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관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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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김관제.jpg
성명
김관제(金觀濟)
본관
경주 김씨[1]
생몰
1886년 6월 18일 ~ 1951년 7월 1일
출생지
경상남도 고성군 개천면 명성리
사망지
경상남도 고성군
추서
건국훈장 애족장

1. 개요
2. 생애



1. 개요[편집]


한국의 독립운동가이자 한의사.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편집]


김관제는 1886년 6월 18일(추정) 경상남도 고성군 개천면 명성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1909년 안희제, 남형우, 윤세복, 이시열(李時說), 이원식(李元植), 김동삼, 배천택(裵天澤), 박중화, 신백우, 김태희(金泰熙) 등 80여명의 동지들과 함께 국권회복을 목적으로 한 신민회계열의 비밀청년단체인 대동청년당(大東靑年黨)을 조직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1910년 한일병합이 선포되자 1911년 만주로 망명하여 윤세복, 이시열 등과 함께 봉천성 환인현에 동창학교(東昌學校)를 설립하고 그 교사가 되어 교포자제에 대한 독립사상의 고취와 교육구국운동에 종사하였다. 그러나 동창학교가 폐쇄되자 1915년 압록강 대안 봉천성 흥경현에 일신학교(日新學校)를 설립하여 그 교사로 활동하였다. 1916년에 일신학교는 흥동학교(興東學校)로 명칭을 바꾸었다.

이후 의열단에 가입하여 조선과 일본에서 활동하는 애국지사들과 독립자금을 모집하고 한편으로는 일제 고관을 암살하고 관청을 폭파할 목적으로 곽재기, 이성우 등과 함께 1917년 12월 상해에서 폭탄을 구입 후 운반하는 과정에서 일본 헌병에게 체포되었고, 1920년 5월에도 이성부와 함께 상해에서 폭탄 13개와 권총 2정을 구입하여 옥수수 자루에 넣고 운반하는 과정에서 일경에 압수당하였다. 이후 중국에서 귀국하여 대구 약전골목에서 복양당한의원을 운영하며 한의사로도 활동했다. 국내에서 합법•비합법 독립운동을 지속하다가 치안법 위반으로 재검거되어 8.15 광복시까지 대구형무소에서 복역하였다. 8.15 광복 후 건국준비위원회 경북위원장, 민족혁명당 대표 등을 역임했다. 6.25 전쟁 발발후 좌익인사로 분류되어 대구에서 특무대(CIC) 조사를 받던 중 고문 후유증과 지병 등으로 1951년 7월 1일 옥사한 것으로 추정된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3년 김관제에게 대통령표창을 추서했고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1] 상촌공파 18세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