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가시 한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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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가시 게본도비치 한잔
Агаси Гевондович Ханджян
Aghasi Khanjian


본명
아르메니아어: Աղասի Ղևոնդի Խանջյան
한국어: 아가시 게본디 한잔
출생
1901년 1월 30일
오스만 제국
(現 튀르키예 )
사망
1936년 7월 9일 (향년 35세)
소련 그루지야 SSR 트빌리시(現 조지아 트빌리시)
묘소
아르메니아 토흐마흐 묘지
재임기간
아르메니아 공산당 제2서기
1928년 ~ 1930년
아르메니아 공산당 제1서기
1930년 5월 5일 ~ 1936년 7월 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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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력
게보르갼 신학교 (졸업)
스베르들로프 공산주의 대학 (졸업)
직업
정치인
정당

종교
무종교 (무신론)
배우자
로자 빈즈베르크
주요 서훈
소비에트 연방 레닌훈장


1. 개요
2. 생애
3. 사후



1. 개요[편집]


러시아소련정치인. 1928년부터 1930년까지 아르메니아 공산당 제2서기, 1930년부터 1936년까지 아르메니아 공산당 제1서기를 역임했다. 1936년 트빌리시에서 의문사했다.

2. 생애[편집]


한잔은 오스만 제국 동부의 도시 반에서 태어났다. 그의 가족은 아르메니아인 대학살을 피해 1915년 러시아 제국으로 도피하여 에치미아진 대성당에 기거했다. 한잔은 게보르갼 신학교를 졸업했지만 점차 혁명적 마르크스주의에 뜻을 두게 되었다. 1917년부터 1919년까지 그는 아르메니아의 마르크스주의 학생조직인 스파르타크(Спартак)에 가담했으며 후에는 아르메니아 볼셰비키 지하위원회의 서기장도 맡았다. 1919년 8월 아르메니아 제1공화국에 체포었고 그해 9월 공석으로 콤소몰 자캅카스 지부에 선출되었다. 1920년 1월 석방되었으나 그해 9월 다시 체포되어 10년형을 선고받았다. 1920년 11월 소비에트 러시아가 아르메니아를 점령하여(소비에트-아르메니아 전쟁) 12월 한잔을 풀어주고 그를 아르메니아 공산당 예레반 지부 서기장으로 임명했다.

한잔은 1921년 모스크바의 스베르들로프 공산주의 대학에 입학했다. 졸업 후 레닌그라드 지구당에서 일할 때는 그의 상관인 그리고리 지노비예프(1883~1936)에 맞서 스탈린을 지지했으며 동시에 세르게이 키로프의 측근이었다. 1928년 4월 아르메니아로 귀환한 후 1928년부터 1930년까지 아르메니아 공산당 제2서기를 역임했으며 1929년부터 1930년까지 예레반 지구당 제1서기를 역임했다. 당시 아르메니아를 지배하던 고참 볼셰비키(Старые большевики)[1]은 풋내기 신참인 한잔을 반대했으나 이내 한잔은 그들을 권력의 변두리로 몰아내고 아르메니아를 장악하게 된다. 한잔은 이전 아르메니아 공산당이 모스크바의 지령에 따라 시행하던 가혹한 집산화 정책을 조금 유연하게 풀어주었고 강제로 생성한 다수의 콜호스들을 해산했다. 대신 한잔은 자영농에 고율의 세금을 부과하여 그들이 "자발적으로" 콜호스에 가입할 수밖에 없게 만드는 수법을 썼다. 1932년까지 아르메니아 농민의 40%가 콜호스에 가입했으며, 한잔은 카리스마적이면서 동시에 아르메니아 대중들에게 인기있는 정치인으로 성장했다.

한잔은 투철한 공산주의자였지만 동시에 투철한 아르메니아 민족주의자이기도 했다. 한잔은 예기셰 차렌츠, 악셀 바쿤츠, 구르겐 마하리 등 아르메니아 지식인들과 친교를 맺었으며, 1932년 1월 연설에서는 이른바 "대러시아 쇼비니즘"을 비판하고 아르메니아 고유의 언어와 문학, 역사를 옹호했다.[2] 또한 1930년 아라마이스 예르진캰(Арамаис Арутюнович Ерзинкян) 등과 연명하여 카르스, 나고르노카라바흐, 나히체반을 아르메니아 SSR에 합쳐달라고 청원했다가 1935년 스탈린에게 민족주의자라고 비판을 당하기도 했다. 게다가 스탈린의 측근인 베리야와 투쟁을 벌였고 1931년 그를 자캅카스 공산당 제2서기로 임명한 스탈린의 결정에도 공개적인 반대를 표했다. 한잔은 이런 돌출적인 언행으로 자신의 명줄을 재촉하고 말았다.

베리야는 우선 아르메니아에서 한잔의 정치적 동맹자들을 몰아내고 그 자리를 자기의 수하들로 채우는 것으로 이 눈엣가시를 숙청하는 첫발을 떼었다. 여기에 1936년 자캅카스 SFSR이 해체되어 아르메니아에 영향력을 미칠 수단이 줄어든 것이 역으로 한잔을 숙청하려는 베리야의 의욕에 불을 지폈다. 한잔은 1936년 7월 9일 트빌리시의 자캅카스 공산당 회의에서 이전 5월 21일에 반혁명 혐의로 체포된 네르시크 스테파냔[3]을 보호하려 했다는 비판을 당했다. 그날 오후 7~8시 한잔은 자신의 숙소에서 총상을 입은 채로 발견되었다. 한잔은 급히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사망이 선고되었다.

3. 사후[편집]


소련은 공식적으로 한잔이 '자살'했다고 발표했으며, 언론에서는 한잔이 아르메니아 지식인 내의 민족주의자들을 보호하고 스테파냔을 보호하려 했으며, 민족주의자와 반혁명분자, 트로츠키주의자들을 적발하는데 심대한 오류를 저지른 책임을 지고 '자살'했다고 떠들었다.[4] 이후 소련의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아르메니아도 대숙청이 벌어져 한잔 옹호파든 반대파든 상관없이 사이좋게 모두 목이 날아갔다.

1956년 복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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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917년 러시아 혁명 이전에 볼셰비키에 가담한 사람들을 가리킨다. 이들 대다수는 대숙청 당시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이때 아르메니아 고참 볼셰비키의 지도자였던 아르메니아 SSR 인민위원장 사아크 테르가브리엘랸(Саак Мирзоевич Тер-Габриэлян, 1886~1937)도 처형되었다.[2] 하지만 그로부터 2년 후 스탈린이 이른바 "지역 민족주의"를 비판하며 소수민족들의 민족주의를 겨냥하자, 한잔은 보신차 아르메니아 민족주의자를 비판하고 아르메니아 지식인들을 겨냥해 민족주의에 물들었다고 몰아붙였다.[3] 당시 아르메니아 SSR 교육인민위원으로 한잔의 측근이다. 1937년 6월 25일 총살되었다.[4] 다만 한잔이 자살한 것 자체는 사실로 보이는데, 당시 한잔을 둘러싼 정치적 환경의 급변과 베리야의 노골적인 압박은 도저히 정신적으로 견디기 힘든 수준이었기 때문이다. 이는 프린스턴 대학 교수이자 소련사 전문가인 스테판 코트킨의 의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