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국지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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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國地理志

조선 중기의 학자 한백겸(韓百謙:1552~1615)이 한국의 지리에 관한 사항을 여러 고서(古書)에서 뽑아 엮은 책. 1책 60장. 목판본.

해당 도서가 저술될 당시에 한백겸의 나이는 이미 예순이 넘었고, 팔에 붓을 들 힘도 없어서 아들 교흥(敎興)이 옆에서 아버지가 불러주는 내용을 기록하며 완성했다고 한다. 한교흥은 아버지가 사망하고 25년이 지난 인조 18년(1640년)에 경상감사의 도움을 받아 영영(경상감영)[1]에서 이 책을 간행했다.

내용은 중국 및 한국 사서를 인용해 삼조선 이래 고려 왕조까지 한반도 역대 국가들의 수도나 영토 변천 및 각지의 주요 방어거점, 그곳에서 벌어진 전쟁들에 대해 위치를 고증하고 자신의 사론적(史論的) 성격의 견해를 우안(愚按)[2]이라는 표현으로 덧붙였다.

부족국가에 대한 기록은 전한서(前漢書) 조선전(朝鮮傳), 후한서(後漢書)의 고구려전(高句麗傳) · 동옥저전(東沃沮傳) · 예전(濊傳) · 부여전(扶餘傳) 등의 원전을 약간 생략하여 거의 그대로 인용하였으며, 그 밖에 위씨춘추(魏氏春秋) · 통전(通典) · 동관서(東觀書) 등이 인용되고 우리 나라 자료는 인용되어 있지 않아 단군조선에 대한 서술은 없다. 이 부분에서는 부족국가의 위치 · 강역 · 종족 및 사실(史實)의 신빙성 문제가 언급되어 있다.

삼국에 관한 부분은 고구려 · 백제 · 신라의 순서로[3] 삼국 시대의 경우 문헌통고(文獻通考) · 송사(宋史) · 한서 등의 중국 문헌 말고도 동사(東史)[4] 삼국사기 고구려지(高句麗志), 고려사 · 동국여지승람 등의 한국 문헌도 인용되었으나, 사서의 인용 없이 서술한 부분이 많다. 고려시대에 대하여서는 고려사 본기(本紀), 여지승람의 인용이 한두 차례 있을 뿐 사서의 인용 없이 서술되고 있다.

국도(國都) · 봉강(封疆) · 형세(形勢) · 관방(關防)에 중점을 두어 서술하고 있다. 국도는 각 나라의 옛 국도를 시대순으로 쓰고 그 국도를 잡게 된 연혁을 밝히고 있는데, 첫 국도에는 개국 전설을 싣고 마지막 국도에는 왕들이 몇 대에 걸쳐 몇 년만에 나라가 멸망하였다는 내용이 기재되었다. 봉강 부분에서는 그 나라의 영역 내에 흡수된 부족국가나 역사적 유래가 있는 지명에 대한 설명이 있으며, 당시의 역사에서 전투 지역으로서 요충지였던 하천(江) · 언덕(峴) · 고개(嶺) · 성곽(城) · 요새(柵) · 군진(鎭) 등의 위치가 적혀 있고, 어느 곳인지 분명하지 않은 곳에 대해서는 저자의 견해를 밝히고 있다. 고려 시대에 관해서는 국도에서 개성부(開城府) · 서경(西京) · 남경(南京) · 동경(東京) · 강도(江都) · 중흥전(重興殿) · 신경(新京) · 북소궁(北蘇宮)에 대한 설명과 봉강 · 형세 · 관방에 대한 내용이 삼국과 마찬가지로 기재되었는데, 삼국에 비하면 내용이 줄어들었다. 위치가 거의 밝혀져 있다보니 자신이 특별히 내용을 덧붙일 것이 없었다고.

예외로 동국지리지에서는 발해에 대한 구체적인 언급은 없었으나 조선이 왜 약한 나라가 되어 끊임없이 외적의 침입을 받게 되었는가 하는 역사적 원인을 찾으면서[5] 그 원인을 고구려 영토의 상실에 있다고 진단했고[6] 이러한 관심 속에서 조선사의 일부로는 부정적이지만 발해를 고구려 계승국으로 보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발해사가 처음으로 고구려 역사 뒤에 붙여서 설명된 역사책으로 평가되기도 한다.

분량은 많지 않지만 우리 나라 역사지리학의 창시라는 점에서 중요한 가치가 있을 뿐만 아니라 이후의 역사지리 연구에 많은 자극을 주었다. 즉, 오운(吳澐)의 동사찬요(東史纂要)의 지리지, 유형원(柳馨遠)의 동국여지지(東國輿地誌), 신경준(申景濬)의 강계고(疆界考)와 동국문헌비고(東國文獻備考)의 여지고(輿地考), 안정복동사강목(東史綱目), 정약용강역고(疆域考), 한진서(韓鎭書)의 해동역사속(海東繹史續)의 지리고(地理考) 등에 영향을 미쳤다.

규장각도서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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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조선 시대에 각 도의 감영은 도내에서 쓰이는 책을 인쇄하는 일도 함께 맡고 있었다. 17세기부터 민간에서 돈을 받고 책을 필사해 빌려주거나 개인 혹은 문중 차원에서 책을 간행하는 일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활발하지는 못했고, 상업적인 목적을 겨냥한 방각본이 활성화 것은 19세기의 일.[2] 자신의 생각이나 안(案)을 겸손하게 이르는 말[3] 삼국사기 이래로 한반도 삼국을 서술할 때 신라를 앞세우고 그 다음으로 고구려와 백제 순서로 뒤따르던 것에 비하면 이색적이라는 지적이 있는데, 이 책이 고대 국가의 '강역'에 중점을 두고 서술된 책인 이상 한국사에서 가장 강역이 넓었던 고구려가 우선이 되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4] 막연히 한국의 역사를 다룬 책들을 뭉뚱그려서 이렇게 표현한 것이라고도 하는데, 구체적으로 오운의 동사찬요를 지적한 것이라는 견해도 있다. 실제로 한백겸 자신이 오운의 동사찬요를 읽고 호평한 글이 그의 문집인 구암유고에 실려 있다.[5] 이러한 위협을 품게 된 것은 임진왜란 이후에 급속도로 세력을 키워 조선과 명을 위협하게 된, 다들 아시는 조선 북쪽 변방의 그 녀석들이 원인.[6] 정확히는 신라가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당병을 축출한 뒤에 수도를 서라벌에 그대로 둘 것이 아니라 한반도 중앙부로 옮기던가 했었어야 한반도 북부 지역의 옛 고구려 영토에 대한 획득도 가능했을 텐데 그런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면서 비판했다. 조선 후기의 실학자 안정복도 이러한 한백겸의 견해를 지지하고 사론으로써 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