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라이언 트로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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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캐나다 및 미국의 前 아이스하키 선수. 마이크 보시와 함께 뉴욕 아일런더스 4년 연속 우승 왕조 신화를 쓴 주역이자, NHL사상 단 8명 뿐인 단일 경기 5골 이상을 기록한 선수 중 한 명이다.
2. 선수 경력[편집]
2.1. 뉴욕 아일런더스 입단과 왕조 건설[편집]
캐나다 서스캐처원의 미국 몬태나주와의 국경지대에서 태어난 트로티에는 장 벨리보를 우상으로 삼아 하키를 즐겼다.
1974년 NHL 드래프트 2라운드 전체 22번으로 지명된 트로티에는 95포인트로 신인 최다 포인트 기록을 세우며[4] 최우수 신인이 수상하는 칼더 메모리얼 트로피를 수상했다.
마이크 보시가 합류한 이후에는 클라크 길리스-브라이언 트로티에-마이크 보시의 일명 '트리오 그랑드(Trio Grande)'라는 라인을 형성하면서 활약했고, 1978-79시즌에는 134포인트로 非 오리지날 식스팀 최초로 하트 메모리얼 트로피와 아트 로스 트로피를 수상했다.
1980년 처음으로 스탠리 컵 파이널에 진출하여 플레이오프 팀내 최다 포인트를 기록하면서 콘 스마이스 트로피까지 수상했으며, 1983년까지 4년 연속 우승의 주역이 되었다.
1981년 캐나다 컵 대회 당시에는 캐나다 국가대표로 출전했던 것에 반해 1984년에는 아내가 미국인이었기 때문에, 미국 국적을 취득하여 출전했다.[5] 이 과정에서 캐나다 대표팀의 동료들의 질시를 받기도 했다.
보시와 함께한 아일런더스의 왕조는 막이 내려 에드먼턴 오일러스와 바통 터치로 왕좌를 넘겨주었다. 1987년 보시가 부상으로 조기 은퇴를 한 이후, 트로티에의 기량도 급감하며 1987-88까지만 해도 82포인트를 기록했던 사람이, 1년만인 1988-89년에는 45포인트로 거의 반타작에 그쳤고, 또 1년이 지난 1989-90에는 24포인트로 또다시 그것의 반타작(...)에 그쳤다. 그래도 아일스 최고의 프랜차이즈 선수로 적어도 수비에서는 어느정도 활약해주며 팀을 이끌었다. 마침, 센터 팻 라퐁텐의 포텐이 터지면서 세대교체의 필요성을 느낀 아일스는 그를 자유 계약으로 풀어주었고, 팀의 정신적 지주 마리오 르미외의 부상때문에 비상이 걸린 피츠버그 펭귄스가 하트퍼드 웨일러스의 프랜차이즈 센터 론 프랜시스와 함께 영입했다.
플레이오프에 돌아온 르미외와 루키 야로미르 야그르, 베테랑 센터 론 프랜시스 등과 함께 팀을 이끌며 1991년과 1992년 리핏 우승을 거두며 커리어 여섯 번 째 우승을 거두고 미련없이 아이스링크를 떠났다.
1992-93시즌에는 뉴욕 아일런더스 프런트에 합류했지만, 팀의 재정적인 문제로 1년만에 나오며 1993-94시즌을 절반 정도 펭귄스에서 다시 치르고 공식적으로 은퇴를 선언했다.
3. 은퇴 이후[편집]
1997년에 하키 명예의 전당에 헌액, 마이크 보시와 클라크 길리스에 이어서 2001년 10월 20일에 영구결번식을 통해 그의 등번호 19번은 결번으로 지정되었다. 하지만, 2002-03시즌을 앞두고 지역 라이벌 뉴욕 레인저스의 감독으로 취임한 것때문에 일시적으로 아일스와의 관계가 냉랭해졌다.
2006년 3월 4일, 경기에 앞서 아일스 구단 첫 스탠리 컵 파이널 우승 26주년을 기념하기 위한 행사[6] 에 초청되어 관계를 해소했고, 6월에 아일스 프런트에 합류하면서 2010년까지 선수 개발 부서에서 일했다.
2014-15시즌 또 다른 뉴욕팀 버팔로 세이버스의 코치로 잠시 현장에 복귀하기도 했다.
4. 기타[편집]
- 아메리카 원주민 혼혈이다. 정확히는, 아버지가 크리 혈통이며 어머니는 아일랜드계이다. 어릴 때부터 '혼혈종'이라든가 모멸적인 말을 들으며 인종차별을 당하기도 했지만, 백인인 어머니가 그가 간직한 유산을 자랑스러워하라며 독려했다고 한다. 하키 명예의 전당 헌액 연설에서도 이에 대해 밝히며 원주민 문제를 환기했고, 원주민 공동체를 돌아다니면서 원주민 혈통으로서의 자신감을 가질 것을 당부하는 등 사회적 활동에 적극적이다.
- 단일 경기에서 5골 이상 기록한 8명의 선수 중 한 명이다. 나머지 7명은 조 말론(5회), 마리오 르미외(4회), 웨인 그레츠키(4회), 뉴지 랄롱드(3회), 베이브 다이, 모리스 리샤르, 대릴 시틀러(이상 2회).
- 스티브 아이저먼이 가장 좋아하던 선수이기도 한데, 등번호를 19번으로 고른 것도 트로티에의 등번호에서 유래했다.
5. 연도별 기록[편집]
5.1. 정규시즌[편집]
5.2. 플레이오프[편집]
[1] 1984년 취득[2] 신시내티 스팅어스[3] 시즌 도중 경질.[4] 1981년에 노르디크 드 케벡의 페테르 슈꺄스트니가 39골 70어시스트 109포인트로 경신했고, 1993년에 테무 셀래네가 76골 56어시스트 132포인트로 또다시 경신하며 현재까지 기록을 유지하고 있다.[5] 물론, 캐나다 국적 역시 유지 중이다.[6] 공교롭게도, 이날 상대팀은 아일스가 1980년 스탠리 컵 파이널에 꺾었던 상대였던 필라델피아 플라이어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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