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원전 4세기, 축록중원은 시작되었다!/진/등장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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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역대 군주
2. 공/왕족 영(嬴)씨
3. 기타 이름있는 자
4. 기타


1. 역대 군주[편집]


스레 시작 시점의 군주. 특이사항으로 반항적인 이민족인 의거의 수장을 포로로 잡아 후궁으로 들인 경력이 있다(...) 다만 이후 해당 이민족은 친진파가 득세하는 등의 성과도 있었다.

제위에 있을 때 촉나라가 적극적인 공세를 편 적이 있는데, 이에 대응하기 위해 위나라와 대치중인 동부 병력을 차출한다는 위험천만한 수를 쓰려다[1] 이미 그를 축출할 준비가 되어있던 균개를 위시한 영사습파에 의해 참혹한 결말을 맞는다. 이때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 잠시 덜떨어진 척을 하였으나 이내 소용이 없음을 깨닫고 죽음을 받아들이는 모습을 보인다.

진간공 이전 군주인 진영공의 아들. 원 역사보다 조금 빨리 위나라에서 돌아와 진공의 자리에 올랐다.그래서 진출공은 출연도 못해보고 짤렸다 지못미 원 역사대로라면 진의 악습인 순장을 폐지한 군주여야 했지만, 말년에 생각을 되돌아볼 기회가 있었음에도 끝까지 순장 폐지를 생각한 적은 없어 공이 하나 줄었다.
즉위 이래 제위 기간 동안 서하 장성지대의 공략에 몇 차례에 걸친 친정까지 해가면서 어느 정도의 성과를 보았으나 전체적으로 일진일퇴가 반복되었다. 꽤나 자주 친정을 나설 정도로 위무후 못지 않거나 그 이상으로 호전적인 군주이나, 단순히 서하에 들이 박는게 아니라 한나라라 조나라 같은 주변국과 연계하면서 계획적으로 움직이는 치밀한 면모도 갖추고 있다.
말년에 공숙좌가 직접 13여만의 대병력을 이끌고 진나라의 수도를 노려왔을때 직접 군을 이끌고 위장 퇴각 및 포위 전술을 시도하면서, 동시에 이를 기회로 딸 영거량의 자질을 시험했고 이 때 위장 퇴각을 직접 담당하다가 일이 잘못되어 진짜로 패퇴하는 중에 하반신에 화살을 맞았는데, 아랑곳하지 않고 지휘를 계속하면서 농성 단계까지 들어선다. 공숙좌의 본군을 상대로 성문이 돌파되기 직전까지 버틴 끝에 영거량이 정예군을 이끌고 위군의 후방을 유린하자 이에 가세하면서 영거량의 자질에 만족하고 자신의 후계자임을 공식적으로 인정하였다.
이후 부상이 악화되고 있었기에 어의들이 긴급히 수술을 강행하였으나 다시는 말을 타지 못하는 몸이 되었는데, 그 결과 실의에 젖어 서하 공략과 천도 불가의 의지 및 방침을 고수하였지만 1년 후 사망하는 바람에 뜻을 이루지는 못했다.

헌공의 치세중에 무언가 은근슬쩍 등장하기 시작한 후계자 후보(?) 헌공 영사습이 처리하던 실무를 일부 분담하는 듯한 묘사와 함께 얼굴을 알렸다. 특이사항으로 할머니인 진간공과 비슷한 듯한 성적 취향을 보인다는 점이 있다. 헌공의 말년에 벌어진 공숙좌의 진나라 수도 공략전에서 위장 퇴각 및 포위 섬멸이라는 작전이 수립되었을 때 진헌공의 본대보다도 높은 숙련도의 정예병을 이끌고 근처 성에서 매복하였을때 복병을 경계한 공숙좌가 서하주둔군 병력으로 이를 추격하였지만 경이로운 신속함으로 이미 벗어나 공숙좌의 본대의 후방에 들이치는 데 성공한 것으로 헌공 영사습에게 공식적인 후계자로 선언받는다.
영사습 사후 진행된 순장에서 충성파나 귀족파를 막론하고 실질적인 거물 대신 휘하의 잔챙이나 실무진들이 갈려나간 것을 기회로 자신의 사람들을 심기 위하여 구현령을 진행하고 이후 순장을 폐지하는 등의 나름 대개혁을 진행하였다. 이 과정에서 무려 그 손빈이 등용되는 쾌거가 있었으며, 이를 바탕으로 손빈을 지휘관으로[2] 전대 진공의 숙원이었던 서하지역을 위나라에서 되찾아오는 데 성공하면서 명실상부한 군주의 위엄을 드러낸다.
치수사업을 위하여 묵가에서 복돈을 위시한 진나라 지부의 유치를 주도하고 정국거의 건설을 역사보다 일찍 추진, 조선을 벤치마킹해 귀족의 개입을 배제한 호구조사를 실시하는 등의 본디 진나라에 약했던 부분인 내정 쪽에서도 적극적인 활동을 벌이면서 진나라의 군주 중 현재로써는 가장 정력적인 활동을 보인다.
허나 초나라와 사돈관계가 된 것을 이용해 이목이 초나라에 집중된 틈을 타 촉나라에 영향력을 장악하려는 시도가 있었지만, 촉나라 또한 기민했던 탓에 오히려 역효과를 내고 말기도 하였다.
여기에 더해 말년에는 손빈과 11만의 군사를 동원하여 동진의 교두보를 위해 완으로 들이닥쳤지만 별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물러서야만 했다.
자신이라고 모든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았건만, 어찌하여 전인제는 되고 자신은 안 되었는지에 대한 한탄을 마음속에 담은 채 몇 년 후 세상을 떴다.[3]

즉위한 즉시 사돈지간인 초나라로부터 전폭적인 지지요청을 청하여, 이를 통해 직전에 있었던 진초관계의 균열을 봉합하며 진나라 내 주요 인물들의 긍정적인 평가를 얻었으며, 종횡가 진진을 하대부로써 등용하였다. 특이 사항으로 그의 재위기간은 진나라가 특히 군사적으로 운이 따르지 않았던 기간이었고, 이 탓에 자신의 자식들을 각각 초와 조선에 인질로써 보낸 전적이 있었다. 허나 초나라와 연계하여 전인제가 스스로 형성한 국제질서를 깨고, 이후 장왕 기유의 제위왕에게 겪은 굴욕을 중요한 순간 떠올려 대 제 합종의 서막을 연다.
이후 초나라의 손에서 벗어나기 위해 노력했지만 실패. 이후는 본인이 사랑하던 딸인 영직에게 왕위를 물려주기 위해서 자기 자식들을 처리하고[4], 세력이 좀 크던 자식인 영휘를 파촉으로 보내서 죽일려고 했다. 영휘가 파촉으로 가는 도중에 영휘는 아직도 안 죽었냐고 물으면서 사망.[5]
일대기를 요약하면 그 동안 등장한 진나라 왕들 중 전쟁보다는 정치적 싸움과 계략을 선호하는 특이한 부류였으며 내정개혁을 시도하고 외교판을 흔드는 등 온갖 노력을 한 왕이었지만 중요할 때마다 다이스 운과 시류가 나빠서 실패하는 등 재위기간 내내 일이 안 풀려 고생하다 떠났다. 조선에서 묵가, 법가 등을 초빙하여 한 개혁 시도는 진 귀족들의 반발과 전쟁 패배 등으로 인해 무산되었고 전쟁에서는 위나라에게 진출이 계속 막히다가 급기야 경취가 등장하면서 초나라에게 관중 남쪽 상당수를 상실하고 초의 준 속국이 되는 비참한 결과를 낳았으며 산동대전 후 외교전에서 초의 영향력을 벗어나려 시도하던 게 들통나고 마지막에는 가장 아끼는 자식인 영직을 왕위에 올리려고 했지만 진나라 중신들의 반초감정이 너무 커 영탕이 진으로 귀환하자 대거 영탕 쪽으로 돌아서는 바람에 그마저도 실패하고 만다.
다만 영사가 발버둥친 것이 헛된 것은 아니어서 제의 패자체제를 끝내는 등 여러 활약을 했는데 묘하게도 그 결과들 상당수가 조선에게 유리한 외교판도를 조성했고 결과적으로 영사가 죽은 후 조선은 제나라를 반토막내고 영탕을 옹립하여 진과 동맹을 형성하는 등 가장 큰 수혜를 입었다. 그래서 어장에서는 외교를 못 하는 참치들 대신 조선을 위해 외교적 판을 다 짜줘 조선제일외교관이라는 별명까지 생겼을 정도(....).

영사의 서장자 겸 적장자.[6] 어머니는 위나라 왕족인 위왕후.
서하대전의 전후 협상의 과정에서 영사가 서류상 조작을 통해 조선의 요구 기준을 맞추어 인질로 보내졌다. 이후 이래저래 조선에 의해서 진왕이 될 야심이 있는지에 대한 부추김 내지는 떠보기를 당하다가, 영사가 죽은 직후 초나라가 보유한 진왕의 후보인 영건을 제치고 왕위에 앉히기 위해 급하게 진직도를 타고 고향으로 돌아가게 되고, 자기 나라의 친초 세력을 일소하며 왕위에 올랐다.[7] 이후 5년에 걸친 전쟁으로 각각 의거와 초나라에 내주었던 소관과 무관을 수복하고, 위나라의 합횡 사전 준비로 영직 옹립 시도[8] 겸 관중 경락 시도를 어떻게든 저지했다. 그 과정에서 적장 중 하나인 공손연(서수)를 처형하여 권위를 다지는 데 성공하였다.
이후 어떻게든 위의 침입을 막다가 하남대전에서 조선의 패배와 함께 합횡에 참여해 발언권이 약해진 덕에 농서에서 몇년간 쉬고 오기도 했다.
눈물로 영직에게 혈육의 정을 말하며 설득해 영직의 협조를 이끌어내고, 2차 중원대전에서 승리해 하동까지 넘어가는데 성공했지만 이번에는 초의 위협으로 산관을 넘기는등 조선에게 짜증날 일을 여러번 했다.
확실히 편을 정하라는 장약의 조언에 영직을 자기 후계자로 낙점…하지 못하고 영직이 영탕이 괴로워함을 눈치채고 자진해서 희생해 조선에 인질로 간다. [9]
첫 등장의 단순무식함과는 다르게 왕으로써 불리한 상황에서 엄청나게 선전해 초를 몰아내고 위의 침입을 방어해내는등 합횡의 대전략을 붕괴시켰기에 승리왕 영탕 혹은 눈물 몇 방울로 실세이던 영직을 꾀어내서 협조를 얻어내고 또 눈물을 흘려서 다시 영직이 스스로 희생하게 만들어 실리를 있는대로 다 얻어간 행보덕분에 어장주도 속인 음훙한 놈, 혹은 귀큰놈(…)이라고도 불린다.
그러나 오랜 전란에 의한 기근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친초파라는 명분을 지나치게 사용한 대대적인 숙청의 결과 반란이 일어나게 되었고, 이는 결국 진나라의 주요인물들이 장약을 제하고 모두 그녀에게서 마음이 떠나는 계기가 되어 모두 자신들만의 길을 모색하는 형국으로 이어지고 말았다.[10]
믿고있던 수하 맹열의 배신으로 정무에 대한 의욕을 잃어 태자 영영에게 대리를 명하고 그 자신은 세월아 네월아 술만 마시고 지내던 중 점차 질환[11]으로 노쇠화하여 시종들에게 자주 역정을 내어 종국에는 한명만 남게되는데 이 남은 시종 하나가 영탕의 시중에 지치고 몰린 나머지 영탕이 위급할때 이를 못본척 하고 죽도록 내버려두어 기원전 278년에 최후를 맞이하였다.[12]

연종이 성립되는 첫 회맹 때 등장한 원 역사에는 없던[13] 영탕의 태자. 해갈이 힘든 기근에 시달린 진나라의 존속을 위해 어머니인 진왕 영탕이 거의 단순히 초나라랑 관계가 있기라도 하면 그걸 빌미로 죽여대[14] 입을 줄이면서까지 어떻게든 진나라가 지원을 받을 수 있을 때까지 버티게 한 탓에 이전까지는 영탕을 중심으로 결속되어 있었던[15]대다수의 중진들에게 반발을 사며 여태까지 단결하며 이어진 투쟁의 결과에 회의감을 심었기에, 어머니 스스로가 느끼기에도 어쩔 수 없는 결정이었지만 그 후속 조치로 후계구도를 공고히 하기 위한 목적으로써 회맹의 보좌에 낙점되었다.
영탕에게 반어거지[16]로 대리청정을 맡게되어 어머니 대신 진나라 국정을 돌보고 있다가, 기워전 278년 어머니인 영탕이 사망하고 그 자리를 물려받아 진왕에 오르게 되었다.
본인의 세력은 선왕때부터 자리를 지켜온 장약 정도이고 친조선파의 지지를 등에 업은 영통과 조선에서 돌아와 서부의 지지를 받는 영직사이에 끼인[17] 끝에 자신에게 힘을 실어주기 위해 조선이 국내로 불러들인 사이 영통에 의해 상왕이 되었다가(...) 연종에 의해 정상화되었기에, 직후 이어진 함양 회맹에서 사전에 영직과 의논한 할양안을 넘어 그 이상의 영토를 할양해 태왕의 환심을 얻으려 할 정도로 진나라 사람을 못 믿고 자신의 왕위에 대한 두려움에 떨게 되었다.

2. 공/왕족 영(嬴)씨[편집]


원 역사에 따르면 상앙에 의해 태자 대신 벌을 받아 코가 잘렸어야 할 인물. 그러나 상앙이 조선으로 가버리면서 영거량과 죽이 잘 맞는 친척 포지션이 되었다(...) 진헌공 시절 균개가 시도했으나 좌절되었던 조선과의 교류를 튼 정도의 공적이 있다. 그 영향인지 영거량 시대에 진나라의 사신으로써 기용되었다. 영거량이 죽고 그 후계인 영사는 가족조차도 쉬이 믿을 수 없는 상황임에도 점점 노구가 되는 몸에도 불구하고 어쩌다 보니 영건을 임기 응변 용으로 계속 중용하였고, 이후 그런 상황 속에서도 천수를 누리고 퇴장하였다.[18] 남녀를 가리지 않고 코를 베이면 외모를 너프(...)당할테지만, AA적으로 여성이 된 상황에서 그 굴욕을 당하지 않은 것만으로도 원 역사보다 행복하게 살다 간 편이라고 할 수 있겠다.
영거량 시절 제나라에 인질로 보내진 적이 있다. 지혜의 영질(저리자) 힘의 임비라는 소리를 들은 네임드이다. 공손석의 절친. 인질 생활을 다녀와서 진나라의 수뇌부로써 활약했지만, 서하를 뺐긴 시점에서 동맹국인 초가 국방에 중요한 무관을 할양하라는 요구에 격분, 초의 사신으로 온 굴원을 죽이고, 이후 협상을 시도하러 온 장의를 죽이면서 진초전쟁을 개시하는 계기가 되었다. 경취를 상대로 패전하고, 전반도 경취에게 패전하면서 수도 함양 코 앞인 남전이 함락되고 초나라로 압송되었다. 이후 굴개가 굴원의 복수로 압송되던 영질을 베어서 사망. 이후 공손석은 복수를 위해 진나라를 떠나 중원을 주유하다가 한나라에 정착한다.[19]

진나라의 뛰어난 장수. 이민족과의 전투에서 큰 공을 세웠으나 오만한 행동을 보여 영사에게 배척뱓는다. 급기야 그를 견제하기 위해 기용한 영화를 실각시키기 위해 쿠데타를 모의하다가 적발되어 사형당하고 만다.

진나라의 뛰어난 장수. 영앙과 마찬가지로 이민족과의 전투에서 공을 세워 승진한다. 군공으로 인해 견제받다가 낙향한다. 이후 왕위쟁탈전에서 본인이 왕이 되겠다고 선언했다가 아무도 따르지 않자 위태후에게 투항하여 영탕의 일파가 된다. 그러나 다시 견제받고 낙향하는 신세가 된다.
영사의 삼남. 백기와 함께 파나라 원정을 가던 중 영사의 사망을 알게 되었다. 빠르게 군공을 세우고 촉나라의 군사를 빌려 회군하여 왕위 쟁탈전에 참여하려던 도중 그를 탐탁지 않게 여긴 백기와 촉나라에게 살해당한다.

원역사의 진소양왕. 여기서는 적장자로 태어났다.
어머니 미왕후[20]와 아버지 영사에게 큰 사랑을 받으면서 자랐고, 초나라에서도 친척인[21] 영직을 왕위에 내세우고자했으나 조선의 개입으로 실패. 완으로 물러갔다. 거기서 진이 무관을 공격하는데 지칠 때 돌아간다는 계획을 세웠지만, 이 또한 305년에 초나라가 재정의 한계가 와서 무관을 진에게 할양하면서 실패했다. 마지막으로 초에 와있던 고애가 소진과 위는 진나라 내전에 개입하지 않았다는 주장을 믿고 도박수를 던져 소진과 접촉했고, 이는 합횡을 재시동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후 하남대전에서 합횡군이 승리하여 진나라에 대량조[22]로 복귀하게 되나, 민심은 그녀를 초나라의 주구로 간주하였고, 진나라 주요 인물들은 형식상으로만 그녀를 따를뿐이었기에, 그녀의 비원[23]은 이루기가 쉬워보이지 않는다.
결국 영탕과 대화하며 초나라보다 진나라를 중시하는 자신의 마음을 나누며, 악평을 자신이 다 뒤집어쓰기로 하며 영탕을 적극적으로 지지한다. 그러나 친초파의 수장이라는 입장탓에 결국 선택을 강요받고, 최종적으로 영탕이 후계자로 밀어줄 만큼의 마음은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 진의 왕위를 포기하고 가신들과 함께 조선에 인질이 되어 맥성에 자리잡는다.
처음에는 왕위에 대한 미련을 버린듯 보였으나 사마근이 서신으로 진의 상황과 영직을 지지하겠다는 의사를 보이면서 서서히 왕위에 대한 야심을 보이고 영탕이 자리에 누워 위중하자 태왕 기설에게 귀국 의사를 밝힌다. 이때 기설은 영직이 귀국할경우 진나라가 다시 혼란스러워 질것을 우려해 태자 영영의 대관식 이후에 가라고 제안하지만, 즉시 눈물을 흘리며 재차 간곡히 청하자 하동의 경현에 대기하고 있다가 영탕이 죽으면 즉시 귀국하는 형태로 허락을 맡는다.[24]
그렇게 하동에서 사마근이 보낼 소식[25]을 기다리던 중 자신을 돕겠다는 유세객 우경을 만나고 이 우경의 추천으로 인상여와 연이 닿게된다. 인상여가 내비친 연종붕괴론에 동조하면서 진나라의 미래를 위해서 연종을 해체하고 그 수단으로 서초원의 강자 돌궐을 언급한다.[26] 이후 사마근의 연락으로 진에 귀국하고 재회한 영통에게 자신을 진 서부로 보내고 그 감시역으로 사마근[27]을 언급하면서 타협하는데 성공한다.
그러나 영통이 쿠데타로 인해 붙잡히고 감옥에 갇히고 이제 진에 남은 희망이 사라졌다며 통곡한다. 서부와의 협상용을 목숨은 살려두었지만 사실상 풍전등화 같은 신세로 전락, 하지만 조선이 연종군을 소집하여 함양으로 진군하자 진동부가 그대로 투항하여 순식간에 함양 앞까지 진군하자 이에 충격받은 영통이 다시 불러들어와 대책을 논의하게 되었다. 이후 감옥에서 단식을 감행해 비루한 모습으로 태자 기도와 숙부 위염에게 보이며 동정론을 일으키고 어떻게든 진 외부로 나가지 않기 위해 노력중이다.

위의 관중경락전 당시 중천에서 사마착의 원군이 올 때까지 필사적으로 위군을 저지하면서 등장하였다. 막 내전이 끝나 모든 면에서 어수선하거나 여력이 부족했던 당시의 진나라에서 본인의 위치가 뚫린 다음의 여파는 굉장히 치명적이었기에 크기는 둘째치고 가장 결정적인 공을 세운 인물. 다만 원군의 장이자 당시 상관이었던 사마착의 판단 때문에 이것이 더 큰 성과로 이어지지는 못하였다.
이후 공적을 위해 자신의 성 내의 친초파를 자극해 반란을 일으키게 한 뒤 쓸어버리려는 계획을 세웠고 백기와 대화하는 와중 계획이 성 내로 새어나가서 참살당한다.

영사의 딸들 중 하나였으나 반 영직 파벌이 추대하기엔 배경세력이 너무 미약해서 별궁에 감금되었다. 이후 원래 등장 판정에서 진장에게 역할을 뺴앗기고 다시 공기화 되었다가 조선으로 볼모로 보내진다. 합횡전에서 조선이 패배한 후 진나라는 일단 합횡에 들어가면서 조선과는 척을 지지 않으려 했는데 이에 조선이 그 신뢰의 징표로 영통의 신변보장을 요구해 소량조[28]로 임명, 모브에서 벗어난다.
친조선이나 친초 같은 성향이 따로 있는 게 아닌 진나라를 우선시하는 성향이지만 그와는 별개로 영직 때문에 개고생한 것 때문에 영직을 싫어하며 입지 상 조선과 영탕의 지원이 필요한 상황. 하지만 뒤를 봐 줘야 할 조선은 힘을 아껴야 하는 상태고 영탕은 초나라 세력의 영향을 벗어나기 위해 수도를 비우고 서쪽으로 가 버리면서 아무런 뒷배 없이 스스로 인맥을 쌓아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
조선의 연종질서가 확립된 이후 반쯤 폭주에 가까운 행보를 보이는 영탕으로부터 유사시를 대비하기 위해 자체 세력을 양성하려 하였는데, 이 때 경현군 조승의 전폭적인 지원으로 재정과 인맥 등의 문제를 해갈하였다.
영직이 인질이 되어 조선으로 가고 영탕이 맹열의 암삼사건을 계기로 뒷방에 틀어박히자 태자 영영을 보좌하여 주요 국정을 운영하고 있으며, 영탕이 죽고 영영이 왕위에 오르지만, 여전히 실권을 쥐고 있다. 이탓에 영통의 휘하 인물들에게 어린 영영보다 영통이 왕위에 올라야한다는 주장이 올라오고 영통은 이를 일언지하에 거절하고 있었으나, 결국 이에 넘어가 영영이 기설과 회담을 위해 국내를 비운사이에 쿠데타를 일으켜 정국을 쥐고 끝내 왕위에 오른다. 그러나 조선의 연종군 소집과 진격에 진 동부가 저항 한번 하지 않고 그대로 투항한것에 충격받아 감옥에 가두어둔 영직에게 대책을 묻고 영직 휘하 인상여에게 그녀를 지지하는 이들과 함께 연종군과 처절히 싸우다 죽을것은 주문받는다. 이에 각오를 다지고 군사 3만을 이끌고 함양 앞에서 조선,송 연합군과 회전을 벌이지만 중과부적으로 대패한다. 마지막까지 자신을 지지하는 이들과 더불어 최후의 돌격을 감행하고 전사한다.[29]

영직의 동복동생. 영직이 조선에 인질로 가면서 같이 끌려가게된다.

영직의 동복동생 영직이 조선에 인질로 가면서 같이 끌려가게된다.


3. 기타 이름있는 자[편집]


영사습의 측근. 본래 진영공파의 사람으로 진간공에게 찍혀서 한직에 있었다. 이후 진간공 및 후혜공의 재위기간 동안 공작을 주도하여 영사습이 진나라로 귀환할 때까지 유리한 판을 깔아놨으며, 그 덕에 영사습의 귀환을 원 역사보다 빠르게 이룰 수 있었다.[30] 기식 대에 순우곤의 부추김으로 진이 조선과 수교하려 하였을 때 그 사절로써 보내졌으나, 조선과 진이 같은 문제를 공유한다는 공감대를 형성한다는 것을 파고들려다 되려 조선후 기식이 이 점을 이용해 완곡하게 거절당하고 귀환한다. 이후 공숙좌의 공격으로 영사습이 패퇴하는 과정에서 만일의 경우를 위한 증원을 미리 명했을 때 사병 5000여명을 이끌고 진나라 서부군 일부와 함께 사습의 본군에 합류하는 것을 끝으로 하여 영사습의 사망 이후 마치 뒤를 따르기라도 하듯이 어느 새 사망.

본디 위나라에서 흔양과 콤비로 동부군을 담당했던 인재이나, 공자 위완이 찬탈을 목적으로 행동할 당시 흔양과는 달리 빠져나오지 못하여 결국 보수를 명목으로 위완의 편에 섰다가 이후 위완이 어이없게 패배하는 과정에서 말 그대로의 단신으로 진나라로 탈출하여 잘 중용되었다. 이후 중원대전 당시 원역사 적으로 세트메뉴 취급이었던 흔양이 죽은 것으로 판정되자 그 덤으로 함께 사망판정을 받아 세상을 떴다(...)

영거량 시기의 귀족 대표격으로 출현한다. 특히 호구 조사에 개입하려 하다가 그 얕은 수 때문에 찍소리도 못하고 역으로 기세에서 눌려버리고, 문인에게 정보를 술술 퍼주는데 당시 그녀에게는 완벽한 초면이어서 눈치가 빠른 영건에게 찍히는 등의 인상적인 활동을 보였다.
이후 혜문왕 영사 대 초까지 등장 자체가 거의 없었으나, 서하대전의 대패로 실추된 진왕의 권위를 놓치지 않고 영사와 담판을 벌여 여태까지 왕가가 개혁을 위하여 들인 인사를 숙청해도 된다는 허락을 받아 본인의 언급을 빌리자면 본디 자신들의 것들을 되찾으며 화려하게 귀환[31]하였다.

본래 방연을 따라서 위나라에서 방연이 자리잡을 때 즘에 출사할 생각이었지만, 이후 방연의 출세가 더디게 되면서 스스로 방연의 연줄을 포기하고 나와 슬개골이 적출되는 비극을 겪지 않았다. 고향인 제나라에 큰소리치고 나왔던지라 돌아와서 관직을 요구하기는 좀 그랬는지 위나라 때와 다를 게 없는 니트생활을 보내다가,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어서 진나라에 출사하여 관직을 얻었다.
이후 서하의 거의 완전한 병탄을 이루는 성과를 거두면서 본래 역사에서 공손앙이 영지로 받았던 상 지역을 얻는 등의 출세를 하였다. 상 지역에서 소해휼이 총대를 매고 진행한 공성에서 주군인 거량과 자신을 상대로 생각외로 선전한(?)소해휼을 보고 저런 자가 적이라면 빨리 죽어야 할 텐데 뉘앙스의 반응을 보였다.
이후 서하지역의 완전 병탄을 위해 왕성으로 파견되었는데, 적의 병력 운용 방식을 보고 적장이 방연임을 간파하였다. 방연이 역사대로의 악행을 저지르지 못한 탓에 악감정이 없어 동문으로써 가급적 목숨은 살려주고자 하였지만, 그런걸 생각할 겨를도 없는 압승으로 뜻을 이루지는 못하였다. 이후 쾌진격으로 안읍을 노리기 직전까지 갔고, 진나라는 이때 점유한 지역중 왕성을 제외한 지역을 댓가로 함곡관을 얻는 등의 성과를 낸다.
그러나 영거량의 말년에 한나라의 완 지역을 얻기 위하여 계획된 공세에서 수많은 난제를 극복하지 못하고 성과 없이 물러나야 하면서 그 손빈이라도 어쩔 수 없는 것이 있음을 증명하기도 하였다.
혜문왕 영사 시기에 총책임자로써 재차 동부, 특히 민지를 목적으로 한 공세를 준비하다가 사망했는데, 손무처럼 나이를 먹고 자신의 삶에 대한 일종의 회의감 때문에 도가적인 행동에 빠져들다 스스로 아사하여 대대적인 차질을 주는 실책을 저지르는 결말이 되었다.

돈의 성향상 이름을 계승받기 때문에 세월이 흘러 세대가 교체되도 여전히 AA가 토니 스타크로 고정되는 인물. 묵가 진나라 지부의 설립 당시에는 3대째였다. 공학 관련의 여러 분야를 파고드는 묵가 중에서도 특히 치수 쪽에 정평하여 외부요인의 개입이 없을 경우 정국거의 완성에 약 15년 정도의 기한을 책정하고 달려드는 등의 활동을 하였다. 강력한 힘 아래의 천하의 일통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으며, 영거량을 떠보기도 한다.
그러나 영거량 말년에 전후 책임으로 인하여 거의 희생양급으로 점찍혀 본인은 파직되었으며, 영사 시기에 서하대전으로 인하여 왕의 권위가 실추되어 귀족들과 타협하는 과정에서 비록 주 목적은 조선에서 파견된 법가계 인사들이었다지만 자신의 사람들 또한 일부 희생되는 불행이 있었다.

종횡가 중 1인. 영거량 시절 진나라에 출사할 마음을 먹었다. 이후 영사 시기 주 왕실을 충동하여 전인제의 패자 체제에 좀 더 균열을 가하는 등 활약했지만, 진나라 왕위계승내전 이후 그 행적 때문에 자신의 사람인지를 확신할 수 없었던 영탕에게 처형당했다.[32]

전국시대의 최고 명장중 하나인 그 백기이다. 원래는 전장에서 죽기 싫어서 벌벌 떠는 모습을 보였지만, 농서 약탈전에서 살기 위해서는 떨면 안된다는 위염의 말에 각성, 우리가 아는 그 백기가 된다. 원역사 진나라와는 다른 환경이지만, 원래부터 지는 전쟁 나가기 싫다는 성격과, 싸이코패스 끼가 있던지라 보신주의자 싸이코패스란 별명을 얻었다(...) 하지만 능력은 확실히 출중해서 산동대전에서 대활약하고, 사실상 무관을 되찾아오는데 결정타를 날리고, 위의 관중경락전에서 음진현령과 함께 위의 음진 방면 공세 병력을 분쇄해버리는 등 엄청난 성과를 자랑하는 중이다.
그 특유의 보신주의로 영탕이 몸소 기근을 해결하기 위해 시행한 친초계 백성들의 숙청에 대해서는 편을 확실히 안 정한 것이 잘못이라는 반응을 보였다. 그러나 이때의 숙청으로 인하여 진나라 서부지역이 반란을 일으켰고 초기진압에 실패한 조정은 반란군 수장 여례와 협상하여 숙청의 실행자였던 백기를 제물로 타협을 보았고, 함양에서 참수당한다.[33]

원역사에서는 장의와 진출방향을 두고 대립하기도 한 그 사마착. 사마조라고도 부르는 듯하다. 첫등장에서는 원역사와 마찬가지로 파촉 정벌을 건의했고, 그게 받아들여져서 파촉원정을 준비했다. 하지만 서하대전에서 패배하고 나서는 초나라 배격을 최우선시해서 영사가 부탁한 영직의 보좌를 받아들이지 않기도 했다.[34] 그럼에도 영사를 생각해서 진나라 내전 때 영탕을 편들기를 망설였지만, 영탕이 영사 때 구호인 서유대진 여일방승이란 구호를 보고 영탕을 지지. 남전을 수복하는 성과를 보였다. 이후에는 순양과 상용에서 대활약하고 월지의 약탈을 방어하는 등[35] 다방면으로 혹사활약중.
영탕의 재위기 군부 중진으로써 마치 군인은 정치에 관여하지 말아야 한다는 듯한 중립적인 정치색을 가진 것인지 영탕이 기근 때문에 사실상 입을 줄이려고 친초의 꼬투리가 있는 상당수의 백성을 쳐내갈때는 적잖은 노기와 함께 중단을 종용하였으나, 끝내 반란이 발발할 지경이 되자 사마착 또한 자체적으로 세를 증강해 진나라의 만약을 대비하는 처지가 되었다.
손녀의 생각을 알지 못한 채 명을 다하며 본인의 세력을 승계하게 된다.

영탕의 친모. 진나라 왕위계승전 이후 잠시 영탕의 섭정이 되었지만 이후 지나칠 정도의 간섭으로 영탕에게 끌어내려졌다.

진나라 왕위계승전 당시 운영현령으로 조선에서 돌아온 영탕일행을 맞이하고 그녀의 편으로 갈아타서 영탕이 와위에 오르자 출세하게되지만, 지나친 반초 인사였던 탓에 하남대전에서 조선이 패배하고 진이 합횡으로 갈아타자 영탕의 손에의해[36] 숙청된다.

영거량 시절 진과 초의 혼인동맹으로 영사와 혼인하게 된 초의 왕족. 나이 차이가 한참 났기에 영사가 죽는 순간까지도 그를 남동생 대하듯 하였고 영사 쪽에서도 감성적으로는 많이 의지하였다. 영사 사후에는 자신의 딸이자 영사가 가장 아끼던 자식인 영직에게 부모로써 많은 조언을 해 주며 그 행보를 지원하였고, 결국 영직이 가족과 진나라, 특히 언니인 진왕 영탕을 위하여 스스로 바랬던 모든 것을 내려놓고 조선의 인질로 스스로 걸어들어갈 때도 휘하의 일가친척과 함께 그녀의 곁을 따라가주었다.

원 역사적으로 진나라가 상무 경향이 강한 탓[37]에다 본디 진에 왔을 상앙이 여기서는 조선으로 가버린 탓에 문관계 진나라 네임드라는 이미지가 강한 아마도 작중 최초의 인물(...) 주요 역할은 완벽하게 영탕의 조언자이다.
여례의 반란과 백기의 처형 이후에도 아직까지 영탕을 믿어주고 있는 이제는 유일의 최측근.
영탕 사후에도 영통과 함께 국정을 이끌고 있었기에 영통의 세력을 경계 자체는 했으나, 결국 영통의 거사 당일 원래 목표에 가까운 영직 일파와 함께 신병을 구속당한 뒤 국정 농단 명목으로 처형당했다.
죽기 전에 영통의 계획이 성공할 경우를 가정한 축하와 그 성공으로 이루고자 하는 것에 대한 비아냥을 유언으로 남겼다.

영탕의 총애하는 무장이지만 머리가 모자라서 영탕도 중요한 일은 맡기지 않는다. 영탕의 총애를 받은 만큼 영탕을 지지하는 신하중 하나. 영탕의 지나친 숙청에 대한 반발로 현재 영탕과 태자 영영을 암살하고 동생 영통을 왕위에 올릴 계획을 꾸미는 중에 발각되어 사로잡히자, 일절의 변명 없이 당당하게 역모를 모의했음과 역모를 꾀한 이유를 쏘아붙이고 처형되었다.
영탕은 그래도 측근이라 생각했었던 만큼 잠시 혼절할 정도로 충격을 받았다.

위왕후의 측근으로 위왕후의 섭정시기 그녀의 참모로 활약하였다.

미왕후의 동생으로 영직의 외삼촌이자 그녀의 최측근 중 하나다. 영직이 초에 있던 시절부터 그녀의 명을 따라 위와 조선에 정탐을 다녀왔고 영직이 조선에 인질로 보내졌을때 저항하려던 미왕후가 허튼짓을 벌이지 못하도록 감시하였다.

함곡관 공방(및 영환의 소량 공격 시도의 크로스 카운터) 당시 함곡관의 수장이었던 자. 원 역사에서는 영탕의 장사들을 동경하는 성향 덕에 총애받았었다. 한나라의 사자신중충 계획을 무위로 돌리고 어떻게든 이를 합횡군으로부터 원군이 당도할 때까지 사수하였다.

영직의 최측근으로 영직이 어려서 초에 인질로 갈때부터 진에 돌아오고 다시 조선으로 가기까지 항상 영직의 곁을 지키며 보좌하였다.[38]

이름이 초원식이긴 하지만 일단 의거가 진나라와 교류한 시절 때문에 딱히 초원적 습성은 없다. 사실 위나라의 대장군 경리를 저격해 죽인 범인이며 의거왕 차원에서 범인을 흉노로 몰기 위하여 진나라에 피신해 있던 중 영직의 측근 상수를 만나고 영직을 위해 의거출신이 자신에게 서슴없이 무릎까지 꿇은 상수의 자세에 감동하여 영직측의 객장이된다. 후일 의거가 진에게 귀부의 형식으로 완전히 멸망하였기에 이제는 의거 지방 출생의 완전한 진나라 사람이 되었다(...)

사마착의 손녀. 출사도 전부터 신차가 죽어 장군 한 명이 급한 한나라의 스카우트 제의를 받았지만 안 그래도 진 군문의 명가 출신이라 앞날이 보장된 곳을 두고 떠날 이유가 없어 거절했다.
진의 생존을 명분으로 영탕이 매우 극단적으로 친초 분자를 선별해 참살해나가자 이에 반발한 할머니의 의견에 자연스레 동조하였으며 여례의 반란과 백기의 숙청을 계기로 조선과 영직[39]에게 줄을 대기 시작하는 등 차후를 모색하고 있다.

조선출신 종횡가로 경쟁사회 조선에서 취업이 힘들어지자 마침 반란이 터진 진나라에서 공을 세워 출세해보려고 스스로 중재자로 나서서 협상을 진행하였다. 협상자체는 원만하게 타결되었지만, 진조정...정확하게 영탕이 너무나도 냉정하게 백기를 팽하는것을 보고 진나라에 가망이 없다 여겨 백기를 빼네어서 함께 송나라로 떠나자고 제안한다.[40][41] 그러나 이 두사람을 철저히 감시하고 있던 영탕에게 발각되어 함양에서 처형당한다.

영탕의 숙청에 대한 반동으로 진 서부지역에서 반란을 일으킨 반란군 수장. 이후 독립적인 행보를 위하여 서부의 이민족들과 협정을 맺었지만, 사마착의 근거지가 바로 옆동네인 탓에 함부로 움직이진 않고 있다.
그러다 하필 조선- 진-돌궐 경로로 돌궐에 궁궐용 목재를 조달하는 사업에서 어떤 명분도 없이 목재를 가장 높은 지분으로 횡령하여 이를 이용한 영탕과 영통의 계책으로 돌궐가한의 연줄을 잃었다.[42] 영직이 진나라에 복귀하고 서부에 부임하면서 중앙에 배척된 서부에 대해 사과하면서 자신과 함께해줄것을 요청하자 눈물을 흘리며 그녀의 휘하가 된다.

조선출신 유세가로 묵가 한단지부에서 신세지는것으로 첫 출현하였으며 이때 인상여와 공손룡과 친분을 맻게되었다. 이후 진왕 영탕이 위중하다는 소식을 듣고 진나라에 출사하기로 결심 하동에 있던 영직을 찾아가 그녀의 휘하로 들어간다. 신의를 중히 여기는 성격으로 영직에게 임관할때도 이에 관하여 언급한다.[43] 자신을 따라 동행한 인상여를 영직에게 소개해준다.

조선출신 유세가로 사람을 관찰하는것이 취미라 하면서 중원과 초원[44]을 떠돌며 이름있는 사람들을 만난다.[45] 이후 묵가 한단지부에서 사람 관찰한다는 핑계로 눌러앉아 묵가인들의 지탄을 받지만 아랑곳하지 않는 철면피를 보여주면서 우경, 공손룡과 친분을 맻게된다.
진왕 영탕이 위중하다는 소문을듣고 진나라로 향하려는 우경을 따라 동행하였고, 우경이 영직에 임관하자 그녀가 모시는 영직에 대해 알게된다. 이때 조선이 만든 연종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언급을 하였고 이것이 영직의 마음에 들어 관심을 끌게 되었으나,[46] 영통의 난 이후 영직이 위경으로부터 받은 언질 등으로 인해 뜻이 갈라지게 되자 진나라를 떠나 돌궐에서 유세를 하여 연종을 뒤흔들 기반을 갖추려 했지만 이미 조선은 돌궐에게 관제 연수를 제안하여 돌궐이 승낙해 시작도 전에 막히고 말았다.

진나라 대부[47]로 영통측의 인물. 영통에게 영영을 몰아내고 왕위에 오르라고 주장하고 있으며, 영통을 왕위에 올린 공적으로 출세하는것을 목표로 하고있다. 결국 영통을 충돌질하는것에 성공하여 거사를 일으키지만, 연종군이 소집되고 진나라 동부가 저항없이 항복하는 모습에 바로 영통을 버리고 잠적한다.
그러나 진나라 조정의 적극적 색출로 끝내 붙잡혀서 영영 앞에 끌려가 처형당한다.

촉나라 출신으로 종횡대전 당시 관중전선에서 참전했었고, 촉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진나라가 초를 막아주어야 한다는 생각에 진으로 넘어와 임관하였다. 영통측 인물로 호양과 더불어 영통이 왕위에 올라야 한다고 생각하는 인물. 다만 호양이 자신의 출세를 목적으로하는것과 다르게 어린 영영보다 영통이 왕위에 오르는것이 진을 위하는 일[48]이라 생각하고 있다. 호양과 더불어 영통을 충돌질하는것에 성공하여 거사를 일으켜 장약을 사로잡는 공을 세운다. 그러나 연종군이 소집되고 진나라 동부가 저항없이 항복하는 모습에 바로 영통을 버리고 잠적한다.
고향으로 돌아가기 위해 산관은 넘어 남정까지 오는데 성공하였지만 아직 진에 남아있는 동지들의 탈출을 위해 남정에 남아 탈출작전(?)을 지휘하고 있다.

4. 기타[편집]


이민족과의 기나긴 악연을 자랑하는 진나라에서도 그것을 매일같이 피부로 느끼던 서부군의 담당자. 덕분에 이민족 혼성군 상대하는데 이골이 난 것인지, 이들을 동원한 촉나라의 공세를 효과적으로 저지하였다.


  • 진 백성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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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오기가 서하주둔군을 담당하던 시절의 일이다.[2] 당시 영거량은 본인이 출전하고 싶어했지만, 하필이면 당시 임신 중이었기에 영건에게 제지당한 후 손빈을 대신 보냈다.[3] 이 한탄에 대해서 영사가 고민한 결과가 바로 제나라의 패자 직위였고, 이는 328년의 낙양사건에 큰 영향을 미친다.[4] 유폐하거나 죽이거나라는 의미의 처리였다.[5] 이 일로 참치들 사이에서는 역시 빌런은 빌런답게 인성 개판이라는 평가를 얻었다(...)[6] 이는 원래는 서장자였지만, 조선으로 보내면서 적장자로 승격하고, 초나라에 영직을 보내면서 다시 서장자로 강등했기 때문이다.[7] 당시 위나라는 조선을 상대로 합횡을 기획하고 있기에 이 때 어떻게든 길을 빌려주지 않았다.[8] 초나라가 합종에 참여함에 있어 위나라에게 가급적 달성을 요구한 조건 중 하나였다.[9] 이는 언니로써는 몰라도 왕으로써는 최적해였다. 조선의 신뢰를 얻고, 후계가 꼬일 상황을 막아내고, 친초파를 숙청할 길이 되었기 때문[10] 그나마 초동대응까지 실패하여 희생양으로 백기를 내치는 선에서 끝난 것은 진나라 백성들에게 이전까지의 행보로 여전히 지지받고 있어서였다.[11] 섬망[12] 들리지는 않았으나, 마지막으로 읊조린 말은 자신을 죽여달라는 것이었다.[13] 원 역사의 영탕이 자녀도 없는 상태에서 구정을 들겠다는 괜한 생쇼하다 무릎을 다친 게 도져 죽어서(...) 그렇다.[14] 친초파 문제가 대두된 것은 이 때로부터 몇십년 전부터의 일인데다, 갖은 노력으로 친초 성향이 매국행위까지 갈 극성 친초파들은 이미 수차례의 숙청과 진압을 통해 자취를 감춘 지 오래였다. 남은 이들이라고 해도 오히려 어디까지나 진을 위해서 내린 판단 하에 초와 친해질 필요는 있다 정도가 가장 극렬한 입장일 정도였고, 아예 진의 중진 중에서 해당 기준을 적용하면 영탕부터가 친초 위험분자라는 지적을 해 줄 지경이었다...[15] 이는 심지어 영직과 영탕의 항목에서 보듯 웬만해서는 정치적으로 대적할 관계였던 영직조차도 예외가 아니었다.[16] 밑었던 수하인 맹열의 배신에 의욕을 잃고 칩거 중[17] 거기에 영통의 지지자들이 영통을 충돌질 하는것을 보았기에 스스로 더욱 불안해 하였다.[18] 심지어 영사는 회맹에 자신의 대리인 자격으로 파견해버리기까지 했는데, 이 때 일이 잘못될 경우 대리인으로써의 자격 미달을 이유로 꼬리를 자를 생각이었다.[19] 여담으로 지력이 100이고 안 그래보이는데 다혈질인 점에서 어장주는 세후와 가장 닮은 성격이라 표현했다. 무엇보다도 죽기 직전 자신의 눈 앞에서 최소한 자기네 나라라면 볼 일이 없는 국가적 개판(...)을 눈앞에서 목도하자 그대로 크게 미친 듯이 웃다가 베여 죽었다.[20] 원역사의 선태후[21] 미왕후는 초나라 왕족이다.[22] 재상으로 타국의 상방과 동일하다.[23] 왕위[24] 이때 기설이 보여준 반응이 마뜩치 않은것으로 보아 영직을 경계하는듯 하다.[25] 영탕 사망소식[26] 이전부터 참치들이 우려했던 중원과 초원 양사이드로 조선을 압박하는 전략이 언급된것이다.[27] 영통은 사마가문이 영직에게 붙은 사실을 모른다.[28] 왕-대량조 바로 다음의 직책으로 사실상 3인자.[29] 인상여의 주문대로 자신을 지지하는 이들 모두 끌여들여 함께 죽기로 다짐했다.[30] 원 역사에서도 영사습을 맞아들인 건 균개였으나 여기선 좀 더 빠르게 이뤄졌다. 사실 이는 본디 이름없는 귀족 포지션이었으나 해당 행보에 부합하는 인물이 있음을 뒤늦게 찾은 스레주에 의해 균개가 된 것도 있다.[31] 물론 진나라와 진 왕가의 입장에서는 재차 드리운 암운이겠다만.[32] 퇴장 직전 영탕에게 사실 너의 아버지는 너 말고 영직을 왕으로 만들고 싶어했다는 말을 하려다가 말았다.[33] 죽기직전 자신은 왕에게 충성을 다했다며 울며불며 살려달라고 간청하였지만, 영통은 냉정히 백기를 잘라버렸다. 물론 이는 진나라 군부 내에서 근왕파이자 중견급 인물을 날려버린 것이므로 엄청난 타격임은 말할 것도 없었다.[34] 영직은 엄마가 초나라 사람이고, 본인도 어릴 때 초나라에 인질로 가서 친초파라고 여겨졌기 때문[35] 아이러니하게도, 진나라가 서하대전으로 몰락하는 것이 월지의 약탈 때문이였는데, 월지가 망하는 계기도 진나라를 약탈하는 것이였다.[36] 영탕이 숙청하지만 사실상 초의 요청으로 인해 죽었다.[37] 실제 진나라 행동 판정 중 내정에서도 일부 부문을 빌미로 외정이나 군사행동에 가까운 짓을 내정이라 간주하고 할 수도 있었던 적이 꽤 되었다.[38] 더불어 영직과 침상을 함께 하는것으로 추정된다(...)[39] 영직에게 보내는 서신에 자신이 영직의 균개가 되겠다고 언급하였다.[40] 송의 상방 위염은 백기와 친한사이인것도 있었다.[41] 백기를 송에 보내어 그 연줄로 송에서 출사해보겠다는 계획이다.[42] 진측의 사정을 고려해 애초에 일부 물량이 유출되도록 안배되어있긴 했지만, 다른 연루자와 달리 명분도 충분한 최소선도 없이 한 행동이라 시선이 도저히 고울 수가 없었다.[43] 영직은 손해보는 성격이라며 쓴웃음을 지었다.[44] 이때는 여비가 떨어져 돈벌겸 객지벌이로 나간것이라 취미와 연관은 없다. 본인도 이때 생고생 한것을 두고두고 후회하였다.[45] 비의와 소진[46] 원 역사에서 영직과 인상여의 관계를 생각하면 아이러니하다.[47] 진나라 출신이 아닌 외국인이지만 어디 출신인지는 밣혀지지 않았다.[48] 더불어 조국 촉을 위한 일이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