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도화(1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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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1825년 9월 6일
경상도 안동대도호부 일직현 귀천리
(현 경상북도 안동시 일직면 귀미리)[1]
사망
1912년 8월 7일
경상북도 안동군
본관
의성 김씨
자 / 호
달민(達民) / 척암(拓菴)
상훈
건국훈장 애국장

1. 개요
2. 생애



1. 개요[편집]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편집]


김도화는 1825년 9월 6일 경상도 안동대도호부 일직현 귀천리(현 경상북도 안동시 일직면 귀미리)에서 부친 김약수(金若洙)와 모친 진주 정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영특해 7살 때 이미 글을 지을 줄 알았고, 소학과 통감을 일찌감치 익혔다고 한다. 한번은 정재(定齋) 류치명(柳致明)이 여강서원에서 강학을 한 일이 있었다. 이때 그는 강학에 참석했지만 해가 저물도록 아무것도 쓰지 않다가 모임이 끝난 뒤 물러나 강론한 내용을 기록했는데 한 치의 착오도 없어 참석자들은 "총명함에 비견할 이가 없다."고 했다고 한다.

1849년 부친의 지시에 따라 류치명의 문하로 들어가 학문을 익힌 그는 성리학을 일찍 깨우쳤으며, 부모의 뜻에 따라 과거 시험에 응시했으나 과거제도의 문란함을 보고 환멸을 느껴 귀향한 뒤 평생 향리에서 학문을 닦았다. 그는 성리학 이론을 정리한 <성학진원(聖學眞源)>을 저술했고, 42살 때 부친상을 당한 뒤 정자(程子)와 주자의 저술을 탐독했다.

68세 때 유일(遺逸)로 천거되어 의금부도사를 제수받았고, 1895년 을미사변 이후 고종으로부터 의병을 일으키라는 밀지를 받았다. 사실 그는 군사에는 밝지 못했지만 안동 일대에서 명망이 대단했기에 선비들로부터 의병대장이 되라는 권유를 받았고, 결국 이에 따르기로 했다.

그는 곽종석, 김흥락(金興洛)·권진연(權晋淵)·강육(姜錥) 등에게 통문을 돌려 일본을 몰아내자고 알렸다. 이에 대다수가 응했지만, 곽종석은 임금께 대항하는 격이 되며 현실적으로 승산이 없으나 불가하다며 고사의 뜻을 밝혔다. 이후 김도현, 권세연, 유지호(柳止鎬)[2]와 함께 의병을 일으키는 일을 논의한 뒤 1896년 권세연이 최종적으로 의병을 일으켰고 그는 부장을 맡았다.

그러나 1896년 1월 28일 안동 관찰사 김석중이 지방과 서울의 관군을 규합한 뒤 안동부로 쳐들어오자, 권세연은 결사 항전했으나 의병의 전투력이 너무 약하여 끝내 패배를 면치 못했고, 결국 1월 29일 안동부를 내주고 퇴각할 수밖에 없었다. 권세연은 패배의 책임을 지고 의병장 직을 사퇴했고, 김도화가 그를 대신해 대장을 맡았다. 이 시기 김도화는 서상렬에게 다음과 같은 시를 보냈다.

당당한 대의를 펴고야 말 것이

늙은 이 몸 막대 짚고 뒤를 따라 왔소.

한 조각 붉은 마음 간 곳마다 서로 통함을

살아도 죽어도 맹세코 서로 도우리

펴는 도중 굽힘 있고, 굽히는 중에도 펴는 것이.

태악(泰岳)도 홍모(鴻毛)도 다 같은 이 티끌이라오.

밝고 밝은 이 마음 아직도 죽지 않은 것이

천일(天日)을 돌리는 그 일인들 어찌될 수 없으리.


그는 수령들 중 일제의 편에 섰다고 여겨진 예천군수 유인형(柳仁馨), 의성군수 이관영(李觀永), 영덕군수 정재관(鄭在寬) 등을 참형에 처하였다. 이어서 인근의 의진들이 군사적으로 연합하여 상주(尙州)에 있는 적의 병참(兵站)을 공격하였다. 3월 그믐에 함창 태봉에 주둔한 일본 수비대를 공격할 계획을 세우고 3월 26일 제1차 공격을 하였고, 29일(음 2월 16일) 연합 의진의 의병들이 모두 태봉을 향하여 진격하였다.

그러나 여러 차례의 격렬한 공방전 끝에 태봉 함락은 실패로 돌아갔다. 4월 2일 적군 50여명이 안동부로 들어가 시가에 불을 질렀다. 이때 안동읍 천여 호의 민가가 불탔다. 태봉 전투에서 실패한 후 안동부를 중심으로 한 일대의 의병장들은 다시 흩어진 군사를 수습하여 전투 준비를 갖추었다. 이때 안동 의진은 대장 김도화를 중심으로 하여 부장(副將) 유난영(柳蘭榮)·김하휴(金夏休)·선봉장 유시연(柳時淵)·소모장 이충언(李忠彦) 등이 활발하게 움직여서 많은 병력을 보충하여 안동읍을 중심으로 진영을 설치하였다.

이후 그는 영양의 김도현, 진보군의 허훈, 의성의 김상종(金象鍾), 선성의 이인화(李仁和)와 연락하여 일본군에 맞섰다. 그러나 고종이 아관파천을 단행한 뒤 의병 해산을 명령하자, 그는 자명소를 올려 비통한 심정을 드러낸 뒤 의병을 해산시켰다.

이후 향리에 은거하던 그는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청파오조약소(請罷五條約疏)를 올려 조약을 당장 폐기하라고 요구했다.

이는 임금이 욕을 당한 것만이 아닙니다. 군주보다 중한 것이 사직이요, 사직 보다 중한 것이 백성인데 백성이 장차 오랑캐의 노예가 되려 합니다.(중략) 오적을 용서하지 못할 죄가 셋 있으니, 첫째는 나라를 팔아먹은 죄요, 둘째는 외적과 은밀히 통한 죄요, 셋째는 군부(君父·임금)를 협박한 죄입니다.


1910년 8월 29일 한일병합이 선포되자, 그는 순종에게 상소를 올려 격렬하게 항의했다.

500년 역사의 왕위와 3000리 강토는 선대의 왕으로부터 이어받았습니다. 국가의 통치대권은 폐하의 사유물이 아니며 한 치의 땅도, 한 사람의 백성도 폐하의 사유물이 아닙니다. (중략) 폐하는 무엇을 하는 사람입니까. 무슨 사람이기에 이따위 짓을 합니까.(陛下何爲而爲此)


이후 대문에 '合邦大反對之家(합방을 절대 반대하는 집)'을 써붙이고 생활하다 1912년 8월 7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83년 김도화에게 건국포장을 추서했고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2019년 4월 12일, 문화재청은 <척암선생문집책판(拓菴先生文集冊板)> 한 장을 독일 경매시장에서 매입하여 국내로 들여왔다고 발표했다.#
[1] 의성 김씨 집성촌이다.[2] 독립유공자 유연성의 아버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