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실리오스 레카피노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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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Κ(ύρι)]ε βοήθει Βασιλ[είῳ ἐ]ν[δοξο]τάτῳ προέδρῳ τῆς συγκλήτου

[(καὶ) πα]ρακοιμ[ω]μέν(ῳ) τοῦ φιλοχρ(ίστου) δεσπότου

주님, 원로원의 가장 저명한 프로에드로스(proedros: 원로원 의장)이며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황제의 파라코이모메노스(parakoimomenos: 황제의 옆에서 자는 자. 일반적으로 환관이 맡는 궁정 직위)인 바실리오스를 도우소서.

이스탄불에서 출토된 10세기 중반 동로마 제국 주화. 황제와 황후, 황족의 이름과 이미지가 주로 실리는 주화에 환관의 이름이 새겨진 점에서 바실리오스의 권세가 실로 대단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1. 개요
2. 행적




1. 개요[편집]




10세기 동로마 제국환관, 정치인, 장군. 로마노스 1세부터 바실리오스 2세까지 6명의 황제를 섬기며 강력한 권세와 부를 누렸지만, 바실리오스 2세에 의해 숙청되었다.


2. 행적[편집]


로마노스 1세슬라브인 여인 사이의 사생아로, 출생년도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학자들은 대체로 910년에서 915년 사이에 태어났을 것으로 추정한다. 요안니스 스킬리치스, 요안니스 조나라스 등은 그가 로마노스 1세가 폐위되었을 때 거세되었다고 주장했지만, 미하일 프셀로스는 성인을 거세하는 것은 드물고 매우 위험하다며 어렸을 때 거세되어 궁정에서 환관으로 근무했다고 주장했다. 현재 학계에서는 프셀로스의 주장이 옳다고 본다.

바실리오스가 로마노스 1세 치세 동안 어떤 행적을 보였는지는 기록이 미비해 분명하지 않으나 환관으로서 궁전의 잡무를 맡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던 944년 12월 로마노스 1세가 두 아들 스테파노스 레카피노스콘스탄티노스 레카피노스에게 폐위된 뒤, 945년 1월 콘스탄티노스 7세가 아내 엘레니 레카피니의 조언을 받아들여 스페타노스와 콘스탄티노스를 긴급 체포해 로마노스 1세가 보내졌던 수도원에 함께 들어가게 했다. 이후 바실리오스는 파라코이모네스(parakoimomenos)로 발탁되었다.

참회자 테오파네스는 바실리오스가 콘스탄티노스 7세의 충실한 환관이었으며, 콘스탄티노스 7세의 왕비 엘레니와 긴밀한 관계를 가졌다고 기술했다. 이로 볼 때, 바실리오스는 두 형제가 콘스탄티노스 7세를 음해하려는 움직임을 보인다는 것을 적시에 알려서 콘스탄티노스 7세가 반격하게 해줬고, 그 보답으로 중책을 맡은 것으로 보인다. 그 후 958년에 요안니스 치미스키스 장군을 구원하기 위한 원정군 사령관으로 발탁되어 동방으로 향했다. 그는 요안니스와 합세한 뒤 사모사타를 파괴하고 알레포의 에미르 사이프 알 다울라가 이끄는 구원군에게 큰 패배를 안겨줬다. 바실리오스와 요안니스는 수도로 귀환하여 히포드룸에서 개선식을 거행했다.

959년 11월 9일 콘스탄티노스 7세가 사망한 뒤 황위에 오른 로마노스 2세는 바실리오스를 경질하고 또다른 환관 요세프 브링가스를 파라코이모메노스에 선임했다. 그는 이에 강한 반감을 품고 브링가스를 타도할 기회를 노렸다. 그러던 963년 초 로마노스 2세가 갑작스럽게 사망했고, 5살된 장남 바실리오스 2세와 3살된 차남 콘스탄티노스 8세가 공동으로 황위에 올랐다. 두 어린 황제의 모후 테오파노는 섭정으로 지목되었고, 브링가스는 황후의 최고 고문이 되었다.

브링가스는 군대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고 있는 니키포로스 포카스가 군대와 귀족의 지지를 받아 왕좌를 주장하는 것을 막기 위해 니키포로스의 부하 로마노스 쿠르쿠아스와 요안니스 치미스키스에게 서신을 보내 그들의 상관을 배신하는 대가로 각각 동방과 서방의 최고 사령관직을 주겠다고 제의했다. 그러나 두 사람은 이 서신을 니키포로스에게 보이며 결단을 촉구했고, 결국 니키포로스는 963년 7월 2일 카이사레아에서 황제를 자칭했다. 그후 그는 콘스탄티노플에 자신을 공동 황제로 받아들이라는 편지를 보냈다. 그러자 브링가스는 콘스탄티노플의 수비를 강화하고 니키포로스를 국가의 적으로 선포했다.

바실리오스는 상황을 관망한 끝에 니키포로스의 편에 들기로 마음먹고, 니키포로스가 군대를 이끌고 콘스탄티노폴리스 외곽에 이르렀을 때 3,000명에 달하는 수행원을 무장시킨 뒤 민중을 선동하여 브링가스의 추종자들을 공격하고 도시의 주요 건물과 항구를 장악했다. 브링가스는 아야 소피아로 피신했고, 바실리오스는 크리소폴리스 항구에 달려가서 니키포로스 일행을 맞이했다. 그 후 브링가스는 추방되었고, 바실리오스는 니키포로스의 황위 등극을 도운 공로를 인정받아 파라코이모네스에 복직되고 프로에드로스(proedros)에 선임되었다. 이후 황제가 전쟁에 전념하는 동안 궁전에 남아 내치를 돌보며 권세를 누렸다.

969년 12월 11일 요안니스 치미스키스가 추종자들과 함께 궁전에 난입하여 니키포로스 2세를 시해했을 때, 바실리오스는 병에 걸려 자택에 머물었다. 일각에서는 음모가 발생할 것을 감지하고 병을 가장했을 거라고 추정하지만, 사실 여부는 불명확하다. 그는 니키포로스 2세가 살해되었다는 소식을 접하자마자 요안니스 치미스키스가 황위를 계승하는 데 전폭적인 지지를 보냈으며, 대리인을 콘스탄티노폴리스 전역에 보내 민중이 혼란을 틈타 약탈을 벌이지 않도록 통제하게 했다.

이후 새 황제가 니키포로스 2세 추종자들과 친척을 제거하도록 도왔으며, 로마노스 2세와 니키포로스 2세의 미망인인 테오파노를 프로티 섬으로 유배보냈다. 테오파노는 몇 개월 후 프로티 섬에서 탈출해 소피아 대성당으로 피신했다. 그러나 바실리오스는 그녀를 강제로 끌어내서 더 먼 아르메니아의 유배지로 보냈다. 다만 요안니스를 마지막으로 보게 해달라는 그녀의 간청을 받아들여줬다. 요안니스는 테오파노와 만나는 데 동의했지만, 그 때문에 테오파노에게 온갖 욕설과 악담을 들어야 했다. 그 후 테오파노는 바실리오스에게 화살을 돌려 그를 몇차례 때린 후 수행원들의 제지를 받아 끌려 나갔다. 이후 그녀는 아르메니아의 유배지로 보내졌고 976년에 요안니스 1세가 사망한 이후에 풀려났다.

이후 요안니스 1세가 스뱌토슬라프 전쟁, 아랍과의 전쟁 등 군사 활동에 전념하는 동안, 바실리오스는 971년 요안니스 1세와 함께 5,000명의 정예병을 이끌고 페레아슬라베스츠를 습격하여 루스군에게 타격을 입힌 것 외에는 내정, 특히 재정 관리에 주도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그 과정에서 최근에 동로마 제국이 재정복한 아나톨리아 남동부 지역의 광활한 경작지를 수중에 넣는 등 막대한 재산을 축적했다. 975년 말 동방 원정을 마친 후 귀환길에 오른 요안니스 1세는 아나톨리아를 지나칠 때 그 일대의 질 좋은 토지의 소유자가 바실리오스라는 걸 듣고 크게 화를 내면서 돌아가는 대로 당장 그를 불러 해명을 듣겠다고 엄포했다.

당대 기록에 따르면, 바실리오스는 이 말을 전해듣고 사람을 시켜 황제가 먹는 음식에 독을 타게 했다. 이후 황제는 사지를 거의 움직일 수 없고 눈에서는 피가 흐르고 목과 어깨는 온통 고름투성이가 되는 증상에 걸렸다. 이에 황제는 어떻게든 콘스탄티노플로 돌아가려 애썼다. 가까스로 보스포루스까지 도착하긴 했지만 황제는 더이상 가지 못하고 976년 1월 10일 51살의 나이로 재위 6년 만에 붕어했다고 한다. 그러나 후대의 일부 학자들은 이 기록의 신빙성에 의문을 표하고 있다. 독살되었다고 보기엔 효력이 늦게 발동되면서도 그토록 강력한 효과를 지닌 신비로운 독약의 정체를 알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요안니스가 장티푸스, 말라리아, 이질 등의 치명적인 질병에 감염되어 죽었다고 보는 게 이치에 맞다고 본다.

요안니스 1세가 사망한 후 바실리오스 2세가 18세의 나이에 제국을 이끌었지만 실권은 여전히 환관 바실리오스에게 있었다. 요안니스 1세의 처남인 바르다스 스클리로스는 요안니스 1세 사망 소식을 듣고 황제가 되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병사들의 추대를 받아 황제를 칭한 뒤, 카이사레아로 진격하여 977년 가을 페트루스 포카스와 두 번 맞붙어 모조리 승리했고, 페트루스는 두 번째 전투에서 전사했다. 아탈레이아에 근거지를 둔 제국 남부 함대는 스클리로스에게 충성을 바쳤고, 몇달 뒤 니케아도 스클리로스의 손아귀에 들어갔다. 그는 군대를 보스포루스의 아시아쪽 해안에 집결시키고 수도를 수륙 양면에서 공격하려 했다. 하지만 마히알 쿠르티키오스가 이끄는 반란측 해군이 다르다넬스 해협을 봉쇄하려다 테오도로스 카란테노스가 이끄는 정부측 해군에게 패배하면서 기세가 꺾였다.

바실리오스는 키오스 섬에 7년간 유배되어 있던 바르다스 포카스를 복권시켜서 스클리로스와 맞서게 했다. 바르다스 포카스는 곧바로 자신의 근거지였던 카이사레아로 잠입한 뒤, 스클리로스를 토벌한다는 명분을 내세우며 군대를 일으켰다. 스클리로스는 후방이 위협받자 어쩔 수 없이 철수했다. 이후 스클리오스와 포카스간의 전쟁이 3년간 이어진 끝에, 979년 봄 포카스가 최종적으로 승리했고 스클리로스는 바그다드로 망명했다. 바실리오스는 바르다스 포카스를 동방군의 스클라리오스에 선임하고 그와 동맹 관계를 맺었다.

한편, 지난날 요안니스 1세가 불가리아 제1제국을 침략하여 동부 불가리아 일대를 병합한 뒤 서부 불가리아에서 할거하던 사무일은 동로마군이 바르디스 스클리로스의 반란군에 집중된 틈을 타 트라키아와 테살로니키, 테살리아, 헬라스, 펠로폰네소스 일대를 휩쓸었고, 많은 동로마 요새들을 공략했다. 바실리오스는 불가리아 반란군을 무력으로 제압하는 건 어렵다고 보고, 내부분열을 유도하기로 했다. 그는 사무일의 형제 아론에게 접근하여 자신의 여동생과 결혼시켜주고 트라키아의 지배자로 세워줄 테니, 사무일을 배신하라고 권유했다. 아론은 이에 호의적인 반응을 보였고, 양자는 긴밀한 교류를 이어갔다. 그러나 이 사실을 알게 된 사무일은 아론을 공격했고, 976년 6월 14일 뒤프니차 인근에서 아론과 그의 부하들을 모조리 처단했다. 다만 아론의 아들인 이반 블라디슬라프만은 사무일의 아들 가브릴 라도미르가 간청한 덕분에 살아남을 수 있었다.

아론을 이용한 공작이 실패로 돌아가자, 바실리오스는 불가리아의 전 차르인 보리스 2세로만을 불가리아로 돌려보내서 내분을 일으키게 하였다. 보리스 2세는 국경 근처의 숲을 지나가던 중 동로마 복장을 입은 것을 보고 오해한 불가리아 경비대에게 살해되었다. 조금 뒤쳐져서 걷던 로만은 경비대에게 자신의 신분을 밝히면서 가까스로 목숨을 건졌다. 로만은 비딘으로 끌려갔는데, 사무일은 의외로 그를 차르로 추대하고 자신은 장군을 자처했다. 당시 로만은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끌려갔을 때 요안니스 1세의 명령에 따라 거세되었다. 따라서 그는 자식을 둘 수 없으니 사무일이 결국 그의 뒤를 이을 게 확실했다. 로만은 사무일에게 국정을 맡겼고, 자신은 신앙 생활에 전념했다. 977년, 사무일이 테살리아의 중요한 항구도시인 라리사를 포위하여 983년까지 공성전을 벌였다. 바실리오스는 라리사를 구원하기 위해 구원군을 파견했지만 구원군을 파견했으나 중도에 격파당했다. 결국 라리사 주민들은 항복하였고, 남자들은 불가리아 군에 강제 입대하고 여자와 노약자는 불가리아 내륙으로 끌려갔다.

불가리아 반란군을 상대로 숱한 실패를 맛보면서 바실리오스의 위상이 실추되자, 그동안 바실리오스의 꼭두각시로 지내는 것에 울분을 느끼고 있던 바실리오스 2세는 이 때를 틈타 친위 쿠데타를 벌이기로 마음먹었다. 985년, 바실리오스 2세는 파라코이모네노스가 바르다스 포카스와 밀서를 주고받으며 자신을 폐위시키려 했다고 비난하고 권좌에서 축출했다. 그의 모든 토지와 재산은 몰수되었고, 그가 시행한 모든 법률은 무효로 선언되었다. 바실리오스는 추방된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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