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구홍/선수 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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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나무위키+상위문서.png   상위 문서: 송구홍


1.1. 1991 시즌
1.2. 1992 시즌
1.3. 1993 시즌
1.4. 1995 시즌
1.5. 1996~1997 시즌
5. 총평



1. LG 트윈스 1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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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의 LG 트윈스 시절
1990년 드래프트에서 LG 트윈스에 지명되었다. 이 해의 드래프트는 서울출신의 국가대표 출신인 거물급 대졸 3루수 두명이 화제가 되었다. 한명은 건국대 출신의 송구홍, 또 한명은 한양대 출신의 황일권. 그러나 대체적인 평가는 송구홍이 황일권보다는 한 수 위. 그래서 모두들 예상하기를 당시 OB 베어스가 그렇게 한이 맺혀있는 주사위에서 승리한 쪽이 송구홍을, 패한 쪽이 차선책으로 황일권을 가져가리라 예상했다. 그리고 운명의 연고지 우선지명의 날. 당시 합의대로 두 팀의 대표는 주사위를 굴렸고 주사위의 결과는 역시나 LG 트윈스의 승리.[1] 결국 LG 트윈스는 예상대로 송구홍을 지명했고, OB 베어스는 황일권을 지명했다.[2]


1.1. 1991 시즌[편집]


전년도 우승팀 프리미엄에 금상첨화의 기대를 받고 입단했건만 첫 해에는 프로 적응에 한계를 드러내며 타율 .236, 2홈런으로 기대에 못 미치는 성적을 거두었다.

1.2. 1992 시즌[편집]



그러나 입단 2년만인 1992년 타율 3할과 더불어, LG 트윈스 역사상 최초로 20-20 을 달성했고 3루수 KBO 골든글러브를 수상하였다.[3] 이 시기에 얻은 별명이 로보캅. 특히 당시에는 LG가 2년 연속으로 페넌트레이스 하위권을 맴돌던 때여서 송구홍의 활약은 팬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1.3. 1993 시즌[편집]


그 다음해인 93년에는 이종열이 성장하면서 유격수로 자리를 옮겼고 익숙하지 않은 포지션에서 고생하면서도 역시 3할대 타율을 기록하며[4] LG의 페넌트레이스 4위를해서 3년만의 가을야구 진출의 1등공신이 됐다.[5] 문제는 1993년 시즌을 마치고 현역으로 입대했는데 발가락 피로골절로 귀가조치, 치료 후 재검을 받기 위해 1년을 쉬었다. 그 사이 원래 포지션인 3루는 이적한 한대화와 백업으로 성장한 이종열, 유격수는 유지현이 차지해버렸다. 결국 94년 우승은 밖에서 지켜볼 수 밖에 없었다.[6]


1.4. 1995 시즌[편집]


그리고 야심차게 복귀한 95년, 그는 인생 최대의 실수를 저지르고 만다. 리그에서 2위를 차지한 LG는 롯데 자이언츠와 플레이오프를 치르고 있었고, 각각 한경기씩 주고받으며 1:1, 그리고 운명의 3차전, LG는 7회까지 6:3으로 앞서고 있었다. 7회말 1사 만루 상황만 넘기면 거의 승리가 보이는 상황. LG의 투수 김용수는 4번타자 마해영을 3루수 땅볼로 유도했고, 송구홍이 3루 베이스를 밟고 느린 마해영을 1루에서 잡았다면 이닝이 끝났을 상황이었다.

송구홍은 확실히 무실점으로 막을 의도였는지 공을 곧장 홈으로 송구했고, 그 공은 3루주자 김민재의 등을 맞추고 말았다. 그 사이에 2루에 있던 전준호마저 홈인. 1점도 안 주려다가 2점을 줘 버렸다. 결국 LG는 롯데에게 패하여 한국시리즈 진출이 좌절되었다.


1.5. 1996~1997 시즌[편집]


방위 복무가 끝난 96년에 2루수로 정착하지만 떨어진 타격능력은 돌아오지 않았고 이는 1997년까지 이어졌다.


2. 해태 타이거즈 시절[편집]


결국 이상훈의 해외진출로 인한 투수진 보강의 일환으로 1997년 말 이병석과 함께 해태 타이거즈로 해태의 신인 투수 2명과 2:2 트레이드 되었다.[7] 당시 해태 타이거즈는 이종범의 공백을 메우기 위한 선택으로 본래 아마야구 시절 유격수 포지션을 맡았던 김종국을 유격수로 보내게 되어 내야진에 공백이 생기게 되었고 이를 보강하기 위해 당시 검증된 내야수 중 한 명인 송구홍을 영입했던 것.

해태 이적 후 80경기 동안 .288의 타율과 .336의 출루율을 기록하면서 당시 1번이었던 장성호의 뒤를 받혀주는 전통적인 2번 타자의 역할을 쏠쏠히 해냈으나 허리부상으로 인해 도중에 시즌을 마감해야 했다.[8] 송구홍이 92~93정도의 역할만 해줘도 해태는 닥치고 3연속 포스트시즌인데 아쉽게도 그는 똑딱이에 그치고 만다.


3. 쌍방울 레이더스 시절[편집]


당시 해태 타이거즈는 투수진과 센터라인이 부족했다. 이강철, 이대진의 부상과 김상진의 지병[9], 임창용의 이적으로 인해 투수진에 구멍이 뚫렸다. 게다가 김종국이 부상을 당하면서 센터라인도 구멍이 뚫렸다.[10][11] 그래서 박재용과 송구홍을 묶어서 쌍방울로 보내고 오봉옥박계원을 데려오는 트레이드를 단행했고 송구홍은 쌍방울에서 뛰었다.

그러나 송구홍이 하락세를 타던 상황이었던데다가 당시 해체 직전의 쌍방울은 웬만한 프로 2군 수준의 팀이었기 때문에 제대로 된 지원도 없었다.[12] 결국 별다른 활약을 하지 못한 채 시즌을 마감했다.


4. LG 트윈스 2기[편집]


쌍방울이 해체되고 난 후 자유계약선수로 공시가 되자 2000년 LG 트윈스로 다시 돌아왔다. 이때 00번을 달고 마지막 선수 생활을 보냈으나 하락세를 되돌리지 못 하고 끝내 은퇴했다.


5. 총평[편집]


야구를 즐기고 항상 전력을 다해 플레이하는 스타일이었지만 아쉽게도 센스하고는 거리가 먼 선수였다. 3루수로 골든글러브를 탄 1992년에도 20개가 넘는 실책을 기록했을 정도. 김주찬의 원조격이라 할 수 있는 전형적인 타고난 신체능력에 의존한 몸야구 스타일. 게다가 유연성이 떨어지는 편이었음에도 몸을 사리지 않는 허슬플레이로 인해 부상을 자주 겪고 유리몸화 되면서 신체능력이 급감하자 더 이상 반등하지 못했다. 갓 30이 됐을 때 해태에 와서 잠실보다 훨씬 짧은 무등구장에서 겨우 2홈런 치고 끝. 군대문제로 인해 1년을 통으로 날리고 부상이 겹친 데다 야구센스로 커버하는 타입도 아니다보니...어찌보면 일본프로야구의 우노 마사루와 비슷한 타입. 그러나 송구홍의 피지컬과 운동능력 & 힘만큼은 분명 상당한 수준이었기에 관리를 잘받고 3루로 고정해서 꾸준히 출장하고 병역문제만 안걸렸다면 더 잘 할수 있었을거란 평가를 지금도 받고 있기에 더더욱 안타까운 선수. 93년 당시에 차라리 이종열을 유격수로 쓰고 송구홍을 3루로 썼다면 어땠을까 하는 의견도 적지 않았다. 이광환 감독의 송구홍 유격수 기용이 결과적으로 송구홍의 선수생활을 깎아먹은셈. 송구홍은 체격이 큰데다 유연성이 좋지 못해 유격수로 기용하기는 무리가 있었는데 덕분에 이때 부상을 달고 살기 시작했고 나중에 이종열이 내야 전 포지션에서 준수한 수비를 보여준걸 생각하면 두고두고 아쉬운 대목.

결과적으로, 송구홍은 가장 절정의 기량을 지녔던 시기에 LG가 우승하던 순간을 함께 하지 못한 아쉬움을 남겼다. 1995년의 처참한 실수로 아쉬움을 남겼지만 그래도 당시의 LG팬들은 그가 보여줬던 허슬 플레이를 잊지 못한다. 루상에선 언제나 전력질주와 몸을 날리는 슬라이딩을 시도했으며[13] 아슬아슬한 타구엔 항상 몸을 사리지 않고 다이빙캐치를 시도하는 등 유니폼에 흙이 지워질 날이 없었을 정도.[14] 몸에 맞는 공으로 고통스러운 상황에서도[15] 항상 싱글벙글 웃는 표정을 보이곤 했는데 이는 그가 야구를 진심으로 즐겼기 때문이고 이런 모습 덕분에 짧은 전성기에도 불구하고 팬들의 기억에 강하게 자리 잡았다. 90년대 LG 선수들 중에서 추억보정이 가장 깊게 박힌 선수. 인터넷에서는 '송공'이라는 친근한 애칭으로 불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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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당시 주사위를 굴렸던 LG 트윈스의 정영수 과장은 주사위 승부에서 연전연승, 91년 임선동, 92년에 이상훈, 94년에 심재학 등을 따내는 등의 맹활약으로 OB 베어스 프런트와 팬들에게 피눈물을 나게 했다. 어찌 보면 90년대 LG 트윈스의 전성기의 숨은 공로자. 참고로 93년의 유지현은 두 팀의 지명선수가 갈려서 (LG 유지현, OB 류택현) 주사위를 굴리지 않았다. 하지만 주사위 굴리나 안 굴리나 OB가 피를 본 건 변하지 않았다. 하긴 88년에도 현재보다는 미래의 가능성을 본다며 김기범 거르고 이진을 지명했으니 당시 OB 스카우트진의 눈이 얼마나 썩어있었는지 알 수 있는 일화.[2] 한편 황일권은 입단 잡음때문에 실업야구에서 2년을 보내다 와서 기량 하락이 왔고, 이미 대학 시절에도 거품 논란이 많았다. 게다가 코치들이 조금만 질책을 해도 못견뎌했을 정도로 팀에 융화되지 못해 별다른 활약을 못하고 프로 생활을 끝냈다.[3] 한대화의 7년 연속 수상을 저지했다! 그리고 1년 뒤 한대화가 LG로 오게 되었고, LG 소속으로 골글을 받았다.[4] 그 해 4월 11일 광주 해태전에서 노히트 노런에 도전하던 조계현을 상대로 9회초 2사에서 LG의 첫 안타를 때려내기도 했다. 이 둘은 송구홍이 1997년 말 해태로 트레이드되기 직전 조계현이 삼성으로 이적하면서 선수로는 같은 팀에서 만나지 못했다가 2012년 LG에서 조계현은 수석코치로, 송구홍은 주루코치로 만나게 되었다.[5] 그러나 수비부담이 너무 커서 20홈런을 쳤던 첫해와 비교해 겨우 4개의 홈런으로 장타력이 급감했다. 안그래도 3루에서 조차 걸어다니는 화약고인 선수한테[6] 같은 시기 김동수는 방위병 판정이 나오며 경기를 뛸 수 있었던 반면 송구홍은 1년을 쉬어야 했는데, 어떻게 보면 저 1년의 공백이 기량 저하를 부른 원인이었을지도 모른다.[7] 공교롭게도 자신에 의해 노히트 노런을 저지당한 조계현이 삼성으로 현금 트레이드된 직후였다. 그리고 송구홍의 트레이드 맞상대였던 투수 박철웅은 1998년 초 불의의 교통사고로 하반신 마비 판정을 받아 선수생활을 접었다.[8] 같이 키스톤을 맡아 줄 것이라 여겨졌던 김종국 역시 시즌 초 부상으로 이탈. 이로 인해 내야진에 구멍이 뚫린 해태 역시 시즌 막판 5위로 떨어지면서 가을야구에 실패하게 된다.[9] 결국 99년 6월에 암으로 세상을 떠난다.[10] 송구홍이 타격이 무난했음에도 수비가 워낙에 막막한 수준이었기 때문에 유격수나 2루수로 쓸 수가 없었다.[11] 상황이 이러다 보니 3루로 전향한지 몇년된 홍현우를 다시 2루수로 배치시켰고 3루수 자리를 갓 입단한 정성훈과 유틸리티 역할하던 이호준에게 맡기게 된다.[12] 특히 99 시즌에는 돈 없다고 식사도 한식뷔페에서 외상으로 때우고 숙소 비용 없어서 여관방을 전전하거나 가까운 원정거리(광주, 대전)는 아침에 이동하는 수준이었다.[13] 1993년 당시 치열하게 1위 자리를 추격하던 해태전에서 홈 슬라이딩을 하면서 헤드퍼스트로 몸을 훌쩍 날렸는데 너무 일찍 슬라이딩을 해버려서 50cm쯤 되는 거리를 허우적대면서 기어들어와 홈인한 일도 있다. 홈인 후 특유의 미소는 덤.[14] 문제는 이런 이유로 실책도 많았다.[15] 심지어 사구를 피하지 않는 성향에다 워낙 타석에 바짝 붙는 스타일이라 더더욱 많이 맞았다. LG 트윈스 구단 역사에 한 시즌 최다 몸에 맞는볼 기록 보유자로 24개를 기록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