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주십일

덤프버전 :

1. 개요
2. 배경
3. 내용
4. 후대의 재발견
5. 위작 논란
6. 병자호란과 연관된 언급
7. 기타


1. 개요[편집]


揚州十日. 양주십일기(揚州十日記)라고도 한다.

명청교체기인 1645년 청군에 의해 명나라의 제2~3의 대도시인 양주성에서 10일에 걸쳐 일어났던 대학살극을 담은 양주성 생존자 왕수초(王秀楚)의 일기이다.

2. 배경[편집]


명나라 멸망 후 만력제의 손자 홍광제가 남경으로 옮겨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산해관을 넘어 오삼계군을 편입시킨 청군은 별다른 교전 없이 승승장구하며 남하하고 있었는데 유일하게 양주성만이 사가법의 지휘 아래 결사항전했다. 성이 함락된 후 다른 성들에 본보기를 보일 필요성이 있어진 장군들의 묵인과 악에 받친 병사들에 의해 조직적 학살이 일어났다.

3. 내용[편집]


열흘에 걸쳐 학살된 사람은 무려 80만 명에 육박한다. 당시 황도 북경성에 이은 제2~제3의 대도시였던 양주성의 인구를 약 80~100만 정도로 추측하고 있는데, 대략 도시 인구의 80% 이상이 깡그리 몰살당한 처참한 대학살극이었다. 근대에 일본군에 의해 일어난 난징 대학살도 15~30만의 희생자로 추론되는 판국인데 전근대에 일어난 학살이 후대에 일어난 학살의 규모를 3배 이상 초월하고 있다.

양주십일기는 이 학살의 현장을 그림을 그리듯 자세히 묘사하고 있다. 청군이 대로를 휩쓸고 다니면서 아이를 가진 여자들을 납치하는 과정에 대로변 흙탕물에 버려진 수백구의 갓난아이들의 시체들, 성 안과 밖에 성높이와 비슷한 수준으로 쌓인 산처럼 많은 시체들과 시체들에서 흘러나와 세개의 하천줄기를 형성해 온 도시를 휘감은 핏물…저자의 가족들 역시 참화에서 벗어날 수 없어서, 학살 도중 큰 형·작은 형과 형수·조카를 잃어버렸고, 저자와 아내·자식까지 3명만 살아남았다고 전해진다.[1]



4. 후대의 재발견[편집]


그러나 청조 말 일본에 유학간 중국인 유학생들이 일본에 출판되어 있던 이 책을 결국 발견하게 되었고, 당시 유학생들은 굉장한 충격을 받았으며, 청조에 대한 분노에 치를 떨게 되었다. 그리고 해당 서적을 공수해와 청나라 식자층들에게 뿌렸고, 이는 한족들이 만주족에 대한 반감을 넘어 살의를 품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신해혁명 당시 만주족이 한족 혁명군에게 대거 학살당하고[2] 살아남은 만주족들도 청나라의 멸망으로 나라 없는 민족이 되어버린 후 한족들에게 인종 탄압을 당해 오늘날 만주족이 단순한 나라 없는 민족을 넘어 아예 한족에 동화되어 사라질 위기에 처해버린 향후 역사는 결국 양주성에서 뿌린 업보가 수백 년에 걸쳐 고스란히 자신들에게 돌아온 것이라고 후대 사람들은 말한다. 한국 민족주의자의 입장에서는 병자호란의 업보로, 몽골 민족주의자의 입장에서는 청나라의 몽골 병합의 업보로 여겨지기도 한다.

1924년 핍궁사건이 일어났을 때 청나라 소조정의 노신들이 대청은 입관 후 도량 있는 정치로 백성들에게 미안한 일을 하지 않았다고 항변했으나 펑위샹의 부하 녹종린은 "당신이 말하는 것은 청실의 입장이오. 그러나 대청이 입관한 후의 양주십일과 가정삼도는 백성들이 영원히 잊을 수 없을 것이오." 라고 청실의 항의를 일축하기도 했다. 여담으로 녹종린과 선통제 모두 중국 공산화 이후 대륙에 남아서 마오쩌둥으로부터 구시대의 화해 증거라고 같이 인증샷을 찍기도 했다.

5. 위작 논란[편집]


양주에서 학살이 자행된 것은 청실록에 수록되어 있는 아이신기오로 도도가 내린 도륙령과 마찬가지로 도도가 자신의 전과를 자랑하는 상소문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 사실이다. 문제는 도도의 도륙령으로 80만이 죽었다고 주장하는 왕수초의 일기가 정말 당대인이 그 사건을 겪고 썼다고 믿기에는 의심쩍은 점이 있다는 것이다. 우선 양주 토박이라는 왕수초가 썼다고 보기에는 구체적으로 고증이 가능한 지명이 3곳에 불과하며, 신여록 등 명말청초를 다루는 다른 책들과 비교했을 때 전세과정이 불투명하고, 당시 만주족들이 한족을 남만 오랑캐라고 지칭한 것과 달리 이 책에선 중국이라고 지칭하는 등 명나라 당대의 언어로 쓰여지지 않았다. 무엇보다 앞서 말한 것처럼 버젓이 학살을 지시했다는 기사가 있는 청실록을 포함해 조정이 양주십일기를 금서로 지정했다는 사료가 없다.

문자의 옥을 거치며 대의각미록 등 수많은 금서들이 회수되었지만 아무리 억지로 틀어막는대도 대륙 어딘가에서 이름 없는 농부와 상인들의 집구석이나 무덤에 처박힌 채 한두 권은 살아남아 발굴되거나 구전으로 변용을 많이 거쳐서나마 전해지게 마련인데(대표적으로 설공찬전) 양주십일기는 그 한두 권조차 없었다. 문화대혁명으로 전근대 중국의 서적들이 대거 소실되는 와중에도 홍위병이 미처 발견하지 못한 것들은 이후에 발견되어 박물관에 전시되는 경우를 생각하면 양주십일기의 실존은 더더욱 의심스러워진다.

그래서 일부에서는 멸만흥한의 분위기가 고조되고 있었던 청말민초 시기에 한족 유학생들이 이 책을 이상하게도 사건이 일어난 양주가 아닌 일본에서 '재발견'했다는 사실에 주목하여 만주족에 대한 반감을 극대화하기 위해 위조한 책이라고 주장한다.

중국역사가 장더팡은 양주십일기에 나오는 사망자수의 의문을 제시하면서 당시 양주 근처 인구여러 마을의 보고에 의하면 양주지역 전체인구는 79000가구 , 즉 50만명 정도라고 지적했다. 그리고 그중에서 청나라군이 공격해오자 양주성으로 몰려들었는 최대 인원은 20만~30만명이라고 지적했다.

장더팡이 그렇게 지적한 이유로는 여러 이유가 있다.

  • 첫번째로 관련 기록에 따르면 많은 주민들이 양주성으로 피난갈 시간이 부족했다는 점이며

  • 두번째로는 주민들이 적군을 피해 대량으로 성안으로 몰려들려면 도시에 높은 성벽과 깊은 해자가 있으며 주변에 언덕이 많아서 방어하기 매우 유용한 지역이여야 하며 또한 성안에 적에 저항하기 위해 대규모 군대가 성안에 주둔해있어야 하는 두가지 조건을 고려해야 하는데 일단 양주성은 주변이 평원으로 둘러싸인 평지성으로 방어에 유리한 지형이 딱히 아니며 양주성안에 있는 주둔군도 불과 만명에 불과했기 때문에 이러한 상황에서 수많은 주민들이 양주성안으로 몰려들었다는 점은 믿기 힘들며

  • 세번째로는 청나라군이 양주성에 도착하기 하루전 양주성 주민들이 관문을 끓고 탈출했다는 기록을 통해서 오히려 청나라군이 양주성을 공격하기 전에 양주성에 주민수가 늘어난게 아니라 오히려 성을 탈출하는 자들이 늘어났으며

  • 네번째 이유로는 양주십일기에도 청나라군이 성을 학살하고 7일뒤에 구호품을 내보내자 구호품을 앞다투어 받아가는 자로 눈 깜짝할 사이에 구호품이 전부 다 없어졌다고 묘사되어 있는데 이는 실제로는 학살뒤에도 살아있는 양주성 주민들이 많았다는 묘사로 이는 양주십일기서 말하는 청나라군이 거의 모든 양주성 주민들을 전부 다 학살했다는 내용들과 반대되는 묘사라는 점이다. 즉 청나라군이 양주성 주민들을 거의다 학살했다는 양주십일기의 주장은 양주십일기 내에서도 모순이 되는 주장이라는 것.

  • 마지막 다섯번째로는 보통 시신 한명을 태우려면 약 100kg의 나무가 필요한데 80만개의 시신을 전부다 태울려면 무려 8만톤의 나무가 필요한데 당시 기술로는 그정도로 많은 대량의 나무들을 청나라군이 양주성안으로 옮길수 없다는 점이다.

호주의 동아시아사 박사인 안토니오 핀네인 역시 양주십일기에 기록된 80만명의 수치는 상당히 과장된 수치로 명청교체기 당시 사상자 수치는 대게 신뢰할수 없는 상당히 과장되었다고 지적하며 이는 학살의 공포에 대한 진술로 실제보다 상당수 부풀러진 것이라고 말했다.

따라서 양주대학살당시 양주성내의 주민들은 최대 20만에 30만명 사이로 추정되며 최대 당시 양주성 주민 전체 인구의 80%인 16만명에서 24만명 사이에 주민들이 죽었을 것으로 추정된다는 것이다.

양주십일 위작을 주장하는 중국인의 글#

6. 병자호란과 연관된 언급[편집]


학살에 가담한 청나라 병사들 중에서 병자호란에 참전한 것으로 보이는 자들이 있어, 한국사와도 연결점이 있다고 할 수 있다. (사실, 청나라 군대의 지휘관이었던 아이신기오로 도도도 병자호란에 종군한 인물이었으니 병사들 가운데서도 그런 자들이 있다고 해서 딱히 놀라울 건 없다.)

세 병사는 우리들을 어느 저택으로 몰아넣었는데 그 안에는 미모의 여자 몇 명과 다른 만주 병사 몇 명이 있었다. 그들은 끌려온 우리를 보고 크게 웃었다. 부녀자들과 남자를 분리해 각각 다른 방에 몰아넣었다. 우리에게서 빼앗은 재물을 보고 미모의 여인들이 아양을 떨면서 달라고 조르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칼을 빼앗아 그들을 베어버리지 못하는 것이 못내 한스러운 지경이었다. 병사가 이 모습을 보면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고려를 정복할 때[3]

고려 부녀자 수만 명을 포로로 잡았는데 몸을 내맡기는 자가 한 명도 없었다. 어찌하여 중국이 수치심을 모르는 게 이 지경에 이르렀느냐? 이게 바로 너희들이 이런 난리를 겪는 이유다."[4]

이러한 시대사적 디테일이 있는지라, 만일 양주십일이 위작이라면 지금은 실전된 어떤 원전이 있었을 것으로 추측하기도 한다.


7. 기타[편집]


이밖에도 가정삼도(嘉定三屠)라고 하여 절강성 지역의 도시인 가정을 청나라 군대가 무려 3번에 걸쳐 잔혹하게 학살한 사건이 있었다. 이 가정삼도를 벌인 자는 이성동(李成棟)인데 이름을 보면 알겠지만 한족으로 청나라에 항복한 명나라 장군이었다. 원래 이자성의 부하였던 이성동은 명나라에 항복했다가 남명 정권에서 배척을 받자 청나라로 항복하였고 그 이후 가정삼도를 벌였다. 헌데 그렇게까지 청나라에 충성을 다했으나 별로 대우가 좋지 않자 다시 남명으로 항복하였고 감주(贑州)등지를 공격하다가 물에 빠져 죽었고, 이후 남명 조정에서 충렬(忠烈)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파일: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__CC.png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2023-12-08 18:30:45에 나무위키 양주십일 문서에서 가져왔습니다.

[1] 일설에 의하면 이때 너무 많은 주민들이 죽어서 그들의 시체에서 흘러나온 피가 마치 호수와 같았고, 그 위에 성의 현판이 둥둥 떠다녔다고 한다. 이러한 묘사는 중국의 소설가인 얼웨허가 발표한 소설 <강희대제> 5권의 끝부분에서도 언급되면서 "어떻게 짐승 같은 만주족과 함께 할 수 있느냐?"라는 문구로 표현된다.[2] 오늘날 중국의 만주족 대다수가 중국 북부 지역에 거주하는 이유들 중 하나는 단순히 만주족의 고향인 만주와 중국의 수도인 베이징이 북쪽에 있어서 그런 게 아니라, 신해혁명 당시 중국 남부 지역에 거주하던 만주족이 신해혁명으로 대거 학살당하고 그나마 살아남은 경우에도 혁명군의 영향력이 중국 남부 지역에 비해 상대적으로 약했던 중국 북부 지역으로 대거 도망치거나 아예 남방 한족에 동화되어 정체성까지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중국 남부 지역의 만주족은 혁명군에게 대거 학살당하여 대가 끊어진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그만큼 현대 만주족의 조상군에서 이탈할 수밖에 없었다.[3] 고려라고 썼지만 당연히 조선을 의미한다.[4] 아이러니하게도 위의 후대의 재발견 문단에 나온 것처럼 만주족 스스로가 중국 병합과 병자호란의 업보를 치르게 되었다.