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공주대학교/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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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역대 총장
3. 공주사범대학
3.1. 사범교육의 효시
3.2. 전란 그리고 군사정부
3.3. 신관동 시대의 개막
3.4. 발령적체와 국가고시안 파동
4. 국립공주대학교
4.1. 통합의 역사
4.2. 최초와 혁신의 역사



1. 개요[편집]


파일:공주대역사.jpg
국립공주대학교 약사


국립공주대학교 개교 70주년 기념영상 (2018)

국립공주대학교는 1948년 개교한 공주사범대학이 90년도 일반대학으로 개편, 91년도 종합대학으로 승격한 대학교이다. 이후 92년도 예산농업전문대학, 01년도 공주문화대학, 05년도 천안공업대학과 통합하여 지금의 형태를 갖추었었다.[1]


2. 역대 총장[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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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공주사대마크.jpg 공주사범대학 학장
제1-2대
김연창
제3대
임한영
제4-6대
김영돈
제7대
강명경
제8대
민병조
제9-10대
박재규
제11대
이화영
제12대
안승주
1991년 종합대학으로 승격
파일:공주대학교 엠블럼.svg 국립공주대학교 총장
제1대
안승주
제2대
이상우
제3대
오제직
제4대
최석원
제5대
김재현
제6대
서만철
제7대
원성수
제8대
임경호





제8대 국립공주대학교 총장
임경호
林敬昊 | Lim Kyeong Ho


파일:임경호(1964).jpg

출생
1964년 4월 20일 (60세)
종교
불교
재임기간
제8대 국립공주대학교 총장
2023년 6월 5일 ~ 현재
학력
서울시립대학교 (환경공학 / 학사)
한국과학기술원 (토목공학 / 석사)
한국과학기술원 (토목공학 / 박사)
경력
국립공주대학교 스마트인프라공학과 교수
Kyoto University 방문교수
공주대학교 방재연구센터 소장
Penn state University 방문교수
대한환경공학회 대전·세종·충청지회 회장
한국도시환경학회 편집위원장
공주대학교 산학연구본부장 및 산학협력단장
공주대학교 FAIR 사업단 단장
제8대 국립공주대학교 총장

파일:공주대학교 엠블럼.svg 국립공주대학교의 역대 총장
교명
대수
이름
임기
비고
공주사범대학
제1~2대 학장
김연창
1948. 08. ~ 1960. 06.

제3대 학장
임한영
1960. 08. ~ 1963. 10.

제4~6대 학장
김영돈
1963. 11. ~ 1973. 12.

제7대 학장
강명경
1973. 12. ~ 1976. 05.

제8대 학장
민병조
1976. 06. ~ 1980. 06.

제9~10대 학장
박재규
1980. 06. ~ 1986. 02.

제11대 학장
이화영
1986. 03. ~ 1990. 02.

공주대학
제12대 학장
안승주
1990. 03. ~ 1991. 02.

공주대학교
초대 총장
1991. 03. ~ 1995. 02.
제2대 총장
이상우
1995. 03. ~ 1998. 03.

제3대 총장
오제직
1998. 06. ~ 2002. 06.

제4대 총장
최석원
2002. 06. ~ 2006. 06.

제5대 총장
김재현
2006. 06. ~ 2010. 06.

제6대 총장
서만철
2010. 06. ~ 2014. 03.

제7대 총장
원성수
2019. 05. ~ 2023.05

제8대 총장
임경호
2023. 06. ~ 현재



3. 공주사범대학[편집]


공주사범대학
公州師範大學
Kongju National Teachers College
[2]

파일:공주사대 초기 로고.png
초기 교표
파일:공주사대 로고.png
후기 교표
분류
4년제 단설 사범대학
위치
반죽동 캠퍼스 (1949~1979)[3]
충청남도 공주시 봉황로 75
신관캠퍼스 (1969~1990)
충청남도 공주시 공주대학로 56
존속 기간
1948년 7월 31일 ~ 1990년 2월 29일


3.1. 사범교육의 효시[편집]


파일:공주사대 반죽동 캠퍼스.gif
초기 반죽동 캠퍼스 전경

대전충남세종권역 최초의 정규대학인 공주대의 역사는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던 1948년까지 올라간다.[4] 해방 이후 공주여자사범학교 교장과 지역민들은 사범대학을 설치하고자 노력 했으며, 당시 서덕순 도지사가 사범대학건립추진위원회를 설치하고 전도 각군에서 분담 모금함으로써 가시화시켰다. 이에 의하면 공주사대의 설립은 단순한 중앙정부의 정책이 아니라 도민의 열망과 후원, 충남도의 착안과 노력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으로 그 의미가 매우 크다. 특히 오늘날의 충남 유일의 국립종합대학이란 위상을 생각할 때 더욱 그러하다.

이는 식민교육을 벗어나 새롭게 민주교육을 하고자 했던 문교부의 뜻과 맞아 1948년 7월 31일 승인을 얻어 2년제 도립 공주사범대학이 개교하였는데,[5][6] 이것을 학교는 공식적인 개교년도로 보고있다. 당시 국내에서 정식 사범대학서울사대, 대구사대 그리고 공주사대이었기에 이 세 대학을 지금 사범대학 체제의 효시로 일껃는다. 과거에는 국립대학 사범대학을 나오면 교사로 의무적으로 임용이 되었고, 따라서 가장 정원이 크며 오래된 공주사대 출신 교육인들이 지금도 전국적으로 많이 분포해 있는 편이다.

대전의 지역인사들에 의해 당시 도청이 이전한지 14년이 넘던 대전시(현 대전광역시)에 사범대학을 설치하자는 요구도 있었으나, 교사(시설)와 교원(교수진)이 부족하기에 이에 걸맞는 돈을 주지 않을거면 어렵다고 단언하자 포기하였다고 한다. 따라서 인프라가 어느정도 갖추어진 공주에 설립하기로 결정하여 초기에는 공주여자사범학교(현 공주교대) 교장과 초대 공주사범대학 학장이 같았고 부지도 공유했었다. 사실 이와 같은 규모의 인프라는 당시 대전의 실정으로는 어려운 일이었다.

파일:공주사범대학 반죽동 캠퍼스 정문.png
공주사범대학 반죽동 캠퍼스 정문 (1961년)[7]

개교 1년 후인 1949년 11월 3일 구 충청남도청[8] 자리이자 현재의 공주대학교사범대학부설고등학교가 위치한 반죽동 캠퍼스로 옮겼다. 지금은 잘 상상하기 어렵지만, 이곳에서 30여년을 보냈기에 적지 않은 시간을 머물렀던 것이다. 이는 초기 축제를 봉황축제로 불렀다는 것에서도 알 수 있는데 뒷산이 봉황산이었기 때문이다. 현재도 공주사대부고에서는 이 전통을 이어가고 있다고 한다.


3.2. 전란 그리고 군사정부[편집]


파일: 공주사대 구본관.png
공주사범대학 구 본관 (반죽동 캠퍼스)

1950년 제1회 졸업식이 거행되었고 한국전쟁의 발발 직전인 당해 6월에는 국립 공주사범대학으로 이관되었으나, 교사가 전란에 의해 파괴되는 등 대학 운영은 정지 상태가 되었다. 1951년 3월 15일 학장의 공관을 사무실로 사용하고 대전지방법원 공주지원 청사 1층을 강의실로 빌려 쓰는 등의 형태로 겨우 강의를 다시 시작하였다. 1953년에는 교육실습을 위해 캠퍼스 내부에 남녀공학의 부속중학교를 설립했다.

전쟁이 끝나고 빠르게 정비에 들어갔다. 1954년 4년제 사범대학으로 전환되었고, 이점이 당시에는 학사 자격이 나오지 않던 지금의 교육대학들과 결정적인 차이점이었다.[9] 그래서 교대 졸업생들이 본교로 많이 진학하여 공부했는데 그 대표적인 예가 나기연 제5대 전주교육대학교 총장이다. 1956년에는 부속고등학교 설립을 인가받았다.[10]

파일:4.19혁명 당시 공주사대.jpg
4.19 혁명 당시 시위에 참여한 모습 (1960년)

1960년 4.19 혁명 당시 서울에서 일어난 대학생 시위에 연대하여 시위에 참여하였고, 4월 26일에는 충남대, 대전대(현 한남대), 그리고 대전의 여러 고등학교 학생 등 총 5,000여명이 연합하여 대전에서 격렬하게 시위를 벌였다. 당시 대전 충남권 대학에서 공주사대는 주도적인 위치에 있었고, 민주주의를 위한 이러한 행동은 70~80년대도 이어지게 된다.

파일: 공주사대 졸업식.png
제11회 공주사범대학 졸업식 (1961년)

1961년에는 교원연수원이 개설되어 교원양성뿐만 아니라 현직 교원들을 위한 교육까지 진행하기 시작했다. 61년 8월에는 대학 정비 방안으로서 대학개편에 착수하였다.[11] 그리고 62년 2월에 5.16 군사정부는 사범대학의 축소를 지시한다. 문리과 등의 일반학과와 중복되는 경우에는 폐지한다는 발상에서 비롯되었다. 때문에 물리, 화학, 생물은 통합되고 국어, 영어, 수학 등이 폐과되는 등의 수난을 겪었으나 대신 사회, 체육 등이 이 시기 생겨나기도 했다.

당연히 학교와 학생은 이에 반발하였고 폐지 철회 운동을 벌린 끝에 64년부터 학생을 다시 모집하게 되었으나 이번엔 새롭게 만든과를 폐과 시키는 등 정책의 난맥이 이어졌다. 하지만 다행이도 부활 운동에 힘입어 65년 2월 모든과가 복과하게 되었다.


3.3. 신관동 시대의 개막[편집]


파일:공주대 신관캠 60년대.png
공주사범대학 신관동 캠퍼스 이전 (1969년)

1966년 5월 31일 현 신관동 국유지를 교지로 확정하고 1969년 8월 15일 현재의 신관캠퍼스로 대학본부를 포함한 4개 학과(국어교육과,사회교육과,수학교육과,교육학과)를 이전하였고, 차례로 인문사회계열 학과부터 이전하기 시작했다. 공사 진행에는 시간이 많이 소요 되었기에 79년 9월에서야 완료되었는데 10년 동안 복수의 캠퍼스를 운영한 것이다. 국립공주대학교의 이원화캠퍼스의 역사는 이 때부터 시작했는지도 모른다.

파일:공주사범대학 정문.png
공주사범대학 신관캠퍼스 정문 (1973년)[12]

1976년에는 오늘날의 공주교육대학교인 공주교육대학과 통폐합 논의가 있었다. 이 논의는 두 대학의 학장과 교수단에서 합의되었고, 강남 지역에 위치했던 공주교육대학은 강북 지역인 공주사범대학 위치로 통합이전을 추진하였다. 하지만 당시 4년제 사범대학과 2년제 교육대학이 충돌하는 문제가 있어서 당시 문교부(현 교육부)에서 반려하였고, 교원대 설립이전까지는 중등교원 양성과 초등교원 양성이 법적으로 구분되어 있는 당시 법제상의 문제가 있어서 실현되지는 못했다.

1980년대는 본교가 양적으로 성장하던 시기이다. 교지의 규모부터 지금의 사범대학 건물들은 이 즈음 지어진 것들이 대다수로 90년 중후반부터 지어진 타단과대학들보다 더 오래되었다. 최근에야 엘리베이터 설치 등 리모델링을 대대적으로 했지만 그래도 내부에서 보면 낡은 티가 난다.

80년 11월에는 교육대학원이 설치된다. 30년 넘는 교원양성대학치고는 오히려 늦은 셈이다. 이를 시작으로 학과의 신설과 증원이 이루어져서 82,83년도에는 입학정원 1,183명이고 84년 총 4,320명의 학생이 다녔는데, 나름 국내 최대를 자랑하는 오늘날 사대 정원과 비교해도 2,3배에 이르는 학생 수이다. 하지만 졸업정원제의 실시와 다시 정원 감축으로 하향곡선을 그리게된다.

파일:공주사범대학 시위.png
공주사범대학 학원 민주화 투쟁 (1982년)

70,80년대는 민주화의 열망이 강한 때였기도 했는데 금강회 사건 등이 대표적이다. 이런 학원 민주화는 학생들의 구속과 제적, 교내 출입제한, 휴교조치로 이어졌지만, 이런 선배동문들의 노력이 있었기에 오늘날의 민주사회가 있었음을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3.4. 발령적체와 국가고시안 파동[편집]


파일:학생시위대와 교무과장의 대담.png
공주사범대학 국가고시안 반대 시위 (1986년)

1986년 5월 12일 목련사 앞 잔디밭(당시 민주광장이라 불렸으며, 현 중앙도서관 자리)에서 열린 학생총회에서 ‘교원적체 문제의 해소’, ‘임용시험 실시설에 대한 학교 측 반대 입장 표명’, ‘졸업정원제 폐지’, ‘학생 공식기구의 인정과 활동 보장’ 등 9개 항의 요구사항을 결의하고 시위를 벌였다. 도서관 점거와 철야농성 끝에 5월 14일 학교는 위와 같은 요구사항에 대하여 긍정적인 답변을 내놓았고 학생들은 해산하였다.

하지만 2학기가 시작되자 학내 상황은 매우 격화 되었다. 정치,교육 문제에 대한 대자보가 연이었고 9월 10일 ‘어용교수의 퇴진’, ‘교원적체 해소’ 등의 구호를 외치며 시위를 시작하였다. 다음날 11일 오전 교무과장실을 점거농성하였고 학내 시위는 진행되었다. 결국 소방차와 경찰이 학내에 진입하여 연행되었고 이것이 도화선이 되어 학생들과 전경들 간의 투석전까지 일어났다.

학생들은 교문 밖을 나와 가두시위를 벌렸고 연행된 학생 석방을 외치면서 화염병과 돌을 던져 신관파출소의 유리창과 출입문은 파손 되었다. 이어 학내로 철수한 학생들은 철야 농성에 들어갔고 이에 따라 교문 주변에서 대기중이던 전투경찰과 교문 주변에서 치열한 공방전을 벌였다. 이 때 학내보도 블럭을 깨뜨려 투석전에 이용하였는데 덕분에 보도공사에 보도블럭을 사용하지 않아 학생들은 00년대 중후반까지도 불편함을 겪었다.

이러한 시위는 민주화 운동, 이념투쟁 및 교원적체 문제등의 현안과 연결되면서 계속적으로 되풀이한다. 87년이 되자 보다 조직적으로 전개되는데 이는 교원임용의 국가고시 제도의 체택 때문이다. 더 이상 학내문제가 아닌 국립 사범대학 전체의 문제가 되었고 학생회에서는 전국 국립사대학생연합(약칭 전사련)을 결정하였다. 5월 7일 전남대에서의 발대식을 통해 공동위원장에 공주사대 류융주 학생회장을 선출하였고, ‘교원대학 철폐’,[13] ‘국가고시 철회, ‘발령 적체 해소’ 등의 이슈를 걸고 수업거부를 결의 하였다.

때마침 5월 6일에서 8일까지 제18회 웅진대동제가 열렸는데 7일과 8일 본 공연 이후 학생들은 횃불행진을 외치며 가두 진출을 하였고, 축제가 끝나자 전사련의 결의에 의하여 이루어진 수업 거부 등이 캠퍼스를 뒤덮었다. 11일 긴급총회로 결정된 수업 거부는 12일부터 시작하여 14일간 지속되었다. 사태 이후로 일부 교수는 경질 되었고 정부도 6.29 선언을 통해 학원사태로 인한 제적자들의 복학을 허가한다.

파일:공주사대 임용정책 반대 시위.png
공주사범대학 교원양성종합대책안 반대 시위 (1989년)

국립사범대학은 교원양성을 위한 목적으로 세워졌고, 졸업 후 교사발령과 등록금 인하 등의 혜택을 주었다. 하지만 무리한 교육정책과 사범대학의 남설과 학생들의 무분별한 증원은 교사자원 과잉을 초래했고, 결국 89년 9월 6일 문교부는 교원양성종합대책안을 발표한다. 80년대 중후반부터 끊임없이 논란되었던 임용고시가 정부의 정책으로 공식 채택된 것으로 이는 당장 90년도부터 적용하기로 결정되어 또 한 번 대규모 시위를 일으켰다.#

파일:공주사대 국가고시안 파동.png
공주사범대학 일반대학 변경 반대 시위 (1989년)

1990년까지 국내 유일의 단설 사범대학이었던 공주사대는 이와 같은 흐름에 교명을 ‘공주사범대학’에서 일반대학인 ‘공주대학'으로 개편을 한다. 이부분은 비록 학생들의 거센 반발을 일으켰으나 시대적 요구로 인해 불가피한 부분이었으며, 학교 당국의 미래지향적 결단이었다. 그리고 이듬해인 1991년 지금의 종합대학인 공주대학교로 승격되었다.


4. 국립공주대학교[편집]


공주대학
公州大學
Kongju National University

파일:공주대학 로고.png
분류
4년제 일반대학
위치
충청남도 공주시 공주대학로 56
존속기간
1990년 3월 31일 ~ 1991년 2월 28일

국립공주대학교
國立公州大學校
Kongju National University

파일:공주대학교 엠블럼.svg
분류
4년제 종합대학
위치
신관캠퍼스 (1969~현재)
충청남도 공주시 공주대학로 56
예산캠퍼스 (1992~현재)
충청남도 예산군 예산읍 대학로 54
옥룡캠퍼스 (2001~현재)
충청남도 공주시 우금티로 753
천안캠퍼스 (2005~현재)
충청남도 천안시 서북구 천안대로 54
세종캠퍼스(예정)
세종특별자치시 집현동 58
존속 기간
1991년 3월 1일 ~ 현재


4.1. 통합의 역사[편집]


파일:공주대학교 현판식.png
공주대학교 현판식 (1991년)

1991년 동시에 종합대학이 된 국립대학은 많이 있어도 그 대다수가 과거 사범학교,[14] 농업학교 등 중등교육기관이었거나[15] 전문학교로 시작했던 학교들이[16] 이후에 산업대학 등으로 승격되었다가 일반대학이 된 경우가 대부분이다. 설립부터 대전충남권 최초의 정규대학으로 시작한 공주대학교는 과거위상 자체가 다르다 할 수 있다. 따라서 공주사대 출신 동문들 중에선 이후 기술할 통합 학교들을 공주대로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도 꽤 많을 정도이다.[17]

파일:예산농전 로고.png
파일:공주문화대학로고.png
파일:천안공업대학 로고.png
예산농업전문대학 교표
공주문화대학 교표
천안공업대학 교표

종합대학 승격 이후의 역사는 통합의 역사라해도 과언이 아닌데 국가의 국공립대학 통합정책에 의거 충남소재의 국립 전문대학을 모두 통폐합한 것이다. 1992년 예산농업전문대학(現 예산캠퍼스)[18]을 시작으로, 2001년에는 공주문화대학(現 옥룡캠퍼스)[19]을 통합했으며, 2005년에는 천안공업대학(現 천안캠퍼스)[20]까지 통합시켰다.[21]


따라서 공주대는 위의 표에서도 보이듯이 단과대학 별로 그 역사가 다르다는 특징이 있다. 이런 형태의 대학은 앞서 말한 서울대경북대 등이 대표적으로 나타나며, 어찌보면 서울사대, 대구사대, 공주사대 모두 타 단과대학과 합쳐지는 식으로 종합대를 구성한셈이다. 이리하여 2005년부터 신관캠퍼스(사범대학, 인문사회과학대학, 자연과학대학), 예산캠퍼스(산업과학대학), 옥룡캠퍼스(영상보건대학), 천안캠퍼스(공과대학)라는 국내 최초의 3개지역-4캠퍼스 체제에 이른다.

2009년 9월에는 옥룡캠퍼스의 영상보건대학을 신관캠퍼스공과대학이 위치하던 곳으로 이전하고, 외국인 교육을위한 전문캠퍼스로 바꾸었다. 이로써 공주에 있는 신관캠은 진짜 '공주'들의 도시가 되었다. 남학생비중이 높은 공과대학은 천안으로 가고 여학생 비중이 높은 영상대, 보건대 캠퍼스가 왔으니… 게다가 원래 사범계열, 인문계열은 여자가 많았다. 그리고 2012년엔 영상보건대학을 예술대학과 간호보건대학으로 분리했다.

이렇게 3개의 전문대학을 합쳤음에도 부족했는지 한국철도대학한국재활복지대학마저 통합 하려했으나 이 둘은 불발로 돌아갔다. 이후 공주대는 충청남도와 협약을 맺고 도청이 이전한 내포신도시에 일부 대학원 및 기타시설, 그리고 인문사회과학대학을 이전한다는 로드맵을 발표한다. 장기적으로 2025년까지 이전할 계획이라고 한다…고 했으나 최근의 움직임을 보면 의과대학을 설립하려는 목적으로 보였다.[22] 이렇게 되면 내포(홍성) 캠퍼스가 새로이 등장하게 될 것이었으나 현재로선 가능성이 높지 않다.

또한 이전에 세종특별자치시에 캠퍼스 입주를 신청했으니 이것까지 승인될 경우 내포캠퍼스까지 합쳐 무려 6캠퍼스 체제(…) 그러나 세종시에 국립대 캠퍼스를 설치하지 않겠다는 교육부(당시 교육인적자원부)의 정책 때문에 수포로 돌아갔다. 하지만 법령이 개정되고 세종시에 국립대학 설치가 허용되면서 세종시 입주를 신청하여 2021년 2월 세종 공동캠퍼스 입주가 확정됐다. 이로서 5캠퍼스 체제를 구축하게 되었다.


4.2. 최초와 혁신의 역사[편집]


공주대의 역사는 현재 70년, 공주농림학교 시기부터 하면 110여년에 이르지만 종합대학으로의 역사는 91년도부터로 그 역사가 길다고 할 수는 없다. 하지만 지난 30년간 여타 후발 국립대보다 빠르게 성장해 왔으며, 규모면에서는 이미 몇몇 거점국립대학마저도 넘어섰다.

그러나 단순히 학생 정원이 늘어난다고 학교가 발전한다 말하기는 어렵다. 공주대는 규모가 클 뿐만 아니라 서울대경북대에 이은 사범대학의 효시이자 국내에서 3번째로 농학교육이 이루어지도 했으며, 국내 최초로 대학 교육과정에 만화전공과[23] 특수동물 전공 그리고 응급구조학전공을[24] 도입하였다. 이외에도 국립대학 최초로 영상 관련 융·복합 학과인 영상학과를 비롯해 문화재보존과학과, 외식상품학과와 국립대학 최초이자 현재도 유일한 게임디자인학과, 디지털융합금형공학과, 관광영어통역학과, 보건행정학과, 의료정보학과 등도 보유 하고 있다. 이처럼 국립대학으로는 그 동안 개설하지 않고 사립대학에 의존했던 분야들 마저 도전해 학생들의 부담을 덜고 국가기관으로써의 학문적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이런 학과들 외에도 국립 최초의 유치원[25] 국립국제교육원 위탁 재외동포 교육과정인 한민족교육문화원을 개원하였고, 최근에는 대한민국 최초의 국립대학 부설특수학교도 설립 추진 중에 있다. 또한 국립대학 최초의 복수학위 제도를 운영하고 했으며,[26] 충청도 최초로 공학교육인증을 도입하는 등 질적으로도 내실화를 도모하고 있다. 따라서 당연히 건축학교육인증이나 간호교육인증평가, 보건의료정보관리교육평가인증, 동물보건사양성기관평가인증 등의 등의 대학인증들은 이미 받은 상태이다.

아울러 각종 정부재정지원사업면에서도 기존의 교육역량강화 지원사업, CK-1 사업, BK21+ 사업그 후속 4단계 사업, LINC+ 사업, 15년 연속 고교교육기여대학 사업 선정 등 주요 국책사업을 비롯하여, 최근에도 각종 다양한 사업을 유치 및 수행하며 주요 국립대학 중 하나로서 역할을 다하는 중이다.

이런 노력 덕분에 종합대학으로서의 역사는 비교적 짧은 편이면서 양적으로는 전국 40여개의 국립대 가운데 이미 10위권 규모에 도달했고, 질적으로도 성장하여 SCIE급 논문의 수가 매해 400여 편식[27] 꾸준히 나올 뿐만 아니라 각종 지표에서도 국가중심국공립대학교 18개교들 중에서 최상위에 드는 성과를 내고있다.[28]

2023년 아시아 651-700위
2022년 아시아 601-650위
2021년 아시아 601+위
2020년 아시아 451-500위
2019년 아시아 451-500위

2023년 논문점수 국가중심국공립대학교 4위,[29] 세계 1,323위
2022년 논문점수 국가중심국공립대학교 4위,[30] 세계 1,299위

2023년 국가중심국공립대학교 5위,[31] 세계 1,754위
2021-22년 국가중심국공립대학교 4위,[32] 세계 1,588위
2020-21년 국가중심국공립대학교 4위,[33] 세계 1,574위
2019-20년 국가중심국공립대학교 3위,[34] 세계 1,512위

2023년 국가중심국공립대학교 5위,[35] 세계 1,916위

2023년 국가중심국공립대학교 3위,[36] 세계 1,532위
2022년 국가중심국공립대학교 3위,[37] 세계 1,471위
2021년 국가중심국공립대학교 2위,[38] 세계 1,272위
2020년 국가중심국공립대학교 3위,[39] 세계 1,737위

2022-23년 국가중심국공립대학교 4위,[40] 세계 1,627위
2021-22년 국가중심국공립대학교 4위,[41] 세계 1,598위
2020-21년 국가중심국공립대학교 4위,[42] 세계 1,595위
2019-20년 국가중심국공립대학교 4위,[43] 세계 1,499위

2023년 국가중심국공립대학교 2위[44]
2022년 국가중심국공립대학교 7위[45]
2021년 국가중심국공립대학교 6위[46]
2020년 국가중심국공립대학교 6위[47]
2019년 국가중심국공립대학교 2위[48]

게다가 충청남도 유일의 국립종합대학이니 연구나 사업적인 면에서 사실상 충청남도 지역의 거점 역할을 도맡아서 하는 형편이다.[49] 이런 특성 때문에 대전충남에서 유일하게 지역 할당제를 적용받는 국립종합대이기도 했으나,[50] 최근 혁신도시법의 개정으로 충청권 광역화가 되어 충청남도뿐만 아니라 대전광역시, 세종특별자치시, 충청북도의 공기업과 공공기관에서 일정비율 이상을 의무채용을 적용받을 수 있게 되었다.

현재의 국립공주대학교는 충남과 세종의 대표 국립대학을 표방하며, 새롭게 행정수도로 떠오르는 세종특별자치시공동캠퍼스를 조성하는 등 함께 성장하고 있다.##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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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간혹 공주사대가 예산농대와 천안공대를 합쳐서 종합대학인 공주대가 되었다는 말을 하는 사람이 있는데, 이는 명백하게 틀렸다. 공주대는 공주사대가 개편한 대학이고 이후 인근 국립 전문대를 흡수 통합한 형태이다. 즉, 91년 이미 종합대학 승격한 상태로 92년부터 통폐합을 시작한 것.[2] 파일:Screenshot_20220824-022030_NAVER.png 당시 공주사범대학의 영문명이 Kongju National Teachers' College였음을 알 수 있다. 이후 80년대 후반부터는 영문명 Kongju National Teachers University도 병용되었다.[3] 개교후 1년까지는 공주사범학교(현 공주교대) 부지를 공유함[4] 이후 합병되는 산업과학대학을 포함하면 공주농림학교의 개교인 1910년까지 거슬러 생각할 수도 있다.[5] 정확하게 말하면 정규대학이자 단기고등교육기관인 초급대학으로 분류된다. 이는 현 전문대학의 직접적인 전신이라 할 수 있는 전문학교고등전문학교와는 다르다. 같은 예시로 당시 신흥대학(현 경희대학교 전신), 청주농과대학(현 충북대학교 전신) 등이 있었다.[6] 참고로 이 당시 설립된 공식적인 ‘대학’ 중 현존하는 대학교는 서울대, 부산대, 경북대, 전남대, 강원대, 전북대, 경상대, 연세대, 고려대, 이화여대, 한양대, 성균관대, 숙명여대, 중앙대, 동국대, 단국대, 국민대, 가톨릭대, 청주대, 동아대, 영남대, 조선대 등 공주대를 포함하여 23개교 뿐이다. 이들 이외에 이전 역사를 주장하는 대학들은 당시 정부로부터 공인 받은 대학이 아닌 전신 학교들을 끌어들인 경우이다.#[7] 일제강점기 당시 충남도청 정문이였던 금남루가 있던 곳으로 50년대 금남루를 철거하고 정문을 신설하였다. 신관동으로 캠퍼스 이전한 이후에도 공주사대부고와 부중의 정문으로 사용되다 옛 충청감영 문루 복원사업으로 2018년 복원된 문루 옆으로 이전하여 보존하고 있다.[8] 조선시대 충청 감영 자리이자 1932년까지 충남도청이 존재하던 곳이다.[9] 교육대학은 1963년에야 전문대학으로 승격되었으며, 1982년 전까지는 학사 자격조차 나오지 않았다. 또한 현재의 교육대학교도 종합대학이 아니기 때문에 일반대학원을 운영하지 못하며, 학술 석박사 학위를 수여하지 못하는 등 연구가 제한된다.[10] 1953년 설립된 부속중학교 학교 급간을 고등학교로 개편했다. 부속중학교는 4년 뒤인 1961년에 재개교한다.[11] 당시 단위 지역 내에 설치되어 있는 국립대학의 단과대학과 동일 또는 유사한 국공립 대학이 있을 때는 이를 폐지한다는 원칙도 내세웠다. 대표적 예시가 충남대 + 충북대 = 충청대학교였다. 공주사대도 이후 충청대랑 합칠 수순이었으나, 물리적 한계에 달해 충청대는 합친지 겨우 1년 지나 63년에 다시 분리된다.[12] 현재 후문으로 사용되고 있는 곳이다.[13] 왜 교원대(84년 대통령령 공포)가 여기 들어가나 의문을 가질 수 있지만 정부가 별도의 교원양성기관으로 기존의 사범대학과 교육대학과의 관계와 차별성이 충분히 정리되지 않은채 정치적으로 설립하였다는 점에서 논란이 없을 수 없었다. 더군다나 81년 제정된 교육세법은 82년부터 86년까지 5년간 1조 5천억원을 교육환경을 개선하고자 하였던 시한부 목적세임에도 불구하고 목적 이외의 용도로 전용되었다는데서 문제 제기가 이루어진 것이다.[14] 사범대학과는 다르다. 초등교원 양성을 위한 중등학교로 지금의 마이스터고랑 유사한 형태였다. 자세한건 교육대학 문서 참조.[15] 사범학교였던 경우는 군산대, 목포대, 안동대, 강릉원주대 등이 있고 농업학교였던 경우는 서울시립대, 순천대, 한경대, 경남과기대 등이 있다.[16] 수산전문이었던 부경대나 공업전문이었던 서울과기대, 한국교통대, 한밭대 등이 대표적이다.[17] 이점은 서울대학교와 비슷하다 할 수 있는데 경성제국대학 출신들 중에선 같이 합쳐진 전문학교들에 대한 반발이 컸다고한다. 관련해선 국대안 파동 참조.[18] 통합 당시 예산농대에는 농업과, 원예과, 축산과, 토목과, 임업과, 식품제조과, 농업경영과, 농촌지도과, 가정과, 농업기계과, 조경과, 낙농과, 식물보호과 등 총 13개 학과가 존재했었음.[19] 통합 당시 공주문화대에는 간호학과, 유아교육과, 산업공예디자인과, 만화예술과, 의료보험관리과, 컴퓨터정보과, 산업영상과, 응급구조과, 관광영어통역과, 관광과, 애완동물과, 운동과학과, 광전자통신과, 귀금속디자인가공과 등 총 14개 학과가 존재했었음.[20] 통합 당시 천안공대에는 기계과, 전기과, 컴퓨터과, 제어계측과, 금형설계과, 플랜트설계과, 신소재열공학과, 정보통신과, 전자과, 공업디자인과, 신소재응용화학과, 건축과, 토목과, 자동차과, 시각정보디자인과, 환경공업과 등 총 16개 학과가 존재했었음.[21] 간혹 공주사대가 예산농대와 천안공대를 합쳐서 공주대가 되었다는 말을 하는 사람이 있는데, 이는 명백하게 틀렸다. 공주대는 공주사대가 개편한 대학이고 이후 인근 국립 전문대를 흡수 통합한 형태이다. 즉, 91년 이미 종합대학 승격한 상태로 92년부터 통폐합을 시작한 것.[22] 실제로 학교측에서 학생들을 대상으로 의과대학 유치를 위한 서명운동에 동참하도록 독려했었다.# [23] 일반대학원에 만화학 석박사 과정이 있는건 지금도 공주대뿐이다.[24] 응급구조학의 석사 및 박사과정 역시 전국 최초로 개설하였다.[25] 지금도 국립 유치원은 한국교원대강릉원주대 그리고 공주대뿐이다.[26] 2+2, 3+1제도로 국내에서 2(또는 3)년 공부하고 해외에 2(또는 1)년만 유학하면 국내와 해외 학위를 모두를 받을 수 있는 제도이다.[27] 14년 436편, 15년 379편, 16년 411편, 17년 419편, 18년 425편 등.[28] 이는 의과대학이 없는 국립대학 중에서 한 손 안에 든다고 볼 수도 있다. (지거국은 모두 의대가 있다.) 참고로 의대의 유무에 따라 연구성과 지표 차이가 크다.[29] 부경대 30위, 서울과기대 37위, 서울시립대 43위, 공주대 50위.[30] 부경대 30위, 서울과기대 39위, 서울시립대 44위, 공주대 49위.[31] 서울시립대 32위, 부경대 38위, 서울과기대 46위, 강릉원주대 52위, 공주대 53위.[32] 서울시립대 28위, 부경대 37위, 서울과기대 48위, 공주대 49위.[33] 서울시립대 31위, 부경대 37위, 서울과기대 49위, 공주대 50위.[34] 서울시립대 33위, 부경대 38위, 공주대 50위.[35] 서울시립대 14위, 부경대 31위, 서울과기대 36위, 강릉원주대 41위, 공주대 53위.[36] 부경대 13위, 서울시립대 29위, 공주대 39위.[37] 부경대 24위, 서울시립대 27위, 공주대 36위.[38] 서울시립대 25위, 공주대 27위.[39] 서울시립대 27위, 서울과기대 42위, 공주대 44위.[40] 부경대 31위, 서울시립대 39위, 서울과기대 42위, 공주대 48위.[41] 부경대 31위, 서울시립대 41위, 서울과기대 43위, 공주대 48위.[42] 부경대 32위, 서울시립대 41위, 서울과기대 43위, 공주대 50위.[43] 부경대 29위, 서울시립대 39위, 서울과기대 41위, 공주대 49위.[44] 서울시립대 31위, 공주대 37위.[45] 서울시립대 28위, 서울과기대 33위, 부경대 37위, 한국교통대 39위, 금오공대 45위, 군산대 51위, 창원대 52위, 공주대 53위.[46] 서울시립대 28위, 서울과기대 41위, 부경대 45위, 목포대 46위, 창원대 49위, 공주대 54위.[47] 서울시립대 27위, 서울과기대 36위, 부경대 40위, 금오공대 45위, 한국교통대 46위, 공주대 49위.[48] 서울시립대 28위, 공주대 37위.[49] 충남대대전광역시에 위치해 있다. 대전, 충남, 세종을 묶어서 하나의 권역처럼 생각하지만 이들은 법적으로 각자 다른 광역자치단체이다. 이는 지역별로 받는 국책사업에서 대전에 소재한 충남대가 충남지역에 참여하기 어렵다는 것을 의미한다. 참고로 거점국립대학 자체는 법이나 행정적 기준이 있는 공식 분류가 아니다. 단순한 총장협의체일 뿐. 공주대나 충남대나 똑같이 장관급 총장이 임명된 4년제 국립 종합대학이다.[50] 2020년 이전까지 대전광역시는 지역 할당 대상이 아니었으므로 대전 소재 대학들은 모두 지역 할당을 받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