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무라 마사히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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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무라 마사히코
木村政彦(きむら まさひこ / Masahiko Kimura

국적
파일:일본 국기.svg 일본
출생
1917년 9월 10일
구마모토 카와시리정[1]
사망
1993년 4월 18일[2]
학력
타쿠쇼쿠대학
종목
유도
신체
170cm, 85kg
1. 개요
2. 선수 경력
2.1. 프로레슬링계 진출
3. 기타




1. 개요[편집]


일본유도 선수, 프로레슬러.


2. 선수 경력[편집]


1930~40년대 유도계의 최강자로 불렸으며 브라질리언 주짓수종합격투기에서는 기무라라 불리우는 기술로도 이름이 알려져 있다. 기무라 본인이 만든 것은 아니고 본래 유도에 있던 '팔 얽어 비틀기(腕緘, うでがらみ)' 기술이지만 1951년에 벌어진 엘리오 그레이시와의 대결에서 이 기술을 시전하면서 주짓수계에서 그의 이름이 붙여 불려진게 그 시작이다.

브라질리언 주짓수로도 유명한 그레이시 가문의 엘리오 그레이시와의 대결은 1951년 상파울로 신문사의 초청으로 브라질에 들어와 있던 상황에서 벌어졌는데, 이전에도 가토를 비롯한 유도가들을 꺾은 엘리오와 당대 유도계 최강자라는 기무라의 대결은 브라질 대중의 관심을 집중시켰으며, 관객만 2만 명에 브라질 대통령까지 보러 온 대규모 시합이었다고 한다. 여기서 타격없는 그라운드 승부를 벌이던 와중 기무라는 13여 분만에 팔 얽어 비틀기로 엘리오 그레이시의 양 팔을 부러뜨렸고 엘리오는 패배를 인정하지 않았으나 세컨드 측에서 타월을 투척하여 TKO로 승리했다. 그 이후 그에 대한 존경심 차원에서 팔 얽어 비틀기 기술을 기무라로 부르기 시작했다.



경기 영상.

엘리오 그레이시는 이 대결 이전까지 무승부는 있어도 패배한 적은 없던 강자였던지라 지금까지도 기무라의 강함을 논할 때 이 에피소드가 빠지지 않고 나온다. 물론 당시 엘리오 그레이시는 나이도 많고 몸이 쇠락해져갈 시기였고 기무라는 가장 신체적으로 좋을 때였기는 했다. 그러나 엘리오 그레이시는 이전 경기 내용도 보면 압도적인 승리만 있는 건 아니었고, 무승부도 많았다. 일본 유도가들과의 대결에서도 기절까지 시킨 가토를 제외한 나머지 선수들에게는 별로 이긴 적이 없으며[3] 레슬러들과의 대결에서도 많은 무승부를 기록하기도 했다.

다만 여기서 고려해야 할 점은 원래 엘리오는 체격이 왜소하고 몸도 허약해서 형제들 중 누구도 그가 무술로 대성할 거라 생각을 안 했던 사람이란 것이다. 즉, 엘리오는 형제들 중에서도 체격이나 힘은 떨어지는 편이었지만 그걸 기술로 보완하여 싸운 스타일로[4], 강자로서 유명했다기보다는 그런 허약한 체질에서도 강한 상대를 이겨오면서 브라질리언 주짓수에 대한 강함을 널리 알리게 된 인물이라고 보는게 더 옳다. 한편, 기무라는 기술도 뛰어났지만 완력도 동전이나 손가락으로 구겨버리는 괴력의 소유자였다. 참고로 대결 당시 몸무게도 10~30kg대까지 설왕설래가 있긴 하지만 기무라가 앞서긴 했다.

그래도 엘리오 그레이시 입장에서도 별로 손해본 장사는 아닌게, 이때 브라질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키면서 이후 본인의 도장과 유파도 인기를 끌게 된다. 일설에 의하면 기무라도 이때 엘리오의 기술에 감명받아 일본에 돌아가 동료들에게 기술을 알려주기도 했다고. 엘리오의 아들인 호이스 그레이시가 90년대 들어 UFC 초대 챔피언이 되고 브라질리언 주짓수가 전세계에 알려지는걸 보면 격세지감이다.

이후 1959년 브라질의 흑인 발리 투도 선수[5]였던 발데마르 산타나와 그레플링 1승, 무규칙 경기 1무를 기록하기도 했다.


2.1. 프로레슬링계 진출[편집]


1950년대 프로레슬링계에 뛰어들어 당대 일본 프로레슬링계 최고의 스타였던 역도산과 대결하게 되는데, 유도가로 이름을 날리던 그가 프로레슬링계에 진출한건 기무라의 아내가 결핵에 걸리는 바람에 고가의 치료약인 스트렙토마이신(Streptomycin)을 구할 돈이 필요했기 때문이라는 이야기가 있다.[6]

그러나 이때 기무라와 역도산의 대결은 쇼와의 간류지마 혈전이라 불리며 대대적으로 홍보가 되었는데, 문제는 경기 내용이 둘한테 다 별로 안좋은 방향으로 끝나면서 이후 기무라는 몰락의 길을 걷기 시작하고 역도산도 이전의 영웅 이미지가 깎여나가게 되었기에 이들을 언급할 때 빠지지 않는 사건이다. 기타 내용은 항목 참조.


3. 기타[편집]


  • 극진공수도를 창시한 최영의강도관에서 함께 유도를 배웠으며 친구이기도 했다. 최영의는 기무라를 강도관 선배로서 그래플링 타입으로는 자신도 상대가 안 된다고 할 만큼 고평가하기도 했다. 특히 자신이 아는 무도가 중 자신과 동등 혹은 그 이상으로 열심히 수련한 유일한 인물로 평가하기도 했다는걸 보면 지독한 연습광이었던 것으로 보인다.[7] 그래서인지 상기한 역도산과의 대결에서 기무라가 낭패를 당하자 발끈하기도 했다.

  • 1940년 천황친람대회(텐란 시아이)[8]에서 우승한 후 쇼와 덴노에게서 탄토를 선물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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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현 구마모토시 미나미구[2] 폐암으로 사망했다.[3] 그나마 가토와의 대결도 첫번째는 무승부였다. 오노 야츠시하고는 무승부, 타카시에게도 무승부였다.[4] 이런 일화 때문에 엘리오가 오늘날 브라질리언 주짓수의 일대종사로 취급받는 측면이 있다. 본인 스스로도 자신의 체격을 보완하고자 주짓수 가드 기술 등을 열심히 개발했기 때문이다.[5] 격투 기반은 카포에라, 키 182cm, 몸무게 94kg의 선수였다.[6] 방학기 씨의 만화 바람의 파이터에서는 이 부분이 아내가 에 걸렸고 당시 암에 대해 무지한 시절인 데다가 마이신이 만병통치약처럼 취급받던 세상이라 암 치료제 비용을 대기 위해 프로레슬링에 뛰어들었다고 묘사했다. 2차 세계 대전 패전 이후 미국이 개혁 차원에서 일본 학교에서 행해지던 유도 교육을 금지시킨 탓도 있었다. 물론 기무라 정도 되는 위상의 유도가가 그거 때문에 생계가 흔들릴 정도는 아니었겠지만, 어찌됐건 그도 다른 활로를 찾아봐야 했고 그중에 상기한 브라질 출장도 카라시코라는 프로레슬러가 이끌어 홍보차 가게 된 것이라고 한다.[7] 하루에 무려 9시간씩 수련을 했다고 한다.[8] 천황이 친히 관전하러 온 대회를 뜻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