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브드 알 라흐만 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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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치세
2.1. 북방 원정과 반란 진압
2.2. 바이킹에 맞서다
2.3. 치세 말기
2.4. 대기독교 정책



1. 개요[편집]


عبد الرحمن الأوسط

아브드 알 라흐만 아우사트


재위 822년 5월 21일 ~ 852년 9월
생몰 792년 ~ 852년 9월

후우마이야 왕조의 4번째 아미르. 부왕 알 하캄 1세 때와 마찬가지로 그의 치세는 전쟁으로 점철되었다. 치세 초반에는 서북쪽 아스투리아스 왕국과의 밀고 밀리는 전쟁이 이어졌고 그 도중에 톨레도메리다에서 기독교도들이 반란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840년에 들어서는 정북쪽의 바스크인들과 바누 카시가 연합하여 반란을 일으켜 아브드 알 라흐만 2세가 친정에 나섰다. 844년 가을에는 서유럽을 휩쓸던 바이킹이 쳐들어와 리스본세비야를 점령하였지만 바누 카시와 연합하여 격퇴하였다. 말년에 그는 기독교도들의 순교를 방지하고자 노력했으나 그들은 이슬람이나 무함마드를 모욕하며 결국 처형되었다. '코르도바의 48성인' 중 18인이 그의 치세의 인물들이다. 한편 내치에 있어 그는 동부의 거점 도시 무르시아를 세우고 코르도바에 여러 건물을 짓는 등 안달루스의 문화 번영을 이어갔다. 하지만 군사적으로는 불안이 계속되며 아들 무함마드 1세에게로 계승되었다.


2. 치세[편집]


파일:Dirham_abd_al_rahman_ii_20192.jpg
파일:Abderramán_I_en_Murcia.jpg
844년경에 주조된 압둘 라흐만 2세의 디르함 은화
스페인 무르시아의 동상

수도 코르도바가 아닌 고려의 서경에 해당하는 톨레도에서 알 하캄의 장남으로 태어나 그의 후계자가 되었다. 불과 10대의 나이 때에 압둘 라흐만은 부왕의 명에 따라 자신과 왕공들에게 조공하러 온 5천여명의 사람들을 연회에 초청한 후 학살한 대숙청을 주도하였다. (이른바 참호 학살) 이로써 그는 '학살자'라는 별명을 얻었다. 이렇듯 호전적인 성격이던 압둘 라흐만은 822년 즉위 직후 부왕 대의 내분과 프랑크의 침공으로 30여년간 중단되었던 아스투리아스 왕국에 대한 전쟁을 재개하였다. 마침 824년 바스크인들이 2차 론세스바예스 전투에서 프랑크 군을 격파하고 팜플로나 왕국을 세우며 외부의 개입 우려도 낮아진 상태였다. 한편 내치에 있어 압둘 라흐만은 825년 카르타헤나의 배후에 신도시 무르시아의 건설을 지시하고, 자신에 충성하는 아랍인들을 정착시켜 안달루스 동부에 안정적인 거점을 마련하였다.


2.1. 북방 원정과 반란 진압[편집]


하지만 같은해 코임브라, 비세우 주둔 우마이야 군대의 아스투리아스 침공은 격퇴되었고 827년 바르셀로나의 서고트 반란을 사주한 것도 역시 실패하였다. 829년에는 메리다에서 재차 반란이 일어났고, 이에 압둘 라흐만은 835년 그곳에 높이 10m의 성벽과 25개의 성탑을 갖춘 거대한 요새를 세우는 것으로 대응하였다. 837년에 톨레도의 기독교도들과 유대인 공동체가 반란을 일으키자 그곳에도 같은 조치로 성채가 세워졌다. 839년, 아스투리아스 국왕 알폰소 2세가 도우로 강을 건너 비세우를 공격하는 등 기세를 올렸다. 비록 842년 그가 사망하고 아스투리아스가 내전에 돌입하며 서북면 국경은 안정되었으나 북쪽 팜플로나 왕국의 엔네코 아리차와 바누 카시의 무사 이븐 무사 형제[1]가 함께 반란을 일으켰다. 1차 토벌군이 패배하고 843년 재차 토벌군이 파견되었으나 사령관 알 하리트가 사로잡히며 패하였다. 이에 압둘 라흐만이 친정에 나선 후에야 반란은 진압되었다.


2.2. 바이킹에 맞서다[편집]


그럼에도 내우외환은 지속되었다. 844년, 갈리시아를 습격한 바이킹들이 8월에 리스본에 당도하여 도시를 함락하였다. 13일간 약탈을 자행하고 계속 항해하여 카디스, 알헤시라스 등의 해안을 약탈한 그들은 마침내 과달키비르 강을 거슬러 올라가며 내륙으로 향하였다. 시도니아를 거쳐 9월 25일 세비야에 당도한 바이킹 군대는 하중도인 메노르 섬에 진영을 세웠다. 4일 후 세비야 수비대가 이를 공격하였지만 습지대로 보호받는 바이킹들에게 격퇴되었다. 이후 포위에 나선 바이킹 군대는 10월 1일 혹은 3일에 기습에 나섰고, 격렬한 전투 끝에 세비야를 장악하였다. 성벽이 없는 시가지는 함락되었지만 남은 수비대가 농성하는 시타델은 버텨내었다. 이슬람측 기록에 의하면 바이킹들은 주민들에게 끔찍한 포로 신세 혹은 죽음의 선택지만을 주었다고 한다. 그나마 다행히도 새로 건립된 대사원에 대한 바이킹들의 방화는 실패하였다.

급보를 접한 압둘 라흐만은 하지브 (내무관) 이사 이븐 슈하이드를 사령관으로 한 원군을 편성하며 주변의 태수들에게 병력 파견을 명하였다. 재차 복속한 바누 카시의 무사 등이 포함된 원군이 집결하자 이사는 남하하여 세비야 부근 악사라페 언덕에 주둔하였다. 11월 중순 내내 벌어진 전투에서 우마이야 군은 밀고 밀리는 접전 끝에 무사의 활약에 힘입어 17일 탈야타에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무슬림측 기록에 의하면 약 1천의 바이킹이 전사하고 30여척의 바이킹선이 그리스의 불에 의해 파괴되었다고 한다. 남은 바이킹들은 배에 올라 주민들의 돌팔매를 맞으며 철수하였다. 그러던 이내 그들은 포로들 및 약탈물을 의복, 식품 및 (방해 없는) 하천 통행권을 바꾸자고 제안하였고 수락되었다. 바이킹들은 해안에 재집결한 후 우마이야 함대의 추격을 받으면서도 알 가르베 (포르투갈 남부)를 잠깐 습격한 후 북상하였다.

수복된 세비야는 폐허 그 자체였다. 바이킹들은 안달루스의 사람들에게 충격과 공포를 안겨주었다. 이러한 일의 재발을 막기 위해 압둘 라흐만은 함대를 편성하고 세비야에 해군 병기창 (다르 알 시나아)을 설치하고 선박 건조 및 수병 양성에 투자하며 후일을 대비하였다. 또한 세비야를 비롯한 남부의 도시들에 성벽을 세워 방어력을 높혔다. 이러한 조치들은 859년과 966년 재발한 바이킹의 침공을 격퇴하는 기반이 되었다. 한편 이듬해인 845년, 바이킹은 코르도바에 사절을 보내었다. 이에 압둘 라흐만 역시 시인 야흐야 이븐 알 하캄 알 가잘을 사절로 파견하였다. 또한 후대의 기록에 의하면 일부 바이킹들은 북유럽으로 돌아가지 않고 안달루스에 정착, 이슬람으로 개종한 후 치즈 무역상이 되었다고 한다. 안달루스 인들은 바이킹들을 배화교도라 생각하여 마주스라 불렀다고 한다. 이베리아에서 호되게 당한 바이킹들은 847년 보르도를 점령하고도 더 남하하지 않았다.


2.3. 치세 말기[편집]


위험이 사라지자 무사 이븐 무사는 재차 반란을 일으켰는데, 이번엔 압둘 라흐만의 장남 무함마드가 투델라를 함락하고 재차 그를 복속시켰다. 무사는 아들들을 인질로 보내고 직접 아미르 궁전을 방문해 복속을 표하였다. 그러나 846년 재차 반란을 꾀하다가 다른 왕자 히샴에게 굴복하였다. 이듬해에 무사는 또다시 반란을 일으켰고, 압둘 라흐만은 보복 원정을 통해 진압하였다. 불굴의 무사는 850년, 팜플로나의 에네코 아리차와 함께 또다시 봉기하였다. 이번엔 무사의 아들 이스마일이 전면에 나섰다. 한편 이븐 하즘에 의하면 무사의 동생인 유누스 이븐 무사는 여전히 압둘 라흐만에게 충성을 유지하였고, 숙부 자히르 이븐 포르툰의 아들들과 함께 무사와 20년 념게 내전을 벌였다. 다만 결국 압둘 라흐만은 무사를 완전히 굴복시키지 못하고 사망하였다. 이후 후계자인 무함마드는 무사에게 명목상의 충성을 대가로 사라고사 일대의 통치권 등 영토의 1/5 가량을 할당해주며 타협한다.

한편 848년에는 바르셀로나 백작 베르나트가 사망하고 아들 기욤이 계승하였는데, 동시에 그는 툴루즈 백작까지 겸하여 아키텐 국왕 피핀 2세에 버금가는 세력을 지니게 되었다. 이를 경계한 서프랑크 국왕 샤를 2세는 850년 남하하였다. 기욤은 안달루스 측에 도움을 청하였고, 이에 압둘 라흐만은 원군을 파견하였다. 하지만 프랑크 군 역시 증원되었기에 기욤은 패배하고 바르셀로나로 도주하였지만 왕당파에게 붙잡혀 암살되었다. 다만 샤를의 동맹인 가스코뉴 백작 산초 2세는 851년 바르셀로나를 습격한 무사 이븐 무사에게 사로잡혔다. 이에 샤를이 협상에 나서 이듬해 9월 산초는 석방되었다. 지금까지 열거한 무력 행동 외에 압둘 라흐만은 예술을 후원하고 코르도바 대사원을 증축하는 등 많은 공공 건물들을 세웠다.


2.4. 대기독교 정책[편집]


내부 정화에 착수한 압둘 라흐만은 순교를 통한 기독교도들의 결집을 막기 위해 기독교 총회 (공의회)을 열어 순교를 금하도록 선포하게 하였다. 그럼에도 850년 4월, 코르도바의 수도사 페르펙투스가 이슬람을 모욕하다가 처형되며 '순교'하였다. 이듬해 4월에는 관료 출신의 이삭이 아미르 궁전 앞에서 기독교도로의 신앙 선언을 하고 처형되었다. 그해 6월에는 포로 출신의 근위병 산초가 신성모독죄로 처형되었고 불과 이틀 후에는 페테르, 왈라보누스, 사비니아노, 위스트레문두스, 하벤티우스, 제레미야로 구성된 5명의 기독교 성직자들이 공개적으로 무함마드를 모욕하다 처형되었다. 특히 강경했던 제레미야는 채찍질을 통해 죽음에 이르렀다. 7월에도 시세난두스, 성 조일루스의 바울, 테오도미르가 처형되었다. 11월엔 무슬림 부친을 둔 플로라와 마리아가 이슬람을 모욕한 후 처형되었다. 비슷한 형식으로 852년에도 10명이 더 처형되어 그 숫자는 24명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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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각각 바스크인 기독교도, 서고트계 무슬림이었지만, 모친이 같은 이부형제로 상호 협력하였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