쇼와 덴노 (r20190312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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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축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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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토 확장 계획
레벤스라움 · 스파치오 비탈레 · 대동아 공영권
* 전쟁 도중 추축국에서 연합국으로 전향
# 간접적 지원/지원 여부 논란 있음
+ 괴뢰 국가/정권 및 위성 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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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메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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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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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5대
쇼와
아키히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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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전쟁범죄와 그로 인한 피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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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panese War Crime and Its Victims
A급 전범 (평화에 대한 죄)
A급 전범
사형수

기무라 헤이타로
도이하라 겐지
도조 히데키
마츠이 이와네
무토 아키라
이타가키 세이시로
히로타 고키

A급 전범
복역수

가야 오키노리
고이소 구니아키
기도 고이치
도고 시게노리
미나미 지로
사토 겐료
스즈키 데이이치
시라토리 도시오
시마다 시게타로
시게미츠 마모루
아라키 사다오
오시마 히로시
오카 다카즈미
우메즈 요시지로
하시모토 긴고로
하타 슌로쿠
호시노 나오키
히라누마 기이치로

A급 전범
지정자1

미치노미야 히로히토
나시모토노미야 모리마사
고노에 후미마로
코다마 요시오
고이즈미 지카히코
구즈 요시히사
기시 노부스케
나가노 오사미
니시오 도시조
다니 마사유키
다다 하야오
다카하시 산키치
데라시마 겐
도쿠토미 소호
마사키 진자부로
마츠오카 요스케
사사카와 료이치
사토미 하지메
쇼리키 마츠타로
스마 야키치로
아모 에이지
아베 겐키
아베 노부유키
아오키 가즈오
아카기 고헤이
안도 기사부로
오카와 슈메이
오타니 게이지로
이사하라 히로이치로
이와무라 미치요
하시다 구니히코
혼다 구마타로
혼조 시게루

B · C급 전범 (일반 전쟁범죄, 인도에 반한 죄)
피의자 약 5,700여 명2
범죄 사건
학살 사건
관동 대학살
난징 대학살
마닐라 대학살
밀리환 초 학살
바탄 학살
보르네오 학살
중국 북부 학살
치치지마 학살
파푸아뉴기니 학살

인간 실험
731 부대
규슈대학 생체해부 사건

전시 강간
일본군 위안부
관련 논란
순국7사묘 · 야스쿠니 신사 · 일본의 피해자 행세 · 팔굉일우 기념탑
가나다 순 배열.
* 불기소 피의자, 재판 전 사망자 포함.
* 개별 사건의 중복 피고인까지 합계되었으며, 이 밖에 추축국 피점령지 내 부역자, 기소유예자가 포함된 수치이다.
→'일본군' 정보 보기



파일:hirohito_color.png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800px-Imperial_Seal_of_Japan.svg.png 일본국의 제124대 천황
제호
쇼와 천황 (昭和天皇)

히로히토 (裕仁/유인)
어칭호
미치노미야 (迪宮)
출생일
1901년 4월 29일
출생지
일본 제국 도쿄 아카사카 구 동궁어소
사망일
1989년 1월 7일 (87세)
사망지
일본 도쿄 지요다 구 후키아게 어소
능묘
일본 도쿄 하치오지 시
무사시노능 (武藏野陵)
즉위식
1926년 11월 10일 (교토고쇼)
장례식
1989년 2월 24일 (도쿄 고쿄)
재위기간
1926년 12월 25일 ~ 1989년 1월 7일
(62년 1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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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
아버지 다이쇼 덴노, 어머니 데이메이 황후
형제자매
4남 중 첫째
배우자
고준 황후
자녀
히가시쿠니 시게코
히사노미야 사치코
다카츠카사 카즈코
이케다 아츠코
아키히토
마사히토
시마즈 타카코
학력
동궁어학문소 (東宮御學問所) 수료
신체
165cm, AB형
십이지
소띠 (신축년)
서명
파일:1280px-Showa_shomei.svg.png

1. 소개
2. 생애
4. 죽음
6. 기타
7. 가족관계
7.1. 자녀들
7.2. 가혹했던 고부관계
7.3. 형제관계
8. 매체에서
8.1. 영화
8.2. 역사서
9. 한국과의 관계?




1. 소개


파일:Emperor_Hirohito_portrait.jpg

국제 신의상 어떨지 싶지만 뭐 괜찮겠지. (国際信義上ドウカト思フガマア宜イ)

인도차이나 진격을 허용하는 히로히토의 반응, 1941년 6월 25일. 스기야마 메모 (杉山メモ) 상권 231쪽. 후지와라 아키라(藤原彰) 외, <천황의 쇼와사(天皇の昭和史)> 82쪽.[1]

황국이 총력을 기울여 승리를 결정지을 계기는 바로 오늘날에 있으니, 공들은 기꺼이 백성들보다 앞장서서 분노를 새로이 하여 단결을 굳건히 하고 떨쳐 일어나서 적국의 야욕을 분쇄함으로써 황운을 무궁히 도울지어다.(皇國カ其ノ總力ヲ擧ケテ勝ヲ決スルノ機方ニ今日ニ在リ卿等宜シク衆ニ先ンシテ憤激ヲ新ニシ團結ヲ鞏クシ奮テ敵國ノ非望ヲ破碎シ以テ皇運ヲ無窮ニ扶翼スヘシ)"

제85회 제국의회 개원식 칙어(第85回帝国議会開院式の勅語), 1944년 9월 7일 [2]

일본의 제124대 천황. 태평양 전쟁 개전을 결정한 인물 중 하나. 여러 정치적 상황으로 인해 처벌은 받지 않았다.
4월 29일생으로 이날이 전쟁 전에는 '황제의 생일'이라는 의미에서 천장절(天長節)[3]이라는 공휴일이었다. 그러던 것이 전후 식목일, 정확히는 '녹색의 날'로 바뀌었다가 2007년 자민당, 공명당, 일본 민주당의 합의로 '쇼와의 날'으로 재개정되어서 동북아 국가들에서 말이 좀 나왔다.그냥 하던 대로 '천장절'이었으면 동아시아 전통이라고 묻어갈 수 있었는데 윤봉길이 1932년 중국 상하이 훙커우 공원에서 의거를 일으킨 날도 바로 이날이었다.
어렸을 때의 이름은 迪宮(미치노미야)로, 중국 천자들처럼 연호+(帝) 같은 형식으로 표기를 만들면 '소화제(...)'가 된다.

2. 생애


파일:Michi-no-miya_Hirohito_1902.jpg
어렸을 때 칭호[4]는 미치노미야(迪宮)였으며, 도장에 새겨진 인장명은 와카타케(若竹)였다. 역대 덴노들 중에서 재위 기간이 가장 길며[5], 가장 장수한 덴노였다. 그리고 후술하겠지만 덴노 중 유일하게 공식석상에서도 안경을 쓴 덴노다.
히로히토는 1901년(메이지 34년), 4월 29일 도쿄도 아카사카 구 아오야마[6]의 도구고쇼(東宮御所)에서 메이지 덴노의 장손으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훗날 다이쇼 덴노가 되는 요시히토 황태자, 어머니는 사다코 황태자비다. 오랫동안 정실이 아들을 낳지 못하고 측실 소생으로 계승되어 오던 일본 황실의 관습을 깨고, 적장자(嫡長子)로서 대를 이었다. 사다코 황태자비는 이후로도 아들 3명을 더 낳았다. (차남 야스히토, 3남 노부히토, 4남 다카히토)
태어났을 때 키는 51cm였고, 몸무게는 약 3kg 정도였다. 히로히토는 태어난 지 70일밖에 되지 않았을 때 친부모의 품에서 떨어져, 추밀원의 고문이었던 카와무라 스미요시 백작에게 맡겨져서 누마즈(沼津) 저택에서 자랐다.[7] 1908년에 가쿠슈인 초등과에 입학한 히로히토는, 가쿠슈인 원장이던 노기 마레스케 육군대장의 밑에서 엄격한 교육을 받았다.[8]
1912년 7월 30일에 할아버지 메이지 덴노가 사망하고 아버지 요시히토 황태자가 뒤를 이어 다이쇼 덴노로 즉위하자, 히로히토 친왕은 황태자로 지위가 올라가게 되었다. 다이쇼 덴노의 즉위 후, 가쿠슈인 초등과에 재학 중이던 그는 황족신립명에 의해서 육해군 소위로 가게 되었고 근위보병 제1연대에 배치되었다. 1914년 3월 히로히토는 가쿠슈인 초등과를 졸업했다. 같은 해에 할머니 쇼켄 황후가 사망했다. 1918년에는 방계 황족인 구니노미야 나가코 여왕이 황태자비로 간택되었다. 1919년 만 18세가 되자, 히로히토는 성년식을 한 후 바로 황태자에 책봉되었다.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220px-Emperor_Hirohito_and_empress_Kojun_of_japan.jpg
1924년, 히로히토 황태자와 나가코 황태자비.
사실 나가코 여왕은 "외가인 시마즈 가문에 색맹 형질이 있다"는 이유로 황태자비 결정이 취소될 뻔했으나, 결혼 당사자인 히로히토 황태자는 "나가코 여왕이 좋다"며 감싸주었다고 한다. 덴노가 된 후로도 나가코 황후와 금슬이 좋았다고.
다이쇼 덴노의 병이 날로 악화되고 있던 가운데, 히로히토는 1921년 3월 3일부터 9월 3일까지 영국을 비롯한 유럽 국가들을 차례로 순방했다. 히로히토가 20세가 되자 1921년 섭정에 취임했고[9] 셋쇼노미야(攝政宮)라고 칭해졌다. 사다코 황후는 유약하여 무시당하던 남편과 어린 장남을 대신하여 거물급 인사들과 힘겨루기를 했다. 그 때문에 히로히토의 치세는 1921년부터 1926년 아버지 요시히토가 죽을 때까지의 5년도 포함되는 셈이다.
섭정 기간이었던 1923년 12월 27일에는 궁정 문밖에서 사회주의에 심취했던 난바 다이스케로부터 저격을 받았지만 생명에 지장은 없었고 난바 다이스케에게 저격을 받았을 당시에 히로히토는 자동차 안에 있었는데 "누가 총을 쏘나 보다" 하면서 태연했다고 한다. 난바 다이스케는 저격을 시도한 직후 붙잡혀 무자비하게 구타를 당한 후, 대역죄로 사형에 처해졌지만 난바 다이스케가 처형된 뒤 히로히토는 난바 다이스케의 가족들에게 피해가 가지 않도록 배려했다고 한다.
파일:Emperor_Showa.jpg
동년에 히로히토는 구니노미야 나가코 여왕과 결혼하려 했으나, 관동 대지진의 영향으로 이듬 해인 1924년에 결혼식을 올렸다.
1926년 12월 25일에 아버지 다이쇼 덴노가 사망하자 그는 124대 덴노가 되었고 연호를 쇼와(昭和)로 바꿨다. 1928년 11월 교토고쇼에서 즉위식을 올린 후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날 때까지 국가 중대사에 깊이 관여했고, 특히 군사나 외교 정책에 관심이 많았다. 다이쇼 치세에서 실추되었던 왕권을 손에 쥐기 위해서 그랬던 것으로 보인다.
나이 30살이었던 1932년이봉창 의사로부터 폭탄 투척[10]을 당했다. 하지만 폭탄 2개 중 하나는 잘못 던져져 말과 마부(근위병)에게만 부상을 입혔고, 하나는 불발이 되어 실패. 폭탄 투척 이후 일본 경찰들이 들이닥쳤을 때, 경찰들은 이봉창 의사가 던진 줄 모르고 이봉창 의사 앞에 있던 일본인을 구타했으나[11]이에 죄책감을 느낀 이봉창 의사는 자수하여 현장에서 체포되었으며, 이후 사형에 처해졌다. 이때 침착한 어조로 "숨지 않을 테니 점잖게 다뤄라."고 말했다고. 조선에서는 격렬하게 비난하는 어조로나마 의거를 전할 수 있었으며, 특히 중국 언론에서는 대놓고 "아쉽게도 불발되었다"는 기사로 보도했다.[12]
1933년 12월 23일, 장남이자 훗날 덴노가 되는 츠구노미야 아키히토 친왕이 태어났다. 그러나 도조 히데키삼대오물들의 걸출한(...) 전략으로 인해 결국 패전에 패전을 거듭하다가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탄 2개가 떨어지고 난 후에 항복을 결정하고 1945년 8월 15일 포츠담 선언을 수락하는 라디오 항복연설을 했는데 이를 옥음방송이라고 한다. 놀라운 사실은, 일본 국민들이 덴노의 목소리를 들은 것은 이게 처음이었다는 것.[13]
항복 후에 더글라스 맥아더GHQ에 의해서 강요되어서 1946년 1월 1일에 인간선언을 발표하게 되었다. 인간선언 이후 덴노는 더 이상 신격화가 부정되었고, 한 명의 평범한 인간으로 격하되었으며, 정치 일선에서도 물러나게 되었다. 재산 역시 모두 몰수당해 거리로 내몰려도 할 말이 없는 상황.[14] 다만 덴노 존치를 결정한 마당에 히로히토 본인과 그 직계에 한정해 생활비를 일정 수준으로 주기로 해서 이때부터 덴노 일가는 일본 의회에서 예산을 타서 쓰게 되었다.
파일:hirohito_macarthur_1945.jpg
더글러스 맥아더와 히로히토. 그야말로 1장으로 요약 가능한 태평양 전쟁 결과.
이 사진은 일본 언론이 알아서 보도하지 않았으나 미군정이 반드시 보도하도록 지시해 일본인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허무한 표정으로 멍하게 바라보는 히로히토와 달리 맥아더는 시큰둥한 표정으로 정복도 입지 않고 주머니에 손까지 찔러넣은 채 찍은 모습으로 "누가 대장인지" 깨닫게 해줘 사진을 보고 자살하는 사람까지 나올 정도였다. 에드워드 베르가 쓴 책 <히로히토 - 신화의 뒷편>에 의거하면 이는 맥아더의 의도된 행동이었다고 한다.
1947년 제정된 일본국 헌법(일명 평화헌법)에서 히로히토는 상징적인 존재로 전락했지만, 미군이 일본을 점령하고 있던 당시에 GHQ의 사령관이었던 맥아더에 의해 독자적인 정치적 영향력은 유지될 수 있었다. 1952년 4월 28일에 샌프란시스코 조약으로 일본이 주권을 되찾자 그는 여러 신궁과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하며[15] 다시 활동을 재개했지만, 더 이상은 정치에 참여하지 않고 상징적인 덴노(天皇)로 남았다.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난 이후에도 히로히토는 덴노라는 공적인 업무는 그냥 상징적인 수준으로만 수행했고, 대신 원래부터 관심이 많았던 생물학 연구에 관심을 쏟으며 이에 몰두했다. 1971년 아내 나가코 황후와 함께 전쟁 후 처음으로 제2차 세계 대전의 적국이었던 영국네덜란드를 방문하기도 했으며, 여러 정상들과 회담을 가지기도 했다. 그 과정에서 아시아계 대학생들이 히로히토를 규탄하는 집회를 열기도 했다.

나는 옥좌에서 오랫동안 일하며 여러 가지 경험을 했다. 가장 인상에 남은 일은 천황비와 같이 유럽 여행을 갔을 때이다. 또 미국 여행을 갈 예정이기도 하다. 1964 도쿄 올림픽과 오사카 박람회도 인상적이었다고 생각한다. 반면에 가장 후회스러웠던 일은 두말할 것 없이 제2차 세계대전이다.

— 1975년 인터뷰 중에서 "제일 기억에 남는 일과 제일 후회스러운 일이 무엇이었냐"는 기자의 질문에 한 답

1975년 10월에 히로히토 덴노와 그의 아내 나가코 황후미국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공식 방문했다. 미국 방문을 앞두고 히로히토와 뉴스위크지의 기자 버나드 크리셔의 인터뷰가 있었는데, 버나드 크리셔는 "일본이 개전을 결단한 정책 결정 과정에도 폐하가 가담하셨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에 대해 어떻게 대답할 것인가"라는 질문을 했고 히로히토는 "전쟁을 끝낼 때 나는 스스로 결정을 내렸다. 하지만 전쟁 개시 때에는 내각의 결정이 있었고, 나는 헌법에 따라 일본 내각의 결정을 뒤집을 수 없었다"고 변명했다. 또한 9월 22일에 열린 기자회견에서도 "일본인들의 가치관은 변하지 않았다. 일본의 군부 지도자들이 일본을 잘못된 길로 이끌었던 적이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지금 내가 무슨 말을 한다면 아직도 살아 있는 그들을 욕하는 셈이 된다. 나는 그러고 싶지 않다."고 이야기하기도 했다.
기자회견을 마치고 몇 주일 후 히로히토 부부는 국빈 자격으로 미국 워싱턴 DC를 방문하여 제2차 세계 대전에 대한 깊은 슬픔의 뜻을 전하고, 미국 관광길에 올라 캘리포니아 주 애너하임의 디즈니랜드 등을 찾았다.[16] 그리고 미국 디즈니에서 받은 시계가 있는데, 디즈니에서 일본 덴노의 방문을 기념하여 만든 기념품이었다. 히로히토는 이 시계를 받고 "디즈니 풍경이 아름답다"며 미소 지었고, 나중에 히로히토가 사망했을 때 그 시계를 무덤 속에 넣었다고 한다. 영국이나 네덜란드에서 규탄집회가 일어난 것과는 달리, 미국에서는 별다른 일 없이 미국 방문을 마칠 수 있었다.
그렇게 해외의 여러 정상들을 만나며 살다가, 1989년 1월 7일 오전 6시 33분 십이지장에 생긴 종양 때문에 하혈하다가 87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1989년 2월 24일 무사시노능에 매장되었다. 히로히토의 후계자로 그의 장남이던 아키히토가 덴노에 오르게 되었고, 연호를 1989년 1월 8일 0시 정각에 헤이세이로 바꾸면서 헤이세이 시대가 막을 열었다.

3. 쇼와 덴노/전쟁 책임


문서 참고.

4. 죽음



NHK에서 히로히토 덴노 사망 2분 후에 방송한 소식. 미야오 이와오 궁내청 차장이 사망 전인 오전 4시의 덴노 상태를 발표하는 내용과 임시뉴스.

NHK에서 히로히토 덴노가 사망한 지 1시간이 지난 후에 방송한 내용. 후지모리 쇼이치 궁내청 장관이 히로히토 덴노가 사망한 것을 발표한 내용과 관련 임시뉴스. 덴노가 사망한 것을 알릴 때는 "천황폐하 붕어"(天皇陛下 崩御)라는 글귀를 띄운 이후 차임음을 울린다. 위 2개의 동영상에서 나오는 궁내청 장관은 후지모리 쇼이치(藤森 正一). 해당 영상 후반에는 훗날 일본 총리를 역임하는 당시 관방장관 오부치 게이조(小渕 恵三)의 모습도 보인다.

히로히토 사망했을 때 당시 일본인들의 반응인데, 대체 노인층은 아주 슬퍼하는 분위기지만, 젊은 층이나 중장년층들은 그럭저럭 같은 반응인 거 같다. 즉 제각각이라는 거.
  • 사망 당일 한국 보도영상

MBC 뉴스데스크 자료
KBS 9시 뉴스 자료
히로히토 덴노 사망 당일과 헤이세이 시대로 넘어가기 전날에 나온 한국 측 관련보도. 당시 관방장관인 오부치 게이조가 헤이세이 연호를 처음으로 공개하는 장면도 나온다. 두 방송사 다 당시 한국과 일본의 방송 화질 차이를 느낄 수 있다[17]
심지어 1988년 여름부터 히로히토 덴노가 위독해지자 일본의 모든 행사와 콘서트, 일본 총리의 해외일정이 취소되고 전 일본이 숙연 및 자숙해져야 한다는 사회 분위기가 반강제적으로 형성되었다. 이 해 일본시리즈에서 우승한 사이타마세이부 라이온스는 3년 연속 우승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별다른 축하연 없이 조용하게 묻혔다. 안습이다. 1978년부터 매해 개최된 기린컵도 1990년까지 2년간 개최를 중단하기까지 했다. 또한 광고계에서는 '건강하세요', '멋진 인생', '드디어 그날이 온다' 등의 멘트가 사라졌다. 역시 덴노의 심기를 해하지 않기 위해서였다. 언론에서는 이 분위기를 선도하여 모든 기사를 일본 황실의 동향파악에 집중하고 덴노가 매일 어느 정도의 맥박을 유지하는지까지 일일이 기사화했다. 아무래도 미친 것 같아요
그러나 외신측 반응은 일본 언론들과 사뭇 달랐다. 1988년 9월 21일자 영국 황색언론 <더 선>에는 "악마지옥으로 돌아갈 준비를 한다"고 보도했고, 10월 7일에 김재훈 한겨레사회연구소 이사가 신생 진보일간지 <한겨레신문> '더불어 생각하며' 칼럼에서도 "쇼와 본인이 죽기 전에 과거사에 진심으로 직접 사죄하라"고 촉구하였다. 일본 전역은 '자숙'이라는 명분으로 엄숙한 분위기를 유지했으며, 연일 천여 명의 사람들(대부분 노년층)이 덴노가 머무는 도쿄 황거에 몰려들었다.
하지만 정작 이 위독 상태가 해를 넘겨서 오래 끌자, 덴노의 사망 당일에는 일본에서는 일부 극우 노인네들이 황거 앞에서 울어제낀 것을 제외하고는 차분했다. 오히려 정규방송이 안 나온다고, 방송국마다 전화통에 불이 나도록 항의 전화가 빗발칠 정도. 정규방송이 빠지고 추모방송이 주구장창 나오다보니 생긴 일인데, 당연히 재미있을 리가 없으니. 그래서인지 비디오 대여점의 매출이 상승했다고.[18]
이 시기의 웃긴 일화 하나. 언제 쇼와 덴노가 죽는가 가장 빨리 알아내기 위해 황거 근처에서 거의 노숙을 하던 한 기자가 있었는데, 그 기간이 길어지면서 그야말로 노숙자 몰골이 되었다. 그런 꼴을 한 기자 옆을 지나던 한 어린이가 옆에 있던 어머니에게 "저 아저씨는 뭐야?"라고 물으니, 어머니가 "공부 안 하면 저렇게 되는 거야."라고 대답하는 걸 들었다고. 지못미.
쇼와 덴노는 죽기 직전에 일본의 몇몇 역사학자들과 한국, 중국아시아 국가들[19]로부터 전쟁 책임에 대한 사과를 남길 것을 요구받았다.
다케시타 노보루 총리는 쇼와 덴노 사후 담화에서 "일본 국민들을 전화(戰禍)에서 구해내기 위해 '종전'이란 영단을 내리셨다"는 식으로 그의 죽음을 애도했지만, 담화문 내용에서 쇼와의 전쟁 책임이 언급되지 않아 침략피해자인 한국, 중국 등 전 세계에 파문이 일었다.
참고로 소설 13계단에 따르면, 쇼와 덴노가 위독해지자 전 교정기관의 사형 업무가 중지되었던 적이 있다. 쇼와 덴노가 사망한 뒤 특별사면이 이뤄질 것을 고려한 결정이었는데, 이 와중 최고재판소에서 사형 여부를 다투던 일부 사형수들은 상고를 취하하여 사형을 확정시켜 버렸다. 최고재판소에서 감형될 가능성보다 특사로 감형될 확률이 높다고 보고 도박수를 던진 것이다. 그 이유는 판결이 확정된 피고인만이 특별사면의 대상이 되기 때문이다.[20] 결국 특사가 내려지긴 했는데 대상은 생계형 사범 등 애매한 경우만이 해당되었고. 그 결과 사형수들은 스스로 자신의 명을 단축시켜 버리는 비극이 발생했다고 알려졌다. 그런데 이건 사실이 아니다. 사형수의 사면은 사실상 전무했고, 감형도 1975년 이후로 전혀 없었으며 사형을 면한 경우는 모두 2심에서 정상참작사유 발생 등을 이유로 무기로 감형된 자들이었다.
그리고 죽은 시기가 1989년 초, 즉 해를 넘기고 겨우 1주일 지난 시점이라, 쇼와 연호를 박은 달력들이 대거 폐기처분되고 헤이세이 연호가 찍힌 달력들을 새로 발행하느라 일본 열도에서 종이 낭비가 극심해지고 재정 부담을 여러 곳에 안겨주기도 했다.
한편 쇼와 덴노의 둘째 손자 아야노미야 후미히토 친왕은, 할아버지가 사망한 지 얼마 안 되어 가쿠슈인 대학 1년 후배인 가와시마 키코와의 약혼 발표 기자회견을 했다. 후미히토 친왕은 24세, 키코는 23세였다. 당시 사진을 보면 약혼 발표라는 자리에 어울리지 않게 후미히토 친왕과 키코가 온통 검은 옷을 입고 있는데, 상중이었기 때문이다. 상중의 약혼 발표와 곧 이어진 결혼(1990.6.29)에 대해 곱지 않은 시선도 있었으나, 황실에 시집와서 잘 적응해 열심히 사는 키코 비의 모습 덕분에 비판 여론이 수그러들었다고 한다.
쇼와 덴노의 손녀인 노리노미야 사야코 공주는 1969년 4월생으로, 1989년 4월에 만 20세 성년을 맞이했다. 당연히 원래대로라면 그녀를 위한 각종 축하행사가 치러져야 했으나, 할아버지의 죽음 때문에 이듬해로 미루어졌다.

5. 쇼와 덴노/다른 나라와의 관계


항목참고

6. 기타


근대 이후 대영제국빅토리아 여왕(1819~1901),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황제인 프란츠 요제프 1세(1830~1916)와 함께 80세 이상을 살고 60년 이상을 즉위한 세 군주 가운데 하나. 재위기간은 프란츠 요제프 1세 68년(86세), 빅토리아 여왕 64년(82세), 쇼와 63년(88세). 하지만 앞의 두 인물보다 히로히토가 더 주목받는건 앞의 두 인물은 1848년 혁명 이후로는 불안정하지만 그럭저럭 평화로운 치세를 보냈지만, 히로히토는 어린 시절에 조국의 근대화를 보고 자라고 본인의 재위 초기에는 조국이 미국을 상대로 큰 전쟁을 벌이다 패전하였으며, 이때 위기를 겪었지만 1950년 이웃나라에서 벌어진 전쟁으로 위기를 모면하고, 조국의 경제 고도 성장은 물론, 눈에 띄게 변화된 사회상까지 보고 죽었던 것이다.
그런데 사실 이보다 좀 더 앞선 시대에 1명 더 있는데, 청나라의 고종 건륭제(1711~1799)로, 무려 89세까지 60년(!)을 재위했다. 게다가 이것도 자신이 강희제보다 오래 재위하기 싫어서 자진 퇴위한 것이고, 상황 재위기간을 더하면 64년이다.
이 조건을 충족하는 현대 인물 가운데는 태국푸미폰 아둔야뎃 국왕이 있었다. 89세에 70년간 재위했다. 조만간 근대 이후 최장수 군주(빌헬름 1세, 만 91세)를 경신할지도 모...를 뻔 했으나 2016년 10월 13일, 만 88세로 사망하면서 무산됐다. 영국의 엘리자베스 2세 국왕 역시 89세로 60년 기록을 넘겼으며, 2014년 부로 쇼와보다 장수한 군주가 되었다.
일설에는 1945년 9월 27일, 더글러스 맥아더도쿄에 진주한 지 1달 동안 히로히토에 대해 어떠한 조치도 없자 제발이 저린 히로히토가 직접 '출두'해 찍은 사진이 2장이며, 히로히토가 90도로 허리를 꺾어 맥아더에게 굽신거리는 사진이 있으나 일본 측의 방해 공작으로 찾기 힘들어 졌다는 떡밥이 있었다. 맥아더의 회고록이나 당시 함께 있었던 목격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히로히토가 맥아더의 환영 인사에 '감사하다'고 말하며 고개를 숙여 답했다는데, 이 얘기가 와전된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히로히토가 90도로 허리를 숙여가며 굽신거리는 사진이 찍혔다는 증언은 없었으며, 애초에 흔히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과는 달리 맥아더는 히로히토를 엄연히 한 나라의 군주로 대해주며 그에 걸맞은 예의도 갖췄다고 한다. 위에 나와있는 두 사람이 함께 찍은 사진도 사실은 맥아더 특유의 허리 펴기(…) 자세 때문에 조금 과하다 싶을 정도의 오해를 불러 일으켰지만, 맥아더의 회고록을 보나 당시 목격자들의 증언을 보나 맥아더는 분명히 히로히토에게 충분한 예의를 갖췄다.
왜인지는 몰라도 극단적으로 사람과 접촉하는 것을 싫어하여 의회가 열릴 때나 군대를 사열하는 꼭 참가해야만 하는 행사 이외에 사람들 앞에 모습을 드러내는 일을 꺼렸다고 한다. 이봉창이 던진 폭탄이 안타깝게도 빗나간건 다 이유가 있었다. 게다가 의전 절차에 따라서 어느 누구라도 어떤 이유가 있더라도 자신의 신체에 손을 대지 못하게 했고, 이러한 습관은 그가 죽을 때까지 계속되었다. 이것이 할아버지 메이지 덴노처럼 히로히토 본인의 대인기피증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엄격한 황실 교육의 영향 탓이었는지는 불명이다.
워낙에 귀하게 자란지라, 황태자 시절 영국을 방문했을 때 런던 지하철을 처음으로 타보게 되었다. 이때 차표를 역무원에게 건네주고 개찰구를 나가야 한다는 것을 몰라서(...) 그냥 차표를 소지한 채로 개찰구를 지나가려다 그가 덴노인지 모르는 역무원이 그를 제지하면서 실랑이가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이때 실랑이를 벌이던 차표는, 일본으로 가져와서 현재 궁정기념관에 보관 중이라고 한다. 또 한번은 아돌프 히틀러가 당시 최고의 차였던 메르세데스 벤츠 770K를 히로히토에게 선물로 주었지만, 정작 히로히토는 승차감이 나빠서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고 한다.
선천적으로 건강이 좋지 않아서 할아버지인 메이지 덴노와 마찬가지로 걸어다닐 때 발을 질질 끄는 습관이 있었다고 하며, 태어날 때부터 척추가 굽어 있었다고 한다. 또한 근시가 심해서 고생을 많이 했고, 안경을 써야만 앞이 보였을 정도로 안경은 필수품으로 가지고 다니면서 생활해야 했다. 그의 대인기피증은 여기서 비롯된 것일지도 모른다.
http://m.yna.co.kr/kr/contents/?cid=AKR20150709190700073&mobile
일본 궁내청에선 전후 70주년을 맞이해 쇼와 덴노의 항복 녹음(옥음 방송) 전체를 전격 공개했다. 심지어는 디지털로 세세하게 복원했다. 아베 신조 정권의 우경화를 반대하는 아키히토 덴노 본인의 의견을 간접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황실 내부 문제에 대해서는 당시에 진보적이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오랫동안 아들이 태어나지 않아 "후궁을 들이라"는 말을 들었지만 모두 거절했고,[21] 아키히토가 태어난 뒤에야 여론이 없어진다.
1959년, 평민 출신의 쇼다 미치코가 아키히토 황태자와 결혼하여 황태자비가 되었다. 히로히토가 찬성했기에 아키히토는 미치코와 혼인할 수 있었다. 당시 나가코 황후와 히로히토의 동생들 부부, 전 황족들과 궁내청이 그리 반대했음에도 이들이 혼인한 것은 히로히토가 허락했기 때문이다.

7. 가족관계


다이쇼 덴노데이메이 황후(사다코)의 4남 중 장남으로 출생, 아내 고준 황후(나가코)와의 사이에서 2남 5녀를 낳았다. 히로히토는 한 집안의 가장으로서는 무척 좋은 사람이었다고 전해진다.

7.1. 자녀들


쇼와 덴노와 나가코 황후의 자녀들은 장남 아키히토와 막내딸 시마즈 타카코를 제외하고는 모두 일찍 죽거나, 건강이 나쁘거나, 아이를 낳지 못하거나, 부부관계가 원만치 못하거나, 일찍 과부가 되는 등 하나같이 불행한 삶을 살았다.
  • 장녀 데루노미야 시게코(照宮成子) 내친왕(1925.12.6-1961.7.23): 방계 황족 히가시쿠니노미야 모리히로(東久邇宮盛厚)[22] 왕과 결혼, 3남 2녀를 낳았다. 다이쇼 덴노가 생전에 본 유일한 손주이기도 하다. 패전 후 평민 신분으로 떨어졌고[23], 만 35세의 젊은 나이에 암으로 죽어 히로히토 덴노와 나가코 황후 내외는 큰 충격을 받았다.
  • 5녀 스가노미야 타카코(淸宮貴子) 내친왕(1939.3.2-): 어머니 나가코 황후의 외사촌 남동생[24]인, 옛 화족 시마즈 히사나가(島津久永)와 결혼하여 1남을 낳았다. 히로히토 덴노와 나가코 황후의 딸 5명 중에서 유일하게 행복한 삶을 살아간 인물로, 바로 위의 언니 이케다 아츠코와는 정반대로 활달하고 화려하며 떠들썩한 성품의 소유자라고 한다.

7.2. 가혹했던 고부관계


아내 고준 황후(나가코)는 일본 막장 드라마를 현실로 찍었다. 큰아들인 아키히토 황태자가 평민 쇼다 미치코와 결혼하려 할 때, 우익 단체까지 동원해가면서 엄청 반대했다. 미치코가 말이 평민이지 닛신(日淸) 제분이라는 대 재벌가의 장녀이며, 외가는 옛 화족(백작) 소에지마(副島) 가문이었으며, 무엇 하나 빠지는 구석이 없었는데도 말이다.
미치코가 황태자비가 된 후로, 나가코 황후악독한 시어머니의 교과서가 무엇인지 아주 제대로 보여주었다. 심지어 미치코 황태자비가 황후가 된 후로도, 나가코 태후와 그녀의 똘마니들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미치코 황후는 시어머니 나가코 황태후에게 어찌나 시달렸는지, 1993년 10월 20일 만 59세 되던 해에 실어증으로 쓰러지기까지 했다. 나가코 태후는 그녀 자신이 사망하는 순간인 2000년까지, 40여년간 단 한순간도 빠짐없이 미치코 황후를 들들 볶았다.
나가코 황후 역시 시어머니 사다코 태후(데이메이 황후)에게 30여년간 호된 시집살이를 당했다고 한다(...). 가해자가 된 피해자 군기잡기, 꼰대질은 당한 것을 되풀이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 놀랄 일도 아니다. 사다코 태후의 시녀 다케야 츠네코(竹屋津根子)와 나가코 황후의 시녀 다케야 시게코(竹屋志計子)는 친자매였지만, 웃전들의 기싸움으로 인해 서로 대화조차 나누기 어려울 지경이었다.
다이쇼 덴노가 죽기 얼마 전 시절, 황태자 부부가 문병을 왔을 때였다. 나가코 황태자비는 시어머니 사다코 황후의 앞에서 너무 긴장하여, 장갑을 낀 채로 젖은 수건을 짜는 실수를 저질렀다. 이 때 사다코 황후는 "너는 무엇을 해도 서투르구나!!"라고 시종들도 있는 앞에서 나가코 황태자비를 꾸짖었다고 한다.[25] 나가코 황태자비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하고, 시어머니의 꾸중을 듣고만 있었다고.
한편 고준 황후의 아버지 구니노미야 구니히코 왕은 일본 육군 대장으로, 1928년 대만 시찰 도중에 우리나라 독립운동가 조명하 의사의 의거로 상해를 입어 다음 해에 사망했다.

7.3. 형제관계


첫째 남동생 지치부노미야 야스히토 친왕 : 1902. 6. 25 ~ 1953. 1. 4
둘째 남동생 타카마츠노미야 노부히토 친왕 : 1905. 1. 3 ~ 1987. 2. 3
막내 남동생 미카사노미야 다카히토 친왕 : 1915. 12. 2 ~ 2016. 10. 27

8. 매체에서



8.1. 영화


파일:일본의가장긴하루.png
  • 1967년 <일본의 가장 긴 하루>에서는 마츠모토 하쿠오가 분했는데, 얼굴은 나오지 않는다.
파일:엠퍼러쇼와.jpg
파일:일본패망하루전쇼와.jpg

8.2. 역사서


  • 마지막 황제로 유명한 프랑스 소설가, 기자 겸 정치가인 에드워드 베르가 쓴 <히로히토: 신화의 저편>이 있다. 2002년 1월 을유문화사에서 정발되었다. 다만 에드워드 베르가 전문 역사가는 아니며, <차우셰스쿠 평전>을 비롯한 다른 책에서 상당한 오류를 범한 바가 있다는 것은 감안해야 할 점.
  • 전문 역사가가 쓴 책으로는, 전 히토츠바시 대학 교수이자 현재 빙햄튼 대학 교수인 허버트 빅스가 서술하고 2010년 삼인 출판사가 내놓은 <히로히토: 근대 일본의 형성>이 있다. 2001년 퓰리처상 논픽션 부문 수상작이며, 히로히토에게 강력하게 전쟁 책임을 물은 책으로 유명하다.

9. 한국과의 관계?


- 고대 일본의 지배층과 지금 덴노(天皇)와의 관계는 어떤가.
"하나 예를 들겠다. 1989년 지금의 헤이세이 천황 즉위식 때, 제단 위로 올라가서 30분 정도 자신이 천황이 되었다고 신에게 보고하는 시간이 있었다. 그런데 유독 그곳에만 카메라가 들어갈 수 없었다. 왜냐, 조선어로 이야기했기 때문이다. 아마도 '-은', '-는' 등의 말이 들어간 문구를 읊었을 것이다."

- 보다 구체적인 사례가 있다면?
"있다. 전후 기마민족이동설로 일본역사계에 화두를 던진 에가미 나미오(江上波夫) 선생이 쇼와 천황(히로히토)을 만나러 간 적이 있다. 그때 그는 '죄송합니다. 폐하에 대해 반도에서 왔다는 등 이상한 이야기를 했습니다'라고 말하자 쇼와 천황은 '아니야, 우리들조선 출신이야' 라고 이야기했다고 한다. 에가미 선생은 그것이 일생에 가장 충격이었다고 말했다고 한다."

- 그 이야기를 에가미 나미오 씨로부터 직접 들은 것인가?
"에가미 나미오 선생이 한국의 김용운 교수에게 직접 이야기했고, 김 교수로부터는 내가 직접 들었기 때문에 틀림 없다. 천황가가 한반도에서 왔다는 근거가 또 있다.

첫번째 '어머니'를 일본어로 오카아상이라고 하는데, 황실에서는 '오모'라고 말한다. '오모'는 어머니가 아닌가. 2번째, 천황계에서 젓가락을 잘 쓰지 않고 숟가락을 쓴다. 마지막으로 일본인들의 기본적으로 앉는 자세인 정좌(正座)를 하지 않는다. 즉 무릎을 꿇지 않고 양반다리를 한다는 점이다."
출처: 일본 로열 패밀리는 백제 왕족! - 일본인을 통해 본 일본사회(3) -한일고대사 연구자 오다 노부오(宇田伸夫) 씨 (JP NEWS)[26]
일본 고대사 연구가인 우다 노부오 씨가 2010년 JP NEWS와의 인터뷰에서 밝힌 바에 따르면, 쇼와 덴노가 생전에 자신들의 뿌리가 조선(한반도)에 있다는 것을 일본에서 기마민족론을 주장한 에가미 나미오 씨에게 밝혔다고 한다. 다만 출처가 상기되어 있듯 애초에 덴노가가 백제 왕족이라고 주장하는 책에서 나온 거라 걸러들을 필요는 있다. 결국 쇼와가 대중이나 다수의 사람들에게 직접 밝힌 게 아닌 누구누구를 통해서 들었다는 카더라 수준이기 때문. 물론 아들인 아키히토간무 덴노의 생모가 백제 무령왕의 자손이라고 속일본기에 기록돼 있어 한국과 연을 느낀다고 밝힌 적은 있지만, 이게 덴노가가 백제인이라는 소리는 아니다. 그런 식이면 고려 시절 상당수 왕들도 생모는 다 몽골인이었으니...
[1] 파일:external/578186f8a7c6c46d039be967586e48cfec134e9a19e4b29d52d1ae6a052c88cb.png[2] 파일:external/s4.postimg.org/Showa.jpg 이미지 출처는 여기.[3] 이 명칭은 꽤 유구한데 당나라 현종(712~756)이 자신의 생일을 '천장절'이라고 했던 것에서 유래한 것이다. 일본에서는 코닌 덴노(770~781) 시기에 이 명칭이 들어왔다.[4] 천황과 황태자의 자녀들에게 주어지는, "~노미야(ノ宮)"라는 식의 이름. 차남 이하의 아들들은 성년이 되거나 or 결혼하여 가장이 될 때, 칭호 대신 궁호를 새로 받는다. 딸들은 결혼하면 남편의 성씨를 따른다.[5] 물론 일본 신화 속에 있는 상상 속의 인물들을 제외하고서 그렇다는 것이다.[6] 현재 위치는 도쿄도 미나토구[7] 이는 일본 황실화족(귀족) 사회의 오랜 전통이었다. 그러나 쇼와 덴노의 맏며느리 미치코 황태자비는 이 전통을 깨고, 2남 1녀 모두를 자신의 품에서 직접 키웠다. 이후부터 일본 황실에서도 자녀들을 친부모의 곁에 두고 기르기 시작했다.[8] 동갑인 이방자 비도 히로히토와 같은 시기에 가쿠슈인에 다녔는데, 그녀 역시 노기 마레스케 장군이 대단히 엄격했다고 회고했다.[9] 조선식으로 말하면 대리청정이다.[10] 사쿠라다몬(桜田門) 의거[11] 이봉창 의사는 검문을 통과하기 위해 일본 헌병 장교의 명함을 도용했다. 그래서 의심하지 않은 것.[12] "한국인 이봉창이 일본 황제를 저격하였으나 불행하게도 맞지 않았다(韓人李奉昌 狙擊日皇 不幸不中)." 이 기사가 일제를 자극하게 되어, 결과적으로 이 보도는 1차 상하이 사변윤봉길 의사의 의거로 이어진다.[13] 사실 처음은 아니다. 과거 히로히토의 육성이 실수로 마이크에 잡혀서 방송된 적이 있다. 옥음방송 문서 참조.[14] 참고로 같이 제2차 세계대전을 치른 이탈리아 왕실은 아예 쫒겨났다.[15] 다만 A급 전범들이 합사된 것에 대해서는 '이웃 국가들에게 크게 실례가 되는 행동이다', '이곳은 국가를 위하여 희생한 이들을 모셔놓는 곳이다. 헌데 저 자들이 이곳에 모셔질 자격이 있는가?'라며 지속적으로 불쾌감을 드러냈고 그 뒤로 다시는 야스쿠니 신사에 접근도 하지 않았다. 과거 죄악을 반성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패전으로 인해 폐위와 심하면 목숨까지 날아가는 거 아닐까 두려워해야 했던 히로히토 입장에서는 꺼림칙할 수밖에 없었을 듯.[16] 그런데 이때 디즈니가 히로히토에게 손을 내밀었을 때 히로히토는 왜인지 손을 피했다고 하며, 이로 인해 디즈니가 당황했다고 한다.[17] 한국에서 녹화한 영상은 VHS 규격으로 녹화한 것이고 일본에서 녹화한 영상은 베타맥스 규격으로 녹화하였기에 화질 차이가 나는 것이다.[18] 1월 9일에 정상적인 방송으로 돌아오긴 했지만, TV광고는 15일까지 자숙을 실시했었다.[19] 심지어는 미국, 유럽 국가들에 대해서도.[20] 사면에는 일반사면과 특별사면으로 나눌 수 있는데, 일반사면같은 경우, 해당하는 범죄의 종류를 정하고 그 죄를 사면하는 경우이고, 특별사면은 이미 형이 확정된 특정한 범죄인에 대한 사면이기 때문에 형이 확정되지 않은 사람은 무죄추정의 원칙에 의하여 범죄인이 아니게 되므로 사면 대상이 될 수 없다.[21] 아버지인 다이쇼 덴노데이메이 황후와의 사이에서 아들이 넷이라 후궁이 필요가 없어서 들이지 않은 것이라, 그 시절까지는 "황후가 아들을 낳지 못하면 후궁을 들인다"는 정서가 남아 있었다.[22] 어머니 나가코 황후의 숙부인 히가시쿠니노미야 나루히코 왕의 장남. 즉 부모님의 사촌동생, 5촌 당숙과 결혼한 셈. 게다가 모리히로 왕은 데루노미야 시게코 공주의 증조할아버지 메이지 덴노의 외손자이기도 하다. 꼬이고 꼬인 개족보[23] 신적강하[24] 큰언니인 히가시쿠니 시게코와 똑같이 친족인 5촌 당숙과 결혼[25] 장갑(오페라 글러브)에 대한 악몽은 며느리 미치코 황후와 손자며느리 키코 비에게도 있다. 자세한 것은 항목 참조.[26] http://jpnews.kr/sub_read.html?uid=6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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