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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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유래
2. 의미
3. 이야깃거리
3.1. 가설
3.2. 구성
3.3. 역사, 낙원동 교사와 관련된 일화



1. 유래[편집]


대학스포츠리그 출범아래 오늘날까지 건국대학교,단국대학교,동국대학교 세 대학교들은 고려대학교, 연세대학교의 리그 및 토너먼트전에서 벌이는 고연전 대학 스포츠 경기처럼 삼각경쟁 구도를 형성하고 있어서 유래된 말로 확정한다.[3] 토너먼트 전에서는 1986년부터 이어온 MBC배 전국대학농구대회에서 그 경쟁구도가 심화된 양상을 이루고 있으며[4], 2009년도에는 동국대학교가 2016년도에는 단국대학교가 준우승을 이룸으서 이전 토너먼트에서 전통의 강호들이였던 고려대학교,경희대학교,성균관대학교,연세대학교,중앙대학교,한양대학교들과 버금가는 대학스포츠 경쟁력을 갖추고 있는 추세다.


2. 의미[편집]


이 의미는 오늘날 대학스포츠 리그에서 사용되고 있다. 건국대학교,단국대학교,동국대학교 이들 대학들이 대학축구팀,대학야구팀,대학농구팀을 운영하고 있고 또 이 팀들이 각 U리그,한국대학야구,한국대학농구리그에서 소속되어 오랜기간동안 대학 스포츠리그 및 토너먼트 전에서 경쟁구도를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그 중에서 대학 U리그[5]보다는 한국대학농구리그에서 대학농구의 대중적인 인기 및 흥행성에 맞물려 한국대학스포츠협회에서의 고연전과 같은 리그경기를 의미한다.[6]


3. 이야깃거리[편집]



3.1. 가설[편집]


법교명 가운데에 국(國)이 붙은 세 대학교, 즉 건국대학교(Konkuk university), 단국대학교(Dankook university), 동국대학교(Dongguk university)를 삼국대(건국/단국/동국)라고 부르게 된 이유는 여러 가설들이 있는데, 법조계에서 부르던 말이있다. 사법시험 합격자수에서 건국대학교, 단국대학교, 동국대학교가 나란히 동률을 이룬 일이 있었다. 거기에서 착안해 당시 건국대학교 출신 동아일보 기자가 가운데 교명에 '국(國)'이 붙는 것을 착안해 삼국대라고 표현한 것이다. 또한 사법연수원에서 이 학교들의 출신 검사,변호사 배출비율이 비슷해 사회에서 유사한 법조계 아웃풋을 형성한것도 그 배경 중 하나이다.


3.2. 구성[편집]


삼국대 세 학교에는 일반대학 이외에도 의과대학 또는 의학전문대학원이 공통적으로 개설되어 있으며, 이 대학들은 다 본교가 아닌 분교 쪽에 위치한다.[7] 의과대학을 제외하고는 추가적으로 한개씩의 의학계열 학과를 더 운영하고 있으며, 건국대학교는 수의과대학(Department of Veterinary Medicine), 단국대학교는 치과대학(Department of Dentistry), 동국대학교는 한의과대학(Department of Oriental Medicine)이 개설되어 있고 세 대학들은 각 전문의료 부설기관들을 [8] 운영하고 있으며 동시에 해당 의료분야에서 선도적인 위치에 있다. [9]

3.3. 역사, 낙원동 교사와 관련된 일화[편집]


  • 건국대학사(史)와 단국대학사(史)의 자료를 참고하면 일제강점기 때부터 건국대학교 설립자인 상허 유석창 박사와, 단국대학교 설립자인 범정 장형 선생은 서로 인연이 깊어 만주에서 같이 항일운동을 전개 했었다. 이후 범정 장형 선생은 백범 김구 선생이 있는 중국 상해로 가서 대한민국 임시정부 일원으로 대외적인 독립운동을 지속했었고, 상허 유석창 박사는 경성으로 귀국한 다음 경성의전에서 의학을 수료해 민중병원을 세운 다음 대내적인 독립운동을 전개해나갔다. 이러한 인연은 해방 이후에 조선정치학관(前身 건국대학교)과 단국대학(前身 단국대학교)의 설립에 큰 영향을 주게 된다. 동국대학교의 학교 교보를 참고하면 해방직후 낙원동 [10] 낙원학사에서 건국대학교(建國大學校), 단국대학교(檀國大學校), 동국대학교(東國大學校) 세 학교가 함께 기초 교육기관으로 발로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동국대학교는 1946년 9월 20일, 단국대학교는 1947년 11월 1일[11], 건국대학교는 1949년에 낙원학사에서 미군정 문교부로부터 설립인가를 받았다. 낙원학사는 건국대학교 측이 조선정치학관 옛 건물로 매입하여 오늘날 건국대학교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파일:낙원동교사.jpg

  • 낙원동교사에 대한 일화로는 해방이 되자 해공 신익희가 중국에 있던 임시정부에서 돌아와 낙원동 교사에 대학 설립 계획을 세웠다. [12] 이 기성회에 참여한 이사 가운데는 대종교의 장로 범정 장형[13]과 그를 후원하는 백범 김구도 뜻을 함께 하고 있었다. 대학을 세우려면 교지확보가 필요한데 당시 국민대학설립기성회의 재단 이사였던 범정 장형은 백범 김구와 대학 교지 확보를 물색하던 도중 낙원동 학사를 찾았고, 교사에는 그보다 먼저 상허 유석창[14] 박사가 자리하고 있음으로 해서 서로 인연을 이어가게 되었다. 상허 유석창 박사 역시 조국의 독립을 위해 활약하던 아버지를 따라다니며 만주 땅에서 독립운동을 한 인물이다.[15] 이런 점에서 본다면 백범 김구, 범정 장형, 상허 유석창 이들은 다 같이 중국 땅에서 독립운동을 한 공통점이 있으며 해방이 되자 이들이 함께 낙원동 교사에서 반갑게 만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낙원동 교사가 대학 산실로 자리잡게 된 것은 상허 유석창 박사의 노력이 큰 힘을 발휘했다. 그는 1945년 10월에 사설강습소 건국의숙을 시작했다. 그리고 본격적인 교육사업에 뛰어들어 1946년 2월에 조선정치학관의 신청을 경기도에 제출하고 5월에는 학생을 받아 본격적인 낙원동 교사 시대를 열어 나갔다. 조선정치학관의 명칭은 그 후 정치학관으로 바뀌는데 이는 신생 한국의 정치다운 정치를 할 수 있는 인재를 양성하고자 하는 설립자의 의지가 반영된 것이었다. 한편 이 교사에서 수립된 1946년 3월에 발족한 국민대학설립기성회는 상해 임시정부의 정통성을 계승하는 범국민적인 민족대학 설립 의지를 표명해 임정의 주 요인을 비롯해 백낙준 이태규 조윤제 등 교육계 인사 40여명이 이사진으로 참여했다. 그러나 당시 민족대학 설립을 경계한 미군정청의 견제에 부딪쳐 난항을 거듭했다.특히 이 기성회는 설립 당시 5만평의 토지 기부를 약속했던 박기홍의 미망인 조희재 여사와 이사진으로 참여한 백범 김구, 범정 장형 등 임시정부 사람들이 여러 가지 이유로 손을 때면서 재단을 구성할 교사 하나 없어 어려움을 겪었다. 이는 국민대학관의 건학 운동이 사실상 신익희와 신민동지회가 주축이 되어 전개되면서 서로의 뜻이 맞지 않았다는 표면상의 이유도 있었지만, 결정적으로는 초기 김구 노선을 따르던 신익희가 한민당에 입당해 이승만 노선을 지지하면서 김구 노선을 지향하던 장형과는 정치적으로 대립 관계에 놓이게 되었기 때문이였다. 한편 낙원동 교사에 있는 조선정치학관[16]은 아직 완전한 대학이 아니었다. 대학령에 의한 특종학교로 정규대학 학위를 수여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는 당시 문교부가 신교육제도 실시 이후 몰려들기 시작한 대학 설립 신청에 대해 일정한 기준을 정한 데서 비롯됐다. 1946년 11월 미군정청 문교부가 발표한 대학 설립 기준에 따르면 3개 이상의 단과 대학을 종합한 규모의 대학을 '종합대학',인문 혹은 자연과를 한 단위로 한 기관을 '대학', 주야를 불문해 입학 자격은 고등 중학 졸업 정도로 수업연한 2개년 이상의 교육을 시키는 기관을 '대학관', 1년 미만의 고등학술강습을 하는 기관을 '학관'으로 분류했기 때문이다.

파일:김구 선생과 장형 선생.jpg

하지만 1947년 6월부터 이 교사 일부를 빌려쓰던 단국대학교가 그 해 11월 백범 김구에 의해 문교부로부터 정식 대학 설립인가를 받아 간판을 걸게 되면서부터 기존에 두 대학간에 갈등이 표출되기 시작했다.조선정치학관이 처음 학생을 받은 것은 1946년 5월 15일이었다. 당시 체제는 정치학과 20명, 경제학과 20명으로 각각 주·야간제로 운영되고 있었다. 인가가 난 것은 그 해 8월 29일. 초대 이사장에는 보성전문학교[17] 출신의 강기덕이 취임하고 초대 관장에는 김정실이 임용되었다. 그런데 이듬해 김정실이 단국대학으로 자리를 옮기면서부터 미묘한 문제가 발생하기 시작했다. 당시 조선정치학관은 대학으로 인가되지 않은데다가 뚜렷한 자산이 없다는 이유가 약점이었으며, 여기에 백범 김구계 사람들이 떠난곳에 남아있던 신익희 중심의 국민대학기성설립회 간 명의이전이 제대로 되지 않아 소유권 분쟁이 일어나고 있었다. 그런 반면 단국대는 1947년 11월 1일 문교부로부터 정규 대학으로 인가되면서 조선정치학관에 나란히 단국대학 간판을 걸고 대대적인 학생 모집에 착수해 19∼20일에 입학검정시험을 치렀다. 11월 30일에는 사학자 장도빈이 초대 학장에 취입하고 12월 3일 입학식이 거행되었다.
파일:김구 선생과 유석창 박사.jpg

12월 8일에는 낙원동 교사와 이화동의 배영학관 교사에서 정식 강의가 이루어졌다. 하지만 이 시기에 조선정치학관과 단국대 학생들 중에서 비정규 학제로 들어온 학생들간에 갈등이 일어났다. 그 동안에는 한 교사에서 조선정치학관[18]과 단국대학이 나란히 간판을 걸고 수업을 해도 문제가 없었고, 조선정치학관과 단국대 두 교육기관끼리는 같은 교사 안에서 학내 교류도 활발히 있었지만, 정규 학제에 속한 학생들과는 달리 비정규 학제로 온 학생들 간에는 갈등 도화선이 일어나서 서로 갈라지기 시작했다. 이 무렵부터 비정규 학제 내에서는 두 학교간에 학생들이 다른 곳으로 무료 편입하거나 정규학제로 재입학하는 일이 빈번해지면서 낙원동 학사 소유주인 상허 유석창 박사가 낙원동 학사를 공동 소유하는 방향으로 단국대학과 서로 합치자는 의견을 범정 장형에게 제기했었지만, 결국 두 사학재단의 긴밀한 협력과 의논끝에 조선정치학관은 1949년 9월 9일 조선정치대학으로 설립 인가되었고, 단국대학은 그 해 12월 조선전기주식회사[19]가 관사로 사용하던 신당동의 조선전업협화장 건물 7백평을 인수해 그곳으로 이사하면서 비로소 막을 내렸다.

파일:한성전기지주,서북회관.jpg




[3] http://www.basketkorea.com/news/articlePrint.html?idxno=154039[4] http://sports.news.naver.com/general/news/read.nhn?oid=065&aid=0000035497[5] http://www.kfa.or.kr/news/news_view.asp?BoardNo=9249&Page=1&Query= [6] http://photolog.blog.naver.com/PostView.nhn?blogId=sportsku&logNo=110077827489&parentCategoryNo=&categoryNo=&viewDate=&isShowPopularPosts=false&from=postList, http://sports.news.naver.com/general/news/read.nhn?oid=065&aid=0000020903,http://sports.news.naver.com/general/news/read.nhn?oid=065&aid=0000019315 [7] 단, 단국대의 경우 천안캠퍼스가 분교였다가 2013년 본분교 통합을 하고 현재 이원화캠퍼스이다.[8] 건국대학교부속 동물병원http://vmth.konkuk.ac.kr/, 단국대학교 치과대학 죽전치과병원http://dkdh.dankook.ac.kr/, 동국대학교 분당 한방병원http://www.dumc.or.kr/index03.jsp[9] 세 학교 모두 지방에 분교 또는 이원화 캠퍼스가 있는데 건국대학교는 충주, 단국대학교는 천안, 동국대학교는 경주에 위치한다.[10] 참고로 대학 50년사를 보면 대학설립의 비사를 어느 정도 살펴볼 수 있는데 해방후 새롭게 정립한 '민족정기'로 1946년 8월 22일을 서울대학교의 '개교일'로 잡아 지금까지 기념해 오고 있듯이 설립 인가서를 기준으로 2년제 전문대학 형식이던 이화여자전문대가 신청일자가 1946년 6월 24일로 기록된 제1호 인가서를, 연희전문대는 1946년 7월 31일부로 기록된 제2호 인가서를 미군정청 학무국으로부터 받았고 보성전문대는 신청일자가 1946년 8월 5일부로 기록된 제3호 인가서를 받아 8월 15일, 고려대학교라는 종합대학 승격의 법률적 토대를 마련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역시 전문대학의 형태로 운영되던 종로구 혜화동의 혜화전문학교(惠化專門學敎)가 1946년 9월 20일, 동국대로 설립인가를 받았고 종로구 명륜동의 명륜전문학교(明倫專門學敎)는 1946년 9월 25일, 성균관대로 설립인가를 받았는데, 종로구 낙원동의 단국대는 1947년 11월 1일에 광복 최초 4년제 대학으로 정식 설립인가를 받았다. 1948년에는 숙명여대, 중앙대, 한양대, 1949년에는 건국대, 홍익대가 설립인가를 받았으며 1949년에 가인가를 받았던 경희대는 1952년에 정식 설립인가를 받았고 일제때 평양에 있다가 폐교되었던 숭실대는 1954년 4월 15일, 당시 문교부로부터 정식 설립인가를 받았다.(한국대학신문의 광복이후 정규대학 설립인가 현황(1946년~1954년) 참조)[11] 단국대는 설립인가를 허락받은 대학들 중에서 백범 김구 선생에 의해 가장 먼저 4년제 대학으로 편제되었다.[12] 그는 임시정부의 법무장관, 문교부장, 외교부장 등 화려한 경력을 지닌 사람으로 국민대학설립기성회 이사장이 되고 국민대학교 건학의 기초를 닦았다.[13] 후일 단국대학교를 설립[14] 후일 건국대학교 설립[15] http://news.joins.com/article/2098756[16] 훗날 건국대학교[17] 훗날 고려대학교[18] 건국대학교 전신[19]한국전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