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리 알 릿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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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아파 이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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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 하미드

제26대
바하룻딘 술라이만
제21대
앗 타이브
1. 모로코 이드리시 왕조의 초대 아미르.
2. 하산 이븐 알리의 6대손. 타바리스탄 알라비 왕조의 개창자
3. 야흐야 이븐 후세인. 대학자 알 카심의 손자. 예멘 자이디 이맘국의 초대 이맘.






1. 개요
2. 생애
2.1. 알 마문의 후계자
2.2. 의문사
3. 기타
3.1. 저술과 평가
3.2. 어록


1. 개요[편집]


عَلِيّ ٱبْن مُوسَىٰ ٱلرِّضَا
알리 이븐 무사 알-릿다[1]

이맘위: 799년 8월 31일 ~ 818년 6월 6일
생몰: 766년 1월 1일 ~ 818년 6월 6일

열두이맘파의 8대 이맘. '이맘 레자', '레자 샤'로 불린다.[2] 무사 알 카짐의 아들로, 이맘 등극 전부터 학식과 경건함으로 조부 자파르 앗 사디크에 못지 않은 명성을 떨쳤다. 이맘에 오른 후 압바스 왕조는 4차 피트나로 몸살을 앓았고, 내전의 승자인 칼리파 알 마문은 부족한 정통성을 확보하기 위해 알리를 자신의 후계자로 삼았다. 다만 이라크에서 이에 반대하는 반란이 일어나자 알 마문은 진압하러 떠났고, 뒤따르던 알리는 석연찮은 정황 속에서 급사하였다. 쉬아 무슬림들은 (이전과 같이) 사인이 칼리파의 독살이라 여겼고, 지금도 그의 기일과 아슈라 때마다 추모와 애도 의식이 거행된다. 쉬아 이슬람권 중에서도 특히 이란에서 크게 추앙받는데, 유일하게 이란에 안장된 이맘이자 이맘위 대부분을 호라산에서 보냈기 때문이다.

2. 생애[편집]


무사 알 카짐의 장남으로, 베르베르인 노예 출신인 나즈마의 소생이다.[3] 799년 부친이 바그다드의 유배지에서 사망하자 33세의 나이로 이맘에 올랐다. 고조부 때부터 내려진 전통에 따라 정치에 거리를 두고 메디나에서 신학에 치중하던 알리는 810년대 알 아민알 마문 형제 간의 내전으로 촉발된 4차 피트나의 혼란기에 존재감을 드러내게 되었다. 813년 알 마문의 부장 타히르와 하르마타가 바그다드를 함락했을 당시 압바스 조의 중앙 집권력은 크게 약화되어 있었다. 시리아에서는 바누 칼브를 중심으로 우마이야 왕조 부흥 운동이 일었고, 자지라에서는 총독 나스르 빈 샤바트 알-우카일리가 사실상 자립하였다. 이를 틈타 자이드파 쉬아 세력이 행동을 개시하여 815년을 기점으로 대대적인 반란이 터졌다.

우선 이라크의 쿠파 (나자프)에서 아불 사라야 앗-사리 빈 만수르 앗-샤이바니가 하산 이븐 알리의 현손인 아부 압둘라 무함마드 (이븐 타바타바)를 칼리파로 추대하고 반란을 일으켰다. 압바스 조의 토벌군을 격파한 아불 사라야는 이븐 타바타바가 부상 후유증으로 사망하자 무함마드 빈 무함마드 빈 자이드를 후임 칼리파로 삼고 재차 압바스 군을 격파하며 바스라, 와시트, 아바즈, 마다인 등을 장악하였다. 또한 그는 하산 이븐 알리의 현손 무함마드 빈 술라이만과 알리 자인 알 아비딘의 손자 후세인 빈 하산을 각각 메디나와 메카로 보내어 도시를 접수하게 하였다. 후자를 동행한 알리의 동생 이브라힘은 더 나아가 815년 가을 예멘을 장악하였다. 다만 이미 이라크에서는 전세가 역전되어 아불 사라야는 8월 쿠파를 잃고 곧 처형되었다.[4]

그해 11월 메카의 후세인 빈 하산은 자파르 앗 사디크의 아들이자 알리의 숙부로서 명성이 높았던 무함마드 앗-디바즈를 칼리파로 추대하였는데, 816년 1월 알 마문의 8촌인 이샤크 빈 무사 빈 이사에게 패배하여 홍해연안으로 피신했다. 그후 재차 압바스 군에 맞섰다가 패배한 앗-디바즈는 협상에 나섰고, 그간 중립을 지키던 알리가 개입하여 양측을 중재하였다. 그 결과 앗-디바즈는 칼리파 주장을 철회하고 공개 사죄를 통해 사면을 받았다. 한편 연이은 쉬아 반란을 진정시키고자 알 마문은 스스로 이맘 알-후다 (옳게 인도된 이맘)를 칭하고 알리를 자신의 거점인 메르브로 초청하며 재상 알-파들 빈 사흘의 사촌 라자 이븐 아빌 자하크와 환관장 등을 보내어 그를 호위하게 하였다.

2.1. 알 마문의 후계자[편집]


파일:레자 알리.jpg

817년 이스파한에서 발행된 디르함 은화. 알리 알 릿다가 칼리파 알 마문의 후계자로 명시되어 있다.

알리는 정치에 관여하지 않는다는 교리에 따라 알 마문의 초청을 피하려 하였고, 아들 무함마드를 대동한 메카 순례를 핑계로 삼기도 하였다. 하지만 압바스 당국의 압박에 알리는 816년 결국 메디나를 떠났고, 오랜 여정 끝에 니샤푸르에 이르렀다. 그곳에서 순니 학자들과 교류하던 알리는 알 마문의 독촉에 메르브에 당도하였다. 알 마문은 알리에게 그의 고결함을 칭찬하며 칼리파 위를 내어주겠다 제안하였고, 알리가 거절하자 그렇다면 후계자 (왈리 알-아흐드) 위라도 받아달라고 요청하였다. 두달간 거부 의사를 밝히던 알리는 알 마문의 집요한 요구에 승복하여 결국 817년 초엽, 조정 업무나 관리들의 인사[5]에 관여하지 않겠다는 조건 하에 후계자 위를 수용하였다. 그해 3월 23일 알리는 쉬아의 상징색인 녹색 예복을 입은 채로 메르브의 관료 및 장교들로부터 후임 칼리파로서 충성 서약을 받았다. 알 마문 역시 의복을 기존의 흑색에서 녹색으로 바꾸었고, 공식 깃발과 관리들도 뒤따랐다.

동시에 제국 전역의 모스크에서 알리의 후계자 등극을 선포하였고, 이를 기념하기 위한 주화가 발행되었다. 제국 각지의 총독들도 바스라의 이스마일 빈 자파르를 제외하고는 순조롭게 새 후계자에 대한 충성을 맹세하였다. 이로써 알리 가문은 압바스 조의 공식적인 인정을 받았고, 알 마문은 두 가문의 연대를 강화하고자 알리와 자신의 장녀 움 하빕을 결혼시키고 다른 딸 움 알-파들은 (메디나에 있는) 알리의 어린 아들 무함마드와 이어주기로 약속하였다. 알 마문은 이후로 공식 행사 때마다 알리를 대동하려 하였다. 그가 앞서 언급된 조건을 이유로 들며 거부하자, 대신 종교 문제의 판결과 이슬람과 기타 종교의 학자들과의 토론을 맡겼다.[6] '황태자' 알리에게는 또한 별개의 비서와 내무관 및 호위대, 경찰 병력 등이 주어졌다. 이는 사실상 칼리파에 버금가는 소조정을 마련해 준 것인데, 알 마문의 이와 같은 결정에 대해서는 다양한 해석들이 있다.

과거에는 알 마문이 진심으로 알리를 칼리파에 적합한 인물이라 보았거나 고착화된 순니-쉬아 갈등을 끝내려 했다고 여기기도 하였다.[7] 다만 현대의 주류 해석은 알 마문이 알리의 세속 군주적인 모습을 강화하여 그가 이맘위와 칼리파위를 분리하는 쉬아 교리를 스스로 어기도록 유도했다는 것이다. 애초에 현실적으로 나이에 있어서도 한창인 30대의 알 마문을 장년인 50대의 알리가 계승할 가능성은 매우 낮았다. 따라서 알 마문이 진심으로 알리를 후계자로 여겼다기 보다는, 그를 이용하여 쉬아 세력의 불만을 잠재우고 더 나아가 (세속화를 통해) 쉬아 정체성을 흔들고자 했다는 것으로 보는게 합당해 보인다. 일각에서는 알 마문이 이맘의 절대권을 인정한 쉬아 교리를 끌어들여 권력 강화를 시도했다고 해석하기도 한다.[8] 어떠한 해석을 취하든, 결국 알 마문에게 있어 알리는 개인적인 감정을 떠나 지극히 정치적인 이용 수단이었던 것이다.

알리 역시 이를 파악하고 알 마문의 요구를 최대한 거절하려 노력했던 것이다. 쉬아 교리상 이맘은 속세의 일시적인 권세가 아닌 공동체의 구원을 통한 영원한 권세가 목표이기 때문이다. 쉬아 전승에 따르면 알리는 강권으로 어쩔 수 없이 후계자 위를 수용해야 했으며, 자신 스스로도 그에 대해 '선조 알리께서 (무아위야와의) 협상에 응해야 했던 것'과 같다고 자조하였다 한다. 당대에도 이러한 인식이 있었는지 알 마문의 예상과 달리 쉬아 공동체는 혼란을 겪지 않고 알리를 향한 응집력을 유지하였다. 오히려 (세속의 투쟁을 지향한) 자이드파와 일부 순니 세력 등이 알리의 산하에 모여들며 쉬아 세력은 더욱 확장되었고, 이에 대한 반감 역시 점차 커졌다. 특히 기존에 칼리파 위를 독점하던 압바스 가문은 알 마문의 결정에 반발에 반발하며 바그다드에서 그의 폐위를 선포하고 문중의 연장자인 이브라힘 이븐 알마흐디를 칼리파로 추대하였다.

바그다드의 군중 역시 쿠란과 순나로의 복귀를 주장하며 이브라힘을 지지하였고, 와시트쿠파 등 다른 이라크 도시들에서도 반정부 봉기가 일어났다. 재상 알 파들은 이라크의 혼란을 알 마문에 보고하지 않고 은폐하였고, 818년이 되어서야 알리가 자신의 연락망을 통해 접수한 소식을 알 마문에 전하며 바그다드로 향하여 안정을 회복할 것을 권하였다. 이는 알리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정사에 관여한 것으로, 대신들 역시 그에 동조하자 알 마문은 바그다드 진군을 결정하였다. 그러자 알 파들은 자신에 대한 압바스 왕족들의 분노를 이유로 들며 사임 의사를 밝히고 호라산 총독으로 남게 해달라 청했지만, 알 마문은 그에 대한 맹목적인 지지를 약속하며 사임을 반려하였다. 하지만 818년 2월, 행렬이 사락스를 지나던 도중 알 파들은 장교들에게 암살당하였다. 주모자들은 칼리파의 명을 따랐을 뿐이라는 말을 남긴 채로 곧바로 처형되었다.[9]

2.2. 의문사[편집]


알 파들의 암살이 있고 약 4개월이 지난 818년 6월, 알리는 알 마문과 함께 호라산 서부의 투스를 지나던 중 사망하였다. 쉬아 측에서는 이전 이맘들과 달리 독살당한 것이라 주장하였고, 그중 역사가 타바타바이는 알리의 늘어나는 인기를 경계한 알 마문의 소행이라 여겼다. 자연사라 주장하는 순니 측의 역사가 알-마수디는 알리가 포도 과다 섭취...로 인해 사망했다고 기록하였다. 다만 현대 학자들은 알 파들과 알리 모두 이라크에서 이브라힘을 옹립한 압바스 가문의 미움을 받고 있었기에, 알 마문이 그들의 분노를 가라앉히고자 일종의 타협책으로써 둘을 제거한 것이 아닐까 하고 추정한다. 쉬아측 순교 논리에 반박하고자 알 마문은 알리의 시신을 그 친척들에게 보이며 자연사라 증언하게 하였다. 또한 알 마문은 직접 알리의 장례 예배를 주관하였고, 비탄에 찬 모습을 보였다. 이는 쉬아 측에선 연극으로, 순니 측에서는 진정한 슬픔으로 묘사된다.[10]

논란을 완전히 불식시키고자 알 마문은 알리를 자신의 부친 하룬 알 라시드 옆에 안장하며 존중을 나타내었다. 다만 819년 8월, 바그다드에 무혈 입성한 알 마문은 다시 흑색을 공식 색상으로 채택하며 쉬아 색채를 지우고 순니 칼리파로 회귀하였다.[11] 알리에게는 무함마드 알-자와드 외의 자녀가 없었기에 사후 이맘위의 계승은 그전보다 더 순조로웠다. 다만 역시나 일부 와키피야 세력은 알리 (혹은 무사)를 최후의 이맘이자 마흐디로 여겼고, 다른 일부는 당시 7세였던 무함마드의 연소함을 문제 삼으며 알리의 동생 아흐마드를 이맘으로 모셨다.[12] 또한 자이드파와 순니 등 알리의 후계자 책봉 후에 가담했던 세력 대부분은 알리의 사후 다시 이탈하였다. 다만 이러한 분열은 전체적으로 보았을 때에 미미한 수준이며, 다수의 쉬아 공동체는 주류인 열두이맘파로 유지되었다. 열두 이맘들 중 유일하게 이란에 묻힌 알리의 성지는 후일 마슈하드 ('신성한 곳')라는 종교 도시로 발전하게 된다.

3. 기타[편집]


파일:이란 마슈하드.jpg

파일:마슈하드 이란.jpg
마슈하드의 이맘 레자 성지

알리 영묘의 현 구조는 14세기, 시아파로 개종한 일 칸국올제이투 칸이 조성한 것이다. 15세기에는 티무르 제국의 황후 가우하르 샤드가 고하르샤드 모스크를 더하여 더욱 확장되었다. 이후 사파비 ~ 카자르 왕조에 걸쳐 현존하는 정교한 장식이 가미되었고, 유명 신학교인 미르자 자파르 칸 학교도 추가되었다. 알리의 기일과 아슈라 때에는 쿠트바 카니라 불리는 설교 의식이 18세기부터 행해지고 있다. 성직자들이 촛불을 들고 인근 인킬라브 광장에 둘러서면 모여든 군중들이 알리의 설교를 낭독하고 신을 찬미한다.

쉬아 전승에 따르면 816년 알리가 호라산으로 떠난 후, 그의 여동생 파티마 빈트 무사는 같은해 가을 이맘과 합류하기 위해 23명의 알리 가문원과 함께 호라산으로 향하였다. 하지만 이란 중부의 사베흐를 지나던 중 일행은 칼리파가 보낸 병사들에게 공격을 당하여 남성 구성원 대부분이 전사하였고, 파티마는 한 여성에게 음독을 당하여 인근 에서 눈을 감았다. 사후 파티마는 쿰에 있는 그녀의 지지자가 마련한 부지에 매장되었는데, 이는 후일 이란의 주요 쉬아 성지 중 하나가 되었고 근대에 들어 쿰은 열두이맘파의 신학 도시로 거듭나게 된다.[13]

알리의 다른 동생인 아흐마드 빈 무사 역시 형과 합류하기 위해 호라산으로 향하던 중 쉬라즈에서 칼리파에 의해 살해되었다고 전해진다. 그의 영묘인 샤 체르가 역시 이란의 주요 쉬아 성지 중 하나로, 매년 수백만의 순례객이 방문한다.

알리는 이맘 레자 외에도 '아불 하산 2세'로도 불리는데, 이는 그의 쿤야인 아불 하산이 부친 무사와 같기 때문이다.[14]

3.1. 저술과 평가[편집]


알리는 선대 이맘들처럼 신학적으로 출중하였다. 그가 직접 저술한 책은 남아있지 않지만, 제자들이 정리한 책들로 240여개의 하디스를 기록한[15] '사히파 알-릿다'와 어록집인 '우윤 알-아크바르 알-릿다' (무함마드 빈 알리 빈 바바와예 쿠미)가 있다. 열두이맘파 내에서는 9세기의 의서 '알-리살라 앗-다하비야'[16] 역시 알 마문의 의뢰로 알리가 저술에 참여했다고 믿어 즐겨 보는데, 그 진의 여부에 대해서는 논란이 많다.

칼리파의 후계자로 지목된 것 때문에 알리는 (초반 3명을 제외한) 12이맘들 중 자파르 앗 사디크와 함께 수니파에서도 많은 존경을 받는다. 실제로 후계자 임명 후 순니 학자들이 알리를 자주 방문하여 하디스 전수를 청하였다 한다. 쉬아 교리에 영향을 받은 일부 수피들도 알리를 경건함의 상징으로 보고 진리 전수의 계보에 넣었다. 그중에는 이란 동부 케르만 지역에서 발원한 네마툴라 수피 종단이 있다.

3.2. 어록[편집]


알리는 여러 어록을 남겼는데, 그중 일부를 소개하자면 이렇다.

모든 인간에 있어 진정한 친구는 그의 지성이고, 적수는 그의 무지이다.


믿음은 예배와 금식의 많고 적음에 있는 것이 아니라, 신의 사명을 얼마나 반영함에 있다.


이슬람 위에는 믿음이, 믿음 위에는 신에 대한 경외가 있다. 신에 대한 경외만큼 인간 각자에게 잘 배분된 것은 없다.


인간은 자비롭지 않다면 존경할 가치가 없다.


수명이 3년 남은 이가 그동안 가족애를 다진다면, 전능하신 하나님은 그에게 30년의 시간을 주신다.


이맘은 종교의 필수 요소이자 무슬림들의 체제이다. 이는 현생에 있어 혜택의 근원이자 신자들의 긍지이다.


무슬림과 비무슬림을 막론하고 학자들과의 토론을 즐겼던 알리의 진디크 (마니교도 혹은 무신론자)와의 논쟁을 소개한다.

(진디크) 만약 그대의 신앙이 틀리다면 어찌할거요?

(알리) 만약 우리의 신앙이 틀렸다 할지라도 기도하고, 금식하고, 자선을 행하고, 고해를 하는 것이 나쁜 영향을 끼치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의 신앙이 맞다면, 우리는 구원을 받을 것이되 너희는 그저 사라지지 않겠는가?!


(진디크) 그대들의 신은 어디에 있고, 어떻게 존재하는가?

(알리) 전능하신 하나님께 어디, 어떻게와 같은 수식은 적용될 수 없다.

(진디크) 인지할 수 없다면, 그것은 존재하지 않는 것 아니겠는가?

(알리) 우리의 감각으로 인지하지 못한다면, 그것이야 말로 그분이 확실히 우리의 주인이란 증거이고 여타의 것과 다른 존재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진디크) 그래서, 신은 어디에 있는가?

(알리) 신께서 어디 안 계신 곳을 먼저 말해봐라.

(진디크) 신이 존재한다는 증거는 무엇인가?

(알리) 우리의 놀랍도록 정교한 몸의 구조가 바로 증거이다. 천체를 관측하여 해와 달과 별이 뜨고, 지고, 순환하는 것과 바람과 구름이 움직이는 것에서 그분의 힘을 느낄 수 있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이 그에 대한 결정자와 창조자가 있다는 증거이다.


(진디크) 그 위대한 신은 그럼 왜 인간에게서 숨어버렸나?

(알리) 신과 인간 사이의 장막은 창조물에만 드리운 것이니, 이는 인간의 죄가 많기 때문이다. 그분께는 밤이나 낮이나 감추시는 것이 없다.


이러한 논쟁 끝에 결국 진디크는 이슬람에 입교했다는 해피엔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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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호칭인 알-릿다는 '인정받은 자'란 뜻인데, 이는 쉬아 세력은 물론 과거 압바스 혁명군도 사용하던 구호인 '알-릿다 민 알 무함마드' (무함마드 가문 중에서 인정된 분)에서 유래한 것이다. 일설에 의하면 알 마문이 알리를 후계자로 삼으며 부여한 호칭이라 한다. [2] 팔라비 왕조레자 샤 팔라비 등 이름의 기원이다[3] 그의 조모 역시 베르베르 인이었기에 알리 자체는 75% 베르베르 혈통인 것이다[4] 알리의 다른 동생 자이드 역시 바스라에서 항복하였다.[5] 관리 선발, 임명 및 해임[6] 쉬아 측에서는 또한 여러 종교의 신학자들과 주선한 토론 역시 알리를 깎아내리려는 의도가 있었다고 평가한다.[7] 또한 일부는 페르시아인 재상 알-파들 빈 사흘의 영향력 혹은 알 마문과 다른 압바스 가문원들과의 불화를 이유로 들기도 하였다.[8] 실제로 후일 알 마문이 강력한 재상이던 이븐 사흘을 죽이고는 더이상 재상을 선임하지 않은 채로 종교 재판소인 미흐나로 독재를 한 점을 보면 그가 권력욕이 매우 강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9] 이후 알 마문은 다시 재상을 세우지 않는다[10] 둘다 맞을 수 있는게, 알 마문에 있어 알리는 개인적으로 마음에 들었어도 정치적으로는 (이미 바그다드에서 반쉬아 반란이 일어나 대립 칼리파가 추대된 이상) 그를 제거할 수 밖에 없었다. 이는 순욱을 아꼈음에도 그에게 죽음을 내린 조조가 순욱의 죽음에 애도를 표하고 그 후손들을 잘 챙겨준 것과 대비된다. 실제로 알 마문은 알리의 사후 그 아들 무함마드를 나름 잘 챙겨준다.[11] 이로써 칼리파로 옹립되었던 이브라힘은 지지 세력을 잃고 항복한다[12] 이에 대해 자파리 학자들은 쿠란에서 이사 (예수) 역시 아직 아동일 때에 사도의 임무를 부여받았고, 무함마드는 나이에 상관없이 이맘에 오르는 순간 신의 계시를 통해 종교 부문에 있어 '완벽한 지식'을 전수받아 이맘의 지위에 문제가 없다고 보았다[13] 이러한 사실을 알리가 알게 되었다면, 알 마문에 대한 그의 불신과 위기의식은 더욱 커졌을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쉬아측 기록에 의하면 알리는 자신의 죽음을 예견했다 한다. 동시에 이는 알 마문이 진정으로 쉬아 세력과 화해하려 한 것이 아니라는 또하나의 증거이기도 하다.[14] 같은 논리로 이맘 무사 역시 아불 하산 1세로도 불린다[15] 쉬아 측에서는 순니 사하바들의 하디스를 불신하고 알리-파티마와 그 직계 자손들의 하디스 만을 진짜로 여긴다[16] 금 잉크로 쓰여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