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티오코스 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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셀레우코스 3대 군주
Antiochus II Theos
안티오코스 2세


파일:안티오코스 2세.jpg

출생
기원전 286년
셀레우코스 제국(레반트)
사망
기원전 246년 7월
아나톨리아
재위
셀레우코스 군주
기원전 261년 6월 2일 ~ 기원전 24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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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호
안티오코스 2세 테오스
Antiochus II Theos
가족
안티오코스 1세(아버지)
스트라토니케(어머니)
라오디케 1세(첫째 부인)
베레니케(둘째 부인)
셀레우코스 2세 칼리니코스(장남)
안티오코스 히에락스(차남)
아파마(장녀)
카파도키아의 스트라토니케(차녀)
라오디케(삼녀)
안티오코스(삼남)
참전
시리아 전쟁

1. 개요
2. 생애



1. 개요[편집]


셀레우코스 왕조의 3대 군주.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와의 시리아 전쟁을 지속하면서 동방을 소홀히 해, 파르티아그리스-박트리아 왕국의 독립을 초래했다.


2. 생애[편집]


기원전 286년경 안티오코스 1세와 스트라토니케의 차남으로 출생했다. 형 셀레우코스가 있었기에 왕위를 계승할 가능성은 낮았는데, 기원전 267년 부친이 셀레우코스를 반역을 도모했다는 혐의로 처형하면서 그가 유일한 왕위 계승자가 되었다. 기원전 261년 6월 2일 부친이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와 손을 잡으려는 속국인 페르가몬 왕국을 정벌하려 했다가 사르데스 근처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패배한 뒤 사망하면서 새 국왕으로 즉위했다. 프톨레마이오스 2세는 이 소식을 접하자 즉각 휴전을 깨고 북진하여 이오니아의 몇몇 도시를 점령했다. 안티오코스 2세는 이에 맞서고자 마케도니아의 안티고노스 2세 고나타스와 연합하여 함대를 지원받았고, 코스 해전에서 이집트 함대를 궤멸시켰다. 이후 남하하여 팜필리아와 이오니아를 탈환했으며, 뒤이어 밀레소스와 에페소스를 점령한 뒤 소아시아 그리스 도시국가들로부터 '테오스'(Theos: 신)라는 칭호를 받았다.

비슷한 시기에 트라키아를 공략하려 했지만 이렇다할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다만 비잔티움에서 그의 이름으로 동전을 발행했던 걸 볼 때, 비잔티움을 영유한 건 성공한 듯하다. 기원전 257년 프톨레마이오스 2세는 반격에 나서 시리아 일부를 공략했다. 여기에 코린토스칼키스를 선동하여 마케도니아에 반란을 일으키게 했고, 안티고노스 2세는 어쩔 수 없이 그리스로 철수했다. 게다가 안티오코스 2세가 시리아 전쟁에 열을 올리느라 동방 속주에 별 신경을 쓰지 못하는 사이, 파르티아박트리아에서 사트라프들이 잇따라 반란을 일으켰다. 파르티아의 사트라프 안드라고라스는 독립을 선포했고, 박트리아 총독 디오도토스도 기원전 256년 셀레우코스 왕조의 지배권을 부정하고 자신이 왕이라고 선포했다.

상황이 이처럼 좋지 않게 돌아가자, 안티오코스 2세는 프톨레마이오스 2세와 화해하기로 하고, 아내 라오디케 1세와 이혼한 뒤 프톨레마이오스 2세의 딸 베레니케와 결혼했다. 안티오코스 2세는 전 아내 라오디케 1세가 일리온, 카리아, 키지쿠스 등 아나톨리아 전역의 다양한 지역에서 토지를 소유하도록 했고, 면세 해택도 줬다. 안티오코스 2세와 결혼한 베레니케는 안티오코스라는 이름의 아들을 낳았다.

그런데 기원전 246년 7월, 안티오코스 2세는 소아시아의 영지를 관리하던 라오디케 1세와 재회했다가 의문의 죽음을 맞이했다. 당대부터 라오디케 1세가 자기 아들인 셀레우코스를 왕위에 올리기 위해 전 남편을 암살했다는 강한 의심을 받았다. 그 후 라오디케 1세는 장남 셀레우코스를 '셀레우코스 2세'로 선포하고 소아시아에서 거병했다. 베레니케는 오빠였던 프톨레마이오스 3세[1]에게 구원을 청했고, 프톨레마이오스 3세는 즉시 출진했다. 하지만 그가 미처 도착하기 전에, 누이 베레니케와 외조카 안티오코스는 라오디케 1세의 부하들에게 살해당했다. 이 소식을 접한 프톨레마이오스 3세는 격노하여 셀레우코스 왕조를 향한 대대적인 원정을 감행했고, 셀레우코스 왕조는 이로 인해 멸망의 위기에 직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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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프톨레마이오스 2세는 이미 사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