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르 점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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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르 점령
Occupation de la Ruhr
Ruhrbesetzung
Occupation of the Ruhr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Bundesarchiv_Bild_183-R09876%2C_Ruhrbesetzung.jpg


파일:De68SQLVAAAmUCW.jpg

일시
1923년 1월 11일 ~ 1925년 8월 25일
장소
[[바이마르 공화국|

파일:독일 국기(3:2 비율).svg
]] 독일국 루르
원인
독일의 베르사유 조약 배상금의 디폴트 선언
교전국 및 교전 세력
[[프랑스 제3공화국|

파일:프랑스 국기(1794-1815, 1830-1958).svg
]] 프랑스
[[벨기에|

벨기에
display: none; display: 벨기에"
행정구
]]

[[국가 파시스트당|
]] 독일국
지휘관
파일:프랑스 국기(1794-1815, 1830-1958).svg 레몽 푸앵카레
파일:독일 국기(3:2 비율).svg 빌헬름 쿠노
파일:독일 국기(3:2 비율).svg 빌헬름 마르크스
병력


피해

민간인 130명 사망
결과
국제 압력으로 인한 프랑스군의 철수
영향
독일의 초인플레이션과 극우화의 가속화

1. 개요
2. 배경
3. 반응
4. 기타



1. 개요[편집]


프랑스벨기에가 군대를 동원하여 독일의 루르 공업 지대를 점령한 사건. 점령 통치 기간은 1923년부터 1925년까지였다. 돈을 안갚는다고 타국 영토를 침공하고 저항하는 현지인들을 처형한 이 사건은 독일의 극우화와 초인플레이션을 불러일으켰다.


2. 배경[편집]


베르사유 조약으로 바이마르 공화국은 지불이 불가능할 정도로 과중한 전쟁배상금을 짊어졌는데 독일이 지불해야 할 액수는 무려 1320억 골트마르크였다.[1] 전후 엉망진창이었던 독일의 경제 상황에서 이런 거금을 갚기는 불가능했다. 결국 1922년 연말 독일은 디폴트 상태에 빠졌다.

하지만 프랑스벨기에는 배상금을 감면해 주지 않았다. 프랑스에 전쟁 배상금 문제는 단순히 돈 문제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었다. 프랑스는 독일을 자꾸 눈 감아 주다가는 독일이 베르사유 조약을 아예 무효화하고 강대국으로 부상할 테니 이를 막기 위해서는 경제적으로 독일을 쥐어짜야 한다고 생각했다. 게다가 당시 프랑스와 벨기에는 빌헬름 쿠노 독일 총리가 협상국을 떠보기 위해 일부러 디폴트를 선언했다는 의심[2]이 강했다. 따라서 즉각적으로 라인란트 일대를 점령하고 독일을 압박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져 갔다.

하지만 협상국의 또 다른 일원이었던 영국은 강압적인 조약 이행에 반대했다. 그러자 프랑스는 독일에 군사적인 제재 대신 경제 제재를 가하는 절충안을 제시했으나 영국은 이조차 거부했다. 이런 상황에서 독일이 배상금으로 지급할 예정이었던 석탄과 목재가 6개월 가까이 연체되었다. 인내심이 한계에 다다른 레몽 푸앵카레 프랑스 총리[3]은 1923년 1월 루르 지역을 점령할 것을 군대에 지시했다.


3. 반응[편집]


독일인들은 프랑스의 점령에 거세게 반발했다. 무장 투쟁까지는 없었지만 시민 불복종 운동은 만연하였다. 바이마르 공화국 정부도 루르의 노동자들에게 총파업을 지시하여 이 루르 투쟁을 적극 지원했다. 그러자 프랑스와 벨기에는 자국 노동자들을 고용하여 석탄을 채굴하는 방식으로 대응했다. 심지어 점령 말기에는 파업뿐만 아니라 일부 저항세력에 의하여 열차 선로가 사보타주당하는 등 독일인들의 저항은 더더욱 거세졌다.

이미 엉망이었던 독일의 경제는 총파업으로 인해 더욱 추락했다. 경제 대공황, 디폴트, 총파업이라는 상황 속에서도 전쟁 배상금은 계속 지불해야 했다. 돈이 없는 정부는 돈을 찍어서 갚기로 결정했다. 돈을 찍어서 화폐를 직접 지불한 것은 아니고 그 화폐로 자국 시장에서 귀금속을 구매하여 갚은 것이다. 이는 당시 독일의 시장경제에서 가격이 매우 경직적이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대량의 통화가 시장에 나와도 바로 물가가 오르지는 않은 것이다. 그러나 이런 화폐 남발은 종국적으로는 독일에서 초인플레이션을 일으켰다.

프랑스의 점령 통치는 민주 국가가 같은 유럽 국가에 행한 것치고는 상당히 과격했다. 2년 동안 130명 가량의 독일인들이 사보타주 혐의로 프랑스군에 처형되었다.[4] 점령 말기에는 한 프랑스 중령이 독일인에게 암살당한 사건이 발생했는데 프랑스군은 이 중령의 관을 운구하면서 조의를 표하지 않는 독일인들을 무자비하게 구타했다. 이런 행동은 고스란히 촬영되어서 나중에 나치가 독일에서 반프랑스 감정을 선동하는 데 쓰였다.

이에 전세계적으로 독일을 동정하고 프랑스를 비난하는 여론이 커졌다. 심지어 1차 대전 협상국의 일원이었던 영국과 미국도 프랑스의 행보를 비난했다. 영미에 막대한 부채를 지고 있던 프랑스는 양국의 압박에 민감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1924년에 도스 안이 채택된 후 프랑스와 벨기에는 루르에서 철수했다. 이는 프랑스가 미국이 제안한 전쟁 배상금 감축안에 동의한 것이었다. 1924년에 프랑스에서도 금융위기가 일어나서 점령을 유지할 비용이 없기도 했다. 여담으로 샐리 마크라는 한 연구가가 1978년에 루르 지역 점령에 따른 프랑스의 대차대조표를 만들어 보았는데 의외로 9억 마르크 흑자였다고 한다.

바이마르 공화국이 프랑스에 무력한 모습을 보여주자 독일인들은 체제에 대한 회의감을 키웠다. 1924년에 극우파의 주도로 라인란트가 독립을 선포했고 아돌프 히틀러가 이끄는 국가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뮌헨 폭동을 일으켰다. 일련의 반체제 운동이 증가하면서 바이마르 공화국의 정치 불안정은 심화되었고 이는 결국 국가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의 집권으로 이어지고 말았다.


4. 기타[편집]


루르 점령으로 국제연맹 위임통치령이었던 클라이페다 지역에서 프랑스군이 대부분 철수하자 리투아니아는 이때다 하면서 클라이페다 지역에 봉기를 일으키고 공격해 점령하고 주민투표를 거쳐 자국으로 편입시켰다. 하지만 독일은 이를 잊지 않았고 1939년 리투아니아에 반환하지 않으면 전쟁을 일으키겠다고 협박하여 다시 돌려받았다. 이것이 바로 메멜 반환이다. 물론 1945년 독일이 패전하며 다시 토해냈지만. 동시에 폴란드에 단치히 회랑도 요구했지만 폴란드가 거부하면서 폴란드 침공이 발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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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919년에 맨 처음 결정된 금액은 이것보다 훨씬 적은 226억 마르크였으나 미국에 진 전쟁 채무를 전쟁 배상금으로 해결할 생각이었던 영국과 프랑스에 의해 1921년에 엄청나게 증액되었다. 이때 프랑스가 내세운 명분이 '협상국 군대의 군사적 손실도 배상하라'는 것이었다.[2] 실상은 독일에 진짜로 돈이 없어서 디폴트를 선언한 거였지만 프랑스와 벨기에는 이미 라인란트를 점령할 생각이었기에 독일이 진짜로 돈이 없는 걸 알면서도 일부러 디폴트를 했다고 주장했다.[3] 제1차 세계 대전 기간 동안 프랑스 대통령을 지내다가 1차대전이 끝나면서 총리로 자리를 옮겼다.[4]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알베르트 레오 슐라게터. 자유군단 소속 군인으로, 저항 조직을 이끌며 프랑스군의 열차 선로에 사보타주를 감행하다가 1923년 5월 프랑스 측에 체포당하여 처형당했다. 그의 사후 슐라게터의 이름은 나치 독일에 의하여 비행단 이름에 붙는 등 프로파간다 요소로 활용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