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성경/형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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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전통적 시각, 성서비평학적 시각 등 신약성경의 형성에 대한 여러 견해를 모은 문서이다.

2. 마태오의 복음서[편집]


초대 교부들에 의해 생긴 전승에 따라 사도 마태오가 저술한 것으로 인식되어 있으나, 이후 성서비평학을 도입한 가톨릭을 비롯한 학계에서는 사도 마태오 본인이 복음서를 집필했으리라고 단정짓지는 않는다. 복음서가 12사도 중 한 사람이 기록한 것 같지 않은 비사도적 작품인 마르코 복음서에 많이 의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단, 저자가 누구인지 확실하게 알 수 없으므로 편의상 마태오 복음서로 부르고 있다. 대략적으로 사도 마태오가 설립한 히브리인들의 교회 내에서 형성된 복음으로 추정하고 있다.

전통적 견해로는 초대 교부들의 증언에 의거하여 마태오의 저작으로 보고 있지만 성서비평학이나 자유주의 신학 계열에서는 비사도적 전승인 마르코 복음서에 너무 의존했다는 이유로 마태오 본인의 저작이었다는 데에 의문을 표하고 있다. 예수와 직접 동행하며 행적을 뚜렷히 봐온 사도 중 하나인 마태오가 사도도 아닌 마르코의 글에 의존한다는 것은 의아한 부분이긴 하다.[1][2]

전체 28장의 비교적 방대한 양으로 구성되어 있는 복음서로서 짧은 시간 내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다양한 자료를 모아서 형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는 50-60년에 형성된 '예수의 어록(Q자료)'와 70년경에 완성된 마르코 복음서를 바탕으로 하여[3], 복음사가 마태오가 수집한 특수 자료(M자료)[4]를 첨가하여 형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요약하자면 마태오 복음서 = 마르코 복음서 + Q자료 + M자료.

이후 서기 100년경에 쓰인 문서인 '12사도의 가르침(디다케)'[5]는 교회에 마태오 복음서가 언급되는 점과, 서기 70년경에 벌어진 예루살렘 성전 파괴에 대한 내용이 삽입되어 있는 점으로 보아 서기 80-90년 사이에 형성되었다는 것이 가톨릭을 포함한 일반적 성서비평학계의 견해다.

또한 이 책은 일반적으로 알려진 대로 이스라엘 언어인 히브리어로 집필된 것을 헬라어로 번역한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헬라어로 쓰인 것이다. 복음서의 내용 안에 히브리어나 아람어를 그리스어로 풀이해 주는 내용이 포함된 점을 보아 북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에 인접한 시리아 지방의 유다계 기독교인들에 의해 저술된 것으로 추정된다. 아울러 위에서 서술한 것과 같이 시리아에서 기록된 것으로 추정되는 디다케와 마태복음의 연관성과 안티오키아의 이냐시오가 마태오 전승을 알고 있었던 점, 마태복음에서 베드로가 차지하는 중요성[6]은 마태복음이 시리아에서 기록되었다는 가설을 지지한다.[7] 물론 유다계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 (나자렛파라고 하는) 히브리어 마태오 복음서가 전래되었다. 초기 기독교 사가들은 히브리어 복음서에 대해 간혹 언급하고 성 예로니모는 이를 번역해보기도 했지만 일부 단편만 남아있어 실체를 알 수는 없다.

기록자가 율법의 세세한 사항에까지 존중심을 보이고(5:17-18), 서기관과 바리사이인을 어느정도 존중하면서(23:2) 예수를 대적하는 서기관과 바리사이인을 적대하는 태도를 보이는 것(23:13~29)을 보아 원래 바리사이파 서기관이었을 가능성이 있으며, 이 경우 천국의 제자된 서기관(13:52)에 대한 칭찬은 자전적인 것이었을 수 있다.[8]

3. 마르코의 복음서[편집]



3.1. 저자[편집]


전통적인 관점에서는 교회 전승을 따라 사도 베드로의 제자인 마르코 요한이 성령의 인도에 따라 저술한 것으로 보며, 베드로의 첫째 편지(베드로전서) 5장 13절에서 로마(바빌론)에 있는 베드로와 마르코 사이의 동반자 관계, AD 140년경 파피아스의 증언 등을 그 근거로 들고 있다.[9] [10] 베드로전서를 베드로의 친서로 보는 교회 전승과는 달리, 성서비평학적으로는 베드로1서를 서기 70-92년경에 작성된 것으로 베드로의 친서가 아니라고 보고 있기 때문에 근거로 제시하지 않는다.

본래 4복음서를 집필한 필자들은 자신들의 이름을 밝히지 않고 작품만 내놓았다. 복음서 필자들은 본인들의 이름보다는 복음서 자체에 중점을 두었다고 여겨진다. 그렇지만 시대가 지나면서 복음서 간의 구분을 위하여 필자들을 거론하게 된다. 마르코 복음의 명명은 히에라폴리스 주교인 파피아스(빠삐아스)가 요한 원로로부터 들은 증언이 토대가 된다. 요한 원로는 주교에게 마르코가 베드로의 통역이었으며, 베드로가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에 관해 마르코에게 가르쳤으며 마르코가 이를 충실히 기록했다고 말했다고 한다.

파피아스와 신약성경을 근거로 하자면, 마르코는 바울로의 협력자였으며, 베드로의 통역이었다.

4복음서는 한 두루마리(혹은 코덱스)에 같이 들어있어서 원래는 각 복음서에 이름이 없었지만, 초대 교회의 교부들의 전승에 따라 마르코 복음은 사도 베드로바울로의 협력자인 마르코의 이름을 따서 붙인 것이다. 또한, 마르코 자체가 당시 흔한 이름이었기 때문에, 마르코라는 이름을 가진 다른 사람이거나, 마르코가 세운 교회에서 작성하여 마르코의 이름을 붙였다고 추정할 수도 있다.

주목해야 할 점은, 마르코 복음을 집필한 필자가 누구냐는 것보다, 어떤 사람인가가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이것은 다른 복음서도 마찬가지지만, 필자가 어떤 사람이냐에 따라 복음서의 집필 방향이 다르며, 심지어 공관 복음서 내부에서도 약간의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마르코 복음의 필자는 히브리어아람어, 유대인의 풍습을 아는 사람이었다. 따라서 필자는 유대계 그리스도인으로 추측된다. 하지만 집필 언어는 헬라어인데다가 히브리어나 아람어가 등장할 경우 헬라어로 번역해 놓기도 했다.[11] 따라서 마르코 복음의 필자는 그리스어에 능통한 해외 유대계 그리스도인일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마르코는 예수님의 12제자 중 한 사람은 아니지만, 70인 전도 대원 중 한 명이었고 베드로의 통역자로, 두 사도의 관계는 성경 곳곳에 기록되어 있다. 마르코의 집은 주로 제자들의 집회 장소로 사용되기도 하고 최후의 만찬도 이루어졌다. 마르코 복음서를 기록한 직후 서기 68년 5월 8일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에서 이교도들의 박해로 인해 순교했다.

3.2. 구성 및 형성[편집]


4복음서 중 2번째에 위치하고 있지만, 마르코 복음서와 루카 복음서가 내용상 겹치는 점이 많다는 점 등에 의해 시기적으로 가장 먼저 쓰여졌다는 걸 알 수 있다.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으나, 13장에 성전 파괴 예언이 들어 있는 점으로 미루어 볼 때 예루살렘 성전이 이미 파괴되었거나, 혹은 그러한 재앙이 눈 앞에 닥친 AD 70년 전후의 어느 시점으로 예상된다.[12] 예루살렘과 성전이 AD 70년에 파괴되었기 때문.[13]

한편 유다 독립전쟁이 일어나기 전부터 마르코 복음서의 전승 원형이 이미 집필되었다는 설도 있다. 당시 유대 사회에서는 고유의 신앙에 근거한 종말론과 메시아사상이 횡행하고 있었기 때문에 강경한 주전론자들이었던 열심당원을 중심으로 신이 유대 민족을 구원해줄 것이라는 근거없는 낙관론이 팽배해 있었고 결국 이런 광신적인 믿음이 객관적으로는 절망적인 상황을 무시하고 전쟁을 일으키는원동력이 되었는데, 이 열심당원들과 생각을 달리 했던 초대 기독교 공동체는 당연히 다른 판단을 내렸다.

또한 마르코 복음 본문에는 성전이 무너질 것이라고 예언했는데, 1차 유대 전쟁에서 예루살렘 성전이 많이 파손되고 약탈을 당했지만 완전히 무너지지는 않았기 때문에 사실과는 다소 어긋나 있다.[14] 또 초기 기독교에서는 자기네 첫 세대가 다 죽기도 전에 예수가 재림하는 종말이 닥칠거라는 시한부 종말론이 흔했다는 점도 70년 이전 집필설에 심증을 더한다.[15]

그리고 유대교 측의 기록이나 성경, 역사가들의 당시 기록을 보면 독립 전쟁 이전까지만 해도 기독교는 유대교의 한 분파 정도로만 여겨졌지만 독립 전쟁 이후로 완전히 결별했다는걸 확인할 수 있다. 초기 기독교인들은 독립 전쟁에 협조하지 않고 탈출했기 때문. 초기 기독교인들이 마르코 복음서 본문의 예수의 경고를 따라 독립 전쟁에 동참하지 않고 탈출해버렸다고 가정하면 이러한 역사적 정황과 아주 잘 일치한다.

종합하자면 70년 이전 집필설은 초자연적 예언 여부와는 무관하게 "마르코 복음서의 저자가 복음서 내의 예수의 입을 빌려 당시에 곧 일어나려는 전쟁에 대해 경고하고 있다."는 입장이라고 할 수 있다.

Q 문서의 존재를 부정하는 일부 학자들은 마태오 복음서를 보고 그리스 서화체로 요약한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마르코 복음과 마태오 복음 간의 유대교를 바라보는 관점차를 볼 때 그럴 가능성은 낮다.

4. 루가의 복음서[편집]


전통적 관점에서는 교회 전승을 따라 바울로의 동료 루가가 성령의 인도에 따라 저술한 것으로 보며, 사도행전과 루가 복음서 둘 다 루가의 저술로 인정한다. 루가 복음서는 예수의 행적에 대한 바울로의 서신적 재해석이 아니며, 그 내용상으로도 그리스도교 신앙에 대한 루가 자신의 특유한 관점이 존재하기 때문이다.[16]

반면 성서비평학에서는 사도행전과 루가 복음서의 저자가 같은 사람임은 분명하지만, 사도 바울로의 동역자인 루가인가에 대해서는 사도 바울로의 영향이 없음을 들어 의문을 표시하고 있다.

초대 교부들에 의해 생긴 전승에 따라 사도 바오로의 동료인 루가가 저술한 것으로 인식되어 있으나, 이후 성서비평학을 도입한 가톨릭을 비롯한 학계에서는 누가 썼는지 알 수 없다는 입장이다. 의사 역할을 했던 루가가 썼다고 간주된 이유는, 루가복음에는 병에 대해 상세한 묘사가 있을 뿐만 아니라[17], 마르코 복음의 인용문에서도 의사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는 빠뜨리고 있다는 점이다.[18]

하지만 사도 바오로 특유의 사상적인 영향을 거의 찾기 힘들며, 당시 문학 작품에는 의학적 표현을 사용하여 글의 수준을 높이고자 하는 경향이 있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사도 바오로의 동료였던 루가가 복음을 작성했다는 것은 단정하기 힘들다.

루가 복음서는 다른 복음서에 비해 그리스어 문장이 매우 정교하며 어휘 또한 매우 세련된 것이 특징으로, 작성자의 언어 실력이 탁월한 것으로 보인다. 50-60년대 형성된 예수 어록(Q자료)와 70년대 형성된 마르코 복음서를 바탕으로, "70인역 성서"를 많이 참조한 것으로 보인다. 도미티아누스 황제 치하(서기 81~96년)에서 그리스도인이 박해받은 사실이나, 얌니아에서 유대교를 재건한(서기 85~90년) 후 생긴 반목 등의 사항이 반영되어 있지 않은 걸으로 보아 서기 80~85년 사이에 형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사도 바오로의 동역자인 루가가 집필하였다고 보는 개신교 학자의 견해 중에는, 사도행전보다 이전에 쓰여진 것으로 여기며, 사도행전이 바오로의 (1차)투옥으로 일종의 열린 결말처럼 마무리 된다는 점을 들어 사도행전과 더불어 바오로의 순교 이전인 서기 50년~60년으로 보기도 한다.

하지만 사도행전의 저자가 이미 바오로의 죽음을 알고 있었으며 사도행전의 결말은 의도된 것이었다고 주장하는 신학자들도 많으며, 이 경우 추정 연대가 1세기 말까지 늦춰지기도 한다.

루가의 친저성을 인정하지 않는 성서비평학 측에서는 기록 연대를 AD 80년에서 2세기경까지 잡기도 한다.

참고 자료로는 L 자료, Q 자료, 마르코의 복음서, 마르키온의 복음서 등이 쓰였다는 견해가 존재한다.

5. 요한의 복음서[편집]


요한의 복음서는 원전이 고대 그리스어로 작성되어 있다. 그리고 기독교 교리를 설명하는 논증 과정에서, 고대 그리스 철학의 개념들을 사용한다. 따라서 요한의 복음서는 당시 로마의 식민지였던 그리스의 귀족층을 설득하기 위해 쓰인 성격이 강하다고 볼 수 있다.

요한의 복음서가 공관 복음서와 다른 신학적 특징 때문에 영지주의자들에게 즐겨 인용되었고, 실제로 현대 성서주석학에서는 영지주의, 또는 이의 기원이 된 집단이 이 복음서를 썼다고 보는 경우도 있다. 그 외에도 이교 집단에서도 잘 알려져 있었다. 이러한 이유로, 요한의 복음서를 정경에 넣기 위하여 사도적 전승을 가지고 있음을 주장해야 했고, 이레네오사도 요한이 말년에 에베소에 거주하면서 작성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2세기 초까지도 요한이 살아 있었다는 내용이 덧붙여진 것으로 보아, 소아시아에서 활동하던 유명한 사제인 요한과 혼동한 것으로 추정된다.

현대 성서비평학에서는 이 문서에 대한 요한의 저작권을 인정하지 않고 편집의 산물로 보기 때문에 '제4복음서'(the fourth gospel)로 호칭하는 것이 일반적이다.[19]

요한의 복음서를 자세히 살펴보면 사도 요한에 대한 언급이 거의 없다. 요한의 복음서를 집필했거나 혹은 적어도 요한 공동체(요한 학파)에 예수의 전승을 전한 인물로 보이는 자가 요한 복음서 안에는 주의 사랑하시는 제자로 나와있기 때문이다.

성서비평학적인 관점을 배제하고 성경을 있는 그대로 보면 사도 요한 말고는 저자의 후보가 될만한 사람이 없다. 주의 사랑하시는 제자는 최후의 만찬 때 예수 그리스도의 바로 옆에 앉았기 때문에 최측근 중 한명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참고로 공관복음서를 보게 되면, 베드로, 대 야고보, 사도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특별취급받는 장면이 3번이나 나온다.[20] 그리고 요한복음 21장을 보면 베드로, 도마, 나다나엘, 대 야고보, 사도 요한, 그리고 이름을 알 수 없는 다른 제자 둘 중에 주의 사랑하시는 제자가 있다고 나온다. 요한복음에서 베드로, 도마, 나다나엘은 관찰 대상이므로 확실히 저자가 아니고, 대 야고보는 베드로보다 일찍 순교했으므로 베드로 순교 이후에 쓰여졌을 것으로 추측되는 요한복음의 저자가 될 수 없다. 또한 주의 사랑하시는 제자는 부활 이후 베드로와 같이 빈 무덤을 확인하러 가는데, 사도행전을 보면 베드로와 사도 요한이 같이 행동하는 장면이 여러 차례 나온다. 그리고 요한복음 21장에는 주의 사랑하시는 제자가 고기를 잡는 장면이 나오는데 사도요한은 어부였다. 이와 같은 사실을 볼 때 성서비평학적 관점을 배제할 경우 사도 요한이 요한복음의 저자라는 것은 거의 확정적이다.

그러나 주의 사랑하시는 제자가 과연 12사도 중의 1명인 제베대오의 아들 사도 요한인지에 대해선 논란이 많다. 일반적인 기독교적인 시각에서는 둘을 동일시한다. 하지만, 다른 복음서에서 묘사된 제베대오의 아들 사도 요한은 상당히 과격하고 직설적인 성격의 소유자이며 마르코의 복음서에서는 제베대오의 아들인 야고보와 사도 요한을 가리켜 예수가 보아네르게스, 즉 우레의 아들이라고 불렀다는 기록이 전한다. 그만큼 상당히 급하고 과격한 성격의 소유자였음을 암시한다. 심지어 이들은 사마리아의 한 마을에서 예수를 쫓아내자, 불을 하늘에서 내리게 해서 마을을 태워버리자는 소리까지 했다.

반면에 요한의 복음서에 묘사된 주의 사랑하시는 제자는 상당히 지적이고 차분한 성격의 소유자로 추정되기 때문에 복음서에 묘사된 사도 요한의 이미지와 맞지 않아 보인다. 아람어를 쓰는 나사렛 지역의 촌부였으며 특별한 교육을 받지 않았던 사도 요한이 요한의 복음서처럼 고급스러운 그리스어로 씌어진 문서를 작성할 수 있었을지도 의문이다.[21] 성경에서는 승천 이후의 12사도들이 이러한 능력을 보였다고 기록하지만 [22] 실제 역사적으로 이러했는지는 불분명하다. 즉, 배운 것이 없는 가난한 어부 출신인 사도들에게 이러한 능력들이 있었다는 것은 그 당시 사람들도 믿기지 않는 일이었다.

그래서 성서비평학자들은 요한복음을 한 개인이 썼을 수는 있지만, 문학적으로 잘 짜여진 구성과 일관된 시각을 보여주기 때문에 사도 요한 계통의 전승을 형성시켜 온 공동체의 성장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것으로 보고, 요한 공동체 내에서 형성된 복음서로 추정하고 있다.

당대인의 평균 수명 또한 복음서들을 예수의 제자 또는 동시기 사람들의 저술로 보기 힘들게 만든다.

그러나 참된 제자이면서도 인간적인 나약함이나 혈기, 공명심, 경쟁심을 보인 건 당시 미숙하던 사도들 전반에 걸쳐 나타나던 모습이었으며, 마지막 겟세마네에서조차 제자들은 이해하지 못한 것이 많아 많은 질문으로 예수를 근심케 하기도 했다. 또한 평소엔 온순하고 지적이더라도, 존경받는 선생이 모욕을 당하면 감정에 격해 철없는 소리를 할 수 있기 때문에 반드시 요한의 모습과 모순된다고 보기 어렵다. 특히 요한과 야고보는 예수와 친척관계로 어머니의 치맛바람 일화까지 소개될 정도니 더욱 그렇다.

요한의 복음서가 유대인과 그리스도인을 철저하게 구분하고 있고, 유대인의 관습이나 용어에 대해서 설명을 해주는 것으로 볼때, 요한의 복음서는 티투스예루살렘 대신전을 파괴한 이후에 기록되었을 것으로 보는 게 일반적이다. 또한 기독교 신자들이 회당에서 쫓겨나는 상황이 반영되어 있는 것으로 볼 때, 얌니아 회의에서 유대교 경전이 확립된 이후인 90~95년경에 집필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이 당시 역사를 알고 싶다면 요세푸스 기록을 참조하면 좋다.

전통적인 견해로는 세 편의 요한 서간, 요한묵시록과 저자가 같다고 본다. 현대 신학에서도 복음서와 서간 세 편은 사도 요한이 실제 저자인지와 별개로 '요한 공동체'라는 공통된 배경에서 기록되었다는 설이 우세하다. 특히 복음서와 서간 세 편은 저자가 동일하다는 설이 현대까지 상당한 지지를 받고 있다. 하지만 묵시록의 경우 사용된 그리스어 어휘와 신학적 메시지에 차이가 분명히 존재한다. 그래서 성서비평학계에서는 저자가 각각 다르다는 게 다수설이며, 복음서 및 서간과 달리 요한 공동체의 영향까지도 부정하는 경우가 많다.[23] 1세기 말의 요한 공동체가 일부는 베드로-바울로로 대표되는 주류 교회에 편입되어 요한 문서가 정경에 포함되는 등 영향력을 발휘했으며, 일부는 원정통 교회에 등을 돌리고 영지주의 계열 종파로 이어졌다는 학설이 유력하다. 학술적으로는 복음서의 저자 요한을 사도 요한과 구분하여 '복음사가 요한(John the evangelist)'로 칭할 때도 있다.

참고 자료로는 기적 자료, 담화 자료 등이 쓰였다는 견해가 있다.

6. 사도행전[편집]


루가의 저작을 인정하지 않는 성서비평학자들은 사도행전이 AD 80년에서 2세기경에 쓰여졌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사도행전의 참고 자료로는 바울로 편지들이 사용되었다고 주장되기도 한다.

7. 로마서[편집]


사도 바울로가 썼다는 것이 거의 대다수의 견해이다. 4QMNT, 솔로몬의 송시, 아담과 이브의 생애, 알렉산드리아의 필론 문헌, 에스라 4서, 유대교 영지주의, 포이만드레스, 헤르메스 문헌 XI 등을 참고자료로 하여 쓰여졌다는 성서비평학계의 견해가 존재한다.

8. 고린토전서, 고린토후서[편집]


사도 바울로가 썼다는 것이 거의 대다수의 견해이다. 유대교 영지주의 문헌, 포이만드레스, 헤르메스 문헌 XI 등을 참고자료로 하여 쓰여졌다는 성서비평학계의 견해가 존재한다.

9. 갈라디아서[편집]


사도 바울로가 썼다는 것이 거의 대다수의 견해이다. 그러나 이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소수의 학자들도 존재한다.

저자에 대해서 바울로가 기록했다 하지만, 19세기 청년 헤겔주의자들은 갈라티아서가 바울로의 서신이 아니라 초대교회 안에서의 유대교 중심 인물들과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자들 사이에 일어난 분쟁으로 나온 결과물으로 바울로의 신학적 사상을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바울로 추종자들이 바울로의 이름을 빌려 쓴 작품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이것은 극단적인 주장에 지나지 않는데 이는 서기 1세기 영지주의자인 마르키온과 서기 4세기 신학자 에우세비우스와 19세기 이후 헤겔변증법적 철학을 적용하여 신학성서를 해석하였던 튀빙겐 학파를 포함한 거의 대부분의 학자들이 바울로를 갈라디아서의 저자로 의심하지 않는다.

기록연대와 장소를 정확하게 말하기 어렵다. 학자들은 바울로의 1차 전도 여행(서기 46년- 48년)이 끝난 뒤 이스라엘 공의회가 있던 서기 49년 사이에 기록하거나, 2차 전도 여행이나 3차 전도 여행시기에 지었다고 추정한다.

그 중에서도 3차 전도 여행 시기에 기록될 것이라고 보는데 그 이유는 사도행전 13장과 14장에 바나바와 함께 1차 여행에서 갈라디아[24] 지방에 교회들을 세웠는데 본 서신의 4장 13절에 이를 회고하는 글이 써 있다. 1차 여행 이후로 볼 수 있음을 알 수 있으며, 사도행전 18장부터 20장까지 자신이 에페소에 있으면서 코린토 1서를 기록했으며 그 후에 마케도니아 지방으로 간 뒤 그곳에서 코린토 2서를 기록하였다.

그 기간에 본 서간을 기록해야 했던 문제로 인하여 갈라티아서를 써야 했다. 그렇기에 바울로는 3차 여행 도중에 코린토 2서를 기록한지 얼마 되지 않아서 급히 갈라티아서를 써야 했다. 그리하여 기록 연대를 서기 55년 - 58년으로 추정된다.

유대교 영지주의 문헌들?, 포이만드레스, 헤르메스 문헌 XI등을 참고로 해서 쓰여졌다는 성서비평학계의 견해가 존재한다.

10. 에페소서[편집]


일반적으로 전통적인 시각에서 사도 바울로의 친서로 인정되지만, 성서비평학계에서는 저자에 대해서 바울로가 기록했다는 설과 바울로의 편지에 후대의 여러 사람들이 덧붙였다는 설, 바울로의 친서가 아니라는 설이 존재한다. 19세기 청년 헤겔주의자들은 다른 바울로 서신처럼 수신자들에게 보내는 친밀한 인사가 없으며 문체나 감정 표현 같은 부분에 있어서 바울로가 썼다고 보기에는 어렵고 이신칭의나 이신득의같은 바울로의 사상이 담겨져 있지 않는다는 이유로 바울로의 저작설을 의심한 바 있다. 친서임을 긍정하는 학자들은 초대교부들과 사도교부들의 문서들에서도 바울로의 저작을 인정하고 있으며 서신의 주요 내용이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내용이 처음부터 끝까지 내비치고 있음을 주장한다.

한편, 에라스뮈스로부터 시작된 에페소서 위서론은 골로사이서까지의 바울로 서신에 포함된 종말론과 재림에 대한 언급이 에페소서에서는 약해져 있으며, 바울로의 시대보다 발전된 보편교회의 모습이 드러남을 들고 있다. 다른 바울로 서신, 특히 골로사이서에서 인용된 것으로 보이는 구절들이 많은데 이는 친서설과 위서설 양측에서 각자의 주장에 대한 근거로 들고 있다.

친서설이 옳다고 가정했을 때, 기록한 장소는 감옥에서 기록되어 있다고 하지만 정확하게 어디서 기록되었는지는 학자들마다 의견이 분분하다. 에페소나 카이사리아 그리고 로마에서 썼으리라고 보는데 대체적으로는 로마에서 썼으리라고 보고 있다. 이유는 정확하게 에페소에서 투옥되었다는 증거와 근거가 없으며 카이사리아는 사도행전 25장에서 바울로가 구금되었단 사실은 맞으나 옥중서신인 필리피서 1장에서는 조만간 석방되리라는 기대를 내비치나 실제적으로는 2년 동안 구금되어 있기에 카이사리아에서 썼다고 보기에는 어려웠다. 전통적인 견해로서 마지막은 로마인데 그가 썼던 옥중서신의 필립비서에서 로마황제와 시위대에 대한 언급 그리고 복음 사역의 전개를 시사함을 본다면 로마에서 썼다고 볼 수 있다.

기록연대도 기록한 장소와 연관되어 있다. 저자의 문제로 바울로가 쓴 것이 아니라면 A.D. 70년이나 95년까지 갈 수 있으며 에페소에서 기록되어 있다면 A.D. 54-56년. 카이사리아에서 썼다면 A.D. 62-64년이 될 수 있으나 로마에서 투옥되었다면 A.D. 60-62년이라고 볼 수 있다. 물론 복합적인 상황을 종합하여 골로사이서와 필레몬서의 기록을 확인하면 바뀌어질 가능성이 크지만 대체적으로 A.D.63년으로 보고 있다.

11. 필립비서[편집]


사도 바울로가 썼다는 것이 거의 대다수의 견해이다. 유대교 영지주의, 포이만드레스, 헤르메스 문헌 XI 등을 참고자료로 하여 쓰여졌다는 성서비평학의 견해가 존재한다.

12. 골로사이서[편집]


하느님의 뜻으로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가 된 나 바오로와 우리 형제 디모테오가 골로사이에 있는 성도들, 곧 성실하게 그리스도를 믿는 교우들에게 이 편지를 씁니다

골로사이서 1장 1절


나는 친필로 서명을 하며 여러분에게 문안합니다

골로사이서 4장 18절


이 구절을 보아 사도 바울로가 필자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이긴 하지만, 성서비평학계에서는 사도 바울로의 친서임이 분명히 확인된 편지들에 언급되지 않은 단어들이 87개나 나오는가 하면, 문장 길이도 훨씬 길고, 신학적인 관점도 차이가 있다며, 누군가가 사도 바울로의 권위를 빌어서 쓴 위작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친서를 인정하는 측에서는 저술 시기를 AD 62년 정도로 보고, 위작이라고 주장하는 측에서는 저술 시기를 AD 90년까지도 본다.

13. 데살로니카전서, 데살로니카후서[편집]


테살로니카 후서는 바울로가 쓴 서신으로 알려져 있지만, 바울로의 친저성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학자들도 존재한다. 마르키온, 무라토리안 정경에 포함되는 등 매우 이른 시기부터 바울로의 작품으로 인정받아 왔지만, 종말론재림에 대한 신학적 메시지가 데살로니카전서와는 다르다고 지적하는 학자들도 존재한다.

첫째 편지의 경우 위서 논란이 없기 때문에 보통 저술 시기를 AD 51년경 정도로 본다. 반면 둘째 편지가 위서라고 주장하는 성서비평학 측의 견해가 있는데 이러한 견해는 둘째 편지가 AD 80–110년경에 쓰여졌다고 주장한다.

14. 디모테오전서, 디모테오후서[편집]


우리의 구원자이신 하느님과 우리의 희망이신 그리스도 예수님의 명령에 따라 그리스도 예수님의 사도가 된 나 바울로가, 믿음으로 나의 착실한 아들이 된 티모테오에게 인사합니다. 하느님 아버지와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님에게서 은총과 자비와 평화가 내리기를 빕니다.

티모테오 1서 1장 1절


하느님의 뜻에 따라, 또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는 생명의 약속에 따라 그리스도 예수님의 사도가 된 바울로가, 사랑하는 아들 티모테오에게 인사합니다. 하느님 아버지와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님에게서 은총과 자비와 평화가 내리기를 빕니다.

티모테오 2서 1장 1절


디모테오서는 위 구절에 써 있는 것처럼 저자가 사도 바울로임을 명시하고 있으며, 전통적으로 이를 받아들여 사도 바울로가 저술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문체 차이, 교회 구조 및 직분에 대한 서술이 이후 시대에 가깝다는 주장, 더 발전된 바울로 이후 시대의 영지주의에 대한 비판이라는 주장 등 사도 바울로가 쓰지 않았을 것으로 보는 신학자들도 존재하며, 성서비평학계에서는 디도서와 더불어 바울로 서간 중 위서라는 주장이 강한 편에 속한다. 가설들로는 바울로의 제자(들)이 작성했거나, 바울로와는 접점이 없는 사람이 이름을 빌렸거나, 바울로 본인이 작성했으나 건강이나 다른 이유로 대필로 편지가 쓰였다는 것 등이 있다. 이와 별개로 성서비평학계에서 디모테오서와 디도서의 저자는 동일인물로 여겨지는 일이 많으며, 학술적으로는 저자를 목회자(the Pastor)라고 칭하기도 한다.

목회서간 중 티모테오 2서는 티모테오 1서, 티토서와 달리 상대적으로 다른 바울로 서신과 유사하다고 평가되기도 한다. 티모테오 2서의 친저성을 인정하고 다른 두 목회서간은 이를 모방한 후대의 저자의 것이라는 소수의견도 있다.

티모테오 2서 4장 6~8절에서 저자는 바울로의 죽음이 다가옴을 암시하고 있다. 바울로의 친저성을 인정하는 전통적인 시각에서 티모테오 2서 등 목회서간은 사도의 순교 직전, 만년의 작품으로 여겨진다.

성서비평학의 시각에서는 친저성이 인정되는 바울로 서신과의 문체 차이, 마르키온 정경에 포함되지 않는다는 점, 티모테오서에 실린 교회 제도가 다른 초기 기독교 문서에 실린 교회 제도와 다른 점 등을 근거로 들어, 사도 바울로가 죽은 후 한 세대 이상이 지난 다음에 쓰여졌을 것으로 보기도 한다. 이냐시오가 117년경에 보낸 편지에는 감독과 장로가 명확하게 구분되어 있는데, 티모테오서에서는 혼용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학자들에 따라서 2세대[25] 혹은 3세대[26]으로 그 연대를 잡는 사람들도 있으며, 3세대를 주장하는 학자들은 디모테오서가 2세기에 쓰여졌다고 주장한다.

친저성을 인정하는 시각에서는 애초에 목회서간이 다른 서신서들과는 집필 목적이 달라 문체가 충분히 차이날 수 있으며, 영지주의나 초기 교회의 제도적 정비가 알려졌던 것보다 이른 시기에 일어났을 가능성도 있는 등 초기 교부들이 인정한 목회서간의 바울로 친저성을 부정하기에는 충분한 근거가 되지 못한다고 본다.

15. 디도서[편집]


티모테오1서, 티모테오2서와 함께 사도 바울로 서간 중 목회서간으로 분류되고, 전통적인 시각에 따라 대체로 사도 바울로의 친저성이 인정되는 편지지만, 성서비평학계에서는 세 편 모두 바울로의 이름을 도용하여 후대에 작성된 것으로 보기도 한다. 디도서는 감독(주교), 장로(사제)와 같은 교회 직책을 언급하고 있는데, 바울로의 시대에 디도서에 나오는 그러한 고도화된 교회 구조나 여러 직책들이 있었을지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며, 이를 근거로 바울의 친저성을 의심하는 성서비평학자들이 있다.

사도 바울로의 친저성을 부인하는 측에서는 디도서의 저술 시기를 2세기로 잡기도 한다.

16. 필레몬서[편집]


유대교 영지주의, 포이만드레스, 헤르메스 문헌 XI 등을 참고자료로 하여 쓰여졌다는 성서비평학의 견해가 존재한다.

17. 히브리서[편집]


히브리서는 익명의 저자가 쓴 성서로, 사도 바울로의 서신으로 분류되어왔지만 오늘날의 성서 주석학에서는 부정하고 있다.[27] 하지만 그렇다고 바울로와의 관계를 완전히 부정하기에는, 바울로 서간의 모티브들이 너무 자주 나온다. 한편 교부들의 경우도 정경성과는 별개로 친저성에 대해서는 유보적인 스탠스를 취하기도 했는데, 가령 오리게네스는 히브리서의 사상이 바울로에게 어울리기는 하지만 그가 이 서간까지 직접 집필하지는 않았다고 생각했다. 현 학계의 시선도 오리게네스와 비슷한데, 히브리서의 친저성에는 부정적이되 바울로와의 어떤 관계성에는 긍정적이다. 전통적인[28] 신약성경 분류법에서 히브리서는, 가톨릭의 경우 바울로 서간의 맨 뒤에, 개신교[29]의 경우 공동 서간의 맨 앞에 위치한다.

바울로 이외의 저자 후보들로는 바르나바, 전도자 아폴로, 필립보, 바울로의 동역자인 브리스킬라아퀼라 부부 등이 추측되고 있다.

18. 야고보서[편집]


야고보서의 저자는 자신을 '주 하느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종 야고보'(야고보서 1장 1절)라고 소개한다. 그런데 성경에는 야고보(제임스: James)라는 이름의 사람이 무려 5명이나 등장한다. 12사도 중에도 야고보가 있다. 제베대오의 아들 야고보 또는 요한의 형제 야고보(장 야고보)는 44년에 이미 순교했기 때문에 이 서간을 썼을 확률은 낮다.

정교회개신교에서는 이 편지를 예수의 형제 야고보(정교회 축일은 10월 23일, 12월 26일)가 썼다고 본다. 보수 개신교에서 주장하는 이유로는 소 야고보는 성경의 서신서를 쓸 만큼 영향력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가톨릭에서는 소 야고보와 예수의 형제 야고보를 동일인(축일은 5월 3일)으로 보고 이 편지를 '소 야고보(예수의 형제 야고보)'가 썼다고 본다.

최근 연구 결과에 따르면 토마스 복음서와 관점을 같이 하는 내용들이 많아, 토마스 교파의 인물이 쓴 것으로 추정하는 의견이 있다.

18.1. 차명 서신설[편집]


현대 성서비평학자들 다수는 다음 근거를 들어 야고보서는 예수의 형제 야고보의 서신이 아닌 사도 시대 이후 서신으로 보고 있다.

  • 1. 이 책은 팔레스타인 상용어가 아니라 매우 세련된 그리스어로 기록되어 있다
  • 2. 예수의 생애와 교훈에 대한 언급이 거의 나타나지 않는다. 예수에 대한 언급만 해도 단 두 번밖에 찾아볼 수 없다(1:1 ; 2:1)
  • 3. 병든 자들을 위해 교회의 장로들을 부르라(5:14)는 언급을 보면 이 편지의 시대적 배경이 교회에 장로 제도가 자리 잡은 후대임을 알 수 있다.
  • 4. 이 서신이 무라토리 정경 목록(180년 전후)이나 2세기에 주로 활동한 어떠한 교부의 글에도 전혀 언급되지 않고 심지어 교회사가인 에우세비우스조차 4세기 초반에 쓴 글에서 야고보서는 '논란이 되고 있는 책' 가운데 하나라고 보았다.[30]
  • 5. 다음 구절과 같이 바울 서신의 내용을 반박하고 있는 구절이 보이는 것을 미루어 바울 서신 집필 이후에 쓰여진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며 이 경우 62년에 죽은 예수의 형제 야고보의 저작이 될수 없다.[31]

사람이 율법을 행하는 행위로 의로워지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의로워지는 것이라(갈라디아서 2:16)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고 인정을 받는 것이고 믿음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야고보서 2:24)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하나님께서 그를 의롭다고 여기셨다.(로마서 4:1~3, 갈라디아서 3:6~9)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자기 아들 이삭을 제단에 드렸을 때, 행함으로 의롭다 함을 얻은 것이 아닙니까? 여러분이 본 대로 그의 믿음에 행함이 따랐기 때문에 행함으로 믿음이 완전하게 된 것입니다.(야고보서 2:21~22)



18.2. 전통적 저작설 [편집]


주의 형제 야고보의 친서설을 주장하는 학자들은 다음의 근거를 들어 차명설을 반박하고 있다.

  • 1. 당시 팔레스타인 지역에서는 그리스어가 통용되고 있었으며, 세련된 수사는 필경사 혹은 편집자의 영향일 수 있다.
  • 2. 간접적인 방식을 통해 예수께서 말씀하신 전승의 흔적이 나타난다.
  • 3. 병든 자들을 위해 교회의 장로들을 부르라(5:14)는 언급은 유대 기독교의 특징일 수 있으며, 오히려 감독에 대한 언급이 없는 것은 해당 서신이 부제-장로-감독의 삼중직이 확립되기 이전의 서신임을 암시한다.
  • 4. 해당 서신이 이후 인용되지 않은 것은 유대 기독교가 예루살렘 함락 이후 쇠락했기 때문일 수 있다.
  • 5. 할례 등 유대인의 율법에 대해서 믿음을 강조하는 바오로 서간의 맥락과 달리 야고보서에서 행함의 중요성은 주로 자선에 관련하여 언급된다.

19. 베드로서[편집]



19.1. 저자[편집]


저자는 베드로 전서와 후서 첫머리에는 각각 사도 베드로가 이 편지를 집필했다고 나와 있고, 전통적인 시각에 따라 대체로 두 편지 모두 사도 베드로의 친서로 인정된다. 그러나 당대에는 이름있는 사람을 저자로 내세워 집필하는 일이 있었기 때문에 여러 내용상의 문제로 의문을 제기되고 있다.[32] 오리게네스는 베드로가 남긴 편지 한 통은 공인되었지만, 두번째 편지는 정경으로 넣는 데에 무리는 없지만 의심스러운 면이 없진 않다고 밝히고 있다.[33] 특히 베드로후서는 교부들의 시대부터 그 친저성에 의문을 제기하는 의견들이 있었고, 사도 시대 이후에 쓰여진 유다서와 비슷한 점이 많다는 점, 베드로전서와의 문체 차이[34], 바울로 서신을 '경전(scripture)'수준으로 언급하는 등의 이유로 베드로의 친서가 아니라고 주장하는 학자들이 많으며, 성서비평학계 내에서는 확실한 다수설이다. 복음주의 신학자들인 카슨(D. A. Carson)과 무(Douglas J. Moo)는 베드로후서를 위서로 단정짓지는 않지만 '신약의 모든 책들 중 가장 저자라고 주장되는 이의 친저성이 의심되는 책'이라고 언급했다.

오늘날 성서비평학 학자들은 예수의 제자였던 베드로가 주님을 가까이에서 모시던 이야기를 하지 않고, 세련된 그리스어 문장을 구사하고 있다는 점, 아람어나 히브리어 구약성경이 아닌 그리스어 칠십인역의 인용 정황, '바빌론'을 성전 파괴 이후의 비유로 보는 해석 등을 이유로 들어 베드로전서의 친저성에 의문을 제기한다. 하지만 베드로가 실루아노 등 대필자를 통해 작성했다는 주장 등, 베드로전서의 친저성을 확실히 부정할만한 증거는 없는 것이 현실이다.[35] 베드로전서가 사도 베드로의 친저가 아닐 경우, 베드로전서를 인용하는 베드로후서는 확실하게 친저성이 부정된다.

19.2. 저술 시기[편집]



19.2.1. 전통적인 관점[편집]


베드로전서와 베드로후서 모두 베드로가 순교하기 직전인 AD 61-63년 경 즈음에 쓰여졌을 것으로 본다.

19.2.2. 성서비평학의 관점[편집]


각 서간이 담고 있는 상황과 사상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집필연대가 달라지는데 이때 베드로전서 5장 13절에 ‘바빌론’이라는 표현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 로마 당국에 의해 예루살렘이 파괴된 70년 이후에 집필되었으며 70년에 예루살렘이 파괴된 후 로마는 구약시대 때 이스라엘을 멸망시킨 바빌론과 동일시되었고 그리고 125년경에 파피아스가 이 서간을 인용했던 것으로 보아 90년대 초를 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기원후 70~92년경에 쓰여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베드로후서의 경우 베드로전서를 언급하면서도 초기 교부들에게는 베드로전서만 알려진 경우가 많았다는 점, 유다서에 종속적이라고 여겨지는 점, 늦어지는 재림에 대한 변호, 영지주의적 영향 등으로 인해 신약 정경 중에서도 가장 늦은 2세기 중반으로 연대를 추측하고 있다.

성서비평학에서는 첫째 편지의 기록 연대를 AD 75–90년경, 둘째 편지의 기록 연대를 AD 110년경이라고 본다.

20. 요한 서간[편집]


기독교 전승에 의하면 기원후 85-95년경 사도 요한에페소에서 기록한 서신이다. 전통적인 견해에서는 요한의 복음서, 요한묵시록과 마찬가지로 사도 요한의 저작으로 여겨지지만 현대 성서비평학에서는 사도 요한이 저자인지, 묵시록과 저자가 동일한지 등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견해가 우세하다. 다만 요한묵시록은 구약 성경의 모티프들을 대거 인용하는 방식으로 쓰여진 글이기 때문에, 요한서간과 문체를 비교하는 방식으로 동일 저자 여부를 판단하는 것을 무의미하다고 보는 시각도 있다.

요한1서는 히브리서와 마찬가지로 서신 내에 저자에 대한 언급이 없으며, 요한 2, 3서의 저자는 스스로를 ‘장로’라고 칭한다. 저자가 요한이라는 언급은 서신 내에는 존재하지 않지만 초기 교회의 교부들은 일관적으로 이 편지들을 요한의 것으로 인정한 바 있다.

첫째 편지가 사도 요한이 사망한 이후에 쓰여졌다는 성서비평학의 견해에 따르면 첫째 편지를 AD 110년까지 잡기도 하고, 둘째 편지는 셋째 편지의 대중화 후에 쓰여졌다는 견해가 있으며, 셋째 편지는 보통 첫째 편지와 비슷한 시기에 쓰여졌을 것이라고 추측된다.

21. 유다서[편집]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자 야고보의 동생이라고 하는 유다가 적은 서신. 개신교와 천주교 간의 예수와 그 가족에 대한 해석이 완전히 다르기 때문에 저자를 정확히 누구라고 지칭할 것인지는 이견이 있다.

대체로 개신교에서는 성모 마리아가 예수를 낳은 이후 일반적인 부부생활을 했다고 보기 때문에 예수의 친형제들이 있었다고 해석한다. 따라서 이 서간은 예수의 친동생 유다가 적은 것이며, 사도 다대오(유다)는 이 저서에 관여한 바가 없다고 본다.

천주교의 경우 예수는 친형제가 없었고 (성모평생동정 교리) 예수의 형제라고 언급되는 유다와 소 야고보의 형제 사도 유다 타대오가 같은 사람이라고 해석한다. 따라서 이 서간의 저자 역시 유다 타대오라고 여겨진다.

22. 요한의 묵시록[편집]


666이 네로 황제의 이름을 가르킨다는 것을 근거로 들어 요한의 묵시록이 네로 황제 시기에 쓰여졌다고 주장하는 측의 견해에 따르면 요한의 묵시록은 AD 64-68년 정도에 쓰여졌다. 반면 도미티아누스 황제 시기에 쓰여졌다고 주장하는 측에 견해에 따르면 요한의 묵시록은 AD 95년경 정도에 쓰여졌다. 죽은 네로가 다시 돌아올 것이라는 Nero Redivivus 전설이 1세기 말 민간에 유행하는 등, 네로를 근거로 묵시록의 연대 추정을 이르게 잡기보다는 도미티아누스 시기로 추정하는 것이 학계의 확실한 다수설이다.

어느 시점으로 가정하든 당시 사람들의 평균수명을 감안하면 예수의 제자 또는 동시기 인물이 집필했을 가능성은 낮다.

성서비평학계에서는 요한 복음서나 서간과는 저자가 다르다는 것이 다수설이며, 복음서 및 서간과 달리 요한 공동체의 영향까지도 부정하는 경우도 있다. 묵시록의 성향이 나머지 요한 문서보다는 오히려 바울로와 유사하다는 주장도 존재한다.[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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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IVP 성경사전』(한국기독학생회출판부)의 '마태복음' 항목 및 '그랜드 성경'(성서교재연구원) 마태복음 서문에서 발췌.[2] 마르코, 루가 항목에서도 마찬가지로 IVP 출판사는 개신교 성서비평의 주류를 대표하지 못한다. 개신교 성서비평에 대해서는 '한국신학연구소' 계열의 책을 참고하기 바란다. 역사적인 연구에서 개신교든 가톨릭이든 교파적 차이는 없다고 봐야 한다.[3] 실제 마르코 복음서의 대부분이 마태오 복음서에 담겨져 있다.[4] 대부분 유대주의자의 비방에 대항하는 기독교적 변증.[5] 디다케는 위경이 아니며, 디다케를 경전이라고 생각한 집단 자체가 없었다. 실제로 읽어보면 내용의 상반부는 지혜문학이고 후반부 세례는 어떻게 주어라, 예언자가 찾아오면 어떻게 접대하여라, 성찬례는 어떻게 거행하여라 하는 등 실제적인 교회 규범을 규정한다.[6] 갈라티아서 2:11에서 베드로는 시리아의 안티오키아에 있는 것으로 묘사된다[7] 레이몬드 E. 브라운, 메시아의 탄생, CLC, 2014, 73p[8] 레이몬드 E. 브라운, 메시아의 탄생, CLC, 2014, 71p[9] 『IVP 성경사전』(한국기독학생회출판부) '마가(요한)'항목과 '마가복음' 항목 인용.[10] IVP 책의 경우 개신교 내에서 복음주의를 표방하기 때문에 개신교의 주류 성서학을 대표하는 것은 아니다. 저 견해는 교단을 막론하고 성서비평 이전 시대에 널리 퍼진 입장일 뿐이다.[11] 몇 가지 예가 있으나 한 가지만 소개한다. "그리고 아이의 손을 잡고 "탈리다 쿰." 하고 말씀하셨다. 이 말은 '소녀야, 어서 일어나거라.'라는 뜻이다."(마르코 복음 5장 41절) [12] 전이냐 후이냐를 단정할 수 없는 건, 마르코 복음서의 예루살렘 함락 묘사가 전투에 대한 구체적인 묘사라기보디는, 고대 공성전에서 흔히 있을 수 있는 상투적인 묘사이기 때문이다. 즉, 예루살렘 함락을 겪고 썼을 수도 있지만, 함락이 예상되던 시점에 상투적인 묘사로 재앙을 서술했을 수도 있다는 것.[13] 예수가 성전 파괴 예언을 하지 않았고 후대인이 가필한 것이든, 혹은 예수가 그러한 예언을 하였는데 후대에 회상된 것이든, 복음서에 의미심장한 사건으로 적히랴면 집필 시점은 성전 파괴 전후가 가장 그럴듯하기 때문이다.[14] 다만 유대 전쟁이 끝난 후에 집필된 것이 확실한 다른 세 복음서에서도 성전이 완전히 무너진다는 내용이 나온다. 마태오 복음서루카 복음서는 마르코 복음서를 많이 참고했기 때문에 마르코 복음서의 본문을 그대로 인용했다고 볼 수도 있겠지만 마르코 복음과 무관한 요한복음에서도 이런 내용이 나온다는 것은 설명하기 어렵다. 한 가지 설명할 수 있는 이론은 성전파괴 예언이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예언이라는 것이다. 예수께서 그 말씀을 하셨을 당시에는 제자들과 말세에 관하여 예수의 재림의 시기에 관하여 어떤 징조가 있을 지 대화하고 있는 장면이 나온다. 따라서 성전파괴 예언은 AD 70년에 있었던 유대전쟁을 예언한 것이 아니라 예수의 재림 직전에 일어날 징조를 예언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15] 앞에 난하주에서 말한 것과 마찬가지로 예수의 성전파괴 예언은 이 세상의 끝날에 관한 한 징조에 대한 예언이었기 때문에, 성전파괴 예언이 주후 70년에 있었던 유대전쟁을 가르킨다고 많이 믿고 있었던 초기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 왜 시한부 종말론이 흔했는지를 설명할 수 있다.[16] 『IVP 성경사전』(한국기독학생회출판부) '누가' 항목 및 '누가복음' 항목에서 발췌. 다만 마르코 복음서 항목에서 설명되었듯, IVP 출판사의 책은 개신교 내에서 (온건) 복음주의를 표방하기 때문에 개신교의 주류 성서학을 대표할 수 없다. 개신교나 가톨릭이나 주류는 모두 성서비평을 인정하므로 저술자나 연대 문제에서 둘 사이의 차이는 없다.[17] 루가복음 4장 38절, 5장 12절, 8장 44절, 13장 11절.[18] 마르코 복음 5장 26절, 루가복음 8장 43절.[19] Hodd, C. (1968). 'The Interpretation of the Fourth Gospel', Witherington, B. (1995). 'John's wisdom: A commentary on the Fourth Gospel' 이나 Ashton, J. (2007). 'Understanding the fourth Gospel' 등의 개론서적이나, 각론에서도 마르다론 논문# 등에서 이러한 용어가 사용된다.[20] 예수 그리스도는 겟세마네, 야이로 회당장의 집, 변화산에 이 세 명만을 데리고 간다.[21] 특히 요한의 복음서 1장 1절~13절 등에 나오는 형이상학적인 내용을 작성하기 위해서는 헬레니즘 철학에 대한 상당한 수준의 지식이 필요하다. 사도 요한이 선교 등의 명목으로 어찌어찌 그리스어 교육을 받을 기회가 있었다고 가정하더라도, 복잡하고 난해한 헬레니즘 철학까지 통달했을 가능성은 낮다.[22] 사도행전 2장에 기록된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으로 인해 방언의 은사를 비롯하여 다양한 성령의 은사를 받게 되었다.[23] PAINTER, J. (1997). "THE JOHANNINE LITERATURE". In HANDBOOK TO EXEGESIS OF THE NEW TESTAMENT. Leiden, The Netherlands: Brill. https://doi.org/10.1163/9789004379947_025[24] 고고학 주류에서는 튀르키예 중부 전지역을 말한다.[25] 기원후 70~100년[26] 기원후 100-130년[27] 가톨릭에서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전의 라틴 전례에서 히브리서를 봉독할 때 '사도 바오로가 히브리인들에게 보낸 서간'이라고 하였지만, 현대 라틴 전례에서는 저자를 명시하지 않는다. 가령 2020년 12월 17일 매일미사를 보면, 콜로새서는 "사도 바오로의 콜로새서 말씀입니다"라고 소개하고, 히브리서는 "히브리서의 말씀입니다"라고 소개한다. 또한 바울로 명의로 쓰였지만 친저성이 부정되는 서간은 많지만, 히브리서는 사실 잘 보면 저자가 자신을 바울로라고 밝히는 부분이 애초부터 없다.[28] 학술적이라는 의미가 아니다. (주석학적으로 친저성이 부정되는) 히브리서를 바울로 서간에 넣는 가톨릭도, 히브리서는 제외하지만 (역시 주석학적으로는 친저성이 부정되는) 에페소서는 바울로 서간에 넣는 개신교도, 카테고리 분류에서는 전통을 따른 것이다. 물론 전통적인 카테고리 분류가 아니라 학문적인 친저성 논의에서는 가톨릭 학자가 히브리서의 친저성을 부정할 수도, 개신교 학자가 에페소서의 친저성을 부정할 수도 있다.[29] 여기서 루터 성경은 예외이다. 루터는 히브리서를 거리를 두고 대해야 할 문서 중 하나로 봤는데, 이런 이해는 루터 성경의 신약 순서에까지 영향을 끼쳐 필레몬-히브리-야고보-12베드로로 이어지는 통상적인 순서와 달리 루터 성경은 123요한-히브리-야고보-유다-묵시의 순서를 따른다. 이는 다른 개신교 성경에서는 따르지 않는 루터 성경의 독자적 순서이다.[30] http://www.newsnjoy.or.kr/news/articleView.html?idxno=29418[31] 김득중, 초대 기독교와 복음서, KMC, 2016[32] 초대교회에서도 이 두 편지의 저자가 누군지에 대해서 의견이 분분했으며 먼저 교회사가 에우세비우스는 파피아스가 베드로전서를 인용했었다고 밝히면서, 베드로후서에 대해서는 논란은 있으나 많은 사람들에게 친숙하다고 기록하고 있다.[33] 예로니모 또한 베드로가 공동서간이라고 불리우는 편지 두 통을 썼다고 언급하고 있다.[34] 다만 베드로전서는 실루아노가 대필했다고 베드로전서 본문에서 밝히고 있다.[35] 친저성 논란이 있는 신약의 모든 책에 대해서도 비슷하다. 위서임을 주장하는 측에서 논쟁을 확실히 끝낼 만한 증거를 제시하는 것은 실질적으로 불가능에 가깝다.[36] PAINTER, J. (1997). "THE JOHANNINE LITERATURE". In HANDBOOK TO EXEGESIS OF THE NEW TESTAMENT. Leiden, The Netherlands: Brill. https://doi.org/10.1163/9789004379947_0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