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학(명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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徐鶴
1566∼1646

1. 개요
2. 생애
3. 기타


1. 개요[편집]


중국 저장성(절강) 출신으로 정유재란조선의 원군(援軍)으로 참전한 명나라 장수. 정유재란 이후 명나라로 귀국하지 않고 경상북도 성주군에 정착하여 절강 서씨(浙江徐氏)의 중시조가 되었다. 자(字)는 명암(明庵)이다.


2. 생애[편집]


서학은 명나라 명장(名將) 가문 출신으로 알려져 있다. 선조 가운데 명나라 육부(六部) 소속 정3품 병부시랑(兵部侍郞)을 지낸 인물이 있다고 전해진다. 서학의 증조부는 절강서씨 시조 서해룡(徐海龍)이다.

서학은 31세 나이로 정유재란 때 유격장(遊擊將) 남방위(藍芳威) 휘하 장수로 유격파총(遊擊把摠)에 임명되어 직산 전투, 울산성 전투, 사천성 전투 등에서 활약하고 여러 전공을 세웠다.[1] 서학과 함께 전투에 참전한 유명 인물로는 비왜총병(備倭總兵) 마귀(명나라)가 있다.

서학은 정유재란(1597~1598년) 이후 명나라로 귀환하지 않고 같은 절강 출신이자 같은 부대에 근무한 유격중군(行營中軍) 시문용(施文用)과 함께 경상북도 성주군에 정착하였다. 서학이 조선에 정착한 연유는 불분명하나 동료 시문용이 정유재란 당시 어깨에 큰 부상을 입게 되자 이를 보살피기 위해 같이 정착했다고 전해진다. [2] 서학과 시문용 외에 정유재란 참전 후 조선에 정착한 절강 출신 장수로는 편갈송(片碣頌), 낙상지(駱尙志), 장해빈(張海濱), 팽우덕(彭友德), 오유충(吳惟忠) 등이 있다. [3] 서학의 조선 정착 이후에 삶과 행적은 구체적으로 알려지지 않았으나 주변에 순탄하지 않은 일들이 있었다. 인조반정(1623년)으로 동료 시문용이 실권(失權)하고, 병자호란(1637년) 직후 청나라로부터 조선 내 명나라 장수의 압송 요구가 있었다.[4] 때문에 정착 이후에는 속세에 어느 정도 거리를 둔 평범한 선비로서 삶을 살았을 것으로 사료된다. 서학은 절강서씨의 중시조가 되었고, 향년 80세의 일기로 별세하여 절강서씨 집성촌 대명마을 뒤편 군성산에 안장되었다.


3. 기타[편집]


  • 영조 시기, 암행어사로 유명한 박문수(朴文秀)가 임진왜란에 참전한 명나라 유민(遺民)들의 활약상과 후손의 생활상을 조사하여 하여 영조에게 보고하였다. 이후 영조는 박문수의 주청을 받아 서학에게는 정2품 도총관(都摠管)을 추증하였고, 시문용에게는 종2품 병조참판(兵曹參判)을 추증했다고 전해진다. 또한 그 후손들에게 일체의 조세와 부역을 면한다는 교지도 함께 내렸다고 한다.

  • 순조 34년, 조선 사림들이 서학과 시문용을 추모하고자 대명마을에 ‘풍천재(風泉齋)’를 지었고, 헌종 1년에 유허비(遺墟碑)를 세웠다.

  • 성주 석씨의 시조 석천(在錦)은 서학의 사위이다. 석천은 석성(石星)의 차남으로, 조선에 귀화하라는 석성의 유언에 따라 대명마을에 정착하면서 서학의 사위가 되었다. 석성은 임진왜란 당시 명나라 병부상서(兵部尙書)로 명나라 황제 만력제에게 조선에 지원군을 보내야 한다고 주청한 인물이다. 당시 병부상서는 현재 국방부장관급으로, 석성은 임진왜란 당시 명나라군 파병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후 만력제는 정유재란이 한창이던 때에 임진왜란 파병으로 인해 막대한 군비를 소모했다는 이유로 석성을 투옥시켰는데, 석성은 투옥 중에 둘째 아들 석천에게 조선으로 망명하라고 유언을 남긴 것이다. 그렇게 하여 석천은 서학의 사위가 된 것. 참고로 대명마을에는 서학의 묘뿐만 아니라 석천의 묘도 같이 모셔져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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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인으로서 전투 행적과 업적에 관한 기록이 많지 않아 자세한 공로는 알 수 없다.[2] 서학이 명으로 귀환하지 않고 조선에 정착한 연유로 당시 정세에 비춘 가정(假定)이 한 가지 있다. 이 설(說)에 따르면 정유재란 당시 명나라는 쇠퇴기였고 청나라와 대립 관계 속에 국운이 비관적인 상황이었으므로, 임진왜란에 참전한 많은 장수들이 신변의 보호를 위해, 가문의 유지를 위해 명나라 보다 안전한(?) 조선에 망명했다는 것이다. 실제 명나라 멸망(1644년) 이후 많은 명조유민들이 청나라의 탄압을 피해 대거 조선으로 피신했는데, 정유재란 이후에 망명한 장수들은 이들보다 40년가량 일찍 피신한 셈이다. 명청교체 시기에 대다수의 명나라 문무관이 숙청과 멸문을 당했는데 어찌 보면 선견지명을 가진 자들로 볼 수 있다. 조선 인조 시기, 일부 사대부 층에서 일찍이 망명한 명조유민들을 도망자라고 비난하기도 했지만, 이들은 명의 중흥을 기원하고 전통을 계승하는 모습을 보여 황조유민(皇朝遺民)으로서 조선 조정의 우대를 받으며 조선에 잘 정착할 수 있었다.[3] 동정승첩비문(東征勝捷碑文)에 따르면 이들은 조선에서 왜적과 싸우고 돌아가지 못한 명나라 명장들로 이름이 새겨져 있다.[4] 당시 조선 조정은 겉으로는 청나라의 압송 요구에 응했지만, 실제로는 재조지은(再造之恩)을 명분으로 귀화한 명나라 장수들을 보호했다. 하지만 청나라의 압박에 못 이겨 강제로 송환하는 경우도 더러 있었다고 하니, 귀화한 많은 명나라 장수들이 당시에 은거했다고 전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