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반 블라디슬라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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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이반 블라디슬라프.jpg
이름
이반 블라디슬라프
(영어: Ivan Vladislav, 불가리아어: Иван/Йоан Владислав҃)
출생
미상
사망
1018년 2월
직위
불가리아 제1제국 차르

1. 개요
2. 생애




1. 개요[편집]


불가리아 제1제국 26대 차르. 가브릴 라도미르를 시해하고 차르 직위를 찬탈한 뒤 동로마 제국과의 전쟁을 이어갔지만 1018년 2월 디라키움 공방전 도중 전사했다. 이반 1세[1]로도 불린다.


2. 생애[편집]


사무일의 동생인 아론의 아들이다. 아론은 형이 동로마 제국을 상대로 반란을 일으켜 불가리아를 부흥하고자 할 때 함께 했지만, 바실리오스 2세 황제의 꼬드김에 넘어가 배신하려 하다가 976년 6월 14일 뒤프니차 인근에서 형의 반격으로 살해되었다. 이때 사무일이 이반 블라디슬라프마저 죽이려 하자, 장남 가브릴 라도미르가 "혈육끼리 더 이상 피를 봐서는 안 된다"라며 아버지를 간절히 설득해 그의 목숨을 건지게 하였다.

그러나 1014년 10월 사무일이 클레이디온 전투의 참상에 큰 충격을 받고 사망하고 뒤를 이은 가브릴도 동로마 제국과의 전쟁에서 고전하자, 그는 딴 마음을 먹었다. 바실리오스 2세는 그가 차르가 될 수 있게 도와주겠으며, 차르가 된 뒤에는 호의를 베풀겠다고 약속했다. 그는 황제의 약속을 믿고 1015년 8월 페트리스크 마을 근처의 숲에서 사냥하던 가브릴을 습격해 살해하였다. 그는 가브릴의 가족과 지지자들을 모조리 죽이거나 실명형에 처하고 차르가 되었다. 1016년에는 차르 사무일의 가신이자 사위였던 두클랴 대공 요반 블라디미르를 유인하여 살해했다.

그는 차르에 오른 뒤 바실리오스 2세에게 충성을 맹세하며 평화 협약을 맺으려 하였다. 그러나 바실리오스 2세는 그를 믿지 않고 암살자를 보냈으며, 암살이 실패하자 1015년 말 군대를 이끌고 오스토보와 소스크로 진격해, 펠라고니아 평원을 황폐화하고 수많은 불가리아인을 포로로 잡았다. 블라디슬라프는 오흐리드를 버리고 프레스파 요새에서 버텼다. 바실리오스 2세는 오흐리드를 점거한 뒤 좀더 공세를 이어가려 했지만, 불가리아군이 배후를 습격할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자 모시노폴리스로 귀환하였다.

블라디슬라프는 비톨라를 새 수도로 선택하고 요새화한 뒤, 1016년 비톨라로 쳐들어온 동로마군을 격파하고 페르니크를 88일간 포위공격했지만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철수했다. 1017년 바실리오스 2세의 요청을 받아들인 키예프 루스군이 불가리아 북동부를 침공하여 프레슬라프를 점령하고 수많은 전리품을 확보했다. 바실리오스 2세는 그 사이에 남쪽으로 진군하여 카스토리아를 포위했다. 블라디슬라프는 사절을 파견하여 루스군을 아군으로 끌여들이려고 애쓰는 한편, 페체네그와 연합하여 테살로니키를 공략하려 하였다.

바실리오스 2세는 페체네그가 다뉴브 강을 건너려 한다는 정보를 입수하자, 카스토리아 포위를 풀고 오스트로보 호수 근처로 이동하여 페체네그와 대치했다. 페체네그는 곧 동로마 제국과의 전쟁을 포기하겠다는 의사를 전달했고, 바실리오스 2세는 남쪽으로 돌아가서 사무일의 궁전이 있던 세티나를 점령하고 그곳에 보관된 식량을 다수 확보하였다. 그해 가을, 이반 블라디슬라프는 콘스탄티노스 디오예니스의 별동대를 기습 공격했지만, 바실리오스 2세가 친히 구원군을 이끌고 달려오자 전의를 상실하고 도주했다.

1018년 2월 디라키움 요새를 포위하여 공성전을 벌이던 중 전사했다. 장남 프레시안 2세가 뒤를 이어 차르가 되었지만, 불가리아 귀족들은 더 이상 희망이 없다고 판단하고 제국에 대거 귀순했다. 프레시안 2세는 어떻게든 버티려 했지만, 어머니 마리아 황후 마저 귀순하자 그해 8월 바실리오스 2세에게 항복하였고, 불가리아 제1제국은 멸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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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후의 불가리아 제2제국이반 아센 1세와는 별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