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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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순왕의 왕자
범공 | 梵空

출생
918년 이후(추정)[1]
신라 금성
사망
연대 미상
해인사[2]
재위기간
신라의 왕자
? ~ 936년 1월[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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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
부왕: 경순왕
모후: 죽방부인
형제
형: 마의태자
누이: 덕주공주[1]
법명
범공(梵空)
골품
진골(眞骨)


1. 개요
2. 생애
3. 문헌상 기록
4. 평가
5. 기타
6. 관련문서



1. 개요[편집]


통일신라의 제56대 경순왕의 계자(季子)[4]신라 말기의 왕족이자 고려 초기의 승려이다. 출가 이전 왕족 시기의 이름은 사서에 전하지 않는다.[5]

2. 생애[편집]


太子哭泣辭王, 徑徃皆骨山麻衣草食以終其身.

태자는 왕에게 울면서 하직하고, 바로 개골산으로 들어가서 삼베 옷을 입고 풀을 먹다가 생애를 마쳤다.

季子祝髮隷華嚴為浮圖名梵空, 後住法水海印寺云.

계자(막내 아들)는 머리를 깎고 화엄종에 들어가 승려가 되어 이름을 범공이라 했는데, 그 뒤로 법수사와 해인사에 머물렀다고 한다.

《삼국유사》 제2기이 김부대왕 中, 마의태자와 범공에 대한 언급


삼국사기의 기록에는 등장하지 않으며, 첫 기록은 고려 말기인 1281년에 일연이 지은 삼국유사에 처음으로 등장한다. 935년 음력 11월 신라고려에게 항복한 뒤, 형인 마의태자경순왕에게 하직한 후 바로 개골산으로 들어가 삼베옷을 입고 살다가 세상을 떠났다. (경순왕의) 막내아들은 머리를 깎고 화엄종에 들어가 승려가 되어 법명을 범공(梵空)이라 했는데, 이후 법수사(法水寺)[6], 해인사[7]에 기거했다고 한다. 이후의 행적은 불명.

사서에 이름이 전하지 않는 왕자가 있었는데, 그도 왕에게 항복하지 말 것을 극력 간하였으나, 왕이 듣지 않으매 처자를 버리고 형 태자와 함께 개골산으로 들어갔다고 한다.

《동국여지승람》 범공에 대한 언급


신라가 망하자 경순왕의 막내아들 김덕지가 중이 되어 법수사에 들어가 이곳 해인사에도 드나들면서 여생을 보냈다고 한다.

《해인사지》 범공에 대한 언급[8]


3. 문헌상 기록[편집]


  • 삼국유사》(1281, 일연)에서는 경순왕의 계자(季子)가 신라 멸망 후 머리를 깎고 중이 되어 이름을 범공(梵空)이라 하고 해인사에 머물다 죽었다고 한다.
  • 《하서 김인후 가장》(1561, 양자징[9])에서 경순왕의 왕자를 김덕지(金德摯)라 하였다. 여기서 처음 김덕지라는 이름이 등장한다. 김덕지는 울산 김씨의 시조이다.
  • 《하서 김인후 신도비문》(1682, 송시열)에서는 경순왕의 별자(別子)가 김덕지로 학성부원군에 봉해졌다고 하였다.
  • 증보문헌비고》(1908, 칙명)에서는 경순왕의 계자 범공이 해인사에 들어가기 전에 김운발(金雲發)이라는 아들을 두었는데 그가 분적하여 나주 김씨 시조가 되었고, 경순왕의 별자 김덕지가 분적하여 울산 김씨 시조가 되었다고 한다.
  • 울산 김씨 족보에서는 시조 김덕지를 범공과 동일 인물로 보고 있다.

4. 평가[편집]


  • 범공은 형 마의태자와 함께 신라가 망할 때 마지막까지 충절을 지킨 인물로 꼽힌다.
  • 나라가 위기에 처하자 마지막까지 절조를 지킨 범공의 행동은 조선시대에 들어와 유교적 대의 명분론에 비추어 재조명되고 칭찬받았다.

5. 기타[편집]


  • 울산광역시의 남암산에 위치한 김신대(金信臺) 설화에 의하면 승려가 된 범공이 말년에 세운 김신암(金信庵)이라는 절에서 유래했다는 설화가 전해진다.
  • 전라북도 전주시 완산구 교동 동고사에 신라 경순왕의 둘째 아들 덕지 왕자가 범공이란 스님이 되어 도를 닦으며 부왕과 어머니, 마의태자 등 5인의 상을 목각으로 조성하여 이 절에 봉안했다는 설화가 전해지고 있다. 그리하여 '김부대왕절', '진불대왕절'이라 불렀다.
  • 드라마 태조 왕건에서는 형인 마의태자와 달리 미등장했다.

6. 관련문서[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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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족보상 경순왕은 897년생이고 마의태자는 917년생이다. 삼국사절요에 의하면 부모의 혼인시점이 897년이므로 대략 맞아 떨어진다. 그렇다면 계자인 범공은 마의태자 출생 후 1년이 지난 918년 이후에 출생했을 것이다.[2] 증보문헌비고에서는 처자를 버리고 해인사에 들어가 살다 죽었다고 한다.[3] 음력 935년 12월.[4] 신라가 고려에 합병될 당시에 경순왕의 막내아들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경순왕은 고려에 귀순한 후 고려 태조의 장녀 낙랑공주 왕씨와 혼인하여 자녀를 더 갖게 된다.[5] 경순왕의 장남의 이름도 전해지지 않고 있는데, 지금 전하는 마의태자라는 이름도 일제강점기인 1926년 동아일보 연재 소설에서 비롯되었다.[6]경상북도 성주군가야산에 있었던 사찰. 현재 절은 남아있지 않고 석탑만 남아 있는데, 임진왜란 전후로 불에 타 폐찰된 것으로 추정된다.[7]경상남도 합천군에 위치한 사찰. 팔만대장경이 이곳에 보관된 것으로 유명하다.[8] 《해인사지》어느 부분인지 출처 필요.[9] 석성현감. 호는 고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