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리우스와 술라의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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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우스의 흉상.
술라의 흉상.

1. 개요
2. 시대 배경
3. 전개 과정
3.1. 동맹시 전쟁 이후의 정치 혼란
3.2. 술라의 1차 로마 진군
3.3. 킨나와 마리우스의 공포정치
3.4. 킨나의 시대
3.6. 술라의 공포정치와 술라 개혁
3.6.1. 살생부 발표(기원전 82년)
3.6.2. 술라 개혁
3.6.3. 술라의 정계은퇴와 죽음
4. 이후의 로마 공화정
5. 평가



1. 개요[편집]




기원전 2세기 그라쿠스 형제가 로마 자영농들의 경제적 몰락과 빈부격차 심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일련의 개혁을 단행하다가 피살당한 이래 갈수록 혼란스러워지던 로마 공화국에서 두각을 드러낸 가이우스 마리우스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임페리움(명령권)을 둘러싼 경쟁을 벌인 끝에 각자 포풀라레스옵티마테스의 수장이 되어 내전을 벌인 시대를 일컫는 학술상 용어. 보통 로마 내전으로 일컬어지지만, '마리우스와 술라의 시대'로 한정해 설명할 경우에는 로마 공화국의 이탈리아 내에서 벌어진 동맹시 전쟁과, 폰투스 왕 미트리다테스 6세의 대 로마 선전포고로 발발한 제1차 미트리다테스 전쟁부터 술라가 죽은 기원전 78년까지를 가리킨다.


2. 시대 배경[편집]


기원전 2세기, 100여 년간 이어지던 포에니 전쟁에서 고대 카르타고를 멸망시키고, 마케도니아 전쟁에서 마케도니아 왕국을 무너뜨리고 그리스 전역을 복속시켰으며, 마그네시아 전투에서 셀레우코스 제국을 격파하고 지중해 전역에 영향력을 행사하게 된 로마 공화국의 위세는 절정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러한 영광의 이면에는 공화국의 근간을 흔들 화근의 싹이 자라나고 있었다.

공화국을 지탱하는 군단병들의 주축인 로마 시민들은 대부분 자영농이었다. 그들은 광활한 지중해 전역에서 전쟁을 치르느라 그들의 농토를 떠나 머나먼 곳으로 가야 했고, 결국 농사를 망치고 생존을 위해 농토를 팔아치우고 로마 시내에서 일거리를 찾으려 했다. 이로 인해 군단병에 지원할 수 있는 자격 요건을 가진 재산을 가진 자들의 수는 줄어들었으며, 이는 로마군의 약화를 초래했다. 그들이 팔아치운 땅은 원로원 의원을 중심으로 한 로마 부유층이 사들인 뒤 뿐만 아니라 전쟁으로 획득한 넓은 영토는 매각, 또는 임대를 통해 부유층의 수중에 들어갔다. 그들은 이 드넓은 토지를 대규모의 노예를 통해 경영했다. 게다가 부유층들은 무산자들에게 싼값에 소작으로 줘야 하는 국유지를 불법으로 점유했고, 이로 인해 시민들은 대거 파산하여 무산계급으로 전락했다.

로마 정부는 이러한 상황을 해결하고자 토지의 소유를 500 유게름(약 125 헥타르)만 허용하는 토지 상한제를 실시했지만 잘 지켜지지 않았고, 여러 집정관들이 토지 개혁을 실시하려 했으나 원로원의 강력한 반대로 무산되었다. 그라쿠스 형제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호민관으로서 농지법을 비롯한 일련의 개혁을 단행했지만, 반대 세력의 심한 반발에 시달렸다. 결국 형 티베리우스 셈프로니우스 그라쿠스는 반대 세력이 동원한 폭도들에게 맞아 죽었고, 동생 가이우스 셈프로니우스 그라쿠스는 원로원 최종 권고에 의해 반역자로 낙인찍힌 뒤 지지자 3천 명과 함께 주살되었다.

그라쿠스 형제가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고 개혁이 무산된 뒤, 로마 공화국의 혼란은 가중되었다. 지중해 전역을 제패할 정도로 강력했던 로마군은 시민들의 몰락으로 인력난에 시달렸다. 당국은 이를 해결하기 위해 징병대상자의 재산 기준을 완화했으나 사실상 빈곤층이나 다름없는 사람들이 군복무를 제대로 할 리 만무해서, 오히려 전투력만 떨어지는 결과를 낳았다. 그 결과, 로마군은 유구르타 전쟁에서 고전하는 등 예전만큼의 역량을 보여주지 못했다.

급기야 킴브리 전쟁에서 잇따라 패배한 끝에 아라우시오 전투에서 8만 로마군이 전멸하는 사태가 벌어지면서 로마의 안보가 위험해지자, 로마인들은 유구르타 전쟁에서 승승장구하고 있던 가이우스 마리우스집정관으로 삼아 킴브리족의 침략에 대처하게 했다. 마리우스는 유구르타 전쟁을 마무리하고 로마로 귀환한 뒤 군제 개혁을 단행했다. 우선 무산자들을 군에 입대시키는 것 자체는 어쩔 수 없다고 인정했으나, 그들의 재산으로 병역의무를 수행하게 하는 것이 아닌 국가가 봉급과 경비를 줘서 병역을 수행하며, 기존의 병역대상자들은 군대에 가지 않을 경우 세금을 내게 했다. 또한 병사들이 군복무를 마치면 토지를 비롯한 보상을 받을 수 있도록 했다.

마리우스의 군제개혁은 큰 효과를 발휘했다. 일자리를 구하지 못해 빈곤에 시달리던 이들은 삶의 활로를 찾고자 군대에 앞다퉈 입대해 목숨을 걸고 싸웠다. 마리우스는 동기부여가 된 병사들을 이끌고 킴브리 족을 섬멸했고, 로마인들은 그를 "로마 제3의 건국자"[1]라고 칭송하며 집정관으로 5번 연속 선출했다. 그러나 마리우스의 군제 개혁은 지휘관이 병사들에게 돈을 지급하고 과도하게 통제함으로써 사병으로 삼아버리는 악영향을 초래했고, 이로 인해 군사적 역량을 갖춘 정치인들 간의 군대를 동원한 권력다툼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마리우스는 호민관 루키우스 아풀레이우스 사투르니누스를 통해 자신을 따르는 군단병들에게 갈리아의 토지를 나눠주는 법안을 통과시키려 했다. 하지만 사투르니누스는 이보다 더한 행보를 보였다. 그는 먼저 로마의 빈민들에게 분배하는 빵 가격 제한을 대폭 인하했다. 재무관 퀸투스 세르빌리우스 카이피오는 그렇게 했다간 국고가 텅 비어버린다며 반대했고, 원로원은 이 법안을 표결에 부치는 것은 반국가 조치로 간주한다고 선언했다. 한 호민관은 법안에 대한 거부권을 행사했다. 그러나 사투르니누스는 무시하고 민회에 법안을 상정했다. 카이피오와 지지자들이 투표함을 뒤집으며 저항했지만, 법안은 끝내 통과되었다. 사투르니누스는 뒤이어 시칠리아 섬과 그리스, 그리고 갈리아에 있던 국유지를 마리우스의 퇴역병에게 주어 식민지를 건설하는 법안을 제시했다. 농지법에 반대하는 이들이 투표 날에 몽둥이로 무장하여 투표 장소를 덮쳤지만, 마리우스의 퇴역 병사들과 사투르니누스의 지지자들에 의해 저지되었고, 사투르니누스를 방해하려 했던 호민관은 모욕을 당한 뒤 집에 조용히 지내야 했다. 그리하여 농지법 역시 일사천리로 통과되었다.

사투르니누스는 원로원에 민회에서 통과된 모든 법안을 지키겠다고 맹세하지 않으면 20달란트의 벌금을 부과하고 추방하겠다고 위협했다. 모든 원로원 의원은 새 법을 지지하겠다고 밝혔지만, 퀸투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 누미디쿠스만은 끝까지 거부했다. 이에 사투르니누스는 원로원 의사당에서 메텔루스를 몰아내기 위해 관원들을 보냈다. 메텔루스를 추종하는 이들이 들고 일어나 격렬하게 항의하면서 메텔루스를 끌어내지 못하자, 사투르니누스는 민회에서 메텔루스 때문에 아무도 땅을 받지 못할 거라고 선동했다. 이로 인해 여론이 급격히 악화되자, 메텔루스는 결국 로마를 떠나야 했다. 사투르니누스는 이렇게 승리를 거듭했지만 귀족들의 증오를 샀고, 호민관의 급진 정책에 두려움을 느낀 많은 민중과 에퀴테스 역시 그에게서 멀어지려 했다.

사투르니누스는 자신이 추진한 법안을 공고히하려면 기원전 99년 호민관 선거에서 또다시 당선되어야 한다고 여겼다. 그러려면 마리우스의 지원이 필요했다. 마리우스는 기원전 99년 집정관 선거에서 불출마하겠다고 선언했지만, 사투르니누스의 동료인 가이우스 세르빌리우스 글라우키아를 지원했다. 사투르니누스는 글라우키아의 집정관 당선을 밀어주기로 하고, 지지자들을 총동원해 집정관 선거전에 투입했다. 그러나 글라우키아는 기원전 100년 12월 10일 집정관 선거에서 낙선했고, 또다른 후보인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오라토르가이우스 멤미우스가 당선되었다. 그러자 사투르니누스의 지지자들이 대대적인 봉기를 일으켰는데, 그 과정에서 멤미우스가 살해되고 말았다.

집정관 당선자가 피살당하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지자, 원로원은 즉시 사투르니누스와 가이우스 세르빌리우스 글라우키아를 암살의 배후로 규정하고 원로원 최종 결의를 통과시킨 뒤 마리우스에게 토벌을 맡겼다. 마리우스는 딜레마에 빠졌다. 원로원의 명령대로 사투르니누스를 잡아다 처형한다면, 마리우스는 자신의 지지세력을 공격하는 것이고, 이는 그의 지지자에 대한 배신이므로 정치생명은 끝나게 되는 것이었다. 그리고 사투르니누스를 지지하고 원로원의 명령을 거역한다면, 이는 로마의 구체제에 대한 반역이었다.

그는 고심 끝에 원로원의 최종 권고에 순종하여 자신을 따르는 무리를 무장시킨 뒤 사투르니누스 일당을 공격했다. 포로 로마노에서 벌어진 시가전 끝에 사투르니누스 일당은 참패했고, 사투르니누스는 루키우스 에퀴티우스를 비롯한 측근들과 함께 마리우스에게 투항했다. 마리우스는 이들을 신전에 가둬두었다. 이때 원로원 원로원 지지자들은 신전으로 몰려가 신전 천장에서 돌과 기왓장을 떼네어 신전에 있던 사람들에게 마구 던졌고, 결국 사투르니누스는 피살되었다. 그의 집은 파괴되었고, 추종자들은 처형되거나 추방되었다. 그렇게 사투르니누스를 죽음으로 내몬 마리우스는 원로원으로부터 국가를 구한 영웅이란 찬사를 받았지만, 이후에는 민중의 외면을 받고 은둔했다.

이 무렵, 오랜 세월 로마와 함께 숱한 전쟁을 치렀던 이탈리아 동맹시 주민들은 함께 피를 흘렀으면서 새로 얻은 영토가 대부분 로마 시민들에게 넘어가는 것에 강한 불만을 품었다. 그들은 동등한 의무에 걸맞은 동등한 권리를 갖기를 원했기에 자신들도 로마 시민으로 인정해달라고 요구했으나, 자신들의 특권을 그들과 공유하고 싶지 않았던 기존의 로마 시민권자들의 강력한 반대로 번번이 묵살당했다. 급기야 기원전 91년 로마 시민권 확대를 실시하려던 호민관 소 마르쿠스 리비우스 드루수스가 암살당하는 사건이 벌어지자, 동맹시들은 이탈리아 공화국을 수립하고 동맹시 전쟁을 단행했다. 3년간 이어진 격전 끝에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의 맹활약으로 로마가 승기를 잡았다. 하지만 동맹시의 지속적인 협조를 받아내려면 그들과 타협할 필요가 있었기에, 로마 당국은 로마 시민권을 확대하기로 결의했다. 그리하여 전쟁이 끝나면서 혼란은 끝나는 듯했으나, 이는 폭풍전야일 뿐이었다.


3. 전개 과정[편집]



3.1. 동맹시 전쟁 이후의 정치 혼란[편집]


기원전 88년 동맹시 전쟁을 마무리하고 동맹시들에게 로마 시민권을 부여하기로 한 뒤, 이들에게 선거구를 어떻게 분배할 지를 놓고 논쟁이 벌어졌다. 당시엔 로마 포럼에 모인 시민들을 주거지 별로 35개 부족으로 나눈 뒤, 이 35개의 부족의 과반수로부터 지지를 얻어낸 이가 당선되는 방식으로 선거가 진행되었다. 원로원은 새로운 로마 시민들에게 8개의 부족을 할당하려 했으나, 호민관 푸블리우스 술피키우스 루푸스는 기준의 35개 부족에 할당하는 법안을 민회에 제출했다. 이에 원로원은 강력히 반대했고, 기존의 로마 시민들 역시 정치적 특권을 새로운 시민들에게 양보할 생각이 없었기에 격렬하게 반발했다. 이에 술피키우스는 가이우스 마리우스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마리우스는 술피키우스를 도와주는 조건으로 동방 원정 지휘권을 자신에게 맡기라고 요구했다. 이보다 앞선 기원전 89년, 폰토스 왕국미트리다테스 6세비티니아 왕국로마 공화국을 상대로 전쟁을 선포했다. 그는 순식간에 소아시아 전역을 석권하고 발칸 반도로 진출해 고대 아테네 등 여러 도시 국가의 호응을 얻었으며, 소아시아에 거주하는 로마인과 이탈리아인 8만 명을 학살했다. 이에 원로원은 그를 응징할 원정군을 파견하기로 하고, 기원전 88년 집정관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에게 놀라 시에 주둔한 6개 군단을 이끌고 동방 원정을 떠나게 했다. 하지만 마리우스는 다시 한 번 군사적 위업을 쌓고 싶었기에 술피키우스에게 미트리다테스 6세를 무찌를 기회를 달라고 요청했고, 술피키우스도 받아들였다.

한편, 놀라에서 병사들을 훈련시키고 있던 술라는 로마에서 분란이 생겼다는 소식을 듣고 포룸으로 이동한 뒤 동료 집정관 퀸투스 폼페이우스 루푸스와 함께 카스토르, 폴룩스 신전의 로스트라 연단에 서서 종교적 권한을 이용해 페리아이(feriae: 모든 공무가 중단되는 휴일)를 선언했다. 그러자 술피키우스의 선동을 받은 군중이 폭동을 일으켰고, 술라는 팔라티누스 언덕 기슭에 있던 마리우스의 집으로 도주했다. 마리우스는 술라에게 이 상황을 타개하려면 휴일 선언을 철회하고 술피키우스의 법안에 대한 표결 진행을 허락하라고 권고했고, 술라는 어쩔 수 없이 받아들였다. 술피키우스는 민회를 소집해 이탈리아인의 선거권에 관한 그의 법안을 통과시킨 뒤, 며칠 후에 술라의 동방 총사령관 지명을 철회하고 그 지휘권을 마리우스에게 넘긴다고 선포했다.


3.2. 술라의 1차 로마 진군[편집]


마리우스의 요구에 따라 술피키우스의 법안 통과를 허용한 뒤 굴욕감을 간직한 채 놀라로 돌아간 술라는 전령으로부터 지휘권이 마리우스에게 돌아갔다는 소식을 듣고 분노했다. 그는 병사들을 선동하여 자기 편으로 삼은 뒤, 마리우스가 인수인계를 하려고 보낸 장교를 현장에서 살해하고 6개 군단을 이끌고 로마로 진격했다. 로마 법은 누구도 로마 시에 군대를 진군시키는 걸 허락하지 않았고, 공화정 수립 이래 이 원칙이 지켜지고 있었기 때문에, 마리우스와 술피키우스 등은 술라가 이리 나올 줄 상상도 하지 못했다. 두 사람은 급히 검투사와 해방노예를 동원해 에스퀼린 포룸에서 맞섰으나 끝내 패배를 면치 못했다. 술피키우스는 해안가로 달아나다가 노예에게 배반당해 살해되었고, 마리우스는 추격을 피해 온갖 고생을 한 끝에 아프리카의 안전지대로 달아났다.

술라는 도시에 입성한 뒤 도시 주변에 군대를 배치한 후 민회를 소집해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하면서, 어떠한 법률도 원로원에서 논의되지 않는다면 민회에서 통과될 수 없으며, 가장 부유한 사람들이 더 많은 투표권을 가져야 한다고 규정했다. 또한 300명의 새로운 의원을 원로원에 추가해 원로원의 힘을 늘렸고, 술피키우스의 법은 폭력에 의해 강요되었다는 이유로 무효화했다. 술라는 얼마 지나지 않아 군대를 카푸아로 돌려보냈고, 자신의 행위가 권력을 탐해서가 아니라 공화국의 회복을 위해서였음을 사람들에게 인정받기 위해 차기 집정관 선거에 아무런 간섭도 하지 않았다. 한편 그는 동료 집정관 퀸투스 폼페이우스 루푸스를 이탈리아의 또다른 군대를 이끌고 있던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 스트라보에게 보내 지휘권을 인계받게 했다. 스트라보는 지휘권을 포기하는 척했으나, 다음날 병사들이 루푸스를 살해했다. 스트라보는 화가 난 척 했지만, 군대의 통제를 재개했다.

기원전 87년 선거에서, 술라를 따른 후보들은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킨나그나이우스 옥타비우스에게 낙선했다. 술라는 선거 결과에 태연한 체하면서, 이것이 자신을 폭군이라 칭한 정적들의 말이 거짓임을 보여주는 궁극적인 증거라고 주장했다. 그러면서도 집정관들이 자기가 동방으로 떠난 사이에 배신하는 걸 방지하고자 신임 집정관들의 취임 선서를 집행할 책임자로서 그들이 자신의 정치 개혁을 방해하지 않겠다고 서약하도록 강요했다. 두 집정관은 많은 군중 앞에서 그렇게 서약했고, 약속을 어길 시 추방형을 받아들이겠다는 뜻으로 바닥에 돌을 던졌다.

술라는 이 정도면 안심할 만하다고 여기고 카푸아에 주둔한 군대를 이끌고 동방으로 떠났다. 그러나 기원전 87년 1월 취임한 킨나는 술라를 탄핵하려 시도했다. 그는 호민관 비르기니우스를 보내 로마 시민들을 불법 살해한 죄로 술라를 기소했다. 하지만 호민관의 직권 범위는 로마 시내에만 한정되었기 때문에, 술라는 기소를 무시하고 동방으로 떠날 군단들을 집결시키는 일을 계속했다. 1개 군단은 뒤에 남겨 놀라 포위를 유지하게 하고, 나머지 5개 군단을 이끌고 그리스로 떠났다.


3.3. 킨나와 마리우스의 공포정치[편집]


술라가 떠난 뒤, 킨나는 이탈리아 시민들의 지지를 받아 술피키우스의 법안을 부활시키려 했다. 이에 옥타비우스는 기존의 로마 시민들의 지지를 받으며 반대파를 이끌었다. 투표 당일 호민관이 거부권을 행사하자 킨나의 지지자들이 폭동을 일으켰다. 옥타비우스는 지지자들을 포럼으로 이끌어 킨나의 부하들을 물리쳤다. 킨나는 로마 시에서 탈출했고, 옥타비우스는 민회를 움직여 킨나를 집정관 직에서 박탈하고 추방형을 내린 뒤 신관단의 일원이었던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메룰라로 대체했다.

킨나는 로마를 떠난 뒤 티부르, 프라이네스테, 놀라 등 남부 지역을 돌며 시민들을 설득해 순식간에 10개 군단 이상을 모집했다. 여기에 술라에 반감을 품은 그나이우스 파피리우스 카르보, 퀸투스 세르토리우스 등 귀족들을 대거 끌어모아 자신의 편으로 삼았다. 여기에 마리우스가 아프리카에서 사병을 이끌고 가담했다. 옥타비우스는 스트라보의 지원을 받고 항전했지만, 기원전 87년 말 전염병이 창궐하면서 스트라보가 사망하면서 큰 타격을 받았다. 마리우스 등은 로마에 대한 식량 공급을 차단했고, 결국 원로원은 킨나, 마리우스와 협상하여 그들의 신원을 복구시키기로 했다.

마리우스군은 로마 시로 돌아온 뒤 닷새 동안 대숙청을 자행했다. 옥타비우스는 도망치기를 거부하고 참수되었으며, 그의 머리는 포룸에 전시되었다. 킨나를 대신하여 집정관에 선출되었던 메룰라는 재판에 회부되자 자살을 택했다. 그 외에도 루키우스 카이사르, 가이우스 카이사르 등 전직 집정관 6명을 포함한 수많은 고위 관료들이 처형되었다. 술라는 국가의 적으로 선포되었고, 그의 집은 불태워졌으며, 재산 역시 몰수되었다. 그가 세운 법은 폐지되었고, 킨나와 마리우스는 기원전 86년 집정관에 선출되었다. 마리우스는 7번째 집정관을 맡아 술라를 토벌하고 미트리다테스 6세와의 전쟁을 이끌 준비를 하다가 1월 중순에 갑작스럽게 사망했다.


3.4. 킨나의 시대[편집]


킨나는 마리우스 사후 한동안 유일한 집정관을 맡다가 여름에 루키우스 발레리우스 플라쿠스를 보결 집정관으로 선임했다. 이후 기원전 85년과 기원전 84년에 그나이우스 파피리우스 카르보와 함께 집정관에 잇따라 당선되면서, 로마와 대부분의 속주의 통치자로 군림했다. 그는 마리우스의 지지자들과 밀월 관계를 맺었으며, 힘들게 얻은 로마 시민권을 어떻게든 지키고 싶어하는 삼니움인과 루카니아인들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았다. 그는 내부의 안정을 도모하기 위해 채무자들이 부채의 4분의 1만 갚으면 되는 법안을 통과시켰지만, 급격한 개혁은 혼란을 가져온다는걸 잘 알았기 때문에 이탈리아인에 대한 시민권 분배를 단번에 진행하지 않고 점진적으로 추진했다. 이탈리아인들은 그가 죽은 후인 기원전 84년 또는 83년이 되어서야 로마인과 동등한 시민권을 얻을 수 있었다. 그는 이와 더불어 살아남은 귀족들과 화해하고 권력을 어느정도 분배했고, 그 덕분에 로마는 몇년간 평온을 유지했다.

한편, 킨나는 동방으로 떠난 술라를 물리치기 위해 기원전 86년 동료 집정관 루키우스 발레리우스 플라쿠스에게 2개 군단을 맡기고 동쪽으로 보냈다. 술라는 이들과 싸우는 대신 자신의 병사들로 하여금 플라쿠스의 병사들을 자신의 군대에 합류하도록 유혹했다. 플라쿠스군은 술라보다 적은 병력인 데다 술라가 군인으로서의 명성이 높은 것도 있어 많은 이들이 탈주하여 술라 휘하로 들어갔다. 결국 플라쿠스는 술라와 싸우길 포기하고 미트리다테스 6세와 싸우고자 이동했다. 그러나 그는 곧 가이우스 플라비우스 핌브리아에게 피살되었고, 핌브리아 역시 미트리다테스 6세와 평화협약을 맺은 술라와 맞서려다 부하들이 대거 술라에게 귀순하자 자살했다.

그 후 술라는 제1차 미트리다테스 전쟁을 마무리한 뒤 소아시아 일대의 여러 신전과 도시들로부터 많은 벌금을 물려 로마를 공격하기 위한 군자금을 모았다. 그러면서 로마에 자신이 곧 돌아가서 권력을 불법으로 빼앗은 자들로부터 로마를 구하겠다고 통보했다. 킨나는 이에 맞서기 위해 대대적인 전쟁 준비에 착수했다. 그는 군대를 모집하고, 함대를 수리하고, 식량과 돈을 모았으며, 이탈리아인들에게 술라가 이긴다면 로마 시민권을 도로 빼앗길 테니 최선을 다해 맞서라고 선전했다. 기원전 84년 초, 킨나는 군대를 아드리아 해 너머 일리리아로 파견했다. 그러나 풍랑이 거센 겨울에 바다를 건너는 건 무리한 짓이었고, 한 분견대가 거센 물살로 인해 병사 절반이 수장되는 사건이 벌어졌다.

가까스로 생존한 병사들은 곧바로 반란을 일으켰다. 이에 안코나 시에 있던 파견대도 도항을 거부했다. 이에 킨나는 강경하게 처벌하고, 일리리아로 가서 눈이 덮힌 산을 강행군으로 돌파하는 것을 강요했다. 병사들이 그런 그에게 집단 항의하자, 킨나는 직접 병사들을 설득하기 위해 총회를 소집했다. 그러나 그가 집합한 병사들의 무리 속으로 들어가려 했을 때, 한 병사가 길을 터주기를 거부하다가 킨나의 경호원 한 명에게 가격당했다. 그러자 병사들은 반란을 일으켜 킨나와 그의 일행을 모두 살해했다.


3.5. 술라의 2차 로마 진군[편집]


킨나가 허망하게 죽은 뒤, 카르보가 포풀라레스파의 리더를 맡았다. 그는 발칸 반도에서 술라와 싸우려던 계획을 취소하고 이탈리아에서 술라를 대적하기로 했다. 그는 기원전 84년 내내 군대를 모집했다. 징병 담당자들은 술라가 돌아오면 이탈리아인의 시민권과 평등한 투표권이 모두 무산될 거라고 주장했고, 이탈리아인들은 술라에 대적하고자 징병소로 찾아갔다. 그 결과, 카르보는 대략 15만에 달하는 대군을 확보했고, 술라의 5개 군단 3만 명을 충분히 압도할 수 있으리라 확신했다. 여기에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아시아티쿠스는 2개 군단과 함께 마케도니아 변방에 주둔했고, 열렬한 킨나파 인사였던 하드리아누스는 아프리카에서 병사와 물자를 모았다. 퀸투스 세르토리우스는 갈리아 키살피나에서 확고한 기반을 다져놓았고, 시칠리아는 거물급 민중파 인사인 가이우스 노르바누스의 영향력 아래 있었다.

기원전 83년 봄 브룬디시움에 5개 군단을 이끌고 상륙한 술라는 이탈리아인들이 정치에 참여할 권리를 잃어버릴까 봐 자신을 적대한다는 걸 간파하고, 상륙하자마자 이탈리아인들이 선거권을 갖는 걸 용인하겠다는 뜻을 공표했다. 브룬디시움 주민들은 이에 열광하여 술라를 환대했다. 그는 아피아 가도를 따라 진군하면서 자신의 선의를 과시했다. 병사들에게 시골 지역을 약탈하는 걸 엄금했고, 이탈리아인들에게 그들의 참정권과 투표권을 용인하겠다는 뜻을 거듭 밝혔다. 그러자 이탈리아인들은 술라에 굳이 대적할 필요가 없다고 보고, 포풀라레스파를 맹목적으로 지지하던 태도에서 상황을 방관하는 쪽으로 선회했다. 여기에 마리우스의 대숙청 때 아프리카에 피해 있었던 메텔루스 피우스가 사병대를 이끌고 가세했고, 스트라보의 아들로 막대한 피호민들을 동원할 수 있었던 20대 초반의 청년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 마그누스도 합류했다. 또한 히스파니아에 피신했다가 소규모 사병을 이끌고 이탈리아에 도착한 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도 술라의 편에 섰다.

이후 2년간의 내전에서 가이우스 마리우스의 아들 소 가이우스 마리우스(일명 젊은 마리우스)와 그나이우스 파피리우스 카르보 등이 이끄는 포풀라레스파를 상대로 연전연승한 술라는 기원전 82년 11월 콜리나 성문 전투에서 포풀라레스 파와 삼니움 연합군을 상대로 격전을 치렀다. 술라가 직접 지휘했던 좌익 부대는 삼니움족의 압박을 이기지 못하고 붕괴되었다. 이에 술라는 프라이네스테로 전령을 보내 그곳 병사들에게 포위를 중단하고 아군을 구원하라고 전하게 했다. 그러나 그가 모르는 사이, 우익 부대를 이끌던 크라수스가 적군을 격파하고 진영을 함락시켰다. 술라는 수 시간이 지나서야 크라수스의 보낸 전령을 통해 자기가 이겼다는 걸 알게 되었다. 삼니움 지휘관 텔레시누스는 부상을 입은 채 전장에 쓰러져 있다가 목이 베어졌고, 수급이 창에 꽂혀 전시되었다. 이리하여 내전은 술라의 승리로 종식되었다.


3.6. 술라의 공포정치와 술라 개혁[편집]



3.6.1. 살생부 발표(기원전 82년)[편집]


내전 승리 후 로마에 입성한 술라는 젊은 마리우스의 수급을 포룸에 전시한 뒤 로마 성문 밖에 있는 벨로나 신전에서 원로원을 소집했다. 그는 의원들 앞에서 발언하기에 앞서 삼니움족 포로 6천 명을 신전과 가까운 플라미니우스 경기장으로 데려가라고 지시했다. 술라가 원로원 앞에서 미트리다테스 전쟁 관련 보고서를 읽기 시작할 때, 병사들은 플라미니우스 경기장에서 삼니움 포로 6천 명을 에워싼 뒤 학살을 자행했다. 포로들의 비명 소리는 신전 안에서 너무나 처절하게 들렸고, 의원들은 공포에 휩싸였다. 하지만 술라는 의원들에게 자기 말에 계속 귀를 기울여달라고 부탁했다.

"범죄자 몇 명을 따끔하게 혼내는 것뿐이오. 밖에서 일어나는 일에는 신경쓰지 마시오."


살육이 끝나고 의원들이 공포에 떨며 돌아간 뒤, 술라는 민회를 소집한 뒤 대가를 치러야 할 사람은 앞에서 이끈 자들이지 뒤에서 따라간 자들이 아니라고 밝혔다. 이 말을 들은 로마의 부유층 사이에 불안이 고조되는 가운데, 원로원 대표단이 술라를 찾아가 불안감을 덜어달라고 부탁했다.

"당신이 죽이기로 마음먹은 자들을 처벌하지 말아달라고 요청하는 게 아닙니다. 다만 살려주기로 마음먹은 자들이 마음 졸이지 않게 해달라는 겁니다."


"누구를 살려줄지 모르겠소."


"누구를 처벌할 생각인지 알려주십시오."


술라는 그날 밤 측근들과 함께 논의한 뒤 80명의 이름이 적힌 서판을 게시했다. 이름이 적힌 이들은 잡히는 대로 처형당하고 재산을 몰수당했다. 그러나 다음날 술라는 220명의 이름이 추가된 새로운 명단을 포룸에 게시했고, 그 다음날 아침에는 또다시 500개가 넘는 이름을 내건 서판을 게시했다. 이제는 모두가 언제든 시민권을 박탈당하고 비참하게 살해될지 모른다는 공포에 사로잡혔다. 술라는 가져오는 머리마다 포상금을 지급했고, 살인자가 희생자의 재산을 일부 챙기도록 허락했다. 그러자 술라의 측근들은 부자들을 숙청 대상으로 지정해 가차없이 죽이고 재산을 몰수했다. 그 중 가장 심한 인물이 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였다. 그는 가이우스 베레스라는 군관을 대동하여 이탈리아 전역을 일주하며 현지 주민들로부터 반술라파 인물이 어디 숨어있는지를 전해듣고 가차없이 추격하여 살해하여 재산을 모조리 물수했다. 술라의 적에게 물질적인 도움을 제공한 집안까지 숙청 대상에 포함되었고, 지방의 상인, 은행가, 행정가들이 모조리 붙잡혀 처형되었다.

이러한 숙청은 비단 이탈리아에서만 그치지 않았다. 술라의 하수인들은 로도스에 가이우스 노르바누스가 숨어있는 걸 알게 되자 로도스 시민들에게 그를 넘기지 않으면 엄중한 결과를 초래할 거라고 경고했다. 시민들이 이 문제를 놓고 고민에 빠지자, 노르바누스는 장터로 나가 자살했다. 또한 술라는 폼페이우스를 파견하여 카르보를 추적하게 했다. 폼페이우스는 카르보가 시칠리아 해안에서 떨어진 한 섬에 있다는 정보를 토대로 시칠리아로 향했고, 도착하자마자 즉결 재판소를 열어 반술라파로 알려진 이들을 모조리 처형했다. 카르보는 결국 폼페이우스에게 사로잡힌 뒤 그 자리에서 처형되었다. 메사나 주민들이 즉결 재판소가 불법이라고 항의하자, 폼페이우스는 이죽거리며 답했다.

"검을 든 우리에게 법 운운은 그만두시오."


이렇듯 대숙청을 자행한 술라는 기원전 82년 6월 1일 이후로는 숙청대상자 명단에 이름이 추가되지 않을 거라고 선언했다. 그 사이에 이미 명단에 오른 사람들은 술라에게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친구들을 이용해 자기 이름을 명단에서 빼기도 했다. 그 중 가장 유명한 인물이 바로 율리우스 카이사르였다. 당시 19살이었던 카이사르는 가이우스 마리우스의 처조카였으며, 킨나의 딸과 결혼했다. 술라는 카이사르에게 아내와 이혼하라고 명령했지만 따르지 않자 그의 이름을 숙청대상 명단에 올렸고, 카이사르는 한동안 숨어지냈다. 하지만 카이사르를 위해 수많은 이들이 변호해주자, 술라는 몇 주후 사면해줬다. 일설에 따르면, 그는 투덜거리며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고 한다.

"당신들 좋을 대로 그 친구를 데려가시오. 다만 당신들이 그리도 살리고 싶어하는 사람이 언젠가는 당신들이 나와 함께 지켜온 귀족층의 대의에 치명타를 날릴 거라는 점만 알아두시오. 이 카이사르라는 친구 안에는 마리우스가 여럿 들어 있으니까."


술라의 대숙청으로 죽은 사람이 몇이나 되는지는 불확실하다. 일설에는 최소한 원로원 의원 100~300여 명과 에퀴테스 1000~2000여 명 이상이 죽었다고 한다.


3.6.2. 술라 개혁[편집]


술라는 숙청을 마무리한 뒤 원로원이 주도하는 과두정 체제를 복구하기 위한 일련의 개혁을 단행했다. 그는 원로원을 강화하기 위해 정원을 300명에서 600명으로 늘렸으며, 평민 집회에서 선출되는 호민관들이 정계에 진출하는 것을 막았다. 그리고 에퀴테스와 로마의 배심원 전원을 원로원 의원으로 채움으로써 귀족들이 사실상 면책 특권을 갖게 했다. 그리고 곡물법을 폐지해 민중이 곡물을 싸고 일정한 매입가로 구매할 수 없게 했으며, 민회에서 재판을 다룬 관행을 폐지하고 모든 재판을 상설 법정체제에 위탁하고, 호르텐시우스법[2]을 폐지하여 민회의 권한을 크게 약화시켰다. 내전 당시에 마리우스의 편을 든 이탈리아의 도시들은 로마 시민권을 박탈당했고 토지는 로마의 공유지로 몰수되었다.

또한 집정관은 한 사람만 출정할 수 있었고, 이탈리아 내에서는 집정관 권한으로 4개 군단만 편성할 수 있게 했다. 또 전직 집정관이 다시 집정관이 되려면 집정관을 지낸 해로부터 10년을 거치도록 정했다. 그리고 한 개인이 지나치게 빨리 출세하는 걸 막기 위해 로마의 명예로운 경력에 나이 제한을 두었다. 한편 자신을 위해 성심껏 활약해준 병사들을 보답하기 위해 이탈리아 각지에 신도시를 건설하고 휘하의 퇴역 병사들을 정착시켰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로마와 오랜 세월 함께 동고동락했던 에트루리아 시민들의 토지를 대거 몰수하는 짓을 벌이는 바람에 사후에 에르투리아인들이 반란을 일으키는 빌미를 제공하고 말았고, 술라의 퇴역 장병들이 현지에 적응하지 못하여 이탈리아에 혼란을 야기하기도 했다.

술라의 개혁은 민회에서 재판을 다룬 관행을 폐지하고 모든 재판을 상설 법정체제에 위탁함으로써 보다 체계적인 법정 시스템을 구축하는 등 몇 가지 성과를 거두었으나, 민중의 지지가 필수적인 공화정 체제에서 민중을 억압하는 정책을 추진한다는 근본적인 모순으로 인해 근본적인 해결책이 되지 못했다. 게다가 마리우스의 군제개혁 이래 이미 벌어지고 있었던 로마군의 사병화에 대한 적절한 조치가 없었고, 이로 인해 로마는 술라 사후에도 빈번한 내전에 시달려야 했다.


3.6.3. 술라의 정계은퇴와 죽음[편집]


술라는 80년 독재관에서 돌연 은퇴하고 사저로 돌아가 회고록을 집필했다. 탈고 2년 후인 78년, 과식으로 인한 알코올 의존성 간경화와 위출혈이 겹쳐 사망했다. 술라가 죽은 뒤, 그의 처우에 대해 논란이 있었다. 집정관 카툴루스는 그를 국장으로 처리해야 한다고 했고, 다른 집정관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3]는 장례식을 치를 명예조차 박탈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논쟁이 알려지자, 격분한 술라의 퇴역병들이 전 로마에서 몰려들었고, 레피두스는 어쩔 수 없이 국장을 허용했다. 묘비에는 술라가 생전에 생각한 아래의 비문이 새겨졌다.

동지에게는 술라보다 더 좋은 일을 한 사람이 없고, 적에게는 술라보다 더 나쁜 일을 한 사람도 없다.



4. 이후의 로마 공화정[편집]


양 세력의 임페리움 다툼과 내전은, 그라쿠스 형제의 개혁 실패 못지 않게 로마 사회에 미친 영향이 컸다.

마리우스와 술라가 벌인 대대적인 반대파 살육과 보복은 양 세력이 서로를 증오하고, 복수심 아래 잔혹함을 더해갔고 이 과정에서 밀려나거나 원로원과 척을 진 인사들은 크게 좌절했다. 본래부터 족벌주의 아래에서 이념 없이 뭉치고 흩어진 로마 원로원 특성상, 이는 본래부터 내재되어 있던 개인과 각 가문의 야심 아래에서 이 혼란을 증폭시켰다. 이 결과, 정략혼, 상호입양, 상호간의 클리엔텔라 관계 등으로 거미줄처럼 이어진 귀족사회는 시대 분위기와 정치적 이해득실에 따라 아버지와 아들, 형과 동생, 장인과 사위 간의 관계라고 하더라도 서로 갈등하고 뭉치는 것을 반복하게 환경을 만들었다. 여기에 더해 술라의 원로원 강화 조치는, 술라 사후 그를 능가하는 뛰어난 정치가가 나오지 않으면서 술라파의 내부 분열과 붕괴로 이어졌다.

따라서 장군으로서는 매우 뛰어났지만 정치적 능력은 마리우스, 술라보다 못 했던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 마그누스가 원로원 내의 실질적인 프린켑스 세나투스(원로원 제1시민)로 오르게 된 이후에도, 로마 공화정은 사실상 표류할 수 밖에 없었고,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 소 카토, 마르쿠스 리비우스 드루수스 클라우디아누스 같은 인사들의 역할도 이런저런 이유로 한계가 명확했다. 결국 마리우스와 술라의 시대 이후의 로마 공화정은 '원로원 중심의 공화정'에서 "무력집단을 등에 업은 특정인사 중심의 공화정'으로 변모하게 됐으며, 이는 카이사르의 내전에서 승리를 거둔 율리우스 카이사르와 후계자 아우구스투스에 의해 실질적인 1인 지배 체제, 즉 제정 체제로 이어지게 된다.

5. 평가[편집]


후기 공화정 시대를 넘어, 제정 시대까지 가장 위대한 라이벌 관계로 평가받고 있는 두 사람의 시대는 로마 세계를 완전히 뒤흔들었다고 평가받는다. 이는 '카이사르 vs 폼페이우스', '옥타비아누스(아우구스투스) vs 안토니우스'로 대표되는 내전기의 라이벌 구도나 '카이사르 vs 소 카토', '안토니우스 vs 키케로'로 대표되는 후기 공화정에서의 라이벌 구도와도 확연히 구분된다고 이야기가 나올 정도.

결과적으로 로마 공화국의 번영과 전성기를 이끈 로마 원로원 중심의 공화정 체제는 '세대는 다르나 시대를 뒤흔든 위대한 장군이자 대정치가' 두 명의 대립으로 루키우스 유니우스 브루투스, 푸블리우스 발레리우스 푸블리콜라가 만들어낸 로마 과두정 체제를 붕괴시켰다. 더군다나 이들의 개혁과 행보는 후기 공화정 ~ 제정 초기까지 등장한 수 많은 야심가들의 출현과 그들의 갈등에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끼쳤다고 평가받는다. 즉, 마리우스와 술라의 시대는 로마 공화국의 종말이라는 로마사의 분기점을 화려하게 쏘아올린 대서사시의 시작이며, 로마 제국과 로마 황제를 출현시킨 그 서막이었던 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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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로마의 건국자는 로물루스이고, 로마 제2의 건국자는 마르쿠스 푸리우스 카밀루스로 일컬어졌다.[2] 민회에서 의결된 법안은 원로원의 승인이 필요하지 않도록 정한 법[3] 훗날 옥타비아누스,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와 함께 제2차 삼두정치를 결성한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의 아버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