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나미시마바라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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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나미시마바라시 | Minami-Shimabara City


시기(市旗)
문장(紋章)




국가
일본
지방
규슈
도도부현
나가사키현
면적
170.11km²
인구
41,320명[1]
시장(市長)

[[무소속(정치)|
무소속
]]
마츠모토 마사히로(松本 政博)
상징
시화
해바라기(ひまわり)
시목
용나무(アコ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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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역사
3. 관광
4. 교통
5. 기타



1. 개요[편집]


일본 나가사키현 남동부인 시마바라 반도의 남부에 위치한 일본의 도시.


2. 역사[편집]


후지와라 분가 중 하나인 홋케의 후지와라 케이스미(藤原経澄)가 1219년 현재의 미나미시마바라시 지역에 히노에 성을 짓고 아리마 가문으로 이름을 바꿨다. 이후 시마바라 반도 일부분을 차지한 작은 세력에 불과했던 아리마는 점차 성장해가며 반도 전역을 차지, 지배권을 확고히 하였다. 이 때까지 시마바라의 중심지는 미나미시마바라시의 히노에 성[2]과 추가로 축조한 하라 성이었다.

17세기 초 영주였던 아리마 하루노부는 키리시탄이었으며 인접한 아마쿠사도 과거 키리시탄인 고니시 유키나가의 영지였기에 해당 지역 주민 다수가 키리시탄이 되었다. 그러나 예수회 및 포르투갈 세력과 잘못 얽혀버린 탓에 가이에키 당했고 아들 아리마 나오즈미가 영지를 이어받아야 했으나 자진 전봉한다.[3]

이후, 새로 들어온 마츠쿠라 가문의 마츠쿠라 시게마사는 기존의 중심지였던 히노에 성과 하라 성을 폐성시키고, 현재의 시마바라시에 지역 규모 및 생산력에 맞지 않는 거성을 지어 옮겨가 버렸다.[4] 또한 영민을 가혹하게 착취, 고문했는데, 이는 기독교 탄압과 함께 시마바라의 난의 주 원인이 되었다. 시마바라성을 중심으로 반란 동참을 거절하거나 대항한 시마바라 반도 북부와는 달리, 남부인 미나미시마바라는 아마쿠사와 함께 다수의 영민들이 동참하였다. 각지의 토벌군이 몰려오자, 아마쿠사의 반군과 합치고 하라 성으로 이동해 끝까지 농성했다. 이로 인해 이 쪽 인구는 전멸(...). 이후 잔존 신자들을 소탕하고 포교를 막기 위해 후미에를 실시하고 개종한 사람들의 후손들을 수 대에 걸쳐 감시하며 연좌제를 적용해 주민들 스스로도 서로를 감시하게 하였다.

한편, 영주 마츠쿠라 카츠이에는 잘못된 통치로 반란의 원인을 제공했다는 이유로 1638년에 가이에키 당한다.[5] 이후 새로 부임한 고리키 다다후사는 인구수가 급격하게 줄어든 문제[6][7]를 해결하기 위해 타지의 농민들을 대거 이주시키게 된다.[8] 그러나 그 뒤를 이은 고리키 다카나가가 실정을 저지르다가 그 또한 1668년에 가이에키 당한다.

이후 마츠다이라 가문이 1669년부터 1749년까지 5대 동안 통치하며, 도다 가문이 1749년~1774년까지 잠깐 맡았다가 다시 마츠다이라 가문이 돌아와 1774년부터 1871년까지 8대 동안 통치한다. 도쿠가와의 방계 가문이 이런 변방 소영지를 맡게 된 이유는, 워낙 큰 걸 저지른 지역이고 카쿠레키리시탄의 완전 소탕에 실패했다 보니 불안한 막부에서 마츠다이라 가문에게 맡기고 싶었을 것으로 보인다.[9] 게다가 전 영주의 실정 때문에 농민들이 들고 일어선 곳에서 새 영주가 또 실정을 하니 도저히 봐줄 수 없었을 것이다. 폐번치현 초기 잠깐 동안 시마바라 현이 만들어진 적 있었지만 다시 나가사키 현에 편입되었다.

운젠 화산의 막대한 영향을 받았는데, 1990년부터 분화를 시작해 1996년까지 계속됐던 운젠 분화로 인해 큰 타격을 받았다. 당시 화쇄류에 매몰된 주택들 중 일부가 현재 기념관으로서 이용되고 있다. 그보다 이전인 17세기에는 운젠의 끓는 물을 키리시탄 고문에 쓰다가 정말 큰 난리가 나기도 했다. 한편으로는 운젠 지옥과 오바마 온천 등 화산의 산물들이 지역 관광 산업의 막대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으니 화산이 좋은 건지 나쁜 건지 묘하지 않을 수 없다.(...)


3. 관광[편집]


나가사키현 각지와 구마모토현 아마쿠사시에서 총 12곳의 마을, 성터, 성당이 나가사키 지역의 은둔 기독교 유적지들이라는 이름으로 세계유산에 등록되었는데 하라 성터는 이 중 유일한 성터 유적이다. 세계유산에 등록되지는 않았지만 과거 중심지였던 히노에 성터 또한 남아있으며, 100여 개의 키리시탄 묘비 중 대다수가 미나미시마바라에 있다.

그 밖에는 규슈 올레 미나미시마바라 코스, 돌고래 왓칭 투어, 토석류 피해가옥 보존공원[10] 쿠치노츠 역사민속자료관, 키타무라 세이보 기념관(생가)[11], 아리마 키리시탄 유산 기념관[12] 등이 있다. 또 시마바라시 남부~미나미시마바라시 북부 지역에서 운젠 분화 피해 기념관과 유적을 일부 공유하고 있다. 음식으로는 밀가루, 소금, 물만 사용하고 손으로 쳐서 길이를 늘이는 소면이 유명하다.


4. 교통[편집]


시마바라 반도에서 가장 구석진 곳이며 접근성도 떨어진다. 과거 시마바라 철도시마바라 철도선이 있었다. 미나미시마바라시의 주요 지역 및 관광지 대부분을 지나가다 보니 지역 주민과 관광객 입장에서는 상당히 반가웠던 노선. 하지만 인구 감소, 운젠 분화, 버스로의 수요 이탈 등 여러 이유로 인해 2008년 미나미시마바라시 구간은 전부 폐선됐다. 대신 시마바라 철도에서 버스를 운행하고 있다.

쿠치노츠 항에서 페리를 타고 아마쿠사 시의 오니이케 항까지 갈 수 있다.


5. 기타[편집]


시마바라시와 함께, 나가사키현의 시 문서 중 가장 마지막으로 작성되었다. 다른 시 문서들 마지막으로 만들어진 게 최소 1년은 지났던데 시마바라 반도만 찬밥신세

시마바라 반도 내에서 인구가 가장 많은 시였지만 시마바라 철도선 전 구간이 폐선화된 이후부터 급격한 감소 추세에 있다. 2015년부터 2020년까지 무려 11%에 달하는 인구가 줄어들어 현재는 시마바라 시보다 적은 상황. 그러나 셋 다 인구수가 거의 비슷해 도토리 키재기에 불과하다.인구수가 가장 적은 운젠과 가장 큰 폭으로 감소 중인 미나미시마바라 간의 누가 먼저 3만명대 돌입하냐의 싸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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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추계인구 2021년 8월 1일 기준[2] 시마바라 번의 이전 이름 또한 이 성의 이름인 히노에 번이었다.[3] 쫒겨난 것이 아니라 본인 요청에 의한 것이다. 전 영주이자 아버지였던 아리마 하루노부가 키리시탄 및 서양 세력과 얽혀 처형된 이후, 영지 대부분을 차지한 키리시탄 영민,가신들에 대한 악감정이 크게 작용했다. 이게 얼마나 심했냐면 예수회 사료에 1613년 나오즈미가 세례명을 받은 자신의 두 이복동생들을 8세와 6세일 때 살해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후 시마바라의 난에서는 토벌군으로 참전, 과거 자신의 영민과 가신이었던 반군들을 마음껏 썰고 다닌다(...).[4] 당시 시마바라 번은 4만 석이었는데 이조차도 현실 상황보다 과했다고 한다. 그런데 시마바라 성의 규모는 10만 석(...)[5] 에도 시대 다이묘들 중 유일하게 할복이 아닌 참수로 가이에키당했다. 이게 일어나기 전까지는 최대 규모의 반란이었던 데다가 토벌군 사령관이 전사해 교체되고 압도적인 수적 우세에도 불구하고 농성전에 휘말렸으니 화가 난 막부가 그럴 만하다.[6] 작은 영지에서 주민 다수가 반란군, 일부는 진압군으로서 참가해, 반란군 쪽에서만 3만 여 명에 달하는 사망자가 나왔고 이후 키리시탄의 색출과 처분까지 이루어졌다. 물론 이는 아마쿠사에서 봉기한 이들을 합친 숫자임을 감안해야 하지만 변두리 도서 지역에게 있어서는 궤멸적인 피해이다. 특히 미나미시마바라 쪽은 거의 다 반란에 가담했고 최후의 농성지였으니 남아있는 인구가 없었을 것이다.[7] 약 200년 뒤 벌어진 보신 전쟁 당시 격전지였던 아이즈 번 소속의 추정 사망자는 3,000명이 넘는데 이후 수십년간 피해 복구가 진행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시마바라의 난 당시 최후에 농성하다가 전멸한 반란군의 수는 그 10배. 게다가 주 희생자가 무사, 군인이었던 보신 전쟁과 달리 여기는 대다수가 지역의 농민, 어민 등이었다. 인구수 변화 및 지역을 종합해보면 사실상 행정구역이 통째로 사라진 것과 같은 수준의 피해였다.[8] 실제로, 시마바라의 명물인 시마바라 소면은 이 당시 히로시마에서 온 이주민들이 만들었다고 한다.[9] 실제로 같이 봉기한 아마쿠사 지역은 이후 폐번치현 때까지 막부 직할령으로 바뀌었다.[10] 운젠 분화의 피해 현장을 일부 남겨놓은 곳이다.[11] 나가사키 원폭 평화공원의 동상 제작자로 유명하다.[12] 상술한 역사 부분을 보면 알겠지만, 아버지와 아들의 키리시탄에 대한 태도가 극과 극이라 아리마라는 이름이 묘하게 느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