가 조조를 설득하기를, 끝까지 정벌하면 원상 형제를 사로잡을 수 있다고 했다.

그러자 조조가 말했다.

나는 바야흐로 공손강이 원상, 원희를 참수해 그 수급을 보내오게 할 것이니 군사들을 번거롭게 할 필요는 없소.

원상은 요동에 도착하기 전 원희한테 이렇게 말했다.

이제 요동에 이르면 공손강이 필시 나를 만날 것입니다. 제가 형을 위해 그 자리에서 손수 공손강을 죽인 후 군현을 점거하고 이곳을 근거지로 삼는다면 이를 기반으로 오히려 더욱 강해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공손강 역시 원상과 원희를 죽여 공을 세울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마구간 안에 무사들을 숨겨놓고 원상 형제를 불렀다.

들어가기 전, 원희가 의심을 품고 들어가려 하지 않자 원상이 강하게 제지하여 안으로 들어갔다. 미처 자리에 이르기도 전에 공손강이 소리지르며 복병을 불러들였고 결국 원상, 원희는 포획되었다. 그들은 얼어붙은 땅 위에 꿇어앉혀져 공손강과 대질했는데, 원상이 이를 가리키며 공손강에게 말했다.

아직 죽지 않는 사이의 추위를 참지 못하겠으니 더불어 앉을 자리쯤은 허락해 주셔야겠소.

그러자 공손강이 말했다.

경의 머리가 만리 길 여행을 떠날 판에 그런 것이 무슨 쓸모가 있겠는가!!

이에 원상과 원희의 목을 베고 그 수급을 조조에게 보냈다.

9월, 조조가 유성으로부터 돌아오자 공손강으로부터 원상, 원희, 속복환의 수급이 도착했다. 이로서 원씨의 세력은 완전히 소멸되었다.


3.8.1. 기록[편집]


삼군(三郡)의 오환(烏丸)이 천하가 어지러워진 것을 틈타 유주(幽州)를 격파하고 한민(漢民-한나라 백성) 10여 만 호를 약탈해 소유했다. 원소는 그 추호(酋豪)들을 세워 선우(單于)로 삼고, 가인(家人)의 자식을 자기 딸로 삼아 그들에게 처로 주었다. 요서(遼西) 선우 답돈(蹋頓)이 특히 강성하여 원소에게 후한 대접을 받았는데 이 때문에 원상 형제들이 그에게 귀의했고 수차례 새(塞) 안으로 들어와 해를 끼쳤다.

공이 이를 장차 정벌하고자 하여, 수로를 뚫어 호타(呼沱)로부터 고수(泒水)로 들어가게 하고 이를 평로거(平虜渠)라 명명했다. 또한 구하(泃河) 입구로부터 로하(潞河)로 들어가게 해 천주거(泉州渠)라 명명하고 바다로 통하게 했다.

12년(207년) 봄 정월, 공이 순우(淳于)로부터 업으로 돌아왔다.

장차 북쪽으로 삼군의 오환을 정벌하려 하자 제장들이 모두 말했다,

“원상은 도망간 적에 불과하고 이적(夷狄)들은 탐욕스러울 뿐 친애함이 없으니 어찌 원상이 이들을 능히 부릴 수 있겠습니까? 지금 깊이 들어가 정벌하면 유비가 필시 유표를 설득해 허도를 기습할 것입니다. 만에 하나 변고가 생기면 후회해도 소용없을 것입니다.”

오직 곽가(郭嘉)만이 유표는 필시 유비를 신임하지 못하리라 헤아려, 공에게 원정하도록 권했다.

여름 5월, 무종(無終-유주 우북평군 무종현)에 이르렀다.

가을 7월, 큰 홍수가 나서 바다에 면한 길(傍海道)이 통하지 않았는데, 전주(田疇)가 향도(鄕導-길 안내자)가 되기를 청하자 공이 이를 따랐다. 군을 이끌고 노룡(盧龍)의 새(塞)를 나오니 새 밖의 길이 끊어져 통하지 않았다.

이에 산을 파고 계곡을 메우며 500여 리를 가서 백단(白檀)을 거치고 평강(平岡)을 지나 선비정(鮮卑庭)[22]

을 건너고 동쪽으로 유성(柳城)으로 향했다. (유성에 도착하기) 2백리 전에 적들이 이를 알아챘다. 원상, 원희는 답돈(蹋頓), 요서 선우 누반(樓班), 우북평 선우 능신저지(能臣抵之) 등과 함께 수만 기를 이끌고 맞섰다.

8월, 백랑산(白狼山)에 올랐다가 졸지에 적과 조우했는데 그 무리들이 매우 많았다. 공의 거중(車重-치중)은 후방에 있고 갑옷을 입은 자는 적으니 좌우가 모두 두려워했다. 공이 높은 곳에 올라 적의 진지가 정돈되지 못한 것을 보고는 이에 군사를 풀어 공격하며 장료(張遼)를 선봉으로 세웠다.

적군이 크게 붕괴되니 답돈과 명왕(名王-관직명) 이하를 참수하고, 투항한 호인(胡人), 한인(漢人)이 20여 만 명에 이르렀다. 요동 선우 속복환(速僕丸)과 요서, 우북평의 여러 호족들은 그 종인(種人-종족)들을 버리고 원상, 원희와 함께 요동으로 달아났는데, 그 무리들이 수천 기에 이르렀다.

당초 요동태수 공손강(公孫康)은 멀리 떨어져 있다는 것을 믿고 복종하지 않았다. 공이 오환을 격파하자 어떤 이가 공을 설득하기를, 끝까지 정벌하면 원상 형제를 사로잡을 수 있다고 했다. 공이 말했다,

“나는 바야흐로 공손강이 원상, 원희를 참수해 그 수급을 보내오게 할 것이니 군사들을 번거롭게 할 필요는 없소.”

9월, 공이 군을 이끌고 유성으로부터 돌아오자 공손강이 원상, 원희와 속복환 등을 참수해 수급을 보내왔다.

이때 추위가 일찍 찾아왔고 2백리 간에 물이 없었으며 또한 군중에서 먹을 것이 부족해 말 수천 필을 죽여 양식으로 삼았는데, 땅을 30여 장 파서 물을 얻었다. 돌아온 뒤 이전에 (원정하지 말도록) 간언한 자에 관해 물으니, 뭇 사람들이 그 이유를 몰라 모두 두려워했다. 공이 이들 모두에게 후하게 상을 내리며 말했다,

“내가 전에 원정을 행한 것은 위험을 무릅쓰고 요행을 바란 것이오. 비록 성공했으나 이는 하늘이 도운 것이니 상규로 삼을 수는 없소. 제군이 간언한 것이 만안(萬安-만전)의 계책이었기에 이에 상을 내리니, 이후 말하는 것을 어려워하지 말라.”

제장들이 혹 묻기를,

“공이 돌아오자 공손강이 원상, 원희를 참수해 수급을 보내왔으니 어찌된 일입니까?”

고 하자 공이 말했다,

“공손강은 평소 원상 등을 두려워했으므로, 내가 급히 공격하면 서로 힘을 합칠 것이고 느슨하게 하면 서로 도모할 것이니, 형세가 그러했소.” – 「조만전」

11월, 역수(易水)에 이르자 대군(代郡) 오환의 행(行-대행의 의미) 선우 보부로(普富盧)와 상군(上郡) 오환의 행 선우 나루(那樓)가 그들의 명왕(名王)을 거느리고 와서 하례했다.

13년(208년) 봄 정월, 공이 업으로 돌아와, 현무지(玄武池)를 만들어 주사(舟師-수군)를 조련했다.

「무제기」


12년(207년), 조조가 요서를 정벌해 오환을 공격했다. 원상, 원희는 오환과 더불어 조조의 군대와 맞섰으나 싸움에 패하여 도망쳤는데, 이에 친병 수천인이 (원상과) 더불어 요동태수 공손강에게로 달아났다.

원상의 사람됨은 기민하고 과감하였으므로 (요동에 도착하기)앞서 원희에게 모략을 말한다,

"이제 요동에 이르면 공손강이 필시 나를 만날 것입니다. 제가 형을 위해 그 자리에서 손수 공손강을 죽인 후 군현을 점거하고 이곳을 근거지로 삼는다면 (이를 기반으로 하여 재기해) 오히려 더욱 강해질 수 있습니다."

한편으로 공손강 역시 원상을 죽여서 공을 세울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정용한 무사들을 마구간 안에 미리 숨겨두고 그 이후에 원상,원희를 불러들였다.

들어가기 직전, 원희가 의심을 품고 두려워하며 나아가지 않으려 하자 원상이 강하게 제지하여 마침내 안으로 들어갔다.

미처 자리에 이르기도 전에 공손강이 소리지르며 복병을 불러들였고 결국 원상, 원희는 포획되었다. 그들은 얼어붙은 땅 위에 꿇어앉혀져 (공손강과) 대질했는데, 원상이 이를 가리키며 공손강에게 말하길.

"아직 죽지 않는 사이의 추위를 참지 못하겠으니 더불어 앉을 자리쯤은 허락해 주셔야겠소."

공손강이 말했다. "경의 머리가 만리 길 여행을 떠날 판에 그런 것이 무슨 쓸모가 있겠는가 !!"

이에 원상,원희를 베고 그 수급을 (조조에게) 보냈다.

『후한서』 「원소열전」


나중에 원상(袁尙)이 북방의 오환족(烏丸) 답돈(蹋頓)에게 귀의하자 태조는 그를 정벌하고자 했다. 당시 군량을 운송하기 어려운 것을 걱정하여 평로(平盧)와 천주(泉州) 두 도랑을 파서 바다로부터 통하게 하였는데, 이것도 동소가 건의한 것이다.

「동소전」


건안(建安) 12년(207년)에 태조가 북쪽으로 가서 오환을 정벌하였는데, 대군이 도착하기 전에 먼저 관리를 보내 전주를 불렀으며, 또 전예(田豫)에게 태조의 뜻을 전달하도록 명령했다. 전주는 그의 문하 사람들에게 긴급히 여장을 꾸리도록 하였다. 문인이 그에게 물었다.

“옛날 원공(袁公)은 당신을 사모하여 예물과 명령을 다섯 차례나 보내왔지만, 당신은 도의를 견지하고 따르지 않았습니다. 지금 조공의 사자가 겨우 한 번 왔는데, 당신은 오직 태조에게 미치지 못할 것을 걱정하고 있으니, 이는 무엇 때문입니까?”

전주는 웃으면서 그들에게 대답했다.

“이것은 그대들이 알지 못하는 일이오.”

그리고는 사자를 따라가 태조의 군대 앞에 도착했다. 태조는 그를 사공호조(司空戶曹)의 속관으로 임명하고, 친히 접견하며 몇 가지 문제에 관해 물었다. 다음날, 태조가 명령을 내려 말했다.

“전자태(田子泰 : 전주)는 내가 부리는 관리가 되기에는 마땅하지 않은 사람이다.”

즉시 그를 수재(秀才)로 천거하고 수현(蓚縣)의 현령에 임명했지만, 그로 하여금 임지로 가게 하지는 않고 군대를 잠시 무종(無終)에 머물도록 했다. 그 당시는 마침 비가 내리는 여름이었는데, 무종은 해안을 따라 낮은 곳에 위치하고 있었으므로 도로가 막혀 통하지 않았다. 적은 또 샛길을 차단하여 지키고 있었으므로, 태조의 대군은 나아갈 수 없었다. 태조는 이것을 걱정하다가 전주에게 물으니, 전주가 말했다.

“이 길은 매년 가을과 여름에는 항상 물이 가득합니다. 얕다고 해도 수레와 말이 통과하지 못하고, 깊다고 해도 배가 운행할 수 없으니, 오랜 시간 어려움을 겪게 됩니다. 옛날 북평군(北平郡)의 군치(郡治)는 평강(平綱)에 있었고, 길은 노룡(盧龍)에서 나와 유성(柳城)에 이르렀습니다. 광무제(光武帝) 건무(建武) 연간 이래로 이 길이 무너져 내려 끊어진 지 2백 년이 되었는데, 좁고 작은 지름길이 있어 통행할 수 있었습니다. 지금 적은 승상의 대군이 무종에서 나와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면, 물러날 것으로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느슨하게 아무런 준비도 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가 만일 군대를 조용히 철수시키고 노룡의 입구로부터 백단(白檀)의 험난함을 뛰어넘고 텅빈 곳을 나온다면, 길은 가깝고 편리할 것이고, 그들이 아무런 준비를 하고 있지 않을 때에 갑자기 덮치면, 답돈(蹋頓)의 우두머리를 싸우지 않고도 잡을 수 있습니다.”

태조가 말했다.

“알겠소.”

곧 군사를 인솔하여 돌아가며 물 옆 길가에 세워져 있는 큰 나무에 이렇게 기록했다.

“지금은 여름이라 길이 통하지 않으니, 가을을 기다렸다가 다시 진군 하리라.”

적군의 척후기병(斥候騎兵)은 그것을 보고 정말로 태조 대군이 갔다고 생각했다. 태조는 전주에게 그가 원래 갖고 있던 군사들을 인솔하게 하고, 서무산(徐無山)으로 올라가 노룡(盧龍)으로 나와, 평강(平岡)을 지나서 백낭퇴(白狼堆)에 올랐다. 유성(柳城)으로부터 2백여 리까지 갔을 때, 적군은 비로소 깜짝 놀랐다. 선우(單于)는 스스로 진(陳)에 임했다. 태조는 대군을 인솔하여 그와 접전을 벌였는데, 목을 베거나 사로잡은 자가 매우 많았으며, 또 도망가는 적을 추격하여 유성에 이르렀다.

태조의 군대는 군영으로 돌아온 후에 공을 논하여 상을 주었는데, 전주를 정후(亭侯)로 봉하고 식읍을 5백 호 주었다.

요동에서 원상의 머리를 베어 보내 왔는데, 태조가 명령을 내렸다.

“삼군(三軍) 중에서 감히 그에게 곡(哭)을 하는 자가 있으면 참수하리라.”

전주는 일찍이 자신이 원상의 부름을 받은 적이 있었으므로 앞으로 나가 원상을 조의하고 제사를 지냈는데, 태조는 이 사실을 알고도 연유를 묻지 않았다.

「전주전」


태조가 장차 원상(袁尙) 및 삼군오환(三郡烏丸)을 치려 하니, 수하들 다수는 유표(劉表)가 유비(劉備)를 시켜 허(許)를 습격하며 태조를 공격할까봐 우려하였다. 곽가가 말했다,

“공이 비록 위엄으로 천하를 진동시키고 있으나 호(胡)는 그들이 멀리 떨어져있는 것을 믿고 있으니 필시 방비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들에게 방비가 없음을 틈타 갑작스럽게 공격한다면 격파하여 멸할 수 있습니다. 게다가 원소(袁紹)가 민이(民夷,중국의 일반백성과 오랑캐)에게 은혜를 베푼데다가 원상 형제가 생존해 있습니다. 4주(四州)(→기주, 청주, 병주, 유주)의 백성들은 단지 위엄으로써 강제로 우리에게 귀부한 것이며 은덕과 시혜가 아직 더해지지 못했는데 이를 내버려두고 유표를 치며 남정(南征)한다면, 원상은 오환(烏丸)이라는 자산을 기반으로 그의 사주지신(死主之臣,주인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충성스런 신하)들을 불러 모을 것이고 이와 더불어 호인(胡人)이 한꺼번에 움직인다면 민이(民夷)가 함께 호응할 것이니, 이는 답돈(蹋頓)에게 다른 마음이 생기게 하고 분수에 넘치는 욕심의 계책을 이루게 하는 것이라 청주, 기주가 우리의 소유가 되지 못할까 두렵습니다. 유표는 좌담객(坐談客,앉아서 담소하기나 좋아하는 인물)일 뿐이라 자신의 재능이 유비를 부리기에는 충분치 않다는 것을 잘 알고 있어 유비에게 중임을 맡기면 그를 제어할 수 없을까 두려워하고 가벼운 임무를 주면 유비가 별 쓸모가 없을 것이니 우리가 비록 나라를 비워두고 원정(遠征)하더라도 공이 염려하실 게 없습니다.”

이에 태조가 실행에 옮겼다. 역(易)(→기주 하간국 역현)에 도착하니 곽가가 말했다,

“병(兵)에서는 신속(神速)을 귀하게 여깁니다. 이제 천리 길을 가며 적을 습격하려는데 치중(輜重, 짐수레)이 많으면 이득을 취하기 어렵습니다. 게다가 치중으로 인해 진군이 늦어져 저들이 우리가 온다는 것을 듣게 되면 필시 방비를 할 것입니다. 치중은 남겨두고 경병(輕兵,가볍고 날랜 차림의 군대)으로 겸도(兼道, 이틀 길을 하루에 달려감)하여 출군함으로써 엄기불의(掩其不意, 적이 뜻하지 못할 때에 엄습함)하느니만 못합니다.”

이에 태조가 은밀히 노룡새(盧龍塞)를 나가 선우정(單于庭)으로 곧바로 향했다. 노(虜)(→오환)가 태조가 갑자기 도착했다는 말을 듣고는 당황하고 두려워하여 어울려 싸웠다. 태조가 이를 대파하고 답돈(蹋頓) 및 명왕(名王)(→오환의 직책명) 이하 여러 명을 베었다. 원상 및 원상의 형 원희(袁熙)는 요동(遼東)으로 달아났다.

「곽가전」


태조가 유성柳城을 공격하고자 할 때의 일이다. 영군領軍 사환史渙은 멀리 행군하여 깊이 들어가는 것은 완벽한 계책이 아니라고 여겨 한호와 함께 간언하고자 했는데 한호가 말했다,

“지금의 병세兵勢가 강성해 위엄이 사해에 떨쳐, 싸우면 이겨 공적을 이루고 뜻대로 되지 않는 것이 없는 상황인데 지금과 같은 때에 천하의 근심거리를 없애지 않으면 장차 우환이 될 것이오. 게다가 공(=조조)께서 신무(神武-영명하고 위풍당당함)하시어 실책하시는 법이 없으니 내가 군과 더불어 중군주中軍主의 입장으로 반대할 일이 아닙니다.”

마침내 수행하여 유성을 깨뜨렸다. 관직을 고쳐 중호군中護軍으로 삼고 장사, 사마를 두었다.

「하후돈전」


태조를 수행해 유성(柳城)에서 원상을 정벌했다. 갑작스럽게 노(虜-오랑캐 또는 적군)와 조우하자 장료는 태조에게 싸울 것을 권하며 기백을 심히 떨쳤다. 태조가 이를 장하게 여겨 자신이 소지한 대장기를 장료에게 주었다. 마침내 원상을 공격해 대파하고 (오환)선우 답돈(蹋頓)을 참(斬)했다.

「장료전」


태조를 수행해 유성(柳城)을 토벌할 때 장료 등과 함께 군의 선봉이 되었고 공을 세워 평적장군(平狄將軍)으로 올랐다.

「장합전」


태조를 수행해 답돈(蹋頓)을 정벌하고 횡야장군(橫野將軍)에 임명되었다.

「서황전」


북쪽으로 세 군(三郡)을 정벌할 때 조순이 이끌던 기병(또는 조순 부部의 기병)이 선우 답돈(蹋頓)을 포획했다.

「조인전」


태조가 남피에서 원담을 멸하고 견초를 군모연(軍謀掾)으로 임시로 임명하고 오환을 치는데 종군하게 했다. 유성(柳城)에 도착하고 호오환교위(護烏丸校尉)로 삼았다.

업(鄴)으로 돌아온 뒤 요동에서 원상의 수급을 보내오자 마시(馬市)에 높이 매달아놓으니, 견초가 이를 보고 비통해하며 매달려 있는 머리 아래에서 제사를 베풀었다. 태조가 이를 의롭게 여겨 그를 무재(茂才)로 천거했다.

「견초전」


건안 12년 (207년), 조공이 북쪽으로 오환(烏丸)을 정벌하자 선주는 유표에게 허도를 습격하도록 설득했으나 유표는 이 계책을 쓰지 않았다.

「선주전」



4. 창작물에서[편집]



4.1. 삼국지 시리즈[편집]


삼국지 시리즈에서는 특수 시나리오로 나오는 경우가 있긴 하지만, 통상적으로는 나오지 않는다. 일반적인 시나리오에서는 서기 200년인 관도대전 직전, 207년인 제갈공명 등장 직전 때가 주로 설정되기 때문이다. 그래도 다른 창작물하고 비교하면 꽤 많이 나온 편이다.

삼국지 6에서 짧은 시나리오인 202년 원씨 구축에서 해당 시기를 다루는데, 202년 5월부터 시작해 204년 4월의 기간으로 원담, 원희, 원상을 죽이거나 20도시를 점령하는 것이 승리조건이다. 원소가 후계자를 남기지 않고 죽어서 원상이 계승하자 반대파인 원담이 있어서 원씨 형제가 싸우는 틈을 타 공격하자고 이야기하며, 하북의 대부분은 원상 소속의 영토지만, 평원, 북해는 원담 소속의 영토이다.

삼국지 7에서는 파워업키트를 통해 202년 본초 중도에 죽고 후계를 다투다가 추가되었으며, 삼국지 8은 삼국지 전반부를 1년 단위로 시나리오를 다루기에 원가의 분열부터 몰락까지 202년부터 206년까지 시나리오로 나온다.

이름은 202년 원가의 분열은 시작되고 유비는 형주로 피신하는데, 203년 원가의 본거지 업은 포위되고 원담은 원수 조조를 의지하는데, 204년 업의 심배는 끝내 무너지고 원담은 조조에게 반기를 드는데, 205년 조조는 마침내 기주를 제압하고 고간은 호관에서 버티는데, 206년 병주마저 조조의 손에 넘어가고 유비는 인재를 갈망하는데 등 총 5개이다.

삼국지 11은 203년 원가의 몰락으로 나오고 삼국지 14에서는 DLC 시나리오인 202년 6월 하북쟁란으로 나오는데, 14에서부터 정사에서만 등장하는 해당 시기와 관련된 원씨 가문의 장수들이 등장하고 고간이 단독 세력으로 나오기도 한다.


4.2. 영걸전 시리즈[편집]


영걸전 시리즈에서는 삼국지 조조전에서만 유일하게 다뤄진다. 조조전의 2장 전체가 극히 일부를 제외하고는 원소 일족과의 싸움을 다루고 있으며, 중반까지는 원소가 보스 격으로 나오지만, 창전 전투 이후 원소가 사망하면서 원소의 아들들과의 전투가 메인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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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원상의 자(字)가 현보이다.[2] 후한서에는 고상(高翔)이라 나온다.[3] 뻣뻣한 시체와 흐르는 피. 사망자를 말한다.[4] 위군 무안현의 현장[5] 병주 상당군. 고간이 있는 곳이다.[6] 저수의 아들이다.[7] 기주 조국 한단현. 전국시대 조나라의 수도로 유명하다.[8] 조국 역양현의 현령[9] 기주 중산국[10] 원소의 차남인 원희를 뜻한다.[11] 기주 감릉국[12] 기주 안평군[13] 기주 발해군[14] 기주 하간국[15] 탁군 고안현[16] 전장으로 와서 적과 싸움[17] 어양군 옹노현[18] 청주 북해국 순우현[19] 이틀 길을 하루에 달려감[20] 적이 뜻하지 못할 때에 엄습함[21] 유주 우북평군 무종현[22] 선비족의 앞뜰, 영역이란 말로, 오환선비동이전에 의하면 당시 오원, 운중에서 동쪽으로 요수에 이르기까지 영역을 선비정이라 부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