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베루스의 칼레도니아 침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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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베루스의 칼레도니아 침공
영어: Roman invasion of Caledonia
파일:Roman.Britain.Severan.Campaigns.jpg
시기
208년 ~ 211년
장소
칼레도니아
교전 세력
파일:attachment/mon_256.png 로마 제국
파일:faction_emblem_caledonii_256.png 칼레도니아
지휘관
파일:attachment/mon_256.png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파일:attachment/mon_256.png 카라칼라
파일:attachment/mon_256.png 게타
불명
결과
로마 제국칼레도니아 정복 실패.

1. 개요
2. 배경
3. 경과



1. 개요[편집]




서기 208~211년, 세베루스 왕조 로마 제국의 초대 황제였던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칼레도니아 정복을 위해 벌인 전쟁이다.


2. 배경[편집]


192년 12월 31일 네르바-안토니누스 왕조의 마지막 황제인 콤모두스가 피살된 뒤, 로마 제국은 내전(다섯 황제의 해)에 휩쓸렸다. 브리타니아와 갈리아의 지지를 받은 클로디우스 알비누스, 도나우(다뉴브, 다누비우스) 강 전선 군단병들의 지지를 받아낸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그리고 동방 전선군의 지지를 얻은 페스켄니우스 니게르가 각자 황제를 자칭했다. 세베루스는 페스켄니우스 니게르를 물리치기 위해 동방 원정에 착수할 때 클로디우스 알비누스에게 '카이사르' 칭호를 줘서 그와 공동으로 로마 제국을 이끌어갈 의사를 밝혔다.

그러나 페스켄니우스 니게르를 제압한 뒤, 세베루스는 태도를 바꿔 장남인 카라칼라를 카이사르로 선임하고, 알비누스를 '국가의 적'으로 낙인찍었다. 결국 양자는 196년부터 전쟁을 벌였고 197년 루그두눔(리옹)에서 대규모 전투를 벌였다. 세베루스는 이 전투에서 한때 목숨이 위태로웠을 정도로 고전했으나, 결국 승리를 거두었고 알비누스를 주살하면서 로마 제국의 유일한 황제가 되었다. 그러나 알비누스가 브리타니아에 주둔했던 군대를 대거 동원해 내전에 투입하는 바람에, 브리타니아는 매우 위험한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북방의 칼레도니아인들은 방비가 허술해진 틈을 타 하드리아누스 방벽을 넘어 로만 브리튼의 북부를 초토화했고, 로마 제국의 지배에 순응했던 부족들은 이에 동요하여 하나 둘씩 이탈할 조짐을 보였다.

브리타니아 총독 루키우스 알페니우스 세네키우스는 이 혼란을 수습하고자 갖은 노력을 기울였다. 하드리아누스 방벽을 재건하고 로마 제국에 반기를 든 브리튼인 부족들을 제압했으며, 칼레도니아인들을 물리치고 피해를 복구했다. 그러나 세네키우스에게 주어진 병력은 지극히 한정되었기에, 칼레도니아인들의 침략을 근절하기엔 역부족이었다. 이에 총독은 세베루스 황제에게

"야만인들이 섬의 거의 모든 것을 약탈하며 파괴하고 있으니, 속주 방어를 위해 더 강력한 군대가 필요하거나 폐하께서 직접 오셔야 합니다."

라고 보고했다. 헤로디아누스는 이에 대한 세베루스의 반응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세베루스는 이 소식을 듣고 기뻐했다. 그는 본래 영광을 얻길 갈망했고, 그가 동부와 서부에서 얻은 승리와 명예를 더하기 위해 브리튼인들에게 승리를 거두기를 바랬다. 그는 아들들이 로마의 사치와 쾌락과는 거리가 먼 군기 아래 군인의 삶에 정착할 수 있도록 로마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기를 더욱 바랬다. 그래서, 비록 당시 나이가 많고 관절염으로 장애를 가지고 있었지만, 세베루스는 브리타니아 원정을 발표했으며, 마음속으로는 어떤 젊은이들보다도 열정적이었다. 그는 여행의 대부분 기간 동안 한 곳에 오래 머물지 않았고, 쉬기 위해 멈추지 않았다. 그는 누구보다 빨리 아들들과 함께 해안에 도착했다.

세베루스가 도착했을 때, 칼레도니아의 일부 부족이 평화를 요청하고자 사절을 보냈다. 그러나 황제는 칼레도니아를 완전히 정복하기로 마음먹은 터라 이를 물리쳤다. 이후 제2 파르티카 군단을 포함한 6개 군단, 기병 군단, 수많은 보조병 부대, 강력한 함대, 9,000명의 프라이토리아니(근위대)와 함께 칼레도니아로 진격했다.


3. 경과[편집]


서기 208년 칼레도니아 원정을 개시한 세베루스 황제는 두 아들 중 막내인 게타를 측근들과 함께 로만 브리튼에 남겨둬서 행정을 전담하게 하고, 자신은 장남인 카라칼라와 함께 북쪽의 칼레도니아로 들어갔다. 황제가 이끄는 군대는 208년 말에서 209년 초 하드리아누스 방벽과 안토니누스 방벽 사이의 영토를 확보하고, 여러 요새와 도로를 건설했다. 이후 안토니누스 방벽을 넘어 북방으로 진군했으나, 칼레도니아인들의 거센 저항에 직면했다.

칼레도니아인들은 로마군과 정면에서 대결하면 반드시 패배한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은 양과 소들을 적 앞에 일부러 풀어둬서 이를 약탈하느라 정신없게 유도한 뒤 습격하여 타격을 입힌 후, 로마군이 반격하기 전에 빠져나갔다. 또한 식량이나 물을 구하기 위해 흩어진 로마군 병사들을 습격하고, 행군 도중에 뒤쳐진 낙오병들도 가차없이 죽였다. 로마군은 이들을 잡으려고 애썼지만, 험준한 산악지대와 깊은 숲을 자유롭게 오가며 유격전을 벌이는 칼레도니아군을 좀처럼 잡지 못했다.

로마군은 이런 상황속에서도 계속 진군하여 과거 플라비우스 왕조 말기 그나이우스 율리우스 아그리콜라원정했을 때 가스크 능선을 따라 건설했던 요새들을 재건하고 발마케완, 글렌마일렌, 킨토레, 노르망다이크, 카이어 하수스 등 여러 영토를 공략했지만, 그 과정에서 큰 손실을 입었다. 디오 카시우스에 따르면, 50,000명에 달하는 로마군 사상자가 발생했다고 한다. 현대 학계는 이를 과장으로 보지만, 로마군이 칼레도니아 원정을 지속하기 힘들 정도로 손실이 컸다는 건 사실이라고 본다.

디오 카시우스에 따르면, 세베루스 황제와 카라칼라가 칼레도니아인 사절들을 만나기 위해 말을 타고 가고 있었을 때, 카라칼라가 돌연 검을 뽑아 부황인 세베루스를 등 뒤에서 찌르려고 했다. 그때 사람들이 소리를 지르자, 카라칼라는 놀라서 검을 거둬들였다. 세베루스는 고함소리에 고개를 돌려 아들을 봤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갈 길을 갔다고 한다. 이 일이 사실인지는 불확실하며, 훗날 폭군으로 낙인찍힌 카라칼라를 비난하기 위해 지어낸 이야기일 가능성도 있다.

그러던 210년 칼레도니아 부족들이 사절을 보내 평화협상을 맺자고 요청했다. 이에 세베루스는 칼레도니아의 중부 저지대를 할양받는 조건으로 동의했다. 당시 병마에 시달려 걷지도 못하게 된 그는 가마에 실린 채 에부라쿰(현재 요크)으로 귀환했다. 디오 카시우스에 따르면, 카라칼라는 아버지 세베루스의 병세가 깊어진 걸 보고 주치의들에게 그의 죽음을 앞당기도록 해달라고 요청했지만 거절당했다고 한다. 211년 칼레도니아인들이 휴전협약을 파기하고 재차 쳐들어왔다. 이 소식을 접한 세베루스는 카라칼라에게 원정군을 이끌고 칼레도니아를 침공하게 하면서, 다음과 같은 지시를 별도로 내렸다.

"야만인 중 한 사람도 멸망을 피하지 못하게 하라. 어머니 뱃속에 있는 아기 역시 처단하여 그 누구도 구원을 얻지 못하게 하라."

그러나 세베루스의 건강이 급속도로 악화되어 죽음이 임박할 지경에 이르자, 관료들은 카라칼라와 게타 형제에게 에부라쿰으로 오라는 전갈을 보냈다. 두 아들은 급히 그곳으로 도착했고, 게타는 세베루스의 곁을 떠나지 않은채 며칠 밤을 새며 부친을 간호했다. 카라칼라와 게타는 사이가 지독히 나빠서 칼레도니아 원정 기간 중에도 식사를 한 자리에서 함께 한 적이 없었지만, 이번만큼은 아버지 세베루스의 소원에 따라 황제의 막사에서 처음으로 함께 앉아 식사를 했다. 그러나 세베루스의 건강은 호전되지 않았고, 결국 211년 2월 4일 65세의 나이로 붕어했다.

그후 카라칼라와 게타는 공동 황제가 되었고, 칼레도니아 원정을 전면 취소한 후 수도 로마로 귀환했다. 세베루스가 확보했던 모든 영역은 얼마 안가 버려졌고, 칼레도니아와 로만 브리튼의 경계선은 하드리아누스 방벽으로 굳어졌다. 이후 로마 제국은 두 번 다시 칼레도니아를 향한 원정을 단행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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