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방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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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순왕 후
왕비 김씨
왕비
죽방부인





竹房夫人
생몰년도 미상[1]

1. 개요
2. 기록


1. 개요[편집]


신라의 마지막 왕인 경순왕의 왕후. 죽방부인이라는 호칭은 고려사에서 언급되며, 삼국사기삼국유사에서는 등장하지 않는다.


2. 기록[편집]


여름 5월 정축 왕이 신라왕(新羅王)과 태후(太后) 죽방부인(竹房夫人), 상국(相國) 김유렴(金裕廉)과 잡간(匝干) 예문(禮文) 및 파진찬(波珍粲) 책궁(策宮)·윤유(尹儒), 한찬(韓粲) 책직(策直)·흔직(昕直)·의경(義卿)·양여(讓餘)·관봉(寬封)·함의(含宜)·희길(熙吉) 등에게 물품을 차등 있게 주었다.

고려사 세가 권제2 태조(931년)


고려사》에 "羅王太后竹房夫人"이라고 쓰여있기 때문에 죽방부인은 태후, 즉 경순왕의 모후(母后: 군주의 어머니) 또는 전대 군주의 아내이지 경순왕의 아내가 아니라는 주장이 있다. 이에 대해 《고려사》를 오역함에 따라 비롯된 결과라는 설도 있는데, 조선 제5대 문종 1년에 완성된 《고려사》는 고려를 기준으로 신라 경순왕을 선대 군주로 보고, 그의 왕후인 죽방부인은 경순왕의 태후(太后)라 기록했다고 해석했다는 것을 근거로 한다. 그러나 문종은 경순왕의 후손이 아닌 것은 물론 신라와 고려는 아예 다른 나라여서 경순왕의 아내를 태후라고 부를 위치가 되었는지는 의문이다. 왕비로서의 기록이 나타난 것은 조선 말기 세워진 신라경순왕전비부터이고, '죽방'(竹房)이라는 명칭은 인명이 아닌 "대나무 방" 정도의 의미로, 신라시대 관서 중 '방'(房)은 주로 여관이 근무하던 곳을 부르던 명칭이었고, 여성 인명을 사서에 표기하지 않게 된 고려시대의 특징을 고려하면 그녀가 기거하는 공간을 뜻하는 명칭일 가능성이 있다. 또한, 굳이 현 군주의 생모가 아니어도 전임 군주의 아내가 '태후'라는 명칭을 쓴 흔적도 《삼국사기》에서 발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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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남편 경순왕이 897년 전후에 출생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어서 죽방부인도 비슷한 시기에 태어났을 가능성이 높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