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리오 르미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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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오 르미외의 관련 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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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하키 명예의 전당 로고.svg
하키 명예의 전당 헌액자(1997)







파일:NHL 로고.svg NHL 관련 수상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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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NHL 로고.svg 1991, 1992 스탠리 컵 파이널 우승



파일:NHL 로고.svg NHL All-Rookie Team(1985)



파일:NHL 로고.svg NHL All-Star Game(1985, 1986, 1988, 1989, 1990, 1992, 1993, 1996, 1997, 2001, 2002, 2003)



파일:NHL 로고.svg NHL All-star Game MVP(1985, 1988, 1990)



파일:NHL 로고.svg NHL First All-Star Team(1988, 1989, 1993, 1996, 1997)



파일:NHL 로고.svg NHL Second All-Star Team(1986, 1987, 1992, 2001)













파일:NHL 로고.svgNHL Plus/Minus Award(1993)



파일:NHL 로고.svgBill Masterton Trophy(1993)



파일:NHL 로고.svgLester Patrick Trophy(2000)




국제 대회 수상 이력 / 보유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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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 소련 IIHF World Junior Championship 캐나다 국가대표팀 동메달



1985 체코슬로바키아 IIHF World Championship 캐나다 국가대표팀 은메달



1987 Canada Cup 캐나다 국가대표팀 금메달



파일:2002 솔트레이크시티 동계올림픽 로고.svg 2002 솔트레이크시티 동계올림픽 캐나다 국가대표팀 금메달



2004 World Cup of Hockey 캐나다 국가대표팀 금메달




기타 상훈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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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Order of Canada.png Order of Canada(2009)



l'Ordre national du Québec(2009)



Canada's Walk of Fame(2004)



Dapper Dan Sportsman of the Year(1986, 1989)



ESPY Award 선정 NHL Player of the Year(1993, 1994, 1998)



ESPN 선정 Hockey Player of the Decade(1990-99)



Lou Marsh Trophy[1](1993)



Chrysler-Dodge/NHL Performer of the Year(1985, 1986, 1987)



IIHF 선정 NHL All-Time Canada Team(2020)




파일:NHL 로고.svg 보유 중인 NHL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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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일 시즌 포인트 및 어시스트 기록 10위 이내는 웨인 그레츠키와 르미외 두 명만이 기록을 보유하고 있음
단일 피리어드 최다 골(4골)[1]
두 자릿수 쇼트핸디드 골을 2시즌 이상 기록한 선수는 웨인 그레츠키와 함께 유이함
올스타전 통산 최다골(13골, 웨인 그레츠키와 타이)
올스타전 단일 경기 최다 골(4골, 웨인 그레츠키와 대니 히틀리와 타이)
올스타전 MVP 최다 수상(3회, 웨인 그레츠키와 타이)
스탠리 컵 플레이오프 단일 피리어드 최다 골(4골, 팀 커와 타이)
스탠리 컵 플레이오프 단일 피리어드 최다 포인트(4포인트, 팀 커와 타이)
스탠리 컵 플레이오프 단일 경기 최다 골(5골)[2]
스탠리 컵 플레이오프 단일 경기 최다 포인트(8포인트, 파트릭 순드스트룀과 타이)



파일:피츠버그 펭귄스 로고.svg 피츠버그 펭귄스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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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다 골(690)
최다 어시스트(1033)
최다 포인트(1723)
연속 골 득점 경기 최장 기록(12)
연속 포인트 득점 경기 최장 기록(46)
단일 시즌 최다 골(85, 1988-89)[1]
단일 시즌 최다 어시스트(114, 1988-89)
단일 시즌 최다 포인트(199, 1988-89)


[각주]



파일:마리오 르미외.jpg

피츠버그 펭귄스 No.66
마리오 르미외[1]
Mario Lemieux OC[2] CQ[3]

출생
1965년 10월 5일 (58세)
[[캐나다 자치령|

캐나다 자치령
display: none; display: 캐나다 자치령"
행정구
]]
퀘벡주 몽레알
국적
[[캐나다|
캐나다
display: none; display: 캐나다"
행정구
]]

종목
아이스하키
포지션
센터
드래프트
1984년 드래프트 1라운드 전체 1순위 (PIT)
신체
193cm, 107kg
소속
피츠버그 펭귄스 (1984~1997, 2000~2006)
정당


별명
The Magnificent One[4]
Super Mario

1. 개요
2. 선수 경력
2.1. 피츠버그 펭귄스의 소년 가장
2.2. 리핏 우승과 황금기
2.2.1. 1988-89시즌 : 아쉽게 넘지 못한 200포인트의 벽
2.2.2. 1989-90시즌
2.2.3. 1990-91 시즌
2.2.4. 1991-92 시즌
2.3. 부상과의 싸움과 1차 은퇴
2.4. 은퇴와 현역 복귀
2.5. 피츠버그 펭귄스의 구단주 겸 선수
2.6. 2차찐막 은퇴 이후
3. 기타
4. 자선사업
5. 연도별 기록
5.1. 정규 시즌
5.2. 플레이오프



1. 개요[편집]


캐나다 의 前 아이스하키 선수. 시드니 크로스비 등장 이전 피츠버그 펭귄스를 상징하던 선수였을 뿐만 아니라, 부상으로 신음하는 와중에도 팀에 헌신하고 팀의 파산 및 연고이전 위기까지 무마시킨 펭귄스의 독보적인 프랜차이즈 스타였지만, 웨인 그레츠키 데뷔 이후 그레츠키의 위상에 근접한 유일한 선수였음에도 부상과 열악한 팀의 재정으로 선수생활에 어려움을 겪은 비운의 선수.

2. 선수 경력[편집]


1965년 캐나다 자치령 몽레알에서 태어난 르미외는 3살 때 지하실에서 형들과 나무 숟가락과 병뚜껑으로 하키를 시작했다고 한다.피츠버그의 전설들은 지하실에서 성장해야하는 법인가[5] 본격적으로, QMJHL[6]에서 하키 경력을 시작한 르미외는 1984년 NHL 드래프트에 나와 피츠버그 펭귄스에 전체 1순위로 지명받아 프로 경력을 시작했다.

2.1. 피츠버그 펭귄스의 소년 가장[편집]


하지만, 입단 때부터 실력 이외의 문제가 도사리고 있었으니... 펭귄스의 재정상태가 말이 아닌 지라 연고 이전 떡밥이 계속 돌았던 것. 1974-75시즌에 이미 북미 4대리그 팀 주제에 파산 선언(...)한 것으로도 모자라, 르미외가 입단하기 직전인 1983년까지 시빅 아레나의 평균 관중 수는 수용인원의 절반에도 못 미치는 7000명도 안 되어 흥행에도 어려움을 겪었다.[7] 플레이오프도 진출하지 못하는 등 팀이 엉망인 상황이라 데뷔 무대는 빠르게 찾아왔고, 1984년 10월 11일 보스턴 브루인스전에 데뷔전을 가졌다. 데뷔전에서 무려 레이 부르크로부터 퍽을 빼앗아 데뷔 골로 연결시켰다. 데뷔 시즌부터 올스타전에 참가하게 된 르미외는 올스타전 MVP까지 차지하면서, 최초로 신인이 올스타전 MVP를 수상한 선수가 되었다. 7경기를 결장했음에도 시즌 43골 57어시스트 100포인트로 칼더 메모리얼 트로피(최우수 신인)를 수상했다.

2년차인 1985-86시즌에는 141포인트를 기록하는 미친 활약을 펼쳐 리그 2위를 기록했다.[8] 그리고 레스터 B. 피어슨 상을 수상했다. 1986-87시즌에는 17경기나 결장했음에도 107포인트를 기록하는 활약에도 불구하고, 팀은 플레이오프 진출에 실패했다. 대신, 1987년 여름에 캐나다 컵 9경기에서 11골을 때려넣어 신기록을 세우는 등의 활약으로 캐나다 팀이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1987-88시즌에는 168포인트를 기록하며, 이전까지만 해도 7년 연속 아트 로스 트로피를 싹쓸이하던 웨인 그레츠키에게서 트로피를 빼앗는 위엄을 보였다. 게다가 정규 시즌 MVP인 하트 메모리얼 트로피에 올스타전 MVP까지 싹쓸이 해갔지만, 팀은 단 1포인트 차로 또다시 플레이오프 진출에 실패했다. 그나마, 긍정적인 점은 무려 9년만에 팀이 연승을 기록한 것(...)

2.2. 리핏 우승과 황금기[편집]



2.2.1. 1988-89시즌 : 아쉽게 넘지 못한 200포인트의 벽[편집]


1988-89 시즌, 그레츠키와 타이를 이루는 114어시스트를 기록했고, 두 시즌 70골 이상을 기록한 두 번째 선수[9], 50경기에서 50골을 기록한 역대 네 번째 선수였다. 결국, 정규시즌 199포인트로 200포인트는 달성하지 못했지만, 이 정도까지 해줘야 팀은 겨우 7년 만에 처음으로 플레이오프에 진출하게 되었다.

위의 기록에도 표기되어 있지만, 199포인트를 기록한 시즌답게 인상적인 경기가 많았는데, 첫 째로는 NHL 단일 경기 최다 포인트 기록(8포인트)을 세운 1988년 12월 31일 뉴저지 데블스전, 심지어 5가지 골 종류대로 다 넣었다!![10] 심지어, 플레이오프 2라운드 필라델피아 플라이어스 상대로 5골 8포인트를 한 번 더 하면서, NHL 정규시즌 단일 피리어드/단일 경기 최다 골/최다 포인트 네 가지 기록을 싹다 갈아치웠음에도 팀은 3승 4패로 아쉽게 탈락했다.

2.2.2. 1989-90시즌[편집]


46경기 연속 포인트를 기록하면서 그레츠키의 51경기 연속에 이은 역대 2위의 기록을 세웠고, 세 번째 올스타전 MVP를 수상했지만 허리 부상으로 정규시즌 21경기를 결장하고 123포인트를 기록하면서 팀은 또다시 진출 실패...

하지만 시즌 이후 이 허리 부상이, 그의 선수 커리어 내내 그를 괴롭히는 허리디스크가 되었고 설상가상으로 감염까지 되면서 여름에 수술대에 올랐다.

2.2.3. 1990-91 시즌[편집]


파일:마리오 르미외 1991.webp
허리 수술과 재활로 정규시즌에서 50경기를 결장했는데, 그의 부재에도 신인들과 팀원들의 활약으로 팀은 플레이오프에 진출했고, 르미외는 완치도 되지 않은 상태에서 플레이오프를 위해 복귀하여 플레이오프에서 23경기 16골 28어시스트 44포인트의 미친 활약으로 커리어 미네소타 노스 스타스와의 파이널에서 첫 스탠리 컵 우승 및 콘 스마이스 트로피까지 수상하는 기쁨을 누렸다. 또한, 플레이오프 44포인트는 1985년 그레츠키의 47포인트에 이은 역대 2위인데, 이걸 허리 부상을 안고도 기록했으니 대단할 따름.

특히, 2차전에서 블루라인에서 퍽을 받은 이후 디펜스 라인과 골텐더를 뚫고 골을 넣은 장면은 그의 커리어 최고의 골 중 하나로 손 꼽힌다.

2.2.4. 1991-92 시즌[편집]


파일:마리오 르미외 1992.jpg
계속 안고있던 허리 부상으로 64경기 출장에 그쳤음에도 131포인트로 아트 로스 트로피를 수상했다. 플레이오프에서 뉴욕 레인저스와의 경기 때 애덤 그레이브스가 스케이트 날로 르미외의 왼손을 베는 바람에 다섯 경기 결장하기도 했지만, 그럼에도 16골 18어시스트 34포인트를 기록, 시카고 블랙호크스를 스윕으로 떡실신시키고 리핏에 성공했다. 또한, 플레이오프 2년동안 78포인트를 기록했는데 1984-1985년 그레츠키의 82포인트에 이은 2위 기록인데, 부상이 아니였으면 1위가 될 것이 확실시되었기 때문에 아쉬운 기록.

2.3. 부상과의 싸움과 1차 은퇴[편집]


1992-93시즌 개막전부터 11월 1일까지 12경기 연속 골을 기록하는 등 쓰리핏할 기세로 순항 중인 와중에 청천벽력과도 같은 통보를 받게 되었으니... 바로, 호지킨 림프종 진단을 받은 것. 그리고 결국 방사선 치료와 함께 두 달을 결장했고, 그럼에도 아트 로스 트로피 수상자 팻 라퐁텐에 불과 12포인트밖에 뒤처지지 않았다.

마지막 방사선 치료를 받은 당일에 필라델피아로 날아가 경기를 치러 심지어 골과 어시스트까지 기록했다. 그의 이런 팀에 대한 헌신과 열정에 그 악명높은 필리건들조차도, 심지어 펜실베이니아 라이벌 선수임에도 기립박수로 그를 맞이했다. 그의 부상 복귀 이후 팀은 무려 17연승을 달리며 기네스 기록에 등재되었다.최다 연패도 펭귄스가 가지고 있다는 건 안 비밀 이에 힘입은 펜스는 창단 첫 리그 선두로 프레지던트 트로피를 수상했다. 또한, 르미외 개인으로서도 경기당 2.67포인트를 기록하며 1983-84시즌 2,77포인트, 1985-86시즌 2.69포인트의 그레츠키에 이은 역대 3위 기록도 썼다. 결국, 미친 득점 페이스로 60경기 출장하여 160포인트르 기록하여 라퐁텐보다 24경기 적게 뛰고도, 12포인트 앞서며 작년과는 정반대 상황이 되었다. 플레이오프에서는 1라운드에서 뎁스를 5경기만에 집으로 보내버렸지만, 2라운드에서 아일스에게 7차전 끝에 패퇴하면서 쓰리핏은 좌절되었다. 시즌 이후, 커리어 네 번째 아트 로스 트로피와 두 번째 하트 메모리얼 트로피, '인내심과 스포츠맨십, 하키에 대한 헌신을 보여준 선수'에게 수여하는 빌 마스터튼 트로피까지 수상했다.

하지만 시즌 이후인 1993년 여름에 또다시 재발한, 아니 계속 앓고 있던 디스크가 터져 두 번째로 수술대에 오르며 93-94시즌에는 22경기 출전에 그쳤고, 계속된 치료에 지친 르미외는 마침 94-95시즌이 직장폐쇄로 정상적으로 진행되지 않자 휴식을 선언했다.

1995-96시즌에 복귀한 르미외는 1995년 10월 26일, 뉴욕 아일런더스전에 커리어 605경기만에 500골을 달성했다. 이는 웨인 그레츠키의 575경기에 이은 역대 두 번째로 적은 경기로 달성한 것이다. 시즌 이후 69골 92어시스트 161포인트로 아트 로스 트로피를 다섯 번 수상한 네 번째 선수이자, 하트 메모리얼 트로피를 3회 수상한 역대 7번째 선수로 기록되었다. 팀은 컨퍼런스 파이널에 진출하며 르미외와 함께하는 세 번째 우승을 노렸지만, 신규팀 플로리다 팬서스의 거친 돌풍에 휩쓸리며 7차전 끝에 패배하면서 물건너 갔다.

1996-97시즌, 719경기만에 커리어 600골을 기록하고 커리어 10번째 100포인트 시즌을 보내게 되었는데, 그레츠키의 718경기 600골 및 15시즌 100포인트에 이은 역대 2위이다. 시즌 이후에는 50골 72어시스트 122포인트로 여섯 번째 아트 로스 트로피를 수상했다. 하지만, 르미외는 1997년 4월 6일, 플레이오프를 끝으로 은퇴하겠다는 충격적인 발표를 했고, 팀은 1라운드에서 필라델피아 플라이어스에게 5차전만에 패배하면서 탈락했다. 그 악명높은 필리건들은 야유·욕설이나 오물 투척 대신에, 이번에도 기립박수로 그의 은퇴를 축복해주었다. 은퇴 이후 1997년 11월 17일, 은퇴 이후 3년의 대기기간 면제로 명전에 직행한 역대 9번째 선수가 되었다. 12년이라는 비교적 짧은 커리어에도 745경기동안 1494포인트를 기록하며, 경기당 2포인트 이상을 기록한 유일한 선수로서 이 부문만큼만은 그레츠키를 뛰어넘었다.

2.4. 은퇴와 현역 복귀[편집]


1990년대 초, 르미외와 야로미르 야그르의 활약을 앞세워 리핏도 하는 동안, 펜스의 오너일가와 프런트는 무능하기 짝이 없어서 정신 못차리고 또다시 채권자들에 빚을 무더기로 졌던 상태였다. 결국, 구단은 르미외를 포함한 선수들에게 연봉 지급을 미루기도 했고, 땜빵을 하려고 여기저기 트레이드하며 지혈을 하려고 했지만 오히려 역효과만 줄줄이 난 상황.

결국, 1988-99시즌 도중인 1998년 11월에 또다시 파산 신고를 한 펜스는 르미외에게 당시 돈으로 무려 $32.5M에 달하는 급여를 미지급한 탓에 르미외는 펜스의 가장 큰 채권자가 되어있었다(...) 차마 팀이 없어지는 꼴은 볼 수 없었던 르미외는 펜스에 최대주주가 될 수 있기 위한 현금 $5M과 채권 중 연체된 급여 중 $20M은 주식으로 전환하는 조건으로 연고이전 없이 인수한다는 조건을 내걸었고, 미국 파산법원이 이를 승인하면서 르미외가 펜스의 구단주가 되었다.[11] NHL 이사회에서도 1999년 9월 1일에 그의 소유권 신청을 승인하자, 르미외는 이틀만에 당시 펜스의 경기를 중계하던 폭스 스포츠 피츠버그와 시빅 아레나를 운영하던 스펙터코 매니지먼트 그룹과 계약을 체결하는 등 발빠르게 움직였고, 법원이 그 사이에 르미외의 구단 조직 개편안을 최종 승인하면서 구단의 사장 겸 이사회 의장 겸 CEO(..)로 취임했다. NHL 선수가 구단주로 취임한 것은 르미외가 최초.

르미외의 이러한 노력이 통했는지, 구단주로서의 첫 시즌부터 적자였던 손익을 흑자로 전환하는 데 성공하였고, 2000년에 자신이 현역으로 복귀하게 되면서 팀 재정도 개선되기 시작했다.

2000년 말부터 르미외가 현역으로 복귀한다는 루머가 돌았고, 실제로 현역에 복귀하겠다는 깜짝 선언을 하였다. 이유는 네 살짜리 아들이 르미외가 뛰는 모습을 보고싶어했기 때문이라고. 또한, 나이키와 은퇴할 때까지 연 $0.5M의 장비 계약을 맺었다.

2.5. 피츠버그 펭귄스의 구단주 겸 선수[편집]


파일:마리오 르미외 2001.jpg
2000년 12월 27일, 구단주 신분인 르미외가 립스전에 복귀 경기를 치렀고, 이는 미국과 캐나다에서 전국 경기로 중계되었을 만큼 큰 화제를 불러모았다. 첫 시프트로 투입 33초만에 어시스트를 기록하더니, 1골 2어시스트 3포인트로 성공적인 데뷔전을 치러 실력이 녹슬지 않았음을 증명했다. 비록, 복귀 첫 시즌은 43경기 출전에 그쳤지만 그럼에도 76포인트를 기록했고, 세컨드 팀에 선정되는 저력을 과시했다. 플레이오프에서도 상위시드인 캡스세이버스를 꺾는 놀라움을 보여줬지만, 컨퍼런스 파이널에서 동부 1위인 뎁스의 철통 수비에 주포인 르미외와 야그르가 5경기 내내 골 득점에 실패하며 도전을 멈추게 되었다. 르미외는 마지막 5경기에선 슬래싱을 범해 페널티 박스 안에서 팀의 탈락을 지켜봐야만 했다.

하지만, 재정적인 압박은 여전해서 01-02 시즌을 앞두고 야로미르 야그르를 라이벌 워싱턴 캐피털스로 이적시킨 것을 시작하여 고액 연봉자들을 트레이드시키거나 FA 유출이 심해졌다. 야그르의 주장직을 다시 이어받았지만, 고질적인 허리디스크가 또 터진데다, 첫 올림픽 출전인 2002 솔트레이크시티 동계올림픽에서 최상의 컨디션을 위해 24경기 출장에 그쳤다. 결과적으로, 올림픽 금메달도 목에 걸었지만, 펜스의 칼럼을 쓰는 한 칼럼니스트는 시즌을 포기하면서까지 올림픽을 우선한 것에 대해 팬들에게 사과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02-03시즌에 만37세의 나이로 리그 득점 선두에 오르기도 했지만, 시즌 막판에 부상으로 결장하면서 91포인트로 리그 8위에 머물렀다. 03-04시즌에는 아예 10경기 출장에 그쳤고, 팀도 NHL 최장 연패 기록인 18연패[12]를 쓰는 등 막장으로 굴러떨어지고 있었다.

저물어가는 선수 경력과는 별개로, 펭귄스에게는 전화위복이 되는 사건이 터졌으니... 바로, 04-05시즌이 직장폐쇄로 통째로 날아간 것. 또한, 락아웃[13][14]의 결과로 샐러리 캡 상한선이 높아지고 리그 수익 분배도 이루어짐에 따라, 펜스도 빅마켓 팀과 경쟁이 가능해졌다. 이 시기동안 펜스는 숨고르기에 들어가 로스터 조정을 했고, 운좋게도 2005년 드래프트 추첨에서 전체 1픽을 얻어 최대 유망주인 시드니 크로스비를 지명하는 데 성공했다.[15] 구단주로서의 르미외의 노력과 호소가 마침내 결실을 맺어, 2005년 8월에 펭귄스가 모든 채무관계를 청산했다고 한다!! 르미외는 켄 소이어에게 구단 사장과 CEO직을 넘겨주었지만, 여전히 최대 주주로 남아있었고 2006년 1월에는 피츠버그에서 연고이전을 하지 않는 조건으로 매입자를 물색하고 있다고 발표했다. 선수로서도, 펜스의 미래를 책임질 슈퍼 루키 크로스비의 정착을 돕기 위해 집에 초청하기도 하고 적극적으로 멘토링을 해주었다.

2.6. 2차찐막 은퇴 이후[편집]


에드 올치크 감독이 경질된 가운데 2006년 1월 24일, 시즌 도중에 불규칙한 심장박동을 이유로 영구적으로 은퇴를 선언했다. 700골 고지까지 딱 10개만을 남겨놓아서 더더욱 아쉬운 은퇴였다.

2006년 10월에는 리서치 인 모션의 회장 짐 발실리에게 매각에 합의했음을 발표했다. 하지만, 르미외가 걸었던 단 하나의 조건, 연고 이전을 하지 않겠다는 것을 약속했음에도 딴소리하면서 NHL 이사회와 분쟁을 일으켰고 결국, 발실리는 두 달 후에 돌연 매입을 철회해버렸다.

르미외가 돌연 캔자스시티를 방문하면서 또다시 연고이전 떡밥이 흘러나오기도 했지만[16], 2007년 3월 13일에 피츠버그시와 홈구장 멜론 아레나 맞은 편에 '콘솔 에너지 센터' 신축 구장 건설 및 최소 30년 사용 협약을 체결하면서 수그러들었다. 르미외가 캔자스시티를 방문했던 것도, 리그에서 가장 낡은 구장을 쓰고 있음에도 신구장 건설에 소극적인 피츠버그시를 압박하기 위했음이 밝혀졌다.

이후에는 시드니 크로스비-예브게니 말킨-크리스 르탕-마르크앙드레 플뢰리 등의 활약으로 스탠리 컵 우승을 세 번이나 하는 것을 흐믓하게 지켜보았고, 2021-22시즌을 앞두고 보스턴 레드삭스리버풀 FC의 구단주 펜웨이 스포츠 그룹이 구단 지분을 매입하여 최대주주가 되는 등 팀의 재정 문제도 영구히 해결되면서 해피 엔딩.

3. 기타[편집]


  • 원래 매일 담배 한갑을 피워댈 정도로 골초였지만, 호지킨 림프종 진단을 받은 이후에 금연했다.

  • 아내와는 1993년 6월 26일에 결혼하여, 네 명의 자식을 낳고 피츠버그의 교외에 살고 있다.



  • 2010년 9월 3일, 캐나다 2등급 훈장에 서훈되었다.

4. 자선사업[편집]


여타 자선사업을 많이하는 스포츠맨들처럼 르미외 역시 자선 사업을 많이하고 있다. 1993년 호지킨 림프종 진단을 계기로 의학 연구 프로젝트를 후원하기 위한 '마리오 르미외 재단'을 설립했고, 피츠버그 암 연구소, 맥고원 재생의학연구소, 백혈병 협회, 루퍼스 재단, 피츠버그의 어린이 집 등등에 후원하고 있다. 또한, 다른 선수들의 자원 봉사 및 자선 사업, 지역 사회 후원을 돕는 역할도 하고 있다.

이외에도, 1996년에 아들이 미숙아로 태어나면서 병원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을 때, 아이들이 병원에서 놀 공간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고 아내의 제안으로 "오스틴의 놀이방 프로젝트"라는 프로그램을 설립, 미국 전역의 병원에 놀이방을 설치하여 아이들이 놀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 치유를 돕는 데 그 목적이 있다.

5. 연도별 기록[편집]



5.1. 정규 시즌[편집]


정규 시즌 기록
소속
시즌
GP
G
A
P
+/-
PIM
PPG
PPP
SHG
SHP
GWG
OTG
S
S%
FO%
PIT
1984-85
73
43
57
100
-33
54
11
33
0
0
2
1
209
20.57
-
1985-86
79
48
93
141
-8
43
17
66
0
0
4
1
276
17.39
-
1986-87
63
54
53
107
12
57
19
38
0
0
4
2
267
20.22
-
1987-88
77
70
98
168
23
92
22
80
10
14
7
2
382
18.32
-
1988-89
76
85
114
199
41
100
31
79
13
18
8
1
313
27.16
-
1989-90
59
45
78
123
-18
78
14
49
3
3
4
0
226
19.91
-
1990-91
26
19
26
45
8
30
6
13
1
1
2
0
89
21.35
-
1991-92
64
44
87
131
27
94
12
47
4
10
5
0
249
17.67
-
1992-93
60
69
91
160
55
38
16
55
6
9
10
0
286
24.13
-
1993-94
22
17
20
37
-2
32
7
15
0
0
4
0
92
18.48
-
1995-96
70
69
92
161
10
54
31
79
8
9
8
2
338
20.41
-
1996-97
76
50
72
122
27
65
15
37
3
6
7
0
327
15.29
-
2000-01
43
35
41
76
15
18
16
32
1
1
5
1
171
20.47
52.11
2001-02
24
6
25
31
0
14
2
14
0
0
0
0
75
8
44.63
2002-03
67
28
63
91
-25
43
14
45
0
0
4
1
235
11.91
46.06
2003-04
10
1
8
9
-2
6
0
4
0
0
0
0
21
4.76
49.13
2005-06
26
7
15
22
-16
16
3
15
0
0
0
0
77
9.09
55.36
NHL 통산
(17시즌)

915
690
1033
1723
114
834
236
701
49
71
74
11
3633
19
-

5.2. 플레이오프[편집]


플레이오프 기록
소속
시즌
GP
G
A
P
+/-
PIM
PPG
PPP
SHG
SHP
GWG
OTG
S
S%
FO%
PIT
1988-89
11
12
7
19
-1
16
7
10
1
1
0
0
41
29.27
-
1990-91
23
16
28
44
14
16
6
19
2
2
0
0
93
17.2
-
1991-92
15
16
18
34
6
2
8
18
2
2
5
0
69
23.19
-
1992-93
11
8
10
18
2
10
3
9
1
1
1
0
40
20
-
1993-94
6
4
3
7
-4
2
1
2
0
0
0
0
23
17.39
-
1995-96
18
11
16
27
3
33
3
12
1
1
2
0
78
14.1
-
1996-97
5
3
3
6
-4
4
0
2
0
0
0
0
19
15.79
-
2000-01
18
6
11
17
4
4
1
6
0
1
3
0
39
15.38
46.39
NHL 통산
(8시즌)

107
76
96
172
20
87
29
78
7
8
11
0
402
18.9
-

[1] 미국에서는 미국 발음으로 마리오 르뮤(\leh-MYOO\)라고 불렀다.[2] 캐나다 훈장 2등급, 2009년 서훈[3] 퀘벡주 훈장, 2009년 서훈[4] 프랑스어로는 'Le Magnifique'[5] 시드니 크로스비2살 때 지하실에서 시작했다(...)[6] 퀘벡 메이저 주니어 하키 리그[7] 그럴 만도 한게, 지금이야 30년동안 리빌딩(...)한다고 까이지만... 피츠버그 파이리츠는 당시에 빅 레드 머신 신시내티 레즈와 경쟁하면서 전성기를 달리고 있었고, 피츠버그 스틸러스댈러스 카우보이스 다음가는 전국구 인기팀인데, 이들에 비해 성적도 후달리는 데다 리그를 대표할 만한 프랜차이즈 스타의 부재도 한몫했다.[8] 1위는 웨인 그레츠키215포인트[9] 물론, 첫 번째는...[10] 이븐-스트렝스, 파워플레이, 쇼트핸디드, 페널티샷, 엠티넷[11] 르미외는 자신에게 채무를 지지 않았더라도, 연고이전 및 공중분해를 막기 위해 입찰을 통해 인수했을 것이라고 인터뷰했다.[12] 즉, NHL 정규시즌 최다 연승 기록과 연패 기록 모두 피츠버그 펭귄스가 보유하고 있는 것.[13] 여담으로, 타 리그와 마찬가지로 직장폐쇄(락아웃)이 보통 선수협과 구단주 그룹 간의 계약에 관련한 합의에 실패하면서 발생하기 마련인데, 르미외는 구단주이면서 선수였던 탓에 조금 곤란한 처지에 놓였었다. 물론, 구단주 지위 때문에 선수협은 탈퇴했었지만 선수 연금을 받기 때문에 조합비도 여전히 내던 상태였기 때문에... 결국, 구단주 투표는 참여하지 않고 부사장에 일임했다.[14] 또한, 락아웃 시기에 르미외는 빅마켓과 스몰마켓의 격차를 해소하기 위해 NFL의 하드 샐러리 캡 도입을 제안하였다.[15] 또한, 이 해 드래프트 3라운드에서는 크로스비 시대의 코어 디펜스맨 크리스 르탕 역시 지명했기 때문에 펜스 입장에서는 르미외 지명에 이어 또다른 구단 역사의 전환점이 되었다.[16] 캔자스시티는 이전부터 연고이전 시 유력한 도시로 꼽히기도 했고, 마침 신축 구장도 있어서 더욱 신빙성을 부여하는 근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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