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규(고려 거란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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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북면 도순검사
양규
楊規


캐릭터
지위
흥화진사 (1 ~ 4회)
서북면 도순검사 (4회 ~ )
가족
양규 처 (배우자)
양대춘 (아들)
등장회차
1 ~ 7회, 10회 ~
배우
지승현

1. 개요
2. 작중 행적
2.1. 1회
2.2. 2회
2.3. 3회
2.4. 4회
2.5. 5회
2.6. 6회
2.7. 7회
2.8. 8회 ~ 9회
2.9. 10회
2.10. 11회
2.11. 12회
2.12. 13회
2.13. 14회
2.14. 15회
2.15. 16회
2.16. 17회
2.17. 18회
2.18. 19회
2.19. 20회
3. 인간관계
4. 묘사
5. 총평
6. 어록



1. 개요[편집]



[ 공식 홈페이지 인물 소개 ]


-1 '''흥화진의 늑대.'''
'''3만의 고려인 포로를 구해낸 고려의 영웅!'''

거란군이 압록강을 건너 고려에 당도했을 때 가장 먼저 만나는 곳. 흥화진.
양규는 서북면 도순검사라는 막중한 책무를 가지고 흥화진으로 향한다.
그리고 40만의 거란군이 흥화진을 에워싸고 며칠 밤을 지새우며 전투를 벌인다.
그러나 성벽 아래로 거란군의 시체가 쌓여갈 뿐, 거란군은 이 작은 성을 함락시키지 못했다.

결국 거란의 대군은 흥화진을 포기하고 남쪽을 향해 진군했다.
늑대처럼 숨죽이고 때를 기다리던 양규는, 고려 정예병을 이끌고 다시 적진을 향해 달려간다.

"절대로 싸우지 말라는 명이 있기 전에는 결코 멈추지 않는다."

양규는 마침내 거란의 황제를 발견하고, 그를 향해 달려든다.





이 눈앞에 있는데 어찌 싸움을 멈추겠는가. 창칼이 모두 부러질 때까지 우리는 적과 싸울 것이다. 야만족의 포로로 끌려가는 고려의 백성들을 모두 구해낼 것이다.

KBS 대하드라마 〈고려 거란 전쟁〉의 주인공. 배우 지승현이 맡았다.[1]


2. 작중 행적[편집]



2.1. 1회[편집]


여요전쟁이 시작되는 역순행적 구성으로 전개가 시작된다. 작품이 시작하는 1009년 시점에서는 흥화진을 담당하는 흥화진사로 등장해 국경을 넘어 염탐하러 온 거란 정찰대를 추격한다. 활솜씨를 자랑하며 거란 병사 두 명을 포로로 잡았지만, 정작 자신의 군령을 어기고 국경을 넘어간 김숙흥이 포로로 잡히는 바람에 기껏 잡은 포로 둘을 교환하여 거란에 돌려준다. 이후 상황을 살피러 상관이자 서북면 도순검사 강조가 찾아오자 그를 맞이하며 흥화진의 안위를 다시 한 번 부탁받는다.


2.2. 2회[편집]


포로 교환의 책임을 지고 수감된 김숙흥강조의 명으로 흥화진보다 비교적 후방에 있는 귀주로 파견한다.[2] 김숙흥은 크게 반발하지만, 거란이 흥화진이 아닌 귀주를 공격로, 또는 퇴각로로 삼을 수도 있으니 거란 놈들 죽이는 게 소원일 뿐인 너 같은 미친 놈 하나는 귀주에 있어야 한다며 그의 반발을 꺾으면서 귀주로 보내는 데 성공한다. 태세 전환이 일품이다 그를 보내고 난 뒤 흥화진부사 정성이 거란이 진짜 귀주로 온다고 생각하냐고 묻자, 그러지 않길 바란다고 답한다.


2.3. 3회[편집]


정변을 결심한 강조흥화진으로 찾아와 독대한다. 강조가 결심을 밝히자, 명령 없이 군사를 움직이는 것과 신하가 황제를 세운다는 것 모두 반역이라는 점을 지적하며 각오를 묻는다.

이어 자신을 부른 진짜 이유를 밝혀달라고 한다. 강조는 자신이 정변을 위해 군사를 빼내면 생길 국방의 공백을 막아달라고 부탁하는데, 그건 전령으로도 말할 수 있는 것이니 자신을 찾아온 진짜 이유가 무엇인지, 혹시 자신도 가담하라고 요구하는 것인지 묻는다. 이에 강조는 양규까지 역적으로 만들고 싶진 않으며, 추후 반역자가 된 자신을 이전 같이 대해줄 수 있느냐고 묻는다. 쉽게 답하지 못하는 양규를 두고 떠나려는 강조에게 직접적인 답 대신, 자신은 장수로서 싸우라면 싸우고 지키라면 지키는 명만 받든다고 말한다.


2.4. 4회[편집]


정변으로 집권자 자리에 오른 강조의 뒤를 이어 서북면 도순검사가 되었으나 이를 받아들이는 대신 서경이 아닌 흥화진에 남겠다며[3] 김훈최질을 당황하게 한다. 김훈이 관례를 따르라고 하자 그럴거면 도순검사 임명을 무르라며 뻗대 결국 흥화진에 남는다. 이에 자기 후임으로 흥화진사가 된 정성이 당신이나 김숙흥이나 윗 사람 말 안 듣는 건 똑같다고 놀리자 멋쩍게 웃는다.[4]

이후 현종의 책봉을 받아내기 위해 거란을 오가는 고려 사신을 바라보며 전쟁을 염려하면서도, 어쩄든 새 황제가 국경에 관심을 가지는 것만으로도 중요한 일이라며 의미를 찾는다. 이후 선전포고를 전하러 온 거란 사신 한기 일행을 개경으로 인도한다.


2.5. 5회[편집]


한기거란 황제의 선전포고를 전하면서 자신을 역적으로 몰아세우는 것에 발끈하는 강조에게 "모든 것을 감내[5]하고 전쟁에서 승리할 것만 생각하라"라고 충고한다.

이후 가장 먼저 적과 마주하는 장수가 누구인지 황제도 아셔야 한다는 강조의 권고로 현종을 만나 격려를 받고, 강조가 이 전쟁을 현종과 함께 치르고 싶어했기 때문에 일부러 현종이 임명할 지휘부 자리를 비워 놓았다며 강조의 진심을 대신 전하고 그를 격려해달라고 청한다. 현종이 흥화진으로 떠나는 양규에게 잘 싸워달라고 부탁하자, 양규는 신하에게는 부탁이 아니라 명령하면 된다며 현종을 북돋는다. 이에 현종이 흥화진을 꼭 지켜내라고 명하자 무릎을 꿇고 반드시 지켜내겠다고 다짐한다.

흥화진으로 돌아와 청야 전술을 포함한 모든 준비를 갖춘 뒤[6] 흥화진에 항복을 권유하는 한기를 차갑게 돌려보내고, 결국 압록강을 넘은 거란군이 쏘아 보낸 불덩이를 바라본다.[7]


2.6. 6회[편집]


흥화진 공성에서 거란의 수십만 대군에 전력으로 맞선다. 예상치 못한 흥화진의 분전에 거란군은 숫적 우위를 바탕으로 쉴 틈 없이 파상공세를 펼치며 고려군의 피로를 가중시키지만, 양규는 손이 헐고 활줄이 터지는 등 인간의 한계를 초월한 상황에서 일주일 동안 흥화진을 지킨다.[8]

결국 눈에 띄는 전과가 없자 분노한 야율융서의 질책을 받은 거란군은 7일째[9][10] 북쪽 성문 외곽으로 고려인 포로들을 인간 방패삼아 전진한다.[11] 양규는 인간방패가 된 고려 사람들의 목숨과 성을 지켜야 하는 임무 사이에서 망설인다.[12] 그러나 결국 분노와 죄책감, 슬픔으로 눈물을 흘리며 사격 명령을 내리고, 함께 화살을 쏘면서도 어쩔 수 없이 같은 고려인들을 죽여야하는 현실에 절규한다.

마지막 장면을 자세히 보면, 양규가 발사 명령을 내린 후에 심리적으로 완전히 무너져내려 잠깐 활을 놓았다가 다시 마음을 다잡고 활을 쏘는 장면이 나온다. 40만 거란군에 맞서 7일 동안 잠도 안 자고 싸우는 초인적인 능력을 보여준 양규도 이 순간만큼은 정신적으로 완전히 무너졌다는 것을 잘 보여준다. 이 장면 직후 다음화 예고편과 함께 나왔던 BGM[13] 또한 이전 에피소드까지의 마무리곡과 다르게 굉장히 처절하고 구슬픈 분위기여서 여운을 남겼다.[14]


2.7. 7회[편집]


결국 흥화진 공성이 끝나고 거란군 주력이 남하하자 백성들이 양규의 이름을 부르며 기뻐하지만, 양규는 흥화진을 지키기 위해 고려 백성들을 쏜 일이 마음에 걸려 괴로워한다. 이후 정성에게 이 일을 반드시 갚겠노라고 분노를 삭인다. 인간방패가 되어 목숨을 잃은 아들을 보내주라고 백성을 위로하나, 미련을 버리지 못한 백성은 도리어 도순검사 아들이었으면 그리 못 했을 겁니다라며 원망한다. 이때 잠시 음악이 조용해지면서 가족을 잃은 주변의 다른 백성들까지 일제히 양규를 바라보는 것이 압권.[15]

성 밖으로 빠져나가 아군을 도우려다 공성만 끝났을 뿐 포위는 풀리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닫고, 어떻게든 흥화진의 생존을 후방에 알리기 위해 분투한다.[16] 결국 정성이 동문으로 나가 거란군을 유인한 뒤, 양규 본인이 직접 북문으로 나가 거란의 습격을 막고 봉화 한 곳을 탈환하여 흥화진이 건재하다는 소식을 알림으로써 통주와 개경에 희망을 전한다.

2.8. 8회 ~ 9회[편집]


두 회차의 대부분이 통주 전투 이후 전황과 강조의 최후, 고려 조정의 대책(8회), 서경을 둘러싼 고려와 거란의 신경전(9회) 등으로 집중했기 때문에 등장하지 않았다.


2.9. 10회[편집]


흥화진의 포위가 풀린 것을 눈치채고 은밀히 성 밖을 나와 정찰을 돌다가[17], 매복한 척 기다리고 있던 김숙흥과 만난다. 이후 김숙흥으로부터 삼수채에서 고려 본군이 패전한 것과 도통사 강조의 전사 소식[18], 그리고 함락된 세 개의 성 중 거란의 거점이 곽주 뿐이며, 주력이 모두 서경을 향해 남하했다는 것을 듣고는 곽주성을 탈환하여 거란군의 거점과 보급선을 끊어 전쟁을 끝내겠다는 의지를 표명한다. 흥화진사 정성이 무모한 작전이라며 굳이 갈거면 자신을 베고 가라면서 반대하자, 그럼 자기 혼자서 패잔병 긁어모아서라도 갈 테니 정성은 흥화진을 지키라고 명령한다. 이에 정성이 어쩔 수 없이 내어준 700명을 이끌고 통주성으로 이동한 뒤, 통주성에서 그나마 최대한 긁어모아서 1,000명을 더 확보한다.[19]

통주성을 지키던 최질과 김훈이 1,700명으로는 어렵다며 만류하지만 양규는 "언제 우리가 승산 있는 싸움만 했던가? 곽주를 탈환해야 전쟁을 끝낼 수 있다"며 곽주 탈환 의지를 다시 강력하게 천명한다. 그리고 귀주에 보냈던 김숙흥에게 자신에게 합류할 것을 명하면서 개경의 현종에게도 곽주를 탈환하겠다는 소식을 전했다.[20]

2.10. 11회[편집]



2.11. 12회[편집]



2.12. 13회[편집]



2.13. 14회[편집]



2.14. 15회[편집]



2.15. 16회[편집]



2.16. 17회[편집]



2.17. 18회[편집]



2.18. 19회[편집]



2.19. 20회[편집]





3. 인간관계[편집]


  • 강조: 서로 신뢰하는 상하관계이나 이현운처럼 무작정 강조에게 동조하지는 않는다. 다만 서로가 고려를 위한 충성심을 가졌다는 것은 믿고 있으며, 그렇기에 강조가 반역자가 되었어도 인연을 파하는 일은 없었고, 오히려 현종에게 출전하는 강조를 격려해 달라고 청하기까지 한다. 이후 김숙흥에게 강조가 패전하여 거란에게 잡혀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자 상당히 슬퍼했다.

  • 현종: 상황상 많은 교류를 할 겨를은 없었지만 현종을 직접 알현한 자리에서 자신에게 명령을 내리라고 하는 등, 충신의 모습을 보여준다. 현종 역시 그런 양규의 모습을 보고 신뢰하며 그의 가족을 만나 위로해준다.

  • 강감찬: 메이킹 영상과 배우의 인터뷰를 보아 따로 만나 대화하는 장면이 있는 것으로 보이나 10회 기준 나오지 않았다.

  • 김숙흥: 통제하기 까다로운 성질 과격한 부하. 그러나 한편으론 그에게 귀주를 맡길 만큼 믿는 구석은 있고, 이후 도순검사가 되고서도 흥화진에 남겠다고 고집을 부리는 자신을 정성이 '김숙흥과 닮았다'고 놀리자 인정하기도 한다. 이후 거란의 2차 침공에서 함께 활약하게 될 것으로 보인다.

  • 정성: 직속 부하. 거란이 한창 흥화진에 공세를 퍼부을 때 정성이 양규에게 지휘관을 잃는 것은 위험하니 성벽에 오르지 말고 성 안쪽에 머물러달라 요청하나 양규는 유능한 흥화진사가 있는데 걱정할 게 뭐가 있냐며 가볍게 넘긴다. 생사의 문턱에서 어깨를 맞대고 싸우는 전우로써 서로에 대한 신뢰를 보여주는 장면이다.

  • 아내[21]와 아들 양대춘: 현종이 개경의 사찰에 불공을 드리러[22] 행차하였다가 양규의 처, 양규의 아들 양대춘, 강조의 처를 만난다. 이곳에서 현종은 세 사람을 통해 전쟁터로 가족을 떠나보낸 백성들의 마음과 각오를 전해 듣는다.


4. 묘사[편집]


제2차 여요전쟁 에피소드의 주인공이며 드라마 전체로 따져도 현종-양규-강감찬 세 주연 중 한 사람이다. 실제로 원작 소설 고려거란전쟁: 고려의 영웅들 1부에서는 양규가 단독 주인공이었다. 조선에 이순신이 있다면 고려엔 양규가 있었다고 소개하며, 드라마에선 통주나 서경같이 규모론 훨씬 거대한 전투의 묘사를 줄여서라도 양규의 서사에 집중하고 있어서 이후 흥행에도 중요한 입지를 가지고 있다.[23]

실제 역사에서 추정되는 바와 같이 강조와 가까운 관계로 그려지나 비굴하게 아첨하지 않고 강직한 태도를 견지하면서 고언을 건네고 있다.[24] 5화 시점까지 비판받을 바가 전혀 없는 무결한 인간성을 보여준다. 전쟁을 앞두고 선전을 부탁하는 현종에게 자신은 신하이니 그저 명령을 내리시라 당부하며 고개를 숙이는 장면은 그야말로 백미. 본격적 전쟁에 돌입함에 따라 그의 영웅적 활약이 어떻게 묘사될지 기대가 모아지고 있는데, 흥화진 전투 후부터 전쟁의 묘사가 약해지는 만큼 양규의 활약에 힘이 실릴 것이란 추측이 많다. 실제 행적이 영웅적인 만큼 나오기만 하면 명장면을 찍고 있긴 하다(...)

작중에서는 주로 활을 자주 사용하는 모습을 보이는데, 아마 양규 사후 현종이 내린 조서에서 "6균의 활[25][26]을 당겼다"는 표현에서 따온 것으로 보인다. 활시위를 거는 모습, 전통에 화살을 넣는 모습[27], 깍지를 끼거나[28] 명적[29]이나 불화살 등을 자유자재로 사용하는 모습이 굉장히 인상적이고 독특한 양규만의 아이덴티티를 부여하는 면이 있다. 기존 사극에서도 명궁 캐릭터는 자주 나왔지만, 이렇게 활을 능숙하게 사용하는 장면은 잘 안 나왔던 것도 사실이라 신선한 부분. 또한 장기전에 시달리며 활시위가 헤져 끊어지고 시위에 쓸려서 깍지엔 금이 가고 손가락은 피칠갑이 되도록 부르트는 등, 처절한 전투로 마모되어 가는 묘사까지 일품이다.

오프닝 영상에서 강감찬이 들어올린 '피 묻은 활'이 바로 양규가 썼던 활, 즉 그의 유품이라는 분석이 있는데, 주연급의 지승현 배우가 등장하지 않은 점이나 6회에서 손가락에 피를 흘리며 활을 쏘는 묘사로 보아 꽤 신빙성 있는 추측이다.

5. 총평[편집]




6. 어록[편집]


(웃음) 네 놈은 정말 미쳤구나.

귀주로 가 있거라. 귀주에도 같은 미친 놈이 하나쯤 있어야 하니...

저는 국경을 지키는 장수입니다. 싸우라는 명이 내려오면 싸우고, 지키라는 명이 내려오면 지킬 뿐입니다.

어쨌든 새 황제께선 우리와 함께 국경을 바라보고 계시네. 난 그게 중요한 거라 생각하네.

그래도 반역인 건 틀림 없는 사실입니다. 모든 걸 감수하십시오. 어차피 찬사를 갈구하며 벌이신 일은 아니잖습니까? 중대사, 약해지지 마십시오. 전쟁이 목전에 다다랐습니다. 이젠 이길 방법만 생각하십시오. 다른 것들은 승리한 다음에 생각하시면 됩니다.

폐하. 소장은 폐하의 신하이옵니다. 부탁하실 게 아니라 명하시면 되옵니다. 명을 내려주시옵소서!



거란 놈들의 시체가 쌓여서 우리의 성벽보다 높아지기 전에는, 단 한 놈도 이 흥화진의 성벽 위로 오르지 못할 것이다. 알겠는가?!

일점사!!!

어차피 성벽이 한 군데라도 뚫리면 우린 모두 다 죽네. 어디에 있든 무슨 상관이겠나?[30]

쏴라... 쏴라!![31]

갚아줄 것이네... 천 배 만 배로 돌려줄 것이네...!

떠도는 패잔병들을 모아서라도 곽주를 꼭 탈환하겠네. 그동안 흥화진을 부탁하네.

곽주를 탈환하겠다는 생각을 하는 건 우리밖에 없을 걸세.

곽주를 꼭 탈환해야 하네. 그래야 이 전쟁을 끝낼 수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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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여담으로 지승현은 실제로 학군사관으로 임관했던 예비역 장교 출신이다.[2] 이에 반발하면서 뛰쳐 오르는 김숙흥을 향해 활시위를 건 다음 겨누는 장면이 일품.[3] 여담으로 양규 역의 지승현 역시 장교로 군복무를 했는데, 복무지가 흥화진과 비슷한 기능을 하는 GOP였다. 배우와 배역이 역할이 비슷한 신기한 케이스.[4] 실제로 역사에서 거란이 강조의 명으로 회유하려 했을때 "나는 조의 명을 받지 않는다" 라고 답한 일화를 참고해 강조에게 상관으로써의 친분은 있지만 나라를 배반할만큼은 아니라는 것을 강조하려고 한 것으로 보인다.[5] 본인이 나라를 위해서 벌인 반역이고 정변을 벌이기 이전에 각오를 했다고 한 만큼 자신의 선택에 대해 책임지라는 뜻. 네가 선택한 반역이다 악으로 깡으로 버텨라[6] 이 때 거란군을 피해 산으로 가려는 일부 백성들을 독려하여 흥화진 안으로 피신을 권유한다. 이후 실제로 거란이 잡은 포로들을 어떻게 대우했는지를 생각하면 양규의 말이 옳았던 상황.[7] 이때 흥화진 성 내에는 소등을 실시해 어두웠던 상황이었으며, 더불어 처음으로 클로징 전 장면으로 등장했다.[8] 중간에 손이 잠깐 불에 붙을 때에도 금방 털어버리는 모습이 나오는데, 이 장면만큼은 CG가 아니라 진짜로 작은 불을 손에 붙인 채 연기하였다.[9] 어찌나 격렬하게 싸웠는지 성벽 앞에는 거란군들의 시체가 산처럼 쌓여 있고, 성벽은 피로 칠해져 있다. 양규 본인도 지휘를 하느라 제대로 잠을 자지 못해 성벽 위에서 경계 도중 선 채로 잠에 들어버리는 등 피로에 절어져 있었다.[10] 성벽에서 잠깐 잠들었을 때 꼭 화살이 몸에 꽂힌 것처럼 보이게 연출했는데 양규의 실제 죽음을 떠올리면 복선이라는 의견이 많다.[11] 몇몇 시청자들은 신파억지로 감정을 자극하는 연출이라고 비판했으나, 실제 역사에서 거란, 여진, 몽골 등 다수의 유목 민족 침공군들이 공성전에서 방어군의 전의를 꺾기 위해서 주로 써먹은 단골전법으로 굉장히 많은 관련 기록들이 남아있다. 심지어, 몽골군의 경우는 포로를 산 채로 삶아서 뽑아낸 기름으로 화공을 벌인 기록까지 있을 정도였다. 실제 역사에서는 거란군이 대놓고 고려 백성들을 고려군이 보는 앞에서 학살하면서 고려군의 전의를 꺾으려고 했는데, 이 부분은 다큐멘터리 평화전쟁 1019에 나온다. 드라마의 장면은 이 부분을 가져온 것이다. 그나마 인간방패가 '심리전을 위한 학살'을 '심리전을 병행한 군사작전'으로 완화시킨 묘사란 점에서 전쟁의 참상을 제대로 느낄 수 있다.[12] 수성을 묘사한 에피소드에서 거란군의 화살에 아내를 잃고도 목숨을 마다하고 병력의 보급을 도와줬던 어느 백성이 있었는데, 흥화진이 무너질 수 있다고 생각해 따로 떠나보낸 자식들이 거란군에게 인간방패 포로로 붙잡혀 있는 것을 발견하자 제발 쏘지 말아달라고 애원하다가 성 밖으로 뛰쳐나가려고 해 군사들에게 제지당한다.[13] 3회 목종이 시해되는 장면에서 나왔던 배경음과 동일한 배경음이다.[14] 이 장면을 두고 이후 양규가 왜 그렇게 목숨을 바쳐가면서까지 포로를 구하는 것에 집착했는지 보여주는 복선이라 보는 평이 많다.[15] 엄밀히 말하면 흥화진 성내로 대피하라는 양규의 명령을 무시하고 본인의 선택으로 자식들을 성밖에 놔뒀으며, 그 결과로 자식들이 거란군에 잡혔고 그 중 아들이 화살받이로 내몰린 것이니 양규를 탓하는 건 어불성설이긴 하다. 물론 자식과 아내를 모두 잃은 아버지에게 그런 이성적인 판단력이 남아있을 리가 만무하다만은.[16] 통주성 앞 삼수채에 주둔하고 있던 30만의 고려군은 주로 농민들이 징집되어서 온 광군들로 이루어져서 사기를 올리기 위해 봉화를 올린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흥화진이 무너졌다는 허위 소식으로 인해 개경에 있던 주요 대신들조차 거란군이 무서워서 가족들을 피난 보내려 했다가 현종에게 한 소리를 들었다.[17] 거란군에게 눈치채지 않게 머리에는 두건을 쏘고 말의 발마다 검은 천을 둘렀다.[18] 표정에서 상당한 충격을 받은 게 드러난다.[19] 출정 할 때 병사와 헤어지는 가족이 오열하고 몸을 가누지 못하는 등 비장함이 아니라 슬픔과 비극이 배가 된다. 그동안의 사극이 보여주기식 전투에 집중 했던 것과 달리 전쟁이 얼마나 비극이고 죽음이 얼마나 슬픈지 제대로 보여줬다.[20] 사서에는 운석이 떨어졌다고 하는데 이게 운석이 직접 성을 때려서 무너뜨리고 그 틈을 양규가 파고든건지, 아니면 이 운석이 성 인근에 떨어지자 혼란에 빠진 곽주성을 양규가 기습했는지 알길이 없지만 아무래도 운석이 곽주성 함락에 영향을 끼쳤을지 모른다는 추측이 있다. 특히나 양규가 이끄는 결사대와 곽주를 수비하는 거란군 병력이 배는 차이 나기에 극적인 수가 없다면 사실상 함락은 불가능하기 때문.[21] 고려사절요에 '은율군군(殷栗郡君) 홍씨'로 알려진 인물이다.[22] 고려 본대의 출정 이후 불안한 마음을 추스르려 강감찬의 충언을 받고 한 행동이다.[23] 하지만 단독 주인공이었던 원작 소설의 2차 여요전쟁 파트와 달리 드라마에서는 현종과 강감찬의 서사도 주로 다루게 되면서 소설에 비해 비중은 줄어들었다.[24] 아무래도 역사서에서도 관직 목록이나 시점을 보면 강조와는 가까웠을 것으로 추측되는 부분이 있지만, 흥화진에서 항복을 권유받을 때 "강조의 명은 받지 않는다" 라는 점을 생각해 이렇게 묘사했을 가능성이 높다.[25] 1균(鈞)은 30근을 의미하는데, 현대 우리가 흔히 쓰는 1근=약 600g 기준이 아니라, 당시에는 1근이 약 250g 이하였다. 즉 약 40kg, 파운드로 약 89파운드 쯤 되는 장력의 활을 썼을 것이다. 국궁은 그 특성상 합성궁 중에서도 드로우 렝스가 길고 활몸의 탄성을 화살의 운동에너지로 변환하는 효율이 높았다. 따라서 파운드 수는 타국의 동급 활보다 다소 낮은 경향이 있었던 것을 감안하면, 89파운드의 장력은 활을 전투 기술로 수련하던 당대 기준으로도 약한 활은 아니었을 것이다. 체격과 과학적 훈련, 의료 혜택 면에선 훨씬 더 유리한 현대의 국궁 궁사들은 잘 쏘는 사람들도 70파운드를 거의 넘기지 못한다. 시판 되는 최대 수준의 합성궁이 66~68파운드 장력 수준. 국내에서는, 동호인 수준을 넘어 국궁을 직업 삼는 궁사들 중 간혹 몽골 활을 보유한 경우가 있는데 이것들은 (시판되는 물건들보다) 근중량이 훨씬 높긴 하다.[26]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는 고려시대 근이 당,송제국처럼 630그램 정도 되었을 것이라고 추정하는데 이를 토대로 계산해 보면 113.4kg, 252파운드란 결과가 나오는데 비현실적인 수치로 보이지만 유튜브에서 실전궁술 재현하는 유튜버들 영상을 보면 150파운드를 넘어 190파운드의 터키궁을 쏘는 사람이 있으며 210파운드도 당기는 이도 있으니 252파운드도 사람이 할 수 있는 영역에 속해 보인다. 오스만 투르크 제국의 정예병이었던 예니체리 중 200파운드 정도 되는 활을 쓴 사람도 있다는 기록도 있는 걸 보면 말이다. 물론 고려시대 근중량을 정확히 모른다는 한계에서 오는 계산착오, 기록의 오류도 무시할 수는 없겠지만...[27] 2화에서 귀주로 부임하라 명을 받은 김숙흥이 양규를 죽여서라도 흥화진에 남겠다고 행패부리며 양규가 서 있는 성루로 뛰어올라오는데, 그 몇 초밖에 안 되는 짧은 시간에 다리 사이로 활몸을 끼워 구부려 활시위를 간단하게 걸고 코앞까지 달려온 김숙흥에게 화살을 겨누는 간지폭풍의 모습을 보여준다. 마치 헐리우드 영화에서 빠르게 소총을 재장전하는 베테랑 특수부대 캐릭터를 연상시키며, 김숙흥도 이 모습에 반했는지 귀주로 떠날 때와 금숙흥과 재회할 때 활을 겨누는 모습을 보였다.[28] 한국 사극에서 거의 선보인 적이 없는 손가락 보호대 깍지도 거의 양규의 상징 아이템처럼 나온다. 실제로 전통 국궁은 길이가 짧은 대신 잘못 당기면 손가락이 잘릴 정도로 시위가 굉장히 강력하기 때문에 손가락 보호대는 필수다.[29] 휘파람이 달려 울리는 신호용 화살. 어떠한 현상의 맨 처음을 일컫는 효시라는 단어 역시 이 신호용 화살을 가리키는 말이다. 최종병기 활에서도 나온 적이 있다.[30] 군영에 머물러 지휘관으로써 몸을 보호하라는 정성의 말을 듣고 하는 말이다.[31] 6회 말미에 거란군이 인간방패로 내세운 고려 백성들을 보고 눈물을 흘리며 지시를 내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